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기(知己)
길은 눈에 덮여 있었고 차가운 바람이 뼈를 에일 듯 휘몰아치고 있었으나
심랑과 주칠칠은 고통스럽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들이 한참을 달려갔을
때, 바람에 실려 고기를 굽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주칠칠이 눈을 반짝
빛내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이 부근에 어쩌면 도둑 고양이가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아직 날이 밝지도
않았는데 고기를 굽는 것을 보니 말이에요.
심랑이 말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이런 엄동설한에 황폐한 교외에서 고기굽는 냄새가
나는 게 당신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소?
뭐가 이상하다는 거죠? 도둑 고양이는 어느 곳에나 다 있는 법
아닌가요?
심랑은 어이가 없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고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더니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그 쓰러져 가는 사당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개방 제자들의 발자국도 바로 그 사당 앞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주칠칠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고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이상하군, 정말 이상한데.......
당신은 이제야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소?
고기 굽는 냄새는 이 사당 속에서 풍겨나오고 있는 것 같은데 도대체
누가 고기를 굽고 있는 걸까요? 개방 제자일까요? 만약, 개방 제자라면 그
녀석들이 어떻게 여기서 한가로히 고기나 구워 먹을 정도로 여유가 있다는
거죠?
심랑이 신중하게 말했다.
원래 위험한 일일수록 겉으로는 안전하게 보이는 법이오. 당신 눈에
보이는 여유와 한가로움 같은 것은 어쩌면 우리를 유인하기 위한
함정일지도 모르오.
주칠칠은 그래도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뚱거리며 말했다.
고기 한 덩어리에 무슨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거죠? 그 고기에
독이라도 발라 놨다는 건가요? 만약 독이 발라져 있다면 또 어때요?
우리가 먹지 않으면 그걸로 되지 않겠어요?
심랑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은 어떤 때는 확실히 상당히 똑똑한 편이오.
주칠칠이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어떤 때는 상당히 멍청하다는 거죠?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번에는 당신이 제대로 알아맞췄소.
주칠칠은 여전히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말했다.
이 세상에 똑똑한 사람은 당신 혼자 뿐이에요. 천하의 똑똑함이란
똑똑함은 모두 당신에게만 있는 것 같아요.
그녀는 겉으로는 화가 난 듯 말을 하고 있었으나, 한동안 그녀를
야단치기만 했던 심랑의 얼굴에 웃음이 떠오르는 것을 본 그녀의 마음은
날아갈 듯 기뻤다.
이때, 심랑은 주칠칠의 기분을 모르는 듯 그 사당을 뚫어질 듯 쳐다보고
있었다. 주칠칠이 그 모습을 보고 그를 팔굽으로 툭 치면서 불렀다.
이봐요!
심랑이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왜 그러시오?
들어가요. 여기서 기다릴 수만은 없는 것 아니겠어요? 사당 안에 무슨
매복이 되어 있거나 함정이라고 해도 들어가서 살펴봐야 되지 않겠어요?
심랑은 그녀를 슬쩍 바라보고 다시 사당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내가 들어갈 테니까 당신은 여기서 나를 기다리도록 하시오.
주칠칠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무슨 말인가를 할 듯 했으나, 심랑의 눈을
바라보는 순간 속으로 탄식을 하며 억울한 듯 고개를 숙이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
좋아요,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심랑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럴 때는 아가씨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오. 만약 사당 안에 무슨
일이 있다면 내가 당신에게 곧 알리도록 하겠소.
말을 마친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주칠칠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그를 불러 세웠다.
이봐요!
심랑이 눈썹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봤다. 주칠칠이 말했다.
나를...... 나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되요.
심랑은 마침내 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사당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심랑의 뒷모습을 보면서 주칠칠은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그녀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사당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는 심랑이 사당 안에서 놀람에 찬 부르짖음이나, 노한 외침 혹은
왁자지껄한 소리, 무기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심랑이 사당으로 들어간 지 한참의 시간이 흘렀으나 사당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밖에는 여전히 세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얼어붙은 대지는 죽은 듯한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주칠칠은 입술을 깨물고 두 주먹을 부르쥔 채
미칠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또 얼마의 시간이 흘렀으나 사당
안에서는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려 오지 않았다. 도대체 사당 안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이란 말인가?
심랑은 도대체 사당 안에서 어떤 상황에 빠져있단 말인가? 혹시
왕련화에게 사로잡힌 것은 아닐까?
(왕련화! 네 녀석이 만약 심랑을 죽였다면...... 심랑을 죽였다면 나도
더이상 살고 싶지 않아.......)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주칠칠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참지 못하고 사당을
향해 달려 들어갔다.
어두침침하던 하늘은 이미 희부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어슴프레한 빛이
허물어져 가는 사당 안을 비추자 그 사당 안은 더욱 음산하고 괴기에 넘쳐
흘러 보였다. 사당 안에 피워 놓았던 모닥불은 다 사그러들고 있었다.
모닥불 위에 얹어 놓았던 고깃덩어리도 불길이 사그라져 가고 있었기
때문에 시커멓게 타들어 가지 않은 채 여전히 그대로 걸려 있었다. 사당
안에 걸려 있던 퇴색된 휘장들은 이미 찢겨져내려 사당 안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다. 그리고 신단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뒤집혀져 있었다. 그리고
모닥불과 신단 사이에는 시커멓게 거무스레한 물이 고여 있었다.
그것은 물이 아니고 선혈이었다. 그러나 방금 사당 안으로 들어간 심랑의
모습은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사당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귀신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심랑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미 왕련화에 의해 당했단
말인가? 주칠칠은 놀람에 차 부르짖었다.
심랑!
날카로운 부르짖음 소리는 죽음과 같은 정적을 깨뜨려버렸다.
이때였다. 갑자기 뒤집혀진 신단 아래서 머리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그것은 바로 심랑의 머리였다. 심랑은 신단 아래서 머리를 쳐들어
주칠칠을 힐끗 바라보고는 재빨리 다시 신단 아래로 고개를 숙여버렸다.
주칠칠은 나는 듯이 그쪽으로 달려들어가 한 팔로 심랑의 몸을 끌어안고
기쁨과 놀라움과 원망이 섞인 소리로 말했다.
여기에 계셨군요. 아무 일 없었군요. 왜 저에게 한 마디도 말을.......
그러나 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심랑은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냉랭한 목소리로 짤막하게 말을 했다.
