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번째 순례의 향기(9)
(2016. 1. 30. 광주교구)
◉ 순례 장소 : 옥암동 성당(미사)➟산정동 성당➟
다산초당➟순교자 기념성당 ➟옥터(곡성성당)➟(5곳)
안개가 자욱한 날 순례를 광주로 출발
먼 거리 가기 때문에 안전운전과 자비의기도, 묵주의 기도는 각자의 어려움과 고통 중에 있는 환자를 위한기도를 바치고 영과 육적으로 건강을 위한 마음의 기도를 하며 옥암동 성당에서 대회년 자비의 문 들어가서 순례자 공동으로 기도 하기 천국 가는 길을 닦아 이승의 삶으로 영혼구하기, 봉사하기, 전교하기 노력 야고보순례단의 긍정점 찾기와 세상적인 일에 이야기 하지 말고 영혼을 깨우치고 천국 갈 수 있는 믿음과 사랑주시고 모든 회원들의 영육간의 건강 주세요. 회장님의 명언 말씀을 열렬히 강의 하셨다.
첫 번째 간 곳
● 옥암동성당
오늘의 복음 말씀은 다윗왕의 범한 간음과 살인은 하느님을 무시하는 행위로서 모든 자연을 만드신 분 ‘예수님은 이세상 주인 이십니다.’
내 삶 안에서 중심 하느님안에 있고 뜻에 따르는 생활을 하고 있나?
사제로서 하느님 앞에서 주인처럼 행사하고 생각한 적이 많다고 신부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느님 안에서 내 죄를 고백하며 섬김으로 하느님 앞에 주인이 아닌 종의 입장에서 제 마음을 굳건히 하게 하시고 제 마음을 깨끗하게 하소서 하신다.
성체를 모실 때 신자들의 명찰을 보시고 세례명 이름을 불러주시면서 성체를 주실 때의 그 감동은 가슴이 벅차게 하였다.
두 번째 간 곳
● 산정동 성당
† 6.25 전쟁 때 행방불명된 세 성직자의 순교 기념비가 있는 과거의 주교좌성당
목포 산정동 성당은 한국 전쟁 때 행방불명된 세 성직자의 순교 기념비가 있는 과거의 주교좌성당이다. 광주교구장으로 있던 미국인 안 파트리치오 몬시뇰, 산정동 성당 주임 신부이던 아일랜드인 고(故) 토마스 신부, 산정동 성당 보좌신부 아일랜드인 오 요한 신부 등 세 명의 순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한국 전쟁 때도 박해 때 못지않게 180여 명의 성직자와 수도자가 순교하고 또는 행방불명되었는데 그 가운데 광주교구장으로 있던 미국인 브렌난(Brennan, 安, 1901~1950, 파트리치오) 몬시뇰, 산정동 성당 주임 신부였던 아일랜드인 쿠삭(Cusack, 高, 1910~1950, 토마스) 신부, 산정동 성당 보좌 신부였던 아일랜드인 오브라이언(O’Brien, 吳, ?~1950, 요한) 신부 등도 행방이 묘연하여 산정동 본당에는 현재 이 세 명의 순교 기념비만 세워져 있다.
당시 목포에서 인민군에게 잡혀 대전으로 이송되어 온 세 분 성직자는 대전시 목동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 입구 왼편 마루방에 민주 진영 인사 및 신자 지도 계층 인사들과 함께 감금되어 있었다. 이후 9월 26일부터 28일 새벽까지 총성이 계속 들리더니 인민군들은 북으로 쫓겨 갔는데 세 명의 성직자가 있던 방에서는 인기척은 없고 다만 파트리치오 안 신부의 여권과 명함, 성무일도가 발견되었다.이때 오기선 신부는 세 명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충남 사회과 도청 직원을 대동하고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 뜨락에 길이 10m, 높이 170cm의 구덩이를 파헤쳐 인민군들이 사살한 시체들을 점검하였다. 그리고 수도원 뒷뜰에 있는 37척 되는 우물 속과, 수도원 뒤 구덩이도 파 보았으나 인민군들은 포로들을 전신에 콜타르를 칠하여 죽였고 사살된 지 오랜 시일이 지났기 때문에 시체가 부패되어 분간할 수 없었다고 한다.오 신부는 다시 대전 형무소도 가 보았으나, 1천 명씩 넣어 죽인 우물 8개 속에서도 성직자의 시신은 발견할 수 없었다. 따라서 마을 사람들도 9월 26일부터 28일 사이에 수도원 안에 감금되어 있던 인사들을 죽이는 총소리를 밤낮으로 들었다는 증언에 따라, 세 명의 성직자는 인민군이 북으로 도망하며 포로들을 사살할 때 피살되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이는 1981년 8월 13일 오기선 신부가 고증한 사실이다.
