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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강 학문의 길
1. 언론제현께
여기 계신 방청객들은 너무도 잘 아시겠지만, 제 하루하루의 생활이 말할 수 없이 바쁘다. 제가 구태여 이런 말씀을 드릴 건 없으나, 사실 이 방송은 녹화방송이다. 녹화를 하고 자막작업을 하는데 KBS에서 PD님들과 함께 한다. 제가 옆에서 조금이라도 도와드리면서 하고 있다. 그런 일들은 밤을 새우면서 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이 강의를 준비하는 것도, 제가 아무렇게 나와서 하는 게 아니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리고 남는 시간에는 책을 쓴다. 그래서 상상할 수도 없이 초를 다투어서 전념을 다해서 살아야만 한 주 한 주의 강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
제 생활을 아시는 분이면 알겠지만, 저는 어떠한 경우라도 잠을 거꾸로 자는 사람이 아니다. 저는 밤에 활동을 안 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 강의가 시작된 다음부터 제가 잠을 깎아가면서 1주일을 살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제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것 자체가 사실 기적적인 상황이다.
그래서 저는 너무도 시간이 없고, 여기에 전념해야 하기 때문에 강의 이외의 일에 일체 신경을 못 쓰고 산다. 예를 들어 강의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신문도 못 보고 지낸다.
괜히 신문들을 잘못 보았다가 감정이 상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불필요한 정보가 자꾸 들어오면, 제 강의에 방해를 받기 때문에 그저 여기에만 전념을 하고 살고 있다.
지난번에도 기자님이 여기를 오셔서 ‘저는 이 강의에 최선을 다하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는 게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 말만 했고, 저는 인터뷰한 적도 없고, 인터뷰할 생각도 없다.
그런데 얘기가 들리는데, 지난주 장안에 김용옥이 화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온 신문에 김용옥 이야기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내 귀에 자꾸만 들려오고, 만나는 사람마다 그러기에, 그런 것을 안보고 버틸 수도 없었다. 그래서 제가 여기 KBS에 오기 직전 두어 시간 동안, 언론에서 나온 저에 대한 것을 모두 보았다. 전부다 세밀하게 보았다.
저를 굉장히 비판하고 난리가 날 줄 알았다. 그래서 잔뜩 긴장을 해서 두 시간 동안 그것을 봤는데 아무 이야기가 없었다. 정말 아무 이야기가 없었다. 내가 생각할 실마리조차 담긴 이야기들이 없었다.
그래서 단지 언론 제현께서 저의 강의에 관심을 가져주시는 것이 고맙고, 그러니깐 앞으로도 계속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달라는 부탁만 드리겠다.
제가 언론에 나온 여러 기사들이나, 관심을 가지신 많은 분들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오늘 제가 정확하게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할 게 없다.
2. 나의 여정
단지 내가 어떤 사람이며, 내 학문이 과연 이 땅에서 무엇을 의미하며, 내가 왜 KBS에서 이 강의를 하고 있는지 간략하고 정직하게 말씀을 드리겠다.
저는 해방직후 천안에서 의사의 6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그 뒤에 성장을 해서 보성중고등학교를 나오고, 여차여차해서 여러 대학을 다닌 것도 여러분들이 잘 아실 것이다.
그런데 저는 하여튼 고등학교 때 공부를 참 못했다. 안했다고 말할 수도 있고, 제가 머리가 워낙 나빠서 공부를 못했다. 그런데 저는 중고등학교 시절에 주먹질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공부를 안 하고 운동을 주로 했다. 중고등학교때 운동을 많이 했다.
제가 용인대학에 가서 교수를 했던 것도, 제가 어려서부터 무술을 오래 연마를 해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용인대학에 가서 강의를 하고, 무도하는 학생들하고 있으면 아주 기분이 좋다. 난 그들을 특히 사랑한다. 그래서 내가 용인대학도 갔던 것이다.
고등학교 때까지 무술 연마에만 관심이 있고 공부를 안 했다. 그래서 집안에서 걱정이 했는데, 어떻게 어떻게 하다가 고려대학에 간신히 들어갔다. 이건 지난번에 말씀을 드렸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때 운동을 열심히 한 후유증으로 심한 관절염이 생겼다. 학교를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전신 관절이 팅팅 부었다. 그래서 들것에 실려서 천안으로 내려갔다.
그렇게 막내아들이 아프니, 저희 어머님이 얼마나 가슴 아프셨겠나? 그때 천안에서 저희 아버님이 병원을 하고 계셨다. 그래서 병원 2층 우리집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거기서 제가 한 2년을 보낸다.
그런데 그때 묘하게 우리나라에 평화봉사단이라는 게 왔다. 평화봉사단은 Peace Corps라고 하는 데, 그때 K1(Korea 1.)이 왔다. 케네디 대통령이 보내서 평화봉사단이 왔다.
그때 우리나라에는 GI라고 하는 미군을 빼놓으면, 미국사람들을 접하기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미국사람만 지나가면 따라가서 이야기해보려 하고, 만나기만 하면 ‘How are you?’하면서 영광으로 알던 시절이다.
평화봉사단이 제일 처음에 왔을 때, 모든 게 그렇지만, 초창기에 우리나라에 왔던 사람들은 아주 질이 높았다. 전부 대학원 석사, 박사들이었다. 아주 훌륭한 사람들이 미국에서 우리나라로 왔다. 요새는 국제교류협력단이라고 해서 우리나라에서도 그 비슷하게 대학생들이 외국으로 나간다.