나가시오 !
주칠칠은 깜짝 놀라 심랑의 목을 끌어 안았던 손을 얼른 풀었다. 여태껏
심랑이 그녀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이처럼 자신에게 냉정하게 대한
적은 없었던 것이다.
주칠칠은 심랑의 목을 끌어 안았던 손을 놓고 자신도 모르게 얼른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서는 두 줄기의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심랑은 여전히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홀린 듯 앞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주칠칠은
알 수 없었다.
일순간 그녀는 가슴이 차갑게 식어감을 느꼈다. 그녀는 나직히
중얼거렸다.
끝났어...... 끝났어...... 내가 이게 무슨 고생이지? 내가 무엇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거지? 왜 집에 가만히 앉아서 행복하게 살지 않고 이
사람을 쫓아다니면서 이런 고생을 하는거지? 이러한 모멸감을 참아야만
하는거지?
그녀는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좋아, 심랑, 당신이 나를 이렇게 밖에 대해줄 수 없다면 나는 영원히
당신을 보지 않을거야.)
그러나 그녀의 눈은 여전히 심랑에게서 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도대체 심랑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은지를 말할 수 없었다. 호방함으로
말하자면 웅묘아보다도 못했고 침착함으로 말하자면 김무망보다 못했다.
만약, 풍류와 준수함,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것으로 말하면
그는 왕련화보다도 훨씬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왠일인지 심랑 외에는 아무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심랑이
보이기만 하면 그녀의 가슴에는 기쁨이 넘쳐 흘렀으며, 환희로 가득찼다.
만약 한시라도 심랑을 보지 못하면 그녀는 조바심이 나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왜 저 사람은 나를 이렇게 대하는 거지? 그리고 나는 왜 저 사람을
이렇게 쫓아다니는 거지.)
일순간 그녀는 사랑과 원망이 가슴 속에서 동시에 일어나며 슬픈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울먹거리다가 참지 못하고 방성대곡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심랑, 심랑, 미워요 정말 미워요.
그러나 심랑은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앞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주칠칠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당신은 죽었어요 말좀 하세요.
그녀는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지며 갑자기 손을 들어 심랑의 얼굴을
세차게 후려 갈겼다. 그러나 심랑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 여전히 꼼작을
않은 채 앞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다만 주칠칠로 하여금 사랑과
원망에 지치게 만든 심랑의 뺨에 붉은 손바닥 자국이 하나 생겨났을
뿐이었다. 주칠칠은 조급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하여
마침내 그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통곡을 터뜨렸다.
심랑, 당신은 왜 저를 이렇게 대하는 거예요? 왜 그러는 거죠? 제발
죽여주세요. 더이상 살고 싶지 않아요.
그녀의 애절한 울음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간장이 녹아나는 듯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심랑은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얼마나 울었는지
마침내 그녀의 울음소리는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심랑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소? 이제 좀 괜찮아졌소?
주칠칠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의 얼굴에 일순간 희열이 지나갔다.
그러나 심랑은 또 이어서 김무망을 향해 말했다.
김 형. 괜찮소. 힘내시오.
심랑은 그녀에게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주칠칠의 얼굴에
일순간 떠올랐던 희열의 표정은 실망과 원망으로 넘쳐 흘렀으나 곧이어
놀람에 차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심랑의 앞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비로소 심랑의 앞에 한 사람이 엎드러진 채 누워있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김무망이었다. 김무망은 핏구덩이
속에 엎어져 누워있었다. 그는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얼굴은 마치
백짓장 같았으며 호흡은 이미 상당히 미약해져 있었다. 얼핏 보기에 그는
이미 다 죽어 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 사당 안에 언제 이런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김무망은 왜 또 이렇게 변해있단 말일가? 왕련화,
김불환은 또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주칠칠의 눈길은 김무망의 얼굴을
훑어내려가면서 그의 팔을 바라보았다. 그의 오른팔은 어깻죽지에서부터
싹뚝 잘려 나가 있었다. 거기에는 붉은 피가 범벅이 되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주칠칠은 너무나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비명소리를 내질렀다.
심랑은 오른손 바닥을 김무망의 가슴에 대고 내력을 주입하여 곧
끊어지려는 김무망의 목숨을 연장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주칠칠의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김무망, 김무망, 당신 어떻게 된 일이죠? 누가 당신을 이렇게 만들었죠.
그녀는 방성통곡을 터뜨리고 싶었지만 입술을 악물고 터져 나오려는
울음소리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두 눈은 마치 줄 끊어진
연처럼 끈임없이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가 김무망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김무망, 죽어서는 안 돼요. 제발 부탁이에요. 죽지 마세요.
그녀는 속으로 전심전력을 다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심랑, 부탁이에요. 제발 그 사람을 살려주세요. 당신이 그 사람을 살려낼
줄을 믿어요.
미약한 신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한 번, 두 번, 김무망이 마침내 미약한
신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심랑의 창백하고 침통한 그리고 짙은
그늘이 드리워진 얼굴에서는 땀방울이 흘러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무망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하자 그의
굳게 다물어져 있던 입가에 비로소 약간의 안도의 기색이 떠오르는
듯했다. 그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김무망이 마침내 다시
살아났던 것이다. 날은 이미 환하게 밝아 있었다. 점점 김무망의 호흡이
거칠어졌으며 가슴의 기복이 더욱 커졌다. 주칠칠은 두 주먹을 부르쥐고
입술을 악물었다. 그녀는 마치 전신의 기력을 다해 김무망과 더불어
죽음의 문턱을 빠져나오려고 애쓰는 듯한 모습이었다. 마침내 김무망이
눈을 떴다. 그러나 그의 눈에서는 지난날의 칼날처럼 날카롭고 예리한
눈빛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그는 흐릿한 눈을 들어 주위를 몇 번
훑어보더니 심랑의 얼굴에 눈동자를 고정시켰다. 그는 애써서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심, 심랑.......
심랑이 재빨리 그의 손을 들어 김무망의 입술에 손가락을 대면서 말했다.
김 형!아무 말도 하지 마시오. 걱정 마시오. 모든 게 다 잘 되었소.
