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끝에 다녀온 일본 오이타현의 유후타케!!!
회장 최홍구
1. 일 시 : 2014. 5. 2(금) 19:20 ~ 2014. 5. 5. 18:15
2. 탐방지 : 일본 북큐슈 오이타현 유후타케 등산 및 유후인 관광
3. 산행코스 : 755m의 등산로 초입 ->고야고에(合野越)->마타에->서봉(1,583m)->동봉(1,582m)->마타에->고야고에를 거쳐 산행초입으로 원점 회귀 (11㎞ 정도, 탐방시간 4시간 47분)
4. 참석자 : 박양기, 정숙희, 최석용, 이준하, 이우득, 김흥식, 박유현, 이성군, 김병호, 윤내한, 김재곤, 송윤희, 김미성, 김미진, 신귀남, 김원섭, 고수정, 김지현, 최홍구, 김진습(가이드) 이상 20명
5. 탐방후기
긴장의 연속이던 일들이 현실로 나타났다. 작년 연말에 연간 산행계획을 수립한 뒤, 지난 1월부터 공들여 추진해 온 일본 북큐슈 오이타현의 유후타케 등산과 유후인의 온천관광이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뜻하지도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니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생기고 말았다.
4월 16일 오전 8시 40 여 분에서 부터 10시가 좀 넘는 시간 사이 인천에서 제주로 운항하는 세월호 여객선이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하는 참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여객선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는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을 비롯한 승객과 승무원 474명의 많은 인원이 타고 있었다.
배가 침몰하고 얼마되지 않아서는 일부 언론에서는 오보로 안산고 학생 전원 구조라는 보도와 함께 TV 화면에는 자막이 올라 다들 안도하던 한 숨도 한 순간이 되고 말았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해경 경비정과 구조 헬기, 인근에 조업을 하던 어선들이 속속 도착하여 조타실에 있던 선원들과 갑판 인근에 있던 승객 등 172명 만 구조되고, 나머지는 배와 함께 침몰하고 말았었다.
구조 과정에서 국가재난구조시스템과 관계자들의 허둥대는 모습이 언론을 통해 여과없이 전 국민에게 생생하게 생방송 되었다.
사고는 빠른 물살 지역에서 급격히 조타수(방향키)를 틀다 균형이 무너져서 침몰되었다지만, 승객을 많이 태우기 위해 갑판위를 여객실로 무리하게 증설하고, 또 규정보다 많은 짐을 싣기 위해 배의 균형을 잡아주는 균형수를 덜 채웠다니, 정말 기가 찰 노릇이다.
구조를 위해 해군 특수구조대, 민간구조사, 해양경찰 등 수많은 인력과 구조 장비가 도착했건만 배가 옆으로 기울어 넘어갈 때 구조된 사람들 외엔 하루 이틀이 가도 구조 소식은 감감 무소식이다.
언론과 방송에서는 해양전문가와 구조전문가들이 나와 연일 에어포켓이니 뭐니 하면서 격자로 가로 질러진 선실에는 공기가 남아 있을 수 있어 수몰된 실종자들이 살아 돌아올 수 있다며 구조의 희망을 놓지않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였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실종자 수가 사망자 숫자로 바뀔 뿐이고, 사고 엿새째가 될 때까지 실종자는 아직도 이백 십여 명이다.
살아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촛불염원이 경기와 서울지역에서 전국으로 번졌고, 모든 국민들은 실종자들이 하루빨리 가족의 품으로 무사히 돌아오기를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우리산악회에서는 이번 사고가 발생한 직후 처음 하루 이틀 동안에는 한 일주일 정도 지나면 사고가 어느 정도 수습될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구조 상황을 좀 더 지켜보도록 했다.
그러나 구조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어렵고 난항이 많았다. 살아서 돌아오는 실종자는 없었다. 어떻게든 하루라도 빨리 시신 수습이라도 했으면 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여러 날들이 지나가면서 그 염원도 또한 요원한 것 같았다.
이런 상황이라 우리 산악회로서는 고민에 안 빠질 수가 없었다.
특히, 올해는 우리 산악회의 창립(1984년 11월 25일) 3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로서 해외원정 산행과 30년사 회지 발간이 계획되어 있었고, 작년부터 해외 원정 기념 산행을 원하는 회원들의 희망에 따라 연간 산행계획을 수립하게 되었으며, 그 산행지는 일본 북큐수에 있는 오이타현의 유후타케로 최종 결정되었다.
지난 1월부터 참가회원을 모집한 결과 교육청 소속 직원을 포함하여 총 42명의 회원이 신청하였고, 이후에도 큰 무리없이 산행계획이 추진되었지만, 이번 사고가 발생한 다음 처음에는 한 두명 회원의 참가 포기를 시작으로 11명의 회원이 참가 포기의사를 보내왔다.
그리고, 사고 일주일이 되는 날부터 교육부를 비롯해 교육청에서도 연가나 외유성 해외여행을 자제하고 비상연락체계 확립에 만전을 기하라는 공문이 계속 오고 있었다.
우리는 산행 계획 변경과 포기 등 만일에 대비해 연기와 포기를 염두에 두고 여행사에 양해를 구했으나, 여행사에서는 펄쩍뛰었다. 그렇게 할 수는 없단다.
우리가 산행하기로 계획한 일정이 일본의 황금연휴와 일치하고, 당초 숙박업소와 여객선 승선권 확보를 위해 선수금까지 주며 어렵게 확보했단다. 그리고, 우리의 산행이 팩캐지 상품이 아니고 우리 산악회의 자체 기획 상품이다보니 위약금 또한 만만찮았다. 원정 산행이 무산될 시에는 1인당 이십만원 가량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소한 16명 이상이 되어야만 위약금이 1인당 십만원으로 가능하다고 했다.