그런데 내가 천안에 낙향해서 아파서 누워있을 때, 평화봉사단 1명이 왔다. 자기가 하숙할 집을 찾아보니, 그래도 미국 사람이 기거할만한 반반한 집은 우리 집 밖에 없다고 해서, 그렇게 소개를 받아서 우리 집에 왔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가 그들을 받았다.
내가 병상에서 2년을 사는 동안, 미국의 인텔리 평화봉사단이랑 2년동안 같은 방을 쓴 거다. 그런 호기를 잡아, 내가 아픈 가운데도 우리 어머니는 그런 식으로 나에게 교육을 시키신 거 같다.
그래서 나는 60년대 초반에 미국사람들하고 자유롭게 영어회화를 하고, 그들하고 대화하고 공부하는 능력을 키웠다. 내가 고려대 생물과를 다니다가 내려가서 그런 공부를 한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한문에 취미도 있었지만, 미국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묻는 것을 전부 우리 것이었다. 지나가던 농악패가 우리집에 오면, ‘또 돈 뜯어먹으려고 왔다’고 귀찮아했다. 그래도 우리집이 시골에선 부잣집이니깐 농악패가 오면 귀찮았다. 야단만 쳐서 내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미국사람들은 옆에서 그걸 희한하게 보고, 저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들과 사귀면서, 나는 그 사람들의 눈을 통해서 우리 문화를 알게 되었다. 이상한 이야기다. 부끄러운 이야기다. 우리 문화를 내가 모르고, 미국사람들을 통해 알게 되었으니깐 부끄러운 이야기다.
그들과 영어 공부를 하다보니깐, 우리 문화를 마치 미국인들이 와서 인류학적으로 한국문화를 연구하는 듯한 시각을 갖게 되었다. 20대초반의 어린 시절에 이런 시각을 갖게 된 것이 얼마나 귀한 기회였겠나?
그래서 그 뒤로 신학대학을 들어가고, 다시 고려대 철학과를 들어갔지만, 결국 내가 골인한 곳은 우리 동양철학이었다.
그 당시 동양철학을 공부하겠다고 했을 때, 우리 아버님이 ‘이놈아, 우리나라가 개화를 하려면 서양학문을 배워야지. 동양철학을 무슨 공부라고 하겠다는 거냐? 너 그거 배워서 종로에서 성명철학관을 하려고 그러냐?’고 하셨다. 우리 아버지는 그걸 얼마나 싫어하셨는지, ‘네가 동양철학하면, 내 자식도 아니다.’라고 하셨다.
아버님이 그렇게 야단을 치셨지만, 나는 동양철학이야말로 앞으로 내가 가야할 학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때부터 나는 한학의 세계에 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고려대에서 서양철학을 하고, 그 다음에 동양철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대만에 갔고, 그 다음에 세계적으로 엄밀한 한학의 본산인 일본 동경대학의 중국철학과에 갔다.
내가 대만에 갔을 적에는 중국의 북경대학, 남경대학, 중앙대학에서 오신 노석학들이 아직 살아계셨을 때였다. 모택동 정부에 타협을 안 하고 밀려 내려온 근세의 대학자들이 대거 대만대학에 아주 밀집해 있었다. 그때 내가 갔을 때, 평균 나이가 7,80대의 노교수들이었다. 창파오를 입고 강의하시는 그런 분들의 품격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때 나는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동경대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동경대학에서 그야말로 마지막 한학의 대가들을 모시고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그 다음에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고 82년도에 귀국했다. 여기까지는 제가 특별히 할 말이 없다.
3. 유학의 이유
제가 이 땅에 82년도에 귀국을 해서 고려대 부교수로 취임을 했다. 여러분들이 아셔야 할 것은, 제가 한국에 들어올 때 금의환향한다는 는 생각을 가지고 들어온 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내가 외국으로 떠나기 전에 한 달 동안 한국의 강산을 돌아보고 떠난다. 혼자서 한 달 동안 무전여행을 하다시피 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녔다. 내가 그때 본 한국이, 우리 산하의 마지막 산하였다.
나는 외국으로 떠나면서, 외국의 대단한 문물을 배우러 간 것이 아니었다. 물론 훌륭한 것을 많이 배우고 왔지만, 갈 때는 그런 목적으로 간 게 아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동양철학을 해가지고는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동양철학은 천한 학문이었다. 60년대 우리 학계는 동양철학을 학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 것을 하면 천한 것이었다.
그러니 이걸 설득시킬 가장 좋은 방법은 근사한 학위를 따는 거였다. 한국 사람들은 동경대학이라고 하면 깜빡하니깐, 하버드 대학이라면 깜빡 간다.
나는 1차적으로 이런 것 때문에 유학을 간 것이다. 정직하게 이야기한다. 외국이 선망의 대상이어서 간 게 아니었다. 물론 형들이 다 유학을 갔으니깐 영향을 받았지만, 인정을 받으려면 그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대만에서 중국 사람들하고 중국말로 중국학을 공부한다. 일본에서는 일본사람들에 의해서 한문 텍스트 한 자 한 자를 따져 읽는 엄밀한 훈련을 받았다. 미국에 가서도 그 사람들하고 공부를 했다.