김무망은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두 눈에서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감격과 안심과 기쁨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는 이미
죽음 속에서 다시 돌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평생의 지기라고
할 수 있는 심랑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입가에 일말의
안도의 웃음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는 또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방금
겪었던 그 싸움은 지금 이 순간 그에게는 마치 악몽을 꾼 것 같이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는 방금의 그 악전고투로 벌인 싸움이 상당히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고 생각되었다. 만약 방금의 그 싸움이 없었다면
심랑은 혹시 이순간 이미 왕련화의 간사한 계략에 말려 들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주칠칠도 길게 안도의 숨을 불어내 쉬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김무망, 괜찮으세요.
이때 갑자기 심랑이 "흥!"하고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그는 여전히
주칠칠에게 차가운 낯빛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칠칠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그녀의 머리를 김무망의 귓가에 갖다대고 가볍게
그를 불렀다.
김무망.......
그러나 심랑이 냉랭하게 말했다.
비키시오. 김 형을 귀찮게 하지 마시오.
주칠칠은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지며 재빨리 뒤로 물러서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제가 귀찮게 한 것은 아니잖아요. 저는, 저는.......
말을 하던 그녀는 마치 무엇을 생각해 낸듯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뒤지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몸을 이리저리 뒤지며 무슨 물건을 찾던 그녀가
마침내 은박지로 싼 조그마한 물건을 꺼내들고 기쁜소리로 외쳤다.
여기에 약이 있어요.
심랑이 다급하게 물었다.
무슨 약이오.
부상을 당했을 때 쓰는 약이에요. 듣건데 이건 황제가 사는 황궁에서
쓰는 약이래요. 우리 아버지가 상당한 고생끝에 얻어낸 약이에요. 제가
집을 나올 때 아버지 몰래 슬쩍 한 봉지 갖고 나왔어요.
심랑이 말했다.
이리주시오.
반은 상처 위에 바르고 반은 물에 타서 마시면 되요.
김무망은 약을 복용한 후에 얼굴색이 상당히 좋아져 있었다. 주칠칠은
사당 안에 공기가 차가와지는 것을 막기 위해 쉬지 않고 땔감을 장작불
속에 집어 넣어 모닥불을 활활 타오르게 만들고 있었다. 불빛 속에서 보는
김무망의 얼굴은 붉은 기운이 다시 나타난 듯하여 보였다. 그는 다시 눈을
뜨고 심랑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감격의 눈빛이 넘쳐 흐르고
있었으나 입으로는 한 마디도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간단히
심랑에게 말했을 뿐이었다.
잘 됐구려. 마침내 심 형이 왔구려.
심랑도 마침내 얼굴에 웃음을 보였다.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소. 제가 왔소이다. 김 형께서는 아직은 아무 말도 하지 마시오.
많은 말을 하게 되면 몸을 상하게 되오.
김무망이 웃으며 말했다.
안심하시오. 나는 이미 죽지 않을 자신이 있소.
그는 눈을 들어 사방을 훑어보더니 주칠칠을 바라보고 가볍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곧 얼굴에서 사라졌으며 그의 눈에는 다시 환한 기색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는 날카로운 소리로 말했다.
왕련화는 어디로 갔소,
심랑이 그의 말을 받았다.
그를 보지 못했소이다.
김무망이 원망스러운 소리로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 나쁜녀석.
주칠칠은 김무망을 바라보다 더이상 참지 못하고 물었다.
도대체 당신은 어떻게 그녀석에게 부상을 당하게 된거죠.
김무망이 말했다.
그녀석이 비록 나를 이렇게 부상시키기는 했지만 그녀석도 온전하지는
못했을 것이오.
이것은 도대체.......
그녀는 원래 '이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하고 묻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심랑을 쳐다보는 순간 그녀는 얼른 말을 바꿔서 말했다.
말을 많이 하면 몸을 해칠 우려가 있으니 그만 쉬도록 하세요. 몸이
완쾌가 되면 계속 말을 하도록 하세요.
김무망이 다시 심랑에게 말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일을 나혼자 가슴 속에 묻어 둔다면, 내가 더 괴로울 것 같소. 내가
말을 할테니 제발 들어주시오.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김 형께서 만약 말을 해도 괜찮겠다고 생각되면 말을 해보십시오.
김무망이 말했다.
내가 심 형과 헤어진 다음 객점에서 두 아가씨와의 사이에 일어났던 일은
전부 알고 계시겠죠? 제가 곧장 이곳까지 추적해 왔을 때 갑자기 고기
굽는 냄새를 맡게 되었고 곧장 이 사당 안으로 뛰어들었소. 그러나 이
사당은 바로 나를 유인하기 위한 함정이었소. 나는 사당에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계책에 말려들어 사로잡혔소.
주칠칠이 심랑을 바라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확실히 아무 일도 심랑을 속일 수는 없군요. 이 사람은 그 고기굽는
냄새를 맡자마자 금방 알아차렸어요. 이곳이 틀림없이 함정이라는
것을.......
심랑이 차갑게 그 말을 가로챘다.
끼어들지 마시오.
심랑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쓰던 주칠칠은 도리어 면박을 당하고 다시
눈에 눈물이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김무망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가슴이 저렸다. 그리고 얼굴은 후끈
달아 올랐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 그녀는 다시 김무망이 자신이 겪었던
일을 심랑에게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때 나는 이미 요혈을 제압당했소. 그녀석들은 내가 이미 그들의 그물
속의 고기이고 밥상 위에 올려진 국이라고 생각했었던 모양이오. 그래서
나를 앞에 두고 아무 거리낌 없이 이말저말을 하는 것이었소. 그때야 나는
비로소 왕련화 그녀석들이 상당히 잔인하고 간악하고 그리고 상당히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소. 그것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방대한 규모였소.
심랑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황련화 그 친구는 확실히 총명한 사람이오. 그러나 그 총명함이 도리어
그 친구를 망쳐놓는 것 같소.
김무망의 말은 계속 되었다.
후에 개방 삼로 중에 좌공룡이 사당으로 들어왔소. 좌공룡이라는
그녀석은 평소에 인과 의를 중시하는 도덕군자인 체 하지만 누가 그녀석이
이미 왕련화에게 매수당했다는 사실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소. 그녀석은
단지 개방 방주라는 자리 하나 때문에 왕련화와 한통속이 되어 있었던
거요.
심랑은 얼굴색을 변하면서 말했다.
서약우가 알고 있었던 비밀은 과연 왕련화와도 관계가 있었던 거군요.
김무망이 이상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서약우? 그가 도대체 무슨 비밀을 알고 있었다는 건가요?
