氏族의 연원 |
시조는 김석(金錫). 신라 56대 경순왕의 넷째 아들이며 고려태조 왕건(王建)의 외손으로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졌다. 그런데 시조 김석(金錫)이 경순왕인 김부(金傅)의 볓째 아들이냐에 관해 다른 주장이 있어 왔다. 이를테면 ‘청계공파세적(靑溪公派世蹟)’ 문경사류방(文景泗流芳)과 ‘문학공파보(文學公派譜)’ ‘사직공파보(司直公派譜)’ 등 많은 문헌에는 넷째 아들로, 그밖의 다른 문헌에는 다섯째 아들로 되어있다. 그러나 ‘을축보(乙丑譜)’ 신라김씨선원계(新羅金氏璿源系)에는 넷째 아들로 되어 있어 이 설(說)을 따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의성(義城)을 관향(貫鄕)으로 정한 것은 시조 김석(金錫)이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짐으로써 자손들이 본관(本貫)을 의성(義城)으로 삼았다고 ‘을축보(乙丑譜)’ 세록(世錄)에 씌어 있다. |
본관지 연혁 |
의성(義城)은 본래 소문국(召文國)인데, 신라 경덕왕이 문소군(聞韶郡)으로 개칭하였다. 고쳐 초 의성(義城)으로 고쳐 부(府)로 만들었고 현종 때 안동부(安東府)에 소속시켰으며 인종 때 현령(縣令)을, 신종 때 감무(監務)를 두었다. 충렬왕 때 대구부(大丘府)에 병합되었다가 다시 부현(復縣)되었는데 조선조에서도 그대로 따란다. 1895년 군(郡)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주요 성씨로는 김(金) ㆍ 송(宋) ㆍ 오(吳) ㆍ 정(丁) ㆍ 홍(洪)씨 등이 있었다. |
주요 세거지 |
‘을축보(乙丑譜)’에 의하면, 9세 김용비(金龍庇), 이래로 관향(貫鄕)인 경북 의성(義城)을 세장지지(世葬之地)로 삼아왔으므로 일찍이 의성(義城)에 터를 잡아 세거했다고 믿어진다. 김용비(金龍庇)의 맏아들 김의(金宜)의 자손들인 복야공파(僕射公派)는 13세 김거두(金居斗) ㆍ 김거익(金居翼)의 대에 안동(安東) ㆍ 부여(扶餘) ㆍ 영일(迎日)의 청하(淸河) ㆍ 청원(淸原)의 문의(文義)등지로 가 자리잡았고, 다시 15세 김보(金普) ㆍ 김원(金源)의 대부터 3대(代)에 걸쳐 군위(軍威) ㆍ 수원(水原) ㆍ 고창(高敞)의 흥덕(興德)ㆍ 청양(靑陽)의 정산(定山) ㆍ 김해(金海) ㆍ 보령(保寧)의 남포(藍浦) ㆍ 영천(永川)의 두협(斗峽) 등지로 산거(散居)해갔다. 그 가운데 13세 김득수(金得水)가 북청(北靑)의 사동(蛇洞)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뒤에 그대로 머물러 살았으므로 그의 후계(後系)가 북청(北靑)에 세거했고, 16세 김부현(金傅顯)의 부인 경주최씨(慶州崔氏)가 세아들과 함께 고부(古阜)의 도계리(道溪里)로 옮겨간 뒤 고안(古阜)를 비롯한 정읍(井邑)에도 일부 자손들이 뿌리를 내렸던 것 같다. 또한 16세 김의동(金義同)이 장사(長沙)로 유배되어 그 자손들이 고창(高敞)일대에 터를 굳혔던 것으로 보인다. 김의(金宜)의 아우 김굉(金紘)의 자손들인 부원군파(府院君派)는 김굉(김紘)의 증손 김하(金河) ㆍ 김한(金漢) ㆍ 김호(金浩)의 대에 장성(長城) ㆍ 강진(康津) ㆍ 해남(海南) ㆍ 광주(光州)등지에 자리잡았고, 일부는 14세 김계환(金繼環) 이래로 황해도 신천(信川)의 문화(文化) 등지에, 17세 김국진(金國進) 이래로 충주(忠州) ㆍ 해주(海州) 등지로 가 살게 되았다고 믿어진다. 김용비(金龍庇)의 셋째 아들이며 김굉(金紘)의 아우 김영(金英)의 자손들인 찬성공파(贊成公派)는 일부가 13세 김용초(金用超)의 대부터 성주(星州)에 정착 ㆍ 세거했고, 일부는 고령(高靈)으로 가 살았다. 또한 16세 김한경(金漢卿)의 대부터 3대에 걸처 청송(靑松) ㆍ 괴산(槐山) ㆍ 협천(陜川) ㆍ 경주(慶州) ㆍ 전주(全州)등지에도 자손들이 살게 되었다. 전서공파(典書公派)는 전북 정읍(井邑)을 거쳐 안성(安城)등 경기도 일원에 세거의 터를 굳혔던 것 같다. 