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의 마지막 글인 이번 글에는 1980년대 한국대중음악 가운데 30여 장의 추천 음반을 중심으로 여러 기록과 이야기, 그리고 대표 음악 중 1부를 소개한다.
다음 글에서는 한국대중음악100년사 1980년대를 대표하는 노래 2부가 이어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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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의 일인독주시대로 대변되는 1980년대 대중음악은 다양한 뮤지션들과 풍성한 장르의 여러 음악이 넘쳐났던 최대의 활황기였다.
주류와 언더의 경계도 모호했다. 주류 인기가수들이 음악성이 담보된 명반을 발표했던 시기였고 오락적 요소가 부족한 언더의 뮤지션들도 가요차트에 명함을 들이 대는 이변이 가능했던 시절도 1980년대였다.
1970년대의 암흑기를 지나 조용필의 독주가 시작된 1980년대 대중음악은 권토중래의 기틀을 맞이했다.
각종 대학가요제를 통해 배출된 아마추어 가수들이 대거 프로뮤지션으로 진출하면서 대중음악계는 풍성한 인적 인프라를 구축했다.
또한 해빙 분위기를 타고 활동이 금지된 중요 뮤지션들까지 돌아오면서 중흥의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1980년대는 주류와 언더의 뮤지션이 공존하며 침체된 대중음악계의 성장 동력으로 작용했다.
1980년 '창밖의 여자'를 발표한 조용필이 주류무대를 장악하며 거대한 팬덤 문화를 형성한 가운데 팝 발라드 장르로 밀리언셀러 음반판매시대를 연 이문세와 김학래, 이재성 등은 대중음악의 수준을 외국 팝에 필적하게 끌어올리며 이후 변진섭, 신승훈, 조성모로 이어지는 발라드 전성시대를 견인했다.
박남정, 소방차, 김완선, 인순이, 나미 등의 댄스장르도 큰 인기를 구가했다.
더구나 송골매, 들국화, 부활, 시나위 등 락밴드들도 락 전성시대를 만개시켰고 조동진, 김현식, 유재하 등 언더그라운드가수들도 탄탄한 음악성으로 인지도를 획득하며 소극장 공연문화 정착에 일조했다.
민주화에 대한 강렬한 당대 대중의 여망을 반영하듯 1989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 2집 수록곡 '사계'는 주류 대중가요 차트에 오르며 민중가요가 일반대중음악 시장진입에 성공한 기념비적 음반이 되었다.
또한 1982년 개발된 CD는 점차 국내 제작이 가시화되어 음반 미디어의 대변환이 예고되었다.
송창식은 1970년대 말부터 작가주의적 태도에서 시작된 여러 음악적 시도를 안정적으로 표현해 나왔으며, 이 음반은 그러한 시도의 결정을 이룬 작품이다.
앨범의 재킷은 송창식의 여러 얼굴 표정을 캐리컬처 형식으로 담은 앞면과 송창식 고유의 너풀거리는 춤을 연상시키는 뒷면의 아트워크가 눈에 띈다.
또한 앨범의 앞면 재킷에는 태극문양을 활용한 하회탈이 자리하고 있으며, 레코드판 인쇄지에도 태극 문양이 새겨져 있다.
송창식 음악의 기조는 가장 한국적인 대중가요에 있다. 이 앨범은 이러한 기운이 매우 강하게 스민 작품이다.
호쾌한 송창식의 이미지가 가장 잘 어울리는 노래이자 타이틀곡인 '가나다라'는 이를 잘 대변하는 노래다.
국악적인 느낌이 강한 '가나다라'는 대평소와 꽹과리 등의 국악악기와 한국적인 리듬, 그리고 한글의 자음을 활용한 가사의 유쾌함이 빛난다.
송창식과 국악의 개연성을 품은 ‘가나다라’의 탄생에는 흥미로운 뒷이야기가 존재한다.
이 노래가 만들어진 계기는 일본을 방문했을 때 재일교포 3세들이 한국어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서 그들이 한국어를 보다 쉽게 배울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이유로 '가나다라'는 한글이 아닌 일본어로 가사가 먼저 제작되었다.
또한 '가나라다'를 통해서 한국적인 내용을 보다 많이 익히게 하기 위해서 가사에 '1234567'이라는 숫자와 '태정태세문단세'와 같은 역사적인 내용까지 포함시켰다.
마그마의 결성은 우연한 기회에 시작되었다.
조하문은 연세대학교 지질학과에 재학하며 교내 밴드 아스펜스를 조직해서 활동하고 있었다.
고려대와의 정기전 응원 연습을 하던 중 조하문은 김광현을 만나게 된다.
김광현은 1979년 제2회 TBC 젊은이의 가요제에서 참가곡 '연'으로 작사상과 우수상을 수상한 밴드 라이너스의 기타리스트였다.
조하문과 의기투합한 김광현이 라이너스에서 베이스를 연주하던 문영삼의 동생 문영식을 끌어 들이면서 마그마는 본격적으로 출발했다.