심랑이 말했다.
그가 알고 있었던 비밀은 개방의 반란사실에 관한 걸거요.
그는 이어서 서약우가 어떻게 그들을 찾아왔으며, 또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 상세히 김무망에게 들려주었다. 심랑의 말을 다 듣고 난 김무망이
한참을 입을 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틀림없이 서약우 그 사람과 개방 삼로 등 네 사람은 바로 이 사당에서
밤을 보냈을 것이오. 밤이 한참 깊었을 때 왕련화 그 녀석이
나타났겠지요.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서약우는 내가 왕련화 그 녀석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렇게
큰 비밀을 발견하는 순간 그는 바로 나에게 알리기 위해서 우리를
찾아왔던 것 같소.
김무망이 말했다.
그러나 서 형은 또 어떻게 심 형께서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까요?
심랑이 말했다.
제가 생각컨데 틀림없이 좌공룡은 그 당시에 이미 왕련화의 심복이 되어
있었을 것이오. 내 행적에 대해서는 왕련화 입에서 말이 나왔겠죠. 그리고
틀림없이 서 형은 그곳에서 내가 어디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거요.
김무망이 말했다.
왕련화가 얼마나 생각이 치밀한 인간인데 서약우의 모든 일거수 일투족은
왕련화의 눈에서 벗어 날 수 없었을 거요.
바로 그렇습니다. 그의 행적은 이미 왕련화의 눈에서 벗어 날 수가
없었을 거요. 그렇기 때문에 그가 나를 찾아내기도 전에 이미 왕련화에게
부상을 당했던 것일거요. 그러나 어떻게 또 서 형이 왕련화의 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는지를 모르겠소.
주칠칠이 얼른 끼어들면서 말했다.
그때 왕련화는 틀림없이 다시 그 산 위에 있는 소굴로 돌아갔을 거예요.
그리고 우리를 해치려고 모든 노력을 쏟고 있었겠죠. 그렇기 때문에
서약우는 비록 부상을 당했지만 왕련화가 방심하는 틈을 타서 빠져 나올
수 있었을 거예요.
잠깐 말을 멈췄던 그녀가 다시 말을 이어서 설명했다.
서약우는 비록 왕련화의 손에서는 빠져 나올 수 있었지만 틀림없이 다른
사람이 감시하리라는 것을 알았을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대낮에는
행동하지 못하고 깊은 밤에 모든 사람들이 잠에 빠진 후에야 행동을 할 수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삼 경에 우리를 찾아왔던 것일 거예요.
김무망이 웃으면서 말했다.
최근 당신은 사태에 대한 분석능력이 매우 나아진 것 같구려.
그러나 심랑은 도리어 차갑게 말을 했다.
지금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것은 전체 대국을 얘기하는 것이오. 그런
자질구레한 자그마한 일들은 생각해볼 필요가 없소. 주칠칠의 추측이 비록
맞았다 할지라도 현재 우리가 처해있는 대국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소.
당신은 가급적 말을 적게 하는 게 좋겠소.
김무망의 칭찬하는 말에 기쁜 기색이 얼굴에 떠올랐던 주칠칠은 다시
심랑의 이러한 말에 얼굴색이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더이상
이곳에서 머뭇거릴 수가 없음을 느꼈다. 그러나 또 그곳을 얼른 뛰쳐
나가기도 난처했다. 김무망이 안스러운 눈길로 주칠칠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소이다. 주 아가씨가 얘기한 것은 사소한 일들에 불과하오. 왕련화가
그때 어디 있었던, 어떻든 이순간 그는 다시 나타났소. 서약우가 그순간
어떻게 왕련화의 손에서 도망쳐 나왔든 이순간 서 형은 이미 운명을
달리했소.
심랑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장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서 형이 목숨을 걸고 나를 찾아와서 말을 했던
왕련화의 비밀을 내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거요. 서약우는 헛되게 목숨을
버렸다고 얘기할 수가 있겠죠. 상당히 억울한 죽음이었소.
김무망이 침통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어떤 일은 비록 빤히 죽을 줄을
알면서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소. 그리고 그 일을 했을 경우 과연
이로움이 있는가 없는가는 그 일을 한다는 사실과는 다른 문제라고 할 수
있소. 서약우는 비록 자기의 목숨을 걸고 무용한 일을 했지만, 그는
인,의를 위해서 죽었으니 그의 죽음은 결코 헛되었다고 얘기할 수는 없을
거외다. 그의 죽음이 어찌 억울하다고 얘기할 수가 있겠소.
심랑이 얼굴색을 변하면서 말했다.
김 형의 금과옥조와 같은 말 가슴에 깊이 새겨 두겠습니다.
김무망이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방금 한 말은 생각나는 대로 몇 마디 해본 것에 불과하오. 심 형께서는
이미 그러한 일들을 하고 계시니 제가 더이상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심랑이 말했다.
죽음을 두려워하면 할수록 더 빨리 죽게 되는 법이오. 반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그럴수록 죽을 기회에서 살아나는 경우가 많은
법이지요.
김무망이 갑자기 대소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심 형의 그 말씀이 바로 금과옥조라고 얘기할 수 있소. 그 말을 명심하고
가슴에 새겨 두지 아니할 수가 없구려. 나 김무망이 방금 만약 죽음을
두려워했다면, 어쩌면 지금 이순간 이미 시체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죠?
심랑이 말했다.
왕련화와 그 친구가.......
김무망은 상당히 흥분한 듯해 보였다. 창백한 얼굴에는 이미 붉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는 심랑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말을 가로채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왕련화, 김불환, 좌공룡 등은 누구든 모두 이미 내가 금방 죽을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온갖 수단을 다해 나를 능욕했을 뿐만
아니라 내 앞에서 어떻게 심 형 당신을 해칠 것인가에 대한 계획까지도
서슴없이 얘기를 하는 것이었소. 나는 겉으로는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듯한 모습을 지어 보였지만 사실상 나는 이미 속으로 내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소."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왕련화 그 친구의 눈이 상당히 악독하고 날카롭다고 하지만 김형의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바까지야 알아낼 수 없었겠지요. 그리고 왕련화만이
아니라 세상의 누가 김 형의 마음 씀씀이를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이
있겠소.
