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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타가 공인하는 '태권도박사' 강기석(경향신문 편집국) 국장의 행보가 심상찮다. 작년 11월 '태권도 반세기'를 편저 하면서 재개된, 그의 태권도 관련 행보는 구태연의연한 태권도계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21일 경원대에서 있었던 대한태권도협회 경기규칙강습회에 초청 강사로 등단했던 그는 천여 명의 수강생들을 대상으로 한 특강에서 "태권도가 가라데에서 유래했다"는 자신의 '이론"을 거듭 거론하여 눈길을 끌었다. 그가 '태권도 반세기(국민체육진흥공단)'를 펴내면서부터 이미, 제도권 태권도인들이 술렁이기 시작했었다. 민족 정서에 관련시켜 어느 누구도 주장 하기 꺼려했던 태권도의 역사문제를 기자인 그가 제기 했기 때문이었다. 간혹, 소신파 태권도인들이 태권도의 발상과 관련된 주장을 하다가 이단과 매국노로 지탄 받았을 만큼, 태권도의 역사는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다뤄왔던 것이 태권도의 자화상 이었던 것이다. 그는 "청도관 창시자 이원국이나 송도관 창시자 노병직, 지도관 전상섭이나 윤쾌병 등이 모두 '가라데' 출신 이었고, 최홍희마저도 '주고대학'에서 가라데를 했다. 이러한 명백한 사실을 뒤집어 엎을만한 증거가 없다. 그렇다면 태권도는 가라데에서 왔고, 가라데는 오키나와데에서 왔고, 오키나와데는 당수에서 왔다는 주장이 신빙성 있는 것이다. 물론 오오야마 마스다스(최영희)가 조선시대 때 유구사람들이 조공와서 택견을 배워 갔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발상은 그렇지만, "오늘날 태권도가 가라데나 쿵푸보다 가장 성공한 동양무도 이다. 이제는 발상에 매달려 허구에 매달릴 게 아니라, 태권도의 성장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태권도가 가라데나 쿵푸보다 일찍 경기화를 시작했고, 그 작업에 성공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태권도가 겨루기가 중심이 된 경기화를 함으로써 품세를 주체로 삼고 겨루기를 객체로 삼았던 가라데와 완전히 결별하여 독자적인 모양세를 갖추었던 것"이라고 주장한 그는 책을 쓰는데 있어서 태권도를 10년 동안 취재했던 경력이 큰 밑천이 되었다고 강조했다. 이 날, 강연 중, 한 수강생이 "수고 하셨다"며 야유성(?) 박수를 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그는 차분한 어조로 "강연이 끝나지 않았는데, 더 하겠다"며 연설을 이어나갔다. 특히, 그는 뉴욕특파원(1996년)출신답게 미국에서 성공한 두 태권도 인들의 성공사례를 구체적으로 소개하면서 태권도의 문제점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구체적인 대안까지 제시하는 논리를 펴, 강연이 끝난 후,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지난 1977년 경향신문 체육부 기자로 시작, 올해 '신문사의 꽃'이라는 편집국장이 되기 까지 그는 10여 년간 태권도를 출입했던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가 쓴 '태권도 반세기'에 대해 일각에서는 "관통합 당시의 서술에서 잘못된 부분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그와 20년 이상을 허교 해 온 김인수(중.고 태권도연맹) 부회장은 "강기석 국장은 자타가 공인 하는 '태권도박사'다. 태권도를 그 만큼, 잘 아는 베테랑 기자가 없을 것을 것"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강기성 경향신문 편집국장 연설 및 책 내용(요약) 태권도라는 명칭은 온전히 최홍희의 작품이다. 이러한 명칭은 최홍희가 창안하기 전까지는 한국 무도 역사상 찾아 볼 길이 없다. 최홍희가 태권도라는 명칭에 착안한 것은 자신이 이끌던 29사단이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당수도시범을 벌인 '역사적 사건'이 계기가 됐다. 1953년 9월 최홍희는 제주도에서 창설된 29사단 초대 사단장직을 맡게 됐다. 태권도(당시만 해도 당수도, 혹은 공수도)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던 최홍희는 불끈 움켜 쥔 주먹을 29사단 마크로 삼는 등 태권도를 부대 훈련의 기본으로 삼았다. 