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은 라헬을 위해서, 하나님은 야곱을 위해서.
1. 본문은 야곱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놀랍게 나타나는가를 보여줍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이 있는 밧단아람의 한 우물에 도착했고 거기서 라반의 둘째 딸 라헬을 만나게 됩니다. 라반은 조카인 야곱을 ‘나의 혈육’(14절)이라고 하면서 환대했습니다.
2. 야곱은 라반의 둘째 딸 라헬을 사랑하여 7년을 봉사하는 대가로 라헬을 달라고 요구하게 되고, 라반은 그 조건에 동의했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기에, “라헬을 위해” 7년을 수일같이 여겨 봉사했고 마침내 결혼식 날이 왔습니다. 하지만 라반은 속이는 자인 야곱을 속이고 언니 레아를 그에게 들여보냈습니다. 이튿날 야곱이 항의하자 라반은 야곱의 생애에 잊어버릴 수 없는 단어 ‘장자’라는 말로 레아가 먼저 시집을 가는 것이 옳다고 변명합니다. 결국 야곱은 라헬도 자기의 아내로 얻게 되지만, 본문이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속여 왔던 야곱이, 삼촌에게 속았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레아에게 4명의 아들을 주심으로써 위로하셨습니다. 라헬은 남편의 사랑은 받았지만, 아들을 낳지는 못했습니다. 레아의 첫아들 르우벤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내 괴로움을 보셨다’로 레아의 아픔을 반영합니다. 둘째 아들 시므온 역시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라는 뜻으로 여전히 레아의 아픔이 배어있는 이름입니다. 셋째 아들 레위는 이제는 남편과 연합할 수 있으리라는 레아의 갈망을 반영합니다. 넷째 아들 유다에 이르러서야 레아는 비로소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이 현실을 그저 받아들이기로 한 것인지, 아니면 그러한 중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기로 한 것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수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레아는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사람이 이처럼 자기 자신의 처지와 환경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리로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4. 만일 야곱이 자기 인생을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예민하게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 자기 인생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장자의 권리’에 대한 라반의 변명은 야곱의 마음을 깊이 찔렀을 것입니다. 야곱의 이 고통스러운 경험은 장자의 축복을 얻기 위해서 자기 아버지를 속인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질책이었습니다.
5.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인간 군상을 만나면서 별별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교활한 사람, 적대적인 사람, 거짓말하는 사람, 경쟁적인 사람, 다혈질적인 사람, 말이 많은 사람 등등 다양한 성격의 사람과 만나고 부딪히게 될 때, 우리는 그런 사람을 비난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심각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일 수 있고, 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고 질책하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도구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이 사실을 제대로 깨닫는 데에는 ‘적어도’ 20년이 걸렸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깨닫도록 야곱을 위해 20년을 기다리시고 일하셨습니다.
6. 야곱은 “라헬을 위해서” 7년을 하루처럼 보내왔지만, 하나님께서는 28장에서 약속하신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20년을 야곱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7년이면 될 텐데, 20년이 허송세월일까요? 아닙니다. 20년의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많은 자녀와 엄청난 부, 그리고 야곱을 아브라함의 약속을 잇는 언약 백성으로 준비해 주셨습니다.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신 것입니다.
7.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 백성답게 만들어지도록, 철을 철로 연단하듯이, 속이는 사람은 속이는 사람으로 연단하십니다. 그런 관계를 통하여 나 자신을 깊이 바라볼 수 있도록 하며, 성숙한 사람으로 빚어 가시는 것입니다. 혹여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 나와 늘 부딪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만 비난할 것이 아니라, 나의 모습도 겸손히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곳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일하고 계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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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에서를 피해서 도망을 가던 야곱은 아무것도 둘러봐도 볼 것이 없는 빈 들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찾아와 주십니다. 정신없이 땅에 것만을 보며 도망쳤던 야곱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사닥다리로 인하여 눈을 들어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 후 그는 동방 사람의 땅에 도착하게 됩니다.
