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전 두드리며 강호로 떠나가려니 석양을 마주보며 멀리 창랑가를 부르노라. 소 탄 사람도 안
오는데 더구나 말을 탄 사람 오랴. 쓸쓸히 초막집에 와상에 기대앉으니 종이 창 밖으로 더 넓은 세계 없지 않지만 평생에 창문 뚫는 벌 되기는
부끄럽구나....
다산 정약용이 어느길에 가다 혼자 앉아서 쓴 독좌음(獨坐吟)이란 시의 일부이다. 자신의 신세타령의 표현이 가슴을
아련하게 만든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어느 곳에서도 그를 비난한 글은 아직은 없는 인물이다. 경기도 광주
출생했다. 1807년(순조 7, 46세) 5월에 사도세자의 변고로 시파에 가담하였다가 벼슬을 잃은 부친 정재원(丁載遠)이 귀향할 때 출생하였기
때문에 자를 귀농(歸農)이라고도 했다.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로 호는 다산(茶山). 또는 여유당(與猶堂)이다. 정조 13년에
남인(南人)의 불리한 처지를 극복하고 대과에 급제하여 정조의 총애를 받기도 한 실학자, 우리 나라의 과학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가
유배기간 전라도에서 남긴 유유자적한 발자국을 그가 쓴 시로 만나 본다.
그가 전라도와의 인연은 황사영이 천주교에 대한 박해 내용을
자세히 적어 중국 베이징에 있는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된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전라도 강진에서 18년(1801~1818년) 동안 유배로 시작해
1818년 이태순의 상소로 길고 긴 유배 생활에서 풀려난 후 고향인 경기도 광주 마현으로 돌아가기 까지였다. 어쩌면 그 덕분에 강진 일대에서
머물며 정치ㆍ경제ㆍ지리ㆍ역사ㆍ문학등에 관한 책을 500 여 권을 쓰는 기회가 되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로 남는다.
다산은 강진땅에 이른다 오갈때가 없었다. 가장 접근하기가 용이했던 밥집에
나타나 얼쩡거리다가 주인 노파의 허락으로 움막하나 얻어 기거힌다. 그는 그곳을사의재라고 짓고 나그네 신세타령(客中書懷. 다산시문집
제4권)이라는 시로 만감이 교차하는 감흥을 나타낸다.
흩날리는 눈처럼 북풍이 나를 불어 / 남으로 강진땅 밥 파는 집까지 밀려왔네
조각산이 바다를 가리고 있는데 / 총총한 대나무로 세월을 삼는구나 北風吹我如飛雪 南抵康津賣飯家 好將叢竹作年華
幸有殘山遮海色
장기 때문에 겨울이면 옷은 되레 얇게 입고 / 수심이 하도 많아 밤에 술을 더 마시지 나그네의 유일한 푸접이
되는 것은 / 동백이 설도 전에 꽃이 핀 그거라네 衣緣地瘴冬還減 酒爲愁多夜更加 一事纔能消客慮 山茶已吐臘前花 ►사진=강진군 강진읍
동성리의 사의재
위인은 환경을 탓하지 않은 법, 그것을 사의재기(四宜齋記)에서 읽어 낼 수 있다. "사의재(四宜齋)라는 것은 내가
강진(康津)에 귀양가 살 때 거처하던 집이다. 생각은 마땅히 담백해야 하니 담백하지 않은 바가 있으면 그것을 빨리 맑게 해야 하고, 외모는
마땅히 장엄해야 하니 장엄하지 않은 바가 있으면 그것을 빨리 단정히 해야 하고, 말은 마땅히 적어야 하니 적지 않은 바가 있으면 빨리 그쳐야
하고, 움직임은 마땅히 무거워야 하니 무겁지 않음이 있으면 빨리 더디게 해야 한다.
이에 그 방에 이름을 붙여
‘사의재(四宜齋)’라고 한다. 마땅하다[宜]라는 것은 의롭다[義]라는 것이니, 의로 제어함을 이른다. 연령이 많아짐을 생각할 때 뜻한 바 학업이
무너져 버린 것이 슬퍼진다.
스스로 반성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때는 가경(嘉慶 청 인종(淸仁宗)의 연호) 8년 (1803, 순조
3) 겨울 12월 신축일 초열흘임. 동짓날[南至日]이니, 갑자년(1804, 순조 4)이
시작되는 날이다. 이날《주역(周易)》건괘(乾卦)를 읽었다"고 소상히 적혀 있다.