그는 당수 2단 남태희 중위와 1급 한차교 하사를 사범으로 임명하고 전 장병들을 가르친 결과 29사단은 빠른 시일안에 강군의 기틀을 잡을 수 있었다. 29사단은 기본 훈련을 마치고 이듬해 6월 강원도 설악산 부근 오호리로 이동하게 됐다. 그리고 9월 이승만을 모시고 부대 창설 1주년 기념식을 갖게 됐던 것이다. 기념식에서는 사단장 보고에 이어 29사단의 자랑거리인 부대원 당수도 시범이 있었다. 남태희가 기와 13장을 일격에 쳐 부수는 장면들을 흥미있게 지켜 보던 이승만은 "저게 바로 우리 나라에 옛날부터 있었던 택견이 아니냐"며 감탄했다. 그리고는 "군인들이 저것을 배워야 해. 서양사람들은 키가 크고 힘이 센데 발로 차면 빙그르 주저 앉을 게 아닌가"라는 조크까지 했다. 이 사단시범이야말로 최홍희가 이승만의 총애를 받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승만의 눈에 들게 된 최홍희는 이 기회에 당수도니 공수도라는 이름을 아예 바꾸고 싶었다. 그리고 바꾼 이름은 최대한 택견과 어감이 비슷해야만 했다. 따라서 두 번째 글자는 처음부터 '권'으로 정해놓았다. 무도의 명칭에는 수(手)가 아니면 권(拳)이라도 반드시 들어 가야 할텐데 택견과 비슷하기 위해서는 우선 '권'자가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적당한 '택'자나' 태'자를 찾아야 했다. 한학에 조예가 깊었던 최홍희는 옥편을 펼쳐 들고 '태' 자(字)를 샅샅이 훑어나갔다. 太도 있고, 泰도 있고 怠도 있고, 胎도 있다. 그렇다면 그 많은 '태'가운데 어떤 태를 골라야 할까? 그러다가 발견한 것이 跆였다. 사실로 이 '跆'라는 글자는 최홍희가 발견해 무술계에 끌어들이기 이전에는 무술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던 글자였다. '跆'에는 최홍희가 원했던 '발로 찬다'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질 않다. 기껏해야 '발로 밟는다'는 의미가 있을 뿐이며 이 밟는다는 것도 무술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 가볍게 스탭을 밟는 그러한 동작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어떠랴. 이 글자가 그 중에서도 가장 운동의 성격에 맞고(발을 쓰고 주먹으로 지른다는 점에서) 발음상으로도 이승만이 말한 택견에 가장 가까운 바에야. 이렇게 해서 근 1년 반만에(55년 4월 11일) 태권도라는 명칭이 탄생한 것이다. 대통령의 재가과정 이승만이 "태권도는 무슨 태권도야, 택견이 좋지"하며 고집을 부린 것이다. 이에 최홍희는 이승만을 지근에서 모셨던 경무대 실력자들을 또 한번 요정에 불러놓고 "대통령 휘호는 한자로 써야지 한글로 쓰면 멋이 안난다"는 등 온갖 감언이설로 설득해 드디어 跆拳道라는 휘호를 받아 냈던 것이다. 최홍희는 대통령 재가가 나자마자 자신의 휘하에 있던 오도관과 청도관에 걸려 있는 당수도 간판을 떼어내고 태권도로 바꾸어 놓았다. 또 태권도를 수련하는 군인들이 경례를 할 때는 '태권'이라는 구호를 반드시 외치게 했다. 여기에다 청도관 창시자 이원국이나 송도관 창시자 노병직, 지도관 전상섭이나 윤쾌병 등이 모두 '가라데' 출신 이었고, 최홍희마저도 '주고대학'에서 가라데를 했다. 이러한 명백한 사실을 뒤집어 엎을만한 증거가 없다. 그렇다면 태권도는 가라데에서 왔고 가라데는 오키나와데에서 왔고 오키나와데는 당수에서 왔다는 주장이 신빙성 있는 것이다. 물론 오오야마 마스다스(최영희)가 조선시대때 유구사람들이 조공와서 택견을 배워 갔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발상은 그렇지만, 오늘날 태권도가 가라데나 쿵푸보다 가장 성공한 동양무도 이다. 이제는 발상에 매달려 허구에 매달릴 게 아니라, 태권도의 성장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태권도가 가라데나 쿵푸보다 일찍 경기화를 시작했고, 그 작업에 성공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태권도가 겨루기가 중심이 된 경기화를 함으로써 품세를 주체로 삼고 겨루기를 객체로 삼았던 가라데와 완전히 결별하여 독자적인 모양세를 갖추었던 것이다. 기술측면에서도 손기술 중심에서 발기술, 차기기술 중심으로 발달. 60년대 초반 최영렬 교수가 참여한 한일 공수도교류전에서 이미 입증 되었다. 스피드와 파괴력, 화려함은 이미 가라데는 태권도의 상대가 아니었다(김용옥은 이것을 택견과의 고리로 보는데, 나도 동의 한다). 