날짜는 계속 흐르고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사이 참가를 포기하는 회원들이 계속 늘어갔다. 꼭 가려던 사람들마저 상황이 어렵다며 빠지겠단다.
이와 반대로, 일부 회원(9명)들은 꼭 가야겠다고 야단이다. 이번 산행일정이 무산된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하며, 그에 따른 변상을 요구하는 회원까지 있었다. 또 포기한 회원들로 인해 산행 경비가 늘어날 경우 그 경비를 포기한 회원들에게 변상토록 요청하였다.
6월 말로 명예퇴직을 신청한 이우득 고문은 오랜 공직생활을 등마루와 함께 마지막 해외산행으로 마무리를 하고 싶다며, 당초 계획대로 추진하기를 강력히 희망하면서 요청하였고, 참가를 포기하는 회원 대신 친구 분을 새로이 동참시키기도 했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란에 빠져 참으로 난감하였다. 현재의 사회 분위기로서는 공직자로서 해외 원정산행을 간다는 것이 많은 무리가 따랐다.
생각다 못해 위약금 문제와 원정산행을 원하는 회원들을 위해 소수의 인원이나마 가기를 희망하는 회원들만이라도 갈 수 있도록 계속 추진하기로 했다.
그러자, 당초 참가를 신청했다가 포기한 많은 회원들이 원정산행 연기나 취소를 요구하고 나섰다. 다음에 다시 계획을 세워 추진하잔다.
특히, 손순희 회원과 김재곤 회원은 희망하는 사람들만 간다고해서 집행부에서 동참을 하지 않을 리가 없다면서 산행 추진을 극구 반대를 하였다.
손순희 회원은 다른 회원들은 가더라도 현재 시교육청에 근무하고 있는 나에게는 동참하지 말라는 것이다.
김재곤 회원도 나와 산악회 임원들이 빠지고 공무원이 아닌 순수하게 민간인인 일반 회원만 다녀오겠다는 것이다. 산악회 카페에도 일본 특별산행을 취소한다고 게시해 달라고까지 부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희망하는 회원들만 보낼 수는 없었고, 더더군다나 카페에 거짓으로 원정산행을 취소한다고 올릴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참가 회원들에 대한 보호와 책임을 다하기 위해 산악회 임원이 동행하기로 결정했다.
대부분의 임원들은 세월호 참사로 인한 사망자와 실종자를 애도하는 분위기라 참가를 꺼렸다. 그러나 우리 산악회의 핵심 임원인 박유현 산행이사, 이준하 남부이사에게 같이 가기를 강력히 요청하고 설득했다. 며칠간 고민 끝에 두 사람은 마지못해 승낙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나를 비롯한 임원 4명을 포함해 15명의 회원만 참여키로 했지만, 참가자의 경비가 당초보다 십만원 가까이 올라갈 실정이었다. 참가하는 회원에게 부담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김재곤 회원의 노력으로 경비를 많이 낮출 수 있었다.
당초 5월은 가정의 달이라 오래 전부터 두 딸과 부부가 함께 참여키로 한 김재곤 회원은 5월은 어버이날도 있고 해서 본인의 어머니를 추가로 모시고 가겠다고 했고, 또 부인인 송윤희 회원은 후배 가족 3명을 섭외해 총 19명(공무원 6명, 일반인 13명)이 참가하게 되었다.
두 사람 덕분에 다행이 우리 15명은 1인당 3만원만 추가로 부담하면 되었다.
5월 2일(첫째 날)
드디어 가이드를 포함 총 20명의 회원이 유후타케 원정산행을 떠나게 되었다.
가족 이외는 아무도 모르게 추진하게 했다. 출발날이 근무하는 날이라 나는 집사람에게 오후 6시까지 교육청 앞으로 짐을 챙켜 오도록 부탁하였다. 퇴근하기가 무섭게 양정로터리 인근 차안에서 등산복으로 갈아입고 전철을 이용해 중앙동역에서 하차하여 다른 회원보다 1분이라도 빨리 도착해야 겠다는 일념으로 서두르다보니 하나로 교통카드가 떨어진 줄도 모르고 국제여객선터미널에 가고야 말았다.
국제여객선터미널 1층 카멜리아 여객선 매표소 앞 도착(18:40)하니 김재곤 회원 가족을 제외한 참가자 모두가 벌써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퇴근하고 온다고 무척 바빴다나.
우리는 서로 인사를 하고 가이드와 미팅을 하는 사이 김재곤 회원 가족이 도착(19:15)했다. 잠시 후 출국수속을 밟기 위해 2층 출국심사대로 올라갔다. 심사를 받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집사람에게 잘 다녀오겠다는 전화를 하려고 휴대폰을 꺼내보니 폰에 달아놓은 하나로카드가 보이지 않는다. 호주머니를 다 뒤져봐도 없다. 1층 대합실까지 내려가 찾아봐도 흔적이 없다. 아마도 지하철 출구를 빠져나면서 사용한 다음 호주머니에 넣는다고 넣었는데 카드가 떨어져 나갔나보다. 정말 아깝다. 충전된 금액의 잔액이 6만 여원이나 남아 있었는데...
출국수속을 마치고 7시 50분에 카멜리아 여객선에 올랐다. 우리가 일본에 도착할 때까지 이용할 선실은 309호다. 19명이 다 들어가는 넓은 방이다. 꼭 학창시절 수학여행 가서 이용했던 널찍한 여관방 같다.