◆ 전남 지역의 복음화와 산정동 성당
전라남도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1866년의 병인박해를 피해 온 다른 지역의 교우들이 노령산맥 줄기를 따라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부터였다. 그 후 이들은 1872년의 나주 무학당 사건으로 새로운 순교자를 탄생시키면서도 꾸준히 복음 전파에 노력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새로 이주해 오는 신자들로 인해 전라남도 지역의 교우 촌이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그 결과 1882년 이후에는 리우빌(한국명 유달영) 신부에 의해 장성·순창·담양의 20여 개 교우 촌이 공소로 설정되었다. 1896년까지도 전라도 지역은 전주 본당, 되재[升峙]본당, 수류 본당 등 북부 지역에만 본당 소재지가 있었으며, 남부 지역의 공소들은 수류 본당에 속해 있었다.
그러다가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한국명 민덕효) 주교가 전라도 지역을 순방하면서 나바위 본당과 목포 본당의 신설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 1897년 5월 8일 데예(한국명 조유도) 신부가 목포 본당 초대 주임으로, 베르모렐(한국명 장약슬) 신부는 나바위 본당 초대 주임으로 각각 임명되었다. 데예 신부는 아천리 공소에 임시로 거처하다가 현재의 산정동 성당 부지를 매입하여 1989년 7월 2일 목포로 거처를 옮겼으며, 1899년 초에 아담한 연와제 성당을 완공하였다.
3대 주임 샤르즈뵈프(한국명 송덕망) 신부는 1913년에 새 성당을 건립하였으며, 20대 주임 브라질 신부는 신축 성당 건립을 추진하여 1966년 5월 29일에 현재의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하였다. 26대 주임 김성용(프란치스코) 신부는 1989년 11월 18일에 양로원을 개원하였다, 1988년 4월 5일에 레지오 마리애 한국 도입 기념비 축성식이 본당에서 거행되었으며, 1994년에는 산정동 본당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그 사업의 일환으로 1996년 11월 15일에 한국 레지오 마리애 기념관 기공식을 가졌으며, 1998년 5월 23일 축성식을 가졌다.
◆ 레지오 마리애와 산정동 성당
한국의 레지오 마리애는 50년 전에 광주대교구의 주교좌 성당이었던 목포 산정동 성당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산정동 성당에 가면 한국 레지오 마리애 기념관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레지오 마리애란 교회가 공인한 신자 단체로서, 마리아의 강력한 지휘 아래, 세속과 그 악의 세력에 끊임없이 대적하는 교회의 싸움에 복무하기 위하여 형성된 군대이다. Legio Mariæ라고 하는데 이는 성모님의 군대라는 뜻이다. 그래서 레지오는 군대의 형태로 조직되었고 그것은 본래 고대 로마 군단을 본 딴 것이며 그 명칭 또한 거기에서 따온 것이다.
처음 만들어진 곳은 유명한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의 더블린 시에 있는 프란시스 거리였으며 첫 단원들의 입단은 1921년 9월 7일 저녁 8시, 성모 성탄 축일 전야에 마이러 하우스에서 열렸다. 이 모체가 되는 지단의 이름이 "자비의 모후"였기 때문에 이 조직은 한동안 "자비의 모후 회"로 알려졌다.레지오의 목적은 단원의 성화를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데 있다. 그를 위한 방법으로는 레지오 교본에 명시된 규정에 따라, 사회적 봉사와 가톨릭 활동을 한다. 사회적 봉사 방법으로는 기도와 환자 방문, 사회 봉사기관 방문 활동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금전적인 면 보다는 몸으로 하는 활동을 중요시 여긴다. ▒ 성 골룸반 외방전교회(Missionary Society of Saint Columban) 성 골룸반 외방전교회는 1918년 아일랜드의 갤빈(E. Galvin) 신부에 의해 창설되었다. 갤빈 신부는 1909년부터 1912년까지의 중국 선교 활동을 통해 그곳에서 포교의 필요성을 절감, 외방전교부를 두게 되었는데 골룸바노회는 아일랜드의 성인인 골룸바노를 주보로 모시고 이어 1916년에 설립되었다. 이 회가 한국에 진출한 것은 1933년으로 이해 10월 29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제1진10명이 한국에 도착하였다. 맥폴린(McPolin,林) 신부 등 이들 10명의 신부들은 우선 목포시 산정동(지금의 성 골룸반 병원)에 본부를 두고 주로 전라도와 제주도의 서쪽을 담당하였다. 이 회는 1937년 설정된 광주교구와 1939년 설정된 춘천교구의 사목을 각각 맡아 역대 교구장직에도 동회 회원이 착좌하였다. 또한 1971년 분리 신설된 제주교구에서도 이 회 회원인 헨리(H. Henry, 玄) 주교가 초대 교구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한국에서의 선교 활동에는 시련도 많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이른바 적성국인이었기 때문에 일본 당국으로부터 혹독한 탄압을 받았으며, 1950년의 한국 전쟁 때는 공산당들에게 체포되어 학살까지 당하는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한국 전쟁 때 공산당에게 체포된 9명의 신부들 중 7명은 그들에게 살해되고 나머지 2명은 북한으로 납치돼 갖은 고초를 다 겪었던 것이다.