호구의 탄생은 가라데처럼 상대의 몸 앞에서 공격을 멈추지 않음으로써, 실제 상황에서의 훈련과 겨루기를 가능케 해-실질적인 무도로서의 가치를 높였다. 그러나, 경기 태권도에 대한 비난도 만만찮다. "기술만 강조하여 무술의 원리인 '도'를 무시한다"는 지적이다. 경기태권도의 목적은 오직 이기는데에만 중점을 두기 때문에 태권도 스포츠라는 엘리트화를 초래 해, 특수훈련을 받은 선수들만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선수들은 대학진학 혜택, 직장, 국제대회 입상 때의 연금혜택 등, 구체적인 실리와 연관되어 있어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 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 미국의 경우, 경기태권도가 아닌 도장 태권도 출신이 올림픽 등 대표선수가 되고 있고 대부분의 한국 사범들이 '기술'보다는 '도'의 정신을 강조하는 경영 방침으로 성공한 예가 많다. '도' 중심의 특징은 '예'를 강조하고 태권도의 호신술과 건강비결 등의 효과를 극대화 시킨다는 점이다. 이준구 사범의 예 1956년 단돈 46달러를 지니고 미국 땅을 밟은 이준구 사범은 태권도는 사람을 때리는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가르치는 무도로써의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이준구 사범은 자신이 갖고 있는 정치적 커넥션을 이용해 1986년 10월 스승의 날을 제정하는데 앞장 섰다. 스승의 날 제정 건의서도 그가 직접 만들었다. 그는 동양철학에 근거한 독특한 경영철학을 통해 그 영향력을 늘렸다. 어쩌면 가장 철저한 태권도 비즈니스맨인 것이다. 준리 태권도는 정통 태권도 동작과는 다른 스타일이다. 태권도의 기본동작인 정면주먹 찌르기의 경우, 뒷발이 지면에 닿아 있는 상태에서 허리에서부터 주먹이 나가는데, 준리 태권도의 경우 팔은 가슴에서 모은 상태에서 앞으로 나가고, 뒷발은 지면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뒤꿈치를 든 상태에서 이뤄진다. 정통과 전통을 따지는 태권도 관계자가 보면 이단인 것이다. 또한 현재 마스터 리가 운영하는 준리 태권도는 세계태권도연맹, 국제태권도연맹,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독립적 위치에 있다. 태권도왕-이행웅(李幸雄) 미국태권도연맹은 태권도 경기의 발전에 목적을 둔 공조직인 반면, 미국태권도협회(ATA)는 무도에 비중을 둔 사조직이었다. 따라서 미국 내에서의 조직팽창과 관련해 마찰을 빛지 않을 수 없었다. 국내 태권도계도 마찬가지였다. 이행웅은 한국의 대한태권도협회와 국기원 등 행정기관으로부터 외면을 당했다. 하지만 1962년 스물다섯 살 먹은 키 165cm, 몸무게 58kg의 한 왜소한 청년이 도복과 영한˙한영사전 한 권씩 만을 들고 미국땅에 발을 디딘 이후 38년 동안, 이뤄낸 성취의 기록은 대단하다. '한국을 포함한 세계 7개국 19개 지부, 1200여 개의 지관(支館), 사범 3천 명, 유단자 2만 명, 총 회원수 20만 명, 연간 총 수입 1천만 달러(약 120억 원),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태권도 사부(師父)로도 유명 했다. 지난 2000년 사망에 타계한 그는 1983년 8월13일 송암(松岩) 태권도'라고 이름을 붙인 자신의 태권도를 산꼭대기에 올라가 3백여 제자들 앞에서 발표했다. 송암(松岩)이란 아칸소 주목(州木)이 소나무라는 점과 주도(主都)인 리틀록(Little Rock)에서 딴 바위 암(岩)자를 합해 만든 이름이었다. 85년 에는 칠레와 아르헨티나, 브라질, 페루, 파라과이 등 남이에 송암태권도연맹 (S.T.F)을 설립 하기도 했다. 이행웅은 태권도는 경기가 아니라 무도라고 가르쳤다. "태권도가 한국의 것으로 오래 살아남으려면 도(道)를 우선시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모두 빼앗기고 만다. 덩치가 크고 팔다리가 긴 서양인들과 경기를 해보라. 그들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가?" 그는 또 "경기 태권도는 아무나 할 수 없다. 날쌔고 힘이 있어야 한다. 운동선수 중에서도 엘리트가 할 수밖에 없어요. 반면 도장 태권도는 무도(武道)다. 무도는 자기와의 싸움이다"라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이행웅은 도(道)의 정신을 지켜나가기 위해 그 스스로에게 매우 엄격했다고 전해진다. 