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꿈은 공무원이나 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할아버지는 내게 사범학교 진학을 권했지만, 나는 대학교수가 되고 싶다며 일반계인 대전중학교로 진학했다.
거기서 나는 평생의 친구 정상문(鄭相文·육사 12기)을 만났다. 인상이 깨끗해 첫눈에 호감이 가는 친구였다. 이현덕이라는 친구도 가까이 지냈다. 어느 날 우리 세 사람은 학교 뒤에 있는 보문산에 올랐다. 우리는 풀밭을 뒹굴며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먼저 정상문이 말했다.
“나는 기다리며 살 거다.”
이현덕은 “인생이 별거냐. 나는 그럭저럭 살 거다”라고 말했다. 내 차례가 되자 나는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밀려서 살 거다.”
왜 그렇게 말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내 삶을 돌아보면 그때 말했던 것처럼 살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육군 중령 추천장으로 고교 졸업장 대신해
1950년 6·25가 터졌다. 밀양에서 피란생활을 하던 나는 그해 9월 15일(이날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날이었지만, 그때는 그 사실을 몰랐다), 제3육군병원 위생병으로 자원입대했다. 열일곱 살 때였다.
그해 11월 나는 육군본부 직할 의무후송대대로 전출됐다. 이후 나는 1년 반 동안 전후방 병원에서 전쟁을 치렀다. 직접 총을 들고 적과 싸우지는 않았지만, 팔다리가 잘려나간 병사들과 죽어 넘어진 민간인들의 시체를 수없이 보면서 전쟁의 참상을 절감했다.
1952년 봄, 나는 대구 육군본부로 갔다가 정규 육사(陸士) 2기생(육사 12기) 모집공고를 봤다. 4년간 교육을 받은 후 이학사(理學士) 학위를 받고 소위로 임관한다는 얘기를 접하는 순간, 나는 주저 없이 육사 입교를 결심했다.
사관학교 시험 응시를 위해서는 고등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했다. 대전고(1951년 6년제 중학교가 3년제 중·고등학교로 분리)를 찾아갔다. 하지만 옛날 담임선생님은 졸업증을 줄 수 없고 고교 2년 수료증을 발급해 주겠다고 했다. 군에 입대하지 않은 친구들은 대학 진학의 꿈에 부풀어 있었다. 자원입대한 것이 내 발목을 잡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다행히 대대장 백창기 중령이 추천장을 써주었다. 그는 “박준병 병장은 고등학교 졸업 자격이 있음을 인정함”이라는 문서를 작성한 후, 대대장 관인(官印)을 찍어주었다. 엄밀히 말해 그게 법적으로 졸업장을 갈음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게 통했다.
1952년 3월 육사 입학 시험에 합격한 나는 그해 7월 진해에 있던 육사에 입학했다. 내가 입교할 당시 교장은 안춘생(安椿生) 준장이었다. 1951년 4년제 정규 육사를 만들면서,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이종찬(李鍾贊, 국방부장관 역임) 장군은 국군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6촌 동생인 안춘생 장군을 육사 교장으로 임명했다고 한다.
모든 게 부족한 상황이었지만, 다시 공부할 기회를 잡게 된 나는 열심히 공부했다. 덕분에 졸업할 때 군사학 성적이 가장 우수한 생도에게 주는 지상(智賞)을 받았다.
쿠데타에 반대하던 이한림 1군사령관
1956년 6월 육군 소위로 임관한 나는 1년간 강원도 화천 북방의 9사단에서 소대장 근무를 했다. 이듬해 6월 나는 중위로 진급, 육사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교장은 이한림(李翰林) 장군이었다.
전입(轉入)신고를 하는 자리에서 이한림 장군은 새로 생긴 위탁교육제도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인재양성을 위해 인문계통은 서울대에, 이공계는 미국의 대학원으로 진학해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기회를 만난 나는 서울대 사학과에 편입했다. 여기서 나는 이병도(李丙燾)·김상기(金庠基)·전해종(全海宗)·고병익(高柄翊)·민석홍(閔錫泓)·한우근(韓劤) 교수 등 쟁쟁한 분들 밑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2년간 위탁교육을 마치고 육사로 돌아온 나는 육사 사학과 전임강사로 생도(20기)들에게 국사를 가르쳤다.
4·19로 이승만(李承晩) 정권이 무너지고 장면(張勉)이 들어선 1960년 10월, 이한림 육사 교장은 1군사령관으로 영전(榮轉)했다. 이듬해 4월 이 장군은 나를 전속부관으로 불렀다.
5·16 쿠데타가 일어난 것은 내가 이한림 장군의 부관으로 부임한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이한림 사령관은 당초에는 군(軍)의 정치적 중립 고수라는 관점에서 쿠데타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 사령관은 임부택(林富澤) 소장의 1군단에 출동준비를 명령했다.
하지만 쿠데타 진압 명령을 내려야 할 장면 총리는 잠적한 상태였다. 윤보선(尹潽善) 대통령은 비서관을 전방 지휘관들에게 보내 “국군끼리 충돌해 피를 흘리는 일은 피하라”고 설득했다. 결국 이한림 장군은 ‘쿠데타 묵인’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러나 5·16 주체세력은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지 5월 18일 아침 6시, 1개 소대가량의 병력이 사령관 공관을 포위했다. 작전처에 근무하던 엄병길(嚴秉吉) 중령 등 영관급 장교 3~4명이 내실로 들어갔다. 방에서는 고성(高聲)이 터져나왔다.
아침 7시경, 이한림 장군이 나를 불렀다.
“서울로 갈 테니, 지프를 대기시켜라.”
한 달간 감옥생활
공관 현관에 지프를 대기시켜 놓고 얼마 후, 이한림 장군이 엄병길 중령 등에 둘러싸여 나왔다. 지프에 오르기 전 엄 중령이 이한림 장군에게 권총을 풀어달라고 했다. 순간 이한림 장군이 호통을 쳤다.
“항장(降將)이라도 장군은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법이다. 대체 너희가 뭐기에 감히 권총을 달라는 것이냐?”
엄 중령 등도 물러서지 않았다. 곁에 있던 군수참모 박원근(朴元根) 준장이 이한림 장군을 설득, 권총의 실탄을 빼낸 후 빈 권총을 이 장군에게 돌려주었다. 엄병길 중령이 운전대를 잡았다. 내가 뒷자리에 탑승하려고 하자 이한림 장군이 만류했다.
“자네는 따라올 필요 없네. 여기 남아 있어.”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이 장군이 언성을 높였다.
“나는 죽으러 가는 길이야! 자네가 뭐 하러 따라온다는 말인가? 남아 있어!”
“저는 사령관님의 전속부관입니다. 그곳이 어디든 모시고 가야 합니다.”
나는 이 장군이 더 이상 뭐라고 하기 전에 얼른 지프 뒷자리에 올랐다.
그날 정오 서울 덕수궁으로 연행됐던 이한림 장군과 나는 그날 저녁 중구 필동 헌병대로 옮겨졌다. 사흘 후 나는 다시 마포형무소로 이송됐다. 여기서 나는 한 달간 수감생활을 했다. 불러서 조사받는 일도 없이 무료하게 시간이 흘렀다. 이한림 장군 생각만 하면 가슴이 먹먹했다.
이한림 장군은 반(反)혁명으로 몰려 수감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기회만 있으면 관계 요로에 나의 구명을 호소했다고 한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이한림 장군은 후일 박정희 정권에서 건설부 장관, 주터키대사, 주호주대사 등을 지냈다. 이한림 장군은 2012년 4월 29일 91세로 별세했다. 이 장군의 아드님은 “말년에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 이름은 잘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박 장군 이름은 또렷하게 기억하셨다”고 했다.
崔周鍾 장군의 배려
6월 15일 5·16 주체로 혁명검찰부장을 맡고 있던 박창암(朴蒼岩) 대령이 불렀다. 그는 이한림 장군이 육사 교장으로 있던 시절, 육사 생도대 부(副)대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나와도 아는 사이였다. 그는 “고생 많았다. 특별히 문제가 있어서 구속했던 것은 아니었다”면서, 혁명검찰부에서 일해도 좋고, 원대복귀해도 좋다고 했다. 나는 원대복귀를 택했다. 다행히 주위에서는 쿠데타라는 비상상황 아래서 내가 취한 태도를 좋게 봐주었다.
6월 말 나는 최주종(崔周鍾) 소장이 사단장으로 있는 8사단 중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최 장군은 이한림 장군이 육사 교장으로 있을 때 생도대장을 맡던 분으로, 5·16 주체 중 하나였다.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최 장군이 예고 없이 우리 중대를 방문했다. 최 장군은 병사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나와 중대장실에서 잠시 담소를 나누었다. 중대를 떠나기 전 최 장군은 지프에 오르다 말고 내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박 대위, 열심히 해! 누구든지 박 대위에게 시비하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 자리에는 연대장·대대장을 비롯한 여러 명의 장교가 있었다. 내가 이한림 장군을 모시다 수감됐던 사실 때문에 불이익을 받을까 봐 하는 얘기 같았다. 고마웠다. 최주종 장군은 이후에도 종종 나를 찾아와 격려해 주곤 했다.
그해 말 나는 소령급이 맡는 핵심보직인 연대 작전과장을 맡았다. 파격이었다. 이 또한 최주종 장군의 배려였다.
이 무렵 나는 군인으로서 자신감을 얻게 됐다. 솔직히 육사에 들어갈 때만 해도 군인으로서의 적성에 대한 자각이나 소명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고교 친구 정상문의 소개로 알게 된 장기영(張基榮) 《한국일보》 사장은 내게 의무복무기간 5년만 채우고 나오면 신문사에 자리를 만들어주고 미국유학도 시켜주겠다고 약속했었다. 한때 그 얘기에 솔깃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중대장과 연대 작전과장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나는 한눈팔지 않고 직업군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1964년 소령으로 진급한 나는 이듬해 미국 포트 브래그(Fort Bragg)에 있는 특수전학교에서 6개월간 비정규전(非正規戰) 과정을 연수했다. 당시는 베트남전이 확대되고 있을 때여서 심리전(心理戰) 등 비정규전 과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을 때였다.
포트 브래그에는 브라질, 필리핀, 태국 등에서 유학 온 장교들이 있었다. 모두 우리보다 잘사는 나라들이었다. 그들은 “코리아는 어디 있는 나라냐?”, “전쟁의 상처는 아물었느냐?”, “코리아는 가난한 나라라는데, 당신 월급은 얼마나 되느냐?” 등을 물으며 나를 괴롭혔다. 지금과 비교하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지뢰 매설로 敵 爆殺
나는 1966년 12월 주월한국군사령부 민사심리처 요원으로 월남으로 파병됐다. 나를 좋게 본 채명신(蔡命新) 사령관은 이듬해 7월 나를 민사심리전대장으로 임명했다. 나는 사령부 정례 주간회의에서 ‘주월한국군 민사심리전의 문제점과 발전방향’이라는 브리핑을 했다. 이 브리핑에는 포트 브래그에서 배운 최신 이론과 함께, 서울대에서 배운 역사학의 관점서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 정서를 정리한 내용을 담았다. 이 브리핑은 채명신 사령관의 극찬을 받았다. 나는 ‘육군에서 브리핑을 가장 잘하는 장교’라는 평을 들었다. 이러한 평가는 이듬해 중령으로 진급하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1968년 7월 귀국한 나는 최전방 대대장직을 희망했다. 8월 말 나는 강원도 원통의 12사단 37연대 2대대장으로 부임했다. 멀리 해금강이 보이는 건봉산 전방 1031고지 일대를 담당하는 부대였다. 그때 나는 중령 진급 예정자 신분이었다.
당시는 1·21사태를 비롯해 크고 작은 북한의 도발이 빈발하던 때였다. 나는 GP를 지키는 소대장·중대장들에게 적의 예상침투로에 대한 지형정찰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그해 10월 20일 북한군이 침투해 우리 GP의 전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간 것 같다는 휘하 5중대장의 보고를 받았다. 며칠 후에도 북한군이 침투해 인접 GP 전방에서 묵고 간 것 같은 흔적이 발견됐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나는 두 차례 침투로의 교차지점에 M16 지뢰 두 발을 매설하라고 지시했다.
11월 1일은 내가 중령으로 진급하는 날이었다. 진급신고를 하기 위해 사단본부로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5중대장으로부터 긴급보고가 들어왔다. 며칠 전 지뢰를 매설한 지점에서 폭발음이 났다는 것이었다. 현장에서는 북한군 시체 7구가 발견됐다.
백문(白文) 사단장은 직접 우리 대대를 찾아와 내게 중령 계급장을 달아주면서 크게 칭찬을 해주었다. 백 사단장은 이 전과(戰果)를 직접 상세히 기록해 내 장교 인사기록카드 고과표에 별지로 첨부해 놓았다. 이는 내가 동기생들 가운데 선두로 대령 진급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 내 지시를 충실히 이행해 준 부하들 덕분이었다.