■ 순교자
◆ 교구장 안 바드리시오 몬시뇰 (Patrick Brennan) (1901∼1950)
미국 출생으로 1928년 사제 서품을 받고 오랫동안 중국에서 사목하다가 1949년 광주 교구장으로 취임한 후 산정동 성당을 신자들의 요람지로 만들기 위해 전념하다기 6.25 때 인민군에게 잡혀 행방불명이 되었다.
◆ 고 도마 신부 (Thomas Cusack) (1910∼1950)아일랜드 출생으로 1934년 사제 서품을 받고 광주교구에서 사목하다가 산정동 본당 주임신부로 사목하는 동안 세계 제2차 대전, 8.15 해방을 함께 한 성인 신부로 추앙을 받을 만큼 선교 사업에 정성을 다하다가 6.25 때 교구장 안 바드리시오 신부와 보좌 신부 오 요한 신부와 함께 인민군에게 잡혀 행방불명이 되었다.
◆ 오 요한 신부 (John, O Brien) (1918∼1950)아일랜드 출생으로 1942년 사제 서품을 받고 군종 신부로 사목하다가 한국에 와서 산정동 본당 보좌신부로 사목하는 동안 주로 젊은이들의 선교 사업에 힘쓰던 중 6.25 때 교구장 안 바드리시오 신부와 주임 신부 고 도마 신부와 함께 인민군에게 잡혀 행방불명이 되었다.
세 번째 간 곳
●다 산 초 당
다산 정약용이 10여 년간 유배생활하며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 하였던 곳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요한)이 10여 년간 유배 생활을 하며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하였던 곳이다. 강진만이 한눈으로 굽어보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 초당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 유배 18년 중 10여 년 동안을 유배 생활하면서 500여권에 달하는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하였던 곳이다.
정약용은 정재원(丁載遠, 1730~1792)의 넷째 아들로 이승훈(李承薰, 1756~1801, 베드로)의 처남이기도 하다. 다산은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속칭 마재)에서 태어나 성호 이익(李瀷, 1681~1763, 호 星湖)의 학풍을 이어받아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된다.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1801년 신유박해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다시 강진으로 이배(移配, 유배지가 옮겨짐)되었다.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 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은 산방, 제자 이학래 집 등에서 8년을 보낸 후, 1808년 봄에 다산 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유배 생활이 끝나던 1818년 9월까지 10여 년 동안을 다산 초당에서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을 하였으며, 다산의 위대한 업적이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그가 천주교와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1770년대 후반에서 1780년대 초반으로, 천주교 서적을 접하면서였다. 1783년에는 형 약전과 함께 광주 마재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배 안에서 이벽으로부터 천주교에 관한 설교를 듣고 1784년 서울 수표교에 있는 이벽의 집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약전은 세례를 받지 않았다. 그 이듬해 을사추조적발 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부친의 강요로 척사의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1787년 정미반회(丁未泮會)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천주교 신앙을 쉽게 포기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다가 1791년 진산 사건이 발생하여 윤지충(尹持忠, 1759~1791, 바오로)과 권상연(權尙然, 1751~1791, 야고보)이 죽음을 당하고 박해가 거세지자 그는 배교의 뜻을 명백히 하였다.더구나 1795년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 실포 사건(失捕事件)을 계기로 정조가 당시 남인 관료 중 천주교 신자로 지목되던 이가환(李家煥, 1742~1801, 호 錦帶, 貞軒)을 충주 목사로 좌천시키고 이승훈을 예산으로 유배시킬 때 그도 충청도 금정찰방(金井察訪)으로 좌천되었는데, 당시 천주교 신자들을 강제로 배교시키는 등 천주교 신자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적극 부인하기도 했다.