마그마는 1980년 개최된 '4회 대학가요제'에서 은상을 수상 이후 단 한 장의 앨범을 남겼다.
당시 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한 '꿈의 대화' 못지 않게 '해야'가 젊은 층에게 특히 인기를 얻게 되자, 힛트레코드에서 기념음반 형식으로 서둘러 제작했다.
음악 팬들과 음악 관계자들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앨범 발표 이후 멤버 중 김광현과 문영식은 각각 프랑스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전체 수록곡의 완성도가 높고 대중음악사적으로 의미있는 여러 시도와 연주를 담고 있기 때문에 마그마의 해체는 아쉬움이 컸다.
대중들의 마그마 음악에 대한 바람은 조하문의 솔로 활동으로 그나마 위안이 될 수 있었다.
마그마를 대표하는 노래 '해야'는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청록파 시인 박두진의 시 '해야'를 개사해서 작곡한 곡이다.
개사 당시 박두진 시인으로부터 허락을 받지 않고 사용함으로써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진정어린 사과로 사건은 해결되었다.
'해야'는 개사된 곡의 내용이 전달하는 힘찬 기운처럼 음악적으로도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기존 대학가요제 출전 팀들이 단순한 코드 진행과 비트를 기반으로 보컬에 중심이 된 음악을 구사했던 것과 달리, 마그마는 조하문의 다채로운 창법을 바탕으로 헤비 사운드와 싸이키델릭의 조화를 이루며 단번에 대중과 음악 관계자들의 관심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
'해야'는 조하문의 1집에서 원곡보다 부드러운 리듬으로 편곡되어 수록되었고, 여전히 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시나위의 데뷔앨범이 국내 최초의 헤비메탈 앨범으로 손꼽히는 것에 비해 마그마의 유일한 앨범은 국내에서 헤비 사운드를 제대로 시도해서 완성시킨 의미있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마그마의 1집은 멤버들의 연주와 테크닉이 상당한 수준의 음악들로 채워져 있다.
김광현의 기타 톤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내용으로 담겨져 있으며, 조하문의 파격적인 샤우팅과 다양한 창법은 대중음악계 전반에 반향이 컸다.
이는 첫 곡 '알 수 없어'부터 잘 전달된다.
하문 보컬의 방대한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곳'과 '기다리는 마음'은 조하문의 2집 앨범에 각각 '고통없는 나라'와 '슬픈 기다림'으로 제목과 가사가 바뀌어 수록되었다.
그리고 심야 라디오 방송에서 꾸준히 신청되며 마그마를 한국대중음악의 대표적인 락밴드로 이끈 '잊혀진 사랑'은 서사적인 가사와 싸이키델릭의 진수를 담은 연주가 담겨 있다.
배철수가 이끌던 항공대의 활주로는 1978년 개최된 '해변가요제'와 '대학가요제'를 통해서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와 '탈춤'을 히트시키며 대표적인 캠퍼스밴드로 인정받았다.
또한 구창모가 이끌던 홍익대의 블랙 테트라는 활주로가 출전했던 '해변가요제'에서 '구름과 나'를 통해 우수상을 수상하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두 팀의 주축이었던 배철수와 구창모는 학년이 올라가면서 소속 밴드를 후배 기수에게 물려줘야 했고, 보다 나은 음악적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 하나의 팀으로 결합하는 것에 대해 심도 깊은 논의를 벌였다.
그러나 그 과정과 결과는 여의치 않았고 배철수는 활주로의 맥을 이어서 송골매를 결성하지만, 1집 이후 송골매의 주축 멤버 가운데 이응수와 지덕엽이 군에 입대를 하게 된다.
결국 송골매는 사운드의 확장을 위해 6인조로 라인업을 강화시키기에 이른다.
여기에는 블랙 테트라 출신의 구창모(보컬)와 블렉 테트라를 거쳐서 4막 5장에서 활동하던 김정선(기타)과 오승동(드럼)이 새롭게 라인업을 이뤘다.
새로운 멤버 구성으로 발표된 송골매의 2집은 활주로의 하드락과 블랙 테트라의 감성적인 팝스타일이 조화를 이뤘다.
이는 1집에 수록되었던 '세상만사'와 '길지 않은 시간이었네'의 새로운 버전에서 잘 나타난다.
무엇보다 이 앨범을 통해서 송골매는 두 가지의 의미있는 수확을 거둬들였다.
바로 창작곡의 자급자족이 시작되었다는 점과 메인 보컬의 안정화를 통해 새로운 스타일의 밴드음악이 시작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송골매의 1집은 이응수와 지덕엽, 라원주에 의해 전곡이 완성되었다.
반면에 송골매의 2집 앨범은 구창모를 필두로 김정선과 배철수 등 팀 구성원들의 곡이 고르게 수록되어 있다.
또한 구창모의 가입을 통해서 송골매의 음악은 락적인 스타일에 팝적인 구성을 가미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곡이 바로 구창모가 작사, 작곡한 '어쩌다 마주친 그대'인데, 이 곡은 송골매가 결성된 이후 최고의 히트곡으로 손꼽히는 노래다.