盧泰愚 대령과의 만남
1970년 초 나는 대대장 근무를 마치고 진해에 있는 육군대학에 입교했다. 육대에서 공부하는 것은 원래 공부를 좋아하던 내게는 즐거운 일이었다. 덕분에 육대를 수석졸업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육대 수석졸업자는 육대 교관 요원으로 남아야 한다는 불문율(不文律)이 있던 것이었다. 최소한 2~3년은 육대에 남아야 했다.
대령 진급을 앞두고 있던 나는 그보다는 서울의 육군본부에서 일하고 싶었다. 결혼 후 8년 동안 미국 유학, 월남 파병, 전방 대대장 근무 등으로 가족과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이제는 서울에서 근무하면서 가족과 함께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때 도움을 준 사람이 육사 1기 선배인 노태우(盧泰愚) 대령이었다. 당시 그는 육본 인사참모부 대령과장(大領課長)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의 주요 업무 가운데 하나가 육대 졸업생들을 면담하고 희망보직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진해로 내려온 노태우 대령에게 나는 간곡하게 나의 희망을 이야기했다. 그때까지 나는 그와 잘 알지 못하는 사이였다. 내 얘기를 들은 노 대령은 “걱정 말라”고 했다. 나중에 들으니, 노 대령은 육대총장 김익권(金益權) 소장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박 중령을 육대에 데리고 있으려면, 총장께서 책임지고 박 중령을 진급시켜 주셔야 합니다. 박 중령은 이번에 진급 케이스 아닙니까? 만일 책임질 자신이 없으면, 서울로 보내 주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육대에는 오랫동안 육대에서 근무해 온 고참 중령들이 많았다. 그들 외에 나의 진급까지 ‘책임’지는 것은 김익권 총장으로서는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결국 김 총장은 나를 서울로 보내 주었다. 나는 노태우 대령의 재치 있는 일처리가 고마웠다.
全斗煥, 군내 하나회 활동 중단 지시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하나회 회원이 아니었다. 전두환(全斗煥), 노태우 선배 등은 이름만 들었을 뿐,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이였다. 다만 11기 권익현(權翊鉉) 선배와는 생도 시절부터 가까운 사이였다. 그와는 생도 시절 우연한 기회에 가까워져서 의형제를 맺기까지 했다.
내가 하나회원이 된 것은 대령 진급 이후였다. 권익현 선배 등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영남 출신이 주축이 된 하나회에서 나는 회원으로 크게 활동한 것도, 그로 인해 진급 등에서 특혜를 받거나 한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보안사령관으로 있을 때,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지시로 군내 하나회 활동을 중단시켰다. 후일 12·12사건 재판 때 전두환 전 대통령은 “박준병이는 하나회 회원이 아니다”라고 했다.
1970년 가을, 나는 대령 진급 예정자로 선발됐다. 심사위원들은 내가 대대장 시절 침투하는 적을 지뢰로 폭살시킨 전과를 기록해 놓은 백문 사단장의 인사고과표가 결정적이었다고 말했다.
1971년 6월, 인사참모부 대령과장 권익현 대령이 찾아왔다. 생도 시절부터 나와 가까웠던 권 대령은 당시 군부(軍部) 실세였던 윤필용(尹必鏞) 수도경비사령관의 최측근이었다. 그는 나를 윤필용 장군의 측근으로 추천하고 싶다고 했다. 고마운 제안이었다. 권 대령이 힘을 써준 덕분에, 나는 윤 장군과 아무런 인연이 없으면서도 수경사 인사참모로 발령이 났다.
내가 실제로 모셔본 윤필용 장군은 온후하고 인간적인 분이었다. 부양가족이 많은 나를 자주 사무실로 불러, “지난 주말 내기 골프해서 딴 돈이야”, “고스톱해서 딴 돈이야”라면서 수표를 쥐여주곤 했다.
당시 윤필용 장군의 수경사는 강창성(姜昌成) 장군의 육군보안사령부와 경쟁하는 권력기관이었다. 윤 장군과 강 장군은 육사 8기 동기생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다투는 경쟁자이기도 했다.
임관 이래 육사, 야전군, 주월한국군에서 오래 근무했던 나로서는 그런 모습들이 생소했다. 5·16 당시 이한림 장군이 투옥됐던 일도 새삼 떠올랐다. 수경사에서 근무하면서 나는 ‘권력의 중심에 서면 알력이 심하다. 권력은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尹必鏞 사건의 禍 모면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10월 유신(維新)을 선포했다. 당시 나는 수경사 작전참모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수경사령관은 한 달에 한 번씩 대통령에게 부대 현황을 보고하는 독대(獨對)를 했는데, 그 독대가 자꾸만 미루어진 것이다.
그해 11월경, 윤필용 장군과 절친한 사이인 김진구(金振九) 26사단장이 윤 장군을 만나러 왔다가 내 방에 들렀다. 26사단은 의정부에 주둔하는 6군단 예하 예비사단이었다. 그는 내게 사단 예하 연대장 자리를 제안했다. 좋은 기회였다. 윤필용 장군도 흔쾌히 승낙했다.
그런데 12월 초, 다시 수경사에 들렀던 김진구 사단장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내가 가기로 했던 연대장 자리에 보안사 소속 박모 대령을 추천하고 있다고 말했다.
순간 내 인사문제 때문에 윤필용 장군과 강창성 장군이 대립하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바로 김진구 장군과 함께 윤 장군을 찾아가 이렇게 말씀드렸다.
“정규 육사 출신으로 동기 중 선두주자인 제가, 남들이 모두 가고 싶어하는 서울 근교 예비사단에 가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동부전선의 전방사단 연대장으로 가겠습니다.”
김진구 사단장이 고민하던 강창성 장군의 박모 대령 추천 건은 얘기하지 않았다. 윤 장군은 내 결심을 기특하게 여기고 “역시 박 대령은 우리 군의 간성(干城)”이라며 격려해 주었다. 1973년 초 나는 28사단 81연대장으로 부임했다. 전방이기는 했지만, 서울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내가 연대장으로 나간 지 채 두 달이 되지 않았을 때, 육군을 발칵 뒤집어놓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윤필용 사건’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오랜 측근이었던 윤필용 장군이 “박정희 대통령은 노쇠했으니 일선에서 물러나고, 이후락(李厚洛) 중앙정보부장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한 발언이 발단이었다.
윤필용 장군과 그의 측근 장교들은 대역(大逆)을 꾀한 혐의로 잡혀 들어가 고초를 겪은 후, 부정부패 등의 죄목으로 실형(實刑)을 선고받았다. 육사 11기인 수경사 참모장 손영길(孫永吉) 준장, 26사단 연대장 권익현 대령 등이 유죄판결을 받고 예편당했다.
모골이 송연했다. 만약 내가 김진구 26사단장의 제안을 받은 후 26사단 연대장으로 나갔다면? 나 역시 윤필용 사건의 태풍을 피해가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윤필용 장군과 강창성 장군 사이에서 갈등의 요인이 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그 자리를 사양한 것이 내게는 행운이 된 셈이었다.
대통령 有故 모르고 10·26 때 서울로 출동
1975년 1월, 나는 군인이라면 누구나 대망(待望)하는 별을 달았다. 나는 제3하사관학교장, 육본 교육참모부 기획처장, 육본 인사참모부 인사관리처장 등을 지낸 후 1979년 8월 3일 소장으로 진급했다. 경기 양평의 20사단장이 내게 주어진 보직이었다. 나와 함께 동기생 가운데 처음으로 사단장이 된 박세직(朴世直,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체육부장관·안기부장 역임) 소장은 중부전선의 3사단장이 됐다. 동기 중 선두주자의 하나로 꼽히던 박희도(朴熙道, 육군참모총장 역임) 준장은 제1공수특전여단장으로 있었다.
3군사령부 직할 예비사단인 20사단은 유사시 서울로 출동하는 부대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했다. 10·26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나는 육대 동기인 부관감(副官監) 조진희 준장과 사단장 공관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날 8시40분경, 이건영(李建榮) 3군사령관이 전화를 걸어왔다.
“서울에서 내용을 알 수 없는 비상사태가 발생한 듯하니, 전(全) 사단이 즉각 서울로 출동할 수 있게 준비하시오.”
나는 즉시 부대로 들어가 출동준비에 들어갔다. 그날 밤 9시 반, 이건영 사령관은 “가장 빠른 방법으로 서울 태릉지역에 전개하고, 육군참모총장의 명령을 받으라”고 지시했다.
서울로의 출동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낡은 차량, 운전병의 운전 미숙, 도로 사정 등으로 인해, 우리 사단의 마지막 부대가 서울 망우리 초소를 통과한 것은 10월 27일 새벽 4시였다. 육사 보안부대장 김동조 중령이 찾아와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이 서울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해 달라고 했다”는 말을 전했다.
나는 새벽 5시 육사교장실로 가서 육군본부 상황실에 상황을 보고한 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통령 유고(有故)’ 소식을 접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몇 년 전 방송된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10·26 당시 내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명령으로 20사단을 서울로 출동시킨 것으로 방영했는데, 이는 명백한 사실왜곡이다.
12·12사태 5일 전 全斗煥과 만나
10월 27일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됐다. 당시 우리 집은 연희동에 있었다. 계엄군으로 서울에 들어온 나는 우리 집에서 부대로 출퇴근을 했다.
12·12가 일어나기 닷새 전, 보안사령관 비서실에서 전화가 왔다. 12월 9일(일요일) 오전 10시에 전두환 장군이 자기 집에서 만났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집은 우리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였는데, 전에 몇 번 찾아간 적이 있었다.
12월 9일 전두환 장군 집으로 찾아갔다. 전 장군은 무척 반가워하면서, “12일 저녁 6시 반에 수경사 30경비단장 장세동(張世東) 대령의 방에서 저녁이나 같이하자”고 했다. 나는 11시부터 개척교회를 운영하는 장인과 함께 오전 11시 예배에 참석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던 터라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12월 12일 30경비단에서 만나자는 이유라든지, 그날 누가 나올 것이라든지 하는 얘기는 전혀 없었다.
12월 12일 저녁 6시20분, 경복궁에 있는 수경사 30경비단장실로 갔다. 유학성(兪學聖, 안기부장 역임) 국방부 군수차관보, 황영시(黃永時, 육참총장·감사원장 역임) 1군단장, 노태우 9사단장 등이 와 있었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선배들이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전두환 장군을 기다렸다.
7시경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나타났다. 그는 10·26사태와 관련해 정승화(鄭昇和)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기 위해 합동수사본부 수사관들을 육군참모총장 공관으로 보냈는데, 총격전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모두 당황했다. 눈치를 보니 노태우 장군만이 그날 모임의 성격을 알고 있었고, 나머지 장군들은 모르고 있는 듯했다.
全斗煥처럼 대범한 사람 못 봐
장태완(張泰玩) 수경사령관 등이 전두환 장군과 우리를 군사반란집단으로 규정짓고 진압하겠다고 나섰다. 나는 부대로 복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당시 남한산성 육군종합행정학교에 있던 사단본부의 참모장과 참모, 그리고 태릉 인근 등에 분산 주둔한 예하 연대의 연대장들에게 전화를 걸어 경거망동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연행되면서 그 직무를 대리하고 있던 윤성민(尹誠敏) 육군참모차장은 부대 출동을 막기 위해 육군종합행정학교장 소준렬(蘇俊烈) 소장을 우리 사단에 보냈는데, 나는 참모장 등에게 그의 조치에 따르라고 했다. 상황이 악화되자 전두환 장군이 옆방으로 나를 은밀하게 불렀다.
“박 장군, 20사단 병력을 출동시켜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장악해 주시오!”
순간 5·16 당시 고뇌하던 이한림 장군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전두환 장군의 요청을 거부했다.
“20사단은 전쟁이 나면 전쟁터로 가야 하는 부대입니다. 그런 부대를 지휘계통 밖에 있는 사람의 명령을 받아 출동시킬 수는 없습니다.”
전두환 장군은 내 말을 듣자 구구하게 더 이상 요청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노태우 소장의 9사단과 박희도 준장의 1공수특전여단 병력을 동원했다.
정승화 육참총장 연행에 대해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의 사후재가(事後裁可)를 얻기 위해 전두환 장군이 다른 장군들과 함께 총리공관으로 갈 때도 나는 동행하지 않았다. 밤늦은 시각에 사전 약속도 없이 현역 장성들이 군복 차림으로 찾아가는 것은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에 대한 결례(缺禮)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0경비단에는 노태우 장군과 내가 남았다.
