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황사는 위도상 우리나라 최남단에 위치해 있는 절입니다.
1692년(숙종 18)에 건립된 <미황사사적비(美黃寺事迹碑)>에 기록된 창건 연기 설화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 8년(749)에 사찰이 창건되었다고 하니 천년고찰(千年古刹)이라 할 수 있는 매우 유서 깊은 사찰입니다.
또한 남도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수려한 달마산을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사찰입니다.
< 미황사의 창건 >
「동국여지승람」권35 영암군 산천조(靈巖郡 山川條)를 보면 미황사의 창건주와 창건 시기, 그리고 고려후기 미황사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1692년(숙종18)에 민암(閔暗,1634-1692)이 지은 「미황사 사적비」(美黃寺 事迹碑)에는 미황사의 창건 연기설화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라 경덕왕 8년(749) 홀연히 한 석선(石船)이 달마산 아래 사자포구(獅子浦口)에 와서 닿았다고 한다 배안에서 천악범패(天樂梵唄)의 소리가 들리자 어부가 살피고자 했으나 배가 번번히 멀어져 갔다. 의조화상(義照和尙)이 이를 듣고 장운(張雲)·장선(張善) 두 사미(沙彌), 촌주(村主) 우감(于甘), 향도(香徒)100인과 함께 목욕제계하고 경건하게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비로소 석선이 해안에 닿았는데, 그 곳에는 주조한 금인(金人)이 노를 잡고 서 있었다. 그리고 배 안을 살피니 「화엄경」80권, 「법화경」 7권, 비로자나·문수보살 및 40성중(聖衆), 16나한과 탱화 등이 있고 금환(金環)과 흑석(黑石)이 각 한 개씩 있었다.
향도들이 경전과 부처님 상을 해안에 내려놓고 봉안할 장소를 의논할 때 흑석이 저절로 벌어지며 그 안에서 검은 소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문득 커졌다.
이날 밤 의조화상이 꿈을 꾸었는데 금인(金人)이 말하기를 "나는 본래 우전국(優塡國, 인도)왕으로서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니며 경상(經像)을 모실 곳을 구하고 있는데, 이곳에 이르러 산 정상을 바라보니 1만불(一萬佛)이 나타나므로 여기에 온 것이다. 마땅히 소에 경을 싣고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는 곳에 경(經)을 봉안하라."고 일렀다.
이에 의조화상이 소에 경을 싣고 가는데 소가 가다 처음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산 골짜기에 이르러 다시 누우며 사찰을 창건하니 곧 통교사(通敎寺)요, 뒤에 누워 죽은 골짜기에는 미황사를 짓고 경과 상을 봉안했다. 미황사의 '미'는 소의 아름다운 울음소리를 취한 것이고, '황'은 금인(金人)의 황홀한 색을 취한 것이다.」
이와 같이 『동국여지승람』과 「미황사사적기」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미황사는 경덕왕 8년(749)에 의조화상이 창건하여 화엄경, 법화경을 중시하며 여러 불상을 모신 사찰로 헤아려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창건 설화는 곧 불교의 남방전래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 고려시대의 미황사 >
고려시대에 들어와 지원년간(至元年間)(1264~1294)에 남송의 달관(達官), 군자들이 미황사에 내왕하기도 하였습니다. 『동국여지승람』영암군(靈巖郡) 산천조(山川條) 달마산(達摩山)에 보면 「고려 때 승려 무외(無畏)의 記에 …(전략)… 그 암자(도솔암) 북쪽에는 서굴(西窟)이 있는데, 신라 때 의조화상이 비로소 붙어 살면서 낙일관(落日觀)을 수리하던 곳이요, 서쪽 골자기에는 미황사(美黃寺)·통교사(通敎寺)가 있다. 지원 신사년 겨울에 남송의 큰 배가 표류해 와, 이 산 동쪽에 정박했을 때 한 고관이 산을 가리키면서 주민에게 묻기를, "내가 듣기에 이 나라에 달마산이 있다 하는데 이 산이 그 산 아닌가."하므로 주민들이 "그렇다"하였다. 그 고관은 그 산을 향하여 예를 향하고, "우리나라는 다만 이름만 듣고 멀리 공경할 뿐인데, 그대들은 이곳에 생장했으니 부럽고 부럽도다. 이 산은 참으로 달마대사가 상주할 땅이다."하고 그림으로 그려갔으니 위대하다. 이 산이여, 어찌 매우 높고 빼어난 모양이 산과 바다의 아름답고 풍부함을 다 했을 뿐이랴. 그 성적과 영험한 자취도 많도다. 또 외국인들까지도 우러르고 공경함이 저와 같다.」고 합니다. 고려후기에 미황사가 있는 달마산은 중국인들에게도 영험한 도량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 조선시대의 미황사 >