한 마디로 '어쩌다 마주친 그대'는 송골매가 지닌 연주력에 안정된 보컬을 바탕으로 배철수가 그리던 밴드 음악이 완성된 대표적인 곡이다.
허스키 보이스를 강화시키며 앨범을 준비했던 전영록은 '지나간 시절의 연가'를 통해 '82서울국제가요제'에서 금상과 빌보드상을 수상했다.
건전가요를 포함해서 총 12곡이 수록된 이 앨범은 2년 여 동안 특별한 활동을 보이지 않았던 전영록의 성공적인 재기를 확인시켜준 노래가 다수 수록되어 있다.
젊은 층에게 큰 인기를 얻었던 '종이학'과 애절한 가사와 전영록 가창의 우수함이 깃든 '그대 뺨에 흐르는 눈물', 그리고 코러스와 가사의 흥겨움이 인상적인 '꼬꼬' 등이 대표적이다.
1980년대 초반 병원과 학교, 공장 등에서 사랑하는 이에 대한 건강과 행운을 기원하는 종이학을 접는 사람들이 많았다.
고운 꿈을 담은 종이학이 접는 이의 바람을 타고 원하는 소원을 이루어지게 만든다는 이유로 꽤 오랫동안 유행했던 현상이었다.
이처럼 종이학 접기 열풍이 생겨난 것은 전영록이 부른 노래 '종이학'이 히트를 기록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부드러운 전영록의 보컬이 애절한 가사와 함께 담겨진 이 노래에는 슬픈 사연이 존재한다.
전영록은 군복무 시절에 '정아'라고 밝힌 소녀로부터 매주 종이학이 들어 있는 팬레터를 받았다고 한다.
자신이 5개월밖에 살지 못한다고 밝힌 그 소녀는 3개월이 지난 시점부터 소식이 끊어졌다.
소녀를 걱정하며 불안해하던 전영록에게 어느 날 소녀의 친구라고 밝힌 이가 보낸 또 하나의 종이학 편지가 도착했다.
종이학과 함께 전달된 편지에는 "정아는 학이 되어 날아갔어요. 이제 제가 정아 대신 학을 보낼게요"라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가요계 복귀를 준비하던 전영록은 작사가 이건우에게 소녀의 사연을 전달했고, 이건우는 3일에 걸쳐서 '종이학'의 노랫말을 완성했다.
'종이학'의 인기는 전영록의 공식 팬클럽 '천학클럽' 결성의 계기가 되었으며, 방송국에 신청곡과 함께 종이학이 전달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또한 '종이학'의 사연은 1987년 9월 가요드라마 '전영록의 종이학'으로 제작되어 TV에서 방송되는 등 다양하게 소개되어 대중을 감동시켰다.
SG워너비는 2005년 제작비 10억원과 130인조의 오케스트라와 코러스가 참여한 리메이크 앨범 [Classic Odyssey 1978-1993]를 발표하며 전영록의 '종이학'을 새롭게 편곡해서 수록했다.
2015년 63컨벤션센터에서 벌어진 '전영록 데뷔 40주년 기념 기자 간담회'에서 전영록은 "어느 날 어린 친구가 와서 '우리 오빠들 노래 부르지 마요.'라고 하더라. 그래서 '너네 오빠 노래가 뭔데?'라고 물어보고 크게 웃은 적이 있다. 그 노래가 바로 '종이학'이었다."고 SG워너비 팬과의 에피소드를 밝혔다.
이 앨범은 '3회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노래 '내가'를 통해 대중음악계에 등장했던 김학래의 데뷔 음반이다.
김학래는 대학가요제 수상 이후 듀엣이었던 임철우와 한 장의 앨범을 발표하지만, 영장이 나와서 군복무를 마친 1983년에야 솔로로 데뷔했다.
김학래의[자작곡 제1집]은 포크와 락에 기반한 애절한 창법과 대중적인 작법으로 완성되었다.
1984년 김학래는 '친구여'를 히트시킨 이후 일본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던 조용필과 '그대가 미워요'의 전영록, '아파트'의 윤수일, ‘첫사랑이야’의 이용과 함께 그 해 최고 가수 경합을 벌였다.
김학래는 타이틀곡 '슬픔의 심로'를 1984년 5월 마지막 주부터 6월 첫째 주까지 KBS 가요톱10에서 1위에 등재시켰으며, 김수철의 '못다 핀 꽃 한 송이'와 함께 '애상조 가요'를 대표하는 곡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특히 '슬픔의 심로'는 헤어지는 연인의 슬픔을 한 편의 시처럼 써내려간 가사와 애절한 멜로디의 조화가 빛난 노래로 젊은이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79년 임철우와 함께 발표했던 앨범의 '오월의 편지'를 이어서 이 앨범에는 '마지막 편지'와 '찢어진 편지' 두 곡의 ‘편지’시리즈가 담겨 있다.
수록곡 가운데 '외로운 생일'에서 구사하는 그의 보컬과 연주는 강렬하다.