1797년 그는 다시금 자신이 서학도로 지목받자 자명소(自明疏, 스스로의 입장 을 해명하는 상소문)까지 올려가며 신앙을 부인했고 1799년에는 《척사 방략》을 저술해 천주교를 배척(박멸)하는 방법을 상세히 논함으로써 천주교에 대한 배격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1801년 신유박해로 정약용은 체포되었고 이 과정에서 그는 천주교를 철저히 부인하고 권철신, 황사영 등 자신이 알고 있던 교회 지도자들을 고발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강진으로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 조선의 실학(實學)
성리학을 지도 이념으로 하였던 조선은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그 지도 이념의 한계성이 노출되고 자기 전통에 대한 반성과 극복의 길이 모색되었다. 이에 일부 학자들은 성리학만을 고집하는 문화의 한계성을 깨닫고, 정신 문화와 물질 문화를 균형 있게 발전시켜 부국 강병과 민생 안정을 달성함으로써, 안으로 분열된 사회를 다시 통합하고, 밖으로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대처할 수 있도록 국가 역량을 강화하려는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화 운동은 학술과 종교·문학·예술 등의 모든 영역에서 발생하였지만, 특히 학술 분야에 나타난 새로운 기풍을 실학(實學)이라 한다. 실학 운동에는 크게 두 갈래의 흐름이 있다. 하나는 유형원·이익·정약용등이 주도한 중농적(重農的) 실학파로서 농촌 사회의 안정과 농민의 이익을 강력하게 대변하고자 하였고, 다른 하나는 유수원·박지원·박제가에 의해 주도된 중상적(重商的) 실학파로서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개발을 역설하였다.
◆ 다산 기념관
다산 기념관은 영정, 다산 연보, 가계도, 학통, 다산의 일생, 다산의 업적과 유물 등이 판넬과 조형물로 입체감 있게 전시되어 있으며, 좀더 자세한 정보를 알고 싶을때는 컴퓨터를 활용한 터치 스크린에서 검색해 볼 수 있다.
영상실은 다산의 일생과 강진을 소개하는 영상물이 약 7분 동안 상영되는데 관광객이 영상실에 들어가면 자동으로 상영되므로 누구나 불편없이 관람할 수 있다.
네 번째 간 곳
● 순교자 기념성당
영광 지역 순교자들을 위한 순교자 기념 성당
1801년 신유박해 직전 영광 지역 신자로 붙잡혀 처벌을 받은 신자들로 이우집, 이종집, 오씨, 이화백, 윤종백, 남조이와 그녀의 남편 김득겸 등 7명이 있다. 이 가운데 이화백과 복산리의 양반 오씨만이 신유박해 때 영광에서 순교하였고, 김치명과 유문보는 병인박해 때 공주와 나주에서 각각 순교하였으며, 배교자 이우집은 신유박해 때 전주에서 처형당했다.
광주대교구 교구장 김희중 대주교는 2010년 9월 16일 영광 성당을 대교구 산하 성당 중 처음으로 순교자 기념 성당으로 지정했다고 밝혔다. 영광 지역은 1791년 신해박해 이전부터 천주교가 전해진 곳으로, 전주, 고산 지역과 더불어 호남 지역에서는 천주교가 다른 지역에 비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던 곳이다.
영광에서 순교한 이화백과 오씨가 참수형으로 순교한 곳을 서종태 박사는 참수터의 입지조건을 조사하여 도동리 석장승 남쪽의 옛날 우시장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도동리 석장승 남쪽 땅은 읍성 밖이고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대로변이며 수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공터이고 개울가에 위치해 있는 등 참수터로서 갖추어야 할 입지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에 신유박해 때 이화백과 오씨가 참수형을 받아 순교한 곳은 도동리 석장승 남쪽(영광 성당 앞쪽)의 옛날 우시장이 있었던 곳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1832년(순조32)에 잡귀·액·살 등 부정한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석장승을 이곳에 세운 것도 이곳이 순교터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전라도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 직후에 전주의유항검(柳恒儉,1756~1801,아우구스티노)과 진산의 윤지충(尹持忠, 바오로, 1759~1791)이 천주교를 받아들여 신앙공동체를 형성한 뒤 전라도 각지로 복음을 전파 시켜나갔다. 영광에는 유항검 집안과의 인척 관계를 통해서 복음이 전해졌다. 영광의 월산리는 유항검의 이복동생 유관검의 사촌형의 처가가 있던 곳인데 유관검은 사촌형의 처남인 월산 리에 사는 이우집李宇集) 등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유항검의 사돈인 영광 사람 이종집(李宗集)도 유관검을 통해서 입교한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1801년 신유박해때 영광에서 참수형을 당한 양반 오씨도 그의 거주지가 이우집이 살던 월산리에서 가까운 복산(현 장성군 삼계면 부성리 복산마을)이었던 것으로 보아 유관검을 통해 입교한 이우집·이종집 등의 전교로 입교한 것으로 믿어진다.