선실 창쪽에는 안쪽으로부터 박양기 교장샘 부부, 김재곤 가족, 최석용 회원, 나, 김병호, 윤내한 사장 순으로 자리를 잡았고, 맞은편 복도쪽에는 게스트 김원섭 회원 가족, 이준하, 박유현, 이성군, 이우득 고문 및 친구 등 남자 회원 순으로 자리를 잡고 짐을 풀었다.
8시 10분 선내 식당에서 흰쌀밥과 쇠고기국에다 깍두기 김치, 무말랭이무침, 실멸치뽁음의 저녁식사였는데, 집에서와는 달리 조금 늦은 저녁시간과 시장기로 인해 다들 밥과 국을 비롯해 반찬을 더 가져와 저녁을 맛있게 먹었고, 반주로 시원소주를 곁들었다.
식사를 끝내고 선실로 돌아와서 회원들은 휴식을 취하거나 씻기 위해 선내 목욕탕을 찾았다.
밤이 무르익을 즈음 남자회원들은 선실에서 화합의 소주잔에 귀를 기우리다가 잠을 자는 회원들을 위해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나와 박유현, 김병호, 윤내한, 이성군 회원은 로비에 있는 테이블로. 선실에는 모두가 잠을 청하고 있어 혹시 모를 소지품 분실 등을 대비 선실 출입문을 열쇠로 잠그고 나갔다.
처음엔 준비해 간 4홉짜리 시원소주로 시작했는데, 김병호 회원이 선내 매점에서 아사히 캔맥주와 다꼬야끼(오뎅), 감자튀김을 사와 소주와 맥주를 섞은 소맥으로 한잔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로 즐겁운 시간을 보내고는 밤 1시 반경에 선실로 돌아오니 선실에서는 야단이 났던 것이다. 화장실을 이용하려는데 선실 안에서는 출입문이 열리지 않은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여객선에는 비상시를 대비해서 밖에서 잠그면 안에서는 문을 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몸 둘 바를 몰랐고, 죄송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다들 이내 깊은 꿈나라로 빠져들었다.
5월 3일(둘째 날)
아침 5시 선실내 전등이 자동으로 켜졌다. 일찍 잠자리에 든 회원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든 사이, 여객선은 어느새 하카다항에 정박하고 있었다.
6시 반부터 선내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메뉴는 밥과 쇠고기미역국, 붉은새우조림, 마늘줄기뽁음, 깍두기김치.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짐을 챙겨 하선을 준비했다.
7시 30분부터 하선을 해 입국수속을 밟는데, 우리는 7시 40분 선실에서 나왔다. 하선을 하고 입국수속을 하는데 시간이 너무 지체됐다. 사전에 입국신고서 등 제출서류를 모두 준비했는데도 입국수속을 마치는데 45분이나 걸렸다. 입국수속이 빠른 우리나라와는 너무 대조적이다.
하카다항 국제여객선터미널을 빠져 나온 우리는 버스에 올라 첫번 째 목적지인 태재부천만궁 신사로 향했다.(08:38)
태재부천망궁으로 이동하는 중에 가이드는 후쿠오카의 대표적인 음식은 라면이고 하카타 라면이 유명하단다. 그리고, 일본은 관광활성화를 위해 2005년부터 무비자로 입국이 가능하단다. 그 이후부터 늘어나는 우리나라 관광객은 말할 것도 없고.
도로에는 중형차는 거의 보이지 않고 대부분 경차다. 차는 반드시 주차장이 있어야 구입할 수 있단다. 교통범칙금은 우리나라의 3배 정도이고, 과속은 속도에 따라 차등 부과된다나.
우리가 찾은 이때가 일본의 황금연휴기간이라 태재부천만궁 신사가 있는 태재부로 가는 길은 고속도로 정체가 예상되어 일반 국도를 이용했는데 국도도 차가 많아 시간이 많이 걸렸다.
9시 22분경에 태재부천만궁 신사 주차장에서 내려 15분 정도 걸어서야 신사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가이드로부터 태재부천만궁 신사에 대한 설명을 간단히 들었다. 이 신사는 학문의 신인 스가와라 미치자네를 모신 신사로 공부를 잘하게 해달라고 빌거나 염원하는 곳이란다.
우리는 이곳에서 11시까지 자유시간을 갖기로 했다. 각자 자유롭게 신사를 한바퀴 둘러봤다.
때마침 신사의 본전에서는 승려들이 입장하여 의식행사를 치루고 있었고, 이곳을 방문한 수많은 사람들이 질서있게 줄을 서서 차례차례로 신사 앞에서 두 손을 합장하여 절을 하고 있었다. 신사 오른쪽 건물에서는 기념품과 부적같은 물품들을 팔고 있다. 신사 경내 곳곳에는 명패를 걸어 놓은 건물이 있는가하면 경내 곳곳에는 종이에 소원을 적어 꽂아놓는 건물들이 있다.
신사 오른쪽에는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놀이터(유원지)가 위치하고 있다. 이른 시간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가족단위로 놀이터에 입장하기 위해 길게 줄을 지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사 정문 맞은편 저만치 떨어진 언덕 위엔 외벽이 유리로 건립된 웅장한 현대식 건물이 있다. 바로 후쿠오카 역사와 유적을 전시해 놓은 후쿠오카박물관이다.
