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감수성이 매우 예민했던 고등학생 시절. 그 즈음 대부분의 고등학생들이 그랬듯, 나도 새벽 4시에 일어나 공부를 했다. 3대째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학생답게(?), 갸륵하게도, 공부를 시작하기 전, 아침마다 성경을 서너 장씩 읽고 하루를 시작하자는 거룩한 결심을 품었고, 기특하게도 그 결심은 1년 넘게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여느 때처럼 책상에 앉아, 거룩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성경을 읽다가 너무 크게 놀란 나머지 나도 모르게 성경을 얼른 덮어버렸다. 물론 잠시 뒤 그 성경책을 다시 펼쳐 두근거리는 가슴을 다독여가며, 눈에 쌍심지를 켜고 더욱 더 열심히 탐독했지만---. 까닭에 그날 아침 공부는 땡쳐 버렸다. 공부했어야 할 시간에 그 책만을 여러 번 읽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나는 그 책에 19금 빨간 딱지를 붙여놓고 읽지 않았다. 공부에 결정적인 방해가 되었으므로---, 심지어 목사가 되고 난 이후에도 읽지 않았다. 무려 십 수 년 동안이나---,
2. 구약성경을 읽다보면 이처럼 아주 크게 놀라고 당황하게 되는 순간들이 종종 있다. 그 중의 한권의 책이 『아가서(雅歌書)』를 읽을 때다. 이 책의 히브리어 제목은 『노래 중의 노래(Song of songs, 히브리어, 쉬르 하-쉬림)』이다. 이 책을 한번이라도 읽어보신 분이라면 알겠지만, 『아가서』는 에로스적 사랑의 불이 제대로 붙은 청춘남녀의 불타는 사랑을 노래한다. 한 대목만 읽어보자. 『도장을 새기듯 님의 마음에 나를 새겨주오, 도장을 새기듯 님의 팔에 나를 새겨주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 것---, 사랑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 아무도 그 불길 끌 수 없고. 그 무엇으로도 그 불길 잡을 수 없네, 바닷물을 전부 다 끌어온다 하더라도 그 불길 끌 수 없고, 강물을 모두 다 뿌린다하더라도 그 불길 잡지 못하네(아가8:6-7, 사역)』.
2-1.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고대시대 이스라엘나라의 청춘남녀들이 얼마나 뜨겁고, 얼마나 달콤하며,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아찔한 연애와 사랑을 했는지?』, 혹은 『비록 비유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을 빌려 말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얼마나 노골적인 언어로 사랑하는 님을, 또는 그 님의 육체의 아름다움을 아주 거침없이, 매우 구체적이고 솔직한 시어(詩語)로 대담하게 표현하여 노래했는지?』, 또는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청춘남녀의 불타는 연애와 사랑을, 어떤 눈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그 내밀한 속내를 고스란히, 그리고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아가서는 『고대시대에 기록된 이스라엘민족의 세속적인 연애문학작품』이라고 주장한다.
3. 1세기말(AD.90년) 유대교의 종교 지도자들이 『얌니야(Jamnia)』, 현재 『야브네Yavne』라는 지방에서 모여 몇몇 『고대 문헌(성문서들)』의 거룩성에 대해 논쟁하며 그 문서들을 정경(성경)으로 인정해야 할지 말지에 대해 치열한 토론을 벌였다. 당연히 그 첫 번째 자리를 차지했던 책이 『아가서(雅歌書)』다. 그때 위대한 랍비 『아키바』가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그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모든 성서는 거룩하다. 그 중에서도 아가서는 더욱 거룩하다. 이 책은 「거룩함 중의 거룩함」을 간직한 책이다.』. 그렇다면 그가 말한 『거룩함 중의 거룩함(Holy of Holies)』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놀라지 말라.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함이 가장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난 예루살렘 『성전(聖殿)의 지성소(至聖所)』를 가리켜 말한 것이었다. 어떤 구약학자들은 랍비 『아키바』의 이 발언을 이 책의 히브리어 제목을 소재로 그가 「말장난(언의의 유희)」을 쳤다고 논평(論評)했다. 즉 아가서의 원제목인 『노래 중의 노래(히브리어, 쉬르 하-쉬림)』를, 『거룩함 중의 거룩함(히브리어, 코데쉬 하-코데쉼)』에 빗대어 말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의 성경주석에 해당하는 『미드라쉬』는 아가서에 대한 『아키바』의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아키바의 선언이 단순한 농담(말장난, 조크)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키바의 선언은 「성경에서 아가서가 차지하는 중심성(中心性)」에 대한 진지한 발언」이었다. 실제로 「아가서는 성서의 가장 내밀한 성소인 지성소와 같은 거룩한 책」』이라고 주석했다.
