•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포항 바다교회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신학자료 스크랩 한 글자로 신학하기(9) - 색의 신학 - 구미정 박사
감람나무 추천 0 조회 90 07.09.24 09:3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색(色)의 신학 / 구미정_대구대학교 겸임교수


색 속에 길이 있다

요즘 시장의 화두는 색이다. 웰빙 열풍을 타고 칼라 푸드(color food)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토마토(빨강), 녹차(초록), 호박(노랑), 와인(보라), 흑미(검정) 등 대표적인 칼라 푸드에는 암을 예방하고 노화를 방지하는 데 효능이 탁월한 물질이 들어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색은 디자인보다도 기능 쪽에 더욱 가까운 요소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제 ‘잘’ 먹는다는 말은 인위적인 표백과정을 거친 흰색 위주의 식단에서 벗어나 글자 그대로 오색(五色) 찬란한 식단으로 옮겨간다는 뜻이다. 흰 쌀, 흰 소금, 흰 설탕, 흰 조미료, 흰 밀가루, 흰 프림 등 6백(白) 식품을 멀리하는 것만으로도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고 하니, 밥상의 혁명은 색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본래 진정한 혁명은 원시반본(原始返本), 곧 제 뿌리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던가? 우리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가 차린 밥상은 그 자체가 칼라 푸드의 향연이었다. 비빔밥만 해도 그렇다. 콩나물과 당근, 시금치와 고사리, 거기에 철따라 도라지와 표고버섯 등을 빙 둘러 장식하고, 얇게 저며 살짝 볶은 고기를 더한 다음, 중앙에 노른자가 터지지 않게 기술적으로 부친 계란을 얹고, 빨간 고추장 한 숟갈에 참기름 살짝 쳐서 슥슥 비비면, 한 그릇의 밥 안에 온 우주가 녹아든다. 한국의 음식은 이렇듯 음양오행설에 기초한 오방색(五方色)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오방색 혹은 오방정색(五方正色)이란 방위상으로 동서남북 사방에다가 가운데를 더한 오방을 가리키는 색으로, 청(靑)ㆍ백(白)ㆍ적(赤)ㆍ흑(黑)ㆍ황(黃) 다섯 가지 색을 말한다. 이들 각각의 색은 동양의 전통적인 우주론인 음양오행설에 근거한 것인데, 이에 따르면 태초에 음과 양의 기운이 생겨나 하늘과 땅이 되고, 다시 음양의 두 기운이 우주만물을 형성하는 원기인 목(木)ㆍ화(火)ㆍ토(土)ㆍ금(金)ㆍ수(水)의 오행(五行)을 낳았다는 것이다. 음양오행의 원리는 전통적으로 우리네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어린아이가 입는 색동저고리, 밥상 위에 가지런히 덮인 조각보, 간장 항아리에 담긴 붉은 고추, 출산한 집에 매달린 금줄, 잔치 국수 위에 얹어진 고명, 궁궐이나 사찰의 단청, 고구려 고분벽화 등 삶과 죽음의 매 단계 혹은 제 영역에서 우리는 음양오행의 원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과 같은 붉은 과일은 동쪽, 배 같은 흰 과일은 서쪽에 놓고(홍동백서), 생선은 동쪽, 고기는 서쪽에 차리는(어동육서) 제사상은 어떤가? 이어령은 이러한 제사상의 차림 방식이야말로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기호이자 산 자와 죽은 자의 벽을 넘나드는 영혼의 문법’이라고 아름답게 표현한다. 제수로 쓰이는 나물도 허투루 볼 일이 아니다. 도라지 같은 흰 뿌리 나물은 조상을 상징하고, 고사리 같은 검은 줄기 나물은 현세의 산 사람을 뜻하며, 미나리 같은 푸른 이파리 나물은 앞으로 태어날 후손을 가리킨다. 제사상 하나에도 공간적으로는 온 우주를 담고, 시간적으로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담아내는 우리 조상들의 속 깊은 뜻에 새삼 탄복하게 된다.