나를 비롯한 남자회원 몇명는 유원지 입구를 지나 박물관 건물까지 걸어가 보기로 했다. 박물관으로 가는 길은 거리가 꽤 되었고, 찾는 이들의 편리를 위해 터널을 뚫어 무빙워크와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해 놓았다. 에스컬레이터를 지나 박물관 입구에서 지나 온 곳을 보면 입구만 건물로 보이고 중간부분은 나무와 숲으로 덮여있어 산으로 착각될 정도다.
박물관 건물은 크고 웅장했다. 우리는 한정된 시간으로 인해 박물관 1층 로비에서 전시장 입구와 건물 구경하고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박물관 입장료도 꽤 높은 편이라는 게 가이드의 설명이다.
박물관 건물을 나와 마을 통해 다시 천만궁 신사 경내로 들어와서 신사 본전 뒤 만날 장소에서 기다리다 11시가 돼서 신사 후문 쪽에 있는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도시락과 우동으로 이른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난 뒤 버스에 올라 일본 100선 중의 하나이며 높이 85m에서 초당 1톤의 낙수를 자랑하는 히가시 시야노 폭포가 있는 아지무로 향했다. 이때가 11시 51분이다.
가는 도중 가이드는 일본의 3대 맥주가 아사히, 삿뽀로, 기린 맥주라고 하며, 그 중에 아시히 맥주가 가장 유명하다고 한다.
2시 5분 히가시 시야노 폭포 주차장에 도착했다. 5~600m를 10분 정도 걸어 들어가니 폭포가 나타났다. 초당 1톤의 낙수는 수량이 풍부할 때 말인 것 같다. 우리가 찾은 이날은 폭포의 수량이 너무 적다.
때가 때인 만큼 폭포가 시작되는 지점에 태양이 떠 있어 역광이라 사진 찍기에도 쉽지가 않다.
그래도 우리는 폭포를 배경으로 개인과 단체사진을 찍었다. 아쉽게도 폭포에 먼저 올라와 감상한 이준하, 김흥식 회원과 박양기 교장샘의 지갑을 찾는다고 먼저 내려간 교장샘 사모님은 함께 단체사진을 찍지 못했다. 다행히 교장샘의 지갑은 차안에 떨어져 있어 찾을 수 있었다.
우리는 폭포를 감상하고 2시50분에 뱃부로 향했다.
오후 3시 12분 유노하나(유황의 꽃) 재배지인 묘반온천에 도착했다. 이곳엔 우리들 외에도 많은 한국인 관광객이 있었다.
유황을 채취하는 과정과 시설들을 둘러보면서 열심히 사진들도 찍었다. 이곳에 오면 온천열기로 삶은 계란을 꼭 맛봐야 한다기에 가족끼리 삶은 계란을 사 먹는 회원도 있었지만, 고맙게도 윤내한 사장이 회원들을 위해 삶은 계란을 구입해 우리들에게 맛보도록 해 주었다. 나는 2개씩이나 먹었다.
이곳에서 30분 가량 둘러보고 5시 45분경에 가마도 지옥온천이 있는 뱃부로 출발했다. 묘반온천에서 뱃부로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지만, 차가 많이 막히고 정체가 극심하다. 시기가 일본 골든워크이고 뱃부의 온천지대 지옥온천 순례객이 많다보니 차가 정체된단다.
참 신기한 점은 일본은 국민성이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질서를 잘 지키는 국민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관광지나 관광지 인근 도로에서 차가 막혀도, 또 좁은 틈새로 다른 차들이 끼어들어도 절대로 경적을 누르지를 않는단다. 아무리 많은 시간을 도로위에서 서있고, 많이 정체되도 기다려 준다고 한다. 이날도 도로위에서 수십분을 기다리며 서있으면서도 다른 차들이 끼워 들려고하면 여차없이 끼워 주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꼭 배워야 할 정신문화인 것 같다. 우리가 북큐슈 일대를 다니는 동안 경적을 울리거나, 차가 끼워들려는 할 때 안 끼워주는 적은 없었다.
일설로는 옛날에 차를 몰고 가는데 야쿠자 조직원이 몰고가는 앞차가 꾸물거린다고 뒤차가 정적을 눌렸더니, 앞차에서 건 장한 야쿠자 조직원들이 내려 총을 쏴 즉사시킨 후부터는 정적을 울리지 않았다고 한다.
4시 반이 가까이 돼서야 가마도 지옥온천에 도착했다. 가마도 지옥온천에서는 50분간 관람하기로 했다. 가이드를 선두로 정해진 관람코스를 따라가며 가마도 지옥온천 직원의 담배연기 쇼도 관람하고 족욕을 하기도 했다.
나와 몇몇 회원은 가마도 지옥온천을 구경하고 먼저 나와서 인근 구시가지를 돌아봤는데, 귀신지옥온천을 비롯해 갖가지 많은 지옥온천들이 개발되어 있었지만, 지나다니는 자동차만 없다면 80년대에서 발전이 멈춰버린 듯한 아름답고 소박한 소도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문득 2년 전에 다녀간 아소산에 위치한 자연과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아소팜빌리지가 생각났다.
가마도 지옥온천을 구경한 우리는 뱃부 시내 건어물 등 해산물을 파는 해선시장에 있는 창작해선요리전문점 화해선(華海鮮)에 도착했다(17:26)
식사는 밥과 서너점의 회와 우동, 튀김 등 밑반찬이 제공된 간단한 일식이다. 보기에는 양이 턱없이 부족할 것 같은데, 추가로 음식을 시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나와 두 서너 사람만이 공기밥을 추가했다.
식사를 마치고 버스로 40분 정도 달려 오이타에 있는 코모도호텔에 도착했다.(18:42)
말이 호텔방이지 배정받은 호텔방은 작아도 너무 작다. 아무리 땅값이 비싸고 작은 것을 실용적으로 사용한다는 일본이지만, 침대를 제외하면 겨우 사람이 지나갈 정도의 공간밖에 없다.