라반의 집에 도착한 야곱(1-14)
(1-2) 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본즉 들에 우물이 있고 그 곁에 양 세 떼가 누워 있으니 이는 목자들이 그 우물에서 양 떼에게 물을 먹임이라 큰 돌로 우물 아귀를 덮었다가
히브리어 성경 1절 첫 단어의 초두에는 그리고 라는 접속사 쓰입니다. 이 접속사는 야곱이 28장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께 서약한 뒤 이어서 곧장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음을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동방 사람의 땅이란 팔레스타인 동쪽 지역에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역, 즉 하란 근방을 가리킵니다. 야곱이 여행했던 가나안의 브엘세바에서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하란까지의 거리는 대략 700-800km나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야곱이 하루에 30-40km 정도를 걸어서 여행했다고 가정하면 그가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에 도착하는 데는 대략 20-27일 정도 걸렸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리고 히브리어 성경 2절 첫 어두에는 감탄사로 쓰이는 ‘보라’ 라는 단어 웨힌네‘가 사용됩니다. 이는 우물을 발견했을 때 오랜 여행으로 심신이 지쳐 있던 야곱의 기쁨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실감 나게 잘 보여 줍니다. 물이 귀한 중동지역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우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대합니다. 낯선 길을 여행하는 나그네는 한꺼번에 많은 물을 지니고 여행할 수 없기에 다음 우물에 도착할 때까지 필요한 양만큼의 물만 가지고 다녔을 것입니다. 야곱의 기쁨은 단순히 우물을 발견한 것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양 떼를 발견하고 그로 인하여, 양을 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며 그러면 야곱은 자신의 목적지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란 큰 기대감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3-4) 모든 떼가 모이면 그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그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는 우물 아귀 그 자리에 다시 그 돌을 덮더라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형제여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하란에서 왔노라
야곱은 목자들이 자신이 최종 목적지로 삼고 있는 하란 근방에서 만난 사람들이고 자신과 직업이 같은 목자들이었기에, 틀림없이 조상이 같은 친척이요 형제라고 생각하고 이들에게 매우 우호적이고 다정한 칭호인 ’형제‘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하란 출신의 목자들을 만난 이상 야곱은 더 이상 큰 어려움과 방황 없이 목적지 하란으로 여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벧엘에서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보호와 인도하심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하란의 목자들을 만나게 하심으로 야곱으로 하여금 목적지 하란에 도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5-6)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느냐 그들이 이르되 아노라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평안하냐 이르되 평안하니라 그의 딸 라헬이 지금 양을 몰고 오느니라
5절에서 특이한 사실은 야곱이 라반을 거론하면서 그의 아버지 브두엘을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할아버지 나홀을 밝히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를 추측해 보면 라반의 가족들이 하란에 살기 시작한 것이 할아버지 나홀 때 부터였기 때문입니다. 나홀은 야곱의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의 형제로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아내 사라, 아버지 데라, 조카 롯과 더불어 갈대아 우르에서 나올 때 그는 이 대열에 참여하지 않고 여전히 갈대아 우르 지방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후에 하란으로 이주하여 아브라함과 합류하였으나,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나아갈 때도 역시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가문을 형성하여 히브리 민족의 조상이 되었고 나홀은 북방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독립적인 가계를 이루어 아람 족속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야곱이 하란 출신 목자들에게 삼촌 라반을 아느냐고 물었고, 그들은 라반을 굉장히 친숙히 알고 있다라고 해석할 수 있는 히브리어 동사 ‘야다’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서 곧 라반을 만날것이라는 기대감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또한, 목자들은 라반이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해 주며, 곧 그의 딸 라헬이 양을 몰고 올 것이라는 사실도 알려주었습니다. 이 대화에서도 ‘보라’라는 히브리어 감탄사가 사용되었는데, 한국어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아직 두 사람은 모르지만, 야곱과 라헬의 만남에서 감탄사를 다시 사용함으로써, 그들의 만남이 하나님의 섭리속에 얼마나 놀랍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7-8) 야곱이 이르되 해가 아직 높은즉 가축 모일 때가 아니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풀을 뜯게 하라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떼가 다 모이고 목자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겨야 우리가 양에게 물을 먹이느니라
처음 만났을 때 분 아니라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고 할 수 있는 목자들에게 야곱은 권유의 정도를 벗어난 단호한 명령을 내리는 것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몇가지 해석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같은 직업을 가졌던 야곱의 눈에 보기에 그들이 너무 안일하고 게을렀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고, 또한 멀리서 다가오는 라헬과의 대화를 방해받지 않기 위한 의도로 볼 수 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8절에서 목자들의 대답을 들어보면, 그들이 안일하여서 양에게 물을 먹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 근동의 문화에서 유목민들은 우물을 공동 소유 하며 공동 관리하였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개별적으로 물을 먹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정해 함께 모여 물을 먹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9-11) 야곱이 그들과 말하는 동안에 라헬이 그의 아버지의 양과 함께 오니 그가 그의 양들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더라 야곱이 그의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의 외삼촌의 양을 보고 나아가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 그가 라헬에게 입맞추고 소리 내어 울며