후일의 얘기지만, 이날 내가 취한 조치 때문에 나는 12·12 및 5·17사건 재판에서 유일하게 무죄(無罪) 판결을 받았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부대 출동을 거부했던 내게 서운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은 그 후 한 번도 그날의 일을 입에 올린 적이 없다. 간접적으로라도 그가 나에게 섭섭해한다는 얘기도 들은 적이 없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사람을 쓸 때, 사람을 정확히 알려고 노력했고, 능력이 있으면 주저 않고 썼다. 나는 평생 전두환 전 대통령처럼 대범하고 리더십이 뛰어난 사람을 보지 못했다.
20사단, 光州로 가다
12·12사태 후 보안사령부로 권력이 쏠리는 것이 보였다. 연말연시가 되자 우리 부대로도 전보다 훨씬 많은 위문품이 들어왔다.
1980년 1월 하순, 나는 이희성(李熺性) 육참총장에게 부대를 양평으로 복귀하게 해달라고 요청해 허락을 받았다. 나는 계엄업무 수행 중에 나타난 문제점들을 개선해 우리 사단을 유사시 적과 제대로 싸울 수 있는 부대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은 내 뜻과는 반대로 흘러갔다. 우리 부대는 1980년 5월 15일 다시 서울로 이동했다. 이틀 후 비상계엄령이 제주도를 비롯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5월 20일 저녁, 친구와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데 황영시 육참차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광주(光州)에서 소요사태가 발생했으니 1개 연대를 내려보내 윤흥정(尹興禎, 체신부장관 역임) 전투병과교육사령관의 지시를 받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이어 작전계통을 통해 정식으로 명령이 내려왔다. 나는 김동진(金東鎭, 육군참모총장·국방부장관 역임) 대령의 61연대에 출동명령을 내렸다.
용산역에서 61연대의 출동을 확인하고 돌아온 밤 11시경, 다시 1개 연대를 추가로 파견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이병년(李丙年) 대령의 62연대에 출동을 지시했다.
나는 5월 21일 광주 송정리로 내려가 윤흥정 장군에게 부대 도착을 보고했다. 다음 날 60연대와 사단 포병사령부 병력이 공군수송기편으로 내려왔다. 이로써 사단 전 병력이 광주로 내려갔다. 서울에서 육로(陸路)로 이동해 온 우리 사단은 지휘용 지프 14대가 무장시위대에게 탈취당했으며 병사 1명이 실종됐다가 귀환했고, 두 명이 경상을 입었다. 5월 21일, 공수부대가 광주시내에서 철수했다.
온갖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가장 심각한 것은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를 싹쓸이하러 왔다”는 것이었다. 우리 부대에도 육사 출신 대대장들을 비롯해 장병의 20% 이상이 호남 출신이었다. 밤새 한잠도 못 잔 나는 다음 날 아침 7시, 중사 이상 간부들을 보병학교 연병장에 소집했다. 나는 그들에게 “광주시민의 명예를 지켜주고, 국민의 군대로 국민의 신뢰를 받는 군대가 되도록 노력하겠다”면서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사단장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휘하 장병 두 명 戰死
계엄사령부는 자위권(自衛權) 발동을 했지만, 나는 민간인에게 절대 선제(先制)사격을 하지 말고, 사격을 받더라도 최소한으로 대응하며, 부상자는 군인과 민간인 가리지 말고 신속하게 군병원으로 후송하라고 지시했다.
육군본부는 사태 초기 진압에 실패한 책임을 물어 윤흥렬 전투병과교육사령관을 경질하고(외양상 체신부장관으로 입각하기 위해 예편) 전남 출신인 소준렬 장군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광주시 외곽을 포위, 통제하고 있던 우리 사단은 5월 27일 진압작전에 투입됐다. 공수부대가 먼저 시내에 진입해 무장시민의 저항을 분쇄하면, 우리 사단을 비롯해 현지 향토사단인 31사단, 전투병과교육사령부 예하 부대들이 책임구역을 인수받았다.
광주사태 기간 중 우리 사단은 모두 세 차례 교전(交戰)을 벌였다. 우리 사단 장병 두 명이 전사(戰死)하고 11명이 부상했다. 민간인은 10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했다. 국가적 비극이었다. 당시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冥福)을 빈다.
나는 광주사태가 진압된 다음 날, 광주나 인근 지역이 고향인 장병들에게 외박을 주도록 했다. 참모들이 시기상조라고 반대했지만, 나는 “자기 부모, 친척을 찾아가는 데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300여 명의 장병들은 가족과 친지들이 싸준 떡이나 과일 등을 싸들고 무사히 귀대했다. 공수부대가 복귀한 후에도 나는 소준렬 사령관에게 건의해 20사단이 한 달가량 더 광주에 주둔하면서 시가지 정비, 농번기 대민봉사 등을 돕도록 했다.
6월 말 원대복귀한 후 나는 이희성 육참총장에게 “앞으로 국내 소요사태 발생시 군의 동원은 자제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것은 광주사태를 겪은 많은 군 지휘관들의 공통된 생각이기도 했다. 이후 5공(共) 시절 시위진압에 전투경찰을 동원하고,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때에도 군이 출동하지 않은 것은 광주사태의 교훈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후 나는 육군본부 인사운영감, 인사참모부장을 거쳐 1981년 7월 국군보안사령관이 됐다. 당시 보안사령관직은 전임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장군이 거쳐 가면서 권부(權府) 중의 권부로 인식되고 있었다.
육사 동기생인 박세직 수경사령관이 보안사령관, 내가 수경사령관을 맡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세상에서는 나와 박세직, 박희도 장군을 ‘쓰리 박(three Park)’이라고 불렀다. 나중에는 육사 17기 출신인 허화평(許和平) 정무수석비서관, 허삼수(許三守) 사정수석비서관, 허문도(許文道) 비서관 등을 ‘3허(許)’라고 부르면서, ‘3박’은 군부 내 온건그룹, ‘3허’는 강경개혁파로 지칭하기도 했다. ‘3박’이건 ‘3허’건 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얘기다. 그런 식의 대립구도는 없었다.
어느 날 이희성 육참총장이 인사참모부장인 나를 불렀다. 그는 대통령 재가를 받기 위한 인사 초안의 보안사령관 직위에 내 이름을 적으라고 했다. 내가 물었다.
“보안사령관은 박세직 장군으로 결정된 것 아닙니까?”
“대통령 각하께서 직접 당신을 지명하셨소.”
아마 전두환 대통령은 내가 보안사령관이라는 자리를 내세워 ‘엉뚱한 짓’을 하지 않고, 조용하고 성실하게 일을 해나갈 사람으로 보았던 것 같다.
朴世直, “차기 대통령은 나” 발언으로 전격 예편
보안사령관이 된 일주일 후, 전 대통령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박세직 수경사령관이 미국에 있던 동기생 이규환 전 예비역 대령과 함께 부정행위를 저지르고 있으니, 즉시 철저히 조사해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조사해 보니 별일 아니었다. 7월 말 예하 부대를 돌아보기 위해 광주에 내려갔다. 마침 전두환 대통령도 남해안 휴양지에 가 있었다. 나는 다음 날 전 대통령을 찾아가서 조사 결과를 보고할 생각이었다.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데,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다.
“대통령께서 갑자기 서울로 올라오셨습니다. 내일 9시까지 청와대로 오라고 하십니다.”
다음 날 청와대로 달려갔더니, 이미 주영복(周永福) 국방장관과 이희성 육참총장이 와 있었다. 무거운 분위기였다. 내가 이규환 대령 건에 대해 보고하려고 하는데, 전 대통령이 말을 잘랐다. “보고할 필요 없소. 박세직 장군을 즉각 예편시키시오.”
장관과 총장은 이미 얘기를 들은 듯했다. 내가 말했다. “가까운 친구로서 저도 책임이 있습니다. 전방 부군단장으로 보내 반성할 기회라도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전두환 대통령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전역식이라도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전 대통령은 이건 받아들였다.
당시 박세직 장군의 돌연한 예편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박세직 장군이 큰 비리는 아니지만, 5공 정부의 개혁의지를 보이기 위해 일벌백계(一罰百戒)하는 것이라는 설명이 나왔다.
실제로는 당시 박세직 장군이 각계 인사들과 활발하게 접촉하면서 “차기 대통령은 나”라는 식의 언동(言動)을 한 게 문제가 됐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수경사 작전참모 김진영(金振永) 대령 등을 불러서 박세직 장군의 평소 언행 등에 대해 직접 알아보고 그런 조치를 내린 것이었다.
나는 ‘전두환 대통령이 철저한 분이니, 충분히 알아보고 그럴 만하니까 그런 조치를 내리는 것이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친구를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변호하지 못했던 것은 후회스러운 일이다.
나는 사령관으로 있으면서 보안사가 권부로 인식되는 것을 불식시키려 노력했다. 일제(日帝)시대부터 써온 낡은 사령부 건물을 신축하기 위해 100억원의 예산이 책정되어 있었지만, 반납하도록 했다. 그 무렵 신축한 사령관 관사도 매각하도록 했다. 때문에 ‘힘 있는 사령관’을 기대했던 부하들은 실망하기도 했다.
갑작스런 轉役
1983년 12월, 나는 박희도 장군과 함께 대장으로 승진하면서 군사령관으로 나가기로 내정되어 있었다. 그해 12월 12일 오후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전두환 대통령은 조금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사정이 생겼소. 민정당의 형편을 고려해서 1985년 2월 12대 총선에 고향인 보은·옥천·영동 지역구에 출마하는 게 좋겠소.”
나는 당황했지만 군인은 군 통수권자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권력기관인 보안사령관을 오래한 내가 야전군으로 돌아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바로 “알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런 내 모습이 좋았는지, 전 대통령은 “아직 시간이 있으니, 원하는 때까지 근무하라”고 말했다. 전역하기 일주일 전인 1984년 7월 1일에는 나를 대장으로 진급시켜 주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배려였다. 나는 육사에 입교한 지 32년 후인 1984년 7월 7일, 20사단 연병장에서 전역식을 갖고 군복을 벗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전 대통령이 나를 전역시켜 국회의원으로 출마시키겠다는 결심을 한 것은 권익현 사무총장의 건의 때문이었다.
1984년 12월, 선거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야당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이용희(李龍熙) 전 의원, 이동진(李東鎭) 의원, 최극(崔極) 후보 등 만만한 사람이 없었다. 처음에는 ‘한 지역구에서 두 명을 뽑는데, 설마 낙선하기야 하겠나’하는 생각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낙선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엄습했다.
1985년 새해를 맞으면서 나는 지역구 내 모든 마을을 직접 방문하기로 결심했다. 육군대장, 보안사령관이라는 관록은 잊어버리고 선거 하루 전까지 3개 군 900여 개 마을을 모두 돌았다. 결국 나는 2위 당선자인 이용희 후보보다 4배나 많은 8만8047표를 얻어 당선됐다. 득표율은 64.8%로 충북 괴산의 김종호(金宗鎬) 당선자에 이어 전국 2위였다.
국책조정위원장으로 주목받아
2·12총선은 1981년 5공 출범과 함께 형성된 정치구조를 통째로 흔들었다. 민정당은 노태우 대표위원을 얼굴로 내세웠다. 야당은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면서 5공 정권을 거세게 압박했다. 그런 가운데 1985년 9월 3일 나는 국책조정위원장으로 임명됐다. 노태우 대표는 “전두환 총재가 직접 결정한 인사”라고 전했다.
민정당의 외곽기구였던 국책조정위원회는 ▲ 정국상황의 진단과 예측 ▲주요 정치현안에 대한 대책 수립 ▲ 국책평가위원회 및 유관 부서와의 협조 등이 주요 임무였다.
해석하기에 따라 국책조정위원회는 국정 전반에 막강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다. 여기에 더해 내가 초선 의원에 불과하지만, 보안사령관을 지낸 군부 실세라는 인식 때문에 국책조정위원회와 나는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조선일보》 이상철(李相哲, 편집국장·월간조선 사장·서울시 정무부시장 역임) 기자는 《주간조선》(1985년 9월 22일자)에 어느 의원의 말을 인용해 “마침내 한 척의 핵잠수함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고 썼다. 내가 전 대통령의 후계자가 될 수도 있다는 뉘앙스였다.
그럴수록 나는 몸을 낮추고 조심했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자제했다. 국책조정위원회도 민주국가의 청사진을 그리는 데 주력했다. 당시 함께 일했던 최병렬(崔秉烈), 현홍주(玄鴻柱), 이종률(李鍾律), 김학준(金學俊), 김종인(金鍾仁) 의원 등은 후일 노태우 정권 등을 거치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3黨 合黨으로 가는 길
2·12총선 이후 격화된 민주화요구 시위는 결국 1987년 6월 민주화운동과, 이를 수용한 6·29선언으로 결실을 맺었다. 1987년 12월 실시된 제13대 대선에서는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승리했다.
