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紳士)의 나라 영국(Great Britain)
영국 전도(全圖) / 영국 국기(國旗/Union Jack)
스코틀랜드 국기 / 잉글랜드 국기 / 아일랜드 국기 / 웨일스 문장(紋章)
1. 영국 개관(槪觀)
영국의 국토면적은 약 24만 ㎢로 우리나라 남한 면적의 2.7배, 인구는 6천 7백만 정도이며 수도는 런던(London)이다. 인종구성은 잉글랜드 80%, 스코틀랜드 10%, 아일랜드 2.4%, 웨일스 1.9%이고 언어는 영어, 켈트어, 게일어가 통용된다. 종교는 영국성공회가 50%, 로마가톨릭이 11%, 개신교 및 기타 39%이며, 1인당 국민소득은 4만 4천 달러(USD) 정도이다.
<1> Great Britain과 United Kingdom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에 걸쳐 살던 고대 원주민 켈트족은 기원전 50년경 로마군(라틴족)의 침입, 곧이어 유럽민족인 앵글로-색슨족의 침입을 겪으며 차차 웨일스(Wales/남서부), 아일랜드(Ireland/서쪽의 섬), 스코틀랜드(Scotland/북부), 잉글랜드(England/중부와 남동부)로 나뉘어 국가 형태를 갖추게 된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웨일스(1536), 스코틀랜드(1707), 아일랜드(1801)를 통합하여 대영제국(Great Britain/ GB), 일명 유나이티드 킹덤(United Kingdom/UK)으로 부르는 『연합왕국』이 되었다. 그러다가 1922년 아일랜드가 독립전쟁을 일으켜 독립하게 되는데 북아일랜드(Northern Ireland)는 종교문제로 영국연방으로 남았다.
<2> 아일랜드(Ireland) 독립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씨앗은 1845년부터 1852년까지 7년간 아일랜드 지방을 휩쓸었던 감자 역병으로 인한 대기근(Great Famine)이 있었는데 영국 대지주들의 무자비한 착취로 아일랜드인들은 수많은 아사자(餓死者)를 내었고 전염병까지 겹쳐 나라는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영국인 대지주들은 아일랜드인들이 세금을 내지 못하자 그들을 강제로 내쫓았고 쫓겨난 그들은 벨파스트(Belfast)에 있는 빈민구제기관으로 몰려들었다. 아일랜드 전역에서 굶주린 사람들이 벨파스트로 몰려들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길거리에서 굶어 죽거나 전염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아일랜드인들은 지금까지도 당시 영국인들의 착취와 횡포에 뿌리 깊은 원한을 품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영국을 통상 잉글랜드(England)라고 부르지만, 잉글랜드 이외, 특히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 지역의 사람들은 매우 싫어하며 지금까지도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소수의 과격한 세력들이 있다고 한다.
<3> 홈 네이션(Home Nation)
잉글랜드에 통합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는 홈 네이션(Home Nation)이라 부르며 현재도 자치정부, 자치의회, 자치수도를 가지고 있을뿐더러 고유의 언어, 종교, 문화를 가지고 있다.
웨일스의 수도는 카디프(Cardiff/ 웨일스어로 Caerdydd), 스코틀랜드는 에딘버러(Edinburgh), 북아일랜드는 벨파스트(Belfast/아일랜드어로 Béal Feirste)이고 잉글랜드 수도는 당연히 런던(London)이다.
현재의 영국 국기(Union Jack)를 보면 각 나라의 국기들을 조합해서 유니언 잭이 되었는데 웨일스는 당시 문장(紋章/붉은 용)만 있었지 국기가 없어 포함되지 못했다고 한다.
2. 수도(首都) 런던(London)
파리에서 런던으로 가는 방법은 유로스타가 있지만, 너무 비싸서 반값인 비행기로 갔는데 도착공항이 런던에서 훌쩍 떨어진 루튼(Luton) 공항이다. 공항버스를 타고 런던 빅토리아 지하철역까지 가서 다시 런던 써클라인(Circle Line)으로 갈아타고 숙소를 찾아 나섰다. 우리 숙소는 메트로(Metro) 베이스워터(Bayswater) 역에서 그다지 멀지 않아 걸어갈 수 있었는데 제법 괜찮은 숙소였다.