그나마 온천을 할 수 있는 사우나는 새벽 4시부터 밤 11시까지 사용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짐을 푼 뒤 나와 박유현, 이준하, 이성군 회원은 시내투어를 나갔다.(21:10)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을 중심으로 왼쪽 뒤편에는 오이타역(어느 지역이나 역을 중심으로 도시가 발달한다고 하지만 특히 일본이 더 그런 것 같다)이 자리잡고 있고, 역 맞은편 길건너 중앙에는 현대화한 우리나라 재래시장과 비슷한 대형 아케이드가 위치하고 있었고, 대부분의 가게는 영업시간이 밤 10시까지란다. 10시 이후에는 아케이드의 빈 공간을 이용해 인디밴드들이 자리를 잡고 공연을 한다고 했다.
우리가 갔을 때는 9시가 넘은 늦은 시간이라 상점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으며, 몇몇 술집과 오락실이 영업을 하고 있었고, 군데군데 인디밴드가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케이드 인근 시내를 한바퀴 둘러본 우리는 호텔 옆 마트에서 아사히와 삿뽀로 캔맥주를 구입해 호텔방에서 한잔을 하고 내일을 위해 잠을 청했다.
5월 4일(셋째 날)
오전 6시 기상 콜이 전화기를 세차게 때렸다. 얼른 일어나 사우나로 올라가니 벌써 씻고 내려가는 회원도 있다. 아침식사는 7시부터 호텔부페로 했는데, 나는 산행할 때 먹으려고 처음엔 달걀 1개만 챙겼다 나중에 3개를 더 챙겼는데, 처음체 행긴 하나는 삶은 달걀이고 나중에 챙긴 것은 생달걀로 산에 가져가보지도 못하고 깨지는 불행이 생기고 말았다.
8시 30분이 지날 무렵 호텔에서 유후타케로 향했다.
오이타에서 유후인으로 가는 고속도로는 시원스레 달리는가 싶더니 유후인 톨게이트를 빠져나오면서(09:10) 유후인으로 가는 길이 가다서다를 반복한다. 어제 보다도 더 심하게 막혀도 너무 막혔다. 참 연휴로 인해 유후인을 찾은 차량들로 차도는 주차장으로 변했다.
톨게이트에서 유후인 주차장까지 도착하는데 23분이나 걸렸다. 유후인 주차장 인근에 우리가 산행할 동안 유후인을 관광할 게스트로 참석한 김원섭씨 가족 세 사람을 내려준 다음부터는 차가 정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후다케산은 일본 최고의 온천수로 유명한 오이타현 유후인의 외곽에 위치한 1천m이상 산들이 우뚝 솟아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 중 북동쪽에 있으며, 후지산에 이어 일본의 두 번째 명산으로 꼽힌다. 또, 가깝게 보이고 갑자기 높아지는 산세가 알프스산맥의 스키 리조트나 강원도의 험준한 국립공원과 사뭇 그 느낌이 다르다. 특히 산이 마을을 아늑하게 둘러싸고 있으며 노천탕 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유후다케 풍경은 평화로움 마저 느낄 수 있다.
9시 47분에 유후타케 초입 주차장에 도착하여 산행준비를 마친 뒤, 단체사진을 찍고 9시 58분에 산행을 시작하였다. 등산로 입구에는 스틱 대용으로 대나무 지팡이가 비치되여 있었다. 사용했다가 산행이 끝나면 제자리에만 갔다놓으면 되는 찾는 이들을 배려하는 고마움이 배어 있었다.
우리는 산행코스로 755m의 등산로 입구를 출발하여 고야고에(合野越)와 마타에, 서봉(1,583m)에서 동봉(1,582m)을 거쳐 마타에와 고야고에를 거쳐 산행초입으로 원점 회귀하기로 했다.
산행하기 전에 멀리서 바라본 유후타케는 산표면에 나무가 없고 마치 매끄럽게 잔디를 입혀 논 것처럼 우리나라 왕릉처럼 보이는 푸른 동산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산행을 시작하고 이내 느낀 것은 나무와 식물들이 우리나라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많이 다르고, 등산로는 오르는데 불편함이 없게 산세에 따라 지그재그로 만들어 놓아 힘은 많이 들지 않았지만, 화산재로 인해 간혹 미끄러지기도 하고 용암이 굳은 화산석으로 걷기에 좋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쓰러진 나무를 치우지 않고 자연 그대로 둔다거나 등산로를 안내하는 비표도 우리나라와는 달리 군더더기 없이 나무줄기에 빨간 테입만 감아 표시하는 것이 특이했다.
산행을 시작하자 마자 이내 화장실과 휴게장소가 나오고 여기서 25분 정도 올라가면 나오는 표고 1,025m 지점이고, 이곳에서 잠시 한숨을 돌리고 한시간 정도 올라가면 동봉과 서봉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이 나온다.(11:28) 갈림길 아래서부터 조그만한 꽃몽오리를 맺은 철쭉들이 산 정상까지 촘촘하게 들어차 있고, 꽃이 필려면 2~3주일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앞서 간 이성군 회원이 서봉을 오르고 있었다. 나도 박유현 회원과 같이 서봉으로 향했다. 서봉은 공룡의 비닐같은 암릉에 쇠사슬이 설치된 구간이 있고, 동봉에 비해 다소 위험하지만 유후다케의 산행의 백미가 있는 것 같다. 11시 39분 드디어 세사람이 서봉 정상(1,583m)에 섰다.
