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코거래로 인한 우리나라 기업의 손실을 생각할 때 마다 제 머리 속에서는 전혀 관련이 없는 박완서 선생님의 자전 소설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가 떠오릅니다. 아마 ‘누가 다 먹었을까?’란 말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박완서 선생님은 소학교(요즘의 초등학교) 시절 개풍의 박적골에서 서울의 현저동으로 이사하였고, 사직공원 옆에 있는 매동초등학교로 전학하였습니다. 소설 속의 현저동은 송현연구소의 ‘솔재지킴이’께서 운영하고 계시는 ‘향음’이 있는 무악재역과 독립공원(구 서대문형무소) 사이의 언덕 위에 있었던 판자촌이었습니다. 저자가 통학하기 위해서는 인왕산 산자락을 넘어 다녔는데, 먹을 게 별로 없어 입이 항상 궁한 아이들과 같이 봄철 산자락에 많이 피어있었던 아카시아 꽃을 따 먹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비릿한 아카시아 꽃의 맛에 실망하고, 고향에 지천으로 피어있었고, 껍질 벗긴 줄기를 씹었을 때 나는 새콤한 맛의 싱아를 그리워하였습니다.
키코사태를 겪은 기업은, 원화 강세로 다소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생산성 향상을통해 풍성한 매출과 이익을 창출해 내던 예전이 얼마나 그립겠습니까? 아마 비릿한 서울의 아카시아 꽃에 질려 싱아가 흐드러지게 피던 박적골을 그리워하는 저자의 마음과 같겠지요.
키코거래 관련 기업이 입은 손실 규모는 추정하는 기관에 따라 3~10 조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키코피해기업 공동대책위원회’의 홈페이지에는 어느 국회의원의 자료를 인용하여 2008년 8월~2009년 7월의 기간 중에 키코관련 손실은 520여개 업체에 약 3조 4천억 원에 달한다고 하였습니다. 집계에 포함되지 않은 기간, 피해기업과 손실규모를 감안하면 10조 원은 아닐지라도 5조 원은 넘지 않을까요?
통상 파생상품의 손익은 Zero-sum입니다. 손해를 본 사람이 있다면 동일한 금액의 이익을 본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기업이 키코로 인해 5조 원의 손실을 봤다면 누군가는 그 만큼의 이익을 챙겼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서투른 솜씨입니다만 키코거래의 흐름도를 만들어 봤습니다.
<키코거래 흐름도>
![](https://t1.daumcdn.net/cfile/cafe/2253C83653BD484C1A)
l 국내은행(외국계인 씨티은행과 SC제일은행을 포함)은 국내기업과 ①과 같은 키코계약을 체결하면 ②와 같이 동일한 조건으로 외국은행(외은 서울지점 포함)과 반대거래를 실시합니다. 일부(2~3개) 은행의 경우는 옵션포지션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서 외국은행과 반대거래를 실시하지 않고 ⑥과 같이 외환시장에서 헤지거래를 실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국내은행은 관련 시스템, 각종 포지션 규제와 은행 내부의 리스크관리 정책 및 시장 지배력 등에서 상당한 제약 요인을 안고 있어서 그 규모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키코거래 금액의 한 5% 내외가 아닐까 합니다.
l 반면에 외국은행은 국내은행이 안고 있는 제약 요인에서는 상당히 자유롭습니다. 외국은행은 이런 이점을 활용하여 거액의 수익을 거둘 수 있습니다. 2008년의 시장상황 상 외국은행은 달러 매입 옵션 포지션을 최대한 오픈(즉, 달러 매도를 통해 상쇄하지 않음)하였을 뿐 아니라 달러 매입을 더욱 늘려 원/달러 환율의 상승을 부채질함으로써 이익을 극대화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l 키코계약체결에 따라 외국은행이 국내은행에 주는 옵션 프리미엄은 계약기간, 계약환율, KI환율, KO환율에 따라 달라집니다. 옵션 프리미엄은 계약기간이 장기일수록, KI환율이 낮을수록, KO환율이 높을수록 증가하고, 계약환율이 시장환율보다 높을 수록 낮아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외국은행에 반대거래를 실행했을 때 받는 프리미엄 달러당 10원은 예로 들어본 것입니다. 6개월 짜리 키코거래를 실행하면 달러당 프리미엄이 5~6원이었으니 1년 짜리 키코거래에서 10원은 터무니없는 건 아닐겁니다.
l 상기 ①과 ②의 조건으로 전부 외국은행과 반대거래를 했을 경우, 1년간 월 1백만 달러 계약이라면 국내은행은 1억2천만원(=1백만 달러 X 12 개월 X 10원)의 수익이 발생합니다.
l 상기 ⑥에서 프리미엄을 30원/달러로 추정해 본 것은 2008년 1월 이후 달러 금리(기간에 따라 2~3 %)와 원화 금리(기간에 따라 5~6%)의 차이(3% 내외)를 감안한 것입니다. 즉, 이론적인 선물환율을 추정해 본 것으로 외국의 한국물 투자자 입장에서는 이 정도의 프리미엄을 지급하여도 손해볼 게 없는 수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금융감독원이 조사한 키코거래 잔액은 2008년 8월말 현재 12개 은행에 79억 달러였습니다. 한국씨티은행이 21억 달러로 단연 선두이고, 외환과 신한은행이 각 16억 달러로 그 뒤를 잇고 있습니다. 산업은행, 하나은행, 국민은행도 각 5~6억 달러로 적지않은 거래를 유치하였고, 부산, 대구 등 지방은행과 농협조차도 1~2억 달러의 거래 잔액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기업은행과 우리은행의 경우는 은행의 규모에 비해서는 보수적(?)으로 하여 각 2억 달러의 잔액이 있었습니다. 가히 키코 광풍이 불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2008년 8월말이전에 거래가 종결된 키코거래 규모는 얼마인 지 자료를 특별히 찾아 보지 않아 잘 모르겠습니다. 키코거래가 알려지기 시작한 2006년 이후 약 2년 반이라는 기간을 감안하면 한 4~5십억 달러는 되지 않을까요? 국내은행이 거래한 키코거래의 규모를 감독원이 발표한 2008년 8월말의 79억 달러와 그 이전에 거래가 종결된 건이 한 50억 달러가 된다고 가정하면 총 거래규모는 130억 달러가 됩니다.
