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번호 : 경북 문화재자료 제 452호(2003년 12월 15일 지정)
소 재 지 :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 773
자천교회(담임목사 손산문)는 약 100년전 개신교 전파의 교회사적 유산이며,
경상북도에서 현존하는 유일한 한옥 교회당 건물로서 비교적 원형이 잘 보전되고 있으며 우진각지붕 목조 단층으로 한국목조건축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내부 공간구성은 교회형식을 채용하고 있으며 남녀 예배석을 구분하고 있다.
개신교 선교 초기의 시대적 건축적 상황과 교회건축의 토착 과정을 잘 반영하고 있는 문화재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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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서 서당 훈장을 하던 권헌중(權憲中)이 1897년 외국인 선교사 안의와(J.E.Adams)를 만난 것을 계기로 1903년 창립한 우리나라 초기 교회. 자천교회는 초기 한국 교회의 신앙유산을 그대로 간직한 역사 깊은 교회로서 경상북도 지방문화재 문화재자료 452호로 지정된, 전국의 몇 안 되는 개신교 문화재이다.
오늘 우리들의 신앙이 있기까지에는 먼저 신실한 믿음의 선진들이 있었고, 그들의 순교의 피와 헌신의 삶이 바로 오늘의 한국 교회를 있게 한 초석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 선진들의 신앙과 삶은 오늘 우리들의 신앙 삶을 통하여 내일의 한국 교회를 책임질 미래 세대에까지 연결되어 있다
▶ 예배당을 짓기까지
교회가 점점 부흥하므로 안의와 선교사는 권헌중에게 초가집 예배당 대신 더 넓은 공간의 예배당을 건립하도록 권유를 했다.
이에 권헌중은 새로운 예배당을 건축하기로 결심하고 일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권헌중의 계획은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는 ‘유교 국가에 웬 서양 종교인 기독교인가?’라는 지역주민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결국 새로운 교회 건물을 건축하는 계획은 잠시 멈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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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헌중은 주재소(지금의 지서)와 신촌 면사무소를 건축해주는 조건으로 새로운 교회를 건축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따라서 6개월 동안 이 모든 일을 마친 이후에 지금의 자천교회 건물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경제적인 부담을 안고 우여곡절 끝에 자천교회는 헌당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새 성전의 헌당식을 언제 했는지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없어 안타깝다. 현재 자천교회가 창립일로 지키고 있는 날은 1903년 4월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이미 훨씬 이전에 교회가 세워져서 모임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남아 있는 목조 기와 건물은 1904년 건물이 완성되어 이미 면사무소에 종교 건물로 등기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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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울했던 일제 치하와 유교적 토양에서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완성된 자천교회 목조 기와 건물인 일자형 교회는 화려하지도 웅장하지도 않은 모습으로 투박한 시골의 성도들과 100년 신앙 요람지를 지켜오고 있다. <권혁동 진술>
“국내 유일 ‘一’자형 예배당” - 신성학당(新星學堂, 새별배움터)
신성학당은 과거 권헌중 장로가 자천교회 내에 설립한 신성학교의 전통을 이어 받은 배움터로서 내일의 한국 교회와 사회를 이끌어갈 새로운 세대들의 교육을 위한 공간이다.
전국에서 유일한 전통 한옥 교육관인 이곳은 교회 예배당보다 조금 더 오래되었는데 2007년도에 고(故) 김경환 선생이 교회에 기증한 것으로 그 동안 폐가로 방치되었던 것을 교회가 보수, 정비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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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위량
한국 땅에 개신교 복음이 전해지 것은 1884년 이전의 일이다.
많은 선교사들이 복음을 들고 한국 땅과 접촉을 시도했다.
뿐만 아니라 이전에 성경과 접촉도 있었다.
그러나 개신교 복음의 첫 발의 기준을 1884년 9월 20일로 이야기하는 것은 미국 북 장로교 소속 배위량(裵褘良, W. M. Baird)의 선교사인 알렌(Horace N. Allen)이 한국 선교를 목적으로 왔기 때문이다.