장차 야곱의 아내가 될 라헬이 다가오는 장면에 이어 라헬이 도착한 후 새로운 상황이 전개가 되고 있습니다. 한국어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11절은 소리와 관련된 표현과 눈물과 관련된 히브리어 표현을 모두 사용하여 야곱이 목소리를 높여 크게 울었을 뿐 아니라 많은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매우 실감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물은 결코 슬픔의 울음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고 눈물을 흘리며 운 것은 머나먼 길을 여행한 뒤에 친인척을 만난 크나큰 기쁨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며, 또한 그 먼 길을 여행하는 동안 자신을 변함없이 보호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12-14) 그에게 자기가 그의 아버지의 생질이요 리브가의 아들 됨을 말하였더니 라헬이 달려가서 그 아버지에게 알리매 라반이 그의 생질 야곱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그를 영접하여 안고 입맞추며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들이니 야곱이 자기의 모든 일을 라반에게 말하매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
라반은 라헬을 통해 야곱이 나타났다는 너무나 뜻밖의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실제로 라반은 여동생 리브가가 이삭에게 시집간 이후 대략 97년만에 리브가의 혈육을 만났기에 그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삼촌 라반을 만난 야곱은 지금까지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전부 삼촌에게 말해주었습니다. 삼촌의 따뜻한 환대가 야곱이 지금까지 아무 곳에도 말할 수 없었던 자신의 일들에 대해서 말 할 수 있게 하는 촉매제가 된 것입니다. 라반은 야곱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지만, 야곱의 이야기를 다 듣기 전까지는 완벽하게 야곱을 신뢰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말들을 들은 라반은 그의 말이 진실임을 알고 남편이 아내에게 쓰는 표현인 ‘내 혈육이로다’ 라고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가까운 혈족이란 의미뿐만 아니라 친근하고 사랑스럽다는 뉘앙스까지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라반의 모략에 빠진 야곱(15-20)
(15)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
야곱이 한 달간 라반과 같이 생활한 데 이어서 라반은 야곱의 성실함과 목동으로서의 능력을 발견하고는 이제 정식으로 노동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자신의 실리 추구에 야곱을 이용하려는 욕심을 드러내기 시작한 부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라반의 제안은 표면적으로는 혈육인 야곱을 정당하게 대우해 주려는 삼촌으로서의 배려가 담겨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러한 제의 가운데는 야곱을 통해 더 많은 실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라반의 속셈이 짙게 깔려 있다고 해석해 봐도 후일에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면 과도한 해석은 아닐 것입니다. 라반은 이제 자신과 야곱의 관계가 더 이상 외삼촌과 생질의 관계로만 국한 되지 않고 주인과 고용인의 관계로 재정립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히브리어 단어 ‘품삯’의 원형은 ‘고용하다’라는 뜻이 있는데, 이 단어의 깊은 의미를 생각해 볼 때, 라반의 제의는 호의적이었다기보다는 물질적 욕심이 앞선 제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후로 야곱과의 계약을 열 번이나 번복하고 속이면서 철저하게 야곱을 이용한 라반의 간교하고 탐욕스런 모습에서도 명백하게 잘 드러납니다.
(16-17) 라반에게 두 딸이 있으니 언니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앞절에서 라반의 고용 계약 제의에 이어서 라반이 두 딸의 이름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는 이 두 딸이 라반과 야곱 간의 고용 계약 체결에 있어서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레아는 라반의 첫 째딸인데, 그녀의 이름 뜻은 ‘일하다.애쓰다, 지치다’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이름의 뜻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 레아는 딸만 둘 있는 라반 집안의 맏딸로 온갖 힘든 가사를 도맡아 한 부지런하고 성실한 여성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후 그녀는 야곱의 첫 아내가 되어 6남 1녀를 낳았으나 동생 라헬, 야곱의 두 첩 실바와 빌하 사이에서 야곱의 사랑을 잃고 마음으로 심한 갈등을 겼어야 했습니다. 17절에서는 레아의 신체적 약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시력이 약하다’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약점은 레아에게는 약점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녀의 이런 외적 조건이 야곱이 아내를 선택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결격 사유로 작용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라헤은 얼굴과 외모에 있어 매우 아름답고 빼어난 여성임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야곱은 이런 라헬의 외적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입니다.
(18)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한 사실을 표현하여 라헬에 대한 야곱의 사랑의 감정을 뚜렷하게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타는 사랑의 감정 때문에 야곱은 외삼촌에게 7년 봉사를 제의할 수 있었고, 또한 후에 이 문제에 차질이 생겨나 라헬이 아니라 레아와 결혼하게 되었을 때 7년 더 봉사하는 것까지 감수하였던 것이었습니다. 당시 고대근동에서는 결혼할 때 신랑이 신부를 데려가는 조건으로 신부 아버지에게 결혼 지참금을 주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외삼촌 집에 더부살이를 하는 야곱은 당장에 결혼 지참금을 마련할 수 없었기에 7년간 무보수로 노동함으로써 결혼 지참금을 대신하겠노라고 약속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하지만 7년이란 세월 동안 무보수로 노동하는 것은 결혼 지참금으로서는 엄청난 비용이요 대가임에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사랑하는 라헬을 위해 이런 수고와 대가를 서슴없이 지불하기로 작정하였던 것입니다.