민정당과 청와대는 이듬해 4·26총선에서의 승리도 낙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선거운동을 하는 나의 느낌은 달랐다. 선거 일주일 전 새벽, 나는 안무혁(安武赫) 안기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어려운 상황을 설명하고,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고해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도록 건의하라고 했다. 선거 결과 민정당은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여소야대(與小野大)였다.
총선 후 당직 개편에서 나는 민정당 사무총장을 맡았다. 김윤환(金潤煥) 의원이 원내총무, 이한동(李漢東) 의원이 정책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지금과 달리 당시 여당 사무총장은 ‘실세(實勢)’였다. 여당의 조직과 자금, 인사를 장악하는 것 외에도 월(月) 1회 대통령과 독대하는 권한도 있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여당 사무총장은 국무총리에 버금가는 요직’이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여소야대 상황 속에서 야당은 ‘5공 청산’을 거세게 요구했다. 여야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구성에 합의하자, 나는 윤길중(尹吉重) 대표에게 사의(辭意)를 표했다. 광주사태 당시 20사단장이었기 때문에 당에 정치적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광주사태 관련 청문회에서 나는 당시의 일을 있는 그대로 얘기했다.
89년 8월 20일 일본 여행 중이던 나는 노태우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급거 귀국했다. 노 대통령은 내게 박철언(朴哲彦) 정무장관과 함께 야당과의 통합을 추진해 보라고 했다. 여소야대의 극복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더 나아가 보수대연합, 내각제 개헌 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나도 마음에서부터 동감하는 바였다.
물밑작업이 시작됐다. 김영삼 총재의 통일민주당에서는 황병태(黃秉泰) 부총재, 김덕룡(金德龍) 의원이 협상에 나왔다. 나와 박철언 장관, 황 부총재, 김 의원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만났다.
내각제 각서 합의
89년 12월 15일 노태우 대통령과 세 야당 총재(김대중, 김영삼, 김종필)는 “5공 문제를 금년 내에 마무리 짓자”고 합의했다. 그해 12월 31일 백담사에 가 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국회에 출석해 증언을 했다. 12·15합의 이틀 후인 89년 12월 17일 신라호텔에서 나, 박철언, 황병태, 김덕룡 네 사람이 만났다. 우리는 합당의 원칙, 당명, 당 지도체제 등에 대해 합의했다. 신민주공화당과의 접촉도 내가 맡았는데, 김용환(金龍煥) 의원이 상대였다. 우리 두 사람은 만난 지 두 번 만에 합의에 도달했다.
90년 1월 6일, 나는 다시 민정당 사무총장이 됐다. 1월 19일 나와 박철언, 황병태, 김덕룡 의원은 합당 각서에 서명했다. 다음 날은 나와 김용환 의원이 합당 각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1월 22일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YS) 총재, 김종필(JP) 총재는 3당 합당 선언을 했다. 당 이름은 민주자유당. YS가 제안한 이름이었다.
3당 합당의 연결고리는 사실 내각제 개헌이었다. 민자당 전당대회를 앞둔 90년 5월 5일, 나, 노재봉(盧在鳳) 대통령비서실장, 최창윤(崔昌潤) 정무수석, 민주계의 김동영(金東英) 원내총무와 김덕룡 의원이 당헌(黨憲) 초안을 검토했다. 쟁점은 3당 합당의 전제조건인 내각제 개헌을 당헌에 넣느냐 여부였다. 민정계와 공화계는 당연히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민주계는 완강히 반대했다.
결국 논란 끝에 내각제를 당헌에 포함하지는 않되, 노태우 대통령, YS, JP가 합의서를 만들어 서명하기로 했다. 초안은 노재봉 실장이 작성했고, 내가 최종안을 정리했다. 내용은 이렇다.
< 역사적인 민주자유당의 제1차 전당대회를 앞두고 우리 3인은 신뢰와 협조 아래 국가와 당의 발전을 위하여 합당정신에 입각, 헌신할 것을 다짐하며 다음과 같이 합의한다.
1. 의회와 내각이 함께 국민에게 책임지는 의회민주주의를 구현한다.
2. 1년 내에 의원내각제로 개헌한다.
3. 이를 위하여 금년 중 개헌 작업에 착수한다.
1990년 5월 6일
민주자유당 최고위원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내각제 각서 유출 파문
나는 5월 6일 낮 YS를 자택으로 찾아가 서명을 받았다. 그는 내용을 알고 있으면서도 선뜻 서명하지 않았다. 나는 “민정계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이 문서에 서명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30분 후 마지못해 서명을 했다. 이어 오후 4시경 김용환 의원과 함께 JP를 방문, 서명을 받았다. JP는 무척 기뻐했다.
그날 저녁 나는 서명한 원본을 최창윤 정무수석에게 주었다. 최 수석은 대통령의 서명을 받은 후, 다음 날 오후 그 사본 2장를 가지고 왔다. 그는 “YS, JP에게 사본을 전달해 확실하게 매듭을 짓는 것이 좋겠다”는 노태우 대통령의 말도 전했다.
나는 내가 직접 전달하는 것보다는 김동영 원내총무, 김용환 정책위의장이 각각 YS와 JP에게 전달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뜻을 들은 김용환 의장은 곧 사본을 가져갔으나, 김동영 원내총무는 오지 않았다.
나는 YS에게 전할 사본을 사무실 안쪽 내실(內室) 책상서랍에 넣고 퇴근했다. 다음 날은 일정이 바빠서 사본 전달을 깜박 잊었다. 그리고 5월 9일 사본을 찾아보니 보이지 않았다. 깜짝 놀란 나는 보좌관과 비서들을 총동원해서 사본을 찾아보았지만 허사였다.
며칠 후 봉투가 뜯겨진 상태로 누군가가 책상서랍에 넣어둔 사본을 발견했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한번 뜯겨진 사본을 전달하기도 뭣해서 그냥 내가 보관했다.
그해 10월 25일 《중앙일보》는 내각제 각서의 존재를 폭로했다. 내각제 각서의 존재를 부인해 오던 YS는 난처해졌다. 나는 사무총장으로 각서 유출의 책임을 지고 총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해 10월 29일 YS는 당무 거부를 선언했다. 다음 날에는 “내각제 개헌은 국민과 야당이 반대하므로 추진할 수 없다”며 낙향했다. YS의 이런 저항에 결국 노태우 대통령과 JP는 손을 들고 말았다.
혹자는 내가 고의적으로 내각제 각서를 유출한 것이 아니냐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후일 노태우 대통령은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박준병씨는 그렇게 할 사람이 아니다”면서 “거꾸로 김영삼 대표최고위원 측에서 그것을 유출시켜서 내각제를 깨버리려고 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한테 들어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내 사무실을 드나들던 대전고 후배인 박모 기자가 내각제 각서 사본을 습득해서 폭로한 것이라는 얘기도 있는데, 나로서는 모르는 일이다.
내각제 개헌이 무산된 후 YS는 사사건건 노태우 대통령과 부딪히더니, 결국 민주자유당 후보 자리를 차지했다. 나는 박태준 최고위원이 후보로 적합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도중에 출마를 포기하고 말았다. 결국 민정계의 이종찬 의원이 후보로 나섰지만, 그는 경선 과정에서 YS의 불공정한 행태를 문제 삼아 경선을 포기했다.
대통령이 된 YS는 과거와의 단절에 나섰다. 93년 3월 하나회 숙정(肅正)을 단행하더니, 95년에 접어들면서는 ‘역사 바로 세우기’에 나섰다.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정계와 공화계를 밀어내고, 민자당을 YS당으로 만들겠다는 의도가 그 속에 있었다. JP는 여기에 반발, 민자당을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했다.
그해 6·27지방선거에서 자민련은 충청권을 휩쓸었다. 92년 대선 패배 후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DJ는 서울시장에 조순(趙淳)씨를 당선시킨 후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 정계에 복귀했다.
민자당을 탈당하게 된 계기
정국이 요동치자 내가 민자당을 탈당해 자민련에 입당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YS는 8월 중순 나를 청와대로 불러 탈당을 간곡히 만류했다. 나도 탈당할 생각은 없었다. 정치상황의 변화에 따라 당을 이리저리 바꾸는 것은 내 소신과는 다른 일이었다.
하지만 ‘역사 바로 세우기’의 칼날은 나를 향해 오고 있었다. 사실 YS는 집권 초기만 해도 과거 정권들을 ‘군사정권’으로 매도하기는 했지만, 사법처리까지 할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검찰도 94년 12월, 12·12에 대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김윤환 민자당 대표가 12·12사태에 대한 입장이 변화할 수 있다고 시사(示唆)하더니, 강삼재(姜三載) 사무총장은 내가 민자당을 탈당할 경우 구속될 수도 있다고 공언했다. 그런 모욕을 받으면서 계속 민자당에 몸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95년 10월 14일 민자당을 탈당, 자민련에 입당했다. 내가 자민련에 입당하자 YS정권은 나의 모든 것을 뒤졌다. 하지만 나온 것은 없었다.
내가 민자당을 탈당한 지 닷새 후인 10월 19일, 민주당 박계동(朴啓東) 의원이 국회에서 ‘노태우 비자금’을 폭로했다. 이 폭로는 전두환-노태우 정권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했다. 이를 계기로 12·12 및 5·18 관련자 처벌을 위한 소급입법(遡及立法) 제정이 탄력을 받게 됐다. 그해 12월 19일 끝내 소급입법이 제정됐다.
나는 12·12사태에 참여해 ‘반란중요임무’에 종사했다는 이유로 96년 2월 29일 구속 기소됐다. 예상했던 바였다. 이에 대비해 나는 이미 2월 13일 지역구를 어준선(魚浚善) 안국약품 회장에게 내주었다. 옥중출마(獄中出馬)해서 지역구민들에게 나의 결백을 호소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정계은퇴
그해 8월 19일 나는 구속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검찰은 내게 징역 10년을 구형했지만, 8월 26일 서울지방법원은 내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내가 경복궁 30경비단 모임의 성격이나 정승화 참모총장의 체포 사실을 모르고 그 자리에 나갔고, 전두환 장군의 20사단 병력 출동 요청을 거절한 사실을 받아들였다. 2심과 3심에서도 무죄를 인정했다. 나는 12·12사태와 관련해 유일하게 무죄선고를 받았다. 5·18사태와 관련해서는 기소 자체가 되지 않았다.
대전고 동문인 김인섭 변호사, 신정철 변호사(전 대법관), 주재우 변호사, 민경식 변호사 등이 애써 주었다. 그 고마움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97년 11월 박태준 전 민자당 최고위원이 자민련에 입당했다. JP가 명예총재로 물러나면서 박태준 전 최고위원이 자민련 총재가 됐다. 그는 부총재로 있던 내게 사무총장을 겸임해 달라고 했다. 박 총재와는 그가 육사 교무처장이었던 시절부터 인연이 있었다. 그는 이한림 전 1군사령관과 함께 내가 가장 존경하는 군 선배였다.
이후의 정치는 내 개인이나 자민련 모두 실패의 연속이었다. 나는 98년 7·21보궐선거에서 당의 요청으로 서울 서초갑(甲)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2000년 4·13총선에서 자민련은 17석의 군소정당으로 전락했다. 나도 낙선의 쓴 잔을 마셨다. 그해 5월 19일 박태준 총리가 부동산 명의신탁이 문제가 되어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나를 다시 정치에 몸담게 했던 박 총리가 물러나면서, 나도 자연스럽게 정치무대에서 내려왔다. 2002년 12월 나는 정계에서 은퇴했다.
‘밀려서’ 살아온 인생
생각해 보면 내가 정치생활을 한 시기는 우리나라 정치가 권위주의에서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도기였다. 나는 나름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했었다. 3당 합당 때에는 ‘이를 계기로 우리 정치도 달라질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져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다. 과거 민정당·민자당 사무총장 시절 대통령과의 독대 자리에서 정치발전을 위해 필요한 일들을 보다 강력하게 진언(進言)하지 못했던 것이 그렇고, 12·12재판이 끝난 후 바로 정계에서 깨끗하게 은퇴하지 못한 것도 아쉽다. 어린 시절 정상문·이현덕과 나눈 얘기처럼 ‘밀려서’ 살아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행복한 인생이었다. 나라로부터 받은 게 너무 많다. 나라 덕분에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했던 내가 육사와 서울대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고, 군인으로서 최고의 영예인 대장까지 올라갔다. 그 가난했던 나라가 이만큼 성장한 것도 고맙고 자랑스럽다.
