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화
《호흡명상》의 진실
《호흡명상》이란 나와의 전쟁이며, 나와의 대화를 통한 화해(和解)다.
《호흡명상》이란 언어가 지구 곳곳에서 회자되고 있다. 특히 작금에 와 서 불 교 적인 계통에서 대세를 이루고 있다.
실제로 <호흡(呼吸)>이란 몸 밖에서 산소를 흡입하여 몸 안의 물질을 산화하고 그 결과로 생긴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며, 숨을 내쉬거나 들이 쉬는 행위를 말한다.
또한 <명상(冥想)>이란 눈을 감고 차분한 마음으로 깊이 생각에 잠기는 행위를 뜻한다.
이와 같이 『마음결을 고르는 명상』과 『숨결을 고르는 숨쉬기』는 따로 떼어 놓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호흡과 명상이 우리의 삶과 건강에 어떤 관련이 있을까? 이에 대한 진실에 접근해 보자.
▩ <호흡>에 대한 올바른 이해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호흡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었다”는 의미는 호흡을 멈추었다는 말과 같다.
그러면 <호흡(respiration)>에 대한 진실을 추적해 보자.
일반적으로 <호흡>이라하면 생물이 물질을 산화 또는 분해하여 생활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획득하는 작용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호흡 운동의 양식으로는 ‘흉식’, ‘복식’, ‘흉․복식’ 호흡이 주종을 이뤄왔다.
그래서 생리학적으로 호흡근, 호흡중추, 호흡색소, 호흡량, 호흡 율 등의 개념이 정리되었다. 이와 함께 호흡의 과정을 생리학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 폐 속으로 공기의 이동
2) 폐에서 혈액으로 산소를 전달
3) 혈액에 의해 온 몸의 세포로 산소를 운반
4) 세포에 의한 산소의 이용과 이산화탄소의 생산
5) 혈액에 의해 이산화탄소를 폐로 운반
6) 혈액으로부터 폐로 이산화탄소를 전달
7) 폐에서 외계로 공기를 내 보냄
이 과정에서 세포에 의한 산소의 섭취와 이산화탄소의 배출과정을 “내호흡”이라 하고, 폐와 혈액사이의 산소와 이산화탄소의 교환을 “외호흡”이라고 한다.
인체에 있어서 이와 같은 서양 과학적 분석방법이 유효한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호흡의 근본적인 정의나 원천적인 기능을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호흡은 단순한 생리학으로 접근하여 밝혀질 수 없는 그 무엇 즉 <신비성>을 내포하고 있다. 신비성이란 나의 내면세계에 이미 존재하는 「신성(神性)」을 말한다.
아무튼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음식물을 섭취해야 되듯이 숨을 쉬지 않고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사실을 누구나 다 알고 있으면서도 숨쉬기가 생명연장의수단일 뿐만 아니라 신체의 모든 기능 기관들과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등한시한다.
이러한 「숨쉬기」와 「마음(의식)」과의 역학관계는 더욱 중대한 기능성을 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숨쉬기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제대로 골라야 한다는 사실도 간과한다.
그런즉 『마음결을 고르는 명상』과 『숨결을 고르는 숨쉬기』는 따로 떼어 놓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생명운동 측면에서 보면, <호흡, 숨쉬기>란 생명체가 만들어지면서부터 줄곧 이어져가는 생명운동이다. 생명운동에는 내면적 운동과 외향적 운동,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그런데 호흡은 이 두 가지 운동에 연결고리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통합적 운동을 예인한다.
그러면 <숨쉬기 운동>을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까? 이를 위해서는 첫 단계로 “숨결과 숨길 고르기”에 이르는 <조식법(調息法)>을 익혀야 한다.
우리는 마음결이 곱다는 표현을 곧잘 사용하곤 한다. 이는 한 사람의 성품과 성질과 성격이 아름답고, 착하며, 진실하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마음결을 가지고 있듯이 몸에는 살결이 있으며, 기운 결이 있고, 또한 숨결이 있다. 이와 같은 마음결-살결-기운결-숨결이란 근본적으로 <기의 흐름>의 다른 표현이다.
『중국철학사전』을 보면, “기는 만물을 생성하는 근본이 되는 바”라고 적혀있다. 또한“현상을 현상 그 자체로서 인식하는 태도”라고 되어있다.
고대 지나(China)의 철인으로 꼽히는 <장자(莊子)>는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기가 모이는 것이요. 취합하는 것이며. 기가 모이면 사는 것이고, 그 기가 흩어지면 죽는 것이다.”라는 얘기도 있다. 또한 그는“온 세상을 통틀어서 한 기운뿐이다.”라고 했다.
현대과학에서 우주 구성의 본질은 자기장이라고 한다. 이 자기장의 출렁임에 의해 자기파가 발생하고, 이의 합성으로 새로운 MSF((Magnetic Wave Synthetic Body Field, 자기파합성체장)가 형성된다. 이의 결이 전자기파로 표출될 뿐이다.