4. 『아가서(雅歌書)』에 대한 구약학자들의 일반적이고 온건한 견해는 『솔로몬왕(BC.971-931)』에 의해 지어진 원작품을, 바벨론 포로기인 BC.500년경,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작가가 현재의 아가서로 완성했다고 보는 견해다. 그런데 이 책이 유대인의 정경에 포함된 때가 AD.90년이었다. 정경에 포함되기까지, 짧게 잡아도 무려 500년이 넘는 세월이 걸린 셈이다. 구약성경 39권의 책 중, 이 『아가서(雅歌書)』만큼 장구한 세월동안 뼈아픈 질곡의 가시밭을 걸어 온 책이 없다. 오늘의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정말 어이가 없고, 어처구니가 없다. 이 책의 목숨 줄을 잔인하게 움켜쥐고, 살릴 것인가 말 것인가를 수없이 고민하며 혹독한 시련과 폭력을 가한 주역들은 유대교나 기독교를 잔인하게 핍박했던 헬라(그리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황제)나 로마(네로황제)와 같은 이방나라의 폭군들이 아니었다. 도리어 늘 경건하게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 사람들이었다. 날마다 힘써 성경을 읽고, 연구하며, 어떻게 하든지 성경을 보다 올바로 읽고 해석하기 위해 진력을 다해 온 사람들이었다. 첫째는 유대나라의 신학자들인 랍비들이었고, 둘째는 기독교 신학자들―우리 기독교도 유대인의 정경을 우리의 정경으로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유대인 랍비들만큼이나 심각한 논쟁을 벌였다. 당연히 그 정점(頂點)에 아가서가 있었다.―이었다. 『쿠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AD.1473-1543)』의 지동설(地動說)을 지지했던 『갈릴레이(Galileo Galilei, AD.1564-1642)』에게 당시 교회와 사람들이 그랬듯이, 이번에도 여지없이 『고정관념』과 『편견』과 『아집』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낯 뜨거운 세속적이고 통속적인 젊은이들의 사랑노래가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안에 들어올 수 있느냐는 학자들의 생각이 비웃음과 조롱, 날선 비판과 무자비한 공격으로 이 책에 쏟아진 것이다. 한 여름 폭우처럼----. 고정관념과 편견이 지나온 우리 인류역사 속에서, 얼마나 지독하고 강력한 힘을 가진 무섭고 두려운 적으로 작용했는가가, 다시 한 번 몸서리쳐질 만큼 여실히 증명된 것이다.
4-1. 『성서는 오직, 거룩하게(?), 그리고 구속사적 관점의 틀 안에서만(?) 읽고, 해석해야만 한다.』는 매우 경건하고 거룩한 신앙을 고수하고 가르쳤던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정말 하마터면 아가서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과 온갖 핍박과 고난을 가한 다음,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뻔 했다. 마치 『우리를 로마제국의 손에서 구원하지도 못하는, 당신처럼 힘없고, 나약한 자는 결코 하나님의 아들일 수 없다.』며, 바락바락 소리치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1C유대인들처럼---, 초대교회 이후에 등장한 위대한 교부들(오리겐, 터툴리안, 어거스틴 기타 등등)로부터 시작하여, 『마르틴 루터』나 『요한 칼뱅(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시대(1517, 10, 31. 종교개혁일)에 혁혁한 공로를 세웠던 종교개혁자들까지도---, 그리고 또 다시 그때로부터 무려 500여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간 오늘에 이르러서도---, 우리는 여전히 무죄한 『아가서』를 두고, 『하나님과 이스라엘백성 간의 아름다운 사랑을, 청춘남녀의 신비로운 사랑에 비유하여 기록한 책으로 읽어야만 한다.』는 매우매우 독선적이고, 옹고집적인 망령의 손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자존심 상하게도 이 『아가서』에 무려 2500년 동안이나 덮어씌워놓았던 폭압적 굴레를 용감하게 깨부수기 시작한 쪽은 우리 기독교가 아닌 유대교였다. 수천년에 걸쳐 구약성서를 기록한 그들 속에 잠재돼 있던 유연한 사고와 풍부한 상상력의 유전자(DNA)가 잠에서 깨어난 것일까? 아니면 랍비 『아키바』와 『미드라쉬』의 충고를 긍정적으로 수용한 학문적, 학자적 겸손한 태도를 회복한 때문이었을까?
