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산해미읍성 : 바다가 아름답다는 의미의 '해미(海美)'라는 지명은 조선시대부터 사용되었다. 1416년 태종이 서산 도비산에서 강무*를 하다가 해미에서 하루를 머물면서 주변지역을 둘러보게 됐는데,당시 해안지방에 출몰하는 왜구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기에 적당한 장소라고 판단하여 덕산에 있던 충청병영을 이설하기 위한 대상지로 정해 1417년(태종17년)부터 1421년(세종3년)까지 축성을 완료하게 된다. 그 후 해미에 충청지역 육군의 최고 지휘기관인 충청병영이 위치하며 병마절도사가 배치되어 육군을 총 지휘하였고 1651년 청주로 충청병영을 이전하며 충청병마절도사의 병영성으로서의 역할이 끝나게 된다. 이후 충청도 5진영중 하나인 호서좌영이 들어서게 되고 영장(營張)으로 무장을 파견해 호서이성의좌영장과 해미현감을 겸직하게 하면서 읍성(邑城)*의 역할을 하게 된다.
* 해미읍성과 천주교 : 우리나라에는 약 200여년 전, 조선후기에 전래되어 초기에는 서학이라는 학문의 일종으로 연구되었으나 후에 종교화 되면서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1790년대 정조 때부터 시작된 천주교 박해는 병인양요(1866년 흥선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 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한 사건)와 1868년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묘를 도굴한 사건 이후 더욱 극심해진다. 이때 해미진영의 겸영장은 내포지방 13개 군현의 군사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해당 지역의 교도들을 모두 잡아들여 해미읍성에서 처형하였는데 그 수가 무려 1,000여명 이상이었다고 전한다. (서산시홈피)
주차장 앞 잠양루
읍성의 정문인 진남문
일명 호야나무라고 불리는 회화나무 : 충청남도 지정기념물 제172호로 수령 300년 이상 추정되는 나무.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을 이 나무에 매달아 고문했다고 전해진다.
* 한국천주교 3대성지인 이곳은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곳을 방문하여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가한 아시아 젊은이들에게 평화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폐막미사를 집전하였다.
옥사
민속가옥 다듬이질
홍매화
동헌과 느티나무
청허정
자성루와 성곽
농산물판매장
전통주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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