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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시대의 영적 부흥모델: 니느웨의 회개사건
By Dr. Witness Oh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 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요나서 3:3-10)
하늘의 문이 열리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강력한 영적 부흥, 이 놀라운 부흥 앞에 신자라면 가슴이 떨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 각자의 분주하고 곤고한 삶, 그리고 단조롭고 메마른 삶 가운데 우리는 이 주제를 잊어버렸다. 더군다나, 소망도 없어 허물어지고 무너져 가는 많은 교회들의 냉엄한 현실앞에서 이 주제는 이제는 서서히 잊혀져 가는 그런 주제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주제를 잊어서도 안되고 잃어버려서도 안된다.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우리의 교회안에 이 부흥의 역사가 반드시 일어나기를 사모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다. 행2장에 나타난 마가의 다락방에서의 부흥의 역사는 반드시 마지막 때에도 일어나야만 한다. 필자는 요한계시록을 주석하면서, 계11:13의 사건이 불신자들과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재림전에 예수께로 회심하는 대표적인 회심사건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 때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출처]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계11:13) - 5/3|작성자 주님의 머슴
요나서 3장을 읽기 시작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나를 통해 이루신 놀라운 한 사건을 접하게 된다. 요나 당시의 강대한 제국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불어 닥친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를 우리는 보게 된다. 이런 일이 과연 일어날 수 있는 것인가? 정말 가능한 사건인가? 그 때 그 현장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리고 이러한 일이 오늘날에도 가능하며 마지막 때에도 가능한 일인가?
요나서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니느웨는 걸어서 3일이 걸리는 큰 성읍이었다(3절). 그리고 당시 인구가 12만이었다. 1834년 고고학적 연구에 기초한 펠릭스 존스(Felix Johns)의 조사에 의하면, 니느웨는 그 번영의 절정기에 175,000명이나 되는 백성들이 생활할 수 있었던 약12km의 우회도로의 내부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니느웨의 크기에 대한 회의론자들의 반론도 여전하다. 고대 세계의 도시로서 3일 길이나 걸리는 그렇게 큰 규모의 도시가 그 당시엔 없었다는 주장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 3일 길이 니느웨 성안으로 들어가는 데 하루, 성읍만 돌아다니는데 하루, 그리고 그 성읍을 다시 걸어 나오는 데 하루, 이렇게 3일 길이 걸리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어쨌든, 진보주의 해석가들은 요나서를 역사적인 기록이 아닌 하나의 만들어진 문학작품으로 그 당시의 시대 정신을 반영하는 책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진보주의 입장을 정중히 배격한다. 우리는 최종적인 현재의 형태로 기록된 성경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나서 3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큰 니느웨 성읍에 등장한 한 연약한 히브리 예언자의 선포가 전 국가적인 회개를 초래했다는 사실이다. 위의 본문은 니느웨 회개운동의 구체적 내용을 자세하게 제시하고 있다.
니느웨 백성들 사이에서 자발적인 회개가 일어나고, 높은 이로부터 낮은 이까지 회개하는 기적이 일어났다(5절). 더군다나, 당시에 신의 대리자로 불리우는 앗수르왕(본문에는 니느웨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은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베옷을 입었다(6절). 그리고 이 도시에는 공식적인 금식이 선포된다.
이 사건은 니느웨의 일반 백성부터 왕까지 모든 계층을 포괄하는 전 국가적 차원의 회개였으며, 더욱 더 놀라운 것은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까지 이 회개의 대상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들이 모두 회개에 동참했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그리고 악한 길에서 돌아섰으며 즉각 폭력적인 행위를 멈추었다. 이는 즉각적인 삶의 변화를 의미한다.
한 마디로, 니느웨 회개 운동은 전 국가적 규모의 철저한 회개의 모델(model)을 제시하고 있으며 실제적인 삶의 변화, 사회적 개혁까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부흥운동이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놀라운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 이유가 무엇인가? 당시 니느웨는 비록 최고 전성기의 시대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막강한 제국의 자존심을 가진 강력한 국가였다. 그런데 이러한 앗수르의 자존심도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회개의 폭풍을 제어하진 못했다.
