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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반가워요, 대웅씨."
환하게 웃으며 대웅을 맞이하는 라디오 담당 PD. 안면이 전혀 없는 사람과 마주하고 앉은 자리가 못내 어색해 죽을 것 같은 얼굴의 대웅. 쭈뼛거리면서 담당 PD가 무슨 말이라도 먼저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음... 일단 이거 한번 봐봐요. 내가 기획하는 프로그램인데 맘에 드는지..."
"아, 네."
대웅의 앞으로 내밀어진 기획안을 받아들고 차근차근 훑어본다. 입매를 늘려 미소를 띠며 담당 PD를 보던 대웅.
"맘에 드는데요. 진짜 절 DJ로 선택하시는 거예요?"
"네, 사실 내가 채호씨한테 넌지시 입김을 넣었었어요. 김대웅씨한테 권유 좀 해보라고."
"정말요?"
"네, 또 이렇게 흔쾌히 맘에 든다고 해주니까 더 좋구요."
"저야 말로 감사하죠. 아시다시피 그일 이후로 제가 반 백수 인생으로 살고 있잖아요. 기껏해야 소속사 안에서 연습생들 가르치는 거 외에 특별히 하고 있는 스케줄도 없고, 괜히 민폐가 되는 건 아닐까 걱정했거든요."
"에이, 원래 사람은 밑바닥부터 치고 올라와야 세상 사는 법을 안다고 하죠. 분명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본업은 배우지만 난 대웅씨 노래 부를 때 그 목소리가 참 매력적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라디오는 고스란히 목소리로만 감정을 전달하는 거니까 문제없다고 생각해요. 다시 한 번 재기하는데 우리 프로그램이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 아닙니다. 저도 라디오는 처음이라 실수 투성이일 거예요. 잘 가르쳐주시길 부탁드릴게요."
화기애애한 대화가 오고가며 잘 성사된 일이었다. 한참 주가를 올리고 있던 모든 광고스케줄, 차기작 섭외 의뢰, 대본, 시나리오. 정말 거짓말 하나 없이 한순간에 0 이 되어 버렸다. 물밀듯 들어오던 스케줄들은 차츰차츰 횟수가 줄어들었고, 어느 순간 스케줄 없이 보내는 날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그렇게 6년을 버텨 온 지금의 대웅은 소속사 연습생들을 코칭 하는 일 외에는 특이 나게 하고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라디오 DJ라는 자리는 꿈같은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선 본인도 모르게 콧노래가 흥얼거려지는 대웅이었다.
일주일 후. 본격적인 첫 라디오 녹음방송 스케줄이 잡혔고, 스튜디오를 찾은 대웅. 스태프 전체를 마주하는 첫 대면식인 셈이었다. 일단 녹음을 진행하기 전에 간단한 아이디어 회의와 대본 수정 등 의견을 맞춰보기 위해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
"신입 작가 아직도 야?"
"그러게? 다 왔다고 했는데?!"
"한번 나가봐. 면접 때 한번오고 처음이라 또 건물 여기저기 헤매는 거 아닌가 모르지."
"제가 가볼게요!"
"대웅씨가요? 그래도 명색이 라디오 DJ인데... 어떻게 그래..."
"괜찮습니다. 신인의 자세로 뭐든 열심히 해야죠 제가. 하하."
"그, 그럴까 그럼? 미안하지만 부탁 좀 할게요 그럼."
못이기는 척 대웅의 손에 신입 작가의 신상정보가 적힌 메모지 한 장을 쥐어주는 PD. 받아들기가 무섭게 건물 입구 쪽으로 가기위해 뛰어 나가는 대웅. '띵동' 하는 엘리베이터 알림음과 함께 스르르 문이 열리고, 급하게 뛰어나가던 대웅은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기다리고 서 있던 여성과 부딪힌다. 동시에 바닥에 나뒹구는 노트와 펜, 손으로 사과를 하듯 몇 번 흔들고 입구로 달려가려던 대웅은 행동을 멈추고 선다. 노트와 펜을 하나하나 챙겨들며 씩씩거리는 여성의 모습을 유심히 보는 대웅. 신경질적으로 웨이브진 긴 머리를 휙 뒤로 젖히며 다 챙겨들은 여성이 몸을 일으켜 선다. 대웅과 마주하고 선 여성은 다름 아닌 정은예.
"어...!"
"....정은예?"
"....안녕하세요."
"여긴 어쩐 일이야?"
"출근하는 중이었어요."
"자, 잠깐만!"
다급하게 나오느라 쥐어준 종이에 적혀있는걸 확인도 안했던 대웅. 꼭 쥐고 있던 손을 펴서 적혀있는 내용을 확인 한다. 영문도 모르고 멀뚱멀뚱 서 있는 은예의 눈에 대웅의 입 꼬리가 씰룩이며 미소를 짓는 모양이 보인다.
"안녕하세요, 신인 DJ 김대웅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네? 무슨...?"
"신입 작가 정은예씨?"
"네?!"
그렇게 6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 은예와 대웅. 묻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말도 많지만 우선은 일부터 해치우잔 생각으로 은예를 데리고 라디오스튜디오로 들어선다. 면접당시 은예를 호명하던 여자가 쌍심지를 켜고 당장이라도 텃새를 부릴 심산으로 들어오는 은예를 본다. 먼저 선수 쳐서 은예를 대변해주는 대웅.
"아, 다른 동 건물에서 헤매고 있었더라구요."
"앞으론 일찍 오도록 하세요, 정은예씨. 지금 몇 사람이 기다린 줄 알아요?"
"죄송합니다."
"일단, 앉아요. 회의해야 되니까."