한편 9세 김용필(金龍弼)의 아들 김윤관(金允寬)의 자손들인 어사공파(御史公派)는 평남 평양(平壤)을 거쳐 16세 김경(金經)의 대 이래로 용강(龍岡)에서 살았고 9세 김용주(金龍珠)의 자손들은 개성(開城)에서 살다가 15세 김남보(金南寶)이래로 충북 옥천(沃川)에 자리잡았다. 그리고 9세 김성단(金成丹)의 자손들은 선대(先代)부터 세거해온 의성(義城)에 많이 살았으며, 9세 김흥(金興)의 자손들인 선략장군공파(宣略將軍公派)는 능주(綾州)를 거쳐 합천(陜川)에 가 살았다. 1930년 당시 의성김씨(義城金氏)는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ㆍ 장단군(長湍郡) 일원. 충북 옥천군(沃川郡) 이원면(伊院面), 괴산군(槐山郡), 음성군 음성읍(陰城郡 陰城邑), 충남 서산군 원북면(瑞山郡 遠北面) 일원, 전북 정읍군 덕천면(井邑郡 德川面) ㆍ 이평면(梨坪面)일원, 경북 군위군(軍威郡), 의성군 단촌면(義城郡 丹村面) ㆍ 사곡면(舍谷面)등지, 안동군임하면(安東郡臨河面) ㆍ 일직면(一直面) ㆍ 서후면(西後面), 청송군 현서면(靑松郡 縣西面) ㆍ 진보면(眞寶面), 영천군 북안면(永川郡 北安面)일원, 영풍군 장수면(榮豊郡 長壽面), 봉화군 봉화면(奉化郡 奉化面), 예천군 예천읍(醴泉郡 醴泉邑), 성주군(星州郡)일원, 경남 진양군(晋陽郡), 합천군(陜川郡), 평남 용강군 오신면(龍岡郡 吾新面) ㆍ 용강면(龍岡面), 평북 태천군 서면(泰川郡 西面), 함남 이원군(利原郡)등지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특히 경북 성주군 수륜면 수륜동(星州郡 修倫面 修倫洞)은 1980년 당시 의성김씨(義城金氏) 1백 30여 가구가 모여 살고 있던 곳이다. 입향조(入鄕祖)는 고려말 호남병사(湖南兵使)였던 김용초(金用超)로, 조선 개국 후 조정이 어지럽자 금육군 금항면 유촌(金陸郡 金項面 柳村)에 낙향했고, 그후 그의 후손들이 경북 일대에 흩어져 살았다. 수륜동(修倫洞)에 터를 잡은 인물은 김용초(金用超)의 5대손인 서우당 김관석(西友堂 金關石)이다. 마을 중앙에 김용초(金用超)를 추모하는 재실 원모재(遠慕齋)가 있다. 인근 대가면 칠봉동(大家面 七峰洞) 출신인 독립투사 김창숙(金昌淑)은 그의 후손으로 아들 김환기(金煥基) ㆍ 김찬기(金燦基)등 3부자(父子)가 구국의 제단에 몸을 바쳤다. |
씨족史 | |||
의성김씨(亄城金氏)는 신라 경순왕의 아들로 의성군(亄城君)에 봉해진 김석(金錫)을 시조로 하는 성씨다. 김석(金錫) 이후로 의성(義城)을 본관으로 하였다 한다. ‘의성김씨족보(亄城金氏族譜)’ 에는 김석(金錫)이 경순왕의 넷째 아들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신라김씨천년사(新羅金氏千年史)’를 비롯한 경순왕 후손에 대한 기록에는 경주김씨(慶州金氏)의 분관조(分貫祖)가 되는 오종(嗚鍾)이 셋째아들, 은설(殷說)이 넷째아들로 되어 있으므로 김석(金錫)이 다섯째 아들이 된다. 이러한 족보(族譜)의 기록은 당대의 것이 아니고 금석문(金石文)에서 확인되지도 않으므로 어느 것이 바른지 단정하기 어렵다. 의성김씨(義城金氏)의 인물로 고려 ㆍ 조선조에 걸쳐 군(君)에 책봉된 이는 시조 의성군 김씨((義城君 金氏))를 비록, 김홍술(金弘術) ㆍ 김용비(金龍庇) ㆍ 김용필(金龍弼) ㆍ 김굉(金紘) ㆍ 김영열(金英烈) ㆍ 김광부(金光富) 등 7명이고 시호를 받은 사람은 충의 김용주(忠毅 金龍珠) ㆍ 양소 김영열(良昭 金英烈) ㆍ 문원 김원(文元 金源) ㆍ 문민 김남보(文敏 金南寶) ㆍ 문절 김용초(文節 金用超) ㆍ 문경 김안국(文敬 金安國) ㆍ 문목 김정국(文穆 金正國) ㆍ 충강 김제민(忠剛 金齊閔) ㆍ 문충 김성일(文忠 金誠一) ㆍ 문정 김우옹(文貞 金宇顒) ㆍ 문절 김응택(文節 金應澤) ㆍ 정민 김지수(貞敏 金地粹) ㆍ 문민 김덕선(文敏 金德善) 등 13명이다. 