5. 우리에게도 『아가서』에 대한 랍비 『아키바』의 선언과 『미드라쉬』의 지적을 무겁게 받아드려야 하는 이유가 있다. 유대인들은 우리 기독교인들과 달리, 이 『아가서(雅歌書)』를 일 년에 한번은 반드시 읽는 날이 있다. 바로 『유월절축제일(이스라엘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원―해방―받은 날, 우리나라의 8.15광복절 같은 날)』이다. 그들은 유월절 축제의 첫째 날에 의례적으로 유대교 회당(교회당)에 모여, 낭독자의 낭랑한 목소리로 이 『아가서』를 듣는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왜 그들은 『아가서』를, 다른 절기가 아닌 유월절축제의 첫째 날에 읽는 것일까? 기독교회는 지금도 여전히 『아가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두고 학자들 사이에 격론을 계속하고 있는데---, 그나마 다행인 점은 시간이 흐를수록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학자들의 해석방법에 동의하는 학자들이 눈에 띠게 줄어들고, 유대교의 새로운 아가서 읽기에 동의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학자들이 많아지고 있긴 하지만---. 따라서 『아가서에 등장하는 남성은 하나님이요, 여성은 이스라엘 백성이라거나, 혹은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된 교회로, 대입하여 읽어야만 한다.』는 기존의 『알레고리(allegory, 풍유적, 우화적)적 해석』의 틀에서 벗어나, 조금은 낯 뜨거울지라도 순수한 청춘남녀의 사랑을 노래한 서정시, 내지는 아름다운 애정 노래로 읽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지만---.
6. 우리기독교는 말할 것도 없고, 유대교까지도, 『아가서(雅歌書)』를 정경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던 결정적 이유는 『이 책이 거룩하지 못하다』는 생각, 즉 『성(性), 혹은 성적(性的)인 것은 거룩하지 못하다.』는 고정관념과 편견 때문이었다. 이런 눈으로 아가서를 읽은 어른들(기성세대, 편협한 생각이 굳어버린 늙은 지혜자들)이 말했다. 『민망할 만큼 낯 뜨거운, 세속적이고 통속적인 젊은이들의 사랑 노래가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안에 들어올 수 있는가? 성스럽지 못하게---.』 그들은 쓰디쓴 비웃음과 함께, 조소와 조롱, 비아냥과 날선 비판을, 『(무죄한)아가서』에 무자비하게 퍼부었다. 한 여름의 폭우처럼----.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의 경계(기준)를 성경적인 목소리가 아닌 세상 사람들의 목소리에서 찾은 것이다.
6-1. 구약학자들이 레위기서의 핵심구절로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19:2).』는 구절을 꼽는다. 레위기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너희 하나님인 나 여호와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하시는 말씀을 담은 책이라고 학자들이 이해하고 있다. 그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 (1)제사를 드리는 일이 필요했고, (2)이러저러한 여러 가지 부정(不淨)함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율법의 말씀들(정결법)들이 필요했다. 그런데 정작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인가?』에 대하여 매우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말씀하고 있는 레위기19장의 말씀을 읽어보면, 우리들을 몹시 놀라고 당황하게 하는 말씀들이 무더기로 기록돼 있다. (1)거룩한 삶을 사는 것의 첫 번째 말씀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레19:3)』는 말씀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 할 첫 번째 일로 우리들이 예상하는 말씀이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공경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거룩한 삶은 새벽부터 성전―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말하는 것은 수악(首惡)한 거짓말이다. 바른 표현은 예배당이다.―에 나와, 새벽기도를 드리고, 성경 말씀을 읽고, 금식하고, 전도하는 소위 『성전중심의 신앙생활』을 거룩한 삶이라고 가르치는 거짓말쟁이 목사들과 매우, 아주 크게 다르다. 이 구절만이 아니다. 레위기19장을 읽어보시라. 총 36구절 중,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 행해야 할 일들에 대한 언급은 아무리 많이 잡아도 9구절이 넘지 않는다. 나머지 모든 말씀들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19:18).』는 말씀을 중심으로 사람과의 관계에서 행해야 할 일들을 언급한다. 이러한 사실에서 증명되는 바가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세속적인 것과 거룩한 것의 경계는 하나님중심의 일과 세속적일 일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거룩과 세속을 나누는 기준(분기점)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창조목적에 협력하는 삶이다.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와 인간을 포함한 피조물들이 평화롭고, 안전하고, 자유롭게(샬롬=행복), 사랑할 수 있는 세상, 그리하여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도록,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그 일에 봉사하고 헌신하는 삶이다(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써의 삶을 살아가는 것). 우리 한국교회 신자들의 눈으로 볼 때에는 전혀 성경적이 아니겠지만---.
