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버거 말과 글
존 버거 John Berger 1926~
「런던 태생으로, 미술 비평가, 사진 이론가, 소설가, 다큐멘터리 작가, 사회비평가로 알려져 있다. 처음 미술평론으로 시작해 점차 관심과 활동 영역을 sfjqgu 예술과 인문, 사회 전반에 걸쳐 깊고 명쾌한 관점을 제시해왔다. 중년 이후 프랑스 동부의 알프스 산록에 위치한 시골 농촌 마을로 옮겨가 살면서 농사일과 글쓰기를 함께 해오고 있다」
[아품의 기록]
• 아득히 먼 곳
이 장작을 준비한 사람은
내 아버지였던가요?
성냥불을 켜는
손은
역사의 일부일까요?
바람이 따져 묻고
불길이
답합니다.
"중략"
당신 마당의 양귀비꽃들이
내 구름 속에서 흩어집니다.
• 1926년 11월 5일 생
배나무 잎이
나날이 붉어져 갑니다
무엇이 피를 흘리고 있는지 나에게 말해 주오
여름은 아니지요
여름은 일찍 가버렸으니까요
마을도 아니지요
마을은 술에 취해 길 위에 있지만
아직 쓰러지지는 않았으니까요.
내 가슴도 아닙니다.
내 가슴은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으니까요
국화꽃이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듯.
“중략”
어둠 속에서 바라보는 그대여.
무엇이 피를 흘리고 있는지 나에게 말해 주오.
이윤 때문에 잘려 나간
세상의 손들이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유혈의 거리거리에서.
• 농촌 이민(전문)
아침은 어머니들이었지요
그네들의 목초를 키우는
과수원을 가로질러
보이지 않는 침대보를 말리는.
김을 내뿜는 바위들을
태양과 침대 이야기로 괴롭히는.
저녁은 울타리를 심어 놓고
강아지 키만큼 자란 풀 사이에서 부리로 쪼는
닭들에게 눈길을 주곤 했지요
허풍쟁이 구름들을 불러모아
아이들을 먹이는 어머니들에게
열정의 말을 천둥처럼 퍼붓곤 했지요.
하루하루
아침과 저녁이 짝이 되었고
풀과 나뭇잎들이 자랐으며
흠뻑 젖은 푸른색 꽃술이
우리네 호두나무에서 떨어졌지요.
죽은 애벌레처럼.
• 남은 것들(전문)
환하게 빛나던 손님들이 떠났습니다.
푸른빛의 장식들이 거두어지고
그늘을 드리우지 못하는 빛이
창문 위에 낀 모진 성에를 눈감아 줍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풀들이
그네들의 씨앗을 흩뿌리던 곳에서는
철 구조물의 갈라진 틈 위로
이제 얼음이 잠자리를 마련합니다.
하지만 아직 안타까워하지 마오
개똥지빠귀의 작고 조심스런 눈동자가
살며시 다가오는 침묵이
이 조심스런 시행(詩行)들이
여전히 증언하고 있으니까
우회적으로
인간의 변치 않는
끈기를.
• 트로이에서 온 엽서
이 대도시에서는
죽음이 양가죽을 뒤집어쓰고 있지요
고속도로를 따라
차량의 행렬은 끊이지 않아요.
“중략”
• 시 (전문)
한마디 한마디 나는 묘사합니다
당신은 하나하나 사실을 맏으들이고
이렇게 자신에게 묻습니다
그의 말이 진실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연이어 펼쳐진 사절판 크기의 하늘
소금기 배인 하늘
별들로 구멍이 뚫린
다른 하늘에서 인쇄하듯 옮겨 온
ㅈ나잔한 눈물로 덮인 하늘
말리기 위해 펼쳐 놓은 페이지들.
글자와도 같은 새들이 날아가고 있습니다.
아, 우리도 날아가게 해주오.
알 수 없는 글자 같은 새들의 보루 가까이
물 위에서 원을 그리다 그 위에 자리잡게 해주오.
• 하우를 위하여(전문)
나는 당신을 알고 있습니다
내 무지를 통해,
그리고 조심스럽게
당신이 인용으로 채웠던
내 무지의
공간을 통해
나는 당신을 알고 있습니다
과묵함이 담긴 당신의 희미한 미소를 통해
그리고 조각조각 기운 소매 속에
당신이 숨겨 놓았던 자부심의
공간을 통해
나는 당신을 알고 있습니다
죽음 직전의 순간을 통해
비탄에 젖은 말(言)에서
당신이 찾았던 신(神)의
공간을 통해
나는 당신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딸을 통해
그리고 이곳과 그때 사이의
말들의
공간을 통해.