요나 당시 앗수르 제국이 가장 숭배하던 神은 바로 전쟁과 군대의 신으로 불린 ‘앗수르’ 였으며 앗수르 제국은 이 신의 이름을 바로 국가의 이름으로 사용했다. 도성인 니느웨 또한 B.C.2300년경에 사랑과 전쟁의 여신인 아스다롯 신전을 건립하고 이 여신을 숭배하고 있었던 도시였다. 앗수르 제국의 왕은 고대 제국이 대부분 그러한 것처럼 국가신인 앗수르의 지상통치를 대신하는 자로 군림했다. 즉 신의 아들로 숭배를 받았던 자였다.
이런 니느웨가 그들이 멸시했던 이스라엘에 속한 일개 히브리 설교자가 전하는 메시지, 즉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라는 짧은 설교에 여지없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회개의 불이 니느웨를 강력하게 휩쓸고 지나갔으며 요나서 1장의 선원들이 그들의 신이 아닌 “여호와께” 구체적으로 부르짖은 것처럼, 니느웨 또한 그들의 전쟁의 신인 앗수르나 아스다롯이 아닌 히브리의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부르짖고 구원을 요청한 것이다(8-9절).
우리는 이 요나서의 본문을 통해 한 가지 중요한 진리를 보게 된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선택된 민족인 이스라엘의 범주를 벗어나 온 세상을 사랑하시는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사랑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즉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모든 영혼들은 동일하게 소중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왜곡시키며 잘못 확대하는 현대적 신학중의 하나인 만유구원론으로 빠져서는 안 된다. 만유구원론은 궁극적으로 지옥에 떨어진 영혼들도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나중에 모두 구원을 받는다는 사상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극대화한 나머지, 하나님의 공의를 짓밟아버린 비 성경적인 가르침이다.
죄의 용서는 누구라도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무조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거부는 영원한 지옥의 형벌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긍휼의 하나님으로 나타나며, 그리스도를 떠난 영혼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끝없이 기다리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그 사랑과 용서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이 사랑과 용서는 그리스도의 피 흘리신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죄인들의 고백 안에서만 유효한 것이다. 이 고백은 참된 회개로부터 시작된다. 니느웨 백성들의 회개는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께 울부짖는 온전한 회개였던 것이다.
어떤 이는 요나서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요나가 활동했던 시기로 추정되던 B.C. 763년에 앗수르에서 실제로 발생한 한 사건이 이러한 회개를 초래한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이 사건은 당시 앗수르의 홍수와 기근을 초래한 일종의 일식현상으로, 이러한 천지지변과 하늘의 이상 징조는 그 당시의 과학지식으로 볼 때는 신의 진노로 인한 불길한 징조로 공포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이러한 현상가운데 선포된 요나의 메시지가 회개의 역사를 불러왔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리고 당시 니느웨는 술사나 선견자가 신탁을 받아 국가의 재앙이나 전쟁을 예언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에 히브리 선지자인 요나의 메시지에도 귀를 기울였다고 말한다. 아마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나서는 홍수나 지진 등의 자연적 현상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이러한 회개의 역사가 온전히 하나님의 권능 가운데 일어났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요나서 3장이 말하고자 하는 신학적 메시지는 간단하다. 즉 니느웨의 역사는 요나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그 분의 뜻을 따라 일어났음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이 고백에서 쉽게 멀어질 수 있는 존재들인지 모른다. 우리의 삶과 사역에서 입으로는 주님의 영광을 드러낸다고 말하지만, 실제적으로 우리의 이름과 우리 사역의 영광을 더 드러내기를 좋아한다. 처음에는 성령의 일하심을 진솔하게 인정하고 역사하시는 성령님께 영광을 드리지만, 교회나 사역의 규모가 커져서 시스템만으로도 움직여 나갈 때 그 때는 특정한 영적 리더나 사역 단체의 이름이 더 드러나기 시작하고 주 예수님께 드리는 온전한 영광이 훼손을 입기 시작한다. 이러한 문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사람은 극히 드물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자기 자신의 이름이 높임을 받을 때 만족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치는 존재인지 모른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헌신이 사람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싶어한다. 우리의 설교자들은 그들이 전한 설교가 다른 사람들에게 큰 은혜를 주었는지 아닌지 그 결과를 듣고 싶어진다. 우리가 소속된 사역단체가 현재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력과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지 분석하고 싶어진다. 우리가 사역하는 교회에 신자들이 얼마나 증가하고 있는지 구체적인 통계를 보고받고 싶어한다.