6-2. 플라톤(Platon, BC.428-348)으로 대변되는 헬라철학자(세상의 지혜자)들은 물론이고, 불교를 비롯한 세상의 모든 종교는 출발할 때부터 인간의 욕망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절제』가 아닌 『금욕주의(禁慾主義)』는 헬라철학과 이방종교가 누대(累代)에 걸쳐 강조하고 또 강조하며 가르쳐온 공통된 진리이다. 그들은 『인간의 욕망(욕구)』뿐만이 아니라, 그것의 근원과 원인인 『인간의 육체(몸)』 자체를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하고, 아름답고, 축복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플라톤주의자들의 말이다. 『영혼은 육체라는 집 속에서 산다. 육체는 영혼의 옷이다. 아니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다. 본래 맑고, 선하고, 진실한 영혼은 육체의 여러 가지 추잡한 욕망 때문에 더러워지고, 악해져서 타락한다. 그래서 선하고 아름다운 영혼은 추악한 육체의 감옥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친다. 그렇다면 죽음이란 무엇인가? 영혼이 육체의 감옥에서 드디어 해방되는 것이다. 봄이 오면 겨울옷을 벗어 버리듯이, 우리의 영혼도 육체의 옷을 벗어야 하는 때가 온다. 그것이 곧 죽음이다. 죽음은 영혼이 육체의 감옥에서 해방 받는 날이며, 이별하는 날이다. 영혼이 오랫동안 살고 있던 낡은 집을 떠나는 축복된 날이다. 죽음과 더불어 영혼은 육체의 낡은 옷을 벗어 버리고, 「저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영원불변의 완전한 세계)」에서 새로운 옷을 입고, 새로운 생을 다시 시작한다. 그러므로 죽음은 신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것은 성경의 목소리가 아니다. 플라톤주의자(헬라철학자)들의 주장이다. 불교의 목소리도 비슷하다. 『육체(몸)에서 솟구쳐 오르는 모든 욕망, 곧 오욕(五慾, 식욕, 성욕, 수면욕, 재물욕, 명예욕)과 칠정(七情, 기쁨, 분노, 슬픔, 즐거움, 사랑, 미움, 욕심)이 인간을 고통과 불행의 늪에 빠뜨린다. 따라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요, 해탈이다. 따라서 죽음은 축복이다. 육체의 욕망에 순응하는 것은 거룩하지 못하다.』 어느 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은가? 그것은 당신의 자유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뜻)과 말씀까지 바꾸려하지는 말자. ( 다음에 이어서---)
6-3. 고대시대부터 인간 사회에 만연되어 있었던 인간의 육체(몸)과 욕망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생각은 이스라엘사람들에도 낯선 것이 아니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율법을 받기 전에, 모세를 통해 「너희는 이틀 동안(오늘과 내일) 너희를 성결케 하라.」는 요청의 말씀을 듣는다(출19:9-10). 하나님나라의 율법(헌법)을 받을 몸과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요구다.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두 가지 말씀이 주어진다. (1)『너희 옷을 깨끗이 빨아 입으라(하나님의 명령, 출19:10).』 (2)『남자들은 여자를 가까이 하지 말라(모세의 명령, 출19:15).』. 우리들이 출애굽기 19:9-11절의 말씀을 주의 깊게, 꼼꼼히 읽어보면 발견하게 되는 사실인데, 두 번째 조항, 즉 「이틀 동안 성관계를 금함으로써 너희를 성결하게 하라」는 요구는 하나님이 아닌 모세가 덧붙인 조항이다. 이 조항을 하나님의 율법(거룩한 율법)을 받아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가 추가 했다는 사실은 매우 시사적(示唆的)이면서도 흥미롭다. 당시가 약 BC.1400여년 경이다. 여러 세대에 걸쳐 애굽 땅에서 사는 동안 그들도 애굽인의 가치관이 몸에 배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유대인들 역시 당시 이방인들과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성관계를 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받을 수는 없다. 그것은 자신들을 부정하게 한다는 생각 말이다. 우리나라 심마니들이 산삼을 캐러 가기 전 여자와의 잠자리를 금하는 것처럼---.