김학래만이 구사할 수 있는 포크와 락에 기반한 애절하고 폭발적인 창법과 바이브레이션은 그의 음악을 상징했다.
김학래의 기타 실력은 그의 작법의 기초를 이뤘다. '슬픔의 심로'와 '겨울바다', '빨간 낙엽' 등은 기본적인 코드 3~5개로 쉽게 연주할 수 있는 노래였다.
그리고 김명곤의 편곡이 가미되면서 대중들은 김학래의 음악에 보다 더 편안하게 빠져 들 수 있었다.
김학래는 1988년까지 가수 활동을 이어 나오다가 김경호와 내귀의 도청장치 등의 앨범을 기획하며 제작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최혜영의 가수 데뷔는 1982년 대학가요제에 출전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당시 '그대를 잊으려는데'로 참가했던 최혜영은 언론사에 재직중이던 아버지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지구레코드와 계약을 맺게 된다.
계약 체결 이후 최혜영은 지구레코드의 임정수사장을 통해 작사가 박건호를 소개받게 된다.
박건호는 최혜영이 녹음해 온 뮤지컬 '에비타'의 삽입곡 'Don't Cry For Me Argentina'를 듣고서 최혜영 보컬을 보강해 나갈 계획을 세운다.
박건호는 정수라와 함께 '아! 대한민국'을 처음 불렀고 '내 사랑을 본 적이 있나요'의 오리지널 가수이기도 한 장재현에게 최혜영의 트레이닝을 맡기게 된다.
이 사이 박건호는 '아! 대한민국'의 작곡가 김재일과 함께 최혜영의 데뷔 앨범을 위한 곡작업에 들어갔다.
기본적인 가창실력에 바이브레이션이 다듬어진 최혜영은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3학녕에 재학중이던 1983년 12월 데뷔 앨범을 발표하게 된다.
1984년 새 해 첫 날 인기 프로그램 '젊음의 행진'에 출연과 동시에 최혜영의 인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최혜영의 인기몰이에 대해 당시 경향신문에서는 '혜은이의 바통을 이어받은 학생가수'라고 소개했다.
대학생들의 풋풋한 캠퍼스 생활과 젊은이들이 고민하는 인생과 관련된 노래들로 큰 공감대를 형성된 최혜영의 데뷔 앨범은 발매와 동시에 언론과 대중들의 환영을 이끌어 냈다.
맑고 깨끗한 음색과 낭랑한 가창은 새로운 대형 신인의 탄생을 예고하기에 충분했다.
1집 활동 다시 세라복 패션을 유행시키기도 했던 최혜영은 청순하고 귀여운 이미지로 남성들에게 특히 인기를 얻어냈었다.
앨범 수록곡 가운데 가장 큰 히트를 기록한 '그것은 인생'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사랑을 받을 만큼 획기적인 가사를 바탕으로 완성된 노래였다.
1984년 6월 최혜영의 '그것은 인생'은 가요톱10에서 2주 동안 1위를 기록하고 있던 전영록의 '그대가 미워요'를 제치고 1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이후 7월 29일까지 5주 연속 1위를 수상하며 골든컵을 차지했다.
또한 '그것은 인생'은 1984년 한 해 동안 전국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485회가 방송되며 '가장 많이 방송된 노래'로 선정되었다.
당시 이 노래의 기록적인 방송횟수에 대해 최혜영은 "저 자신이 만족하는 것보다 남들이 더 좋아하는 건 가사가 호소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인 거 같아요"라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이러한 대중적 기반은 데뷔 3개월 만에 MBC의 어린이 프로그램 '모두모두 즐겁게'의 MC로 선정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당시 최혜영 이전에 MC를 맡던 이는 혜은이였다.
설운도는 1982년 당시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이었던 KBS '신인탄생'에 출연해서 5주 동안 연속으로 우승하면서 데뷔했다.
설운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1983년 KBS에서 특별 생방송으로 제작했던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이다.
이 방송은 원래 단발성으로 편성되었던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온 국민의 관심을 끌면서 결국 4개월 이상 생방송으로 진행되었다.
453시간 45분간 이어진 이 방송은 단일프로그램으로 세계 최장 연속 생방송 기록이었으며, 방송을 통해서 1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이 잃어버린 가족과 친지를 되찾을 수 있었다.
2015년 이 방송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당시의 방송을 담은 비디오테이프와 이산가족을 확인하는 신청서, 방송 큐시트, 그리고 설운도의 목소리가 담긴 음반 [잃어버린 30년] 역시 주요 유산물로 선정되었다.
당시 방송에서 설운도는 방송국에서 살다시피 하며 많게는 '잃어버린 30년'을 하루에 10번까지 불러야 했다.
역사적으로 무거운 주제를 다뤘던 방송이었지만, '잃어버린 30년'은 전국민들이 따라 부르면서 무명가수였던 설운도를 대형 가수로 끌어 올렸다.
원래 '잃어버린 30년'은 남국인이 작사와 작곡을 해서 완성된 '아버지께'가 원곡이다.