앞에서도 서술했듯이 고려 후기 절이 국내외적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었고, 조선시대 전기에도 사세를 꾸준히 유지해 온 것으로 보입니다.『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권35 영암(靈巖) 불우조(佛宇條)에 통교사, 미황사가 기재되어 있어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 정유재란 때(1597) 전남의 다른 사찰과 마찬가지로 건물이 불타버리고 기록마저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중기 이후의 역사는 1754년(영조 30)에 기록된 <미황사법당중수상량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 상량문은 1982년 대웅전 복원 공사 때 발견된 것으로 내용을 보면 임진왜란 이후 3차례의 중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 번째 중건은 1597년(선조 30)정유재란 때 건물의 일부가 소실되어 다음해부터 공사를 시작해서 1601년에 마무리되었으며, 이 때의 불사는 만선(晩善)스님이 담당했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그 뒤 1658년(효종 9)에서 1660년(현種)까지 이루어진 것으로 성간(省侃)·수신(脩信) 스님이 담당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1751년(영조 27)에 덕수(德修) 스님에 의해 시작되어 상량문이 씌어진 1754년에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때의 불사 내용은 1751년에 동서 양쪽에 금고각(金鼓閣)을 세우고 이듬해 기와를 바꾸었으며, 1753년에는 보길도(甫吉島)에서 목재를 실어 왔으며 대둔사의 아랫마을 사람들이 공사를 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듬해 대웅전과 나한전을 완공했습니다.
한편 18세기에는 고승 연담 유일(蓮潭有一, 1720~1799) 스님은 여러 차례 머무르면서 미황사의 여러 일을 간여하였습니다 미황사는 지역적으로 해안가에 위치하여 바다와 관련되는 불사가 많이 행해졌는데, 스님은 「천변불사소(川邊佛事疏), 천변시왕소문(川邊十王疏文)」으로 물에 빠진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수륙도장(水陸道場)을 개설하고 참회법석(懺悔法席)을 열었습니다. 그래서 연담 스님의 문집인 「임하록(林下錄)」을 절에서 1799년(정조 23)에 펴냈으며 스님의 입적 후 부도가 세워지는 등 스님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1858년(철종 9)에는 영허 의현(靈虛義玄, 1816~1874) 스님이 이곳에서 만일회(萬日會)를 개설하기도 했습니다. 이 때의 만일회는 아미타신앙의 법회였다고 하는데, 이 같은 내용은 초의(草衣) 선사가 지은 <미황사만일회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절은 조선시대 중ㆍ후기에 걸쳐 이 같은 융성을 거듭하다. 100년 전 주지 혼허(渾墟) 스님이 중창을 위해 모금차 군고단(軍鼓團)을 이끌고 완도와 청산도를 가다 배가 조난을 당한 뒤에 점차 퇴락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 현재의 미황사 >
퇴락한지 100년이 흐른 후, 현재 미황사에 주석하고 있는 지운스님과 현공스님, 금강스님이 1989년에 주인 없이 비어있던 미황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흔적만 남은 명부전, 삼성각, 만하당, 달마전, 부도암 등을 복원하고, 퇴락한 세심당을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10여년 간 중창불사 원력을 세워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찰로 면모가 일신되었습니다.
현재의 전각은 보물 947호인 대웅보전, 보물 1183호인 응진당과 명부전, 삼성각, 만하당(선원), 달마전(승방), 세심당(수련원), 요사체(후원), 향적전(객실), 안심료(후원), 보제루(누각), 감로다실(종무소)이 반듯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법회는 매월 음력 초하루법회가 신도 대상으로 있고,
매월 첫주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누구나 참여 할 수 있는 참선법회가 있으며
매월 넷째주 토요일에는 경전읽기모임이 있습니다.
또한 매년 여름과 겨울에 미황사 한문학당이 개설되어 있고
단풍 물든 가을날에는 '달이랑 별이랑 사람이랑'이라는 제목의 작은 음악회가 있으며
매년 12월 31일과 새해 1월1일에는 '노을맞이 해맞이 기원법회'가 있습니다
출처 :문화관광해설가 원문보기▶ 글쓴이 : 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