오방색이 하늘과 남성을 상징하는 양의 색이라면, 이 오방색을 섞어서 나온 중간색은 땅과 여성을 상징하는 음의 색이 된다. 오간색(五間色) 또는 오방잡색(五方雜色)에는 녹(綠, 청+황)ㆍ벽(碧, 청+백)ㆍ홍(紅, 적+백)ㆍ자(紫, 흑+적)ㆍ유황(硫黃, 흑+황)이 있다. 우리 조상들은 일찍이 다양한 잎과 꽃, 열매와 나무껍질 등을 이용한 천연염색의 원리에 통달하여 자유자재로 원색과 간색을 뽑아내서 일상생활에 활용하였다. 삼국시대부터 발달한 염직공예는 고려시대에 전성기를 이루어 특히 자색염 기술은 멀리 중국에서도 알아줄 정도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심지어 청염장이나 홍염장 같은 색상별 전문 장인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색을 아는 민족은 풍요로운 문화를 일굴 뿐만 아니라, 미래의 길도 열어간다. 색채 마케팅이니 색채 치유니 하는 것이 오늘날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생활사에서 낯선 주제이기는커녕 언제나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주요 문화 코드였다. 그런 연유로 신학도 색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색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신비를 성찰하는 일은 매우 의미 있고도 멋있는 신학적 작업이 될 것이다.

붉은 악마, 그 뜨거운 생명력

2002년 월드컵의 최대 충격은 안정환의 골든골도, 홍명보의 4강볼도, 히딩크의 용병술도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대한민국을 온통 붉게 수놓은 ‘붉은 악마’의 출현, 그것이 가장 큰 충격이었다. 애어른 할 것 없이 똑같이 맞추어 입은 빨간색 티셔츠 위에 선명하게 새겨진 구호는 얼마나 도발적이던가? ‘Be the Reds!’, 과격하게 옮기면 ‘빨갱이가 되라!’는 뜻이다. 붉은 악마의 존재는 정치적으로는 분단 세대의 빨갱이 콤플렉스를, 종교적으로는 근본주의 신앙의 천사/악마 이분법을 발랄하게 조롱하면서 신나는 집단 치유의 능력을 발휘했다.
붉은색은 피를 상징한다. 원초적인 생명의 색이다. 기독교의 중심 상징이 예수의 십자가이고, 십자가 하면 보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으니, 색으로 치자면 기독교는 명백히 ‘적색종교’라 할 것이다. 붉은 색은 양기(陽氣)를 띤다. 아기 예수의 탄생일을 12월 25일로 잡은 것도 로마의 민간 습속에서 그 날이 동지(冬至)가 지나고 태양이 소생하는 날이어서 그렇다. 게다가 성탄 전야에는 산타클로스가 붉은색 옷을 입고 불(火)을 지피는 굴뚝을 통해 집으로 들어온다고 하니, 그야말로 양기 충천이 아닐 수 없다.
붉은색은 따뜻하고 자극적이어서 혈액순환을 돕고 신체 전반에 원기를 북돋아 준다. 신체 장기로는 혈액을 순환시키는 기관인 심장이 붉은색에 상응한다. 그래서 우울하거나 슬프거나 무기력에 빠져서 가슴이 답답할 때, 혹은 실연의 아픔으로 가슴 깊이 상처를 입었을 때, 남성은 붉은 기운이 감도는 넥타이를 매고 여성은 빨간 립스틱을 바르라고 한다. 붉은색의 원초적인 생동감이 삶의 활기를 되살려주기 때문이다. 한편, 붉은색은 오행(五行)에서 화(火)에 해당하기 때문에, 성질이 급하고 화를 잘 내고 난폭한 사람에게는 금기로 되어 있다. 민간신앙에서는 붉은색에 액운을 물리치는 신비한 힘이 들어있다고 믿어, 혼례 때 신부는 붉은색 연지곤지를 발랐고, 아기의 백일상이나 돌상에는 반드시 수수팥떡을 차렸으며, 여자아이의 땋은 머리끝에는 빨간 댕기를 매어주기도 했다.