그 후대에서 역사에 이름 있는 인물은 석학 ㆍ 문장가였던 김안국(金安國) 을 비록하여 김정국(金正國) ㆍ 김성일(金誠一) ㆍ 김우옹(金宇顒) ㆍ 김제민(金齊閔)이 있고, 구한말 망국 이후는 김도화(金道和) ㆍ 김하락(金河洛) 등 의병장과 김동삼(金東三) ㆍ 김창숙(金昌淑) 같은 지사(志士)들을 낳았다. 의성김씨(義城金氏)에서는 조선조에 96명의 문과 급제자를 내었는데, 이는 경주김씨(慶州金氏) ㆍ 광산김씨(光山金氏) ㆍ 연안김씨(延安金氏) ㆍ 김해김씨(金海金氏) ㆍ 청풍김씨(淸風金氏) 다음으로 많은 수다. 의성 김씨(義城金氏)의 분파는 9세조를 분파조(分派祖)로 하여 5개파로 나누어진다. 김용비(金龍庇)의 후손이 첨사공파(詹事公派), 김용필(金龍弼)의 후손이 수사공공파(守司空公派), 김용주(金龍珠)의 후손이 충의공파(忠毅公派), 김성단(金成丹)의 후손이 찬성공파(贊成公派), 김흥(金興)의 후손이 선략장군공파(宣略將軍公派)로 나누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의성현 인물조(義城縣 人物條)에 실린 고려초의 인물로 김홍술(金洪術)이 있다. 그는 신라말 진보성 장군(眞寶城 將軍)으로 있다가 고려 태조에 귀의하고 승격된 의성부(義城府)의 성주(城主)가 된 인물이다. 그런데 김석(金錫)의 후손으로 이어지는 의성김씨(義城金氏)와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 알 수 없다. 그 외에 원종조에 과거에 올라 충선왕 때 찬성사(贊成事)에 오른 김훤(金咺)과 그의 아들 김개물(金開物)이 있으나 ‘임술보(壬戌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태자첨사(太子詹事)를 지낸 김용비(金龍庇)의 증손 김태권(金台權)은 좌사윤(左司尹)을 지냈다. 그의 아들 김거두(金居斗)는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고 ‘삼국사기(三國史記)’ 중간본(重刊本)의 발문(跋文)을 쓸 만큼 문장이 뛰어났다. 김거익(金居翼)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으며 조선개국 후 우의정을 제수받았으나 끝내 사양했다. 김광부(金光富)는 김용자(金龍庛)의 셋째 아들 김영(金英)의 손자로 우왕 5년 영남순문사 겸 합포도원사(嶺南巡問使 兼 合浦都元師)로서 침입한 왜구와 싸우다가 가수현 사정(嘉樹縣 四亭)에서 전사, 병조판서(兵曹判書) ㆍ 순성보리공신(純誠輔理功臣)으로 추증되었다. 천성공파(贊成公派)의 파조가 되는 김성단(金成丹)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다. 김용초(金用超)는 충정왕 때 문과에 급제했으나 무예에도 뛰어났다. 왜구 토벌에 큰 공을 세워 정도전(鄭道傳) 등 15명과 함께 공훈에 따라 벼슬을 받았다. 조선개국 후 호남병마도절제사(湖南兵馬都節制使)를 제수받고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봉해졌다. 김영열(金英烈)은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이르렀다. 박포(朴苞)의 난(亂) 때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왕을 호위한 공으로 사후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의성김씨(義城金氏)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이며 조선 인종묘성에 배향된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은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연산군(燕山君) 7년 생원 ㆍ 진사 양시(兩試)에 합격하고, 2년 뒤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했다. 