지금 나는 서경대 석좌교수로 있으면서 젊은이들에게 우리 세대의 경험과 내가 체험한 리더십에 대해 가르치면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어린 시절 막연하게 꿈꾸었던 대학교수의 꿈이 군인과 정치인이라는 먼길을 돌고 돌아 이루어진 셈이다.⊙
거기서 나는 평생의 친구 정상문(鄭相文·육사 12기)을 만났다. 인상이 깨끗해 첫눈에 호감이 가는 친구였다. 이현덕이라는 친구도 가까이 지냈다. 어느 날 우리 세 사람은 학교 뒤에 있는 보문산에 올랐다. 우리는 풀밭을 뒹굴며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먼저 정상문이 말했다.
“나는 기다리며 살 거다.”
이현덕은 “인생이 별거냐. 나는 그럭저럭 살 거다”라고 말했다. 내 차례가 되자 나는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밀려서 살 거다.”
왜 그렇게 말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내 삶을 돌아보면 그때 말했던 것처럼 살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육군 중령 추천장으로 고교 졸업장 대신해
![]() |
6·25 당시 자원입대해 위생병으로 근무하던 중 모교를 찾아가 교복 차림의 친구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왼쪽이 박준병. |
그해 11월 나는 육군본부 직할 의무후송대대로 전출됐다. 이후 나는 1년 반 동안 전후방 병원에서 전쟁을 치렀다. 직접 총을 들고 적과 싸우지는 않았지만, 팔다리가 잘려나간 병사들과 죽어 넘어진 민간인들의 시체를 수없이 보면서 전쟁의 참상을 절감했다.
1952년 봄, 나는 대구 육군본부로 갔다가 정규 육사(陸士) 2기생(육사 12기) 모집공고를 봤다. 4년간 교육을 받은 후 이학사(理學士) 학위를 받고 소위로 임관한다는 얘기를 접하는 순간, 나는 주저 없이 육사 입교를 결심했다.
사관학교 시험 응시를 위해서는 고등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했다. 대전고(1951년 6년제 중학교가 3년제 중·고등학교로 분리)를 찾아갔다. 하지만 옛날 담임선생님은 졸업증을 줄 수 없고 고교 2년 수료증을 발급해 주겠다고 했다. 군에 입대하지 않은 친구들은 대학 진학의 꿈에 부풀어 있었다. 자원입대한 것이 내 발목을 잡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다행히 대대장 백창기 중령이 추천장을 써주었다. 그는 “박준병 병장은 고등학교 졸업 자격이 있음을 인정함”이라는 문서를 작성한 후, 대대장 관인(官印)을 찍어주었다. 엄밀히 말해 그게 법적으로 졸업장을 갈음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게 통했다.
1952년 3월 육사 입학 시험에 합격한 나는 그해 7월 진해에 있던 육사에 입학했다. 내가 입교할 당시 교장은 안춘생(安椿生) 준장이었다. 1951년 4년제 정규 육사를 만들면서,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이종찬(李鍾贊, 국방부장관 역임) 장군은 국군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6촌 동생인 안춘생 장군을 육사 교장으로 임명했다고 한다.
모든 게 부족한 상황이었지만, 다시 공부할 기회를 잡게 된 나는 열심히 공부했다. 덕분에 졸업할 때 군사학 성적이 가장 우수한 생도에게 주는 지상(智賞)을 받았다.
쿠데타에 반대하던 이한림 1군사령관
![]() |
국토건설사업 현장을 시찰하는 장면 총리(왼쪽)와 이한림 1군사령관(오른쪽). |
전입(轉入)신고를 하는 자리에서 이한림 장군은 새로 생긴 위탁교육제도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인재양성을 위해 인문계통은 서울대에, 이공계는 미국의 대학원으로 진학해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기회를 만난 나는 서울대 사학과에 편입했다. 여기서 나는 이병도(李丙燾)·김상기(金庠基)·전해종(全海宗)·고병익(高柄翊)·민석홍(閔錫泓)·한우근(韓劤) 교수 등 쟁쟁한 분들 밑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2년간 위탁교육을 마치고 육사로 돌아온 나는 육사 사학과 전임강사로 생도(20기)들에게 국사를 가르쳤다.
4·19로 이승만(李承晩) 정권이 무너지고 장면(張勉)이 들어선 1960년 10월, 이한림 육사 교장은 1군사령관으로 영전(榮轉)했다. 이듬해 4월 이 장군은 나를 전속부관으로 불렀다.
5·16 쿠데타가 일어난 것은 내가 이한림 장군의 부관으로 부임한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이한림 사령관은 당초에는 군(軍)의 정치적 중립 고수라는 관점에서 쿠데타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 사령관은 임부택(林富澤) 소장의 1군단에 출동준비를 명령했다.
하지만 쿠데타 진압 명령을 내려야 할 장면 총리는 잠적한 상태였다. 윤보선(尹潽善) 대통령은 비서관을 전방 지휘관들에게 보내 “국군끼리 충돌해 피를 흘리는 일은 피하라”고 설득했다. 결국 이한림 장군은 ‘쿠데타 묵인’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러나 5·16 주체세력은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지 5월 18일 아침 6시, 1개 소대가량의 병력이 사령관 공관을 포위했다. 작전처에 근무하던 엄병길(嚴秉吉) 중령 등 영관급 장교 3~4명이 내실로 들어갔다. 방에서는 고성(高聲)이 터져나왔다.
아침 7시경, 이한림 장군이 나를 불렀다.
“서울로 갈 테니, 지프를 대기시켜라.”
한 달간 감옥생활
공관 현관에 지프를 대기시켜 놓고 얼마 후, 이한림 장군이 엄병길 중령 등에 둘러싸여 나왔다. 지프에 오르기 전 엄 중령이 이한림 장군에게 권총을 풀어달라고 했다. 순간 이한림 장군이 호통을 쳤다.
“항장(降將)이라도 장군은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법이다. 대체 너희가 뭐기에 감히 권총을 달라는 것이냐?”
엄 중령 등도 물러서지 않았다. 곁에 있던 군수참모 박원근(朴元根) 준장이 이한림 장군을 설득, 권총의 실탄을 빼낸 후 빈 권총을 이 장군에게 돌려주었다. 엄병길 중령이 운전대를 잡았다. 내가 뒷자리에 탑승하려고 하자 이한림 장군이 만류했다.
“자네는 따라올 필요 없네. 여기 남아 있어.”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이 장군이 언성을 높였다.
“나는 죽으러 가는 길이야! 자네가 뭐 하러 따라온다는 말인가? 남아 있어!”
“저는 사령관님의 전속부관입니다. 그곳이 어디든 모시고 가야 합니다.”
나는 이 장군이 더 이상 뭐라고 하기 전에 얼른 지프 뒷자리에 올랐다.
그날 정오 서울 덕수궁으로 연행됐던 이한림 장군과 나는 그날 저녁 중구 필동 헌병대로 옮겨졌다. 사흘 후 나는 다시 마포형무소로 이송됐다. 여기서 나는 한 달간 수감생활을 했다. 불러서 조사받는 일도 없이 무료하게 시간이 흘렀다. 이한림 장군 생각만 하면 가슴이 먹먹했다.
이한림 장군은 반(反)혁명으로 몰려 수감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기회만 있으면 관계 요로에 나의 구명을 호소했다고 한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이한림 장군은 후일 박정희 정권에서 건설부 장관, 주터키대사, 주호주대사 등을 지냈다. 이한림 장군은 2012년 4월 29일 91세로 별세했다. 이 장군의 아드님은 “말년에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 이름은 잘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박 장군 이름은 또렷하게 기억하셨다”고 했다.
崔周鍾 장군의 배려
6월 15일 5·16 주체로 혁명검찰부장을 맡고 있던 박창암(朴蒼岩) 대령이 불렀다. 그는 이한림 장군이 육사 교장으로 있던 시절, 육사 생도대 부(副)대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나와도 아는 사이였다. 그는 “고생 많았다. 특별히 문제가 있어서 구속했던 것은 아니었다”면서, 혁명검찰부에서 일해도 좋고, 원대복귀해도 좋다고 했다. 나는 원대복귀를 택했다. 다행히 주위에서는 쿠데타라는 비상상황 아래서 내가 취한 태도를 좋게 봐주었다.
6월 말 나는 최주종(崔周鍾) 소장이 사단장으로 있는 8사단 중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최 장군은 이한림 장군이 육사 교장으로 있을 때 생도대장을 맡던 분으로, 5·16 주체 중 하나였다.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최 장군이 예고 없이 우리 중대를 방문했다. 최 장군은 병사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나와 중대장실에서 잠시 담소를 나누었다. 중대를 떠나기 전 최 장군은 지프에 오르다 말고 내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박 대위, 열심히 해! 누구든지 박 대위에게 시비하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 자리에는 연대장·대대장을 비롯한 여러 명의 장교가 있었다. 내가 이한림 장군을 모시다 수감됐던 사실 때문에 불이익을 받을까 봐 하는 얘기 같았다. 고마웠다. 최주종 장군은 이후에도 종종 나를 찾아와 격려해 주곤 했다.
그해 말 나는 소령급이 맡는 핵심보직인 연대 작전과장을 맡았다. 파격이었다. 이 또한 최주종 장군의 배려였다.
이 무렵 나는 군인으로서 자신감을 얻게 됐다. 솔직히 육사에 들어갈 때만 해도 군인으로서의 적성에 대한 자각이나 소명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고교 친구 정상문의 소개로 알게 된 장기영(張基榮) 《한국일보》 사장은 내게 의무복무기간 5년만 채우고 나오면 신문사에 자리를 만들어주고 미국유학도 시켜주겠다고 약속했었다. 한때 그 얘기에 솔깃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중대장과 연대 작전과장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나는 한눈팔지 않고 직업군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1964년 소령으로 진급한 나는 이듬해 미국 포트 브래그(Fort Bragg)에 있는 특수전학교에서 6개월간 비정규전(非正規戰) 과정을 연수했다. 당시는 베트남전이 확대되고 있을 때여서 심리전(心理戰) 등 비정규전 과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을 때였다.
포트 브래그에는 브라질, 필리핀, 태국 등에서 유학 온 장교들이 있었다. 모두 우리보다 잘사는 나라들이었다. 그들은 “코리아는 어디 있는 나라냐?”, “전쟁의 상처는 아물었느냐?”, “코리아는 가난한 나라라는데, 당신 월급은 얼마나 되느냐?” 등을 물으며 나를 괴롭혔다. 지금과 비교하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지뢰 매설로 敵 爆殺
나는 1966년 12월 주월한국군사령부 민사심리처 요원으로 월남으로 파병됐다. 나를 좋게 본 채명신(蔡命新) 사령관은 이듬해 7월 나를 민사심리전대장으로 임명했다. 나는 사령부 정례 주간회의에서 ‘주월한국군 민사심리전의 문제점과 발전방향’이라는 브리핑을 했다. 이 브리핑에는 포트 브래그에서 배운 최신 이론과 함께, 서울대에서 배운 역사학의 관점서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 정서를 정리한 내용을 담았다. 이 브리핑은 채명신 사령관의 극찬을 받았다. 나는 ‘육군에서 브리핑을 가장 잘하는 장교’라는 평을 들었다. 이러한 평가는 이듬해 중령으로 진급하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1968년 7월 귀국한 나는 최전방 대대장직을 희망했다. 8월 말 나는 강원도 원통의 12사단 37연대 2대대장으로 부임했다. 멀리 해금강이 보이는 건봉산 전방 1031고지 일대를 담당하는 부대였다. 그때 나는 중령 진급 예정자 신분이었다.
당시는 1·21사태를 비롯해 크고 작은 북한의 도발이 빈발하던 때였다. 나는 GP를 지키는 소대장·중대장들에게 적의 예상침투로에 대한 지형정찰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그해 10월 20일 북한군이 침투해 우리 GP의 전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간 것 같다는 휘하 5중대장의 보고를 받았다. 며칠 후에도 북한군이 침투해 인접 GP 전방에서 묵고 간 것 같은 흔적이 발견됐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나는 두 차례 침투로의 교차지점에 M16 지뢰 두 발을 매설하라고 지시했다.
11월 1일은 내가 중령으로 진급하는 날이었다. 진급신고를 하기 위해 사단본부로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5중대장으로부터 긴급보고가 들어왔다. 며칠 전 지뢰를 매설한 지점에서 폭발음이 났다는 것이었다. 현장에서는 북한군 시체 7구가 발견됐다.
백문(白文) 사단장은 직접 우리 대대를 찾아와 내게 중령 계급장을 달아주면서 크게 칭찬을 해주었다. 백 사단장은 이 전과(戰果)를 직접 상세히 기록해 내 장교 인사기록카드 고과표에 별지로 첨부해 놓았다. 이는 내가 동기생들 가운데 선두로 대령 진급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 내 지시를 충실히 이행해 준 부하들 덕분이었다.