올라갈 때는 몰랐는데, 서봉 정상에서 바라본 유후인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전원도시 그 자체다.
유후타케는 동쪽으로는 뱃부, 남쪽으로는 오이타, 남서쪽으로는 유후인이 위치해 있고, 유후타케 동, 서봉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원형 겹겹히 펼쳐지는 루른 산들로 쌓인 도시들과 아름다운 풍경들이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 주고 있다.
산 정상의 분화구 주위를 돌아볼 수 있지만 평소에는 날씨가 좀처럼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네요. 하지만 우리가 찾은 이날은 날씨마저 우리를 도와주었다.
동봉과 서봉의 가운데는 분화구로 움푹 파여 있었는데, 백두산 천지와는 달리 물은 고여있지 않았다. 우리는 서봉에서 북쪽으로 해서 분화구 능선을 타며 동봉으로 향했다. 서봉에서 동봉으로 가는 등산로는 바위를 오르는 등 산행의 묘미가 배가 되고 흥이 절로 나는 멋진 길이다.
12시 20분 동봉 정상(1,582m)에 도착했다. 정상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데, 이우득 고문과 친구분 김흥식 회원이 도착했다. 우리는 같이 기념사진을 찍고서는 동봉과 서봉 갈림길로 내려와 서전에 주문한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었다.(12:40)
점심을 먹고 난 뒤 곧바로 하산(12:58)하기 시작했다. 내려오는 길은 올라가는 길보다 훨씬 쉬웠다.
올라갈 때 1시간가량 소요되던 1,025m표고까지 35분만에 내려왔다. 이 지점부터 길은 떨어진 나뭇잎과 나무들이 부서져 흙에 섞여 마치 스폰지 마냥 푹신한 오솔길로 감촉도 좋았고 걷기에도 편했다.
내려오는 길에 윤내한 사장은 가져온 막걸리를 산행 초입 휴게소에서 먹자고 해서 13시 45분에 먼저 내려와 아무리 기다려봐도 감감 무소식이다. 2시가 다되 내려온 이우득 고문은 뒤에서 같이 내려오던 사람들끼리 중간에서 먹어 치웠단다. 일본에서도 막걸리를 한잔 먹어보나했더니만 먹을 복이 없었다.
주차장에 내려오니 2시 10분이다.
먼저 내려온 김재곤 회원은 산행초입에서 기다린 모친과 함께 나무밑에 자리를 펴고 쉬고 있었다. 같이 앉아 쉬는 사이 회원들이 하나둘 내려왔다. 최석용, 이준하 회원을 마지막으로 모두가 산행을 마치게 되었다.(14:45)
14시 52분 주차장을 출발하여 유후인으로 향하여 10분도 채 안 걸리는 거리인데도 유후인에 가까워질수록 아침과 마찬가지로 차가 많이 막힌다. 겨우 3시 12분에 유후인 주차장에 도착했다.
유후인과 킨린코 호수를 둘러보기 위해 16시 30분까지 자유시간을 가졌다.
푸른 숲으로 둘러쌓인 초록마을 유후인은 동서 8km, 남북 22km의 작은 온천마을로 전통민가와 농가를 개조한 료칸과 음식점이 많고, 아름다운 호수 긴린코가 있어 멋진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있었다. 유후인역에서 긴린코호수까지의 약 11km 정도의 유노츠보 거리는 `여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온천마을`이라는 타이틀이 있단다. 옛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소박한 거리의 가게들은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풍경은 아니다. 여러 미술관과 작은 갤러리, 공예품과 악세사리, 빵, 먹거리 가게와 마을을 도는 마차와 전통인력거꾼은 전통과 문화가 잘 조화된 마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유후인에 오면 반드시 맛보아야 할 음식이 있단다. 그건 바로 벌꿀아이스크림(380엔)과 고르게(160엔)와 오이꼬지(150엔)란다. 김재곤 회원 가족은 음식은 음식대로 맛보고 악세사리를 구경한다고 20여 분이나 늦게 나타나기도 해 4시 52분에야 출발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도 흥청망청 마시고 즐길 곳만 개발할 것이 아니라 유후인과 같이 특색있는 문화를 컨텐츠로 관광지와 상품을 개발해야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전날 저녁을 해결했던 뱃부의 창조해선요리전문점 화해선(華海鮮)에 도착한 시간이 17시 50분이다. 이곳까지 오는 길역시 아침처럼 유후인 인근을 지날 때까지 극심한 교통체증이 있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18시 25분에 출발하여 오이타에 있는 코모도호텔에 도착하니 19시다.
몸을 씻고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시내투어를 하기로 했다. 오늘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아케이드를 거쳐 오이타역사를 한바퀴 둘러보았다.
오이타 역사에는 수퍼와 각종 상점, 식당들이 즐비해 있고, 우리나라의 복합 상업시설과 다름없었다. 역사 중앙에는 벤치가 마련되어 있었고 우리는 잠사 그곳에서 쉬었다 돌아오는 길에 호텔 인근 야끼도리 주점을 찾았다. 주점을 찾았으나 말과 글이 통해야 말이지, 그러나 다행이 김병호 회원이 서투른 영어로 안주는 신청하지 못하고 맥주만 신청해 한잔하고는 돌아올 수 있었다.
호텔로 돌아와서는 박유현 회원의 방에 모여 일본에서 마지막 밤의 아쉬움을 소주로 달래고 하루를 마감했다.