사림(士林)의 대표적인 인물로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있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대사헌 조광조(趙光祖)의 일파라는 이유로 파직되기도 했다. 관직은 대사헌(大司憲), 대사간(大司諫), 예조(禮曹) ㆍ 병조(兵曹)의 판서,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 좌찬성(左贊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세자이사(世子貳師) 등을 역임했다. 김안국(金安國)은 성리학 뿐 아니라 천문 ㆍ 병법 ㆍ 국문학 등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동몽선습(童蒙先習)’. ‘모재집(慕齋集)’, ‘ 모재가훈(慕齋家訓)‘ 등의 저서와 ’이륜행실(二倫行實)‘. ’창진방(瘡疹方)‘ 등의 편저서를 남겼다. 조광조(趙光祖)와 같이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주장했으나, 급격한 개혁에는 반대했다. 그의 문하에서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미암 유희춘(眉菴 柳希春) 등이 배출되었다. 그의 동생인 김정국(金正國) 역시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중종 4년 문과에 그해, 호당(湖當)에 뽑혔고 황해도(黃海道) ㆍ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거쳐 병조(兵曹) ㆍ 형조참판(刑曹參判)을 지냈다. 기묘사화(己卯士禍)때 관직에서 물러나 후학을 가르치다가 다시 기용되어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지냈다. 저서에는 ‘성리대전절요(性理大全節要)’, ‘역대수수승통지도(歷代授受承統之圖)’. ‘ 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 ‘기묘당적(己卯黨籍)’, ‘사재집(思齋集)‘ 등이 있다. 김희삼(金希參)은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翰林) ㆍ 검상(檢詳) ㆍ 사인(舍人)을 거쳐 삼척부사(三陟府使)를 지냈는데, 아들 넷중 우홍(宇弘) ㆍ 우굉(宇굉(宏)) ㆍ 우옹(宇顒)3형제가 문과에 올라, 4부자가 대과에 오른 유일한 의성김씨(義城金氏) 집안이 되었다. 김거익(金居翼)의 7세손 김제민(金齊閔)은 일재(一齋) 이항(李恒)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선조 때 문과에 급제, 군수(郡守)를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4형제를 데리고 의병대장으로 출전, 많은 공을 세웠다. 이때 네 아들 중 안(晏)은 전쟁터에서 숨졌고, ◆(◆)ㆍ 흔(昕) ㆍ섬(暹) 3형제는 아버지를 도와 군량미를 조달, 해로를 통해 행재소까지 보내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에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정사 황윤길(正使 黃允吉)과 함께 일본에 다녀온 김성일(金誠一)도 의성김씨(義城金氏)의 인물이다. 이황(李滉) 문하에서 공부하고 호당(湖當)에 뽑히기도 했던 그는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사성(司成)으로 통신부사(通信副使)가 되었는데, 동인(東人)이었던 그는 일본의 침략을 보고한 서인 황윤길(西人 黃允吉)과는 달리 침략의 위험이 없다고 보고했다. 2년 뒤 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 그의 책임을 추궁했으나, 같은 동인(東人) 유성룡(柳成龍)의 변호로 화를 면했다. 그 후 초유사(招諭使), 경상우도관찰사겸 순찰사를 지내고 병사했다. 