盧泰愚 대령과의 만남
![]() |
대령 시절 육군본부에 근무하게 되면서 모처럼 가족과 단란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출근하는 박준병 대령을 배웅하는 가족들. 맨 뒤가 아내 김혜정. |
대령 진급을 앞두고 있던 나는 그보다는 서울의 육군본부에서 일하고 싶었다. 결혼 후 8년 동안 미국 유학, 월남 파병, 전방 대대장 근무 등으로 가족과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이제는 서울에서 근무하면서 가족과 함께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때 도움을 준 사람이 육사 1기 선배인 노태우(盧泰愚) 대령이었다. 당시 그는 육본 인사참모부 대령과장(大領課長)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의 주요 업무 가운데 하나가 육대 졸업생들을 면담하고 희망보직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진해로 내려온 노태우 대령에게 나는 간곡하게 나의 희망을 이야기했다. 그때까지 나는 그와 잘 알지 못하는 사이였다. 내 얘기를 들은 노 대령은 “걱정 말라”고 했다. 나중에 들으니, 노 대령은 육대총장 김익권(金益權) 소장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박 중령을 육대에 데리고 있으려면, 총장께서 책임지고 박 중령을 진급시켜 주셔야 합니다. 박 중령은 이번에 진급 케이스 아닙니까? 만일 책임질 자신이 없으면, 서울로 보내 주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육대에는 오랫동안 육대에서 근무해 온 고참 중령들이 많았다. 그들 외에 나의 진급까지 ‘책임’지는 것은 김익권 총장으로서는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결국 김 총장은 나를 서울로 보내 주었다. 나는 노태우 대령의 재치 있는 일처리가 고마웠다.
全斗煥, 군내 하나회 활동 중단 지시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하나회 회원이 아니었다. 전두환(全斗煥), 노태우 선배 등은 이름만 들었을 뿐,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이였다. 다만 11기 권익현(權翊鉉) 선배와는 생도 시절부터 가까운 사이였다. 그와는 생도 시절 우연한 기회에 가까워져서 의형제를 맺기까지 했다.
내가 하나회원이 된 것은 대령 진급 이후였다. 권익현 선배 등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영남 출신이 주축이 된 하나회에서 나는 회원으로 크게 활동한 것도, 그로 인해 진급 등에서 특혜를 받거나 한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보안사령관으로 있을 때,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지시로 군내 하나회 활동을 중단시켰다. 후일 12·12사건 재판 때 전두환 전 대통령은 “박준병이는 하나회 회원이 아니다”라고 했다.
1970년 가을, 나는 대령 진급 예정자로 선발됐다. 심사위원들은 내가 대대장 시절 침투하는 적을 지뢰로 폭살시킨 전과를 기록해 놓은 백문 사단장의 인사고과표가 결정적이었다고 말했다.
1971년 6월, 인사참모부 대령과장 권익현 대령이 찾아왔다. 생도 시절부터 나와 가까웠던 권 대령은 당시 군부(軍部) 실세였던 윤필용(尹必鏞) 수도경비사령관의 최측근이었다. 그는 나를 윤필용 장군의 측근으로 추천하고 싶다고 했다. 고마운 제안이었다. 권 대령이 힘을 써준 덕분에, 나는 윤 장군과 아무런 인연이 없으면서도 수경사 인사참모로 발령이 났다.
내가 실제로 모셔본 윤필용 장군은 온후하고 인간적인 분이었다. 부양가족이 많은 나를 자주 사무실로 불러, “지난 주말 내기 골프해서 딴 돈이야”, “고스톱해서 딴 돈이야”라면서 수표를 쥐여주곤 했다.
당시 윤필용 장군의 수경사는 강창성(姜昌成) 장군의 육군보안사령부와 경쟁하는 권력기관이었다. 윤 장군과 강 장군은 육사 8기 동기생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다투는 경쟁자이기도 했다.
임관 이래 육사, 야전군, 주월한국군에서 오래 근무했던 나로서는 그런 모습들이 생소했다. 5·16 당시 이한림 장군이 투옥됐던 일도 새삼 떠올랐다. 수경사에서 근무하면서 나는 ‘권력의 중심에 서면 알력이 심하다. 권력은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尹必鏞 사건의 禍 모면
![]() |
1973년 4월 29일 군사재판을 받고 있는 윤필용 사건 관련자들. 앞줄 오른쪽 끝이 윤필용 소장, 왼쪽 끝이 권익현 대령. |
그해 11월경, 윤필용 장군과 절친한 사이인 김진구(金振九) 26사단장이 윤 장군을 만나러 왔다가 내 방에 들렀다. 26사단은 의정부에 주둔하는 6군단 예하 예비사단이었다. 그는 내게 사단 예하 연대장 자리를 제안했다. 좋은 기회였다. 윤필용 장군도 흔쾌히 승낙했다.
그런데 12월 초, 다시 수경사에 들렀던 김진구 사단장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내가 가기로 했던 연대장 자리에 보안사 소속 박모 대령을 추천하고 있다고 말했다.
순간 내 인사문제 때문에 윤필용 장군과 강창성 장군이 대립하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바로 김진구 장군과 함께 윤 장군을 찾아가 이렇게 말씀드렸다.
“정규 육사 출신으로 동기 중 선두주자인 제가, 남들이 모두 가고 싶어하는 서울 근교 예비사단에 가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동부전선의 전방사단 연대장으로 가겠습니다.”
김진구 사단장이 고민하던 강창성 장군의 박모 대령 추천 건은 얘기하지 않았다. 윤 장군은 내 결심을 기특하게 여기고 “역시 박 대령은 우리 군의 간성(干城)”이라며 격려해 주었다. 1973년 초 나는 28사단 81연대장으로 부임했다. 전방이기는 했지만, 서울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내가 연대장으로 나간 지 채 두 달이 되지 않았을 때, 육군을 발칵 뒤집어놓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윤필용 사건’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오랜 측근이었던 윤필용 장군이 “박정희 대통령은 노쇠했으니 일선에서 물러나고, 이후락(李厚洛) 중앙정보부장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한 발언이 발단이었다.
윤필용 장군과 그의 측근 장교들은 대역(大逆)을 꾀한 혐의로 잡혀 들어가 고초를 겪은 후, 부정부패 등의 죄목으로 실형(實刑)을 선고받았다. 육사 11기인 수경사 참모장 손영길(孫永吉) 준장, 26사단 연대장 권익현 대령 등이 유죄판결을 받고 예편당했다.
모골이 송연했다. 만약 내가 김진구 26사단장의 제안을 받은 후 26사단 연대장으로 나갔다면? 나 역시 윤필용 사건의 태풍을 피해가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윤필용 장군과 강창성 장군 사이에서 갈등의 요인이 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그 자리를 사양한 것이 내게는 행운이 된 셈이었다.
대통령 有故 모르고 10·26 때 서울로 출동
![]() |
1979년 7월 30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소장으로 진급한 박준병 장군에게 별을 달아주고 있다. |
3군사령부 직할 예비사단인 20사단은 유사시 서울로 출동하는 부대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했다. 10·26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나는 육대 동기인 부관감(副官監) 조진희 준장과 사단장 공관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날 8시40분경, 이건영(李建榮) 3군사령관이 전화를 걸어왔다.
“서울에서 내용을 알 수 없는 비상사태가 발생한 듯하니, 전(全) 사단이 즉각 서울로 출동할 수 있게 준비하시오.”
나는 즉시 부대로 들어가 출동준비에 들어갔다. 그날 밤 9시 반, 이건영 사령관은 “가장 빠른 방법으로 서울 태릉지역에 전개하고, 육군참모총장의 명령을 받으라”고 지시했다.
서울로의 출동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낡은 차량, 운전병의 운전 미숙, 도로 사정 등으로 인해, 우리 사단의 마지막 부대가 서울 망우리 초소를 통과한 것은 10월 27일 새벽 4시였다. 육사 보안부대장 김동조 중령이 찾아와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이 서울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해 달라고 했다”는 말을 전했다.
나는 새벽 5시 육사교장실로 가서 육군본부 상황실에 상황을 보고한 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통령 유고(有故)’ 소식을 접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몇 년 전 방송된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10·26 당시 내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명령으로 20사단을 서울로 출동시킨 것으로 방영했는데, 이는 명백한 사실왜곡이다.
12·12사태 5일 전 全斗煥과 만나
10월 27일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됐다. 당시 우리 집은 연희동에 있었다. 계엄군으로 서울에 들어온 나는 우리 집에서 부대로 출퇴근을 했다.
12·12가 일어나기 닷새 전, 보안사령관 비서실에서 전화가 왔다. 12월 9일(일요일) 오전 10시에 전두환 장군이 자기 집에서 만났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집은 우리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였는데, 전에 몇 번 찾아간 적이 있었다.
12월 9일 전두환 장군 집으로 찾아갔다. 전 장군은 무척 반가워하면서, “12일 저녁 6시 반에 수경사 30경비단장 장세동(張世東) 대령의 방에서 저녁이나 같이하자”고 했다. 나는 11시부터 개척교회를 운영하는 장인과 함께 오전 11시 예배에 참석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던 터라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12월 12일 30경비단에서 만나자는 이유라든지, 그날 누가 나올 것이라든지 하는 얘기는 전혀 없었다.
12월 12일 저녁 6시20분, 경복궁에 있는 수경사 30경비단장실로 갔다. 유학성(兪學聖, 안기부장 역임) 국방부 군수차관보, 황영시(黃永時, 육참총장·감사원장 역임) 1군단장, 노태우 9사단장 등이 와 있었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선배들이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전두환 장군을 기다렸다.
7시경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나타났다. 그는 10·26사태와 관련해 정승화(鄭昇和)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기 위해 합동수사본부 수사관들을 육군참모총장 공관으로 보냈는데, 총격전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모두 당황했다. 눈치를 보니 노태우 장군만이 그날 모임의 성격을 알고 있었고, 나머지 장군들은 모르고 있는 듯했다.
全斗煥처럼 대범한 사람 못 봐
![]() |
1980년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의 대장 진급을 축하하면서 보안사 앞에서 찍은 사진. 앞줄 왼쪽부터 노태우, 전두환, 박준병. 뒷줄 오른쪽 두 번째는 김진영 대령(전 육군참모총장). |
“박 장군, 20사단 병력을 출동시켜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장악해 주시오!”
순간 5·16 당시 고뇌하던 이한림 장군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전두환 장군의 요청을 거부했다.
“20사단은 전쟁이 나면 전쟁터로 가야 하는 부대입니다. 그런 부대를 지휘계통 밖에 있는 사람의 명령을 받아 출동시킬 수는 없습니다.”
전두환 장군은 내 말을 듣자 구구하게 더 이상 요청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노태우 소장의 9사단과 박희도 준장의 1공수특전여단 병력을 동원했다.
정승화 육참총장 연행에 대해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의 사후재가(事後裁可)를 얻기 위해 전두환 장군이 다른 장군들과 함께 총리공관으로 갈 때도 나는 동행하지 않았다. 밤늦은 시각에 사전 약속도 없이 현역 장성들이 군복 차림으로 찾아가는 것은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에 대한 결례(缺禮)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0경비단에는 노태우 장군과 내가 남았다.
후일의 얘기지만, 이날 내가 취한 조치 때문에 나는 12·12 및 5·17사건 재판에서 유일하게 무죄(無罪) 판결을 받았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부대 출동을 거부했던 내게 서운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은 그 후 한 번도 그날의 일을 입에 올린 적이 없다. 간접적으로라도 그가 나에게 섭섭해한다는 얘기도 들은 적이 없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사람을 쓸 때, 사람을 정확히 알려고 노력했고, 능력이 있으면 주저 않고 썼다. 나는 평생 전두환 전 대통령처럼 대범하고 리더십이 뛰어난 사람을 보지 못했다.
20사단, 光州로 가다
12·12사태 후 보안사령부로 권력이 쏠리는 것이 보였다. 연말연시가 되자 우리 부대로도 전보다 훨씬 많은 위문품이 들어왔다.
1980년 1월 하순, 나는 이희성(李熺性) 육참총장에게 부대를 양평으로 복귀하게 해달라고 요청해 허락을 받았다. 나는 계엄업무 수행 중에 나타난 문제점들을 개선해 우리 사단을 유사시 적과 제대로 싸울 수 있는 부대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은 내 뜻과는 반대로 흘러갔다. 우리 부대는 1980년 5월 15일 다시 서울로 이동했다. 이틀 후 비상계엄령이 제주도를 비롯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5월 20일 저녁, 친구와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데 황영시 육참차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광주(光州)에서 소요사태가 발생했으니 1개 연대를 내려보내 윤흥정(尹興禎, 체신부장관 역임) 전투병과교육사령관의 지시를 받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이어 작전계통을 통해 정식으로 명령이 내려왔다. 나는 김동진(金東鎭, 육군참모총장·국방부장관 역임) 대령의 61연대에 출동명령을 내렸다.