5월 5일(넷째 날)
6시에 기상콜로 일어나 마지막 온천을 위해 사우나를 했고, 7시 호텔 부페에서 식사를 한 뒤 귀국을 위 짐부터 꾸렸다. 후쿠오카로 8시에 출발하기로 하였지만 모두가 일찍 내려와서 7시 50분에 호텔을 떠나게 되었다. 우리가 탄 버스는 고속도로를 1시간 40분 정도 달리다 키야마 휴게소에서 25분 정도를 쉬었다 출발했다.
후쿠오카에 도착하면 면세점을 들리도록 했는데, 버스를 타고 후쿠오카로 가는 도중 가이드는 상품광고에 열심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에 여행왔다 사 가는 제품은 균이 잘 묻어나지 않는다는 세라믹 칼, 정확한 성분과 함량을 표시한 화장품, 그리고 건강에 도움을 주는 게르마늄 팔찌와 목걸이가 인기라나.
10시 15분 하카타 타워 앞 주차장에 도착했다. 먼저 면세점을 들른 다음 수족관과 하카타 타워를 자유롭게 관람하기로 했다.
회원들은 면세점에 들려 구경만 하는 사람과 선물을 사는 사람들로 나뉘었다. 나는 세월호 사태로 인한 애도분위기로 같이 참가하지 못한 집사람을 위해 뭘 살까하고 한참을 망설이다. 때마침 일본 엔화의 환율이 낮아 게르마늄 목걸이와 팔찌, 그리고 아이들과 친지에게 줄 선물용 빵을 3개를 샀다.
쇼핑을 마치고 하카타항 수족관을 구경하고, 하카타 타워에 올라 하카타항 전경을 구경하기도 했다.
11시 20분에 하카타 국제여객터미널로 출발한 버스는 5분 만에 도착해서 곧바로 여객선에 승선했다.
입국 때와는 다르게 출국은 너무 빠르게 승선권만 들고 여객선으로 들어가면 되었다.
선실에 짐을 풀고 잠시 후 12시 10분부터 점심식사를 했는데, 메뉴는 흰쌀밥에 오랜만에 우리의 입맛을 일깨워 주는 얼큰한 김치찌개다. 밑반찬으로는 팥조림, 깍두기, 새우뽁음도 있었지만, 김치찌개가 얼마나 맛있는지 한 그릇을 더 먹었을 정도다.
선실로 돌아온 뒤 회원들은 조용히 휴식을 취하거나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데, 이우득 고문의 친구분인 김흥식 회원이 고스톱이나 치면서 시간을 보내잔다.
김사장과 나, 김병호, 윤내한, 이성군 회원이 참여했다. 김흥식 회원은 실력도 좋았고 운도 따랐다. 처음부터 끝까지 장원을 했던 것이다. 나는 게르마늄 목걸이와 팔찌를 산다고 현금을 사용하다보니 잃을 돈이 없어 삼만 몇천을 잃었지만, 돈이 있었다면 정말 끔찍할 정도였을 것이다.
고스톱을 치다보니 오후 5기가 넘었고, 여객선은 어느새 부산항에 접안하고 있었다. 우리는 고스톱을 멈추고 하선을 준비했다.
순서를 기다려 모두가 하선하니 18시 15분이다. 게스트 김원섭 회원 가족과 김재곤 회원 가족은 먼저 떠나고 없었다. 하선을 하자마자 대부분의 회원들은 집으로 바로 가기를 원해 공식적인 행사 종료를 선언하고 해산을 하기로 했다.
중앙로로 나오는 길에 김흥식 회원은 고스톱 장원을 축하하는 의미로 가까운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가잔다. 하지만 중앙동 일대에는 사무실이 많고 공휴일인 어린이 날이다 보니 영업을 하는 식당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부산역 인근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이성군 회원은 걸어가는 도중에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결국 김흥식, 이우득, 박유현, 이준하, 나 다섯명이 부산역 인근 돼지국밥을 찾았다.
국밥에 소주를 곁들여 원정산행에 있었던 얘기들을 나누다보니 8시가 다 돼어 헤어지기가 아쉽지만 아쉬움을 뒤로하고 자리를 파하게 되었다. 6월초 한라산 정기산행 때 꼭 함께하자며 약속을 하며 우리는 헤어졌다.
원정 산행을 다녀온 이후의 일들
5월 15일 교육청 출입 정보관이 우리 산악회의 일본 원정산행을 제보받았다고 교육청으로 연락이 왔다. 며칠동안 나의 해명과 김안경 행정국장님과 유재중 국회의원님의 도움으로 이 문제를 제보 확인 선에서 간신히 해결하기로 했다. 교육청 간부들께서도 다른 기관의 문제제기 등 다른 일들이 없다면 덮어주겠다고 했다. 한숨이 놓였다.
이것으로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5월 29일 외근 중에 권영식 공보담당관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국제신문의 우리 교육청 출입기자가 우리 산악회의 해외 원정산행 건을 제보 받았다며 기사화하겠다고 한단다. 원정 산행팀 중 곧 서기관으로 승진할 회원이 있는데, 이 세월호 참사 판국에 해외여행을 가는 게 맞느냐고 하면서. 하늘이 노랬다.
나는 담당 기자를 만나려고 했다. 하지만 기자는 만나주지 않았다. 나는 공보담당관에게 산악회 사정을 설명하고 잘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출근해 공보담당관에게 진행사정을 물으니 아직까지 부탁하고 있는 중이란다. 이날도 직접 기자에게 해명을 하려고해도 담당기자는 오후 2시까지 얼굴을 나타내지 않았다. 기사화가 되지 않도록 공보담당관에게 또 부탁했다. 나중에 공보담당관이 기자에게 부탁하니, 기사를 쓸 경우 반드시 사전에 연락을 하겠다고 약속했단다.