그래서 감각되는 MSF는 물질로 느껴지며, 감각할 수 없는 MSF도 무한히 존재한다. 이와 같은 MSF를 신과학에서는 기(氣)로 본다.
요컨대, 생체와 물체는 에너지 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에너지 장은 자기파합성체장이다. 따라서 물질의 바탕이 자기장, 곧 기(氣)라면 이것의 조절로 물질의 창조와 소거는 가능할 수 있다.
사실상 현대과학에서 <김(氣, 기)>을 「에너지」라고 확정적 의미로 본 지는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특히 서양의술에서는 아직까지도 <기>의 실체에 대한 확고한 해석적 입장이 없다.
그러나 동양적 사유체계 속에서 <기>는 만물 또는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로서 물질의 근원이며 본질이라고 규정한 지가 오천년을 훌쩍 넘었다.
그런고로 모든 존재현상은 기의 취산(聚散), 즉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데 따라 생겨나고 없어지는 것이며 따라서 생명이나 생명의 근원으로 보게 된 것이다.
예컨대, “이 산세(山勢)는 기가 세다”라고 할 때와 같은 형세·기운·조짐, 그리고 양생(養生)과 관련하여 신체상의 생명력·힘·정기 및 생체에너지 등의 뜻으로도 쓰인다.
이러한 전통적 의미는 조선조 퇴계, 율곡의 유가(儒家)에서 이(理)의 존재와 대치되는 개념으로 기를 다루면서 정착되었다.
모든 존재의 원인 또는 이치로서 형이상(形而上)의 보편자를 <이(理)>라 하고, <기>는 형이하(形而下)의 구체적인 개체의 존재현상으로 취급하여 『이기(理氣)철학』의 중요개념으로 다루어졌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네 고대조선시대의 『오제․오령론(청- 적- 황- 백- 흑제와 태목- 태화- 태토- 태금-태수 설)』에서 비롯되어 지나(支那, China)로 넘어가 한(漢)국 시대의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기의 이론이 복잡하게 전개된 것이라 여겨진다.
그 후, 우주자연의 운행인 천문 지리, 그리고 양생(養生) 의학 및 길흉화복과 관련되는 일상생활에 까지 <기>를 적용하여 모든 것을 설명해 나갔다.
현재까지도 <기>에 대한 개념은 우리 실생활 속에서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 이를테면, 한의학적 개념으로 기는 생명과 생체의 활동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물질이라고 본다. 그래서 기의 발생에 따라 크게 선천지기(先天之氣)와 후천지기(後天之氣)로 나눈다.
선천지기는 태반을 통하여 생겨나고, 후천지기는 태어난 뒤에 호흡의 기와 음식물에서 받는 기가 합쳐져서 진기(眞氣) 또는 원기(元氣)·정기(正氣)가 작용한다. 따라서 기가 있는 부위와 역할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눈다.
오장 육부에 있는 기를 해당 장기의 이름을 붙여서 간(肝)·신(腎)·심(心)·비(脾)·폐(肺)·위(胃)·담(膽)기(氣)라고 한다.
이 외에 중초(中焦, 가슴부위))에 있는 기를 중기(中氣), 경락에 있는 기를 경기(經氣)라고 한다. 또한 병인(病因)의 역할을 하는 기를 사기(邪氣)라 하는데 사기는 한기(寒氣)·습기(濕氣)·열기(熱氣)·화기(火氣)·조기(燥氣) 등으로 나누어 본다.
시중에서 우리가 호흡을 배울 때 김(氣)을 단전(丹田)에 모은 다든가, 임․독맥(任․督脈)으로 돌린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단전은 여러 경혈(經穴)중에 한군데를 지칭하는 것이요, 임․독맥은 12경락(經絡) 8기경(奇經)중에서 두 경맥에 속해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인체는 에너지 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인체내부의 12경락과 8기경이란 에너지의 통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인체란 실제로 어떻게 구성되어있는 것일까?
동양의학에서 우리 몸은 12경락 8기경 360혈(穴)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본다.
경락은 오장육부(五臟六腑)의 반응이 몸 거죽에 나타나는 경로를 말하는데, 이러한 경락에 있는 수혈(腧穴)을 경혈이라 한다. 수혈은 침을 놓거나 뜸을 뜨는 자리, 즉 일체의 침구치료혈(鍼灸治療穴)을 말한다.
경혈은 경락의 체표순행노선(體表循行路線)에 분포된 혈 자리의 총칭으로, 12정경(十二正經)의 경혈과 기경8맥(奇經八脈) 중의 임맥(任脈)과 독맥(督脈)의 경혈을 합하여 14경의 경혈로 이루어진다.
한편, 경혈은 오수 혈(五腧 穴:井·滎·兪·經·合) 중의 경혈을 지칭하기도 하는데, 오수 혈은 모두 무릎과 팔꿈치 이하에 있으며, 전신의 12경락에 각각 5개씩 모두 60혈이 있다.