김우옹(金宇顒)은 이황(李滉) ㆍ 조식(曹植)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명종 22년 문과에 급제,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안동부사(安東府使)를 지냈다. 정여립(鄭汝立)의 옥사 때 그와 교분이 두텁다는 이유로 회령에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속강목(續綱目)’ 20권을 지었다. 임진왜란 때 풀려나 부호군(富護軍)으로 ‘비어기무(備禦機務)’ 7조(條)를 건의했고, 그 후 이(吏) ㆍ 예(禮) ㆍ 병조참판(兵曹參判), 한성좌윤(漢城左尹)을 역임했다. 김용(金涌)은 선조 때 과거에 급제, 검열(檢閱)이 되었다가 병으로 사퇴했다. 임진왜란 때 안동(安東)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항쟁, 이듬해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이조좌랑(吏曹佐郞) 등 여러 관직을 지내다가 1598년 영의정 유성룡(領議政 柳成龍)이 삭직(削職)되자 함께 배척을 받아 산관(散官) ㆍ 선산부사(善山府使) 등 외직(外職)으로 전전하게 되었다. 광해군 때 태상사정(太常寺正)으로 편수관(編修官)이 되어 ‘선조실록(宣祖實錄)’ 수찬(修撰)에 참여했다. 김지수(金地粹)는 광해군 때 폐모론에 반대해 부령(富寧)으로 귀양갔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나 예(禮) ㆍ 병조(兵曹)의 낭관(郞官)을 지냈다. ‘조천록(朝天錄)’ 은 인조 4년 정사 김상헌(正使 金尙憲)을 따라 서장관으로 명(明)나라에 가면서 지은 시들을 묶은 것이다. 김성구(金聲久)는 부제학 김우굉(副提學 金宇宏)의 후손으로 지평(持平) ㆍ 정언(正言) ㆍ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강원도(江原道)관찰사를 지냈는데, 후손에서 문과급제자가 19명이 나왔다. 김방걸(金邦杰)은 홍문관 수선(弘文館 修선)으로 있을 때 복제(服制)문제를 거론한 ‘기사소(己巳疏)’을 올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을 제주도로 귀양보냈다. 승지(承旨) ㆍ 대사성(大司成) ㆍ 대사간(大司諫) 등을 지냈으나 서인(西人)이 집권하게 되자, 송시열(宋時烈)을 탄핵했던 죄로 전라도 동북으로 귀양 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교리 김성탁(敎理 金聖鐸)의 아들 김락행(金樂行)은 향시(鄕試)에 합격했으나, 아버지가 귀양가게 되자 벼슬을 포기하고 귀양지로 따라가 10여 년간 모신 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시신을 고향으로 옮겨 효자로 이름이 있었다. 김◆(金◆)은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의 문인으로 정조 1년 문과에 급제, 전적(典籍) ㆍ 지평(持平) ㆍ 단양군수(丹陽郡守) ㆍ 예조참판(禮曹參判) 등을 지냈다. 명필 ㆍ 명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단양군수(丹陽郡守) 때 이속(吏屬)들의 시폐(時弊)를 논한 만언소(萬言疏)가 명문으로 꼽히고, 중요한 외교문서를 많이 썼다. 김한동(金翰東)은 관찰사 김성구(金聲久)의 증손으로 정조 때 문과에 급제, 관찰사(觀察使) ㆍ 승지(承旨) ㆍ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했으며, 순조 때는 천주교도로 몰려 유배되기도 했었다. 의성김씨(義城金氏)의 후손에서 구한말 이후 국권회복을 위해 싸운 열사 ㆍ 의사로는 다음의 인물을 들 수 있다. 김도화(金道和)는 을미사변 직후 곽종석(郭鍾錫) ㆍ 김흥락(金興洛) 등의 추대로 의병장이 되어 제천의 유인석(柳麟錫) ㆍ 서상열(徐相說) 등과 연합전선을 펴 일본군과 싸웠다. 