6-3. 이런 맥락에서 추측해 보면 『아가서』를 성서 안에 포함시킬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짓는 마지막 정경화 작업에서 이스라엘 랍비들 중 상당수가 얼마나 강하고 격렬하게 반대하며 반발했을까가 상상이 된다. 더욱이 그들이 『아가서』를 정경(성경)에 포함시키는 것에 대하여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며, 냉소적이고 자조적인 비평을 쏟아냈던 것은 단지 「성(性), 혹은 성적(性的)인 것은 거룩하지 못하다」는 편향적 억지와 아집 때문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아가서』에는 비록 은유적으로 표현되었다고 하지만, 아주 충분히, 그리고 매우 위험한 수위의 노골적인 표현들이 오롯이 담겨 있다. 또한 그들이 아가서를 정경에 포함시킨 이후에도, 꽤 긴 기간 동안, 『19금 빨간 딱지』를 붙여 미성년 자식들이 읽지 못하도록 결정한 것도 공감이 된다. 이해를 돕기 위해, 몇 대목만 소개한다. 『아가서는 시(詩)요, 노래다.』 그러므로 상상력을 발휘하며 연애에 빠진 연인들의 감정을 실어 읽어야 제 맛이 난다. 이런 글을 아침부터 읽게 해 죄송한 마음이 없지 않지만---, 그러기에 더더욱 우리는 아가서를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읽을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그들이 왜 19금 빨간 딱지를 붙여놓은 이 책을, 유월절축제일 첫날에 회당에 함께 모여 읽었는지를---?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새롭게 마음에 아로새겨 넣은 하나님의 목소리와 메시지는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6-4. 『아가서』가 읊고 있는 사랑은 결코 남성 주도적이 아니다. 오히려 남성보다 여성이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다.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도 여자는 요조숙녀(窈窕淑女)여야 한다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생각이야 말로 남성중심의 유교적이고, 가부장적 사회가 낳은 악폐(惡弊)다. 하나님은 적어도 사랑하는 일에 관한 한 남자보다 여자가 더 우월하고 앞선 존재로 지으셨는지도 모른다. 『그대 만일 나를 사랑하려거든, 오직 사랑하기 때문에만, 나를 사랑해 주오.』라고 노래했던 『브라우닝(Elizabeth Barrett Browning, 1806-1861)』의 말대로, 『깊은 사랑, 몸과 영혼(전인격)이 온전히 하나가 되는 사랑은 육체로만이 아니라 (영혼이 담긴)가슴과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에 감성과 상상력이 풍부한 여자가 사랑을 더 잘 한다.』는 말이 옳을 것 같다. 그래서일까? 『아가서』도 사랑을 갈구하는 여성의 노랫말로 시작한다. 시작부터가 매우, 아주 뜨겁다. 심장병을 앓지 않도록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읽으시라!!! 심장이 약한 분은 제발 정지하시라. stop. please~~~.
6-5. 『나는 님의 것, 님은 나의 것(2:16), 나에게 키스해(입 맞춰) 주세요. 숨막힐 듯한 님의 뜨거운 입술로---, 님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더 달콤하고, 님에게서 풍기는 향긋한 내음은 향기름보다 더 향기롭습니다. 님이여, 나를 데려가주세요. 어서요. 님의 침실로---(아가1:1-4, 사역)』. 이렇게 시작된 여성의 노래는 점점 더 진한 핑크빛으로 물들어간다. 『나의 사랑, 멋있어라. 나를 황홀하게 하시는 그대여! 우리의 침실은 푸른 풀밭이라오(아가1:17)--- 님이여, 내게 건포도 과자를 주세요. 좀 더 힘을 내게요. 사과도 좀 주세요(건포도와 사과는 정력제). 기운을 좀 더 차리게요. (밤낮없이) 사랑하다 지쳐 나는 그만 병이(몸살) 들었다오.--- 내 잇몸과 입술을 거쳐서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이 포도주(침,타액)를 사랑하는 내님에게 드려야지. 나는 님의 것, 님께서 그리워하는 여인은 오직 나 한 사람.--- 님이여, 가요. 우리 함께 들(또 다른 침실)로 나가요. 나무 숲속(아무도 없는 은밀 그곳)에서 함께 밤을 지새우며 사랑해요. 그리고 이른 아침에 포도원으로 함께 가요(밤새 사랑한 님에게 이른 아침에 또 다시 사랑을 하자고 속삭이는 말. 포도원은 여자의 몸의 비유). 포도 움이 돋았는지, 포도 꽃이 피었는지, 석류꽃(포도원에 웬 석류꽃일까?)이 피었는지---, 함께 보러가요. 거기에서 나의 사랑을 님에게 드리겠어요. 자귀나무(핑크빛 긴 수술을 머리털만큼이나 많이 피워내는 향기가 짙은 콩과 식물나무, 여성의 은유)가 향기를 내뿜어요. 님께서 문을 열고 들어오면 온갖 열매 다 있어요. 햇것도 해묵은 것도, 님이여, 내가 님께 드리려고 고이고이 아껴(간직해) 둔 것들이라오(자신의 순결을 바치겠다는 속삭임).』