1988년 미국의 의사, <리차드 거버(Richard Gerber)> 박사가 인체의 신비를 에너지 개념으로 풀어 의학계의 베스트 셀러가 된 『Vibrational Medicine』에서 저자는 한국의 <김 봉한>의 이론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경락들은 크기가 보통 현미경으로 볼 수 있는 수준 이하의 크기여서 전자현미경이 개발된 최근에 와서야 관찰이 가능하게 되었다. 거기에다 경락은 생명활동의 근본으로서 생체가 죽을 경우 소멸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의 사체(死體)를 갖고 실험해 온 서양의 해부학은 당연히 경락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프랑스의 연구자 <피에르 드 베르나쥴>도 1985년의 논문에서 인체실험을 통해 <김 봉한>의 연구를 증명하였는데, 그는 방사성 테크니튬 99mg을 경혈에 주입하고 감마카메라로 추적하여 경락의 실재를 확인한 바 있다.
<김 봉한>은 경락에 흐르는 생명 에너지, 즉 기는 절대로 모호한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분명하게 검증할 수 있는 물리적·화학적 실체라고 보았고, 오랜 연구 끝에 그가 내린 기의 실체는 ‘고 에너지의 화학물질’과 ‘전기’였다.
고 에너지의 화학물질이라 함은 경락 속을 흐르는 액체를 말하는데, 경락 속의 액체를 검출하여 분석을 해 보니 DNA 같은 생명 발현물질과 아드레날린(부신에서 생기는 교감신경 호르몬으로서 심장마비 환자에게 직접 수사될 정도로 강력한 자극촉진제), 히알루론산(남자의 정액 속에 다량 존재하는 다당류 무질), 에스트로겐 같은 고 에너지 성분들이 있었다.
이 물질들의 양은 혈액과 임파 액을 포함한 인체 내의 중요한 어떠한 액체 속의 양보다도 훨씬 많았다. 경락 액은 생명을 창출하고, 성장시키며, 활동시키는 에너지였던 것이다. <김 봉한>은 경락이 장기 조직의 모든 세포핵과 연결되어 있다고 결론지었다. 경락이 세포 증식의 중추인 세포핵과 연결되어 있어서 생명 발생 및 성장을 주관한다는 뜻이다.
<김 봉한>은 경락이 태아 발생 어느 단계에서 형성되는지 관찰해 보기 위해 몇 종의 동물을 살펴보았다.
병아리는 품은 지 15시간 내에 경락관이 형성되었다. 어떠한 기본적 기관도 형태를 갖추기 이전에 경락이 공간적으로 그리고 방향적으로 선도하여 각 기관들을 형성시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음에 경락 밖을 흐르는 기가 전기적 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김 봉한> 연구팀뿐만 아니라, 최근에 침술을 연구하기 시작한 서구의 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는 경락을 흐르는 <기>가 “생명의 근본적인 에너지”라는 설명을 뒷받침한다. 따라서 질병을 다스릴 때 무엇보다도 먼저 경락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었다.
질병은 경락이 막히는 데서 일어나는 현상이므로 그 차단된 경락들을 강력한 기-파워로 다시 개통시켜주면, 마치 햇볕을 만난 곰팡이 균처럼 질환 자체가 빠르게 소멸해 버리는 현상을 발견한 것이다.
경락의 존재에 대해 <김 봉한>처럼 체계적이고 구체적으로 밝혀낸 학자는 없다. 지금 미국과 독일·프랑스·일본의 학자들은 <김 봉한>의 경락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동안 동서양의 많은 의학자들이 경락체계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연구를 진행해 왔으나 초정밀고해상도의 전자현미경까지 동원해 경락의 존재를 확인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아직 눈으로 볼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나름대로 의미 있는 진전은 있었다.
1960년대 초 독일의 <폴>박사는 경혈이 피부의 다른 부위보다 전기전도성이 높다는 점을 발견했다. 또한 경혈들이 제각기 내부 장기의 기능과 연관돼 있어 경혈의 전기적 상태를 측정하면 장기가 건강한지 여부를 알 수 있다는 점을 밝혔다. 만일 장기 기능에 이상이 생겼다면 경혈에 적절한 전기자극(전기침)을 가함으로써 치료가 가능하다는 점도 입증했다.
레이저 침으로 경혈에 자극을 가한 후 인체의 자기장을 측정한 결과 자기장이 30-50배나 상승했다. 자극의 형태가 전기이든 자기이든, 또는 광 에너지(적외선 혹은 레이저)이든 경혈을 통해 일단 들어가면 몸에서 자기장에너지로 바뀐다는 뜻이다.
인간의 신체부위 계는 기관계의 각 기관으로서 각 기관은 독립적으로 동작하면서도 기관 계 내의 다른 기관들과 연계성이 있고 또한 다른 기관 계와 상호 의존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인간의 몸도 기계론적으로 생각하여 인간 신체를 부분적으로 분해하는 요소 환원주의적 해부학이 서양의학을 석권해 왔다.