러시아에서는 이 색이 ‘아름다운, 멋진, 좋은, 가치 있는’ 등의 의미로 쓰인다. 추운 지방일수록 따뜻한 것을 갈망하는 심리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정 동쪽에 있는 노천 광장의 이름이 ‘붉은 광장’인 것도 사실은 ‘아름다운 광장’이라는 뜻에서 유래한다. 붉은 악마로 인해 광화문 네거리나 시청 앞 광장이 붉은 광장으로 변한 순간, 그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혁명이 되지 않았던가? 붉은 악마는 독재정권 시절이었다면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을 일, 곧 붉은색 위에 덧칠해진 이데올로기를 말끔히 씻어내는 작업을 통해, 우리 민족에게 붉은색의 상승 기운을 되돌려 주었다. 그 바람에 우리가 월드컵 4강의 신화를 이루어냈던 것이 아닐까?

핑크 칼라의 시대

붉은색에 흰색을 섞으면 분홍색이 된다. 흰색은 빛의 색이다. 빛의 삼원색인 빨강ㆍ파랑ㆍ초록을 합치면 흰색이 된다. 무지개 색 역시 하나로 합치면 영낙없이 흰색이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맨 처음 하는 생명활동이 바로 호흡이고 보면, 색채의학에서 폐와 연관된 색을 흰색이라고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폐는 슬픔과 연관된 장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독한 슬픔에 잠겨 있을 때, 폐가 상한다. 그래서 슬픔의 색은 흰색이다. ‘헤어지자 보내온 그녀의 편지 속에’ 들어있는 것은 ‘곱게 접어 함께 붙인 하얀 손수건’이어야 어울리지, 화려한 원색이면 어색하다. 상복으로도 흰색을 쓰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흰색은 순수한 빛의 색이기 때문에, 다시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를 동시에 내포한다. 가령, 민간요법에서 기침감기에 걸린 사람에게 파뿌리나 무즙, 혹은 백도라지를 먹으라고 하는 것도 흰색이 폐 기능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흰색은 다시 살아갈 힘을 주는 부활의 색이자 창조의 색인 것이다. 그래서 건강과 관련된 색, 이를테면 의사나 간호사의 가운은 흰색을 기본으로 한다. 예수의 부활을 상징하는 색이 흰색인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예수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날마다 부활하는 영원한 생명이며, 빛이다.(요 1:4-9 참고)
남성적인 붉은색에 빛의 색인 흰색이 더해지면 분홍색, 곧 여성성을 상징하는 색이 된다. (우락부락한 남성도 빛의 존재로 거듭나면 여성처럼 온유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하려다가, 좀 오버한다 싶어 참는다. 모든 남성이 공격적인 것도 아니고, 모든 여성이 온유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상징적 또는 은유적으로 하는 말을 곧장 경험이나 현실에 적용하다가는 섣부른 일반화의 오류에 빠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생아 관련 물건이 남아용품은 죄다 하늘색, 여아용품은 분홍색으로 획일화되어 있는 것도 일종의 성차별이라는 지적이 있곤 하지만, 분홍색은 어쩔 수 없이 여성의 색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머니의 자궁과 젖꼭지 색에 일치하는 색으로, 모든 인간이 태어난 원초적 고향, 곧 그 부드럽고 다정다감한 태초의 근원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교도소 내 폭력으로 골치를 앓던 캘리포니아 교도소에서 한 가지 실험이 이루어졌다. 규율을 어기거나 지나치게 공격적인 죄수를 분홍빛이 감도는 방에 수감하는 것이다. 그랬더니 광분하던 죄수가 금새 진정이 되면서 순해졌다. 이에 교도소는 당시 회색이었던 감방 내 모든 벽을 분홍색으로 바꾸었고, 이와 동시에 폭력사고도 눈에 띄게 줄었다는 이야기이다.