3. 학문의 길, 번역
그렇게 공부를 하면서 느낀 것은 뭐냐? 내가 느낀 학문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학문이라고 하는 것은 번역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내가 이것을 오늘 이 시간에 말씀을 드려야겠다. ‘학문이라는 것은 번역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내가 고려대 부교수로 부임했을 때, 우리 고려대학에는 외국 유학생이 없었다. 연세대 학생들은 하이컬러라고 해서 외국유학을 많이 가고, 서울대 학생도 많이 간다. 하지만 우리 고려대 학생들은 고대 막걸리 촌놈, 안암골 호랑이 촌놈들이라고 한다. 외국유학을 안 나갔다.
내가 귀국을 했을 때, 자기 선배가 외국을 갔다 왔다고 해서 학생들의 관심이 높았다.
제가 하버드에 있을 때, 고려대 영문과의 김우창 교수님이 계셨다. 정말 위대한 학자시다. 내가 정말 존경하는 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천상천하유아독존인 인간으로 아는데, 이 땅에도 내가 존경하고 사는 학자들이 많다.
김우창 선생님의 학문 앞에 나는 100% 겸손하게 존경한다. 저보다 훌륭하신 분이다.
김우창(金禹昌, 1937~)
영문학자, 서울대, 하버드대에서 수학, 고려대 영문과 교수, 대학원장
문,사,철 다방면에 심도있는 비평으로 세계인의 존경을 받는 우리시대의 석학, 사상가
그런데 이 김우창 교수님이 미국에 오셨다가 날 보고, 참 가깝게 지냈다. 그래서 한국에 처음 들어왔으니깐 잡지에 글을 하나 기고하라고 하셨다. 김교수님이 그 당시 민음사에서 나오는 ‘세계의 문학’이라고 하는 잡지를 편찬하고 계셨다. 그래서 ‘세계의 문학’에 귀국을 해서 처음 쓴 글을 보냈다.
1982년도에 귀국해서 처음 쓴 글이다. 그것이 83년도 봄호에 나온 ‘우리는 동양학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글이다.
“우리는 동양학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세계의문학], 통권 27, 민음사, 1983년 봄호.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통나무)에 재수록
거기에서 내가 한 말은 이런 것이다.
우리는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모든 학문적 활동이나 지적인 소산이라고 하는 것은 99%가 한문으로 이루어졌다. 한문이라는 언어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언문이라는 것은 세종대왕 때 만들어졌지만, 부녀자들이나 쓰는 특수한 언어로서 존재했고, 대부분의 모든 우리나라의 지적활동은 한문(漢文)으로 이루어졌다.
그 다음으로 20세기에 들어오면, 학문이라는 것은 전부 영어 아니면 독일어, 불란서어 등의 서양언어였다. 그것을 모르면 어디가도 행세를 못했다. 20세기에 공부를 했다고 하면, 영어를 모르면 공부로 취급을 안 해주었다.
그러니깐 기본적으로 한국문화는 외국어 문화권속에서만 학문을 해왔다.
그럼 20세기 우리나라 학문의 과제상황이라고 하는 것은, 20세기의 근대화라고 하는 것은, 한자문화권을 한글문화권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한자문화권을 한글문화권으로 바꾸자는 게 개화다.
번역이란 한문문화권을 한글문화권으로, 사어(死語)를 활어(活語)로, 문어(文語)를 구어(口語)로, 고대를 현대로, 과거를 현재로 바꾸는 작업이다
그러나 한자문화권의 한자만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다. 과거 우리문화도 일종의 외국문화와 같은 것이다. 우리의 과거 문화도 한자문화로 쓰여진 것들이 태반이다. 중국은 우리랑 말이 다르고, 표현이 다르다고 세종대왕도 말씀하셨다.
영어라든가 모든 외래어 문화권은 우리한테 타자(他者)다. 그것을 우리말로 만드는 것이 개화고 우리 학문의 길이다.
과거의 한문문화가 시간적 타자(他者)라면 현재의 영어문화는 공간적 타자(他者)이다. 이 모두가 동일하게 번역의 대상일 뿐이다.
그런데 이 번역이라고 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한국 사람들에게 재미난 게 뭐냐 하면, 번역이라고 하는 것을 아주 우습게 안다.
여기 사마천의 사기의 어떤 부분을 놓고 논문을 쓰려고 한다면, 논문을 쓰는 건 쉽다. 왜냐하면 자기가 해석이 안 되는 부분은 그냥 넘어갈 수도 있고, 여기서 한줄 베끼고, 저기서 한줄 베끼고, 남이 써놓은 것을 여기저기서 모아서 하면 된다.
하지만 이것을 한줄 한줄 우리말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하나 그 출전을 찾아서 하지 않으면 번역이 안 된다. 이 번역이라고 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문제 상황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 학계는 번역이라고 하는 것을 아주 경시했다. 지금도 대학에서 학자들을 평가할 때도 번역은 그냥 우습게 안다. 그리고 위대한 논문을 쓰라고 한다. 그런데 이 논문이라고 하는 것은 사상누각이다. 기본적으로 우리나라의 모든 학문은 국학(國學)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학문의 지고의 목표는 국학(國學)의 정립이다. 외래학문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학문이 되어야한다. 따라서 번역 작업을 거치지 않으면 국학의 기초가 설 수 없다.
지금 여러분들이 공부하는 논어도 중국학이다. 그런데 결국은 국학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 것으로 가야 한다. 그런데 우리 것을 하려면 논어를 공부해야 한다. 우리 것이 전부 13경이라고 하는 유교 경전 속에 들어있다. 그 한문의 기본적인 언어적 틀 속에서 다 짜여진 것이다. 그걸 모르면 국학으로 들어갈 길이 없다.