6-6. 아직도 심장이 정상적으로 뛰고 있다면, 이번에는 남성이 부르는 달콤하고 감미로운 사랑의 노래를 들어보자. 『아름답고 아름다워라, 나의 사랑, 나의 님이여, 그대는 가시덤불속에 피어난 나리꽃(백합의 한 종류)이어라. 너울 속 그대의 눈동자는 비둘기 같고, 그대의 머리채는 길르앗 비탈을 내려오는 염소떼 같고, 그대의 이는 털을 깎으려고 목욕하고 나온 새하얀 암양떼 같구나.----- 그대의 입술은 붉은 실 같고, 그대의 입은 한 송이 아름다운 꽃 같구나. 너울 속 홍조 띤 볼은 반으로 쪼개 놓은 석류 같고, 그대의 쭉 뻗은 목은 무기를 두려고 만든 다윗의 망대 같구나. 그대의 젖가슴은 나리꽃 밭에서 풀을 뜯는 한 쌍 사슴 같고, 쌍둥이 노루 같구나. 그대의 늘씬한 몸매는 종려나무 같고, 너의 허리는 나리꽃을 두른 밀단 같으며, 너의 다리는 숙련공이 공들여 깍은 패물(佩物)같구나.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나는 몰약산으로 가려 하네. 유향언덕으로 가려 하네(이 구절의 「몰약산」과 「유향언덕」도 여성에 대한 비유적 표현. 상상에 맡긴다.)」.--- 오, 나의 귀엽고 아름다운 그대, 나의 사랑하는 님이여, 그대는 흠잡을 데가 하나도 없구나.----- 아름다운 나의 신부야, 그대는 새벽처럼 밝고, 보름달처럼 훤하고, 해처럼 눈부시고, 깃발을 앞세운 군대처럼 장엄하구나. 그대의 입술에서는 꿀이 흘러나오고, 그대의 혀 밑에는 꿀과 젖이 고여 있다.--- 나의 님은 문 잠긴 동산, 덮어놓은 우물, 막아버린 샘, 그대의 동산(몸)에서는 석류와 온갖 맛있는 과일, 「고벨꽃과 나도 풀, 번홍꽃(향기를 듬뿍 머금은 장미와 백합화같이 하얗고 빨간 예쁜 꽃들)」, 창포와 계수나무 같은 온갖 향나무, 몰약과 침향같은 온갖 귀한 향료들의 향기가 나고, 그대의 코에서는 잘 익은 능금냄새가 나는구나. 그대는 동산 안의 샘, 생수가 솟는 우물, 레바논에 흐르는 시냇물(사랑에 갈급한 남자의 목을 축여주는 샘, 우물, 시냇물도 은유적 표현)이어라(아가4:1-15 사역. 아가서 곳곳에서 발췌한 시구들을 적절히 배치하여 편집했음).』.
이것이 아가서의 진면목이다. 아직도 아가서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혀지는가? 『아가서는 수백번을 더 읽어 본다하더라도 퇴폐적인 연애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절감하게 되는 책』이라고 비판했던 3C의 한 교부의 혹평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가서』를 유대인들은 왜 굳이 정경(성경)에 포함시켰을 뿐 아니라, 해마다 유월절축제첫날이 오면, 이웃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회당에 모여 낭독자의 목소리로 들었을까? 낯 뜨거운 연애시에 불과한 이 아가서를----. (다음 글에서 계속---. 다음 글에서 끝을 맺겠습니다.)
7. 이제 『아가서』에 대한 긴 글을 맺기 전에 몇 가지를 정리해야 할 것 같다. (1)왜, 유대인들은 『아가서』에 『솔로몬의 아가(The most excellent song of Solomon, ―히브리어도, 최상급)』라는 부제(副題)를 붙여 놓았을까?(아가1:1, 8:11). (1)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아가서의 저작권을 굳이 솔로몬에게 돌린다. 비록 단어와 문체와 상당수의 내용이 후기 시대(BC.500년경)에 첨가 된 것임을 말해 주고 있음에도---. (2)그들은 이 책의 저작권을 솔로몬에게 돌림으로써 『아가서』를 『지혜서 중의 한 권의 책』에 포함시켜, 후손들이 『아가서』를 시가서(詩歌書=시편))가 아닌, 『잠언』, 『전도서』와 함께 『지혜서』로 읽게 했다. 구약신학의 대가 『브리바드 차일드(,Brevard S. childs)』는 그의 저작 『구약정경개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유대인들은 모세가 율법의 원천(아버지)이요, 다윗이 시편(시가서)의 원천(아버지)이었듯이, 솔로몬은 지혜 저작의 아버지(원천)로 추앙받길 원했다.』. 본디 이스라엘 내에서 지혜의 기능은 교훈적인 것이며, 철학적인 것이 아니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는 그 사회를 든든히 지탱해주고 보호해주는 기둥들이―제의(제사)와 율법과 예언이라는 전통적인 신앙적 가치체계― 있었다. 그런데 그것들에 의지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인간의 지혜(이성)로, 하나님의 피조세계와 그 안에서 얼어나는 인간의 경험에 관하여 성찰하여, 질문하고, 그 물음에 적절한 대답을 찾아내어 설명하려 노력했다. 그 책이 『지혜서』다. 그런데 『아가서』를 그 지혜문학의 범주에 포함시킴으로써, 1C당시 로마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던 헬라철학의 심장부에 핵폭탄을 터뜨린 것이다.