(19-20) 라반이 이르되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한글 성경에서는 상대적인 의미에서만 다른 사람보다는 야곱과 결혼하는 것이 좋다라는 느낌으로 해석됩니다. 하지만, 원어상으로 볼 때, 본문은 라반이 야곱의 제의를 매우 좋게 생각하고 너무도 흔쾌히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히브리어 ‘토브’가 단지 감정적으로 좋다는 의미를 넘어서 도덕적으로도 선하며 모든 긍정적이고 가치가 있는 일을 가리키는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시 라반의 대답은 ‘어는 면에서 보나 이는 좋다’라는 흔쾌한 승낙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20절에서 야곱은 라헬을 끔찍이도 사랑했기에 라헬을 위해 힘들게 노동했던 7년의 세월을 단지 며칠 전도로밖에 생각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랑의 힘이 얼마나 위대하며, 사랑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먼 거리를 헤메고 찾던 야곱이 마침내 삼촌과 아내 될 여성을 만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거짓말로 인하여 돌이킬 수 없는 도망을 해야 했고, 희망없이 불안에 떨며 살아가야 했었던 야곱에게 다시금 회복의 시간표가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많이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실수로 도망자처럼 여기저기를 헤매야 했던 시기가 있었고, 또한, 뜻밖에 환대를 받으며 무엇이든 잘 될 거 같은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있으며, 불같은 사랑의 대상을 찾아서, 이제는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에 정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인생 여정을 아는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가슴 뛰는 야곱의 인생 여정이 그리 쉽지 않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어둡고 고독한 코로나의 기간을 지나면, 야곱이 경험한 것처럼 누군가의 환대를 받으며, 열렬히 사랑할 대상을 찾을 때도 찾아 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도, 기한이 있고, 결국은 또 다른 때로 넘어가야 하는 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순례자들의 숙제일 것입니다. 그 순례길을 배고픔과 허기짐을 안고 걸어가야만 하고, 때로는 도망자처럼 뛰어야 하는 우리들에게 마귀는 천하만국의 허상으로 우리의 걸음을 여행 도중 멈추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생이라는 순례길에서 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만을 섬기며 바라보고 완주하는 사명을 가졌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다.
라반에게 속은 야곱 (21-30절)
라반의 둘째 딸 라헬을 자신의 신부로 얻기 위해 야곱이 약속한 7년은 당시 혼인 계약에 필요했던 대금을 지불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비용은 신랑이나 신랑의 가족이 신부의 가족에게 지불하는 것으로 일종의 보험금과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 보상금은 자신의 딸이 갑자기 이혼을 당하거나, 남편이 죽을 경우를 대비하여, 당시 사회적 약자인 여성을 지키기 위한 제도였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문서에 의하면 결혼을 위한 지참금은 일반적으로 30-40세겔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목자의 일 년 급여가 10세겔이었기에 아내를 얻기 위해 7년을 일한 야곱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두 배가 되는 비용을 지불한 셈이었습니다. 라반은 야곱을 한 가족이라고 하였지만, 남들보다도 못한 조건으로 일을 시킨 것입니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야곱은 자신의 외삼촌 라반에게 이제 당당히 라헬을 요구합니다.
(21)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이 구절의 원어적인 어감을 살려 번역하면 ‘당신은 나의 여자를 주라’입니다. 야곱은 명령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외삼촌이자 장인이 되는 사람에게 이처럼 단호한 표현을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우리는 라반의 다음 이야기를 보지 않아도, 그가 얼마나 지독한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딸을 한 남자에게 보내는 입장에 있는 라반은 이 결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의 최대치를 야곱으로부터 빼앗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자신의 딸을 시집을 보내면서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라반의 이 지독한 모습 때문에 야곱은 이미 상당 부분 그 마음이 상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이렇게 당당하게 라헬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라반이 자신의 딸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또 야곱을 자신의 조카로서 아낀다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여기서 더 끔찍한 것은 라반의 욕심이 아직 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야곱도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라반은 야곱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대단한 욕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라반과 같은 사람을 만나고, 경험하게 하심으로, 야곱 스스로가 많은 것을 느끼고, 그간 자신이 한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기를 바라고 계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22-24) 라반이 그 곳 사람을 다 모아 잔치하고 저녁에 그의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 라반이 또 그의 여종 실바를 그의 딸 레아에게 시녀로 주었더라
이 결혼식을 준비할 때부터 이미 야곱을 속일 계획을 세운 라반은 그 지역 사람들을 모두 다, 힘써 모아, 혼인 잔치를 열었습니다. 라반의 이러한 행동은 당시의 풍습대로 정식으로 혼인을 치러 이 결혼이 법적인 효력을 갖게 하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렇게 결혼을 하면, 야곱은 첫째 딸 레아와의 결혼을 함부로 취소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인물이 또 한 명이 있는데 그 사람은 결혼의 당사자 중 한 명인 ‘레아’입니다. 7년이라는 시간 동안 야곱과 함께 지낸 레아는 야곱이 자신이 아닌 자신의 여동생 라헬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 7년이라는 계약이 왜 시작되었는지도 레아는 모두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라반은 자신의 첫째 딸을 물건을 속여 팔 듯이, 야곱을 속여 결혼시키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강요를 못 이기고, 야곱에게 가는 레아의 마음이 얼마나 비참하고 힘들었겠습니까? 레아는 자신의 집에서도 이렇게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레아의 이러한 불행은 안타깝게도 야곱과의 결혼 후에도 계속됩니다. 이러한 사건들을 보았을 때 레아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든 것은 야곱의 잘못도 크지만 근본적으로 라반의 잘못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레아에게 작은 희망과 같은 존재가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의 여종 실바였습니다. 실바는 누구보다 자신의 마음을 잘 알아주고, 자신과 항상 함께 하는 자신의 시녀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중의 이야기를 보면 결국 실바도 레아에게 진정한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불행한 레아에게 유일한 위로이자, 희망이 되어 주시는 분은 누구이겠습니까? 오늘 본문 마지막에서 나타나는 레아의 고백을 통해 우리는 그 유일한 희망과 위로의 존재를 발견하게 됩니다.