기계는 바깥 세계의 변화에 천편일률적인 대응밖에 할 수 없다. 그러나 생명체는 부분이 독자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서양의학이 인간의 생명체를 부분으로 분해하는 것은 생명을 바로 이해하는 태도라 할 수 없다.
인간 생명체는 기계적이 아니고 유기적이기 때문이다. 부분으로 분해하는 자체가 유기체적 생명을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스러운 일은, 1920년대에 과학사에서는 획기적으로 여태까지의 우주관 전부가, 구체적으로 말해 지금까지 쌓아올린 근대과학의 존속 자체가 정면으로 위협받게 되었던 것이다. 물질의 최소단위라고 여겨지던 원자와 그 원자의 내부를 이루고 있는 아원자의 세계를 연구하게 되면서 물리학자들은 전에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현실을 접하게 된다.
「현대과학과 리더십(마가렛 휘틀리)」이라는 책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을 만나게 된다. “생명은 제 스스로 창조에 앞장선다.
생명자체를 창조하는 능력은 「자생(autopoiesis)」이라는 낯선 이름으로 불린다. 자생은 스스로를 창조하고 새롭게 하며 성장 변화하기 위한 생명의 근원적인 과정이다.
생명계는 모든 과정이 또 다른 모든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연결망이다. 전체 네트워크는 함께 참여하여 스스로를 생산해낸다. 이 과정은 한 가지 형태의 유기체에만 국한되지 않고 생명자체를 설명한다.”
여기서 기술하고 있는 ‘생명의 창조’, ‘자생은 생명의 근원적 과정’, ‘생명계의 연결망’이라는 생경한 구절을 만나면서 생명체인 인간의 영혼과 육신의 운동시스템과 메커니즘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숙고하게 된다.
기실 영혼과 육체에 대한 많은 의문은 아직도 산적해있다. 부연하면, 의학, 과학, 철학, 신학의 혁혁한 진화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해답과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날 엉성하게 보이는 동양적 세계관에 대한 관심이 날로 늘어가고 있는 현상은 이채롭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동양의 사고와 사유 그리고 성찰이라는 범주 안에서, 인간의 몸에 대한 동양의학의 접근은 우주와 연관 지어 소우주라는 관점이 지나(支那, China)의 의철학(醫哲學) 체계에 의해 주조를 이루어 왔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동의보감(東醫寶鑑) 등 우리의 의서들이 황제내경(黃帝內徑), 상한론(傷寒論)과 같은 지나의서(醫書)의 주조를 이루고 있는 우주관을 차용함으로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견이며, 편견이다. 실제에 있어 한민족의 의학은 동양의학과 구별 지을 수 없는 유사성을 배제 할 수는 없지만 동양 속에서도 지리, 역사, 환경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해 보았을 때 동양적 체계 안에 포함시키기에는 이질적인 성향이나 근본적 가치체계의 차이가 너무도 많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호흡이란 통상 들숨과 날숨의 한 주기(週期)의 반복됨을 말한다. 이 같은 숨쉬기는 인간이나 동식물에 있어서도 목숨과 직접적인 관계로 얽혀져있으며, 생물자체의 존재가 생(生), 장(長), 소(肖), 멸(滅)의 과정을 진행하는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된다.
또한 숨쉬기에 의한 김(氣)의 드나듦은 생리적 현상으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백과의 교감(交感)으로 인체의 생명에너지를 규준(規準)하게 된다. 여닫이라는 언어가 있다. 열고 닫는다는 말이다. 나 들 목이라는 말도 있다. 나가고 들어오는 길목이라는 뜻이다. 여닫이와 나 들 목 같은 숨쉬기는 들숨과 날숨의 각기 3단계로 구분 지어 볼 수 있다. 즉
인납(引納) - 당겨서 들이 쉼
대납(代納) - 갈아들임
순납(循納) - 쫓아서 들임
선출(旋出) - 돌려보냄
사출(謝出) - 물러나감
배출(排出) - 내쉬어 헤침
의 과정을 밟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침없이 밟아나가는 숨쉬기를 “순도납출(順途納出)”이라고 하며, “순도식(順途息)”이라고도 한다. 이 과정에서 <납출>에는 생명에너지의 밝고 어둠의 도수(度數)가 얹어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말의 뜻을 알겠는가?
들숨과 날숨의 드나듦에는 생명에너지가 얹혀 다닌다는 말이다. 이러한 생명에너지는 밝음과 어두움이 섞기여 있다. 여기서 밝음과 어두움이란 바로 맑고(청함), 흐린(탁함) 김을 이르는 말이다. 이 같은 호흡을 고르는 조식(調息)법은 세련된 요령과 명상이라는 또 하나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조식법에는 앞에서 언급한 <순도납출>만 있는 것이 아니다. <폐기회도(閉氣會度)>와 <역도출납(逆途出納)>, <역도식(逆途息)> 등 호흡의 방법에 따라 김(氣)의 발현(發顯) 양상이 달라지는 조식법도 있다.