정양용의
강진의 유배기 시작은 집안형제들의 몰락으로 풍지파탄을 맞는다. 신유사옥(1801, 순조 1)이 일어나 다른 천주교 신도들과 함께 화를
입게되었다. 동생 정약용과 함께 천주교를 신봉하였다는 제목으로 체포되어 국문을 받았고 전남 신지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조카사위
황사영(黃嗣永)이 천주교를 신봉한 죄목으로 체포되어 극형을 받게되자 그와 관련하여 혐의가 의심되어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았으며
1800년 11월 5일(순조 1년) 흑산도(黑山島)로 유배되었다.
이때 같이 압송되었던 동생 정약용은 전남 강진(康津)으로
유배되었다 약용이 사의재에 도착하기전에 살아서는 마지막으로 가슴 찢어지는 형 약전(若銓 1758 ~
1816)과의 이별을 나주(羅州)에서 북쪽으로 5리 거리에 있 율정(栗亭)에서 맞는다. 이별 율정(栗亭別)이란 시가 속쓰리게 간장을 애리게 한다.
초가 주점 새벽 등불 깜박깜박 꺼지려 하는데 / 일어나서 샛별보니 아! 이제는
이별인가 두 눈만 말똥말똥 나도 그도 말이 없이 / 목청 억지로 바꾸려니 오열이 되고 마네 茅店曉燈靑欲滅 起視明星慘將別
脉脉嘿嘿兩無言 强欲轉喉成嗚咽
흑산도 머나먼 곳 바다와
하늘뿐인데 / 그대가 어찌하여 이 속에 왔단 말인가 고래는 이빨이 산과 같아 / 배를 삼켰다 뿜어냈다 하고 지네가 크기
쥐엄나무만큼 하며 / 독사가 다래덩굴처럼 엉켜 있다네
黑山超超海連空 君胡爲乎入此中 鯨鯢齒如山 呑舟還復噀 蜈蚣之大如皁莢
蝮蛇之紏如藤蔓
내가 장기에 있을 때는 / 낮이나 밤이나 강진 바라보며 깃날개 활짝 펴고 청해를 가로질러 / 한 바다 중앙에서
그 사람을 보렸더니 憶我在鬐邑 日夜望康津 思張六翮截靑海 于水中央見伊人
지금은 내 높이높이 교목에 올랐으나 / 진주는 빼버리고
겉껍질만 산 것 같고 또 마치 바보스러운 애가 / 멍청하게 무지개를 잡으려고 今我高遷就喬木 如脫明珠買空櫝 又如癡獃兒
妄欲捉虹蜺
서쪽 언덕 바로 코앞에 / 아침에 뜬 무지개를 분명히 보고서 애가 쫓아가면 무지개는 더더욱 멀어져 / 또 저 서쪽
언덕 가도가도 늘 서쪽인 격이야 西陂一弓地 分明見朝隮 兒來逐虹虹益遠 又在西陂西復西
7년은 강진읍내의 주막
사의재(四宜齋)에서 보내다가 이후 고성사(高聲寺)의 보은산방(寶恩山房)과 목리(牧里)의 이학래(李鶴來) 집으로 전전하면서 연구에
전념하였다.만덕사 옆에 있는 처사 윤박(尹博)의 정자로 옮겨 다산정(茶山亭 다산초당)이라 이름하고 학문에 열중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afe.daum.net%2Fnewshome%2Fwys2%2Ffile_attach%2F2017%2F09%2F29%2F1506637149-68.jpg) |
| 경세유표(經世遺表) 다산 정약용 연보에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장손(長孫)
대림(大林)이 태어났다. 7월에 형의 아들 학초(學樵)의 부음을 받고 묘갈명을 썼다. 《상례사전(喪禮四箋)》 50권이 완성되었다. 겨울에
〈예전상구정(禮箋喪具訂)〉 6권이 이루어졌다.
사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다산초당
1808년(순조 8, 47세) 봄에 다산(茶山)으로 옮겨 거처했다. 다산은 강진현 남쪽에 있는
만덕사(萬德寺) 서쪽에 있는데, 처사(處士) 윤단(尹慱)의 산정(山亭)이다. 공이 다산으로 옮긴 뒤 대(臺)를 쌓고, 못을 파고, 꽃나무를
열지어 심고, 물을 끌어 폭포를 만들고, 동쪽 서쪽에 두 암자를 짓고, 서적 천여 권을 쌓아놓고 글을 지으며 스스로 즐기며 석벽(石壁)에
‘정석(丁石)’ 두 자를 새겼다. 《주역》의 어려운 부분을 들추어 〈다산문답〉 1권을 썼다. 봄에 둘째 아들 학유가
방문했다......