(25)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
야곱이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자신이 기다리던 둘째 딸 라헬이 아니라, 레아가 자신의 옆에 누워있었습니다. 어제 결혼식이 진행되었던 밤, 라반이 야곱의 술 취함과 신혼 방의 어두움, 신부가 얼굴에 쓰는 베일을 총동원하여 야곱을 속인 것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간절히 사모했던 것만큼, 또 결혼 생활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과 분노가 컸습니다. 이는 마치 야곱이 아버지 이삭의 시력이 약하다고 하여, 아버지를 속이고 에서의 복을 훔친 것을 떠오르게 하는 사건입니다. 과거 자신이 한 일에 대해 형이 느꼈을 분노를 이제 야곱도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야곱이 라반에게 강하게 항의하며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라고 한 ‘속이다’라는 단어는 야곱이 이삭을 속일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정말이지 ‘뛰는 야곱’ 위에 ‘날으는 라반’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며,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깨닫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래도 거두리라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생명을 얻은 우리는 이 땅에서 매일 무엇을 심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삶의 모든 결정과 행동은 ‘죄악 된 육체를 만족시키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매일 무엇을 심는지 인간의 눈으로는 서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장차 올 마지막 때에 결국 우리 각자는 심은 대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입으로만 외치는 구호가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심고, 그 열매를 얻는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새벽, 말씀과 기도의 자리에 나와 하나님께 부르짖는 교우님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믿음을 따라 선한 것을 심는 분들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삶에 선하고 좋은 것을 계속해서 심는 사람들의 삶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한 열매가 가득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야곱의 이야기를 통하여, 믿음의 사람은 결국 무엇을 심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다시금 설명하고,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26-27) 라반이 이르되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또 나를 칠 년 동안 섬길지니라
속이는 자 야곱보다 더 고단수인 라반은 야곱에게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합니다. 그것은 이미 결혼한 첫째 딸 ‘레아’와의 결혼을 확정하는 주간인 7일을 채우고, 이를 지키면, 둘째 딸 ‘라헬’과도 결혼을 하게 할 것이니 그 대신 다시 7년을 일하라는 조건이었습니다. 라반의 이 표현으로 인하여 그의 실체가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라반이 처음 야곱을 보았을 때는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라고 외치며 스스로가 인정이 많고 고상한 사람처럼 야곱에게 접근하였으나, 라반은 본래 사람보다 물질이 더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많은 청년들을 만나고, 이들의 고민과 함께하면서, 결혼에 있어 물질적인 조건이 너무 큰 영향을 주고 있다는 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욱 안타까운 현실은 아직 신앙이 연약한 청년들보다 이들의 부모님이 더욱더 물질적인 조건에 집착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물론 자녀가 지금 보다 좋은 환경에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야 같은 마음이겠지만, 적지 않은 수의 부모님이 지나치리만큼 물질적인 조건에 집착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신앙으로 살아보겠다는 젊은 커플을 놓고 어떠한 조언도 할 수 없어 말문이 막힌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신앙의 고상한 말을 하여도, 결정적인 순간에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결국 물질이라면 그 사람은 물질이 가장 중요한 사람입니다. 마치 오늘 본문의 ‘라반’처럼 말입니다. 귀한 믿음의 청년들이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리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신앙입니까? 돈입니까? 우리는 이 답을 머리로 생각하는 수준에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내 자녀는 어떻게 결혼해야 할까? 라는 지점에까지 고민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라반의 정체성이 결국 라반의 행동으로 드러났듯이, 우리 개개인의 정체성은 결국 우리의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8-30) 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 칠 일을 채우매 라반이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 라반이 또 그의 여종 빌하를 그의 딸 라헬에게 주어 시녀가 되게 하매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여 다시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더라
라반이 제시한 조건을 야곱이 결국 받아들여, 둘째 딸 라헬도 야곱의 아내가 되었으나, 이 두 번째 결혼식은 첫 번째 레아의 결혼식처럼 사람들을 모아 성대하게 치렀었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라반의 입장에서 이제 목적한 일을 이뤄졌으니, 쓸데없는 곳에 비용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라반의 이러한 행동은 결국 그가 자신의 두 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다시금 확인시켜주는 장면입니다. 결국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 다시 7년을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야곱의 이러한 행동을 순수한 사랑의 모습처럼 보기도 하지만 성경은 야곱의 이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율법을 통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레위기 18장 18절입니다.