분홍색은 흔히 사랑의 색이라고 말해진다. 오죽하면 ‘핑크빛 사랑’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일까? 사랑에 빠진 남녀의 볼이 핑크빛으로 물드는 것을 보라. 핑크색 솜사탕을 나누어먹으며 나이 불문하고 유치하게 노는 것을 보라. 합리와 객관을 초월해서 막무가내로 서로에게 홀리고 빠져드는 이 엄청난 에너지를 당해낼 재간이 있겠는가?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대를 향해 좀체로 화를 내지 않는다. 화가 나는데도 참는 것이 아니라, 아예 화가 나지 않는 것이다. 어머니의 자궁처럼, 있는 그대로 상대를 수용하고 품어줄 뿐인데, 화를 낼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서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나 보기가 역겨워’ 간다는 연인에게 말없이 진달래꽃을 뿌려주는 애절한 사랑에 대해 노래한다. 잡고 싶지만 잡을 수 없고, 보내야 하지만 보낼 수 없는 모순된 사랑의 미학이 분홍색 진달래꽃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만약에 운동선수의 유니폼을 전부 분홍색으로 바꾼다면, 세상의 모든 군대에서 분홍색 군복이 지급된다면, 판사의 법복과 승려의 제복과 목사의 가운이 분홍색으로 통일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황당하지만 즐거운 상상이 아닐 수 없다. 분홍색은 근육을 이완시켜 긴장이 풀어지게 한다. 분홍색 운동복을 입은 운동선수는 경쟁의지가 사라져 시합할 엄두조차 나지 않을 것이다. 군인은 전투의지를 잃어버린 채 ‘무기여, 잘 있거라’를 외치며 연인의 품으로 돌아간다. 법과 도덕과 종교의 수호자들은 지배의지가 사라져 더 이상 근엄하고 딱딱한 표정을 짓지 않는다. 모두가 핑크빛 어린아이의 속살로 돌아가 부드러운 심성으로 사랑을 노래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천국이 아닐까?
바야흐로 핑크 칼라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한다. 사무직 노동자를 대변하는 화이트 칼라와 생산직 노동자를 대변하는 블루 칼라 일색이던 노동 시장에 여성이 대거 진입함으로써 노동의 판도가 바뀌고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경제부문에서 여성 지도력은 특유의 부드러움과 유연함을 앞세워 감성 경영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해가고 있다. 정치영역에서도 여성의원의 비율이 선진국과 후진국을 가르는 잣대로 제시되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도 전근대적인 가치관과 탈근대적인 시대적 요구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여, 여성의 사회진출에 많은 장애가 있는 것이 우리네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생물학자 최재천의 예언대로, ‘여성의 세기’는 당위성의 차원을 넘어 필연성의 수준에서 반드시 도래할 것이기에, 준비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학도 핑크 칼라의 도전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핑크빛 신학은 하나님의 자궁의 신학, 곧 모성애로 가득 차서 무한한 사랑과 자비로 세계를 품어주시는 하나님에 관한 고백을 담을 것이다. 세상이 썩고 무법천지가 되었다고, 땅 위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의 삶이 속속들이 썩었다고(창 6:11-12), 물로 세상을 싹 쓸어버리는 강한 하나님이 아니라, 자식이란 게 본래 그렇지, 하면서 아예 겨룰 생각을 포기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용서하며 기다리는 약한 하나님을 증언할 것이다. 전쟁무기인 활/무지개를 하늘로 던져버리고, 맨 몸으로, 그것도 여리디 여린 무력한 갓난아기의 몸으로 우리를 향해 돌진하시는 하나님의 핑크빛 사랑을 노래할 것이다. (우리 성경에는 하나님이 노아와 맺은 새 언약에서 ‘무지개’를 하늘에 걸어 두어 언약의 징표로 삼았다고 나와 있지만, 다른 나라 성경에서는 ‘활’로 번역된 경우도 많다고 한다. 히브리어 ‘케쉐드’(qeshet)에 이 두 가지 뜻이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린피스, 녹색은총에로의 초대

세계적인 환경운동 단체 중에 ‘그린피스’(Greenpeace)가 있다. 고래 보호 활동 등으로 유명한 이 단체는 본래 1971년 12명의 환경운동가들이 핵실험에 반대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린피스 소속 활동가들은 고래를 포획하려는 사람들 앞에서 고래를 껴안고 시위를 벌였다. 고래를 죽이려면 차라리 나부터 죽이라는 식이었다. 마치 인도 산림지대의 가난한 여성들이 나무를 벌목하려는 기술자들 앞에서 나무를 껴안으며 우리 몸을 자르라고 절규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 칩코(Chipko, 나무 껴안기) 여성들과 똑같이, 그린피스 사람들에게도 자연은 더 이상 인간과 동떨어진 남이거나 인간에 의해 마음대로 착취당해도 되는 노예가 아니었다. 자연이 곧 인간이고, 인간이 곧 자연이었다.