비록 첫날부터 지각한 은예 때문에 언짢아하던 여자도 어느새 기분이 나아졌는지 생글거리며 대웅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대본체크, 사연체크, 실시간 SNS 및 문자 체크에 정신이 없는 스태프들. 첫 출근으로 일머리도 모른 채 그저 선배들 수발이나 드는 정도로 하루가 끝난 은예.
"다들 수고 했어요. 첫 방송 녹음한 느낌 나쁘지 않은 거 같은데 다들 어때요?"
"좋아요."
"저도!"
"네, 좋네요."
"오케이, 오늘 우리 새 식구들도 있고 하니까 회식이나 할까?"
PD의 권유로 급작스럽게 잡힌 회식장소. 조촐하게 화로구이 삼겹살집에서 고기를 구워가면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라디오팀 식구들. 나란히 옆자리에 앉게 된 대웅과 은예. 대웅은 은예를 다시 보게 된 그 자체에 마냥 좋아 방실방실 웃음이 떠나질 않는데, 은예는 너무 오랜만에 다시 보게 된 대웅이 조금은 어색한 듯 억지미소 그득한 얼굴로 상투적으로 대하고 있다. 어느새 조금씩 풀어진 사람들은 하나둘 집으로 귀가를 시키고 덩그러니 남아있는 대웅과 은예.
"택시!!"
"아직도 그곳에 살아?"
"아뇨."
"타!"
대웅의 한마디에 얼떨결에 택시에 몸을 넣는 은예. 그리고 문을 닫을 줄 알았던 대웅이 은예의 옆에 나란히 함께 몸을 넣는다. 놀란 은예가 대웅을 보고, 대웅은 개구진 표정으로 웃어 보이며 눈짓 한다.
"아... 여의도 대림빌이요."
"네,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어느덧 대림빌 앞 택시가 멈춰 선다. 요금을 대웅이 지불하고, 재빠르게 문을 열고 내려서서 은예가 내리길 기다린다. 이렇다 할 거절할 틈도 없이 은예가 내리자 택시 문을 닫아 택시를 보내버리는 대웅. 황당한 표정으로 대웅을 보는 은예. 그런 은예의 표정이 귀엽다는 듯 씨익 웃어보이던 대웅이 은예의 목에 팔을 감고 끌어안는다. 놀란 은예가 대웅을 밀치려 하지만 그럴수록 대웅은 은예를 더 세게 안는다. 조심스럽게 팔을 풀다 말고, 양손을 은예의 얼굴에 가져가는 대웅. 가만히 그런 대웅과 눈을 맞추고 있는 은예는 머릿속이 백지장이 되는 느낌이 든다. 서서히 다가오는 대웅의 얼굴. 은예는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눈을 감고, 대웅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듯 한다. 다가가던 대웅이 멈칫 은예의 행동을 보다 피식 웃음이 새어나오고. 눈을 뜨자 가까이에 있지만 닿지 않은 둘의 입술을 눈치 챈 은예는 민망함에 떨어지려 뒷걸음질 친다. 한걸음 떨어져 선 은예에게 다시 한 번 바짝 다가가 가볍게 쪽하고 입을 맞춘다.
"오늘부터 제대로 다시 시작이다 정은예."
그날을 시작으로 꽁냥거리면서 비밀연애를 시작했고, 몇 개월이 흘렀을 즈음. 화장실을 다녀오는 은예에게 슬쩍 공연 티켓처럼 보이는 종이 하나를 찔러준다. 은예는 별 의심 없이 가방에 챙겨 넣어둔다. 라디오 방송이 끝나고, 급하게 다음 스케줄이 있다며 먼저 가버린 대웅. 황당해 하며 집으로 돌아오던 은예의 휴대폰에 알림이 울린다.
'티켓에 적힌 장소로 저녁 7시까지 와. 그때 보자!'
저녁 7시. 대웅이 전해준 티켓에 적힌 장소에 도착한 은예. 공연장이라고 하기엔 너무 조용한 분위기. 분명 공연이 있다면 많은 인파가 즐비해야 하지만 인적이라곤 찾을 수 없는 공간. 조금씩 걸음을 내딛으며 공연장 문을 여는 순간. 잔잔한 전주가 흘러나오고, 무대 중앙에 잘 차려입은 대웅이 스탠드 마이크 앞에 서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놀란 은예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춰 선다. 노래를 하며 여유 있게 앞으로 더 걸어오란 듯 손짓 하는 대웅. 대웅의 손짓에 한걸음, 한걸음 걸어 다가가는 은예. 어느덧 노래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리고, 은예는 그제야 대웅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눈물이 글썽인다. 천천히 무대 위로 걸어 올라가는 은예 앞에 자그마한 상자하나를 꺼내 보이며 은예의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는 대웅. 능청스럽게 자신의 손을 은예 앞에 펼쳐 보이고, 은예가 대웅의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같은 디자인의 반지를 끼워준다. 어느덧 노래는 끝이 나고, 조용함만 가득한 공연장 안에 단 둘뿐인 대웅과 은예.
"결혼하자 정은예."
"......"
"대답 안 해? 거절하는 거야?"
"...흐이잉..."
"결혼 하는 거다?"
"....으응..."
"사랑해. 앞으로 더 많이 또 사랑해줄게."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했고, 대웅의 프러포즈에 감동한 은예가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보이자. 말없이 따스하게 은예를 품안에 안아주는 대웅. 긴 시간을 돌아왔다면 돌아온 둘의 마음이 6년 만에 결실을 맺는 순간이다. 행복함에... 스쳐지나간 아픈 날들에...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은예. 그리고 그런 은예에게 미안함에... 고마움에... 눈시울을 붉히며 안고 있는 대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