그녀석이 비록 내 속을 엿볼 수 있었다 해도 그 당시의 내가 상당히
비분강개한 태도를 지어보이는 것이 일부러 지어 보였던 태도라는 것을,
그리고 또 꼼짝하지 못하고 그자리에 드러누워있는 것이 사실은 재빨리
몰래 일 수 있었음에도 가식적으로 취하는 행동이었다는 것을 알 수
없었을 것이오.
주칠칠이 다시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그러나 그 당시 당신은 이미 왕련화 그녀석에게 혈도를 제압당했던 게
아니었던가요?
김무망이 말했다.
그순간 내가 왕련화 그녀석에게 혈도를 제압당한 것은 매우 갑작스럽게
발생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피할 수 없었던 것은 사실이오. 그러나 혈도를
제압당하는 순간 나는 재빨리 몰래 운기를 했기 때문에 그녀석이 혈도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었던 거요.
심랑이 말했다.
해내(海內)의 무공명사들 중 만약 운기조식을 가지고 논한다면 이미
옛날에 대가라고 손꼽을 수 있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소.
아울러 형산회합 이후에 그는 더욱더 많은 성취를 이뤘을 게 틀림없소.
다만 놀라운 것은 김 형께서 시옥관 그 사람에게서 바로 그 운기조식하는
것을 배웠다는 사실이오. 시옥관이 자신의 절기를 그 수하에게
전수하였다는 사실이 나 심랑을 상당히 탄복하게 만드는구려.
김무망이 처참한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입을 열었다.
시옥관 그 사람이 선인이든 악인이든 그 문제에 관해서는 논하지 맙시다.
그렇지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시옥관에게는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고
사람을 제대로 쓸줄 아는 재주가 있소. 그리고 그 문하인들에게는 조금도
숨기는 법이 없소.
심랑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일대 효웅은 당연히 일반인들이 미치지 못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법이오. 만약 다른 사람이 미치지 못할 장점이 없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이
미치지 못할 악행을 저지를 수 있겠소. 아! 김 형께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나도 한시 바삐 그사람을 한 번 만나보고 싶소.
김무망이 놀랍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나 심 형 당신은 그사람을 상당히.......
심랑이 말허리를 잘랐다.
시옥관의 악독한 행위에 대해서는 더이상 참을 수 없소. 그렇지만 그
사람의 뛰어난 지혜와 능력에 대해서는 탄복할 수밖에 없소이다.
김무망은 더이상 쾌락왕 시옥관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한참을
멍하니 심랑의 얼굴을 바라보던 김무망이 말을 돌려 자기가 하던 말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비록 운기해서 혈도를 제압하는 왕련화의 손을 막을 수는
있었지만 왕련화의 지력은 확실히 대단한 것이었소. 나는 전신이 마비되는
듯한 기분을 느꼈소.
심랑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왕련화 그 친구 또한 오늘날의 효웅의 한 사람이라고 말을 할 수가
있겠죠.
김무망이 이어서 말했다.
내가 그들 손아귀에 잡힌 제물인 척 행동했던 데에는 내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어서였소. 첫째는, 시간을 벌어서 운기를 하여 마비된 전신을
회복시키기 위함이었고,둘째는 비밀을 엿듣기 위함이었소. 그리고 그
녀석들이 심 형 당신이 틀림없이 나타나리라는 것을 추측해냈을 때 나는
그곳에서 가만히 그 상태 그대로 심 형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가 같이
손을 쓸 생각이었소.
주칠칠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또 끼어들었다.
왕련화 그 녀석이 정말로 심랑이 이곳에 나타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건가요.
김무망이 말했다.
왕련화의 예감은 상당히 뛰어난 것이었소. 그는 심 형 당신이 개방
제자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이곳에 나타나리라는 것을 이미 짐작해냈던
거요. 그래서 당신을 사로잡을 궁리를 하였소.
주칠칠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왕련화의 지략이 비록 뛰어나다고 하지만, 그렇지만 심랑은, 심랑은 이미
그 점을 알아차렸던 거예요.
여기까지 말했을 때 그녀는 슬쩍 곁눈질로 심랑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심랑은 도리어 냉랭하게 말했다.
당신이 말을 하지 않는다고 당신을 벙어리로 생각하는 사람은 여기에
아무도 없소.
주칠칠이 말했다.
아!그래요. 그래요. 가서 장작이나 더 지펴야 되겠어요.
그녀는 몸을 돌려 얼른 모닥불 쪽으로 뛰어가서 곁에있는 장작들을 집어
모닥불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서는 다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김무망은 그녀의 들썩이는 어깨를 바라보면서
가볍게 탄식했다.
가련한 아가씨!
그러나 심랑은 얼굴색을 바꾸지 않은 채 김무망을 재촉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소.
김무망이 말을 이었다.
후에 그녀석들은 심 형 당신이 나타나기 전에 나를 다른 곳으로 옮기자고
말을 했소. 그래서 나는 상대가 많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부득이 맞싸움을
하지 않을 수 없었소.
심랑은 다시 사당에 어지러운 모습을 한 번 휘둘러보고 나서 말했다.
생각컨데 그것은 틀림없이 일장의 경천동지할 싸움이었겠구려.
그것은 인간의 싸움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였소. 그것은 야수의 생사를
건 싸움이었소. 왕련화, 김불환, 좌공룡 세 사람의 무공은 확실히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그는 처연하게 웃더니 이어서 말했다.
그렇지만 김불환 그녀석은 내 얼굴을 보는 순간 이미 겁에 질려 있었고
좌공룡은 비록 매우 경험이 풍부하고 그 무공 또한 뛰어난 것이었지만 내
살기가 대단함에 놀라서 그의 능력을 오분의 일밖에 발휘할 수가 없었소.
다만 왕련화 그녀석은 확실히 늑대와 같은 인간이었소.
심랑이 말했다.
왕련화의 무공도 그녀석의 지략 만큼이나 뛰어나고 독랄하다는 건가요?
그녀석은 각문각파의 장기를 모두 겸비한 잡다한 무공을 펼치고 있었소.
그리고 그 초식에 독랄함은 사람을 놀라게 하기에 족할 정도였소.
그렇지만 가장 두려웠던 것은 그 녀석의 심계가 그녀석의 무공을 더욱
흉악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었소.
김 형의 말씀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요.
깊은 뜻을 가진 것은 아니오. 다만 그녀석의 무공이 상당히 복잡하고
심계가 뛰어났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던 것이오. 그녀석은
상대방이 자신을 공격하기 전에 이미 상대방이 어떠한 초식을
사용하리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었소. 때문에 상대방이 공격을 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상대방이 공격해올 초식을 미리 막아 버리는 것이었소.