요컨대 숨쉬기는 몸(身)과 마음(心)과 김(氣) 그리고 영과 혼과 백의 상호관계를 조율하는 고리 역할을 하는 지극히 소중한 운동이다. 이 같은 숨쉬기의 우리 말 표현이 있음에도 시중의 호흡, 명상도장에서 쓰이는 지나(China) 식 언사는 수정되어야 마땅하다.
아무튼 <조식(숨결과 숨길고루기)>을 함에 있어 우리 민족전통의 핵심은 "자연스럽게, 절로 절로 제절로" 라는 방식에 있다.
모든 행위를 억지로 해서는 안 되며 순리를 따라 자연스럽게 이루어 저야 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에너지의 순환이 경락과 경맥을 통해 물 흐르듯이 자연법칙에 부합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래서 <조식>은 자연스럽게 토해내는 날숨부터 조율하면 저절로 「단전(丹田)」에 기운이 모이게 되고, 모인 기운이 넘치게 되면 자연히 임․독맥을 통해 돌게 된다.
우리는 「건강」과 관련하여「적당한 운동」이라는 말을 자주 듣곤 한다. 특히 요즈음 TV프로에 출연한 의사선생님들한테서 자주 듣는다.
그들은 수영이나 등산 그리고 스트레칭을 주로 얘길 한다. 그러나 맞춤형 적당한 운동이란 구체적으로 무얼 말하는지는 아리송하다.
요컨대 우리가 자신의 몸에 대하여 알고 있는 상식은 생물학이나 의학 분야의 전문성에 비추어 보면 턱없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 때문에 몸에 대한 구체적이며 전문적인 이해는 의사나 약사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운동」을 하여야 한다는 것쯤은 상식이 돼 버렸다. 그런데 건강에 필수인 적당한 운동이란 자기 몸에 대하여 “정성된 마음(의식)”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많다.
이러한 “정성된 마음”에는 의식화된 ‘호흡’과 자기 체형과 체질에 맞는 ‘체조’가 필수라는 사실 또한 모르고 무분별하게 무술도장이나 에어로빅 강습에 몸을 맡기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아무튼 “정성된 마음”을 수반한 「적당한 운동」이란 무의식적인 신체의 동작이 아닌 자의식적인 기(氣)의 흐름이 동작하나하나에 묻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알아야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우리는 일상에서 잊고 사는 경우가 지나치게 흔하다.
다시 강조하건데, 인체에는 신경의 흐름과 혈액의 흐름 외에 정보전달과 조절을 총괄하는 에너지의 흐름이 있다. 이것을 동양의학에서는 경락이라고 불러왔다.
기가 흐르는 길, 즉 경락의 존재는 호흡에 있어서 소홀히 할 수 없는 대단히 중요한 개념이다.
▩ <명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
<명상>이란 “눈을 감고 차분한 마음으로 깊이 생각에 잠기는 행위”로서 마음결을 파악하는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
때문에 서양의 「심리학」과 「인지과학」의 주의․주장을 들어 볼 필요가 있다.
근자에 불교방송에서 티베트 불교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를 미국의 『마음의 수레 모임』이라는 단체에서 초빙하여 “인간의 정보처리 체계”에 대하여 토론하는 내용이 방영되었다.
여기에는 불교의 인식론이 중심이 되어 명상학, 철학과 현상, 정신과학, 발달과학, 정서과학, 인지과학의 견지가 비교되었다.
이 토론은 <불가(佛家) 적 마음>이라는 실체를 인지과학의 측면에서 접근하려는 시도가 주된 내용이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지과학」이라는 학문체계가 미래를 예측하고 판단하는 인간관과 가치관이 무엇인지 주목할 필요를 느끼게 한다.
그 까닭은 다분히 서구의 철학과 과학의 틀이 인지과학이라는 학제에 의하여 재정립되어 가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세계화를 주도하는 금융자본주의가 새로운 진로를 인지과학에 의지하는 듯 보이는 것도 한몫 거든다.
이러한 견지에서 인지과학자인 <이 정모(성균관 대)>의 얘기를 들어보자.
그는 『인문-사회-자연과학 융합의 현장인 인지과학은 어떠한 미래를 여는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미래의 융합과학기술은 Nano(나노기술), Bio(생명과학기술), Info(정보과학기술), Cogno(인지과학기술)의 4개 핵심축이 초기 단계부터 수렴, 융합되어 교육되고, 연구되고, 응용 개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NBIC(융합과학기술) 틀이 나노 과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 낸 틀임에도 불구하고 미래 융합과학기술 추진의 궁극적 목표가 '획기적인 물질, 기계의 발명'이나 '인간의 장수'가 아니라, 인간 개개인이 각자의 일상생활에서, 학교, 일터에서 자신의 능력을 최적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Improving Human Performance 기술의 개발에 있다”는 주장이 눈길을 끈다.