윤지헌이 사는 고산 저구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집을 출입하며 천주교 교리를 배웠는데 그 사람들 가운데는 고산의 김방통(金方通)·안무산安茂山), 진산의 목서중(睦序中)·박춘지(朴春之), 금산의 김종우(金宗祐)·박맹손(朴孟孫), 강진의 윤제현(尹濟賢) 등과 더불어 영광의 윤종백(尹宗白)이 포함되어 있었다. 고창 개갑 사람 순교자 최여겸은 영광과 이웃 고을인 무장현 동음치면 개갑(현 고창군 공음면 갑촌) 사람으로 무장과 이웃 고을의 사람들을 대거 입교시켰는데 그들 가운데 28명이 신유박해 때 붙잡혔다 그 가운데는 무장에 사는 조카 최수천(崔壽千), 금노라고 부르는 조카 최일안, 함평의 남중만(南重萬), 흥덕의 김처당(金處當) 등과 더불어 영광 고을 양반 이화백이 포함되어 있다
신유박해 직전의 영광 지역 신자들의 숫자는 7명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신유박해 때 신문 과정에서 드러난 영광 지역 신자들의 수가 7명으로 전라도에서 세 번째로 많았고 또한 처벌된 신자들의 수도 처형된 자 3명과 유배된 자 2명을 합쳐 모두 5명으로 역시 전라도에서 세 번째로 많았다. 이것은 당시 영광 지역의 교세가 전라도에서 세 번째로 컸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기에 유관검이 주문모 신부의 은닉처로 영광 지역 신앙 공동체를 고려했을 것이다.
말해준다. 그렇기에 유관검이 주문모 신부의 은닉처로 영광 지역 신앙 공동체를 고려했을 것이다.
■ 영광 출신 순교자
○ 이화백 : 무장의 최여겸의 제자로 영광에서 참수당함(한국전주교회사)
○ 오씨(吳氏) : 영광의 복산에 사는 오씨도 최여겸에게 천주교를 접했을 것으로 생각됨. 영광에서 참수당함 (한국천주교회사)
○ 남씨부인 : 그는 그의 남편인 김득겸에게서 천주교를 접하였고, 김득겸이 죽은 뒤 많은 사람에게 전도하였는데, 신유박해 당시 은율에 유배됨(사학징의)
○ 윤종백(尹宗白) : 그는 고산의 윤지헌(尹持憲)에 의해 천주교를 접했는데, 신유박해 당시 전주감영의 감옥에 갇혔으며, 이후의 행적은 알수 없음.
○ 이우집(李宇集) (1761∼1801) : 전라도 영광 월산리 출신 이우집은 영광양반으로 유항검의 친사돈이었다. 당시 양반들의 꿈처럼 여러 차례 과거시험에 응시했다. 그는 유항검의 인격과 신앙에 감화되고 유관검의 권유를 받아 입교하여 교리를 배웠다.
의금부 결안에 보면 이우집은 유항검과 같이 몰래 이류(異類; 오랑케)와 통하여 큰 선박을 나오도록 청하는 일에 놀라서 달려가 고하려는 마음은 없이 수컷이 암컷을 부르면 화답하는 것같이 적극적으로 수작하였으며 실정을 알고도 고하지 않은 불고지죄로 나온다. 그해 3월에 체포되어 전주감영 포청 형조를 거처 의금부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10월 24일 전주(현 전동 성당 터)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그의 나이 40세 였다.