그리고 그녀석은 마음과 손의 일치가 마치 팔뚝과 손가락이 같이 움직이는
것처럼 아주 잘 통했소.
그 친구의 무공은 천법 대사와 비교해서 어떻다고 생각되오?
천법 대사는 결코 그의 공격을 이십초 이상 받아내지 못할 거요.
심랑이 실성한 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대단하다는 거요?
김무망이 냉소를 하면서 말했다.
심 형께서는 틀림없이 그녀석의 무공이 그처럼 대단한데 내가 어떻게
그녀석을 부상을 입힐 수 있었는지 의심스럽다는 거겠죠?
심랑은 당연히 그의 오기를 잘 알고 있었다. 김무망의 말이 끝나는 순간
그는 재빨리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 뜻으로 말을 한 것은 아니었소.
만약 무공으로 말한다면 확실히 나는 그녀석에게 부상을 입힐 수는
없었소. 그러나 심 형께서도 아시다시피 싸움을 할 때 가장 뛰어난 무공은
바로 목숨을 내놓고 싸운다는 것이오.
목숨을 내놓고 덤비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싸움도 막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심랑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김무망이 처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이 오른팔을 제물로 삼아 비로소 그녀석에게 부상을 입힐 수 있었던
거요. 다만 애석한 것은 그순간 내 자신이 혼절을 하였기 때문에
그녀석에게 얼마나 큰 부상을 입혔는지는 알지 못하겠다는 거요.
심랑이 말했다.
김 형의 일장을 어떻게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의 몸으로 막을 수가
있었겠소. 만약 그녀석의 부상이 크지 않았다면 또 어떻게 지금 이순간
제가 김형과 이렇게 평안히 말을 할 수 있겠소? 김무망의 얼굴에 비로소
약간의 웃음기가 돌았다. 그는 이어서 말했다.
그렇소이다 내가 생각컨데 그녀석은 가볍지 않은 부상을 입었을 것이오.
그래서 더이상 심 형을 해치려는 생각을 못하고 이 자리를 빠져나갔던
것일 거요.
심랑은 김무망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길게 탄식 하면서 말했다.
김 형, 당신은 하필 그렇게 할 필요까지야.......
김무망이 두 눈을 크게 뜨면서 말했다.
내가 어떻다는 거요. 내가 잘못 했다는 거요.
심랑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김 형께서 저를 많이 생각해주시다니 제가 어떻게 마음이 편할 수
있겠습니까?
김무망이 말했다.
내가 심 형 당신을 위해서 그랬을 것 같소. 이 일은 원래 내가 방심했기
때문에 일어났던 사건일 뿐이오. 이 일이 심 형 당신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요?
그렇지만 김 형 당신은 그들과 직접 싸울 필요가 없었소.
심랑은 얼굴색이 변하면서 말했다.
사실의 김 형의 마음은 저기 피워져있는 모닥불보다도 더 뜨겁다는 것을
나 심랑은 알고 있소이다. 김 형의 그러한 말씀은 불안한 내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 하는 말인 줄도 잘 알고 있소이다.
그는 괴로운 듯 얼굴을 약간 찡그리고 웃더니 이어서 말했다.
그렇지만 김 형께서는 모르시는 점이 있소. 김 형께서 저를 위해서
이렇게 애를 쓰면 쓸수록 내 마음은 더욱더 괴롭다는 것이오. 나는,
나는.......
김무망이 큰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심 형이 왜 괴롭다는 거요. 심 형은 벌써 내가 이미 병신이
되었다고 동정하는 거요. 흥! 나 김무망이 비록 팔이 한쪽 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그래도 두 팔을 가진 그녀석들보다 수십 배 수천백 배 더 강하다는
것을 심 형은 믿지 못하겠소.
나는, 나는.......
김무망이 날카로운 소리로 질책했다.
더이상 말하지 마시오. 심 형은 오늘 왜 말 많은 아가씨처럼 그렇게 말이
많소. 심 형은 몇 번이나 내 목숨을 구해줬는데 나는 한 마디도 고맙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소. 그런데 심 형은 그와 같은 사소한 일을 가지고
그렇게 말이 많은 거요.
심랑이 갑자기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소. 사내 대장부에게 있어서 그까짓 팔 하나가 대수로울수 있겠소.
외팔이 김무망은 틀림없이 두 팔을 가진 왕련화보다 수십백 배 더 강할
것이오.
그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중상을 입고 피구덩이에 드러누운 채 일어날
수도 없었으며 다른 한 사람은 앞날이 어떻게 될지 알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순간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서로 크게
웃기 시작했던 것이다. 주칠칠은 비록 그들 두 사람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으나 그들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모두가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 와
닿았다. 일순간 그녀의 두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번에 흐르는 그녀의 눈물은 가슴이 아파 흐르는 눈물이 아니라 감동하여
흐르는 눈물이었다. 두 사람은 마주 보면서 한참을 그렇게 웃었다.
김무망은 점점 자신의 기력이 다시 돌아옴을 느꼈다. 그것은 기적처럼
빠르게 부상에서 회복되고 있었다. 그는 기쁨에 차올라 더욱더 큰소리로
웃어 제꼈다. 그러나 갑자기 그는 심랑의 웃음소리가 점점 약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비로소 심랑의 손이 시종 그의 가슴에 얹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심랑은 지금까지 자신의 진기를 계속 김무망에게
흘려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김무망의 부상이 그렇게 빨리 치유될
수 있었으며, 그렇게 쉬지 않고 오랫동안 얘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진기는 무공을 연마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생명과 같은 것이며 피와 같은
것이다. 무공을 연마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진기는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심랑은 이순간 이처럼 중요한 자신의 진기를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김무망에게 흘려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김무망은
쉽게 회복될 수 있었으나 자신은 도리어 기력이 쇠하여져 힘을 잃어갔던
것이다. 김무망이 갑자기 웃음 소리를 뚝 그치고 날카로운 소리로 말했다.
빨리 손을 내 가슴에서 떼시오.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알았소. 하하...... 알았소.