운이 좋았다고 할까, 런던에 사는 고향 후배와 연락이 닿아서 다음날 후배의 안내로 런던 시내를 고생도 안하고 골고루 구경할 수 있었고, 저녁에는 멋진 중국집에서 정통요리를 대접받아 흐뭇하고 고마웠다.
<1> 트라팔가르(Trafalgar) 광장(廣場)
넬슨제독 기념탑 / 트라팔가르 광장 분수대 / 넬슨기념탑 둘레의 사자상
런던 시내 가운데 있는 트라팔가르 광장은 원래 윌리엄 4세 광장이라고 불렸으나 1805년 넬슨 제독이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나폴레옹 군을 격파하고 전사한 후부터 트라팔가르 광장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광장 가운데에는 56m 높이의 넬슨 기둥이 우뚝 솟아있고 그 맨 위에는 5m의 넬슨 동상이 올려져 있다. 또 동상 둘레에 4마리의 거대한 청동 사자상이 있는데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나폴레옹 군으로부터 빼앗아 온 전리품 중 나폴레옹 군의 대포를 녹여서 만든 것이라는데 보기보다 사자가 엄청나게 크다. 시원한 물을 뿜어대는 광장 가운데의 분수대는 시민들의 좋은 휴식처가 된다. 우려했던 것보다 날씨가 비교적 좋아서 영국여행 내내 기분이 좋았다.
<2> 버킹엄 궁전(Buckingham Palace)
황실 근위병 열병식 / 버킹엄 궁전 / 궁전 앞 황금 천사상
버킹엄 궁전은 현재 영국 엘리자베스(Elizabeth II) 여왕이 살고 있는 궁전이다. 건물이 화려해 보이지는 않지만, 왕궁 앞 광장이 굉장히 넓고 주변의 울창한 숲과 연못 등이 눈길을 끈다. 마침 군악대 나팔소리가 들리기에 왕궁 앞으로 달려갔더니 마침 황실 근위대의 열병식이 있어 모여든 관광객들의 카메라 세례를 받고 있었다. 저 왕궁 위에 깃발이 꽂혀있으면 여왕이 있고, 여왕이 외출하고 없으면 깃발을 내린다고 한다. 지금은 있는 모양인데 무엇을 하고 있을까?? ㅎ
<3> 웨스트민스터 대성당(Cathedral)
웨스트민스터 대성당(Cathedral:로마 가톨릭)
웨스트민스터 가톨릭 대성당은 19세기 후반에 건립되어 1903년 봉헌되었으니 이제 100년 남짓 역사가 있는 건물이다.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진 이 건축물은 영연방 잉글랜드와 웨일스 지역 로마가톨릭 성당의 중심 역할을 한다고 한다. 높이가 87m라는 벽돌 탑은 빨간 벽돌에 하얀 돌을 수평으로 줄을 그리듯 장식되어 있어 눈부시게 아름답다.
<4> 웨스트민스터 성공회 사원(Westminster Abbey)
부근에 있는 성공회의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을 한국 사람들은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아서 로마 가톨릭 성당(Cathedral)과 성공회 사원(Abbey)을 혼동하기도 한다.
영국 성공회가 처음 생긴 역사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숨어 있다.
◐ 못된 왕 튜더왕조의 헨리 8세
1534년, 영국 튜더(Tudor)왕조의 국왕 헨리 8세(Henry VIII)는 왕이 되기 위해 형수인 캐서린과 결혼한다. 그러나 아들을 낳지 못하자 아름답고 총명했던 시녀 앤 불린(Anne Boleyn)과 결혼하는데 그녀 또한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 엘리자베스를 낳는다.
엘리자베스가 3살이 되었을 때 또 다른 시녀였던 제인 시모어(Jane Seymour)가 더 예뻐 보였는지 시모어와 결혼하기 위해 앤에게 억울한 누명(불륜설 등)을 덮어씌워 런던탑에 감금하였다가 사형에 처하고.... 이후에도 수많은 이혼과 결혼(8번)을 반복하지만, 결국 아들을 얻지 못한다.
헨리 8세는 형수인 캐서린과의 이혼, 앤과의 결혼과 이혼, 제인과의 결혼 등이 교회법으로 허용되지 않아 로마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당하자 성공회를 만들어 자신이 수장이 되고 이 모든 것을 합법화한다.