• 말 2 (전문)
혀는
등뼈의 첫 잎새
언어의 숲이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첫 잎새
두더지처럼
혀는
말의 대지 속으로 구멍을 파고드오
새처럼
혀는
문자화한 말 위로 원을 그리며 비행하오
혀는 입 속에 묶인 채 홀로 있소
• 영감靈感 (전문)
교외 지역의 집
지하층 부엌을 차지하고 있는
잡동사니
그릇에 내던져진 마늘
그 마늘의
무늬를 만드는
말린 정향(丁香)들한 가운데서
푸름에 대한 예감이
맹렬하게 건의한다
태양의 아낌없는 귀환을
• 르모리앙에서 스벤, 로맨느, 아냐를 위하여
1.(전문)
칼 손잡이들의 노란색이
산 아래로 흘러
올리브 나무들을 지나,
연이은 몇 계절의 올리브 기름으로
돌이돌을 달래고 있는
내 맺돌의 연륜에까지,
그리고 잠든 사나이가
내 맺돌 바퀴의 정적에
깨어날지도.
2.(전문)
나비 한 마리가 낱알 하나를 일깨우고
그 낱알이 또 하나의 낱알을 일깨우고 있어요
먼지 속에서 마찰이 일고
잉태한 돌 위에
하늘이 푸른 젖을 흘릴 때까지
하루가 탄생합니다
열린 눈들의 위태롭고 가파른 시선 아래로
나무들이 이끌립니다.
3. (전문)
손끝이 닿는 곳 밤의 높이에서
풀들은 항상 자라겠지요
내 이파리의 이파리도
하지만 아주 이르게
그리고 꼿꼿이
나무들을 따라가노라면
거미줄이 부서지는 것이 느껴지고
마침내 밤의 모든 연계선이 끊어집니다
그리고 나는 홀로 발걸음을 앞으로 옮깁니다
첫 손님의 눈 그 홍채 위에 비친
벌꿀빛 반점(斑點)이 되기 위해.
• 엘비스(전문)
자작나무
안에서 검은 새가
자신의 날개를
잎새와 맞바꿉니다
등나무를 향해 노래를 하고
사라집니다
영원히
박수갈채와도 같은
무성한 잎새들 속으로.
• 죽음(전문)
맺돼지가
나를 유린했다는
믿음 아래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그 맺돼지를 사냥하는
동안
매 순간
내 머리의 숲에서 잎이 하나씩 떨어집니다
• 음악
카나리아가 독수리 안에서 노래합니다
미친듯이
카나리아가 독수리의 가슴 안에서 노래합니다.
새장에 ㄱ다힌듯 그 안에 갇혀
"중략"
• 침엽수림 지대의 시 두 편
(넬라를 위하여)
덤블 속에서
빛은 망치로 두드려 편 못
덤블 속에서
말(언)은 죽은 이들의 것
덤블 속에서
소식은 감옥에 관한 것
가장 나쁜 선택임을 알고
덤블은 우리를 선택했소.
덤블 속에서 우리는 멧돼지로부터 요령을 터득했소
덤블 속에서
우리는 별들에 낀 성에를 감지했소
덤블을 날라
우리는 빵을 데우기 위한 오븐을 달궜소
좀더 나쁜 선택임을 알고
우리는 덤블을 선택했소
“중략”
• 수건(전문)
아침에
빨아 다리미질하여
야생화 무늬와 함께 접어놓은 수건이
서랍에서 차지하는 공간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흔들어 펼쳐
그녀는 머리에 그것을 맵니다
저녁에 그녀는 수건을 벗어
아직 매듭이 지어진 채로
마룻바닥에 드리워지게 합니다
면으로 된 수건 위
꽃무늬 사이로
노동의 하루가
자신의 꿈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 대도시(전문)
운하의
수면처럼
예리한
달빛의 모서리가
어둠의 수위가
빛의 수위까지
낮아진
새벽 무렵
이성의 자물쇠들이
어둠을
덩이진 암흑을
실명(失明)의 지역을 허락하고 있소
그것을 허락하라 눈(眼)들이여
하지만 이곳에서는 이미
어둠은 자루에 담긴 채 도난당했고
조약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물밑으로 가라앉고 말았소
더 이상 이곳에는 그 어떤 어둠도 없다오.
