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세 어르신
1. 태화강역에서 부전역까지 동해선 광역전철이 개통되어 처음으로 승차하고 온 날이었다. 퇴직 후 무료했던 남편은 역세권에 산다는 이유로 동해선의 볼거리, 먹을거리를 즐겼고, 경로우대 무임승차권으로 두 도시를 넘나드는 재미에 빠졌다.
2. 남편 말에 의하면 승객 대부분이 어르신이라 했다. 나도 65세 생일이 지났으니 어르신 대열에 들어 보고 싶었다. 팍팍했던 일상을 내려놓고 유유자적 지내보고 싶었다. 편한 복장에 모자를 눌러썼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긴장감을 내려놓으니 영락없는 노인이었다.
3. 매표소 앞에 늙수그레한 어른들이 줄지어 늘어섰다. 나는 순서를 기다려 주민등록증으로 승차권을 발급받았다. 플라스틱 경로우대 공짜 표를 주머니에 넣으며 누가 볼까 봐 주변을 살피며 웃음이 나왔다.
4. 내가 어르신이 맞나 곱씹어도 아직은 늙지 않았다 싶다. 최근 UN이 발표한 <평생 연령 기준>에 의하면 청년을 지나 중년을 향한 출발선에 서 있다. 방송에서 백신 예방 접종으로 인해 65세 이상을 어르신으로 자주 사용하고 있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5. 지난가을, 남편과 사찰을 찾았을 때 남편 따라 은근슬쩍 주민등록증을 내밀다 65세 생일이 지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입장료를 내야 했다. 내가 한 행동에 무안해져 투덜거렸다. 드디어 경로우대로 구애됨 없이 무임승차하니 어르신인 것이 실감 났다.
6. 전철에는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팀을 이뤄 자신들의 이야기로 분분했다. 귀동냥을 해보니 경로우대 무임승차가 즐거움의 화두였다. 우리 부부처럼 부전역에 내려 자갈치 시장 투어를 목적으로 두고 있는 듯했다.
7. 교대에서 내려 1호선으로 갈아탔다. ‘어! 지하철도 공짜네! 아직 경제 활동으로 세금도 내고 있는데, 공짜로 타고 다녀도 되는 걸까?’ 잠시 떳떳하지 못한 마음도 들었지만, 대접받는 기분이 은근히 짜릿했다.
8. 자갈치역에서 내렸다. 사람들로 자갈치 시장은 시끌벅적 살아 있었다. 세상에 생선은 이곳에 다 있는 듯했다. 한나절 시장 투어를 마쳤다. 남편은 점심은 유명하다는 붕장어 구이집으로 안내했다. 구운 장어에 시원한 매운탕이 입맛을 살리니 소주가 빠질 수 없었다. 술잔을 앞에 두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며, 자식들 이야기, 쏜살같이 달려가는 우리 인생을 소주에 섞으니 애잔했다. 주거니 받거니 위로의 잔을 부딪쳤다.
9. 자갈치 시장 주변 국제시장과 깡통시장을 둘러보았다. 남편은 갖고 싶은 것을 선물하겠다 했지만, 욕심나는 물건이 없었다. 돈을 아끼려거나, 취향이 맞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왠지 내가 가진 것만으로 충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르신으로 인정받아 내가 빨리 늙는 것일까! 구제 상품 마니아인 내가 새 옷 입을 기회다. 더구나 남편 주머니를 활용할 좋은 기회에 물욕이 사라짐에 의아했다.
10. 돌아오는 전철에 흩어졌던 승객들이 퍼즐 맞추듯 끼리끼리 승차하고 있었다. 맞은편 좌석에 어르신들 얼굴에 피로감이 역력했다. 그분들의 모습에서 세월이길 장사 없음을 실감했다. 자리에 앉자, 주변에 아랑곳하지 않고 검정 봉지를 뒤적이거나, 곧 잠이든 어르신들 속에서 나도 체면 따위에 부담이 없었다. 남아있는 술기운에다 피로감이 밀려와 마음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던 것이 그만,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11. “당신! 아무리 경로석에 앉았다 해도 그렇지! 어떻게 코까지 골 아가며 잠을 자나? 그것도 벌건 대낮에, 나 원 참 창피해서!”
전철에서 내리자, 남편은 볼멘소리로 불평했다.
“내가 정말! 그러면, 깨우지 그랬어요.”
말하면서도 나는 겸연쩍게 웃었다.
12. 남편 발걸음이 빨라졌다. 종일 붙어 다니면서 부쩍 늘고 흐트러진 마누라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한 속내인지도 모른다. 앞으로 다가올 날의 마누라 모습을 앞당겨 본 것인데, 남편 눈에는 거슬렸을 것이다.
13. 평소 하던 대로라면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팔짱 끼며 ‘여봉!’ 콧소리 하면 그만인데, 오늘은 하지 않을 테다. 어차피 다가올 자연스러운 일상의 내 모습이다. 우리는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어른이 되었다. 그깟 몇 년 일찍 태어났다고 결혼생활 40년이 넘도록 찐 어르신으로 나를 대했던 남편이 아니었던가!
‘나도 오늘로 어르신 반열에 올랐으니, 맞짱 한번 떠봐야겠다! 자기 늙음은 모르고 마누라 늙는 것은 못 봐주겠다고 투정이니 그러시거나 말거나! 나도 이제부터, 어르신이거든! 흥!’ 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