■ 영광 성당 역사
1937년에 설립되었다가 폐쇄된 후, 1965년 12월 15일에 재설립된 본당으로 초대 신부로 멀컨 토마스 신부가 부임하였다. 1920년대 초 나주 노안 본당의 서 미카엘 가족이 영광군 백수면으로 이주하면서 영광 지역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노안 본당의 카다스 신부의 활동으로 신자가 늘어나면서 영광 공소가 설립되었으며, 1937년 본당으로 승격되고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의 멀컨 신부가 부임하였다. 초대 주임 신부 부임후 성당 신축을 시작하는 한편 3년 과정의 초등학교인 성심학원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이후 본당 신부가 일제에 의해 수감되면서 쇠퇴하여 공소로 되었다가 6.25전쟁으로 성당 건물이 전소되었는데, 1965년 성당을 재건하고 다시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다섯 번째 간 곳
●옥터 (곡성성당)
† 정해박해의 발상지이자 수많은 교우들이 붙잡혀 와 갇힌 옥터
정해박해 때 이곳 곡성 성당은 객사가 있던 곳이며, 그 앞으로는 남원진관(南原鎭管, 종3품의 첨절제사가 그 관장임)에 속한 종6품의 절제도위(節蹄尉, 곡성 현감이 겸임하였을 가능성이 있음)가 지휘하는 좌·우의 군관청(軍官廳, 일명 將廳)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당고개에서 주모 사건(酒母事件)으로 교우들이 수없이 잡혀 와 갖은 옥고를 치렀던 곳이다. 당시 동헌 자리에는 경찰서가, 사창(司倉) 자리에는 군청이 자리 잡고 있다.
정해박해는 1827년 정해년 전라도 곡성을 시작으로 전라도 지역, 경상도 상주, 충청도와 서울의 일부 지역에 일어난 박해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전국적인 규모의 박해는 없었으나 신유박해의 마무리를 위해 반포된 <척사윤음>은 천주교 탄압의 법적 근거가 되어 1815년 을해박해 등 전국 각지에서 소규모의 박해는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교우들은 이여진(李如眞, ?~1830, 요한), 신태보(申太甫, ?~1839, 베드로), 정하상(丁夏祥, 1795~1839, 바오로), 유진길(劉進吉, 용심, 1791~1839, 아우구스티노) 등을 중심으로 교회 재건과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곡성에서 시작된 박해는 전라도 전역에 파급되면서 240여 명의 교우들이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이송되었고 이어 4월 22일(음) 전주 포졸들이 경상도 상주에서 신태보를 체포, 전주로 압송해 가자 이를 계기로 경상도에서도 박해가 시작되어 상주에서 5∼6개소의 교우촌이 습격 당하여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었다.
또한 서울에서는 4월 21일(음) 이경언(李景彦, 1790~1827, 바오로)이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고, 충청도 단양에서는 경상도의 박해를 피해 유성태(劉性泰, 1789/1794~1828, 라우렌시오)의 집으로 피신해 온 교우들이 체포되어 충주로 압송되었다.
이렇게 해서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서울 등지에서 2월부터 5월까지 4개월 동안 500여 명의 교우들이 체포되었으나 전라도에서 이경언, 이일언(李日彦, 1767~1839, 욥), 정태봉(鄭太奉, 관명 만보, 1796~1839, 바오로) 등 8명이, 경상도에서 박보록(朴甫祿, 박경화, 관명 도항, 1757~1827, 바오로), 김사건(金思健, 1794~1839, 안드레아), 안군심(1774~1835, 리카르도) 등 6명이, 충청도에서 유성태 등 500여 명 중 15명만이 옥사 또는 처형당해 순교했을 뿐, 나머지는 모두 배교하여 석방되거나 유배되었다.
전라 감사 이광문(李光文, 1778~1838)이 추위와 더위, 굶주림에 약한 인간의 나약성을 매우 교묘하게 이용해, 붙잡힌 교우들의 대부분을 배교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것으로 정해박해는 종식되었으나 피해가 가장 큰 전라도 지방의 교회는 거의 폐허되었다.
2번째
순례의 향기 소감의 글은 내 개인 생각은 접어두고
순례지의 특징, 역사중요성, 순교자의 생애의 글을 중점으로 글을 써 보았습니다.
여기에 쓴 글과 사진들은 내개인 사진과 ‘한국의 성지와 사적지’ 및 ‘굿 뉴스 ’에서 따온 글임을 밝히면서 많은 ‘청주교구 사도성 야고보 순례단 ’ 회원님들의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앞으로도 계속 이런 형식의 글을 쓰려고 노력을 할 것 입니다.
2016. 1. 30. 광주성지 순례를 마치며
김홍숙 혜레나
|
첫댓글 두번째 광주순례 체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