아울러 “미래에는 우리가 과거에 지녀온 물질 중심의 과학기술관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 새 틀의 중요한 시사점”이라고 덧붙인다.
이러한 추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국내 과학기술계 인사나 대학교육기관의 담당자들이나 일반 대학생들의 지식구조가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고 항변한다.
실제로 유럽공동체의 「신기술 예측 고위전문가위원회」는 유럽이 추구하여야 할 미래과학기술의 틀을 미국의 NBIC틀에 유럽의 과학기술과 문화 특성을 가미한 자기들 특유의 CTEKS( Converging Technologies for European Knowledge Society; 유럽지식사회를 위한 융합과학기술)틀로 정립하여 2004년 9월에 제시하였다.
꽤 오래 전의 얘기지만, 이 틀의 특징은 미국의 미래 융합과학기술 틀에 사회과학, 환경과학 등을 추가하며 미래 과학기술의 기획과 발전에서 사회과학적 측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미국 NSF와 유럽공동체가 제시한 틀의 공통점 중의 하나는 미래 융합과학기술의 발전 및 미래 사회 전반에서의 인지과학의 중요성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미래의 기술과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인지과학의 학제가 중요한 몫을 담당하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
우리는 여기서 미래의 기술개발의 목표가 인간의 마음과 몸을 능률적이며, 효율적으로 향상시키는데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유럽과 같이 특유의 과학기술의 틀 안에는 그들 나름의 문화가 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아무리 나노, 생명, 정보기술이 융합된다 하더라도 인문-사회과학의 첨가 없이는 그들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시사점이 눈길을 끈다. 따라서 장차 우리에게 닥아 올 미래는 인간의 맘과 몸에 대한 항상성의 유지가 필수조건이 된다.
그리고 이를 버텨내기 위한 사회전반의 “차원 높은 정서”와 “지켜지는 약속”의 계발(啓發)이 중요한 계제가 될 것이라는 전망.
그러면 이러한 목표를 쉽게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절차를 밟아 나가야 될까?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앞에서 언급한 “미래에는 우리가 과거에 지녀온 물질 중심의 과학기술관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 새 틀의 중요한 시사점”이라는 구절을 주목해야한다. ‘물질 중심을 뛰어넘는 과학기술관.’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 그리고 아직까지도 유효한 발언인가?
이 세상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정신도 물질의 한 변형일 뿐이다. 이것을 뛰어 넘는 과학.
정녕 이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초 과학, 신과학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지만 현재까지 그들 나름의 연구업적으로 이를 구명(究明)하기에는 어림없는 노릇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서구적 논리로 길들여진 그들의 문명과 문화로는 “혁명적 과학기술관”을 도출해 낼 수 없음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서구의 기계론적인 세계관은 17세기에 걸쳐 주로 <갈릴레이>와 <데카르트>, 그리고 <뉴턴>에 의해 성립되었다. 물질적인 세계는 데카르트에 의해서 하나의 기계로 이해되었다. 그의 물질의 세계에서 추론해 낸 이러한 발상은 살아 있는 유기체에도 적용되었다. 동물이나 식물도 일종의 기계로 간주하여 보면 훨씬 효과적으로 '분석'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데카르트 식 인식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분석적인 사고방식이었다. 이런 방법론은 바로 근대적인 과학연구의 초석이 되어 자연과학의 발달과 함께 더욱 세련되고 복잡해졌으며 과학의 응용과 그 기술의 실현을 통해 우수성과 유익함을 마음껏 과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금세기 초 약 30년간에 걸쳐 이루어진, 물리학의 기본개념과 물리에 대한 사고방식의 극적인 대변환이 있었다. 물질에 관한 신 물리학의 모든 이론은 이 근본적인 변환을 발판으로 하여 새롭게 편성되고 있다. 그리고 신 물리학에서 얻어진 새로운 개념들은 우리 모두가 오랜 세월 길들어 있던 기존의 세계관을 철저히 바꿔 놓았다.
그것은 상대성 이론과 원자 물리학이 각각 발전하게 되자 뉴턴 적 세계관의 모든 주요 개념들, 즉 절대 공간과 절대시간, 기본적인 고체입자, 물리 현상의 엄격한 인과성, 자연의 객관적 기술이라는 이상 등은 산산이 부셔졌다는 것이다.
현대문명의 토대가 되는 과학은 근대과학에 그 역사적인 근원을 두고 있다. 근대과학의 패러다임은 기계적 결정론, 탈 목적론, 실증주의, 서술적 방법, 실용주의, 가치중립주의, 과학주의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신 물리학의 초기에 비범한 지적인 업적을 세운 사람이 곧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다. 그가 밝힌 신 물리학에서 보여주는 세계상(世界像)은 포괄적이고(holistic) 환경 친화적(ecological)이다.
