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악양 외둔에서 화개로 올라 갈 때 화개 덕은리를 지나친다. 이에 우측의 岳陽亭을 표지판을 무심코 지나친 바 없진 않으리.
평소 고요한 산수를 즐겨던 일두 정여창은 진실로 악양을 사랑하였다. 서기 1483년 (성종 14) 진사시를 볼 때 악양에 거소하였고 1490년 (성종 21) 문과에 급제할 당시에도 악양에 있었다. (주 : 조선 개국시에 공로가 큰 훈구파의 전횡을 누르기 위해 성종대왕시에 영남 사림위주의 사림파를 등용하였다) 고향이 함양인 정여창은 처자와 두 동생 모두 악양에서 살게 하였던 것이다. 1493년 (성종 24)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한 곳도 악양이다.
무오사화로 유배중인 갑자년 1504.4.1에 사망하였고 그해 9월 갑자사화때 정여창은 김종직의 직계라 하여 연산조에 의해 부관참시를 당하였다(본 목록의 남래우과화개현 참조).
일두 정여창은 현 화개 덕은리 부근에 매화와 대나무를 심으며 평생를 살고자 했다. 역시 악양은 백년을 편히 지낼 안온한 땅이다. 택리지, 오주연문장전산고(2004년 8월 동창회시 악양중학교을 방문할 때 도서관에 이책이 있음을 보고 너무 반가웠음)에도 악양은 이와 같고, 필자도 녹이 끊이면 더 갈곳은 없음을 알고 있다.
정여창이 살던곳은 정여창이 몰한지 30~40년만에 폐허로 변하고 거의 잊혀진 땅으로 변했다. 헌종시 진주에서 평사로 이거한 山石 金顯玉(1844 ~ 1910, 헌종~순종때의 학자, 본관은 김해,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이 평소 정여창을 숭앙해 마지 않았고 정통 성리학의 맥을 잇고 있었다. 이에 정여창이 살던 터에 악양정을 중건하고자하고 경상감사, 하동군수의 힘을 비르고 동지 십여인과 소학을 베풀고 서로 계를 맺어 건축자본으로 삼아 1901년 4월 오늘의 악양정을 중건하기에 이른다. 악양정 준공시에 면암 최익헌이 그 중수기를 지었다 (이는 추후 전재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된 산석 김현옥, 악양인의 시를 발굴하여 소개한다.
岳陽亭詩
악양정시
멀리 한양의 손님이 왔다 가니
이시는 악양정을 준공하면서 기 기쁨을 기록한 것이다. 이시를 소개하면서 악양의 문사와 경제적 번화가 이루어지기를 축원하는 바이다. 마치 조선조 성리학의 혈맥이 통하고 부흥하였듯, 성리학의 번화가 오늘날의 악양의 번영으로 재현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더구나 악양의 선비가 100년전에 쓴 악양에 관한 시를 감상할 수 있어서 그 감회가 비감하기까지 하다.
2003년 일두 정여창이 몰한지 400년이 지난 시점에 "일두선생"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수백년전의 그 시절을 구전으로 전하여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물론 그 사실을 참으로 귀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퇴락하여 슬퍼지게 만드는 생가가 평사에 있고, 그미는 서울에서 영어과목을 담당하는 교직에 종사하고 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