(레위기 18:18) 너는 아내가 생존할 동안에 그의 자매를 데려다가 그의 하체를 범하여 그로 질투하게 하지 말지니라
물론 야곱은 이 율법이 선언되기 이전의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법은 과거와 오늘, 영원히 다르지 않다는 점과 이미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께서 이들과 동행하시며, 삶의 기준들을 알려주신 것을 생각해 보았을 때 이미 자신의 아내가 된 레아가 있음에도 그녀의 여동생인 라헬을 얻기 위해 7년을 더 일하는 야곱의 선택은 하나님의 기준 보다, 자신의 정욕을 따르는 선택임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욕망을 따르는 선택 즉, 나쁜 것을 심는 삶의 결과는 좋지 않습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처음 7년을 보냈을 때에는 그 시간이 “며칠”같이 지났다는 표현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다르게 그 다음 7년에는 ‘며칠’과 같이 그 시간이 지나갔다는 표현이 없습니다. 이처럼 두 번째 7년은 야곱에게 힘들고 긴 시간이었습니다. 그도 그런 것이 야곱은 어느덧 자신의 장인 라반과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고, 야곱의 가정 안에는 두 명의 아내와 두 명의 여종들 간의 긴장이 끊임없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자신의 바람과 계획과는 다른 현실을 받아들이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선택의 순간에 가장 좋은 선택은 나의 욕심을 따라가는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을 따르는 선택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지혜의 근본은 바로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만약’이라는 말처럼 무의미한 단어는 없겠으나 만약에 야곱이 라반의 두 번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첫째 딸 ‘레아’만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허락하신 아내로 받아 이를 만족하고 살았으면 어떠했겠습니까? 야곱이 이미 벌어진 상황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따라 자신의 아내 된 레아에게만 집중하였다면 더 행복한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도 그런 것이 야곱의 말년을 괴롭힌 사건들은 하나같이 레아와 라헬을 통해 마음이 갈라진 형제들 간의 분쟁으로 벌어진 사건들이며, 이 사건들로 인하여 야곱은 늙어서까지 편히 쉬지 못하는 인생을 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라반의 죄악과 야곱의 어리석은 판단 속에서도 신실하게 하나님 자신의 뜻과 구원 역사의 계획을 흔들림 없이 이루어 가십니다. 인간의 짧은 계산으로 본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악을 이용하신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놀라운 역사의 진행은 시간 밖에 계신 하나님의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로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자유의지 속에서도, 하나님 자신의 계획과 역사하심을 신실하게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입니다.
레아의 자녀들 (31-35절)
(31)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이러한 과정을 거쳐 야곱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레아의 태를 여시여, 자녀를 주셨고, 라헬은 자녀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점을 보았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아내는 레아였다는 점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끝까지 자신의 욕망에 갇혀 레아를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야곱의 모습은 자신에게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책임을 다하지 않는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와 같은 행동이었습니다. 야곱은 자신에게 벌어진 일과 실수를 외면하고 덮어버리고, 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다르게 하나님께서는 이 가정의 아픔을 세밀히 들여 다 보셨습니다. 31절의 ‘보시고’ 라는 단어는 무언가를 쳐다본다는 뜻과 함께 ‘이해한다’, ‘알다’라는 의미까지도 가지고 있는 단어로, 하나님께서 레아의 슬픈 상황과 형편을 자세히 알고 계셨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슬픔과 아픔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 부르짖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지키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레아의 인생은 지금 꼬일 때로 꼬인 상황으로 출구가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으나 하나님께서 그녀를 돌보시고, 그녀의 태를 열어 그 어려움을 푸시니 이 순간부터 레아의 인생을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각자 어떠한 영역에서 연약하고 미숙하여, 실수를 범한 경험과 아픔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일수록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를 외면하고, 덮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우리의 상황을 솔직하게 아뢰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일을 해야합니다. 그리하였을 때, 우리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돌보시고,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우리는 경험할 수 있습니다.