태권도의 도는 동양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자제력과 극기를 기본으로 한다고 이 세가지 신조를 태권도의 도훈(道訓)으로 삼았다. 그는 태권도가 널리 보급되기 위해서는 경기태권도에서 탈피해 도장태권도의 장점을 살려야 한다고 믿었다. 첫째 재미가 있어야 하고, 둘째 안전성이 보장되어야 하며, 셋째 인성 교육으로서 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은 것이다. 이 세 가지가 균형으로 갖추어야 도장으로서 기능을 다할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다고 믿었다. 종주국에서 '경기 태권도'를 개발시켜 세계를 제패하는 사이에 이행웅은 미국에서 '세 살부터 여든까지' 할 수 있는 '생활 태권도'를 개발해 성공시킨 것이다. 태권도사업을 위해 그는 미국인 소비자들의 기호에 맞는 프로그램을 개발에 전력을 기울였다. 미국인들이 원하는 것은 인본주의(人本主義)교육프로그램이라고 보고 장애자까지 가르칠 수 있는 태권도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했고 그것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사범으로서 인간 교육에 대한 독특한 신념이 있어야 될 터였다. 즉 사범은 교육자여야 했다. 부모가 바빠서 가정교육을 제대로 못 시키니 돈 벌어 그에게 가정교육과 인성교육을 맡기는거라고 개념을 바꾸었다. 그는 사람을 키우는데 중점을 두었다.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사람이 없으면 기술이 전수될 수 없다. 제자를 잘 키운다는 것보다 더 큰 사업은 없었다. 그가 제자를 키운다는 말에는 여러 가지 노하우가 포함되어 있다. 정성들여 가르칠 것, 제자의 인생 선배로서 진로를 잘 개척 해 줄 것,제자가 사범이 되어 도장을 운영하게 되면 그가 돈을 잘 벌 수 있도록 지원해 줄 것 등이다. 물론 미국과 유럽의 경우 도장태권도로 성공한 사람들이 많고 경기태권도가 배워야 할(교훈으로 삼아야 할) 점들이 많지만 태권도가 가라데의 그늘을 벗고 하나의 독립적이고도 완성된 무도로서 발전한 배경에는 아까도 말했지만 앞으로의 태권도 발전에 의무를 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 태권도는 개혁을 통해 다시 중흥의 계기를 삼느냐 개혁의 실패로 비참한 21세기를 맞느냐는 갈림길에 놓여 있다. 태권도는 중학교 선수의 경우 지방대회 3위 이내, 고교 선수는 전국대회 3위 이내에 입상해야 특기생 입학자격이 주어진다. 또 태권도 종주국답게 우리 선수의 기량이 다른나라 선수들보다 월등이 뛰어나기 때문에 국내에서 실력이 뒤지는 선수들이라도 국제대회에 나가면 메달권 진입이 가능하다. 따라서 실력이 떨어지는 선수와 학부모들은 코치와 심판에게 돈을 바치고라도 전국대회에서 메달권에 진입하거나 국제대회에 나가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쉽다. 승부조작에 불만이 있어도 불이익이 무서워 쉽게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결국 학부모는 코치에게, 코치는 심판에게 각각 뇌물을 건네는 게 어렵지 않게 이루어진다. 심판 또한 자신의 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집행부 임원에게 뇌물을 상납하게 된다. '학부모-코치-심판-임원' 간의 먹이사슬이 자연스럽게 형성된다는 것이다. 승부마저 돈으로 쉽게 조작하는 분위기에서 다른 비리행위는 말할 것도 없다. 심판판정에 대한 고민 '태권도 경기의 활성화를 위한 간담회'가 2001년 1월 한국체육대학교에서 열렸다. 김성칠 심판은 "내가 언론 지상에 심판계 내부의 문제를 거론하자 일각에서는 왜 심판 문제를 밖으로 끄집어내느냐고 비판했다. 그러나 심판 내부의 문제는 비단 심판계의 문제가 아닌 태권도계 전체의 문제라고 본다. 심판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심판계 안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토론문화가 정착 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과거 심판으로 활동하면서 심판 문제를 연구하는 모임을 결성하려고 했으나 또 다른 집단을 만든다는 우려 때문에 실현되지 못했다. 90년대 초 심판계를 떠나 오랜만에 상임심판으로 활동하다 보니 심판들의 이기주의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여실히 느꼈다. 