7-1. 1세기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여전히 전 세계, 특히 기독교세계는 『헬라철학(플라톤의 2원론)』이 지배하고 있다. 『기독교진리』라는 탈을 쓰고서---. 유대인 랍비들이 『아가서도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요, 거룩함 중의 거룩함을 간직한 책』이라는 결정을 내린 1C 당시의 로마제국은 100% 헬라철학이 왕 노릇한 세상이었다. 당시 『얌니야회의』에 참석했던 유대인 랍비들 중 상당수까지도 『거룩』과 『세속』, 곧 『세속적인 것』과 『거룩한 것』을, 『영(이데아=Idea, 본질, 본체, 형상이 없음)과 육체(그림자, 물질, 형상)』를 기준으로 나누었다.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은 영원불변하다. 그러므로 선하고 거룩하다』, 그러나 『물질적인 것, 형상(형체, 몸)을 가진 것은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아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낡아지고, 썩어지다 소멸한다. 그러므로 형체를 가진 물질적인 모든 것들은 천하고 악한 것이며, 세속적인 것』이라는 플라톤의 2원론철학의 명확하고 뚜렷한 판별 기준이 로마세계의 보편적인 주류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이데아의 세계(이상세계, 관념적, 사상적 세계, 영원불변의 세계)가 본질이요, 현상세계(감관세계, 우리 오감으로 감각되는 세계)는 이데아를 본떠 만들어진 형상(모조품)에 불과하다』는 플라톤(『티마오스(Timaeos)』에서 주장한 진리)에 대해, 1C 유대인 랍비들이 『No!!!』라고---.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라고---. 『너희들이 틀렸다---』고 용감하게 반기를 든 것이요, 그 헬라철학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여러 날 동안의 치열한 논쟁과 토론, 그리고 깊은 기도와 묵상 끝에, 아가서를 『거룩함 중의 거룩함을 담은 하나님의 말씀』, 곧 정경에 포함시킴으로써---.
7-2.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그들이 아가서를 정경에 포함시킴으로써, 그들은 (1)『하나님은 우리의 영혼만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도, 선하고 거룩하게 만드셨다.』. (2)『하나님은 인간의 영혼만이 아니라 몸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 (3)『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거룩한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남자와 여자, 여자와 남자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도 똑같이 거룩하고 선하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그리워하며, 하나님을 닮고 싶어 하고, 그분과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간절한 욕망을 선하고 거룩한 것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최고의 걸작품인 인간(여자와 남자)이 서로의 아름다움과 매력에 흠뻑 빠져, 서로를 찬양하고, 그리워하고, 갈망하며, 마침내 그와 온전히 한 몸(한 인격)을 이루는 육체적 사랑도 거룩하다. 『죽음조차 이기는 에로스의 사랑』, 그 사랑의 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만큼이나, 크고 강하다. 『지구의 모든 바닷물을 끌어와도, 땅의 모든 강물을 끌어와도 결코 끌 수 없고, 잠재울 수 없는 청춘남녀의사랑』, 『봄날의 들불보다 더 「맹렬하게(원어성경은 ‘하나님의 불’과 동일한 단어를 사용했다.)」 활활 불타오르는 사랑』, 그 사랑을 할 수 있는 영혼과 육체(육체의 욕망까지도)를 하나님이 주셨다.
7-3. 인간이 세상에 사는 동안 가장 헌신적이고, 가장 열정적으로, 상대방의 기쁨과 행복을 위해 자신을 가장 온전히 희생하게 하는 에로스의 사랑이,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감동적이며, 얼마나 숭고하고? 얼마나 거룩한가? 게다가 그 사랑의 기쁨과 희열과 환희와 쾌락은 진정으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이요 선물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성(性)은 지극히 성(聖)스러운 것.』이라는 랍비 『아키바』의 주장은 백번을 생각해도 하나님께서 구신약성경에서 힘주어 말씀하시고 싶어 하시는 진리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얼마나 감탄할 만큼 아름답게 지으셨고, 남자를 얼마나 멋있고 매력적이게 지으셨는가? 그 몸으로 세상에서 가장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사랑―둘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사랑―을 하게 하셨다. 그 사랑이야 말로 『거룩함 중의 거룩함』이 아닌가? 더군다나 하나님은 그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식들(아담, 사람)들이 태어나게 하신다. 하나님의 창조계획을 완성할 수 있는 하나님의 협력자(파트너)들인 인간을---.