그는 학문에 뛰어났는데 한일합방후 일본 총독부에서 사문(斯文)진흥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를 우대, 식민통치에 이용하려 했으나 그는 한마디로 거절해 버렸다. 이때 그를 찾아왔던 고교형(高橋亨)은 집 대문에 ‘합방대반대지가(合邦大反對之家)’라는 글씨를 써붙이고 돌아갔다고 한다. 김하락(金河洛)도 을미사변 때 창의하여 운현(雲峴) ㆍ 노루목 ㆍ 이현(梨峴)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리고 남한산성을 점령하기도 했으나, 뒤에 영덕 오십천(盈德 五十川) 전토에서 순국했다. 그의 ‘정토일기(征討日記)’는 당시 의병활동의 기록이다. 김동삼(金東三)은 한일합방 후 만주로 망명, 이시영(李始榮) ㆍ 이동령(李東寧)등과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했고, 이준(李儁) ㆍ 여준(呂準) 등과는 부민단(扶民團)을 결성하였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임정(臨政) 노동국 총판이 되기도 하고, 또 여러 애국단체들의 통합체인 통의부(統義府)를 조직, 총장이 되었다. 1925년 정의부(正義府)를 조직, 행정위원으로 독립운동을 하다 1929년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15년 형을 선고받고 마포(麻浦)형무소에서 복역 중 옥사했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이 수여되었다.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 은 유림(儒林)으로 일제시대 반일투쟁의 선봉에 섰던 애국자요, 학자였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됐을 때 ‘매국오적청참소(賣國五賊請斬疏)’를 올렸고, 1908년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를 비난, 옥고를 치렀다. 1919년 전국 유림 대표 1백 37명의 명의로 ‘한국독립청원서’를 작성, 이를 파리 만국평화회에 우송하기 위해 상해(上海)로 갔었으며, 그곳에서 임정에 참여, 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다음해 귀국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다가 제 1차 유림단(儒林團)사건으로 경찰에 체포, 출옥 후 다시 중국으로 가서 신채호(申采浩) 등과 독립운동지 ‘천고(天鼓)’의 발행에 이어 박은식(朴殷植)등과 ‘사민일보(四民日報)’를 발간,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한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하여 군사선정위원장으로 활약하며 손문(孫文)과 교섭, 독립운동 기금을 원조받았다.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부의장에 당선되었다가 1927년 상해(上海)주재 일본 영사관원에게 붙잡혀 본국으로 압송, 징역 1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 모진 고문을 받아 앉은뱅이가 되어버렸다. 8ㆍ15광복 후 유도회(儒道會)를 설립, 초대 회장을 지냈고, 초대 성균관(成均館) 관장과 성균관대(成均館大) 학장을 지냈다. 6ㆍ25 사변 때 피난지 부산에서 이승만(李承晩)대통령에게 하야 경고문을 보냈다가 40일간 옥고를 치렀고, 이시영(李始榮)ㆍ김성수(金性洙)ㆍ조병옥(趙炳玉) 등과 ‘반독재호헌구국선언(反獨裁護憲救國宣言)’을 발표,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그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