물론, 우리의 사역들을 적절하게 분석하고 앞으로의 전략들을 효과적으로 수립하기 위해 이러한 평가들이 필요할 때도 있다. 이러한 일들은 주님께서도 인정하실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경우는 이러한 필연적인 경우가 아니다. 우리의 마음에 교만이 가득 차서 우리들 자신의 이름과 영광을 추구하고 확인을 받고자 할 때 일어나는 영적 위험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과 사람들 앞에서 겸손함을 유지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만에 걸려 넘어진다. 오직 예수님의 영광만을 추구하고 주님의 이름만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고 사역을 한다는 것은 일생 동안 우리 자신과 싸워나가야 할 치열한 투쟁이다.
니느웨, 그 놀라운 도시 부흥의 모델
하나님이 요나를 통해 니느웨를 영적으로 뒤흔드셨던 이러한 역사에 대한 기록은 아쉽게도 아직까지는 앗수르 고대문서에서는 발견 할 수 없다. 앗수르의 역사가들은 대부분의 사건들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므나헴 왕 때 이스라엘의 부유층 사람들이 디글랏빌레셀 3세(B.C.744-727년)에게 국외로 추방을 당하지 않기 위해 그 몸값으로 은 50 세겔씩을 바쳤다는 사실이 앗수르 고대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느웨 전체가 굵은 베옷을 입었던 이 역사적인 사건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거대한 제국 앗수르가 일개 히브리 예언자에 의해 전 국가적인 회개가 일어나고 당시 그들이 생각하기에 일개 히브리 민족신에 불과한 야웨 하나님께 굴복했다는 사실이 훗날 앗수르 역사가들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인가? 그래서 그와 관련된 모든 자료들을 삭제한 것인가?
요나서 3장은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에 의한 불신자 회개운동의 모델이며 한 도시에 대한 부흥운동이자 마지막 때의 선교비전이다! 당시 정치적, 군사적, 종교적 상황으로 볼 때 니느웨의 이러한 국가적인 철저한 회개의 역사는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기적이다.
이러한 기적적인 역사를 통해 우리는 요나서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주된 관심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본다. 요나서 1장과 2장의 무대가 바다였다면, 그 바다에서는 이방인인 선원들의 회심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리고 요나서 3장과 4장의 무대가 육지라면 바로 니느웨에서 그 회심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그 회개의 역사는 마치 바싹 마른 들풀에 겉잡을 수 없는 불길이 옮겨 붙은 것처럼 회개의 불길이 니느웨 전 성읍을 휩쓸고 지나간 부흥의 현장으로, 이는 마치 하나님이 직접 니느웨를 방문하신 것처럼 느껴지는 생생한 현장이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사64:1-4절을 연상케 한다.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로 주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 주께서 강림하사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두려운 일을 행하시던 그 때에 산들이 주 앞에서 진동하였사오니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옛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들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사64:1-4)
이방민족인 니느웨의 부흥이 당시 교만했을 뿐만 아니라 잔인한 민족으로도 알려진 앗수르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특기할 만 하다. 예를 들면, BC 9세기에 등장한 앗슈르나시르발 II세(Assur nasir pal II, BC 883- 859)는 자기의 잔인성을 과시하는 각문(刻文)을 갈라(Calah)의 닌울다 신전의 입구에 있는 돌 위에 남겨 두고 있다. 그는 대적자들의 피로 산을 붉게 물들였으며, 또 골짜기를 시체로 채웠고, 사람들을 불로 태웠다. 혹은 그에게 반역을 꾀한 사람들의 껍질을 벗겨 기둥에 붙여놓거나 그들의 팔 다리를 잘라 버렸다고 한다. 이것은 앗수르 왕들의 잔인성을 엿볼 수 있는 전형적인 예이다.