당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생방송을 시청하던 설운도의 매니저는 작사가 박건호에게 전화를 걸어서 하룻밤 만에 새롭게 작사된 곡을 받아와서 설운도에게 녹음을 진행시켰다.
바로 다음 날 설운도는 ‘잃어버린 30년’을 가창했고, 이는 엄청난 히트로 이어지고 말았다.
김현식은 1980년대를 대표하는 언더그라운드 뮤지션 조동익을 이어서 싱어송라이터의 개념을 굳혔고, 솔로가수의 대중화를 본격적으로 열었던 인물이다.
또한 블루스와 소울, 그리고 락과 포크의 열정을 한국적 소리로 담아내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던 뮤지션이기도 하다.
김현식의 데뷔앨범은 우리가 흔히 기억하는 허스키한 목소리가 아닌 맑은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
1집 발매 이후 김현식은 서라벌레코드의 소속 가수들과 군위문공연 등을 돌며 미약한 활동을 보였다.
1982년 김현식은 이대 앞에서 옷가게를 운영하던 김경자와 결혼을 하게 된다.
동부 이촌동 공무원 아파트에 신접살림을 차리고 인근에 피자가게를 열어서 직접 배달도 하는 등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해나갔다.
음악을 향한 희망을 놓지 않았던 김현식은 동아기획으로 소속사를 옮기게 된다.
김현식은 생전 일간스포츠에 연재했던 '스타스토리 김현식의 넋두리 자서전'에서 2집 앨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1집이 가수로서 음반을 내고 데뷔하는데 의미를 뒀다면, 2집은 한명의 가수로서 이제 자신의 음악을 펼쳐간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어서 무척 신경이 쓰였다.
더구나 음반은 그때까지도 별반 방송에는 관심이 없었던 내가 가장 선호하는 팬과 만날 수 있는 통로였기 때문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김현식의 의지는 동아기획으로 소속을 옮김으로서 현실화되었다.
당시 동아기획은 앨범 발매도 없이 라이브 무대만으로 인기를 모으던 들국화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동아기획은 김현식의 음악적 가능성에 들국화 이상의 기대를 걸었고, 김현식 역시 동아기획과의 연대에 충실했다.
조원익과 유연실이 멤버였던 정성조와 메신저스의 보컬로 활동을 병행하던 김현식은 다운타운가에서 '사랑했어요'가 반응이 오기 시작하면서 대중들에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김현식은 2집 수록곡 가운데 7곡을 직접 작사·작곡하며 뮤지션으로서의 재능을 유감없이 선보였다.
대표곡 '사랑했어요'를 비롯해서 전반적인 수록곡이 모두 여전히 사랑을 받고 있는 스테디셀러 음반이다.
사랑과 평화의 최이철이 기타를 담당한 '아무말도 하지 말아요'와 애처로운 가사와 포효하는 김현식 보컬이 매력적인 '어둠 그 별빛'과 '회상', 소설가이자 작사가인 양인자의 노랫말이 인상적인 '바람인줄 알았는데' 등은 '사랑'과 '외로움'이라는 공통적인 감성으로 채워져 있다.
큰 히트를 기록한 2집에 고무된 김현식은 이전부터 구상했던 자신만의 밴드 봄여름가을겨울을 결성하게 된다.
1980년 2학년이었던 김원중은 전남대학교 교내합창단과 밴드 로터스에서 활동했으며, 5.18 민주화운동 당시 현장에 있었다.
1981년 군에 입대한 김원중은 최전방에서 군복무를 하던 중 선임병들에게 "너희 광주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아느냐"며 잦은 구타를 당했다고 전한다.
김원중에게 5.18은 또 다른 상처로 각인되었고, 그는 그 상처를 노래로 치유하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김원중은 복학을 준비하면서 사직공원에 위치한 라이브 카페 '크라운 광장'에 자주 찾아갔다.
당시 그 곳에는 광주, 전남 출신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한 김종률과 '바위섬'을 작사·작곡한 조선대학교 전기과 4학년생 배창희 등이 자주 왕래했다.
김원중을 비롯한 대중음악인들이 교류를 맺어가던 중 옴니버스 앨범[예향의 젊은 선율]이 제작되었다.
이 음반에 막내로 참여했던 김원중은 '바위섬'과 '목공의 노래' 두 곡을 가창했다.
[예향의 젊은 선율]에 수록된 곡의 작사, 작곡은 '1회 대학가요제'부터 '3회 대학가요제'까지 수상했던 이들의 작품이 다수 담겨 있다.
'1회 대학가요제'에서 '저녁 무렵'으로 동상을 차지했던 소리모아 출신의 박문옥과 박태홍, '2회 대학가요제'에서 '약속'으로 은상을 차지했던 김정식, 그리고 '3회 대학가요제'에서 '영랑과 강진'으로 은상을 수상했던 김종률이 바로 그들이다.
또한 언론통폐합 이전에 전남지역 최초의 민영방송이었던 전일방송이 주최한 전일가요제 출신의 작곡가 신상균도 포함되어 있었다.
