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2년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는 1394년 서울을 도읍으로 정하고 종묘와 사직 및 궁궐 등의 공사를 착공하여 1395년 9월 29일 총 755칸 규모의 경복궁을 완공하였다. 그리고 그 해 태조는 정도전에게 새 궁궐과 주요 전각의 명칭을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경복궁의 명칭을 비롯하여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근정문, 정문(현재 광화문) 등 주요 건물의 명칭은 이 때 지어진 것이다.
이후 1411년 태종은 경복궁에 금천을 파도록 명하고 이듬해에는 경회루를 건축하였다.
경복궁이 조선왕조의 법궁다운 면모를 갖춘 것은 세종대왕 때였는데, 1426년 왕명을 받은 집현전에서 경복궁의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지어올렸으니 광화문, 홍례문(현재 흥례문), 일화문, 월화문, 건춘문, 영추문, 영제교 등이 이때 지어진다. 그리고 1429년 사정전과 경회루의 중수를 시작으로 주요 전각을 새로 짓거나 중수하였다.
명종 8년에는 실화로 경복궁이 전소되었는데, 이를 1년도 되지 않아 다시 지었다. 이 때에 동원된 인력이 부역이 2,200명이었고 품팔이꾼이 1.500명이었다고 한다. 명종대에 건립된 경복궁을 그린 ‘한양궁궐도병’이라는 그림이 있었는데, 그림은 임진왜란 당시에 소실되었다고 전해진다.
1592년 선조가 피란할 때에 난민이 발생하였고, 노비문서와 노략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의 궁궐들을 불태웠다. 그 후로 273년간 재건하지 못하다가 1865년 음력 4월 2일 고종의 수렴청정을 하던 신정왕후의 지시로 중건이 시작되어 1868년 재건되었고, 경복궁의 재건을 주도한 흥선 대원군은 권력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 궁궐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동쪽으로 창경궁과 맞닿아 있다.
임진왜란 이후 다시 지어졌고, 폐허로 변한 경복궁의 역할을 대체하여 임금이 거처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곳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많은 부분이 의도적으로 훼손되었으나, 조선 후기에 그려진 《동궐도》를 참조하여 복원이 진행되고 있다.
1909년 일본이 순종의 마음을 달랜다는 이유로 강제로 창경궁 안에 궁문, 담장 등을 헐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일반인들에게 관람시켰으며, 1911년에는 박물관을 짓고 이름을 창경원(昌慶苑)으로 고쳐 격을 낮추어 불렀다. 그 때부터 서울대공원이 생기기 전까지 시민의 공원이었던 창경원은 1983년에 동물원에 있던 동물들을 모두 서울 대공원으로 옮긴 이듬해인 1984년 창경궁을 복원하고 정비하면서 다시 이름을 원래대로 창경궁으로 고쳤다. 사적 제123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운궁은 광해군 시절인 1611년에 월산대군이 머물렀던 정릉동 행궁을 확장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원래는 흥경궁(興慶宮)으로 하고자 하였으나, 광해군이 “이것은 전대의 궁호이니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합당한 궁호를 여러 개 써서 아뢰라”고 하였으므로, 경운궁이라고 이름하였다[1]. 본격적으로 궁궐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은 고종 연간인 1896년이다. 이후 1897년부터 1907년까지 대한제국 시기에 황제가 정무를 보던 법궁(法宮) 역할을 담당하였다. 1904년에 불이 나 궁궐의 상당 부분이 소실된 후 중건이 시도되었는데, 당시 국가의 정치 상황이나 재정 여건상 궁궐 권역과 건물 규모에 적지 않은 축소가 있었다.
1907년 7월에 헤이그 밀사 사건의 여파로 고종이 일본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한 후 경운궁에 머물렀는데, 이때 고종의 궁호(宮號)를 '덕수(德壽)'라고 하였기 때문에 덕수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순종은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
위치상으로 창덕궁과 창경궁의 남쪽에 인접해 있다. 조선시대에는 서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도로가 나면서 끊기고, 현재는 육교로 연결되어 있는 상태이다.
종묘에서는 조선 왕조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종묘의 건축물들과 600여년 간 제례행사를 지내 온 가치가 인정되어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으며, 종묘제례(중요무형문화제 제56호)와 제사를 지낼 때에 춤과 함께 연주되는 음악인 종묘제례악(중요 무형문화제 제1호)은 2001년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등록되었다.
고종이 즉위하자 이곳에서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하였고, 궁궐과 직통으로 연결되었다. 흥선대원군은 10여년간 정치를 하면서 세도정치의 폐란을 제거하고 인사·재정들에서 대폭적인 개혁을 단행하였고,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경복궁을 다시 짓기도 하였다.
지금은 궁의 일부가 덕성여자대학교로 사용되고 있고 방송국 시설이 있기도 하다. 이로 인해 대원군이 즐겨 사용하던 아재당도 헐려 나가고 영화루와 은신군·남연군의 사당도 모두 없어졌다.
일제 강점기에 경희궁을 허물고 그 자리에 경성중학교를 만들었으며, 해방 후에 서울고등학교가 위치하였다. 경희궁터는 사적 제271호로 지정되었고, 1980년 서울고등학교가 서초구로 이전한 이후 서울 시립 미술관 등으로 사용되다가, 다시 건물을 허물고 경희궁의 일부를 복원하였다. 서울고등학교의 별칭과 경희대학교의 명칭 등이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덕수궁의 교대식
보 신 각
석수궁 석조전
경 희 궁 2002년 복원되었다함 ( 옛 서울고 자리 )
경 희 궁
남 대 문
남대문 야경
창덕궁 비탑
창 덕 궁
경 복 궁
경 복 궁
창덕궁 속의 보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