이렇게 급조된 교단이 성공회(聖公會)인데 결국 영국 국교(國敎)가 되고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을 이단으로 몰아 화형 시켰으며 개신교 신자(청교도/淸敎徒:Protestant)들은 박해를 피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신세계)으로 떠나게 된다.
웨스트민스터 성공회(聖公會) 사원(Abbey)
헨리 8세가 성공회 건물로 지정한 건물은 11세기 성 베드로(St. Peter) 성당이었던 건물로, 13세기 헨리 3세가 현재의 고딕(Gothic) 양식의 건물로 개축하여 수도원으로 사용되었는데 역대 영국 국왕들의 유해를 모시고, 또 왕들의 대관식을 올렸던 유서 깊은 건물이다.
◐ 영화 1,000일의 앤
1969년, 영국 찰스 재로트(Charles Jarrott) 감독이 제작한, 주제곡이 너무나 아름다운 영화 『천일의 앤(Anne of the Thousand days)』을 기억하고 계시는지....
그 영화의 비극의 주인공이 바로 앤 불린이다. 앤 불린이 낳은 엘리자베스는 후일 ‘영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왕, 해가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발판을 닦은 여왕, 어학과 문학 분야에서 천재성을 번쩍인 영국의 자랑.....’ 바로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1533~1603)이다.
◐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엘리자베스 1세는 어린 시절부터 천재성을 발휘했는데 7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였고 12살 때 시집을 냈으며, 스페인 무적함대와 결전을 앞둔 영국 해군들에게 한 연설은 지금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가슴을 울리는 명연설로 꼽힌다고 한다. 『나는 내가 연약한 여자의 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왕의 심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잉글랜드 국왕의 심장을 말입니다.』
1588년 4월, 영국은 무적함대로 일컬어지던 스페인의 아르마다 함대와 치열한 해상전투가 벌어지는데 이른바 ‘아르마다 대회전(Armada Encounter)’으로, 스페인이 동원한 전함은 120여 척으로 알롱소 구즈만(Alonso de Guzmán)이 총사령관이었고, 영국은 전함 200여 척이었으며 찰스 하워드(Charles Howard)가 총사령관이었다. 전함의 숫자로 보면 영국이 더 많았다고 할 수 있지만 전함의 크기나 전투능력에서는 영국이 훨씬 열세(劣勢)였다고 하는데 우여곡절 끝에 영국이 승리를 거머쥐게 되고 5대양(五大洋)의 해상권을 거머쥐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1805년에 와서 영국의 넬슨제독(Horation Nelson)은 스페인 트라팔가르 곶(Cabo Trafalgar) 앞바다에서 당시 무적함대라 일컬어지던 스페인 함대를 또다시 격파하여 명실 공히 세계 해상권의 주도권을 거머쥐게 되는데 이것이 트라팔가르 해전으로, 런던의 트라팔가르 광장에는 우뚝 솟은 기둥 위에 넬슨제독의 동상이 서 있다.
이후 영국은 인도를 포함하여 세계의 1/4에 해당하는 대륙을 점령하고 해상권을 재배하게 된다.
엘리자베스 1세는 3살이 되기도 전에 어머니(앤 불린)를 잃었고, 국가와 결혼했다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처녀 여왕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가 12살 때 펴냈던 시집에 실린 이 작품이 너무도 유명하다고 한다.
On Monsieur's Departure(임은 떠나는데)
I grieve and dare not show my discontent, I love, and yet am forced to seem to hate.
나는 애통해하지만 감히 불평을 드러내지는 못합니다. 나는 사랑하지만 아직도 미워하는 척하려고 합니다.
I do, yet dare not say I ever meant, I seem stark mute but inwardly do prate.
나는 아직도 내 마음을 감히 말하지 못합니다. 나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지만 속으로는 끝없이 재잘거립니다.
I am and not, I freeze and yet am burned, Since from myself another self I turned.
내자신으로부터 또 다른 자신에게로 돌아서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면서도 아니고, 얼어붙었으면서도 아직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어린 시절부터 천재성을 발휘했는데 7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였고 12살 때 시집을 냈으며, 스페인 무적함대와 결전을 앞둔 영국 해군들에게 한 연설은 지금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가슴을 울리는 명연설로 꼽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