• 공장
이곳을 지배하는 것은
영원한 새벽의 시간
깨어남의 시간
혁명적 예언의 시간
생명을 잃은 등걸불의 시간
끝도 없이 이어지는
밤낮이 없는 노동의 시간
“중략”
• 물가
밤새도록 허드슨 강은
잠자리에 누워 기침하오
나는 잠들려 애쓰오
내 조국은
나무에 못 박힌 짐승의 가죽
“중략”
• 부재
태양의 고도가 풀의 키만큼이나 낮아졌을 때
보석들이 나무에 걸렸을 때
그리고 순환도로를 따라 도열한 형광빛 가로등 사이에서
테라스가 장밋빛으로 바뀌었을 때
아파트 건물들은 자기네들 피에타를 내걸었소
“중략”
• 먼 마을
산들은 무정하고
비는 눈을 녹이고 있지만
녹은 눈은 다시 얼 것입니다
카페에서는 두 이방인이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방 하나 가득 남자들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중략”
• 외톨이 목동의 달맞이
커피 잔의 갈라진 금처럼
나날이 새롭게 새겨지는
저 지평선 위에서
내가 네 살 때 보았던 만큼의 크기로
암소들의 크기가 변합니다
암소들의 북쪽으로
큰 바위로 불리는
바위들이 풀을 뜯고 있습니다
모든 일이 마감되엇을때
달이 뜨는 바로 그곳에서
먼저 보랏빛 달무리
사람들이 말하길 아버지 나의 아버지가
이끌려 맨발로 쫓아갔던
그녀가 무도회에서 입었던
드레스 색깔의 달무리
아들아 드레스에는 옷단이 없다
이윽고 창백한 피부의 호수
지난 어느날 밤
사내아이들이 헤엄을 치고는
물가에 장화를 버려둔 채
다시금 찾아 오르지 않는 바로 그곳에
아들아 지평선이 입처럼 열린다
천천히 천천히
뼈처럼 하얀 머리가 탄생하고
뒤이어 빛에 감싸인 당신의 몸이
미끄러지듯 가볍게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나의 신(神)인 당신이 왔던 바로 그곳에서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 깨어 있음에 관하여 (전문)
많은 사람들에게는 친구를 만나 술잔을 나누고 싶은, 자신이 좋아하는 술집이 있다. 나는 친구들과 집에서 마시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시립 수영장은 있다. 거기서 나는 나만의 속도로 레인을 오르내리고, 모르는 사람들을 스쳐 지난다. 그렇게 스쳐 지날 때면 눈길을, 가끔은 미소를 주기도 한다.
수영모를 쓰는 것은 필수다. 다이빙을 하기 전에, 혹은 모퉁이의 사다리를 통해 풀에 들어오기 전에 비누로 몸을 씻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이빙을 하고 물 밑에서 첫 번째 스트로크를 내뻗기 전, 나는 다른 시간 단위에 접어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마치 어린이가 집 안의 한 층에서 다른 층으로 가기로 결정했을 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다.
수영장 이용객들은 평등한 익명성을 공유한다. 신발도, 계급을 알리는 표지도 없이, 그저 각자 입은 수영복뿐이다. 지나치다 다른 사람을 우연히 건드리면 사과를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보일 수 있는 무한한 잔인함, 조직화되고, 무언가에 세뇌 되었을 때 우리가 보일 수 있는 그런 잔인함을 이곳에서는, 열두 바퀴째를 향해 몸을 뒤집으면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시립 수영장의 외벽과 평평한 지붕은 유리로 되어 있다. 그래서 물 안에서도 주변 건물들이나 하늘을 볼 수 있다. 왼쪽에는 잔디가 심어진 언덕이 있고, 언덕 맨 위에 키가 사탕단풍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옆으로 누워 수영할 때면 이 나무가 보인다.
하늘을 찌를 듯 위로 뻗은 나뭇가지들 때문에 나무 전체의 형태는 나뭇잎 하나하나와 닮았다.(대부분의 나무들은 어느 정도는 이런 경향을 보인다.) 단풍잎이 깃처럼 생겼다. ‘깃털’을 뜻하는 라틴어가 ‘피나pinna'다. 잎의 앞면은 샐러드의 녹색이고, 디 쪽은 녹색 빛이 도는 은색이다. 단풍잎이 깃 모양이 되는 건 운명이다.