[예향의 젊은 선율]은 5.18민주화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시대정신을 반영한 작품이다.
'내 사랑'과 '사랑은 강물처럼', '바위섬' 등 12곡이 수록된 이 음반은 작사와 작곡, 녹음, 재킷 디자인, 홍보 등 모든 것을 앨범에 참여한 이들이 직접 해결했다.
광주, 전남 지역의 라디오 방송을 시작으로 이슈를 모았으며, 1984년 10월 대성음반에서 정식 유통되었다.
앨범 출시 이후 대성음반은 김원중의 사진과 '바위섬'을 재킷 앞뒷면에 내세워 [김원중 바위섬]으로 새롭게 발매했다.
가사가 하나의 이야기 방식을 취해 완성된 '바위섬'은 1980년 5월 18일에 발생된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노래이다.
'바위섬'은 배창희가 고흥에 위치한 소록도를 방문했다가 영감을 얻어서 완성되었다
배창희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고립된 섬이었던 소록도가 마치 5.18민주화항쟁 당시의 광주처럼 느껴졌다.”고 작곡 당시를 회상했다.
'바위섬'은 전주와 대전, 청주 등 지역 라디오 방송국을 중심으로 방송을 타기 시작했고, 점차 서울에 위치한 대학가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1981년 '5회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차지했던 정오차의 '바윗돌'은 그가 '젊음의 행진' 출연 당시 노래 제목의 의미를 밝힌 이후 곧장 금지곡 처분을 받았다.
방송에 출연한 정오차가 "광주에서 죽은 친구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만든 노래이고, '바윗돌'은 친구의 묘비를 의미한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1985년 1월 김원중은 서울에 위치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했다.
금지곡으로 묶인 정오차의 사례를 익히 알고 있던 김원중은 '바위섬'이 지닌 의미에 대해 질문을 받았지만, 쉽게 이야기 하지 않았다.
'바위섬'은 KBS가요톱10에서 2위를 차지했고, 연말결산에서 9위를 기록했다.
또한 라디오 차트에서는 1위까지 오르는 등 대중적인 히트를 확실하게 이어갔다.
강영철과 양하영으로 구성된 한마음은 튄폴리오 이후에 대중음악 관련 기자들에게 '최고의 화음'이라는 찬사를 얻었던 혼성듀엣이다.
한마음의 노래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일상의 감정과 남녀 사이의 야이기를 담는 가사가 특징이었다.
이처럼 한마음은 혼성이기 때문에 두 사람의 음력 차이를 조절하기 위해 가사에 특히 신경을 썼다.
2집 수록곡 가운데 '갯바위'와 '말하고 싶어요'는 이전 작보다 화음이 더 온화하게 다듬어진 장점을 지닌 노래다.
또한 이 두 곡은 대화 형식으로 두 멤버의 보컬이 교차하는 방식이 특히 인상적이다.
건전가요를 제외한 11곡의 노래 중 10곡에서 강영철이 작곡을 담당했으며, 양하영은 '후회하는 마음'을 작사․작곡했다.
전체 수록곡의 편곡은 김명곤이 담당했다. 또한 '가슴앓이' 등은 1983년 발매된 1집 앨범에서 발췌해서 재수록한 곡이었다.
이 가운데 1집 수록곡 '꿈이여 사랑이여'는 1983년 발매 당시 가사대상을 수상했던 노래였고, 2집 앨범의 '갯바위'와 '말하고 싶어요'를 통해 한마음은 1985년에 2년 연속 KBS가요대상 듀엣부문을 수상했다.
이 앨범에서 가장 큰 히트를 기록한 곡은 '갯바위'이다.
이 곡은 1985년 2월 17일 이은하가 골든컵을 수상한 '사랑도 못해본 사람은'을 이어서 2주 동안 1위를 기록했다.
전남 화순 출신으로 광주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상경했던 故변두섭 예당컴퍼니 회장은 가수 양수경의 남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제작자로 활동하기 이전에 음악다방의 DJ로 이름을 날리던 때가 있었다.
1980년대 초반 음악다방의 DJ들이 방송국에 밀리면서 변회장은 통기타 가수들의 매니저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제작을 시작하게 된 변회장은 이진관을 만나게 되면서 앨범 제작에 첫 걸음을 걷기 시작한다.
그러나 제작비와 홍보비에 대한 예산이 바닥나면서 이진관의 앨범은 다른 제작자의 손을 거쳐서 후반 작업이 마무리되어서 발매되었다.
이진관은 1980년 'TBC 젊음의가요제'에서 자작곡 '그날을 기다리며'로 입상하며 가요계에 발을 디뎠다.
이진관의 2집에는 건전가요 '아! 대한민국'을 포함해서 1집에 수록되었던 '풍선' 등 11곡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앨범에서 크게 히트한 '인생은 미완성'의 작사가 김지평은 2000년 발간한 저서 '한국가요정신사'에서 "'인생의 미완성'은 유한한 인생의 미를 담았다. 미완성은 절망이 아니며 끝이 아니다. 영원한 머물음이다."고 회고한 바 있다.