이러한 패러다임을 토대로 성립한 근대과학은 인간중심적·기술지향 적 과학으로 규정될 수 있으며, 이 관념들이 바로 현대가 직면하고 있는 생태계 문제의 근본원인이 되는 것으로 판단한다.
앞 절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다시 <인지심리학>으로 들어가 명상과 관련된 뇌기능에 대하여 살펴보자.
인간의 정신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인지심리학>은 자연스럽게 여러 분야들 "철학, 인류학, 언어학, 신경과학, 인공지능" 과 연관을 맺고 발전하고 있는데 이러한 분야를 통칭해 「인지 과학(cognitive science)」이라고 한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신경과학자 <앤드루 뉴버그> 교수는 명상에 빠진 티베트 불교 신자와 기도에 몰두하는 가톨릭 수녀의 뇌를 영상 촬영했다. 그 결과 명상이나 기도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뇌의 두정엽 일부에서 기능이 크게 떨어지고 전두엽 오른쪽 부위의 활동이 늘어나는 것을 관찰했다.
두정엽의 기능이 떨어지면 외부에서 들어오는 감각 정보의 입력이 중단되고, 그에 따라 피부에서 감지하던 자신의 몸에 대한 정보 입력이 중지되어 ‘나’라는 존재감도 사라진다. 바로 명상을 통해 무아지경(정신이 한곳에 온통 쏠려 스스로를 잊고 있는 경지)의 상태로 들어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면 명상의 가치와 효과는 「무아지경」에 머무는 것일까?
동양의 무아라는 관념은 특히 불교의 전통 속에서 발전된 개념이다. <붓다>는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현세고(現世苦)에서 ‘해탈’을 이루게 하려는 것이 염원이었기 때문에 고(苦)가 유래하는 곳을 더듬어 가다가 ‘아집(我執)’이라는 무명(無明)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서 그 미망(迷妄)을 타파하기 위해 ‘제법무아(諸法無我)’를 제창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불교의 무아설이다.
<무아>의 기본적 사실은 프로이드파의 사람들이 ‘자아의 힘’이라고 부르고 있는 세계 속에서의 효과적인 기능의 발달을 결코 방해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로 바꿔 볼 수 있다.
한편 “마이트리(Maitri, 자비)”란 자기 자신과 타인, 나아가서는 전체로서의 세계와 우주에 대해 마음을 열고 친애의 감정을 가지고 대하며 유머와 애정이 넘치는 감사하는 기분을 갖는 태도를 말한다.
자비로운 사람은 아무런 저항이나 거부를 나타내는 일 없이 아름다운 것이건, 추한 것이건 모든 대상에 대해 소박한 감사의 념을 가지고 대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공간요법」과 「마이트리 프로젝트」가 지향하는 신경증 환자의 인격 전환 목표라 할 수 있다.
20세기 전반에 접어들면서, 미국 심리학계의 양대 주류는‘정신분석학(psychoanalysis)’과‘행동주의심리학(Behaviorism psychology)’이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미국 심리학계에서 일어난 중요한 사건은 ‘인간주의 심리학(Humanistic Psychology)’이 대두한 것이다.
그들은 행동주의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을 가치 없는 심리학으로 보고, 그들의 혁명적인 심리학은 인류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 주는 것이라고 주창하였다.
<인간주의 심리학>은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생물이 한 종으로서 인간 본성 속에 잠재해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발전시켜 자기실현을 이룩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그 실천을 요구하는 가치체계의 심리학이다.
이러한 인간주의 심리학의 주도자인 <매슬로우(Abraham Maslow)>의 "욕구 위계 설"은 현대 심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행동주의 심리학이란 인간의 발전을 이룩하는 데는 쓸모없는 심리학이라 했고, 다른 한편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은 인간 심리의 병든 반쪽을 제시했으나 이제 우리는 나머지 건강한 반쪽을 채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제 3세력의 심리학으로서 「인간주의 심리학」을 제창한 것이다. 이것은 현대의 병든 서구 문명을 건강한 문명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혁명적인 심리학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인간주의 심리학이 성행하고 있던 20세기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때맞추어 동양의 명상 수련이 미국에 확산되었고, 인간주의 심리학자들 중의 많은 학자들이 그 명상수련을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인간주의 심리학과 동양의 명상의 결합에서 초개인 심리학이 나오게 된다.
<초개인 심리학>은 개인의 인간성이나 자기실현까지도 초월하여 전 우주에 중심을 둔 종교지향적인 심리학이다.
제3세력으로서의 인간주의 심리학은 더 높은 초개인 심리학으로의 과정이었으며 초개인 심리학을 제4세력으로 본다.
그들은 이 제4세력에서 중병에 걸린 현대 서구문명에 새로운 삶의 철학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서양의 심리학에서 <명상>이 차지하는 비중은 날로 심대해 가는 추세다.