국내은행이 ‘싱아’를 얼마나 먹었는지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개인적인 업무경험을 바탕으로 하긴 하였지만 상당 부분은 제 개인적인 상상력을 발휘해서 추정해 보았다는 점을 감안해주시기 바랍니다.
국내은행은 위의 흐름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기업과 키코거래를 체결하면 바로 외국은행과 반대거래를 실행합니다. 양 거래 간의 시차는 없다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국내기업에 거래조건을 제시할 때 이미 외국은행이 동일한 조건의 거래를 실행할 경우 얼마의 프리미엄을 줄 지를 점검한 후 제시하니까요. 평균 프리미엄은 달러 당 얼마쯤 일까요? 기간, Knock-in, Knock-out 수준, 상품 종류(키코, 스노우 볼, 피봇 등)에 따라 다 다릅니다만, 평균 옵션 프리미엄은 달러 당 10원 내외이지 않을까 합니다. 최대한으로 잡아도 달러당 15원은 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최대한인 15원의 프리미엄을 받았다고 한다면, 국내은행이 취한 옵션 프리미엄은 ‘130억 달러 X 15원 = 1950억 원’이 됩니다. 즉, 국내은행들은 키코거래를 통해 최대 2천억 원의 수수료 수익을 올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2천억 원의 수익도 온전히 챙겼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키코거래 기업들이, 2008년 9월 태산LCD의 법정관리 신청을 필두로 하여, 줄줄이 부도를 내거나 법정관리를 신청하였기 때문입니다. 키코사태에 따른 기업의 부도를 막기위해 정부는 ‘Fast Track 제도’를 시행하여 긴급 유동성을 공급하였으나 이는 상당수 기업의 부도를 일정 기간 유예하는 효과에 불과하였습니다. 기업이 부도가 나면 키코거래 흐름도에서 ①의 거래는 이행이 안되지만 국내은행은 ②의 거래는 이행해야 합니다. 통상 키코거래 기업이 부도가 나면 외국은행과 체결한 ②의 거래는 청산 작업을 합니다. 미래에 이행해야 할 거래를 현재가치로 환산하여 손익을 정산하고 서로 채권 채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이 과정을 통해 기업의 손실은 고스란히 은행의 손실로 바뀝니다.
태산LCD 한 건만으로도 2008년 9월 17일 하나은행이 공시한 은행의 손실규모는 2861억 원이었습니다. 법정관리에서 워크아웃으로 전환한 태산LCD는 그 해 12월과 이듬해 6월에 키코관련 채무를 전부 출자 전환하였는데 그 규모는 4340억원이라고 합니다. 하나은행은 회사가 법정관리 신청한 시점에서 바로 외국은행과 체결한 반대거래를 청산하지 못하고 끌고 가다가 환율 상승으로 인하여 손실액이 더욱 크게 늘어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올해 3월에 태산LCD는 상장이 폐지되었습니다. 하나은행은 출자전환한 주식을 처분하지 못하고 거의 전액을 손실 처리하였을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파생금융상품으로 인해 발생한 손실 중 최대 규모라고 생각합니다. 비단 하나은행 만의 문제가 아니라 키코거래를 한 모든 국내은행은 하나은행과 동일하거나 비슷한 과정을 통해 적게는 몇 백억 원에서 많게는 수천억 원의 손실을 부담하였습니다.
결국 3조 5천 억원 ~ 10조에 이르는 ‘싱아’는 외국은행과 외국투자자들에게 다 갔습니다. 손실금의 반(?) 정도는 기업이 부담하였고 기업이 부담할 수 없었던 손실금은 결국 국내은행이 지불하였습니다. 국내은행이 지불한 금액이 적지 않으나, 수 많은 우량 중소기업들을 나락에 빠뜨린 죄값에 비해서는 많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2008년 금융위기의 원인이 된 모기지증권 부실 판매 등으로 JP모간체이스은행의 130억 달러를 비롯하여 상당수 미국은행이 엄청난 금액의 벌금을 낸 것과 비교하면 오히려 특혜를 받았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은행의 부실한 업무처리에 벌금을 많이 물린다고 해서 좋은 것 만은 아니겠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금융기관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제재가 제도적으로 대단히 미비되어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원님 재판하는 듯한 제재와 인적인 징계에 치중하고 있는 감독기관의 행태를 둘러싸고 논란을 벌이고 있는 걸 보면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습니다.
한편 부도나 법정관리를 피할 수 있었던 초우량 중소기업들은 그 뒤 약 2~3년에 걸쳐 피눈물나는 과정을 거치며 키코 계약을 이행하였습니다. 키코거래가 모두 정리되었다고 할 수 있는 2011년 3월이 되어서야 원/달러 환율은 다시 1000원대로 돌아 왔습니다. 3년이 걸렸습니다.
첫댓글 추정 자료이지만 구체적이고 분석적이어서 많은 도움이 됩니다.
저는 상사에서 근무하고 있기에 당시 중견/중소기업들의 피해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은행이 손실을 봤다고 하더라도 기업에 비견할 정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정부로부터 특혜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습니다.
금수강산님 말씀 맞습니다. 은행의 손실이 얼마든 키코로 인한 기업의 고통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