정약용의 대부분 업적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고,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여러 이상적 개혁안을 제시한 것도 이
시기였다. 그 지방 학생들의 교육에도 열의를 보여서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는 틈틈이 많은 제자를 양성했고, 지방 문화 창달에도
기여했다
그가 '봄날 보은 산방에서 놀다(春日遊寶恩山房)' 시를 남긴다. 약초 싹은 비를 맞아 깨끗하고
/ 느릅나무 꼬투리는 봄이 짙어!보이네 철 물건을 보니 나그네 눈이 번쩍 / 절간 찾아 외로운 마음 달래보네 일공의 시가 붙어 있어
/ 난간 기대고 이렇게 읖조린다네
藥苗經雨淨 楡莢受春深 旅食驚時物 禪樓散客心 一公詩句在 凭檻有遙吟
다산은
보은산방(고성사 高聲寺 내 칠성각)에서 9개월을 머물게 된다. '보은 산방에 제하다(題寶恩山房)'의 제목으로 강진만이 보이는 곳에서 혼자
넋두리의 시를 읊는다.
우두봉 아래 있는 규모가 작은 선방 / 대나무가 조용하게 짧은 담을 둘러 있네 작은 바다 풍조는
낭떠러지와 연해 있고 / 고을 성의 연화는 산이 첩첩 막았어라 牛頭峯下小禪房 竹樹蕭然出短墻 裨海風潮連斷壑
縣城煙火隔重岡
둥그레한 나물통은 중 밥자리 따라다니고 / 볼품없는 책상자는 나그네 행장이라네 청산이면 어디인들 못 있을 곳이
있나 / 한림의 춘몽이야 이미 먼 옛 꿈이라네 團團菜榼隨僧粥 草草經函解客裝 何處靑山末可住 翰林春夢已微茫
유배중에 동천여사(東泉旅舍)에서 가르쳤던 제자 중에
황상(黃裳·1788∼1863)이란 제자가 있었다. 그가 읊은 시에 '차운하여 황상의 보은 산방에 부치다(次韻寄黃裳寶恩山房)'라는 시에는 자신의
일상을 현실감 넘치는 묘사가 돋보인다. 그것은 어릴 때부터 시재(詩才)에 뛰어나 사실적인 표현의 달인 스승 다산의
영향이었다.
사진=전남 강진군 월출산 아래 월하리 안운마을 일대 이담로(李聃老)의 별장 백운동원림을 초의선사가
백운동도(白雲洞圖)
찌는 더위 절로라도 가고 싶으나 /늙고 피곤해 재에 오르기가 무섭네 모기 벼룩이 극성스럽게 덤벼 /
여름밤이 어쩌면 이리도 길까 炎敲思走寺 衰疲畏陟嶺 蚊蚤恣侵虐 夏夜覺苦永 更深每發狂
밤이 길어지면 발광이 나서 / 옷을 벗고
우물에 가 목욕하면 시원한 바람 내 얼굴에 불어오지만 / 숲이 울을 막아 그게 불만이라네 생각하면 그댄 구름 속에 누워 / 뼈와 살이
차도록 쉬고 있겠지 解衣浴村井 長風吹我面 疏林觖藩屛 憶汝雲臥高 偃息肌骨冷
산석(山石) 황상(黃裳)은 시에 능통하고, 추사
김정희 선생님하고 교류할 정도로 학문의 조예가 깊었다. 다산이 과거시험을 권했으나 학문에만 전념한 처사로
남는다.
다산은 다산초당에서 지내기 너무 적적하였다.
천일각(사진:좌)을 지나 뒷산을 산책하다 덕유산(德裕山)자락 기슭에 강진만이 보이는 곳에 자리한 원래 만덕사 지금의 백련사에 자주들려 아암
혜장선사(1772~1811)와 친했다. 사월 십칠일 백련사에서 놀다(四月十七日游白蓮寺가 시를 읊는다.