알렌과 더불어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아펜셀러(H. G. Appenzeller), 그리고 스크랜튼(M. F. Scranton)과 같이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한 선교사들에 관하여 한국 교회사를 기술함에 있어서 많이 다룬다.
하지만 각 지방 교회사 이야기를 위해서는 지역에서 활동한 묻혀져 있는 선교사들에 관해서 언급해야한다.
영남지역 교회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배위량(裵褘良, W. M. Baird) 선교사에 관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물론 자천교회의 이야기의 출발점도 배위량 선교사로부터 출발해야 옳을 것이다.
영남지방과 관계한 배위량 선교사의 이야기는 1891년 2월 2일 두 부부가 부산으로 온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들은 부산에 입국하던 9월부터 본격적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배위량 선교사는 주로 개인 전도와 지역 순례를 통해 신자를 확보해 나갔다.
그는 자신의 방을 개방하려 사랑방으로 활용하여 전도를 위한 접촉점으로 삼았다.
그래서 배위량 자신의 방을 ‘동네 사랑방(omnibus house)’으로 불리기도 했다.
배위량은 부산 영선현을 집중적으로 공략한 끝에 주 3회로 모이는 정기 모임과 기도회가 시작되었다.
여기서부터 출발하여 1891년 11월 7일 영남 지방의 어머니 교회인 오늘의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초량 교회가 설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대구와 경북 지방의 장로교회 전래에 관한 이야기는 부산에서 선교 사역을 감당하며 초량교회를 출발하게 했던 배위량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부산에서 선교 사역을 감당하다가 1893년 4월 17월부터 5월 20일까지 1,240리의 대구와 경북지역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의 전도 여행은 대구를 중심으로 한 경북 지방의 선교를 위한 최초의 시도로써 경북지방 선교의 시작이 되는 중요한 선교 여행이다.
1893년 4월 22일 배위량은 서경조 조사와 조랑말을 타고 마부인 박재룡 소년을 데리고 밀양 청도를 지나 팔조령을 넘어 가창을 경유하여 대구에 들어간다.
100년의 자천교회 이야기, 신앙의 터 위에 세워지다"
이날은 대구 땅에 개신교 복음의 사자가 처음 도착한 감격의 날이었다.
이들은 대구에 3일간 머물고 25일 동명을 지나 상주, 안동, 의성, 신령, 배위량 선교사의 선교여행 경로 영천, 경주, 울산을 경유하여 다시 동래로 돌아가는 여정으로 선교 여행을 마치게 되었다.
그가 대구를 방문하여 어떤 형태로 복음을 전했는지 자신의 일기문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일기문에서 “전도할 틈은 없었으나 많은 서적을 나누어주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배위량 선교사의 일기문의 기록을 볼 때 대구 지방의 개신교 복음의 접촉은 1893년 4월 22일 책자를 통한 복음전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894년 배위량은 다시 대구를 방문하게 된다.
그리고 대구가 선교의 전략적 기지로서 매우 적당한 위치라는 점을 확신한다.
그리고 ‘대구는 경상도 북부지방의 중심지며, 인구가 많고, 교통상 서울과 부산이 연결되며, 경상감영이 있는 행정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약령시가 열리는 행정의 중심이요,
부동산을 구입하는데 관청의 반대가 없다’는 긍정적인 사실을 미국 해외 선교부에 보고하게 된다.
배위량의 보고 결과 1895년 11월 부산 내륙지부의 감독을 받는 내륙지회로서 대구 선교부의 승인 받고 그 해 12월 대구에 올라와 선교지를 물색하게 된다.
그리고 1896년 1월 남문 안에 위치한 정완식 씨의 대지 420평, 초가 5동 20여칸과 와가 1동 6칸의 큰집을 구입했다.
이를 약간 수리하여 1896년 4월에 부인과 아들을 데이고 이사를 하게 되었으나 같은 해 10월 해외선교사 연차총회에서 배위량을 서울 지역 교육담당 고문으로 발령을 내었다.
이로써 배위량의 가족은 6개월의 짧은 대구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가고 대구의 선교 업무는 그의 처남 안의와 (安義渦, E. Adams)가 맡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