용산역에서 61연대의 출동을 확인하고 돌아온 밤 11시경, 다시 1개 연대를 추가로 파견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이병년(李丙年) 대령의 62연대에 출동을 지시했다.
나는 5월 21일 광주 송정리로 내려가 윤흥정 장군에게 부대 도착을 보고했다. 다음 날 60연대와 사단 포병사령부 병력이 공군수송기편으로 내려왔다. 이로써 사단 전 병력이 광주로 내려갔다. 서울에서 육로(陸路)로 이동해 온 우리 사단은 지휘용 지프 14대가 무장시위대에게 탈취당했으며 병사 1명이 실종됐다가 귀환했고, 두 명이 경상을 입었다. 5월 21일, 공수부대가 광주시내에서 철수했다.
온갖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가장 심각한 것은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를 싹쓸이하러 왔다”는 것이었다. 우리 부대에도 육사 출신 대대장들을 비롯해 장병의 20% 이상이 호남 출신이었다. 밤새 한잠도 못 잔 나는 다음 날 아침 7시, 중사 이상 간부들을 보병학교 연병장에 소집했다. 나는 그들에게 “광주시민의 명예를 지켜주고, 국민의 군대로 국민의 신뢰를 받는 군대가 되도록 노력하겠다”면서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사단장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휘하 장병 두 명 戰死
계엄사령부는 자위권(自衛權) 발동을 했지만, 나는 민간인에게 절대 선제(先制)사격을 하지 말고, 사격을 받더라도 최소한으로 대응하며, 부상자는 군인과 민간인 가리지 말고 신속하게 군병원으로 후송하라고 지시했다.
육군본부는 사태 초기 진압에 실패한 책임을 물어 윤흥렬 전투병과교육사령관을 경질하고(외양상 체신부장관으로 입각하기 위해 예편) 전남 출신인 소준렬 장군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광주시 외곽을 포위, 통제하고 있던 우리 사단은 5월 27일 진압작전에 투입됐다. 공수부대가 먼저 시내에 진입해 무장시민의 저항을 분쇄하면, 우리 사단을 비롯해 현지 향토사단인 31사단, 전투병과교육사령부 예하 부대들이 책임구역을 인수받았다.
광주사태 기간 중 우리 사단은 모두 세 차례 교전(交戰)을 벌였다. 우리 사단 장병 두 명이 전사(戰死)하고 11명이 부상했다. 민간인은 10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했다. 국가적 비극이었다. 당시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冥福)을 빈다.
나는 광주사태가 진압된 다음 날, 광주나 인근 지역이 고향인 장병들에게 외박을 주도록 했다. 참모들이 시기상조라고 반대했지만, 나는 “자기 부모, 친척을 찾아가는 데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300여 명의 장병들은 가족과 친지들이 싸준 떡이나 과일 등을 싸들고 무사히 귀대했다. 공수부대가 복귀한 후에도 나는 소준렬 사령관에게 건의해 20사단이 한 달가량 더 광주에 주둔하면서 시가지 정비, 농번기 대민봉사 등을 돕도록 했다.
6월 말 원대복귀한 후 나는 이희성 육참총장에게 “앞으로 국내 소요사태 발생시 군의 동원은 자제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것은 광주사태를 겪은 많은 군 지휘관들의 공통된 생각이기도 했다. 이후 5공(共) 시절 시위진압에 전투경찰을 동원하고,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때에도 군이 출동하지 않은 것은 광주사태의 교훈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후 나는 육군본부 인사운영감, 인사참모부장을 거쳐 1981년 7월 국군보안사령관이 됐다. 당시 보안사령관직은 전임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장군이 거쳐 가면서 권부(權府) 중의 권부로 인식되고 있었다.
육사 동기생인 박세직 수경사령관이 보안사령관, 내가 수경사령관을 맡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세상에서는 나와 박세직, 박희도 장군을 ‘쓰리 박(three Park)’이라고 불렀다. 나중에는 육사 17기 출신인 허화평(許和平) 정무수석비서관, 허삼수(許三守) 사정수석비서관, 허문도(許文道) 비서관 등을 ‘3허(許)’라고 부르면서, ‘3박’은 군부 내 온건그룹, ‘3허’는 강경개혁파로 지칭하기도 했다. ‘3박’이건 ‘3허’건 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얘기다. 그런 식의 대립구도는 없었다.
어느 날 이희성 육참총장이 인사참모부장인 나를 불렀다. 그는 대통령 재가를 받기 위한 인사 초안의 보안사령관 직위에 내 이름을 적으라고 했다. 내가 물었다.
“보안사령관은 박세직 장군으로 결정된 것 아닙니까?”
“대통령 각하께서 직접 당신을 지명하셨소.”
아마 전두환 대통령은 내가 보안사령관이라는 자리를 내세워 ‘엉뚱한 짓’을 하지 않고, 조용하고 성실하게 일을 해나갈 사람으로 보았던 것 같다.
朴世直, “차기 대통령은 나” 발언으로 전격 예편
![]() |
박세직 전 수경사령관. |
조사해 보니 별일 아니었다. 7월 말 예하 부대를 돌아보기 위해 광주에 내려갔다. 마침 전두환 대통령도 남해안 휴양지에 가 있었다. 나는 다음 날 전 대통령을 찾아가서 조사 결과를 보고할 생각이었다.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데,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다.
“대통령께서 갑자기 서울로 올라오셨습니다. 내일 9시까지 청와대로 오라고 하십니다.”
다음 날 청와대로 달려갔더니, 이미 주영복(周永福) 국방장관과 이희성 육참총장이 와 있었다. 무거운 분위기였다. 내가 이규환 대령 건에 대해 보고하려고 하는데, 전 대통령이 말을 잘랐다. “보고할 필요 없소. 박세직 장군을 즉각 예편시키시오.”
장관과 총장은 이미 얘기를 들은 듯했다. 내가 말했다. “가까운 친구로서 저도 책임이 있습니다. 전방 부군단장으로 보내 반성할 기회라도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전두환 대통령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전역식이라도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전 대통령은 이건 받아들였다.
당시 박세직 장군의 돌연한 예편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박세직 장군이 큰 비리는 아니지만, 5공 정부의 개혁의지를 보이기 위해 일벌백계(一罰百戒)하는 것이라는 설명이 나왔다.
실제로는 당시 박세직 장군이 각계 인사들과 활발하게 접촉하면서 “차기 대통령은 나”라는 식의 언동(言動)을 한 게 문제가 됐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수경사 작전참모 김진영(金振永) 대령 등을 불러서 박세직 장군의 평소 언행 등에 대해 직접 알아보고 그런 조치를 내린 것이었다.
나는 ‘전두환 대통령이 철저한 분이니, 충분히 알아보고 그럴 만하니까 그런 조치를 내리는 것이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친구를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변호하지 못했던 것은 후회스러운 일이다.
나는 사령관으로 있으면서 보안사가 권부로 인식되는 것을 불식시키려 노력했다. 일제(日帝)시대부터 써온 낡은 사령부 건물을 신축하기 위해 100억원의 예산이 책정되어 있었지만, 반납하도록 했다. 그 무렵 신축한 사령관 관사도 매각하도록 했다. 때문에 ‘힘 있는 사령관’을 기대했던 부하들은 실망하기도 했다.
갑작스런 轉役
![]() |
전두환 대통령은 예편하기 직전 박준병 보안사령관을 대장으로 진급시키고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
“사정이 생겼소. 민정당의 형편을 고려해서 1985년 2월 12대 총선에 고향인 보은·옥천·영동 지역구에 출마하는 게 좋겠소.”
나는 당황했지만 군인은 군 통수권자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권력기관인 보안사령관을 오래한 내가 야전군으로 돌아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바로 “알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런 내 모습이 좋았는지, 전 대통령은 “아직 시간이 있으니, 원하는 때까지 근무하라”고 말했다. 전역하기 일주일 전인 1984년 7월 1일에는 나를 대장으로 진급시켜 주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배려였다. 나는 육사에 입교한 지 32년 후인 1984년 7월 7일, 20사단 연병장에서 전역식을 갖고 군복을 벗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전 대통령이 나를 전역시켜 국회의원으로 출마시키겠다는 결심을 한 것은 권익현 사무총장의 건의 때문이었다.
1984년 12월, 선거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야당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이용희(李龍熙) 전 의원, 이동진(李東鎭) 의원, 최극(崔極) 후보 등 만만한 사람이 없었다. 처음에는 ‘한 지역구에서 두 명을 뽑는데, 설마 낙선하기야 하겠나’하는 생각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낙선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엄습했다.
1985년 새해를 맞으면서 나는 지역구 내 모든 마을을 직접 방문하기로 결심했다. 육군대장, 보안사령관이라는 관록은 잊어버리고 선거 하루 전까지 3개 군 900여 개 마을을 모두 돌았다. 결국 나는 2위 당선자인 이용희 후보보다 4배나 많은 8만8047표를 얻어 당선됐다. 득표율은 64.8%로 충북 괴산의 김종호(金宗鎬) 당선자에 이어 전국 2위였다.
국책조정위원장으로 주목받아
2·12총선은 1981년 5공 출범과 함께 형성된 정치구조를 통째로 흔들었다. 민정당은 노태우 대표위원을 얼굴로 내세웠다. 야당은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면서 5공 정권을 거세게 압박했다. 그런 가운데 1985년 9월 3일 나는 국책조정위원장으로 임명됐다. 노태우 대표는 “전두환 총재가 직접 결정한 인사”라고 전했다.
민정당의 외곽기구였던 국책조정위원회는 ▲ 정국상황의 진단과 예측 ▲주요 정치현안에 대한 대책 수립 ▲ 국책평가위원회 및 유관 부서와의 협조 등이 주요 임무였다.
해석하기에 따라 국책조정위원회는 국정 전반에 막강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다. 여기에 더해 내가 초선 의원에 불과하지만, 보안사령관을 지낸 군부 실세라는 인식 때문에 국책조정위원회와 나는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조선일보》 이상철(李相哲, 편집국장·월간조선 사장·서울시 정무부시장 역임) 기자는 《주간조선》(1985년 9월 22일자)에 어느 의원의 말을 인용해 “마침내 한 척의 핵잠수함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고 썼다. 내가 전 대통령의 후계자가 될 수도 있다는 뉘앙스였다.
그럴수록 나는 몸을 낮추고 조심했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자제했다. 국책조정위원회도 민주국가의 청사진을 그리는 데 주력했다. 당시 함께 일했던 최병렬(崔秉烈), 현홍주(玄鴻柱), 이종률(李鍾律), 김학준(金學俊), 김종인(金鍾仁) 의원 등은 후일 노태우 정권 등을 거치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3黨 合黨으로 가는 길
![]() |
1988년 12월 22일 박준병 의원이 광주사태 관련 청문회에서 광주사태 당시 20사단의 역할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
민정당과 청와대는 이듬해 4·26총선에서의 승리도 낙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선거운동을 하는 나의 느낌은 달랐다. 선거 일주일 전 새벽, 나는 안무혁(安武赫) 안기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어려운 상황을 설명하고,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고해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도록 건의하라고 했다. 선거 결과 민정당은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여소야대(與小野大)였다.
총선 후 당직 개편에서 나는 민정당 사무총장을 맡았다. 김윤환(金潤煥) 의원이 원내총무, 이한동(李漢東) 의원이 정책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지금과 달리 당시 여당 사무총장은 ‘실세(實勢)’였다. 여당의 조직과 자금, 인사를 장악하는 것 외에도 월(月) 1회 대통령과 독대하는 권한도 있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여당 사무총장은 국무총리에 버금가는 요직’이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여소야대 상황 속에서 야당은 ‘5공 청산’을 거세게 요구했다. 여야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구성에 합의하자, 나는 윤길중(尹吉重) 대표에게 사의(辭意)를 표했다. 광주사태 당시 20사단장이었기 때문에 당에 정치적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광주사태 관련 청문회에서 나는 당시의 일을 있는 그대로 얘기했다.
89년 8월 20일 일본 여행 중이던 나는 노태우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급거 귀국했다. 노 대통령은 내게 박철언(朴哲彦) 정무장관과 함께 야당과의 통합을 추진해 보라고 했다. 여소야대의 극복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더 나아가 보수대연합, 내각제 개헌 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나도 마음에서부터 동감하는 바였다.
물밑작업이 시작됐다. 김영삼 총재의 통일민주당에서는 황병태(黃秉泰) 부총재, 김덕룡(金德龍) 의원이 협상에 나왔다. 나와 박철언 장관, 황 부총재, 김 의원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만났다.