‘논어’나 기타 十三經이 모두 우리나라 과거 언어의 어휘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휘인 동시에 우리 삶을 지배한 강력한 가치관이었다.
이 논어라고 하는 것은 2,000년 동안 우리 민족이 살아온 하나의 언어체계이다. 그래서 이것 자체를 알아야 한다.
4. 조선왕조실록
그런데 우리한테 조선왕조실록이라는 게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편년체 역사라고 한다. 일어난 일을 매일 날짜별로, 왕을 중심으로 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써놓은 역사다. 그걸 매일매일 써 놓았다.
편년체(編年體)
사마천 ‘사기’의 기전체(紀傳體)와 대비되는 것으로, 연월일의 흐름에 따라 순서대로 사건을 기록한 역사서술 방법
조선왕조실록
태종 때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 1,893권. 사초(史草), 승정원일기, 의정부등록 등의 자료를 가지고, 다음 왕대의 실록청에서 전 왕대의 역사를 편찬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참으로 대단하다. 분명히 왕은 전부 한국말로 이야기하셨을 텐데, 옆에서 사관이 바로 한문으로 적은 것이다. 승정원 일기도 모두 한문으로 적었다.
내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을 영어로 타이핑 하라면,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몇 사람 없다.
그런데 궁정에선 그렇게 기록을 했다. 한문으로 다 기록을 한 것이다. 우리나라 민족처럼 이렇게 역사를 세밀하게 기록한 나라가 없다.
인류역사상 한 왕조에 대하여 이렇게 방대한 양의 문헌을 남긴 예가 없다. 우리나라 조선왕조실록의 전체 분량은 중국역대 역사 전체를 모은 24사의 전체 분량보다 많으면 많지 적지 않다.
그렇게 매일 매일의 일지를 방대하게 적어놓은 것인데, 그런 것만 해도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알려면 한글로 번역해야 한다. 번역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이 한글번역을 1960년대부터 남한에서도 했고, 북한에서도 했다. 남한에서는 어디서 했냐하면, 국가기관인 ‘민족문화추진회’라는 곳에서 했다.
민족문화추진회
1965년 문교부 산하의 고전국역단체로 발족. 현 재단법인. 국학 불모지의 풍토 속에서 꾸준히 고전의 국역과 국역자 양성에 힘써왔다. ‘조선왕조실록’, ‘한국문집총간’ “고전국역총서‘를 발간. 우리나라 번역문화에 탁월한 공헌을 하였다.
또 ‘세종대왕기념사업회’라는 데서도 했다. 이 두 기관에서 우리나라 조선왕조실록을 맡아서 우리말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다.
5. 코끼리 이야기
그런데 태종 11년 우리나라에 코끼리가 온다. 코끼리를 누가 보냈냐 하면, 아시카가 요시모찌라는 무로마치 막부의 장군이었다.
아시카가 요시모찌(足利義持, 1386~1428)
무로마찌 막부의 4대 쇼오군(將軍). 요시미쯔(義滿)의 아들. 실록에는 ‘源義持’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여러분 생각을 해보라. 코끼리를 배에다 실어서, 현해탄을 건너서, 그걸 수송해서 서울 장안까지 그 거대한 코끼리를 태종11년에 가져온 것이다.
日本國王源義持, 遺使獻象. 象, 我國未嘗有也.
- 태종 11년 2월 22일 기사
그런 기사가 하나 있다고 하면, 그 다음에 이 코끼리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면, 편년체니깐, 책을 다 들여다보면서 기사를 쫓아가야 한다.
답을 먼저 말씀드린다. 일본에 가서 일본 쪽 역사를 뒤져보니깐, 일본 입장에서도 그 코끼리는 동남아에서 처음으로 온 코끼리였다. 그런데 그 코끼리는 일본에서도 처지곤란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불교적으로 생각하면, 코끼리는 상서로운 동물이다. 그래서 아시카가 요시모찌라는 사람은 훌륭한 불교국가인 조선과 이 상서로운 동물을 공유해서, 이 복을 나누어갖자고 한다. 자기네 땅에 한 번 왔으니깐, 그 코끼리를 조선에 보내라고 한다. 그래서 그 코끼리를 귀하게 모셔 왔다.
이것을 종로 앞의 사복시라는 말을 기르는 관청에 이야기해서, 거기서 기르게 했다.
命司僕養之.
그런데 이놈이 하루에 콩 다섯 말 씩을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당시 콩 다섯 말은 국가재정이 흔들릴 정도의 엄청난 것이었던 거 같다.
日費豆四五斗.
그렇게 키웠는데, 태종 12년 12월 10일 신유일 기록에 따르면, 전공조전서 이우(李瑀)라는 사람이 코끼리를 보러갔다. 이유라는 사람은 대단한 유학자였던 거 같다.
前工曺典書李瑀死. .....瑀以奇獸往遺之. 哂奇形醜以唾之.
그 사람이 ‘왜 이렇게 못생겼냐!’면서 코끼리한테 침을 뱉고 ‘이놈!’하고 소리를 지르니깐, 코끼리가 이우(李瑀)를 밟아 죽였다.
象怒踏殺之.
태종 12년 12월 10일 기사
그렇게 이우가 밟혀 죽자, 그 다음에 상소가 올라왔다. 코끼리가 사람을 죽이고, 이렇게 무지하게 많이 먹으니 벌을 주어야한다고 하면서, 코끼리를 귀향 보내라는 상소가 올라왔다.