동향, 계열, 관(館) 등 중소집단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 올바른 판정문화를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또 10년 전과 비교해 심판계는 거의 발전하지 못한 느낌이다. 학연, 지연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이것이 판정 시비의 문제가 되면 안 된다는 의미다 이는 도덕적-윤리적인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심판부가 거듭 태어나려면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운영이 뒤따라야 한다. 또 심판부가 기술심의회의 영향권에서 독립해야 한다. 심판위원장이 윗사람을 많이 모시면 그만큼 소신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 밖에 참신하고 도덕적인 심판을 등용하고, 심판들의 처우개선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심판내무에서 문제가 발생했는데 치유하지 못한건 인정해야 한다. 상처가 발생하면 곧바로 치유해야 하는데, 상처를 숨기고 치유할 때를 놓치면 잠복기에 들어간다. 심판과 지도자 모두에게 문제가 있다. 서로 이기적이고 자기 편의주의적인 발상 때문에 심판과 지도자 사이에 적대감정이 생겨나는 것이다. 심판 판정문제에 떳떳하게 문제를 제기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경희대와 용인대 등 학연이 올바른 판정을 저해한다는 김성칠 심판의 지적에 대해 특정 학교에 적(籍)을 둔 심판들은 독립된 개체로 접근해 윤리적인 문제로 판단해야 한다. 또 자신이 몸 담고 있는 학교의 선수들이 경기를 할 때는 다른 코트로 배정하면 문제될 것이 없다) 한 지도자는 경기장에서 심판과 경기지도자들의 문제가 발생하면 왜 일관성있게 징계하지 않는지 의문이다. 솔직히 지도자들도 심판들을 욕할 자격이 없다. 과연 떳떳한 지도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나, 뭐니 뭐니해도 집행기관 실무자들이 태권도계의 문제점을 제대로 인식하고 얼마나 당차게 추진하느냐가 중요하다. 심판들을 그릇된 시각으로 보는 사고방식을 바꿨으면 한다. 아무리 유능한 사람일지라도 심판계에 들어오면 그날로 욕을 얻어 먹는다는 얘기도 있다. 심판들이 잘못하는 점도 있지만 잘한 점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이해해 줘야 한다. 하루 심판 수고비 5만 원을 받고 1년에 100일 이상 경기장에 나와 있으면 도장이 망한다는 소리를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심판이 지금보다 발전하려면 교육의 보강이 필요하다. 많은 심판들도 심판교육의 패러다임이 전환돼야 한다는데 공감하고 있다. 세계챔피언 출신의 정국현 교수는 "태권도가 발전하려면 제도권의 지도층들이 먼저 변해야 한다. 그들이 어떤 사안에 대해 정확하게 판단을 내리고 일관되게 집행할 때 태권도가 발전한다고 본다. 심판들이 올바른 판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심판 선발의 투명성이 확보돼야 한다. 또 계열과 파벌이 형성되지 않도록 지도자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조직의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은 비방과 불신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서로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 해 눈길을 끌었다. 다음은 현재 태권도계가 당면한 문제들이다. "종주국 태권도가 과연, 전 세계 5000만명에 달하는 태권도인들을 이끌어 갈 철학과 비전을 갖고 있는가"하는 점이다. 국기원을 찾은 외국인들은 국기원이 다른 스포츠연맹이라든지 기업들처럼 전문가들을 고용해 체계적으로 꾸려가는 것이 아니라, 옛날 태권도 하던 사람들이 자기 인맥관리를 하든지 아니면 그냥 개인적인 카리스마에 의존해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심판교육, 사범교육, 코치교육, 또 일반 교육자료 같은 것을 만들어야 되는데 그런 것이 거의 없다. 태권도 철학이 뭐냐고 물으면 시원한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국기원 뿐 아니라 세계연맹이 있고, 대한태권도연맹이 있는데, 이들끼리 세력의 균형을 계속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물밑에서 엄청난 정치적 암투만 계속할 뿐이다. 