내각제 각서 합의
89년 12월 15일 노태우 대통령과 세 야당 총재(김대중, 김영삼, 김종필)는 “5공 문제를 금년 내에 마무리 짓자”고 합의했다. 그해 12월 31일 백담사에 가 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국회에 출석해 증언을 했다. 12·15합의 이틀 후인 89년 12월 17일 신라호텔에서 나, 박철언, 황병태, 김덕룡 네 사람이 만났다. 우리는 합당의 원칙, 당명, 당 지도체제 등에 대해 합의했다. 신민주공화당과의 접촉도 내가 맡았는데, 김용환(金龍煥) 의원이 상대였다. 우리 두 사람은 만난 지 두 번 만에 합의에 도달했다.
90년 1월 6일, 나는 다시 민정당 사무총장이 됐다. 1월 19일 나와 박철언, 황병태, 김덕룡 의원은 합당 각서에 서명했다. 다음 날은 나와 김용환 의원이 합당 각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1월 22일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YS) 총재, 김종필(JP) 총재는 3당 합당 선언을 했다. 당 이름은 민주자유당. YS가 제안한 이름이었다.
3당 합당의 연결고리는 사실 내각제 개헌이었다. 민자당 전당대회를 앞둔 90년 5월 5일, 나, 노재봉(盧在鳳) 대통령비서실장, 최창윤(崔昌潤) 정무수석, 민주계의 김동영(金東英) 원내총무와 김덕룡 의원이 당헌(黨憲) 초안을 검토했다. 쟁점은 3당 합당의 전제조건인 내각제 개헌을 당헌에 넣느냐 여부였다. 민정계와 공화계는 당연히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민주계는 완강히 반대했다.
결국 논란 끝에 내각제를 당헌에 포함하지는 않되, 노태우 대통령, YS, JP가 합의서를 만들어 서명하기로 했다. 초안은 노재봉 실장이 작성했고, 내가 최종안을 정리했다. 내용은 이렇다.
< 역사적인 민주자유당의 제1차 전당대회를 앞두고 우리 3인은 신뢰와 협조 아래 국가와 당의 발전을 위하여 합당정신에 입각, 헌신할 것을 다짐하며 다음과 같이 합의한다.
1. 의회와 내각이 함께 국민에게 책임지는 의회민주주의를 구현한다.
2. 1년 내에 의원내각제로 개헌한다.
3. 이를 위하여 금년 중 개헌 작업에 착수한다.
1990년 5월 6일
민주자유당 최고위원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내각제 각서 유출 파문
![]() |
1995년 10월 14일 자민련에 입당한 박준병(오른쪽에서 두 번째) 의원이 김종필(왼쪽에서 두 번째) 총재의 환영을 받고 있다. 왼쪽은 박철언 부총재, 오른쪽은 한영수 원내총무. |
그날 저녁 나는 서명한 원본을 최창윤 정무수석에게 주었다. 최 수석은 대통령의 서명을 받은 후, 다음 날 오후 그 사본 2장를 가지고 왔다. 그는 “YS, JP에게 사본을 전달해 확실하게 매듭을 짓는 것이 좋겠다”는 노태우 대통령의 말도 전했다.
나는 내가 직접 전달하는 것보다는 김동영 원내총무, 김용환 정책위의장이 각각 YS와 JP에게 전달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뜻을 들은 김용환 의장은 곧 사본을 가져갔으나, 김동영 원내총무는 오지 않았다.
나는 YS에게 전할 사본을 사무실 안쪽 내실(內室) 책상서랍에 넣고 퇴근했다. 다음 날은 일정이 바빠서 사본 전달을 깜박 잊었다. 그리고 5월 9일 사본을 찾아보니 보이지 않았다. 깜짝 놀란 나는 보좌관과 비서들을 총동원해서 사본을 찾아보았지만 허사였다.
며칠 후 봉투가 뜯겨진 상태로 누군가가 책상서랍에 넣어둔 사본을 발견했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한번 뜯겨진 사본을 전달하기도 뭣해서 그냥 내가 보관했다.
그해 10월 25일 《중앙일보》는 내각제 각서의 존재를 폭로했다. 내각제 각서의 존재를 부인해 오던 YS는 난처해졌다. 나는 사무총장으로 각서 유출의 책임을 지고 총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해 10월 29일 YS는 당무 거부를 선언했다. 다음 날에는 “내각제 개헌은 국민과 야당이 반대하므로 추진할 수 없다”며 낙향했다. YS의 이런 저항에 결국 노태우 대통령과 JP는 손을 들고 말았다.
혹자는 내가 고의적으로 내각제 각서를 유출한 것이 아니냐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후일 노태우 대통령은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박준병씨는 그렇게 할 사람이 아니다”면서 “거꾸로 김영삼 대표최고위원 측에서 그것을 유출시켜서 내각제를 깨버리려고 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한테 들어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내 사무실을 드나들던 대전고 후배인 박모 기자가 내각제 각서 사본을 습득해서 폭로한 것이라는 얘기도 있는데, 나로서는 모르는 일이다.
내각제 개헌이 무산된 후 YS는 사사건건 노태우 대통령과 부딪히더니, 결국 민주자유당 후보 자리를 차지했다. 나는 박태준 최고위원이 후보로 적합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도중에 출마를 포기하고 말았다. 결국 민정계의 이종찬 의원이 후보로 나섰지만, 그는 경선 과정에서 YS의 불공정한 행태를 문제 삼아 경선을 포기했다.
대통령이 된 YS는 과거와의 단절에 나섰다. 93년 3월 하나회 숙정(肅正)을 단행하더니, 95년에 접어들면서는 ‘역사 바로 세우기’에 나섰다.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정계와 공화계를 밀어내고, 민자당을 YS당으로 만들겠다는 의도가 그 속에 있었다. JP는 여기에 반발, 민자당을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했다.
그해 6·27지방선거에서 자민련은 충청권을 휩쓸었다. 92년 대선 패배 후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DJ는 서울시장에 조순(趙淳)씨를 당선시킨 후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 정계에 복귀했다.
민자당을 탈당하게 된 계기
정국이 요동치자 내가 민자당을 탈당해 자민련에 입당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YS는 8월 중순 나를 청와대로 불러 탈당을 간곡히 만류했다. 나도 탈당할 생각은 없었다. 정치상황의 변화에 따라 당을 이리저리 바꾸는 것은 내 소신과는 다른 일이었다.
하지만 ‘역사 바로 세우기’의 칼날은 나를 향해 오고 있었다. 사실 YS는 집권 초기만 해도 과거 정권들을 ‘군사정권’으로 매도하기는 했지만, 사법처리까지 할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검찰도 94년 12월, 12·12에 대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김윤환 민자당 대표가 12·12사태에 대한 입장이 변화할 수 있다고 시사(示唆)하더니, 강삼재(姜三載) 사무총장은 내가 민자당을 탈당할 경우 구속될 수도 있다고 공언했다. 그런 모욕을 받으면서 계속 민자당에 몸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95년 10월 14일 민자당을 탈당, 자민련에 입당했다. 내가 자민련에 입당하자 YS정권은 나의 모든 것을 뒤졌다. 하지만 나온 것은 없었다.
내가 민자당을 탈당한 지 닷새 후인 10월 19일, 민주당 박계동(朴啓東) 의원이 국회에서 ‘노태우 비자금’을 폭로했다. 이 폭로는 전두환-노태우 정권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했다. 이를 계기로 12·12 및 5·18 관련자 처벌을 위한 소급입법(遡及立法) 제정이 탄력을 받게 됐다. 그해 12월 19일 끝내 소급입법이 제정됐다.
나는 12·12사태에 참여해 ‘반란중요임무’에 종사했다는 이유로 96년 2월 29일 구속 기소됐다. 예상했던 바였다. 이에 대비해 나는 이미 2월 13일 지역구를 어준선(魚浚善) 안국약품 회장에게 내주었다. 옥중출마(獄中出馬)해서 지역구민들에게 나의 결백을 호소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정계은퇴
![]() |
자민련 시절 박태준 총재와 박준병 사무총장. |
대전고 동문인 김인섭 변호사, 신정철 변호사(전 대법관), 주재우 변호사, 민경식 변호사 등이 애써 주었다. 그 고마움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97년 11월 박태준 전 민자당 최고위원이 자민련에 입당했다. JP가 명예총재로 물러나면서 박태준 전 최고위원이 자민련 총재가 됐다. 그는 부총재로 있던 내게 사무총장을 겸임해 달라고 했다. 박 총재와는 그가 육사 교무처장이었던 시절부터 인연이 있었다. 그는 이한림 전 1군사령관과 함께 내가 가장 존경하는 군 선배였다.
이후의 정치는 내 개인이나 자민련 모두 실패의 연속이었다. 나는 98년 7·21보궐선거에서 당의 요청으로 서울 서초갑(甲)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2000년 4·13총선에서 자민련은 17석의 군소정당으로 전락했다. 나도 낙선의 쓴 잔을 마셨다. 그해 5월 19일 박태준 총리가 부동산 명의신탁이 문제가 되어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나를 다시 정치에 몸담게 했던 박 총리가 물러나면서, 나도 자연스럽게 정치무대에서 내려왔다. 2002년 12월 나는 정계에서 은퇴했다.
‘밀려서’ 살아온 인생
생각해 보면 내가 정치생활을 한 시기는 우리나라 정치가 권위주의에서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도기였다. 나는 나름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했었다. 3당 합당 때에는 ‘이를 계기로 우리 정치도 달라질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져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다. 과거 민정당·민자당 사무총장 시절 대통령과의 독대 자리에서 정치발전을 위해 필요한 일들을 보다 강력하게 진언(進言)하지 못했던 것이 그렇고, 12·12재판이 끝난 후 바로 정계에서 깨끗하게 은퇴하지 못한 것도 아쉽다. 어린 시절 정상문·이현덕과 나눈 얘기처럼 ‘밀려서’ 살아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행복한 인생이었다. 나라로부터 받은 게 너무 많다. 나라 덕분에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했던 내가 육사와 서울대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고, 군인으로서 최고의 영예인 대장까지 올라갔다. 그 가난했던 나라가 이만큼 성장한 것도 고맙고 자랑스럽다.
지금 나는 서경대 석좌교수로 있으면서 젊은이들에게 우리 세대의 경험과 내가 체험한 리더십에 대해 가르치면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어린 시절 막연하게 꿈꾸었던 대학교수의 꿈이 군인과 정치인이라는 먼길을 돌고 돌아 이루어진 셈이다.⊙
[취재후기] 작년 10월 말 이 글을 쓰기 위해 박준병 전 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기억해 줘서 고맙다”면서 기꺼이 인터뷰에 응했다. 작년 11월 1일 성남 분당 그의 집 인근 음식점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음식점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자의 대학 시절, ‘박준병’이라는 이름 뒤에는 12·12사태나 광주사태, 혹은 ‘국군보안사령관’이라는 그림자가 따라붙었다. 하지만 막상 만난 그는 푸근하고 편한 인상이었다. 말은 조심스러웠다. 3선 국회의원을 했다고는 하지만 시원시원하게 자기 얘기를 털어놓는 대중정치인과는 달랐다. 호쾌한 무골(武骨) 스타일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차례차례 계단을 밟아 최정상까지 올라간 성실한 관료’ 혹은 ‘평생 상아탑 안에서 살아온 교수’라는 느낌이 강했다. 지금 그가 갖고 있는 ‘서경대 석좌교수’라는 직함이 그의 언행이나 현재 그의 모습과 가장 어울리는 듯싶었다. 그의 이런 모습은 충청도 태생의 특징에다가, 5·16 당시 이한림 1군사령관의 전속부관으로 있다가 한 달간 투옥됐던 경험, 그리고 윤필용 사건을 지켜본 데서 나온 경험이 작용한 게 아닌가 싶었다. 12·12사태나 광주사태, 하나회 등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자신이 그와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내각제 각서 유출 파문’과 관련해서는 “그게 어떻게 된 일인지는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고 했다. “대전고 후배인 《중앙일보》 박모 기자가 유출했다는 얘기가 있다”고 하자 “처음 듣는 일”이라고 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리더십에 대해서는 극찬을 했다. 그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헤어져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선배인 김성동 차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부터 추진해 오던 김상현 전 민추협 공동의장 권한대행과 약속이 잡혔다는 얘기였다. 김상현 전 의장의 이야기가 실린 작년 《월간조선》 12월호 발매를 앞두고 박준병 전 의원에게 편지를 보냈다. 와병 직후인 김상현 전 의장이 어렵게 시간을 내주어서 부득이 김 전 의장 이야기가 먼저 나가게 된 데 대해 양해를 구했다. 시기적으로도 그의 얘기는 3당 합당이 있었던 달인 1월 말 발매되는 《월간조선》 2월호에 실리는 것이 적절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박준병 전 의원은 바로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는 언제 나가든 상관없으니 개의치 말라고 하면서, 김상현 전 의장의 쾌유를 빌어주었다. ‘충청도 양반’ 모습 그대로였다.⊙ |
첫댓글 다음 최세창사단장 이취임식 때 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