그 뿐만 아니라, 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도 당시 니느웨가 사단의 권세가 강했던 지역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지역은 대체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기 힘든 곳으로 소위 사단의 견고한 진이 확고하게 형성된 지역이다. 이러한 지역은 영적으로 거주민들의 죄악으로 인해 땅이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다.
엘리스테어 페트리(Alistair P. Petrie)은 땅을 영적으로 오염시키는 4가지의 요인을 지적하고 있다. 즉 우상숭배, 피 흘림, 행음과 간음, 그리고 언약파괴이다. 이러한 인간의 죄악으로 땅이 더럽혀질 때 사단은 그 땅을 지배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빼앗아 간다. 즉 그 땅에 사단의 강한 권세가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그의 책에서 죠지 오티스는 한 국가가 전통 문화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축제나 민속 행사를 통해 공개적이고도 합법적으로 사단의 지배를 초청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죠지 오티스는 무슬림들의 경우 이슬람 교도의 의식을 ‘하지’라는 메카 순례로 바꾸는 반면 힌두교도들은 쿰멜라 축제를 위해 12년마다 거룩한 갠지스 강을 열심히 다니고 유럽인들과 미국인들은 할로인 행사를 통해 드루이드 이교도 축제를 하고 브라질인들은 카니발의 화려하고 열광적인 리듬에 금지되었던 것들을 만끽하고 있고, 혼을 부르거나 위로하는 고대 의식을 겉으로는 더 온화한 인기 좋은 축제 및 성지 참배로 재포장하여 사단의 거주권은 다음 세대에 의해서도 인정된다는 것이다.
윌터 윙크(Walter Wink)는 그의 책,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에서 악의 정사와 권세들이 지배하는 영역은 세상의 제도, 법, 전통, 사단적인 의식까지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앗수르 제국은 극심한 우상숭배와 전쟁을 통한 잔혹한 살인 행위, 사회 속에 만연된 음행과 간음, 국가 차원의 주술과 각종 제의나 축제 등을 포함하여 숱한 악행을 하나님 앞에 쌓아온 국가중의 하나로서 사단이 강력하게 지배했던 국가임을 알 수 있다. 이런 국가가 불성실하기까지 한 선지자 요나의 짧은 메시지를 통해 국가적인 강력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은 참으로 믿기 어려운 기적이다.
어떻게 이러한 기적이 일어났는가? 한 마디로 니느웨의 하늘 문이 열린 것이다!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이 성읍에 강력하게 임한 것이다! 인간의 힘이 아닌, 위로부터 부어지는 성령의 권능 때문에 니느웨에 형성된 사단의 강력한 권세들이 깨어지고 죄인들의 심령에 불을 붙은 것이다.
이러한 부흥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미국 제2차 대각성운동의 주역이며, 현대 미국 복음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 우는 찰스 피니의 경우를 보라. 그가 주도한 부흥에 관한 다음의 기사를 읽어보자.
1825년 8월 피니가 인도한 뉴욕 주 중부 오나이다 카운티 웨스턴에서의 집회, 이어 열린 로마에서 열린 집회에 놀라운 회개의 역사가 나타났다. 회개의 역사가 너무도 강하게 나타나 회중들을 진정시켜야 할 정도였다. 특히 뉴욕 중부에 있는 로마에서 열린 어느 저녁 예배 시간에 죄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임했다. 20일간의 집회가 진행되는 동안 매일 밤 피니는 그날 회심한 사람들을 강대상 앞으로 나와 서게 하는 초대의 시간을 가졌다. 사람들은 누가 회심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회심했는지 실제로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교회에서 쓰러지는가 하면 나중에 자신의 집에 돌아가 쓰러지는 자들도 있었다.