풀에서 나오자마자 그 잎을 그리기로 마음먹는다. 종이 한 장에 나무 전체와 가까이에서 본 나뭇잎 한 장을 함께 스케치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단풍나무의 유전자 코드에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거라고. 나는 계속 수영을 하며 속으로 혼잣말을 한다. 그건 일종의 사탕단풍나무의 텍스트가 되는 거라고.
그런 텍스트는 말없는 어떤 언어에 속한다. 우리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읽어 온 언어, 하지만 뭐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언어 말이다.
나중에 나는 배영을 하며 철제 틀 사이에 유리창을 이어 붙인 지붕을 통해 하늘을 본다. 눈부시게 파란 하늘 높은 곳에 하양 새털구름이 떠 있다. 짐작키로 높이는 오천 미터쯤 될 것 같다.(곱슬곱슬한 털을 뜻하는 라틴어가 시루스다) 털들은 천천히 움직이며 하나가 되었다가, 바람이 구름을 덮칠 때면 다시 흩어진다. 지붕의 철제 틀이 없었다면 움직임을 알아차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털들이 움직이는 건 구름에 작용하는 압력 때문이 아니라 각각의 구름 안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어떤 운동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잠든 사람의 몸이 움직이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그런 이유로 나는 수영을 잠시 멈추고, 머리 뒤로 깍지를 낀 채 가만히 떠 있다. 나의 커다란 발가락이 수면 위로 나오고, 그 아래 물이 나를 받쳐 준다.
털들의 움직임을 오래 지켜볼수록 나는 말없이 진행되는 이야기들을 떠올린다. 종종 손가락들이 하는 말 없는 이야기와 비슷하지만, 사실 여기서 이야기는 아주 작은 얼음 결정과 파란 침묵이 전하는 이야기다.
어제 신문에서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인 스무 명이 집에서 폭격을 맞았다는 소식을 읽었다. 미국이 이라크에 있는 자신들의 정유시설을 지키기 위해 삼백 개가 넘는 부대를 은밀히 파병했다는 소식과 아이에스에 납치된 미국 언론인 제임스 폴리의 참수 장면이 공개되었다는 소식, 남자, 여자, 어린이가 포함된 서른다섯 명의 인도 출신 불법 이민자들이 런던에 정박하기 위해 이제 막 북해를 건넌 화물선의 컨테이너 안에서 질식사했다는 소식을 읽었다.
새털구름은 북쪽, 수영장의 끝을 향해 흘러간다. 나는 물에 뜬 채로 가만히 누워, 꼼짝도 하지 않는다. 나는 구름을 지켜보며, 눈으로 그 넘실거리는 모양을 기록한다.
그때 풍경이 보여 주는 확신이 변한다. 변화를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천천히 그 변화는 분명해지고, 내가 받는 확신도 더 깊어진다. 하양 새털구름의 털들이 손을 머리 뒤로 깍지 낀 채 물 위에 떠 있는 한 남자를 바라본다. 이젠 내가 그것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나를 바라본다.
• 만남의 장소
최근에 이라크 시인 압둘카림 카시드의 시를 읽기 시작했다. 그의 시를 읽고 또 읽는다.
이 고양이
녀석은 엿들을까
나의 수다를?
그는 1946년 바스라에서 태어났다. 현재 그는 런던에 살고 있다.
그의 목소리, 그가 만들어내는 이야기, 그가 질문을 하는 방식은, 나로 하여금 사막에 있는 게 어떤 경험일지 생각하게 한다. 사막에는 모래와 하늘 사이의 공간이 무한해 보이는 곳들도 있고, 그 둘 사이에 공간이 전혀 없어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곳들도 있다. 하지만 그런 곳들을 걸어서 지날 때면, 똑자로 선 몸으로 느끼는 공기의 질감은 두 곳 모두 같다. 카시드의 단어들이 읽는 이의 상상 속에서 가지는 질감이 그렇다.
멀리 있는 카페....
지금 나무처럼 보이네
가지와 잎으로 지붕을 t마고
의자들은 그 목재로 만들었지
그곳을 찾는 이들은 거기 앉는 걸 좋아하지
가볍게, 그 가지 위에.
