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에게 외 2편
임 후 성
당신은 길을 건너려다 멈춘다
주변을 쓸어담는 강의 소용돌이를 눈앞에 보고 있는 것처럼
와서 나를 데려가라
함께 쓰러질 곳으로
나는 눈을 감고 양손으로 접시를 쥐고 있다
강의 소용돌이를 들고
그것을 건너가는 것처럼
지옥의 당신을 내려다보며
저녁이 지나도록 광대뼈에서 내려오지 않던 물방울 하나를 나는 손끝으로 밀어 닦는다
나는 접시를 꺼내 놓으며 데려가 달라고 말했다
그 다음의 고요와 접시의 테두리로 보아 접시는 멀리 던져지고 싶은 것이다
당신은 파편을 많이 그린다
사방에 쌓인 밤의 높이와 그곳에서 떨어지는 접시들
당신과 나는 다리를 포개고 앉아서 쌓인 접시를 바라보았다
슬픔을 장식할 수 있는 검은 잎사귀와 보라색 과일 조각을 생각하며
찬장의 치약과 비누에도 매일 입을 맞춰 두어야 할까
접시가 떨어질 때마다 소리가 나는 건 신의 존재에 대한 논증이라고
그 때 당신은 취기가 있었다
태어나지 않았을 때의 저녁을 생각하면
드물게 나는 행복하다
우리는 없는 것의 기호이다
나는 창가에 우리의 무덤 표시를 해 두었다
나는 남아서 약한 불에 틴들 같은 머리카락을 굽는다
경적을 삼키고 있는 파편들은 얼마나 고독할까
접시에 내 얼굴을 담아 두어도
당신은 그것을 그리느라 그것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자루
주둥이가 터지고 밑에는 구멍이 난 자루가 걸려 있네
그 아래에서
호두알을 주웠지만
가볍기가 호두의 흔적만 같았네
이상하지 않은가
자루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데
호두알이 만져지거나
정원으로 통하는 현관 아치 위에 편편한 이층 지붕을 갖춘 집이 떠오르다니
호두를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들어와 어깨에 메고 나가는 것을 보게 되다니
두물머리
은박지가 버려져 있고
버려졌으나 상하지는 않을 것 같다
주머니에 들어가려던 손 하나가 다시 밖으로 나오면서
잃어버린 것을 잊어버린다
벌어진 입에서 수분이 마른다
정오에는 한 번씩 인생을 생각하기로 했다
죽은 사람이란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 좋겠다
살아 있는 사람은
죽음에 대한 의식의 깊이로 남아 있으면 좋겠다
에나멜을 바른 차량이 반짝거린다
아들은 지겨운 순결을 지닌 얼굴이다
이제 집에 가나요?
묻지 않고 나를 지나쳐 물가로 다가간다
발목을 적실 것 같은 아들 앞으로 오리들이 흘러온다
차가운 물이 스미지 않는 털과 기름을 갖고 오리들은 물을 가지런히 벌리며 지나간다
그것이 정오에 아이를 불러냈음이 틀림없다
지나가다가
아버지의 마른 입술이 떼어지는 소리를 들은 게 틀림없다
산문
봄비
비가 올 듯한 기색을 엿보다가 집을 나선다. 온다면 봄비인 때이다. 극단 레퍼토리 공연 일로 무대 디자이너를 만날 일이 있다. 공동 주택 현관을 나서자 두 걸음째부터 얼굴을 덮어오는 따스함이 느껴진다. 두툼한 이불을 덮고 잠든 아가의 목구멍을 빠져나온 듯한 따스함이다. 이 들척지근하고 사뿐한 온기는 극히 희미하게 보이는 습기처럼 흐물거리며 모여들더니 길게 모로 꼬이는 타래를 이루어 낭창거린다. 내음이 생기고 나는 코를 내밀게 된다.