그린피스도 그렇고, 독일 녹색당도 그렇고, 우리나라의 녹색연합이나 녹색대학도 그렇고, 만약에 그 이름에서 ‘녹색’이 빠졌다면 어땠을까? 녹색은 자연의 색이다. 자연을 벗삼아 사는 사람은 콘크리트 회색 건물에 갇혀 사는 도시인보다 욕심도 적고 화도 덜 날 수밖에 없다. 자연의 초록 기운이 가슴을 탁 틔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안의학의 하나인 색채치유에서는 욕심이 많고 화를 잘 내며 가슴이 늘 답답하거나 자신을 인생의 낙오자라 여기고 스스로 우울해 하는 사람들에게 손바닥의 가슴 상응 부위에 초록색을 둥글게 칠하도록 권한다. 그러면 사사로운 욕심이 줄어들고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심과 배려심이 늘어나서 둥글고 원만한 인격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것이다. 인도의 아유르베다 의학에서 말하는 인체의 일곱 개 에너지 센터(차크라) 가운데 제4 차크라인 가슴에 해당하는 색이 초록인 것은 바로 그런 연유이다. 가슴 차크라는 신체의 중심에 위치에 있으면서 위로는 영혼을 다루는 차크라와 아래로는 몸을 다루는 차크라를 중재하는 중추로, 우리 삶에서 용서와 사랑을 일깨워 신과 통하는 문을 열게 해준다.
한편 신체 장기 중에서는 초록색에 상응하는 기관이 바로 쓸개이다. 쓸개는 간 밑에 붙어있는 작은 기관으로, 간에서 생산ㆍ분비되는 담즙을 저장하고 농축시켜 십이지장에 뿌림으로써 소화를 돕는다. 이곳에서 담즙 배설이 잘 안 되면 황달 증상이 일어난다. 또 담즙이 뭉쳐 단단해지면 담석증에 걸리기도 한다. 무서운 일을 당하면 ‘간담이 서늘해진다’거나, 기회주의자를 가리켜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한다’고 말하는 데서 보듯이, 쓸개는 간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간 기능을 조절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한다.
한의학에서 쓸개, 곧 담(膽)은 대담한 용기를 내는 장기로 알려져 있다. 담이 크다거나 담력이 세다는 말은 용기가 있다는 뜻이다. 그런가 하면 ‘쓸개가 빠졌다’는 표현은 줏대도 없고 비겁한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황제내경』에 따르면, 담은 정사(正邪)를 구별하여 올바른 것을 취하고 그릇된 것을 버리도록 결단을 내리게 하는 기관이다. 말하자면 이 조그만 기관이 우리 몸에서 사법부 기능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쓸개에 상응하는 색이 초록색이기 때문에, 가급적 산과 들에서 초록색을 많이 보거나 신선한 푸른 잎 채소를 많이 섭취하면 쓸개가 튼튼해진다고 한다. 초록색은 조화와 균형을 상징하는 색이다. 무지개 색 중에서 빨강과 보라의 중간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중용의 지혜로 우리를 이끌어준다. 빨간색에 치우친 사람이 쉽게 흥분하고 폭력적이기 쉽다면, 보라색에 치우친 사람들은 병적으로 예민하거나 유약한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양과 음의 균형을 적절히 잡아주는 것이 바로 초록색이다. 그러므로 ‘쓸개 빠진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숲의 나무와 들의 풀을 자주 만나고 사귀면서 조화와 균형의 미덕을 배울 일이다.