사실 이 노래는 김지평이 서울 구치소에서 사형수의 전담 카운슬링을 하던 중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형수들과 소통하며 나눈 마음을 담은 노래말이었다.
이진관은 '인생은 미완성'이 히트하면서 무대에서 이 노래를 부르면 관객들에게 “인생은 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당시 이후로 제대로 된 답을 주지 못했던 이진관은 2009년 '인생 뭐 있어?'라는 곡을 발표하며 이에 대한 답을 대신하기도 했다.
이진관은 현재 자신의 히트곡 '인생은 미완성'을 강의와 공연 주제로 활용해서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어퍼메이커(Affirmaker)로 활동 중이다.
어퍼메이커는 '긍정'이라는 뜻의 '어퍼메이션(Affirmation)'과 '만드는 사람'의 뜻을 갖고 있는 '메이커(maker)'를 조합한 신조어이다.
사랑과 평화 출신의 뮤지션 김명곤은 나미의 3집 앨범에서 '빙글빙글'의 큰 히트를 통해서 작곡가로 화려한 변신을 했다.
한국 댄스뮤직의 명곡으로 손꼽히는 '빙글빙글'을 통해 대형가수로 성장한 나미의 4집 앨범 수록곡 가운데 김명곤이 작사․작곡한 노래는 7곡이나 된다.
1980년 2차 대마초 파동으로 사랑과 평화가 공식 활동을 정지당하게 되자 작․편곡자로 나선 김명곤은 나미의 3집과 4집을 통해서 1980년대를 대표하는 프로듀서로 인정받았다.
또한 김명곤은 한국에서 최초로 신스팝을 구현하고자 여러 시도를 진행했고, 그 시도는 나미와의 작업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사랑과 평화의 이철호는 2014년 월간 파라노이드와의 인터뷰에서 "김명곤의 건반은 사랑과 평화 음악의 중심이었다. 그가 보다 더 대중적인 작업을 통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나미와 함께 한 3, 4집을 통해서였다."고 언급했다.
이 앨범은 작가와 프로듀서로서의 김명곤이 지닌 능력이 크게 발휘된 것은 물론 최고 전성기 당시 나미의 노래 실력이 담겨져 있다.
이전보다 비음이 더 섞인 목소리로 레코딩에 임했던 나미는 일렉트릭에 기초한 작법에 심취해 있던 김명곤 작곡의 장점이 가득 배인 노래 '유혹하지 말아요'에서 한국대중가요 사상 가장 섹시한 가창을 보여줬다.
이 곡은 2002년 제작된 영화 '후아유'에서 조승우가 극중에서 이나영에게 불러주던 노래로 원곡을 부른 나미를 다시 한 번 회자시키기도 했다.
또한 레게 스타일의 '보이네'는 잔잔한 멜로디의 흐름 속에 나미 목소리의 매력이 유유히 흐르는 곡이다.
이 앨범에서 가장 히트를 기록한 곡은 단연 '슬픈 인연'이다.
진성과 가성을 뒤섞은 가운데 저음부터 고음까지 고르게 오가는 나미의 창법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영역을 보여줬다.
'슬픈 인연'은 발표 당시 사실과 다르게 표절 시비에 휘말렸지만, 노래의 제목만큼 깊은 인연을 지닌 곡이다.
흑인영가 스타일의 이 곡은 원래 일본 작곡가 오자키 류도우(宇崎竜童)가 만든 노래에 그의 부인이 가사를 쓴 곡이다.
일본 가수 하시 유키오(橋幸夫)가 가창을 했지만 히트를 기록하지 못하자, 오자키 류도우는 평소 친분이 있던 나미에게 곡을 선물했다.
당시까지 일본 음악은 법적으로 국내에서 연주되거나 표기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김명곤의 작곡으로 기록했고, 음악적으로 가능성을 느낀 박건호가 직접 가사를 붙여서 발표되었다.
원곡은 전체적인 멜로디에 집중한 남성 보컬이고, 나미의 버전은 그녀 고유의 섬세한 허스키 음과 음폭이 넓게 실려져 있다.
1994년 젊은 층에게 큰 인기를 얻던 그룹 015B는 나미의 '슬픈 인연'을 리메이크하면서 다시 한 번 크게 히트시킨 적이 있다.
이후 조관우와 노사연, 김돈규, 클릭B 등 수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해서 가창했다.
멤버 전원이 보컬이 가능했던 건아들은 1977년 결성된 이후 1979년 '1회 MBCFM강변축제'에서 '가슴을 펴고'로 입상했으며, 1980년 '3회 TBC젊은이의가요제'에서 '젊은 미소'로 장려상을 수상했다.
건아들은 이후 1983년 '4회 강변가요제'에 출전해서 '꿈이었다고'를 가창했지만 수상에는 실패했다.
건전가요를 제외한 8곡이 수록된 4기 건아들이 제작한 건아들의 2집 앨범에는 리드보컬과 기타를 담당하던 이영복이 작곡한 노래가 5곡이나 차지한다.