이 세상이 연극이고 내가 있는 곳이 무대라는 사실을 알기에 나는 때로 가던 길이나 일하던 손길을 멈추어 눈앞의 무대를 바라보곤 한다. 그러면 목적이 따로 있는 일상의 움직임 말고 그 순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몸이 저질러야 하는 자질구레한 동작들이 사람들에게서 발견된다. 머리카락 넘기기, 말하는 동안 쌓인 큰숨을 딴 데로 불어내기, 발바닥과 지면의 밀착을 조절하기, 떨기, 긁기, 고개를 까딱거려 신경의 온도를 낮추기 혹은 올리기, 몸의 한 부위에만 힘을 집중하기, 음료를 살피기 위해 눈알을 모으기, 뒤로 기대기, 밀어내기, 변명하려 눈알을 위로 올리기, 가볍게 때리기, 어깨나 무릎으로 몸을 추스르기, 등을 부추기기……. 사람들의 이런 동작은 주로 고정된 형태와 색을 단정히 유지하고 있는 사물들이나 분명한 목적을 지니고 어슬렁거리는 동물들의 우아함에 비해서는 훨씬 경박하고 잔망스럽게 보인다. 하지만 나는 의식적으로 통제되기 전에 그들이 저절로 하는 이런 행위에 애착이 간다. 연극에서도 배우가 인물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신경써야 하는 모든 표현 기술의 바탕에 이런 선先의식적 행위의 당연함이 깔려 있다. 이런 행위는 논리적으로는 불필요한 것이면서도 실체의 자연스러움을 위해서는 가장 탁월하게 요구되는 잠재적 기술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말 별볼일 없어 보이기도 한다. 위대한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의 우월함이나 능력의 최대치를 알아내는 것에만 머문다면 이런 애틋한 사소함의 사실성을 사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방금 전 온기의 타래진 모습은 극히 희미한 것이어서 제대로 보려고 하면 결코 보이지 않고 그저 가던 길을 가려고 시선을 들거나 바닥을 한 번 내려다볼 때 시지각의 요동이 만드는 틈 사이로만 언뜻 보일 뿐인데 직접 보이지 않는 것을 볼 때에는 이런 식으로 시각 데이터의 낱장들이 연결되는 경계면에서 살펴볼 수밖에 없다. 이때 보이는 희미함은 그 존재의 전모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희미함이자 뚜렷함이기도 하다. 나는 이것을 ‘옆을 본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가령, 어둠은 내가 즐겨 보는 옆이다. 어둠은 정면으로 응시할 때 어둡고 둥근 안이 서서히 패면서 밖으로 얇은 줄기들로 이루어진 이파리들이 방사되는 듯한 암흑의 움직임을 보여주는데 방사된 이파리들이 바로 그 옆에서 다시 하얘지면서 어둠의 해사한 이목구비를 만들어줄 때가 많다. 그 때 어둠은 미세한 분말 같은데 그 이목구비를 향해 눈을 돌리면 그것은 다시 검은 돌로 뭉쳤다가 돌의 안이 패면서 어느 틈에 아까와 같은 옆을 만들어 그리로 가버리고 만다. 시간과도 같은 것이다.
진짜로 옆을 보니, 겨우내 의식되지 않던 철쭉 가지들이나 그 뒤 벽의 배수관과 잿빛의 벽돌들이 축축하게 일그러져 있다가 다시 또렷해진다. 세로로 흔들거리던 온기의 타래들은 내게 오래 머물지 않고 주변의 차가움에 자리를 내주고 사라진다. 어느새 나는 전철역 입구에 서 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을 알지 못했다. 온기가 사라진 다음 허공을 길게 긋고 내려오는 빗방울을 손바닥에 받아보니 떨어진 것은 가엽게도 산산조각난 작은 물방울이고 그 옆에 남은 것은 부서진 조각의 경계에 들어차 있는 가느다란 빛이다. 그 빛은 희고 차가운데 그 옆에 불그스레 부풀어 있는 내 손바닥의 살갗들이 주는 애처로움 위에서 소멸하고 있다. 그렇게 두 겹이나 되는 외로움의 형태에 눈길을 주면서 주위가 어두워지는 느낌이 들면 나는 잎이 하나뿐인 아주 작은 식물처럼 그 자리에 서 있고 어김없이 혼자인 절실함이 따뜻하게 옆에서 다가온다.