심랑은 사실 더이상 버틸 기력이 없었다. 그는 김무망의 가슴에서 손을 뗀
다음 비스듬히 신단에 기대었다. 심랑과 김무망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났던
모든 동정은 모두 주칠칠의 눈과 귀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는 더이상
심랑의 일의 관계하지 않을 생각이었으나 갑자기 그녀의 가슴이 무섭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말했다.
(나는 결코 이 남자를 포기할 수 없어. 만약 이 남자를 포기한다면 더이상
세상에서 살 가치가 없어지는 거야. 결코 영원히 나는 포기할 수 없어.
만약 이 남자를 포기한다면 나는 일생을 후회와 괴로움 속에서 살아야
할거야. 이 사람이 나를 어떻게 괴롭혔든 나는 반드시 이 사람을.......)
그녀는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모닥불로 이미 잘 익은 고기를 손에 들고
심랑쪽으로 걸어갔다. 고기는 껍질이 이미 불에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으나
향기는 더욱 사람의 구미를 끌어 당겼다. 주칠칠은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피곤하시죠? 이것 좀 드세요.
그러나 심랑은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고 차갑게 말했다.
치우시오.
주칠칠이 말했다.
제가 이미 은비녀로 독이 들어 있나 없나 살펴봤어요. 괜찮아요.
심랑이 여전히 말했다.
치우라고 그랬소.
주칠칠은 입술을 깨물면서 말했다.
고기를 드시고 싶지 않다면 이 부근에 틀림없이 마을이 있을 거예요.
무엇을 드시고 싶은지 말씀만 하세요. 제가 가서 사오도록 할게요. 김무망
당신도 무엇을 좀 드셔야 할 것 같아요.
심랑이 말했다.
우리에게 신경쓰지 마시오.
그러나 저는...... 저는 당신을 위해서 무슨 일인가를 해야만 할 것
같아서.......
심랑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당신이 우리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하고 싶다는 거요? 좋소, 우리를 위해서
한 가지 일만 해주시오.
주칠칠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흐르며 재빨리 심랑의 말을 받았다.
무슨 일이죠? 말씀만 하세요. 무슨 일이든 제가 할 수만 있다면 다
하겠어요.
당신이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우리에게서 약간 멀리 떨어져
있어주는 거요. 멀면 멀수록 좋소. 영원히 내 눈에 보이지 않게 멀리
떨어져 있어 준다면 당신은 나를 위해서 아주 좋은 일을 하는 셈이오.
나는 당신에게 상당히 많은 고마움을 느낄 것이오.
주칠칠은 깜짝 놀란 듯 입을 약간 벌린 채 심랑을 멍한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둥그런 눈에서는 다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얼굴에 웃음을 띤채 말했다.
그렇지만 저는, 저는.......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어 눈길을 돌리자 김무망의 눈과
마주쳤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에서 김무망이 쳐다보며 마음 속으로
비웃으면 어떠랴! 자신은 이미 모든 것을 희생하더라도 심랑을
받아드리기로 결심했는데.
그녀는 입을 깨물면서 이어서 말했다.
제가 도대체 무슨 일을 잘못했기에 당신이 그렇게 화를 내시는지 제발 좀
말씀해 주세요. 제가 잘못한 게 있다면 반드시 앞으로 잘못하지 않도록
고쳐 나갈 거예요. 약속 드릴게요. 반드시 고칠게요.
이러한 말을 그녀는 평생 입밖에 내본 적이 없었다. 말을 마친 그녀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가볍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흐느끼는 얼굴에 미소를
띤 모습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정과 쓰라림, 그리고 괴로움을
동시에 띠고 있는 그러한 흐느낌이었다. 심랑은 마침내 고개를 돌려
주칠칠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마치 얼음처럼 차가왔고
쇳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의 차가운 눈빛은 주칠칠로 하여금
마음을 떨게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도대체 뭘 잘못했죠? 뭘 잘못한 거죠?
심랑이 차갑게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른다는 거요? 만약 당신이 아니었다면
백비비가 어떻게 납치될 수 있었겠소. 만약 당신이 아니었다면 김 형이
어떻게 이러한 모습으로 부상을 당할 수 있었겠소.
주칠칠이 말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모두 제 잘못이란 말인가요.
심랑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당신 잘못이 아니라면 누구 잘못이라는 거요. 당신이 만약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을 생각해 줄줄 알았더라면, 당신이 만약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줄줄 알았더라면 이러한 일들은 발생하지 않았을
거요.
주칠칠의 눈에서 빗물처럼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더듬거렸다.
그러나 나는 나는.......
심랑이 그녀의 말을 가로채고 날카롭게 질책했다.
당신이라는 여자는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멋대로이고 질투만 할줄 아는
여자요. 당신은 자신이 기쁠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의 괴로움을 조금도
생각할 줄 모르는 여자요. 당신은 자신이 기쁠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의
심장이 갈갈이 조각조각 찢어진다고 해도 결코 애석해 하지 아니할 그런
여자요.
심랑의 이 말들은 마치 채찍처럼 주칠칠의 가슴을 할퀴고 지나갔다.
심랑의 질책하던 소리를 듣던 주칠칠은 마침내 그자리에 털석 주저앉았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이렇게 심한 질책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지금 이순간 심랑의 이러한 질책에 멍청해져 버렸던
것이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반문했다.
(나는 정말 그렇게 나쁜 사람이란 말인가? 나는 정말 그렇게 못된 여자란
것인가?)
순식간에 웅묘아, 백비비, 방천리, 전영송 등등 그 사람들의 얼굴이
그녀의 눈앞에서 흔들거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 사람들은 모두
그녀에게 상처를 받았던 사람들이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체면을
손상당하고 어떤 사람은 그녀 때문에 자존심을 상했고, 어떤 사람은 그녀
때문에 가슴의 상처를 받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나도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데, 나는 한 번도 다른 사람을 해치려고 그런 생각을 가진 적이
없었는데 그녀는 계속 자기 혼자 중얼거렸다. 그녀의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던 심랑이 말했다.
그렇소. 당신은 틀림없이 다른 사람을 해치지는 않았소. 그렇지만
당신은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나 많은 상처를 주었다는 거요.
이러한 가슴의 상처는 사실 팔 하나 다리 하나를 자르는 상처보다 더
괴롭게 만드는 거요. 당신은 언제나 당신 혼자만이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소. 다른 사람들이 언제나 당신을
존중해주고 당신을 사랑해주기만을 원했던 거요. 당신은 모든 사람들 머리
위에 있기를 원했고, 모든 사람을 자기 발아래 깔아 뭉게기를 원했소.