초여름 많은 꽃다운 나무들이
/ 치렁치렁 고을 성을 둘러 있네 진하게 고운 빛 비 갠 뒤에 그렇고 / 처절한 것은 나그네 심정이로세 首夏多芳樹 葳蕤繞縣城
濃姸晴後色 悽切客中情
천천히 걸으면 말 타나 일반이고 /외롭게 읊조려 꾀꼬리 노래 화답하지 점점 더 넓은 골짝에 올랐더니
구름바다가 참으로 놀랍게 펼쳐 있네 緩步當高馬 孤吟和晩鶯 漸登山豁處 雲海儘堪驚
지친 몸 지팡이에 의지하고 / 천신만고 절 문간에 당도했네 골이 비어 늘
푸르른 윤이 나고 / 산이 둘러 쉬 황혼이 된다네 衰倦依筇杖 崎嶇到寺門 谷虛常翠潤 山合易黃昏
물을 뜨러 샘물 눈을 찾고 /
구름 보며 나무 뿌리에 앉았다네 아마도 밀물 때가 가까워오는지 / 창공 밖에 시끌벅적한 소리 들리네 㪺水臨泉眼 看雲坐樹根 秪應潮信近
空外有遙喧
사진=강진 백운동도
절 주위에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된 백련사의 동백림이 있는 봄날 백련사에 가
놀다[春日游白蓮寺]에 대해 또 이렇게 노래했다.
구름조각이 닦아냈는지 바다하늘 활짝 맑고 / 냉이밭에 나비들도 하얗게 훨훨
나는데 우연히 집 뒤의 나무꾼 길을 따라 / 드디어 들 머리 보리밭을 지나왔네 片片晴雲拭瘴天 薺田蝴蝶白翩翩 偶從屋後樵蘇路
遂過原頭穬麥田
바다끝에서 봄 만나니 나도 이제 늙나보다 / 외진 마을 벗이 없어 중이 좋은 걸 알았다네 때로 먼 산 바라보던
도연명 생각이 나서 / 한두 편 산경을 놓고 중과 함께 얘기했네 窮海逢春知老至 荒村無友覺僧賢 且尋陶令流觀意
與說山經一二篇
혜장선사와 다산의 교우를 통해 다산은 다도(茶道)의 경지를 익히게 되었고 이후 유배생활을 감내하는 동반자가 되었다.
그러나 다산에게서 학문적 가르침을 받았던 혜장선사는 다산보다 10살이 어렸지만 39세의 나이로 요절해 다시 외로운 고독인으로 남는다. '다시
백련사에서 놀다(再游白蓮寺)'에 그 외로움이 묻어 있다.
지팡이 끝에 딸그락딱딱 소리 내는 돌무더기 / 오솔길 가로질러 소매 가득
부는 바람 꾸부정한 물가 샘은 홈대 속을 흘러내리고 / 어지러운 대밭 속으로 소원의 문이 났네
수저에 감긴 물파래 푸르러서
그냥 좋고 / 장막에 비친 동백꽃 아직 몇 송이 남았어라 너희들은 벗이 있어 참으로 부럽구나 / 역동을 묻는 사람 지금은 세상에 없단다
筇枝鏗戛石叢叢 徑路斜吹滿袖風 曲碕泉出連筒內
小院門開亂竹中 水髮繞匙憐滑緣 山茶照帳惜殘紅 汝曹有友眞堪羨 今世無人問易東
다산이 가장 그리던 것은 같이 유배와 흑산도로 간 형이었다. 그 형을 그리며
마냥 그쪽을 바라보는 보습이 시에 고스라니 담아 있다.
사진=다산초당 좌측에 자리가고 있는 천일각
그의 다산문집에는
보은산 정상에 올라 강진현에서 북으로 5리 거리에 있음 우이도를 바라보며[九日登寶恩山絶頂
在康津縣北五里 望牛耳島] 최정상에 올라 서쪽을 바라보니 바다 속에 산들이 얽혀 있고
연운(煙雲) 사이로 보일락말락 하면서도 나주(羅州)의 여러 섬들이 대체적으로 눈앞에 역력하였다. 다만 어느 것이
우이도(牛耳島)인지 그 분간이 잘 안 되었다. 그날 중이 하나 따라왔었는데 그 중이 말하기를, “보은산(寶恩山)을 일명 우이산이라고도 하고 그
정봉이 둘 있는데 그것은 형제봉(兄弟峯)이라고 하지요.” 하는 것이었다.