그래서 결국 그 다음 실록을 찾아보면 태종14년에 순천 앞바다의 장도라는 곳으로 귀향을 보낸다. 아마 그 당시에 거기까지 배로 보내는 것도 대단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 갖다 놓았는데, 또 거기서 1년 정도 있다가 전라관찰사로부터 장계가 올라온다.
‘이놈이 수초는 아니 먹고, 사람을 쳐다보고 눈물만 흘리고 있으니, 이것 참 큰일 났습니다.’라는 상소문이 올라온다. 거기가 섬이니깐, 섬사람들이 미역이나 베어다 주었던 모양이다. 태종 14년에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馴象放于順天府獐島.
不食水草, 日漸瘦瘠, 見人則墮淚.
- 태종 14년 5월 3일 기사
그래서 불쌍히 여긴 나머지 ‘코끼리를 육지로 보내라.’고 한다. 그래서 코끼리는 다시 육지로 온다. 그래서 다시 전라도 사람들이 기르는데, 기록이 세종실록으로 넘어간다.
세종2년 12월 28일의 기사에 ‘이놈이 일 년에 소비하는 쌀이 48섬이요, 콩이 24섬이나 되니 도저히 우리 전라도 재정으로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 혼자만 기르기가 어려우니, 하삼도 즉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를 돌아가면서 기르게 해 주십시오.’라고 나온다.
道內之民, 獨受其苦, 請幷令忠淸慶尙道輪養.
세종2년 12월 28일 기사
그래서 임금은 ‘그럼, 그렇게 하라.’고 허락한다. 결국 이 코끼리를 하삼도에서 돌아가면서 기르는데, 제일 마지막에 세종3년 충청도 관찰사의 장계가 올라온다.
제일 마지막에 공주로 간 거 같다. ‘공주(公州)에서 기르다가 거기서 어느 노비가 코끼리한테 또 밟혀 죽었고, 이렇게 식량을 축내니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그러니 이 코끼리를 다시 섬으로 귀향 보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는 장계가 올라온다.
그래서 세종3년 3월 14일 결정내리시기를, ‘그럼 하는 수가 없다. 코끼리를 다시 섬으로 보내서 방목을 하되, 이번에는 큰 섬으로 보내서 거기서 편하게 해초가 아닌 것을 먹고 살 수 있도록 하라.’고 한다.
請放海道牧場. 宣旨, 擇水草好處放之, 勿令病死.
- 세종 3년 3월 14일 기사
여기까지 기사가 나오고, 더 이상 관련 기사는 안 나온다.
이 기사를 통해 과거 지방관청의 빈곤한 재정규모와, 조선 사람들의
생명을 애호하는 따뜻한 마음을 읽어낼 수 있다.
그래서 아마 그 코끼리는 어느 섬으로 귀양을 가서 편하게 여생을 보낸 거 같다.
코끼리 관련 기사가 조선왕조실록에 6차례 나온다. 옛날에 이 기사를 한 사람이 조선왕조실록 원문에서 추적을 한다면, 그 코끼리 기사 하나만 가지고 논문을 쓰려고 한다면, 그 사이에 껴들어간 사건이 한 8천여 개 나온다. 그걸 다 뒤지려면 몇 년이 걸린다.
그런데 지금은 조선왕조실록이 완전히 번역되어 조선왕조CD롬이라는 것이 나왔다. 김현이라는 저의 제자와 이웅근 박사라는 분이 이걸 만들었다. 이웅근 박사는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교수를 하셨던 분인데, 학교를 나오셔서 서울시스템이라는 것을 운영하시면서 이 씨디롬을 만드는데 거의 60억을 투자했다.
김현(金炫, 1959~)
고대철학과, 정문연에서 수학. 도올 김용옥 문하에서 공부. 윤사순 교수 지도하에서 녹문 임성주로 박사학위. 서울시스템에서 ‘조선왕조실록씨디롬’의 방대한 작업을 완성. 현 한국과학기술 정보연구원 정보기술부장.
이웅근(李雄根, 1933~)
서울대 상대. 미네소타 대학에서 공부.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56~76). 서울시스템을 설립하여 국학자료를 데이터베이스화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고 국학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현재 동양미디어를 설립하여 국학데이터베이스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걸 만들어서 지금은 ‘코끼리’라고 두드리면, 여섯 개 기사가 쫙 한 눈에 나온다.
우리나라 학문이 해야 할 것은 이렇게 기본적이다. 과거에 범인(凡人)들이 접근할 수 없었던 한문으로 된 사료들이 우리말로 번역되어야 한다. 번역이 되면 이렇게 편하게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게 된다.
6. 나의 본령, 번역
많은 사람들이 김용옥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느냐? 많은 사람들은 김용옥이 여기서 강의를 한다고 그러니깐, 무슨 사기꾼 같은 놈이 나와 가지고, 무슨 재미있게 웃기는 이야기나 하고, 뭐 그런 사람인줄 아는데, 나는 엄밀한 한학 수업을 거쳤으며, 내 관심은 오직 번역 하나다.
과거의 우리 문명은 모두 한문 문화권에 속해 있다. 내가 한문을 시작하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생각했다. 평화봉사단으로 온 미국 사람들한테 그렇게 공부를 하면서 보니, 우리나라의 문화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래서 여기서 내가 할 일은 무엇인지 생각했다.
내가 여기 KBS에 나와서 강의하는 것은, 저에게 있어서 하나의 계몽적인 서비스에 불과하다. 제가 하고자 하는 저의 본령은 번역이다.