로마에 사는 모든 주민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로마는 성령의 임재로 가득한 도시로 변했다. 우티카의 한 보안관은 공무차 로마를 향하다 도시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하나님의 임재의식이 더 강해졌고 공공건물이나 사무소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에 압도된 나머지 거의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우티카로 돌아오자마자 그 보안관은 회심했다. 하나님께서 피니를 부흥운동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가 그를 특별하게 다루어야 할 이유는 그를 통해 놀랍게 일어난 과연 참된 부흥운동이었느냐 아니냐 하는 진위여부가 아닐 것이다. 분명 하나님께서 그를 도구로 사용하셨고, 그를 통해 가는 곳마다 놀랍게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그가 부흥운동을 사회개혁과 연관시켜 노예제도를 반대하고 여성의 지위를 고양하고 기독교의 대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한 것은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다.
한 도시나 국가를 강타하는 놀라운 부흥의 현장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오랜 세월 한 영혼의 추수를 위해 눈물로 말씀의 씨를 뿌리며 기도해왔던 이 땅의 수많은 전도자들과 선교사들의 수고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하늘로부터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충만하게 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 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도 이러한 역사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점에서 요나서는 절묘한 균형감각을 보여준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요나서 2장이 풍랑을 잠재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준다면, 요나서 3장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요나서 2장이 소수의 사람들인 선원들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라면 요나서 3장은 도시-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요나서는 눈에 보이는 기적들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의 균형, 한 영혼 구원과 세계 선교 사이의 균형이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 때의 교회들은 이 두 가지 영성이 통합되어 나타날 것이다. 말씀만도 아니고 은사적 능력만도 아니다. 우리는 둘 다 존중해야 하며 둘 다 버릴 수 없다. 능력만을 강조하면 극단적인 승리신학에 빠지기 쉽다. 말씀만을 강조하면 능력 없는 율법주의에 빠지기 쉽다. 또한 십자가의 고난만 강조하면 권세 없는 패배주의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부활의 능력과 소망도 강조해야 한다.
확신컨데, 요나서 3장은 주님이 재림 하시기 전 마지막 때의 영혼추수운동의 한 모델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님, 불신자들 가운데 성령을 부어주소서! 한 도시를 뒤흔들 마지막 때의 부흥을 주옵소서! 도시들을 붙잡고 있는 사단의 권세가 깨어지게 하소서! 사단의 견고한 진이 무너지고 영혼들이 자유함을 누리게 하소서!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강력한 불을 주소서! 그래서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힘이 아닌 성령의 권능으로 영혼들을 추수하게 하옵소서!”
우리는 사람들의 감정만 흔들어대는 일시적인 부흥이 아니라, 니느웨처럼 근본적으로 삶 자체가 변화되는 부흥을 원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서의 부흥회를 통해 일시적인 회개의 역사는 일어나지만 교회 문밖을 나서는 순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끝나는 그런 부흥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적으로 개인적인 죄악과 사회악과 부도덕이 청산되는 역사를 원한다.
우리가 진실로 원하는 것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고 주님의 나라가 능력으로 임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하늘로부터 능력을 부음 받은 설교자와 교회를 통한 성령의 능력이 바로 이런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부흥의 도구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이 땅에서 실현되도록 정치 권력도 변화시키는 능력을 보여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나 권력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과 종교 권력으로부터 자신을 철저히 분리시키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우리 자신들이 끝까지 변질되지 않는 다면 우리를 통한 부흥의 불은 지속적으로 타오를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의 영적 부흥을 사모하며 간절히 기도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불순종한 요나를 통해서도 이 기적을 행하셨다면, 도시와 열방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전 세계의 중보기도자들의 울부짖는 기도가 왜 응답하시지 않겠는가? 요나를 통해 그 짧은 하나님의 메시지 한 문장만으로도 한 도시를 흔드셨던 하나님께서 영혼들을 향한 전도자들을 통해 왜 역사하지 않으시겠는가? 더군다나 하늘의 능력과 성령으로 충만한 두 증인적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영혼추수사역에 왜 이러한 기적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단순한 은사들만이 나타나는 능력 집회 보다 더 귀한 것은 불신 영혼들에게 강력한 회개의 불이 떨어지고, 그들의 영혼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추수되는 일이다. 그리고 이들의 삶이 거룩하게 변화되고 사회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일이다.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은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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