나는 생각하였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면 그게
모두 우이산인데 그 봉우리 이름이 형제봉이라니 그 산 역시 자못 불우한 산이로구나. 그리 생각하니 서글픈 마음이 들어 돌아와 다음같이 읊어보았던
것이다.
나해와 탐진이 이백 리 거리인데 / 험준한 두 우이산을 하늘이 만들었던가 삼년을 묵으면서 풍토를 익히고도 / 土자산이
여기 또 있는 것은 내 몰랐네 羅海耽津二百里 天設巃嵷兩牛耳 三年滯跡習風 不省玆山又在此
흑산(黑山)이라는 이름이 듣기만 해도 으스스하여 내 차마 그렇게 부르지 못하고 서신을 쓸 때마다 자산(玆山)으로 고쳐
썼는데 자(玆)란 검다는 뜻이다.
사람 눈은 그 힘이 멀리 보지
못하여 / 백 보 밖의 얼굴도 분간을 못하는데 더구나 탁주 같은 안개구름 껴있으며 / 눈앞의 섬들도 자세히 보기 어려움에랴 人
眼之力苦不長 百步眉目已微芒 況復雲霾濃似酒 眼前島嶼猶難詳
먼먼곳을
실컷 본들 무슨 소용 있을 건가 / 괴로운 마음 쓰라린 속을 남들은 모른다네 꿈속에나 서로 보고 안개 속을 바라보다 / 눈 물커지고 눈물
말라 천지가 깜깜하다네 瓊雷騁望嗟何益 苦心酸腸人不識 夢中相看霧中望 目穿淚枯天地黑
다음 글에서는 지식인의 애환이
깊게 묻어나고 있다.
즐거운 일은 원래 순식간에
없어지고 헤어지며 문득 서로 만날 수 있기를 한하는구나 아득히 가련하다, 손님들 가고난 뒤 술통은 다 비고 낮은 집에 홀로 누워서 슬피 글을
읊던 공융이여 일찍이 글을 업으로 삼아 농사 대신 벼슬 하려 하였으나 지름길 잘못 찾아 근심의 성城에 들었구나 시골 늙은이는 항상 한가하고 여유
있는 것은 곧 평생에 고무래 정자도 모르는 무식 때문이로다
자신의
처신을 스스로 자학하고 있다. 정계의 끈이 풀린 선비의 고뇌에 찬 회후이다. 학문을 연구하고 글을 짓는 막간을 이용 두루 들러 시문를
남겼다. 다산은 단지 재능이 뛰어난 시인이 아니라 위대한 시인이었다.
그는 큰아들 학연에게 편지에 "폐족일수록 좋은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머릿속에 책이 5000권 이상 들어 있어야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느니라."적어 보냈다.
노자가 이르는 이런 충고를
그는 수 없이 암송했을 것이다.
곧으려거든 몸을 구부려라. 스스로는 드러내지 않는 까닭에 오히려 그 존재가 밝게 나타나며
스스로를 옳다고 여기지 않는 까닭에 오히려 그 옳음이 드러나며 스스로를 뽐내지 않는 까닭에 오히려 공을 이루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는 까닭에
오히려 그 이름이 오래 기억된다. 성인(聖人)은 다투지 않는 까닭에 천하가 그와 맞서 다툴 수 없는 것이다. '구부러지는 것이 온전히
남는다'는 옛말을 믿어라. 진실로 그래야만 사람은 끝까지 온전할 수 있다.
1818년(순조 18, 57세) 봄에 마침내 목민심서. 국조전례고(國朝典禮考) 2권이, 1819년(순조 19, 58세) 여름에
흠흠신서(欽欽新書)가 이루어졌다. 이 책의 처음 이름은 명청록(明淸錄)이었는데 후에 우서(虞書)의 “흠재흠재(欽哉欽哉)” 즉 형벌을 신중히
하라는 뜻을 써서 이 이름으로 고쳤다.
다산 그의 사명(笥銘)이 스치운다. 보상(임금의 예복)도 네가 간직하고 /
발석(도롱이)도 네가 간직하며 /말끔한 옷이라서 좋아하지도 않고 / 남루한 옷이라서 싫어하지도 않는다 / 黼裳唯汝 襏襫唯汝 毋襒ㅇ以喜
毋襤褸以苦
참고문헌=동국여지승람.다산시문집. 고전번역원/古典譯
문화.김은희/ nox91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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