7-4. 그런데 이 축복은 솔로몬왕만이 누리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그 사랑을 자유롭게, 마음껏 누릴 수 있고,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하나님은 그런 상태의 세상을 『샬롬=평화』라고 부르신다. 애굽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뻐하는 유월절축제의 첫날밤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아가서를 읽는 전통을 만들었는지 이해가 되는가? 그들이 이 땅위에 이룩해야 할 나라는 이런 나라―청춘남녀들이 마음껏,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는 나라―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나라를 만들라는 것이다. 그와 반대되는 나쁜 나라, 곧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시절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를 만드는 포악한 통치 권력자들(지독한 중노동에 시달려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나라, 그래서 자식을 낳지 못하게 하자는 바로왕과 주69시간 노동을 말하는 윤대통령은 닮은 꼴)에게 하나님은 적이 되신다. 놀라지 말라. 그 하나님의 대적이 누구였을까? 바로 『솔로몬왕』이다. 그 시대에 이스라엘나라에게 정복당한 주변 모든 나라의 백성들은 솔로몬왕의 노예였다. 이는 솔로몬왕이 그의 지혜로, 약속의 땅 안에 이스라엘 나라의 번영과 안전을 위해 『또 하나의 애굽 제국을 건설했다』는 의미가 된다(왕상9:17-22). 오호 통재라~~~!!! 솔로몬왕의 시대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영광과 자랑의 시대였을지라도, 그들에게 정복당한 나라의 민족들에게는 제2의 애굽왕의 혹독한 억압과 강포에 시달린 노예생활을 했던 시대였다는 반성적 목소리가 아가서에서 들려오지 않는가? 예수 믿는 놈이나 안 믿는 놈이나---.
8. 1세기 중반에 시작된 기독교는 그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무려 2000년 넘게, 『성경(聖經)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인간을 포함한 피조세계)을 구원하시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얼마나 지속적으로(?) 얼마나 성실하게(?) 일해 오셨는가를 말해주는 책으로, 즉 「구속사적 성경 읽기의 관점」으로, 읽어야 한다.』는 학자들의 고정관념과 편견이 지배해왔다. 이 구속사적 관점으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주장의 뿌리는 유대교였다. BC.1400년경부터(모세오경, 출19-40장, 시내산 율법과 성막=증거막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모세가 기록하기 시작한 때부터) 성경은 기록되기 시작했다. AD.1C에 이르기까지 상당수의 이스라엘 랍비들은 줄곧, 성경은 『구속사적 성경읽기』, 곧 『약속(約束)과 성취(成就)』라는 구도 하에서 읽어야 한다고 고집스럽게 주장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생명을 잃고 바짝 말라비틀어져 뻣뻣하게 굳어버린 고목 같은 옹고집쟁이들은 아니었다. 1000년 넘는 기나긴 세월 동안 꾸준히 제기 되어 온, 주류들을 당혹케 한 비주류들의 목소리―구속사적 관점으로 성경을 읽는 것보다 창조신학적 관점으로 읽는 것이 옳고 합당하다―에도 귀를 기울였다. 그 단초를 제공한 책들이 지혜서요, 그 중에서도 특히 『아가서』가 그 선봉에 섰다. 지혜서를 구속사적 관점으로 읽으면 해석이 안 된다. 지혜서에 속죄제사가 나오는가? 아가서에는 속죄제사는 고사하고 아예 하나님의 이름자체가 나오지 않는다. 만일 성경을 구속사적 관점으로 읽어야 한다면 지혜서들, 특히 아가서는 성경에서 잘라내야 했다.
8-1. 창조신학적 관점으로 성경읽기의 옳음은 『신학(神學)』이 아닌, 오로지 『구신약성경에 뿌리박은 구원론』을 설명하는데서 입증된다. 영혼구원(靈魂救援)은 성경의 주장도 가르침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만이 아니라 육신도 동일하게 선하고 거룩하게 지으셨고,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원하시는 것만큼 우리의 육신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 『초대교회가 증거한 복음의 핵심 메시지는 「십자가(十字架)」와 「부활(復活)」이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육신이 부활할 것이라고 성경이 얼마나 목에서 피가 나도록 힘주어 강조하여 외치는가? 글이 길어졌습니다. 영혼구원과 전인구원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내용들은 다음으로 미루어야겠다. 그럼에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영혼구원(靈魂救援)이 헬라철학의 깃발이라면, 전인구원(全人救援)은 『구‐신약성경』이 줄기차게 흔들고 있는 기독교복음의 깃발이다.』 긴 글을 성실하게 읽어 주신 분들께 하나님의 평화가 넘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