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에세이(5) : 아관파천과 대한제국
1. 1896년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으로의 탈출로 시작된 약 1년간의 ‘아관파천’은 고종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는지 모른다. 을미사변 이후 친일내각과 일본의 감시와 압력에 전전긍긍하던 고종은 ‘춘생문 사건’이란 미공사관으로의 탈출이 실패하자 더욱 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이때 고종의 탈출을 기획하던 사람은 이범진을 비롯한 친러세력과 고종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엄상궁이었다. 이범진이 러시아와의 협력과 정치적 환경을 조성하였다면, 엄상궁은 실질적인 탈출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친일세력과 친분관계를 유지하여 감시를 소홀하게 하였으며 궁중 각 문의 관리자들을 매수하여 탈출을 용이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결국 고종과 왕세자(후일 순종)은 여자로 변장하고 가마를 타고 탈출에 성공하였다.
2. ‘아관파천’의 후폭풍은 거세었다. 고종의 탈출은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고 친일세력에 대한 폭동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오랫동안 개화기 중책을 맡았던 온건 개화파의 중심인물이었던 김홍집과 어윤중은 피살당했으며,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던 유길준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일본의 충격은 더욱 컸다. 군대를 앞세우고 러시아 공사관 앞에서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였지만 러시아는 약 150명의 호위군을 동원하여 고종을 보호했다. 당시 1000여명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던 일본은 무력행위를 통해 고종의 환궁을 강제로 시행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각오해야만 하는 모험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조야는 더욱 군사력을 강화시켜야 한다는 국가적 동의를 획득했다.
3. 아관파천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많은 사람들은 당시 김홍집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위기와 격동의 시기, 나름 온건한 개혁적 성향으로 정치적 중심을 잡았던 인물을 친일파로 몰아세우기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의 죽음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직접 고종을 알현하려 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친일파’라는 이름으로 죽었다. 이러한 현상은 국가를 사수하려는 의지보다는 친일과 친러로 갈라진 당시의 당파싸움에 더 무게를 두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당시의 사학자 박은식은 다음과 같이 아관파천을 혹평했다. “아관파천은 국가를 위하여 복수를 하려는 거사였는지, 친러파 일당을 위한 권력쟁탈의 계책인지 비로 복수의 명분을 빌어 권력쟁탈의 사심을 푼 것이리라. 그날의 거사는 참으로 사를 끼고 횡포를 부림이 법에 크게 어그러지며 법을 업신여기는 것이니 나라를 보존할 수 있겠는가?” 후대의 역사가들은 아관파천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아관파천의 (...) 본질을 보면 외세에 시달리던 조선의 군주가 자국이 당면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능동적으로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쥐고 ‘오랑캐(러시아)로서 오랑케(일본)을 제압하려는’ 전술을 선택한 사건이었다.”
4. 아관파천 기간 동안 고종은 민영환을 러시아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보내 협력을 강화했고 은밀하게 군대 파견과 정치적 지원을 요구했다. 고종이 요구한 수만큼은 아니지만 ‘군교관’이 파견되었고 이것은 고종으로 하여금 환궁의 결심을 굳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년 만에 고종은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했는데 이것은 주변에 있는 외국 공사관의 보호를 받기 위한 선택이었다. 환궁 이후 많은 신하들의 요구에 따라 고종은 ‘칭제건원’을 선포하였다. ‘주상 전하’에서 ‘대군주 폐하’로 바뀌었고 다시 ‘황제 폐하’라는 최고의 존칭과 ‘광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게 되었고, 하늘의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원구단(환구단)’을 설립하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조선은 ‘대한제국’ 시대가 열리게 되었고 마지막 개혁이라로 할 수 있는 ‘광무개혁’을 실시하였다.
5. 대한제국은 ‘구본신참’이라는 과거를 토대로 새로운 것을 참조한다는 정신을 강조했지만, 결국은 전제적 왕정을 유지하려는 수구적 정권의 성격이 강하였다. 민권의 성장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이 부족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실제적인 군사력이나 국력의 뒷받침 없이 상징적인 선포는 다만 허구에 지나지 않다는 혹평을 받기도 하였다. 다만 새로운 미래를 나아가기 위해서는 형식적이나마 독립의 의지와 미래에 대한 비전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고종 옹호자 이태진은 당시 고종이 자행한 이권판매와 매관매직에 대해서도 국가 경영에 필요성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한다.
6. 대한제국의 시작과 광무개혁은 고종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는지 모른다. 외형적으로는 국가를 되살리기 위한 노력이었고 군주의 책임을 다한 정치적 결단이었는지 모르지만, 국제 외교 정세에 눈이 어두웠고 열강 세력의 힘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정치적 능력이 부족했으며 여전히 과거의 군주적 사고와 행동으로 국내적 문제를 해결시키지 못했다는 점은 마냥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어렵게 만든다. 부정적 평가와 긍정적 평가를 모두 포함하여 본다면 대한제국과 광무개혁의 성격은 다음과 같이 객관적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외세의 침략 앞에서 국권을 지키기 위해 지배계급이 주도하여 마지막으로 시도한 근대화 개혁, 또 그 과정과 결과로 설립한 국가체제”
첫댓글 - 힘이 없는 나라에서 겨우 체면을 살리기 위한 몸부림이랄까.... 건강한 나라의 중요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