그런데 이 번역이라고 하는 게 쉽지 않다.
제가 처음 귀국해서 쓴 논문은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것이었고, 그 뒤로도 ‘번역에 있어서의 공간과 시간’을 썼다.
‘번역에 있어서의 공간과 시간’
‘민족문화’ 제9집. 민족문화추진회. 1983
그리고 철학이라는 게 뭐냐? 철학이라는 것은 번역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작업이라고 이야기했다. 제가 한국에 와서 처음부터 한국학계에 와서 던진 과제는 그것 하나였다.
철학의 사회성(1985)
도올논문집 통나무 1991
번역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밑도 끝도 없이 복잡한 이야기들이 많다. 이 번역이라는 것을 놓고, 우리가 어떻게 접근해야 될까? 이 번역이라는 게 쉽지 않다. 그야말로 정말 지루하고, 아주 괴롭다. 번역을 하다가 막히면 잠이 안 온다. 해석이 안 되니깐, 이걸 어떻게 해야 될지 고민하다보면 잠이 안 온다.
7. 번역의 어려움
제가 광산 김씨인데 사계(沙溪) 선생의 자손으로 신독재(愼獨齋)라는 분이 있다. 내가 중용강의에서 신독이라는 말도 했다.
김집(金集, 1574~1656)
김장생(金長生)의 아들. 호는 신독재(愼獨齋). 예조참판, 대사헌을 역임하였으나 주로 초야에 묻혀 학업에 전념하였다. 기호학파의 거봉. 연산의 돈암서원에 향사. 저서 ‘신독재문집’
엊그제께도 광주에서 어느 분이 신독재의 시를 액자에 담아 보내셨다. 시의 내용이 ‘前步有能後步能’로 ‘앞으로 걷는 것도 능하고 뒤로 걷는 것도 능하다.’였는데, 이게 해석할 길이 없다.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前步有能後步能
앞으로 걷는 것도 능하고 뒤로 걷는 것도 능하다.
한문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해석이 안 된다. 그래서 보낸 분한테 전화를 걸고 여쭈어보니깐, 신독재 선생이 벼슬도 안하고 시골에만 사셨는데, 아마 가재 걸음을 걸으셨는지 별명이 가재였다고 한다.
그래서 훈장선생이 지나가면 아이들이 옆에서 ‘가재 선생이 지나 가신다.’라고 놀린 거 같다. 그래서 어떤 진지한 아이가 ‘훌륭한 선생님보고 왜 가재라고 그럽니까?’라고 물으니깐, 그때 쓰신 시(詩)라고 한다.
背石穿砂自作家
바위를 등에 엎고 모래를 파서 스스로 일가를 이루고 살지.
가재는 앞으로도 잘 가지만 뒤로도 잘 간다. 돌을 등 위에 지고, 모래를 헤치면서, 한천수(寒泉水)에 스스로 자기 가문을 짓고 산다. 이렇게 이어지는 시(詩)가 기 막힌다.
별명에 관한 정보를 아는 순간, 뜻이 탁 들어온다. 그 정보를 모르면, 내가 이걸 어떻게 해석하겠나? 무슨 수로 알 수 있겠나? 번역이라는 것은 이렇게 어려운 것이다. 모든 것을 조사해야 하고, 하나하나 문법적인 것도 따져야 하고, 명료하게 자기 해석이 안 되면, 번역을 못하는 것이다.
8. 번역에 대한 외국의 태도
우리나라 학문이 제대로 되려면 번역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내가 일본에 가서 뼈저리게 느낀 게 있다. 미국도 그렇지만, 일본의 대학들은 전부 번역 그 자체를 학자의 제일 성과물로 여긴다.
일본에서 ‘당신은 정다산을 연구했습니까? 그럼 정다산의 무엇을 했습니까?’라고 물으면 반드시 ‘나는 정다산의 무엇을 번역했습니다.’라고 이야기 안 하면, 학자취급을 안 해 준다.
그리고 학문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공유가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똑같은 입장에서 알 수 있어야 한다. 나만 정다산을 아는 게 아니라, 정다산을 모든 사람들이 읽고 똑같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번역이 안 되면, 그건 번역이 아니다. 그리고 정다산의 작품이 번역이 되면, 정다산의 전공자와 비전공자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깐 기본적인 사유들을 정확하게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만이 학문의 진실한 토대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이렇게 황량한 한국 학문에서 논문은 무슨 놈의 논문이 필요하단 말인가!
정말 아셔야 되는 게 있다. 미국 대학에서는 동양학의 고전들이 엄청나게 번역되어 나온다. 각 대학의 출판사에서 정다산의 책을 포함해서 모든 책들이 다 미국에서 번역되어 나온다. 중국의 어마어마한 고전들이 다 정확하게 번역되어 나온다.
그게 어떻게 나오는 줄 아는가? 우리나라의 어떤 출판사에서 번역기획을 해도 안 된다. 현실적으로 그게 어렵기 때문이다. 훌륭한 번역으로 책 한 권을 번역하려면, 어떤 것은 몇 십 년이 걸린다.
젊은 사람들이 뜻을 갖고 대학에 들어가면 석박사 공부를 하려고 한다. 그러면 박사논문 하나 쓰는데 최소한 10년에서 20년이라는 인생을 그 학문에 전념하면서 산다. 그런데 미국 대학을 보면, 미국의 고전학과 동양학 계통 모든 분야는 번역 자체를 바로 학위로 인정한다.