임후성/ 전남 진도 출생. 202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80년동안의 분만 외 2편
문 지 아
밤이 창의 안쪽을 닦는다
새벽이 바깥쪽을 닦는다
귀퉁이마다 내려앉은 숨처럼
오래된 너는 말갛게 얕아진다
끝없이 잃어버리는 다음 날과 다음 날
어제는 기쁘게 잊히고
거듭되는 시작 위로 열리는 창만 있을 뿐
으스러진 뼈 위로 새로운 지문들이 돋으면
태어나기만 했던 시작
이제 너, 단 하나의 망각으로 깊어진다
나머지 창들을 일제히
닫는다
머리카락
밥이 지어진다
고슬고슬 하얗게 탈색된다 나는
빛의 아기가 검은색이었다니
캄포 도마 위
빛처럼 먹물을 뿌리는 낙지
몇 달 전 그것보다 한층
단단한 꿈틀거림이다
죽은 몸 사이사이
아직 자라는 머리카락 같은
수초를 헤집고 살아온
어머니의 탯줄을 조금씩 끊는다
빛이 날 때 부터 위중했었다니
부엌의 전조등은
식칼을 비추고
미열이 닿자 순식간
커터칼로 변해 오는
새벽
엄마는 참치의 화석이 아니다
캔 뚜껑을 따다
손바닥이 움츠러든다,다시 펴진다 ,앗
고개를 떨어뜨린다
용서라도 비는 것 같잖아
엄마는
누구맘으로 불리는 단톡방에
통조림처럼 들어가야겠다
찌개를 끓이는 동안에도
우리 동네는 덩그러미 있을 뿐
각자 이름을 잃어버린 엄마들이
새로운 수초 사이를 헤치는 저녁
아이들에게 읽어줄 책을 고른다
실은 자궁이 하고픈 말을 들려준다
교향곡을 받아 먹고 자란 연년생들에게
욕조에 담긴 참치 한 마리를 꺼낸다
비누를 쥔 듯 미끄러지는 펄떡거림
지느러미가 화석을 뚫고 솟구친다
가만히 식탁보를 덮고
반찬그릇과 밥그릇으로 내리 누른다
밤이 나에게서 문을 못 찾고 기다린다
산문
인테그랄integral~! 아직, 되어가는 중이다!
시에 관심을 갖게 된건 그리 오래지 않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차차 알아가는 수 밖에. 다만 거창한 이유도, 어떠한 포부도 없이 그저 항상 나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인테그랄이란 개념이었다.
인테그랄integral은 수학 시간에 수없이 들어보았던 그것, ‘적분’을 말하는 것으로 전체를 구성하는 (지극히 적은) 일부로 필수 불가분의 요소를 의미한다. 어학사전에서의 integral도 (전체를 구성하는 일부로서) ‘필수적인, 필요 불가결한’이라 명시되어 있다.
나의 시가 있기 전에 나의 과거가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것이고 무엇보다도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나’에 대하여 (어쩌면 수많은 ‘나’들을 대변하여) 지나간 생활, 사건, 감정들을 되새김질해 보며 담담하게 노래해 보고자 한다.
인테그랄, 적분은 정말 작은 수들을 합산하는 기호이지만 결코 그것이 0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차곡차곡 쌓여진 어떤 결과를 도출해 낸다. 내가 의미를 두고 싶은 것은 바로 이런 것! 소소하기 이를 데 없던 일들이라도, 그것이 비록 절망으로 가득한 일이었었다 하더라도 기쁘게 더러는 슬프게 시로 기록하고 표현해 보고 싶은 것이다. 여성이자 어머니로서의 한 존재에 대한 이야기, 나의 내면에 내재된 여러 상처들의 기억들, 그에 같이 수반되어졌던 감정들을 조금씩 함축적으로 나타냄으로써 찬찬히 나의 궤적들을 주욱 정리해 보고 싶었다.
위대하지 않던 일들, 그것이 상처였고 좌절이었을지라도 그것들 또한 나를 완성케 하는 필수 불가결한 일부분이므로 나는 기꺼이 그것들을 담담히 써 왔고 앞으로도 변함 없을 것이며 결국, 나의 시들은 그리함으로써 점점 내가 되어가겠지.
오늘도 나는 차분히 앉아 나를 써 내려가며 시가 되어진다.
아직 나는, 되어가는 중이다...... 시들로......
문지아/ 제주 출생. 2023년 《시사사》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