그렇다면 초록색 명상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인 측면에서 어떤 깨달음을 줄 것인가? 생태신학자 이정배는 그것에 녹색은총이라는 이름표를 붙인다. 녹색은총이란 인간 삶의 근거이자 토대인 자연 속에서 자연을 통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예수 역시 공중의 새와 들판의 꽃에서 하나님을 느끼고 체험하라고 가르치셨다. 자연은 이처럼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영적 안내자로서, 그 자체가 성화(icon)인 것이다.
이정배는 지금까지 기독교가 적색은총, 곧 십자가의 은총만을 강조하고 그것에 강한 집착을 보여 왔으나, 실상 녹색은총에 대한 고백 없이 십자가의 구원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현실적이지도 못하고 공허해지기 십상이라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예수는 인간만의 구세주가 아니라 온 우주만물의 구세주로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는 우주적 그리스도이시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안에 모든 충만함을 머무르게 하시기를 기뻐하시고, 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자기와 기꺼이 화해시켰습니다. (골 1:16-20)

십자가의 피는 만물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적색은총은 녹색은총과 뗄레야 뗄 수 없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 양의 색인 붉은색이 음의 색인 초록색과 보색(補色)관계를 이루듯이 말이다. 적색은총을 입은 사람이라면 모든 피조물의 신음소리를, 마치 해산하는 여인처럼 숨이 끊어질 듯 괴로워하는 만물의 탄식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그야말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듣고 보살피는 보살(보리살타(bodhisattva)의 준말로, 깨달은 자라는 뜻)이 된다.
보살이 깨달은 지혜는 무엇보다도 불이지(不二智)이다. 나와 너, 보살과 중생, 성과 속, 차안과 피안, 열반과 생사가 둘이 아님을 아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적색은총은 우리를 우주가족의 일원으로 불러, 만물의 구원을 위해 투신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나와 하나님이 둘이 아니고 하나임을 깨닫게 한다. 그러한 경지에 이를 때 우리는 비로소 “지구 마을 저편에서 그대가 울면 내가 웁니다.”고 노래한 시인의 마음을 갖게 된다. 화엄경에 나오는 인다라의 구슬처럼, 각자가 거대한 우주 그물에 이어진 하나의 그물코임을 깨닫게 된다. 신앙의 녹색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빛이 있으라! 색이 있으라!

지구는 우주에서 유일하게 색을 가진 별이다. 소위 에메랄드빛 초록 지구라고 불린다. 지구상의 모든 물질은 색을 입고 있다. 물질은 빛을 통해 색을 얻고, 색은 다시 빛으로 돌아간다. 물질의 삼원색(빨강ㆍ파랑ㆍ노랑)을 섞으면 빛의 삼원색이 되는 원리가 바로 그것이다. 인간만 해도 빛의 양에 따라 피부색이 결정된 존재이니, 빛과 색의 연관성은 여기서도 뚜렷하다.
햇빛이 강한 적도지방의 사람들은 그 빛을 전부 투과시키면 세포들이 견딜 수 없기 때문에 검은색 피부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검은색은 빛을 흡수하는 성질이 있어서, 검은색 피부가 일종의 보호막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백인들은 북반구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일조량이 적어서 조금이라도 햇빛을 더 받기 위해 흰 피부를 갖게 되었다. 볕 좋은 날이면 일광욕을 즐기느라 수선을 피우는 그들의 심리가 십분 이해가 된다. 사실 흑인이나 황인에게는 백인에 대한 선망이 내면화되어 있다. 여자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바비인형만 보더라도 전형적인 백인의 몸을 하고 있어서, 어려서부터 백인의 외모를 미의 기준으로 삼게끔 세뇌당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음양오행사상에서 중심은 황색이다. 황색은 중앙, 곧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균형과 조화를 상징한다. 너무 까맣게 타지도 않고, 너무 하얗게 설익지도 않은 적당히 노릇노릇한 피부가 건강한 것이다. 땅(土)의 색인 황색은 빛에 가까운 색이자 깨달음의 색으로, 인류가 지배와 복종이라는 서구식 패러다임 대신에 공존과 상생이라는 동양의 지혜를 가지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 나가도록 인도해준다.