(32)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레아가 고백하는 바, 레아는 이미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생의 괴로움을 돌보셨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첫 아들 르우벤의 이름의 뜻은 ‘보라! 아들이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름을 보았을 때, 레아가 그간 받은 서러움이 이 아들을 통해 상당 부분 위로를 얻었음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레아는 아직 야곱의 사랑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33)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레아를 통하여 두 번째 아들, 시므온이 태어났습니다. 이쯤 되면, 야곱도 레아를 자신의 아내로 정식으로 인정하며, 그녀에게 관심과 사랑을 가졌어야 합니다. 하지만 야곱의 이상한 고집과 집착은 아직도 하나님 안에서 온전히 다듬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레아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야곱의 이러한 모습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자녀를 낳을 때 마다 반복되는 레아의 고백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그녀의 신앙이 하나님 중심으로 성숙해 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므온의 이름은 ‘듣다’, ‘주의하다’, ‘이해하다’라는 뜻을 가진 ‘쉐마’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신앙 고백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이름입니다.
(34)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레아가 또 임신을 하여, 세 번째 아들을 낳아 그 아들의 이름을 ‘레위’ 라고 한 것은 그 뜻으로 ‘밀착하다’, ‘결합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제 자신이 자녀는 셋이나 낳았는데, 야곱이 아무리 부정하여도 자신을 야곱의 첫째 되는 아내로 결합되어 인정 할 수밖에 없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레아는 이제야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하여,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 스스로 달라진 상황과 위치를 얻게 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35)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레아의 네 번째 아들 유다의 이름은 ‘감사하다’ ‘찬송하다’ ‘찬양하다’의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야곱으로부터 줄곧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하고, 서러움을 당하던 레아는 네 명의 아들을 얻게 되자 그 기쁨과 벅찬 감격을 주체할 수 없어 여호와를 찬양하며, 그 아들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라는 뜻의 ‘유다’로 지은 것입니다. 이런 찬양에 응답이라도 하시듯 레아는 결국 야곱으로부터 자신이 가장 중요한 아내라는 사실을 인정받습니다. 이것은 시간이 한참 지나 야곱이 죽기 전 자신의 자녀들을 축복하는 장면에서 나타나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49:30-31)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의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
아브라함부터 이삭, 그리고 야곱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가장 중요한 배우자를 함께 장사하는 가족 무덤에 아브라함은 사라를, 이삭을 리브가를 장사하였고, 야곱은 그곳에 레아를 장사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레아에게 허락하신 상징적인 은혜였으며, 결국 야곱도, 자신의 잘못된 결정을 뒤로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뜻에 순복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오늘 나의 삶이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망가져 버린 것과 같은 절망 속에서 괴로워하고 계신 분이 있으십니까? 우리의 문제를 기억해주시고, 마지막에 결국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우리 주님 밖에 없으시다는 사실을 함께 기억하십시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고, 말씀을 붙들고 부르짖을 때, 우리가 최종적으로 거할 자리는 사망과 괴로움, 고통의 자리가 아닌,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모든 가족들이 함께 뛰노는 영원한 천국, 안식의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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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은 후 그 약속을 믿고 길을 떠나 동족으로 갑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까지 가는 거리는 약 640킬로미터 정도 됩니다.
벧엘에서 은혜를 받고 보니까 비록 힘든 여행길이지만 그는 힘차게 첫발을 내 디딜 수가 있었습니다. 두려움이 예상되는 길이지만, 즐겁게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먼 길도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험한 길도 즐겁기만 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때, 야곱이 은혜가운데 있을 때 라헬을 만납니다.
야곱은 라헬을 만나는 순간 첫눈에 반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 있을 때 그 사랑의 힘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장차 아내가 될 라헬을 위하여 우물을 막아두었던 무거운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떼에 물을 먹이고 라헬에게 입 맞추고 인사를 나눕니다.
사랑하면 무거운 돌도 무겁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세상이 어려워도 힘들지 않습니다.
괴롭다, 힘들다, 어렵다, 고달프다, 큰일났다, 걱정이다.
이 모두, 사랑이 없는 일을 하기에 어렵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야곱의 가슴에 쌓인 사랑은 이제 감격의 눈물이 되어 흐르기 시작합니다.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떼에게 물을 먹이고
그가 라헬에게 입 맞추고 소리내어”(창29:10-11) 울었다고 했습니다.
반가운 친족에게 입을 맞추는 것은 당시 인사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리내어 울었다는 것은 인사 이상의 감사였습니다.