사실상 <명상>은 고대로부터 전 세계적으로 여러 상황에서 시행되어왔다. 은둔 신비주의자의 경우처럼 순수하게 정적주의적(靜寂主義的)인 목적에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수도원과 대다수 정신요법가의 경우처럼 정신이나 육체를 회복하고 일상생활을 풍요롭게 해주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전투를 앞둔 전사(戰士)나 연주회를 앞둔 음악가의 경우처럼 신체나 그 밖의 힘이 드는 특별 활동을 준비하기 위해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최근의 의학 및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명상요법은 치료에 임하기 전에 맥박과 호흡을 조절하는 데 효과가 있으며, 편두통·고혈압·혈우병 등의 증상을 억제하는 데 각기 정도는 다르나 효과가 있음이 숙달된 정신 요법 가들에게서 입증되어왔다.
대부분의 세계 기성종교들은 특정 형태의 명상을 체계화해왔다. 또한 명상은 심리치료의 대표적인 기법의 하나다.
다시 말해, 명상은 자기의 내면 안에 있는 사고와 의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내적 각성을 통해 존재의 근원에 다가서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가 명상을 하는 행위도 '참된 나'를 깨달아 불가 적 무명(無明)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도 많다.
이처럼 명상의 불가 적 입장을 들어보면, 명상은 자신에 대한 전인적인 이해를 돕고 자기통제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 구실을 한다.
명상을 통한 ‘깨우침’은 의식의 진화 과정 속에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능력을 키워주고 자발적인 사랑과 기쁨을 만들어준다. 또한 감정 에너지를 조절할 수 있게 되어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인정하는 능력까지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명상은 인간의 탐욕을 벗고 넓고 평화로운 세상과 내가 하나임을, 그것이 ‘영원한 자유’임을 알게 해주는 과정이라는 주장으로 발전한다.
명상과 형식의 차이는 다소 있지만 「기도」라는 것이 있다. 인도불전에 대한 한역본(漢譯本)에는 ‘기도’라고 하는 말은 거의 나오지 않고, ‘기청(祈請)’이란 말을 사용한 예가 많다.
불교는 진리를 깨달아 바른 마음, 바른 행으로써 인간과 불국토의 완성을 추구하는 종교다. 그런데도 불교를 믿으면 재난이 없어진다든가 병이 낫는다든가 불행한 사태가 호전된다는 등 현세적 이익이 있는 것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것을 얻기 위하여 염불하는 정진을 「기도」한다고 말한다.
이렇듯 기도라는 말이 가지는 보편적인 의미와 불교의 근본 가르침 사이에 괴리가 있기 때문에 일부 식자(識者)들 간에는 기도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기도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시각은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으로서의 기도에 대한 인식의 부족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본래 불교에서 기도란 “깨달음의 진리를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모든 종교의식에서 「기도」는 일반적으로 생활을 진리로써 펴 나가는 창조적 수단이며, 지혜로운 행동이라고 믿는다. 마음의 안정을 얻고 의지의 힘을 기르는 수단이 아니라 생활을 진리로써 펴나가므로 거기에는 자연히 안정과 자신과 용기가 함께 있게 된다는 논리다.
이와 관련하여, 개신교의 차원에서 기도는
1) 마음으로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하나님께 비는 일이나 그 의식. 성도와 하나님과의 교제 혹은 대화.
2) 인간의 영혼이 진정으로 생명을 얻는 영혼의 호흡이자 영혼 전체로 드리는 예배(시 119:164).
라고 규정한다. 다시 말해, 영(靈)이신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인간들이 당신을 가까이하고 당신과 대화하며 당신을 알고, 당신의 뜻을 좇아 살기를 원하신다(빌립보서 4:6, 데살로니가 전서 5:18, 요한일서 1:9).
따라서 기도는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거룩한 행동이 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는 행위여야 하고, 또 언제든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에 힘입지 않고서는 바른 기도를 드릴 수 없다.
한편, 루터(Luther)는 「기도」에 대하여 ‘제화공이 신을 만들고 재단사가 옷을 만드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기도가 매일의 직업’이라고 했다.
아무튼 사람의 정신력이란 참으로 신비한 것이다. 특히 한 곳에 집중하면 할수록 특수한 능력이 발휘된다. 그래서 예로부터 기도하여 소원을 성취했다는 영험 담이 많이 있다.
이러한 기도는 기도를 하는 데 있어서 기본적인 마음가짐이 우선돼야 한다.
그것은 따뜻한 심정, 너그러운 마음, 즉 사랑이요, 자비심이다. 다른 사람을 자기와 같다고 보는 자기 동일화의 정신이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 바탕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미워하거나 대립감정을 가지고서는 기도는 성취될 수 없다.
이와 같이, 기도는 기도의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대상에 대한 굳건한 신뢰가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명상>은 한 마디로 “궁극의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이라는 점이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