오히려 미국에서 태권도가 현대화 대중화되고 있다. 미국은 1960년대 초부터 한국 사범들이 코리안 가라데라는 이름으로 태권도 보급을 시작한 이래 지금은 1만 5000개의 도장에서 7백만명이 태권도를 배우고 있다. 무술로서 출발한 초기 태권도의 원형들이 다양하게 응용되고 개발되고 있다. 미국의 도장들은 성인 수련자가 절반에 달하고 있으며 가족 단위의 수련자도 많다. 최근 들어서는 스포츠와 무도로서 태권도의 교육적 가치가 널리 알려지면서 학교체육으로 확대되어가고 있고 개인 도장에는 학생 수련자들도 늘고 있다. 검은띠를 따는 것이 태권도 수련생들의 목표요 지향점이다. 그만큼 미국에서는 유단자 심사를 까다롭게 하므로 보통 입단하는데 2~3년이 걸린다. 검은띠는 기술적인 측면도 보지만 그보다는 정신적, 인격적인 면을 더 중시한다. 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각 도장마다 승단심사에 독특한 기준을 두고 있다. 워싱턴 이준구 아카데미의 경우 검은띠를 받으려면 학업성적이 B+이상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서울에서는 1년정도만 되면 입단할 수 있다. 국기원에서 열리는 심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이렇게 형식적인 심사가 매주 토요일 일요일 계속 된다. 아이들은 태권도 승품 심사에 대한 그 어떤 존경심이나 경외감을 갖지 못한 채 돈만 내면 쉽게 검은띠를 딸 수 있다는 첫인상을 가지고 국기원을 떠난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태권도 승단 심사를 둘러싼 비리 혐의로 반대하는 도장 소속 학생들의 점수를 조작해 불합격 시키는 어이없는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경기 때는 사생결단이다. 동메달 이상을 따면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쉽고 전국 금메달을 따면 자기가 원하는 학교에 갈 수 있고 잘하면 스카우트 제의도 들어온다. 학교에서는 태권도 정신이 아니라 발차기 등 겨루기만 가르친다. 선수들의 기술 수준은 뛰어나지만 정신적인 수양이나 교육적인 측면은 거의 상실되었다. 그동안 한국 선수들은 수많은 세계대회를 치르면서 태권도 특유의 발기술들을 빠르게 발전시켜 세계에 보급해왔다. 그러나 이런 선도적인 역할은 이제 끝이 나고 있다 .한국 태권도 선수들은 90년대 들어 기술의 정체현상을 보이고 있다. 큰 기술이 아닌 잔 기술에 의한 점수 따기, 메달과 승패에만 집착하는 한국 태권도 문화가 만들어 낸 태권도 기술의 퇴행이다. 이렇게 태권도 종주국은 그 이미지를 서서히 잃어가고 있다. 국기원은 태권도 세계화의 총 본산이었으며 지금도 세계 태권도인들이 가장 가보고 싶어하는 곳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해외사범들은 제자들의 한국행을 꺼린다. 환락가에 휩싸인 그곳에서 태권도 종주국의 위엄고 힘을 느낄수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태권도 본부를 미국이나 유럽으로 옮기자는 주장까지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따라 유단자 단증을 국기원을 거치지 않고 독자적으로 발급하는 국가나 단체가 늘고 있다. 승단비는 받아 챙기면서 태권도의 미래에 대해 투자하지 않고 있는데 대한 당연한 업보다. 한국태권도 지도층의 대폭적인 세대교체가 절실히 요구된다. 가장 큰 문제가 태권도계의 비리의혹이다, 승단심사 과정의 비리혐의도 속속 밝혀지고 있다. 서태협은 지난 93년에 현 경기도 분당의 임아무개 관장, 94년에 송파구의 이아무개 관장이 4단에서 6단으로 월단 특별심사를 받을 때, 이들로부터 각각 1천만원대의 뇌물을 받고 합격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월단 같은 특별심사의 경우, 오히려 심사가 철저히 이뤄져야 하는데도 서태협은 일반심사 규정에 명시된 실기와 필기시험 마저 치르지 않고 단증을 부여했다. "검찰이 밝힌 심사비리 혐의는 빙산의 일각이다. 서태협은 단증발급 기관인 국기원과 짜고 공식적인 단증 신청을 합격자의 절반 정도밖에 하지 않고 나머지는 단증 발급 서류 없이 비공식적으로 합격시켜 서태협과 국기원이 남은 돈을 나눠갖기도 했다" 고 주장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