인간이 빛의 강약에 따라 자기 몸을 조절하며 사는 빛의 존재이자 색의 존재이듯, 인간이 먹는 과일이며 채소도 다 그렇다. 토마토는 빛 에너지 중에서 붉은색을 먹고 자란 열매이고, 가지는 보라색 파장을 흡수한 열매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색과 빛을 먹는다는 뜻이다. 인간은 자기 몸의 장기가 필요로 하는 빛 에너지, 곧 신체 각 부위와 공명하는 색 에너지를 먹으면서 살아간다. 동학사상에서는 이를 ‘한울님/하나님을 먹는다.’는 말로써 표현했다.
자기 색이 분명한 사람을 만나면 오랫동안 그 잔상이 잊혀지지 않는다. 색은 생명활동이 왕성하게 펼쳐지고 있다는 증거이며, 존재의 고유한 정체다. 죽은 듯이 앙상하던 빈 가지에 작은 봉오리가 맺히고 마침내 울긋불긋한 총천연색으로 치장한 꽃들이 피어나면, 우리는 비로소 아, 저 나무가 매화나무였구나, 사과나무였구나, 하고 나무의 이름을 알게 된다. 색이 없으면, 존재도 아리송하다. 색이 바랬다는 것은 그만큼 존재가 희미해졌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죽음이란 생명의 고유한 속성이던 본연의 색을 탈취하는 것이 아닐까? 마치 우주의 블랙홀이 모든 물체를 빨아들여 무(無)로 돌려버리듯이, 그렇게 죽음은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의 색을 검은색으로 획일화한다. 그래서 우리는 죽는 것을 ‘북망산’ 간다고 표현하는지도 모르겠다. 오방색에서 북쪽에 해당하는 색이 바로 검은색이기에.
성서 기자는 구약의 드라마틱한 인물 요셉의 이야기를 끌고 나가면서 요셉이 형들에게 미움 받는 대목에다가 슬쩍 ‘채색 옷’이라는 모티브를 끼워 넣는다. 정말 놀라운 상상력이요, 섬세한 미적 감각이 아닐 수 없다.

이스라엘은 늘그막에 요셉을 얻었으므로, 다른 아들들보다 요셉을 더 사랑하여서, 그에게 화려한 옷을 지어서 입혔다. 형들은 아버지가 그를 자기들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서 요셉을 미워하며, 그에게 말 한 마디도 다정스럽게 하는 법이 없었다. …… 요셉이 형들에게로 오자, 그들은 그의 옷 곧 그가 입은 화려한 옷을 벗기고, 그를 들어서 구덩이에 던졌다. (창 37:3-4, 23-24, 새번역)

요셉이 입은 화려한 옷은 아버지의 사랑의 표현이었다. 아버지는 자기가 사랑하는 자식에게 화려한 색을 덧입혀 주는 것으로 그 사랑을 표현했다. 이에 시샘한 형들은 아우에게서 그만의 독특한 색을 표현하던 옷을 벗긴다. 그리고는 그를 들어서 마치 장사지내듯 검은 구덩이 속에 던져 넣는다. 심리적ㆍ사회적 죽임을 이렇게 은유적으로 표현하다니, 성서 기자의 말재간이 그저 부러울 뿐이다.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문득 유교식 여성 구분법인 덕녀(德女)와 색녀(色女)가 떠오른다. 유교적 엄숙주의 윤리는 색을 오로지 성적인 측면에서만 왜곡되게 해석하여 ‘색을 밝히는 여자’를 부정한 여자로 낙인찍는다. 유교가 예찬하는 덕녀란 성적 욕구가 아예 없는 듯이 행동하는 무색무취한 여자, 목석(木石)과도 같은 여자인 것이다. 이러한 유교적 여성관은 검은색 부르카 속으로 여성을 밀어 넣는 이슬람 문화권과 똑같이 억압적이다. 존재로부터 색을 제거하려는 모든 시도는 죽임의 세력에 동조하는 행위로서, 하나님의 생명활동에 위배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일본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만든 애니메이션영화 중에 <원령공주>(1997)가 있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숲을 파괴하려는 인간과 숲을 지키려는 신 사이의 싸움을 그린 영화다. 