특히 담배의 해독을 경고하는 노래 '금연'은 캠페인송으로 대중에게 큰 인기를 얻으며 금연 열풍을 일으켰던 곡으로 이영복의 독특한 창법이 인상적이다.
또한 이 곡의 기타 프레이즈는 같은 해 영국 유명 락밴드 다이어 스트레이츠(Dire Straits)가 [Brothers In Arms]에 수록한 'Walk Of Life'와 흡사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벗님들 4기로 분류되는 시기였던 1986년에 제작된 이 앨범은 팀의 리더였던 이치현 스스로 "벗님들의 앨범 가운데 최고의 역작은 5집이다. 다양한 장르가 펼쳐졌으며, 벗님들 최상의 연주가 담겨져 있다."고 이야기할 만큼 음악성과 대중성을 고르게 지닌 작품이다.
이 앨범은 수록곡 가운데 '잃어버린 계절'과 '공원에서' 등의 곡에서 전달되듯 당시의 트렌드를 이루던 해외 팝음악을 차용해서 벗님들만의 음악으로 재배치한 흔적이 강하다.
5집 앨범을 준비하면서 벗님들은 트윈기타 시스템으로 사운드의 폭을 강화했고, 이런 이유로 멤버는 6명으로 늘어났다.
이렇듯 확장된 라인업을 통해서 벗님들의 5집 앨범에 수록된 노래들은 보다 안정적이고, 체계적인 틀을 형성할 수 있었다.
1987년을 대표하는 히트곡 '사랑의 슬픔'을 비롯해서 '잃어버린 계절', '그땐 외롭지 않았어' 등이 연달아 히트를 기록한 이 앨범은 80만 장 이상의 판매를 기록했다.
이치현의 탁한 보이스와 기타 솔로 등이 잘 어우러진 '잃어버린 계절'은 이국적인 리듬감을 앞세워 다음 앨범에서 큰 히트를 기록하게 되는 '짚시여인'을 예견한 곡이다.
이 앨범을 대표하는 곡은 역시 '사랑의 슬픔'이다.
겨울을 배경으로 하는 노래임에도 '사랑의 슬픔'은 1987년의 한여름인 7월 29일부터 8월 26일까지 KBS가요톱10에서 5주 연속 1위를 기록하며 골든컵을 수상했다.
멤버를 보강한 이후 가장 완벽한 벗님들의 음악으로 손꼽히는 이 노래에는 건반과 관악, 보컬이 단아하게 흐른다.
특히 주멜로디와 리듬군의 교차하는 진행과 중반부의 기타 솔로는 매우 세련된 감성을 지니고 있다.
벗님들의 음악은 보컬과 기타, 작곡까지 담당했던 이치현과 퍼커션과 보컬을 담당한 김준기를 중심으로 펼쳐져 나왔다.
이치현은 1집 이후부터 벗님들의 노래 대부분을 작사, 작곡했다.
또한 기타리스트로서도 숙련된 연주력을 선보였고, 감미로운 보컬 능력까지 지닌 멀티 플레이어였다.
특히 '사랑의 슬픔'과 '잃어버린 계절' 등에서 고르게 번지는 이치현의 기타는 프레이즈의 반복 속에서 전체 곡의 감성을 잘 녹여내는 맥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비해 김준기의 퍼커션은 기본적인 리듬 라인에 배가된 음악적 맥을 짚어 냈다.
이는 1981년 영국에서 결성되어 국내 뮤지션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던 아시아(Asia)의 드러머 칼 팔머(Carl Palmer)가 구사하던 방식과 훕사하다.
그러나 5집 앨범의 큰 히트 이후 벗님들은 이치현과 김준기의 불화가 번지면서 '벗님들'과 '이치현과 벗님들'로 분리되어 활동을 이어 나가게 된다.
1977년 데뷔했던 홍수철은 자신의 밴드 고슴도치에서 보컬과 기타를 담당했다.
데뷔 이후 무명에 가까운 생활을 이어 나오던 홍수철은 1986년 3년 만에 다시금 새 앨범을 내놓게 된다.
수록곡 가운데 타이틀곡 '철없던 사랑'은 러닝타임이 3분도 되지 않는 곡으로 방송용으로 제격이었다.
여러 방송을 타면서 동시에 인기곡으로 급부상한 '철없던 사랑'은 1986년 10월 22일부터 KBS 가요톱10에서 2주 연속 1위를 기록했다.
1986년 동아일보에서 국내 연극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가장 좋아하는 가요' 부문에서 '철없던 사랑'은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과 나미의 '빙글빙글' 등을 이어서 4위에 선정되었다.
1996년 '진이'를 히트시켰던 하이디는 13년 만에 가수로 복귀하던 2013년 홍수철의 '철없던 사랑'을 보사노바 풍으로 리메이크해서 발표했다.
또한 개그맨 최병서는 2005년 가수로 데뷔하면서 '철없던 사랑'을 트로트풍으로 리메이크해서 수록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