• 라 라라라 라라라 라
개를 해안에 데리고 오는 걸 엄격히 금지한다는 안내판이 해변 산책길을 따라 늘어서 있다. 10월 초, 해수욕객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래밭을 따라 산책을 하고, 몇몇은 일광욕을 한다. 그런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은 개와 함께 왔다. 여기는 이탈리아다.
• 노래에 관한 몇 개의 노트 야스민 함단을 위하여
지난주 당신의 공연을 지켜보고 귀를 기울일 때, 야스민, 당신을 그려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습니다. 말이 안 되는 충동이었지요. 너무 어두웠으니까요. 내 무릎에 놓인 스케치북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따금 스케치북을 보지 않고, 당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끼적이기는 했지요.
그 끼적임에는 리듬이 있습니다. 마치 나의 펜이 당신의 목소리와 함께 움직이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펜이 하모니카나 타악기는 아닌 까닭에, 지금 침묵 속에서 다시 보니 그 끼적임에는 아무 의미도 없네요.
당신은 빨간색 하이힐과 검은색 레깅스, 반쯤 투명하고 어깨에 패드가 들어간 짙은 갈색의 티셔츠, 그리고 오렌지 색, 아니 살구 색 숄을 두른 차림이었죠. 당신은 아주 가볍고, 건조하고, 희박한 어떤 존재 같았습니다. 늘 무언가를 궁금해 하는 사람 같았어요.
노래를 시작하니 당신은 달라지더군요. 당신의 온몸이 더 이상 건조하지 않고 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마치 액체를 가득 넘치게 부어 버린 병 같았죠.
어머니가 부르시던 노래 중에 가장 기억나는 곡은 <세넌도어>다. 어머니는 저녁 식사가 끝나면 손님이 있거나 혹은 그저 가족들이 말없이 포만감에 빠져 있는 순간에 종종 노래를 부르곤 하셨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알토였고, 듣기 좋았지만 한 번도 극적이지는 않았다. <셰넌도어>는 아버지의 노래책에 있던 곡으로, 십구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노래다. 셰넌도어 계곡은 미국 중부의 인디언 정착지에 있다.
오 셰넌도어
얼마나 보고 싶엇는지
멀리, 너는 흘러가는 강물
오 셰넌도어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멀리, 나는 달려가지
거친 미주리 강을 건너.
셰넌도어는 아메리칸 원주민 족장의 이름이자, 미주리 강의 지류 이름이다.. 미주리 강은 다시 미시시피 강과 합류한다.
노래는 강과 같아서 한 곡 한 곡이 자신만의 길을 따라 흘러 간다.
삶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는 이름이 없는데, 이는 우리의 어휘가 가난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들을 콘 소리로 전하는 것은, 이야기꾼이 그렇게 이야기를 전하는 행위를 통해 이름 없는 어떤 사건을 익숙하고 친숙한 것으로 바꾸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는 친밀함을 가까움과 연관시키는 경향이 있고, 또한 가까움은 함께 나누었던 경험의 양과 연관시키곤 한다. 하지만 현ㅅ리에서는 완전히 낯선 사람들이 서로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은 상태에서도 친밀함을 공유할 수 있다. 주고 받는 눈빛에 담긴 친밀함, 끄덕이는 고개, 미소, 어깨를 으쓱하는 행동에 담긴 친밀함, 몇 분 동안 노래 한 곡이 불리고, 거기에 함께 귀를 기울이는 시간 동안 지속되는 가까움, tfka에 대한 어떤 합의, 아무런 조건도 없는 합의. 노래 주위에서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들 사이에 자발적으로 공유되는 어떤 결론.
저녁 여덟시 파리 교외로 향하는 지하철 안, 빈자리는 없지만 서 잇는 사람들도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다. 지하철 차량의 오른쪽에 있는 출입문 앞에 이십대 중반의 남자 네 명이 무리지어 서 있다. 그쪽 출입문은 기차가 현재 방향으로 움직이는 동안 열릴 일이 없다.
[모든 것을 소중히 하라]
• 돌에 관한 생각
나는 자카리아 모하메드의 ‘재갈’이라는 시를 읽었다. 시는 재갈도 물리지 않았는데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검은 말을 그리고 있다.
저 검은 말은 무얼 저리 씹고 있을까?
소년은 묻는다.
대체 무얼 씹고 있을까?
검은 말은
깨물어 씹고 있다.
차가운 쇠로부터 벼리어진
한 조각 기억의 재갈을.
죽을 때까지
씹고 또 씹어야 할
그 기억의 재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