당신은 언제나 모든 사람이 당신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자란 사람이오.
주칠칠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소리쳤다.
아녜요. 아녜요. 저는 결코 그런 적이 없어요.
그러나 심랑은 여전히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아니라고 할 생각이오?
주칠칠이 방성통곡하면서 말했다.
그래요. 좋아요. 당신말대로 나는 나쁜 여자예요. 그렇지만 나는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 사람이잖아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잖아요.
당신은 그런데도, 그런데도 용서해줄 수 없다는 건가요.
그러나 심랑은 여전히 차갑게 말했다.
나는 당신의 그러한 점들을 도저히 그냥 용납할 수 없소.
주칠칠은 손을 들어 땅바닥을 내리치면서 부르짖었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도 당신은 모두 용서해
주었어요. 당신은 왜 나만 유독 용서해 줄 수 없다는 건가요?
심랑이 차갑게 말했다.
내가 당신의 잘못을 용서해 준 것이 다른 사람을 용서해 준 것보다 훨씬
많았소.
주칠칠은 입술을 깨물고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심랑의 면전에
우뚝 서서 눈물을 참고 이를 깨물면서 말했다.
좋아요. 당신이 나를 용서해줄 수 없다면 나도 당신에게 더이상 용서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겠어요. 다만 당신이 이미 당신이 용서할 수 없는 많은
나쁜 사람을 죽였듯이 당신이 용서할 수 없는 저도 죽여주세요.
심랑이 차갑게 내뱉었다.
죽여달라고? 나는 그것도 못 하겠소.
주칠칠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당신 너무 하는군요. 당신에게 더이상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아요.
다만 당신 손에 죽기를 바랄 뿐이에요. 그것마저도 못 해주겠다는 건가요?
저를 죽여 줄 수도 없다는 건가요?
심랑은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칠칠은 다시 그자리에 털썩 주저
앉아 통곡을 했다.
하느님! 아! 하느님! 왜 저를 이렇게 괴롭히는 거죠? 나보다 더 나쁜
사람들도 최소한 심랑의 손에 죽을 수는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저는
지금 더이상 살고 싶지 않은데 어째서 심랑의 손에 죽을 수도 없다는
건가요.
심랑은 가볍게 눈을 감았다. 김무망은 벌써 눈을 감은 채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세상의 어떠한 말로도 지금 이순간 주칠칠의 마음을
위로할 수는 없을 듯하였다. 그녀는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그녀는
자신이 원망스럽고 심랑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아무리 자신이
원망스럽고 심랑이 원망스러워도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마치 미친 사람처럼 사당 안에 어지럽게 널려
있던 물건들을 집어서 심랑을 향해 던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미친 듯이
날카롭게 외쳤다.
당신을 저주할 거예요.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당신을 저주할 거예요.
그녀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더니 몸을 돌려 사당 밖으로 뛰쳐 나갔다.
한참이 지나자 심랑은 눈을 떳으나 그 자리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다. 김무망도 마침내 눈을 뜨고 조용히 심랑을 바라보았다.
심랑은 입가에 가벼운 웃음을 띠고 있었다.
김무망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심 형! 당신 마음은 강철로 만든 거요?
심랑의 웃음 속에는 처량함이 감돌고 있었다.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누가 내 마음을 알아주겠소?
김무망이 말했다.
당신은 어떻게 그녀를 그렇게 차갑게 대할 수 있소?
심랑이 말했다.
김 형 생각엔 내가 그녀를 어떻게 대했어야 옳았다고 생각하시오?
김무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정말 그녀를 용서할 수 없다는 거요.
심랑이 말했다.
김 형의 말씀은 그녀를 용서해 주라는 거요?
김무망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심 형께서 더이상 그녀를 용서해 줄 수 없다해도 심 형은 다시 그녀를
용서해 주어야만 하오.
무슨 말이오?
김무망은 어두침침한 사당의 천장의 한쪽 끝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말했다.
심형 당신이 내 나이 만큼만 더 살면 곧 알게 될거요. 세상에는 미녀가
수도 없이 많지만 주칠칠처럼 당신을 깊게 사랑하는 여자를 찾기란 너무나
어렵다는 사실을 말이오.
그는 천장 한쪽을 바라보던 눈빛을 돌려 심랑을 바라보면서 이어서
말했다.
심 형! 당신은 어떻든 그녀의 모든 행동이 남을 해치기 위해서 했던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오. 당신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하면서 유독 그녀에게만은 관대하지 못한거요?
심랑은 가볍게 눈을 내리 감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그러한 자세로 있던 심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관대해 질 수 있소. 그렇지만
그녀에게만은 관대해 질 수 없소.
김무망은 멍청한 듯 한참을 그를 바라보더니 마침내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탄식을 내뱉은 다음 말했다.
그렇소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해 질 수 있소. 그렇지만 그녀에게만은
관대해 질 수 없소.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두가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듯했다. 그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인간과
인간 사이에 미묘하고도 복잡한 관계를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한참이
지나서 심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용서해 줄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도저히
그녀를 용서해 줄 수 없소.
그의 말을 듣고 김무망이 다시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말했다.
그렇소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잘못을 용서해 줄 수 있지만 당신은
용서해 줄 수 없을 것이오. 다른 사람들의 책임은 자기 자신에게만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만 최선을 다한다면 그것으로 족하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남녀간의 미묘한 감정상의 문제로 자신의 일을 방해받는다
그래도 괜찮다고 할 수 있소. 그렇지만 심 형 당신은 당신의 어깨에 걸린
책임이 너무 무겁소. 너무, 너무 무겁소.......
심랑이 고개를 들고 김무망을 바라보며 웃었다.
김 형은 내 평생의 유일한 지기라고 할 수 있소.
그러나 당신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것은 너무
외롭다고 생각하지 않으시오?
심랑이 천천히 대답했다.
한 인간이 한 사람의 지기를 얻을 수 있다면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하오.
모닥불은 더욱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사당은 점점 더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모닥불이 사당 안을 따뜻하게 하는 건지 두 사람간의
우정이 사당을 따뜻하게 하는 건지 하여튼 두 사람은 따뜻한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어떻든 제발 그녀가.......
어떻든 제발 그녀가.......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어 꼭 같은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들이 하고자 했던 말이 어떻든 제발 그녀가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랄 뿐이오."라는 말이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