나는 공보담당관 말을 믿었다.
그런데, 6월 2일 월요일 아침 출근하니 동료 직원들이 우리 산악회 관련 기사가 신문에 보도됐다고 했다.
신문스크랩을 보니 정말로 "세월호 애도기간 교육공무원 외유"란 제목하에 '부산시교육청 전,현직 16명 지난달 3~6일 일본여행 다녀와' 기사가 국제신문 사회 10면에 보도가 된 것이었다.
기사를 보는 순간 머리가 하해지고 아무 생각이 없었다.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나지만 같이 간 임원들은 어떻게 할 지? 갑자기 걱정이 엄습해 왔다. 하지만 어쩌하랴 운명의 화살은 이미 내 손을 떠났으니 기다려 보는 수밖에.
그런데, 공무원과 관련된 사항이 언론에 보도되면 반드시 국무총리실에서 모니터링하고 해당부처로 처리결과를 보고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교육부에서 연락이 왔다며, 6월 9일 감사관실 이유정 사무관이 일본 원정산행에 참가한 공무원들의 경위서를 제출해 달란다. 나는 우리의 사정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경위서를 작성한 다음, 이번 원정산행에 참가한 동료들에게 참고하라고 보내주었다. 동료들은 자기 사정에 맞게 경위서를 작성하여 보내왔다.
문제는 경위서 제출은 반드시 어떠한 처분이 동반되기 때문에 걱정이 많이 되었다. 나는 나지지만 함께한 동료들이 우선 걱정이 되었다.
해당부서에서는 무거운 처분은 없지 않겠느냐고 했지만, 윗분과 의논과정에서 '책임을 져야하는 사람이 있어야 되지 않느냐?'는 의견이 나왔다는 것이다. 처분은 회장인 나를 제외한 임원들은 가장 낮은 등급으로 처분하고, 나는 그 위의 처분으로 하라는 것이다. 물론 동료들은 다행이지만 나는 그 처분을 받는다면 인사이동은 물론 애쓰고 있는 승진은 요원한 것이었다.
직접 찾아가 설명을 드리고 선처를 부탁드렸다. 그래도 안된다고 해서 계속 선처를 빌었다. 비는 내가 애처로웠는지 마침내 다음날 아침 참모회의 때 의논을 한번 해 보시겠단다. 나는 즉시 행정국장님께 보고를 드렸다. 그리고, 교육국장님, 정책기획관님에게도 그간의 사정을 설명드리고 도움을 요청을 했다. 두 분께서도 너무 가혹하다고 하시면서 참모회의 때 이야기를 잘 해보겠다고 했다. 다음날 아침 8시가 되기전에 일찍 출근하여 교육감님을 직접 만나뵙고 보고를 드리며 사정을 설명드리니, 동호회에서 사적으로 실시한 행사이니 크게 걱정하지 말라며 오히려 위로해 주셨다. 그래도 참모회의가 어떻게 흘러갈 지 모르기에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행이 참모회의 결과가 좋았다. 상위부서인 교육부와 의논을 잘한 다음 모두에게 동일한 처분을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정말 고마웠다. 세 분의 국장님과 교육감님, 그리고, 담당부서인 감사관실 이유정 사무관과 허수인 주임이 너무 고생이 많았던 것이다. 정말 고마웠다. 도와주신 모든 분! 정말 고맙습니다!
앞으로 이분들의 고마운 마음을 가슴에 새기면서 직장 동호회로서 건전한 직장분위기 활성화에 한층 더 노력할 것을 다짐해 본다.
그리고, 등마루산악회 창립 30주년 기념 일본 북큐슈 유후타케 산행에 참석해 주신 회원님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첫댓글 산행후기를 읽어 보니 그 동안 동호회를 이끌어 오면서 고생도 많으셨지만, 이번 일로 심적 고통이 심하셨을거라고 생각됩니다.
회장님의 결단이 있었기에 계획된 예정대로 잘 된것 같습니다.
잘 마무리 되셨다니 또한 안도가 됩니다.
고생많으셨습니다.
우리 회원들은 회장님의 노고 덕분으로 즐거운 산행을 합니다.
항상 힘내시고 등마루를 위해 화이팅 하시기 바랍니다.
격려를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을 비롯해 등마루에 애정을 갖고 함께 하신분들 맘고생 참 많이 하셨습니다.
아마 좋게 이해되지 않겠습니까? 힘 내시고 등마루를 위해 모두 마음모아 화이팅 한번 외쳐 봅시다.
감사합니다. 총무이사님 토욜날 산에서 봅시다.
오늘 학교 시험날이라 조용한 가운데 오랜만에 카페에 들어오니 그동안 파란만장한 사연들이 올라 있네요~ 집행부의 고민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것 같습니다. 저번에도 회장님께 말씀드렸지만 해외원정산행이든 국내산행이든 당초 신청했던 인원의 50%이상회원들 또는 참가자가 취소의사를 표시할경우 제로베이스에서 검토한다는 원칙을 세워놓는것도 좋을것 같습니다. 그러면 집행부의 부담도 줄게되고 참가하지 못하는 회원들의 미안함과 부담도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고생 많으셨습니다. (산행에 자주 참석하지 못하지만 등마루를 사랑하는 맘은 변함없으니 저가 글 올렸다고 너무 나무라지 말아주시길 ~~^^:)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주소가 울산으로 되어있어서 누군줄 몰라 모(?)씨에게 물어보기까지 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