거기서 인상 깊은 장면이, 숲의 신 시시가미(사슴신)의 몸에서 생명을 빨아들이는 힘이 솟아나와 숲을 죽이는 장면이다. 감독은 이 가공할 죽음을 색의 제거로 표현했다. 나무와 꽃과 풀과 동물이 하나씩 제 빛깔을 잃을 때마다 숲은 거대한 검은색으로 뒤덮여간다. 다시금 감독은 시시가미가 스스로 죽어가면서 자신의 생명력으로 숲을 살려내는 대목에서 역시 만물에 색을 되돌려주는 것으로 부활을 표현했다. 생명을 회복할 때마다 빛을 뿌리며 제 색을 도로 찾는 만물들……. 존재는 곧 색이요 빛인 것을 이토록 명확하게 깨닫게 해주는 작품이 어디 또 있을까? 어쩌면 감독은 초록별 지구를, 그 지구에 몸담고 있는 형형색색의 만물을 있는 그대로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색즉시공 공즉시색

존재하는 만물이 빛에서 나왔고, 그 안에 빛이 있으며, 마침내 빛으로 돌아간다는 지극히 기독교적인 언술이 불교로 가면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여기서 색이란 현상계 자체, 그 안에 존재하는 만물 자체를 가리킨다. 반면에 공은 그것 너머의 무궁한 세계, 곧 만물의 진여(眞如)를 일컫는 개념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생사 세계와 열반이 서로 대립되거나 별개가 아니라 하나라고 보기 때문에,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논리가 성립된다. 모든 중생이 이미 부처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속을 들여다보면 부처님의 그림자, 혹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곤 하나도 없다고 절망할 때가 많다. 빛의 존재로 살아야 마땅한데, 얼굴에서 빛이 뿜어 나오기는커녕, 욕심과 두려움과 염려에 묶여 잔뜩 그늘 진 모양새로 살 때가 많다. 삶에서도 신앙에서도 자기만의 독특한 색을 발휘하며 살다가는 요셉처럼 두드려 맞을까봐 일부러 색을 감출 때도 많으니, 이럴 때 꼭 맞는 표현이 ‘쓸개 빠진’이라는 형용사가 아니던가?
우리 모두가 빛의 존재임을 자각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에게서 빛을 빼앗아가는 요인들이 무엇인지부터 점검해야 한다. 그런 연후에 각각의 요인에 해당하는 색을 먹고 입고 보다 보면, 어느새 그 문제로부터 벗어나 건강해진 자기를 발견할 수 있다.
가족관계에 문제가 있다면 빨간색에서 힘을 얻을 일이다. 인간관계가 힘이 들면 주황색과 친해져야 한다. 내면에서 울리는 자기 목소리를 들으려면 노란색을 묵상하자. 다른 존재를 향한 이타적 사랑에 눈뜨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초록색을 바라보자.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시옵소서.’ 기도하신 예수처럼 신의 주파수에 나를 맞추려면 파랑색에서 힘을 얻어야 한다. 내 안에 충만한 빛으로 임재해 계신 하나님과 일치한 상태로 살아가려면 보라색을 먹고 입고 명상하자.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명상은 우리를 빛의 존재로 이끌어줄 것이다. 하나님이 무지개를 선물해주신 뜻은 우리를 빛으로, 색으로 부르시기 위함이 아닐까?

[기독교사상] 2006. 9월호.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