미국의 우수대학의 인문학, 특히 고전학 관계의 박사학위 논문은 절반 가량이 고전 텍스트의 번역 작품이다. 일반연구논문보다 한 고전텍스트의 번역을 학위수여 근거로서 더 높게 평가한다.
하버드 대학의 경우에도 박사학위 논문의 절반이 고전 번역서다. 번역을 하고, 그 앞에 간단한 서문만 붙이면, 그대로 박사 학위를 준다. 그러고 나서 그것을 바로 출판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 정보를 공유할 수 있게 한다.
그런데 2,000년 동안에 걸친 방대한 우리민족 역사의 모든 고전 문헌이 한문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 대한 번역은 없다. 기초사료의 번역이 없다.
칸트,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등의 학문은 1차적으로 희랍어 원전에서 우리말로 정확하게 번역되어야 한다.
중국 대승불교의 기본 작업이 무엇인가? 바로 산스크리트어로 되어 있는, 팔리어로 되어 있는 경전을 그대로 다 번역한 것이다. 팔만대장경의 역사인 것이다.
20세기 우리나라 학문이 제대로 되려면, 서양 학문이든 우리 전통학문이든, 우리 학계의 거의 80~90%가 기초문헌을 정확하게 번역하는 것에만 힘을 쏟아야 된다. 그래야만 우리 학문의 기초가 놓이게 된다.
8. 나의 저술
지금의 내 실력을 파악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여러분들 집안에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창호지에 한문으로 쓴 문집이 있으면, 그걸 가져다 놓고, 김용옥과 다른 누구든 데려다 앉히고, 그걸 해석하는 실력을 비교해 보라. 내 실력은 3,40년간 피눈물 나게 쌓아온 실력이다. 우리 역사는 이런 기초적인 사실을 왜 무시하는가? 제가 여러분들을 웃기려고 강의하는 게 아니다. 이 시대의 언론이 나에게 뭐라고 떠들든 다 쓸데없는 이야기다.
내가 관심으로 가지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아셔야 한다. 그리고 내가 우리 민족을 위해 하고자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셔야 한다.
지금 강의하고 있는 내용을 내가 이 책에 썼다. 이것도 사실 별게 아니고, 다 번역이다. 논어에 대한 번역일 뿐이다.
내가 20년 전 한국에 들어와서 ‘세계의 문학’에 번역을 해야 한다고 썼다. 그래서 한국 기자분들이 나한테 ‘그동안 네가 번역해야 한다고 했는데, 네가 뭘 내놓았냐? 번역서가 뭐가 있냐?’고 한다.
내가 왜 안 내놓았겠는가? 계속 내놓았다. ‘석도화론’은 정확한 번역서다. ‘금강경강해’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는 금강경 중심 불교다. 우리나라의 소의경전(所依經典) 중 대표적인 것이 금강경이다. 이것의 가장 중요한 판본은 해인사에 있는 것이다. 합천 해인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판본은 세계적인 고판본(古版本)이다.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은 꾸마라지바(羅什)역을 제일로 치는데(402년 성립), 현존하는 꾸마라지바역본의 최고본이 우리나라 해인사 판본(1238년)이다.
그런데 세조가 금강경언해를 내었다. 금강경을 내면서, 그 양반이 자기 나라 해인사에 있는 판본을 안 보았다.
세조는 ‘금강경’에 정신적으로 몰입했다. 현존하는 ‘금강경언해(1464년 간행)’는 세조가 직접 한글로 토를 단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 해인사 고판본에 의거하지 않았다. 그 뒤로 우리나라 ‘금강경’은 모두 불완전한 후대의 판본들을 썼다.
중국의 명판본 같은 것을 가져다 보았다. 세조의 금강경언해는 우리나라에 있는 최고 판본인 금강경을 원본으로 해서 만든 게 아니다.
내가 최초로 우리나라 합천 해인사에 있는 고려대장경 판본의 금강경을 가지고, 산스크리트어랑 일일이 대조를 해서, 이 책을 만들어낸 것이다.
도올 김용옥의 ‘금강경언해’는 세계 최초로 우리나라 해인사 ‘금강경 고판본을 산스크리스트 판본과 대조하여, 아름답고 정확한 우리말로 번역해낸 사건이다.
서양철학에 있어서도 가장 어려운 문헌을 가져다가 번역했다. 예를 들면 화이트헤드라는 사람의 영어원문을 번역하면서, 나의 번역 과정에서 생긴 문제들까지 하나하나 다 써주었다.
이성의 기능
20세기의 대표적 서양 철학자 화이트헤드(A.N.White head, 1861~1947)의 The Function of Reason을 도올이 우리말로 옮긴 책. 모든 단락마다 원문과 번역과 案(해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식의 번역은 원문과 번역이 함께 있기 때문에, 틀린 게 있으면 금방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내가 번역과정에서 미비하고 의심되는 것까지 다 적어놓았다. 그래서 여러 후학들에게 ‘내가 여기는 잘 이해되지 않으니깐, 더 조사해보라.’고 적어놓았다. 이건 셰익스피어의 어디서 인용되었고, 저건 칸트의 어디서 인용이 되었다고 다 밝혀주는 작업을 했다.
이렇게 번역을 하고 사는 게 김용옥의 삶이다. 이런 업적이 3,40년 쌓여서, 내 저술이 40여권 된다.
