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이랍니다
양상태
난 그곳에 있었다. 한 지역에서 12년을 살았다면 고향이나 진배없다고 생각한다. 어머니 팔에 안겨 잠들 때처럼 품 안이 그리운 곳이다. 말하여 제2의 고향이라 부른다.
아버지 직장을 따라 항구 도시로 진출한 두메의 촌뜨기는 나름대로 적응을 하기 위하여 용틀임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닌 나를 앞에 세우고 강한 척해야만 했다. 어깨는 펴고 고개를 세우고 걸음은 늦게 걸었다.
초등학교 등교 시에 우리에게는 몰래 올라타야만 하는 통학수단이 있었다. 부두 하역을 하는 아저씨들이 몰고 가는 소달구지에 들키지 않게 엎드려 올라타는 것이다. 들키면 혼나고 내려야 했고 운 좋게 마음씨 고운 아저씨를 만나게 되면 흔들림을 즐기며 무사히 학교 앞까지 갈 수가 있었다.
어느 날 미술 준비물로 가지고 가던 벼루가 달구지 밑으로 떨어져 귀퉁이가 깨졌었다. 아버지께 혼이 날까 봐 숨기기로 한 누나와의 약속은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난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군것질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든 하굣길. 소학교까지 있는 군산에는 유난히 화교가 많았다. 화교가 장사하는 빵집에서 파는, 껍질은 단단하나 속이 텅 빈 ‘공갈빵’이 있었다. 고소하고 달큼한 감칠맛은 잊히지 않는다. 그러나 주머니 사정이 녹록지 않은 초등생은 다음으로 미루는 여유를 그때부터 몸에 배도록 해주었다.
중학교 입시를 치렀던 날, 부모님 따라 동네를 벗어난 시내 중심가에 있는 중국집으로 가서 먹어 본 짜장면과 탕수육. 그때까지 먹어 본 음식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 중 하나였다. 더불어 식사 후 남도 극장 앞 시계점에서 졸업선물로 미리 받은 손목시계는 왼쪽 어깨가 무거워 살짝 들어 올려졌다.
중・고등학교 시절 등교는 연탄재와 늘 같이했다. 질척거리는 운동장에 깔기 위하여 가져가는데 등굣길 근처 골목길에서는 우리들의 연탄재 쟁취 전이 치열했었다. 한 손에 책가방. 다른 손엔 도시락 가방 대신 연탄재라? 그런 시절이 있었다.
급우 중에는 금강을 건너 장항에서 배를 타고 등하교하는 도선 통학생들과 옥구와 이리 쪽에서 기차를 타고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이 있었다. 풍랑주의보가 발령되면 도선 통학생들은 수업 중에도 집으로 돌려보내 줘서 우리들의 부러움을 샀다.
대통령 선거 때가 무르익으면 군산과 장항을 잇는 ‘금강대교’ 착공식은 선거 때마다 줄곧 이어져 왔다. 오십여 년이 흐른 몇 년 전에야 ‘동백대교’라는 이름으로 만날 수 있었다. 정치인들의 공약이라는 것이 헛된 약속임을 확인시켜 주는 계기가 되어 씁쓸하다. 집 근처 호텔에서 대통령이 하루를 묵어간 적이 있었다. 나도 훗날에 한번 그곳에서 잠을 자 보아야겠다고 주먹에 힘을 쥔 적이 있었다. 그 꿈은 최근에 아내와 함께 이룰 수 있었다.
어릴 적, 검정 고무신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타이어 그림 속에 ‘진짜’라 쓰여 있는 보생 산업의‘타이어 표’ 고무신과 쌍벽을 이루던 ‘만월 표’ 경성 고무신 공장이 군산에 있었다. 어느 해 경성 고무 공장에 큰불이나 연일 화염과 연기가 며칠간 지속이 되었다. 근처에 가서 불구경하던 나는 콧구멍이 새까맣고 얼굴까지 연기에 그을리며 고무 타는 냄새가 건강에는 좋지 않다는 경험까지 했다.
내가 가장 우려했던 일은 혹시나 그 옆에 있는 ‘대양 극장’으로 불이 번지는 것이었다. 그곳은 재 개봉관으로 2편을 동시에 상영하며 무엇보다 입장료가 저렴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그리도 느리게 가던 학창 시절, 시간을 흘려보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군산은 일제 강점기 시대의 흔적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월명산의 아카시나무, 적산가옥, 군산세관, 일본은행, 동국사, 뜬 다리(부교)등 일제의 잔재가 아직 많이 남아있다. 그러나 지금은 이를 활용하여 관광 자원화하고 있다. 아팠던 역사를 현대에 와서 되새겨 보는 아픈 역사도 역사라는 산 교육장이다.
배릿한 바다 냄새가 묻어있고 금강이 흐르는 도시 군산. 어부들의 삶의 현장인 ‘째보선창’은 바다가 육지 속으로 파고들어 조그만 만灣을 이루는 곳으로, 째진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오징어잡이 배가 밝히는 집어등은 휘황찬란하고 꼴뚜기젓, 황석어젓, 새우젓 등이 유명하였으나 금강 상류에서 밀려오는 토사로 인해 차차 기능을 잃어 가고 있다. 지난 시절 추억이 하나씩 침식되어 가는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해거름에 어둑신하여 월명공원 ‘수시탑’에 올랐다. 바깥쪽으로는 서해의 검붉어진 윤슬과 장항제련소의 굴뚝이 연기를 머금은 채, 멋쩍게 나를 바라본다. 무엇이라도 하러 여기까지 왔느냐고 묻는 듯하다. 몸을 돌려 안쪽 시가지 쪽을 바라본다. 고개 숙인 가로등은 야금야금 어둠을 베어 물고 있다. 이곳은 정녕 밤을 기다리는 도시 같다. 도시는 화려함을 숨긴 채 하나둘씩 불빛 안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어선의 집어등을 따라 나는 이미 야경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내일을 보듬고 오늘을 사르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