9. 고전번역가 김용옥
국민여러분 저를 정말 믿어주세요. 나는 이 강의 100강이 끝나면, 내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나는 아무 욕심이 없다. 이 강의가 끝나고 나면, 내가 돌아갈 곳은 이런 번역의 세계다. 나는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아직 사상가 축에도 못 낀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세계가 있다.나만이 보는 우주가 따로 있다. 그러나 아직 말할 단계가 못된다. 내가 왜 침술을 연구하러 한의과 대학까지 가겠나? 왜 그런 짓을 했겠나? 내가 바라보는 세계관과 인체관의 모든 문제가 얽혀있기 때문이다. 내가 앉아서 뭔가 생각해볼 기회를 얻으려고 간 것이다. 이리에 있는 하숙방에 가서 6년을 살면서 용맹정진하려고 그런 기회를 만든 것뿐이다.
나 나름대로 생각하는 세계가 있지만, 이런 것들을 아직 발표할 단계도 아니다. 내가 잘 알지도 못하고, 애매모호하다. 단지 추구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사상가도, 철학가도 아니다. 나는 단지 번역가다. 고전번역가일 뿐이다. 그래서 강의가 끝나면 다른 일은 안하고 그저 고전번역만 하겠다는 것이다.
10. 재미
그리고 제가 그런 고전번역의 성과를 가지고 여기에 와서 재미있게 강의를 할 뿐이다. 아무리 어려운 철학이라 할지라도 이야기는 재밌게 해야 한다.
지금은 안 그렇지만, 우리나라는 옛날에 교수 임명장을 받으면, 호텔로 데리고 가서 사흘 동안 반공교육을 시키고, 학생 조지는 훈련만 시켰다. 지금은 물론 안 그럴 것이다.
그런데 제가 하버드 대학에서 강사 수령장을 받으니깐 오라고 했다. 거기선 교수 임명이 되면 교수들을 데려다가 사흘 동안 ‘어떻게 학생들에게 유모러스하게 강의를 하나?’ 거기에 대한 집중적인 훈련을 시킨다. 강의는 일종의 엔터테인먼트라는 것을 가르친다. 그런 훈련을 시킨다.
너희들이 아무리 위대한 지식을 갖고 있더라도 전달능력이 없으면 아웃이라는 것이다.
11. 강의에 대한 태도
제가 여기서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든, 웃기면서 이야기를 하든, 무슨 제스처를 하든, 이건 다 언어다. 말이다. 말장난이다.
주역 계사에 書不盡言, 言不盡意라고 했다. 책이라고 하는 것은 말을 다 할 수 없고, 말이라는 것은 그 뜻을 어떤 경우에도 다 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書不盡言, 言不盡意
[주역][계사]上
내가 여기서 말하는 걸 가지고, 내가 말하는 뜻을 여러분들에게 다 전달할 길이 없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장자가 말하듯, 그 뜻을 얻으면 말을 잊어야 한다. 여러분들이 나한테서 뜻을 얻으면 바로 잊어버리기 바란다. 김용옥도 잊어버리기 바란다.
言者所以在意, 得意而忘言
말은 오직 뜻을 전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그 뜻을 얻으면 말은 잊어버려라.
[장자] [외물]
12. 나의 소망
어느 평범한 주부 독자가 잘 썼다. ‘김용옥이 KBS에 나와서 뭐라고 떠들든, 한국의 시청자들은 김용옥의 말을 취사선택할 능력이 있다. 걱정마라.’
내가 추구하는 세계는 학문의 기본이다. 그리고 나는 많은 사람이 이 강의를 듣고, 나처럼 화려한 사람이 되고, 남을 웃기면서 강의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
나는 이 땅의 젊은이들이 이 강의를 듣고, 뜻을 얻은 다음에 내 말을 잊어버리기 바란다. 어려서 김용옥이라는 사람이 강의에 나와서, 엄마랑 텔레비전을 봤는데 뭔가 뜻있는 말씀을 했었다. 그것이 뇌리에 박혀서 그저 훌륭한 사람이 되면, 내가 뭘 더 바라겠나?
난 엉망진창이 되어도 좋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이제 아무리 나를 왜곡하려고 해도 왜곡이 안 된다. 텔레비전을 통해 여러분들은 나의 진실을 그대로 보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무슨 거짓말을 하겠나? 여기서 거짓말을 하면 금방 들통이 날 텐데 무슨 거짓말을 할 수 있겠나?
그리고 내 강의를 전부 분석해 보라. 무슨 부정적인 이야기를 했나? 서로 이해하고 돕고 긍정적으로 우리 사회의 기초적인 도덕을 만들어가자고 했다. 나는 광신을 싫어한다. 종교적 문제에 대해서도 무슨 문제든, 난 광신을 싫어한다. 나는 이 자리에서 남을 비판하지 않는다. 내가 비판하는 것들은 모두 추상명사들이다. 우리 사회의 원리에 관한 문제들이다.
나는 앞으로도 절대 어떤 특정한 개인에 대한 공격을 하지 않는다. 내가 뭐가 무섭겠나?
그러니깐 이제는 이해하기 바란다. 우리는 선진문명이다. 선진국 사람들이다. 이제는 과거처럼 남을 헐뜯고 비방하는 그러한 시대에서 벗어나야한다. 저 사람이 진정 무엇을 위해 살고, 어떠한 가치를 구현하는가? 그것을 봐야 한다.
나는 이 강의를 재미있게 하지만, 여러분들은 재미 때문에 이 강의를 듣는 것이 아니다. 삶의 의미를 주기 때문에 듣는 것이다. 의미, 뜻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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