감격의 눈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했다는 사실에 흥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내가 이곳까지 무사히 도착하게 되었구나!
벧엘에 친히 나타나셔서 나를 지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던
그 하나님이 분명 나를 보호해 주셨구나!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눈물이었습니다.
주 안에서 꿈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감격과 흥분의 눈물이었습니다.
무엇을 먹고 마실까 그런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고 있다는 그 한 가지 사실 때문에,
또한 미치도록 사랑하고픈 사람을 만났다는 그 한 가지 사실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고 계신다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죽던 살던, 고난이야 있던 없던, 망하든 흥하든,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야곱은 눈물로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계시구나.
야곱은 한 시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창28:13)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28:15)
이 말씀을 기억하고 감격하여 울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야곱은 타향 하란에서 라반의 일을 도우며 살아갑니다.
하루는
외삼촌 라반이 열심히 일하는 야곱을 보고 이런 제안을 합니다.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29:14-15)
이때 야곱은 눈에 보이는 재물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주시면 그 대가로 칠년을 봉사하겠다”고 말합니다.
사랑을 선택했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이 대목에서 참으로 멋진 해석을 붙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창29:20)
정말 아름다운 연애였습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사랑은 돈보다 귀합니다.
사랑은 행복한 삶의 기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든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어 미치도록 행복감에 젖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야곱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그를 위하여 칠년이라는 세월을 수일처럼 지냈습니다.
시간이 문제가 아니었고 고생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평생이라도 바칠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이 야곱의 행복이었습니다.
사랑은 봉사의 원동력입니다. 사랑에는 삶의 권태가 있을 수 없습니다.
늘 아쉬운 마음 뿐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신비입니다.
사랑의 기쁨을 얻고 나면 인생의 기쁨을 얻게 되고
사랑의 승리자가 인생의 승리자입니다.
C.S.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천국은 날마다 만나는 가슴 설레이는 첫 사랑의 향연이다”
우리가 천국에 갈 때에 몇 가지를 꼭 가지고 간다고 합니다.
훗날 천국에 가져가야할 것이 무엇인가 꼭 기억하셨다가 잊지 말고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잊지말라하니까 잊을까봐 걱정이 되시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혹시 잊는다 해도 하나님은 단 한 가지도 빼 놓지 않고 챙겨주십니다.
다른 것 다 이 땅에 놓고 가지만 자기 자신은 가지고 갈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인격, 자신의 삶의 경험들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히 간직하고 갈 것이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 수고했던 흔적을 면류관으로 안고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했던 소중한 경험들을 안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했던 아름다운 경험들, 하나님을 찬양했던 영광스러운 경험들을 가져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가정과 이 교회와 이웃을 어떻게 섬기고 사랑했는가?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를 사랑했던 아름다운 기억들과 아름다운 경험들을 간직하고 갈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교우들, 내 주변의 소중한 친구들과 어떤 사랑을 나눴는가?
사랑의 아름다운 경험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언제까지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의 모든 형태가 다 사라진다 해도 사랑은 언제까지나 없어지거나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할찌라도 사랑의 끈을 않았다면 우리는 인생의 승리자들입니다.
이제 질문을 좀 바꿔 보겠습니다.
나는 사랑의 승리자가 되었는가?
작년보다 올해, 주를 향한 사랑은 한층 더 자랐는가?
교회와 가정과 이웃을 향한 사랑과 봉사와 헌신은 한층 더 높아졌는가?
인생의 평가 기준은 오직 하나,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정말 사랑해서 하는 일이냐 하는 것입니다.
20년, 30년 동안 한 남편을, 아내를 섬기며 가정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할지라도 그 속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쫓기듯 살아왔던 하루하루가 기쁨이 아닌 짜증으로 어느 새 바뀌고,
감사가 아닌 신세타령으로 순식간에 전락하고 맙니다.
사랑 없는 수고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토록 피곤한 이유가 있다면
그 조그마한 일에 그토록 짜증이 난다면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랑은 기쁨입니다. 사랑은 감격입니다. 사랑은 행복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기에 칠년을 수일같이 보냈다했습니다.
사랑은 시간을 정복합니다. 사랑은 수고를 정복합니다.
사랑은 한 많은 세월을 정복합니다. 사랑은 미래의 불안을 정복합니다.
지금 내 몸에 병이 있다거나, 직장과 사업이 어려워도 하나님 사랑하는 끈을 놓지 마십시요.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끈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교회와 위해 봉사하다가 혹 상처받고 인간관계에 갈등이 있다 해도 사랑의 끈을 놓치마십시오. 그것이 오늘을 살게하고, 행복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생활, 예배생활에 행복을 잃으면 만사에 재미가 없습니다.
이 교회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경험을 안고 우리는 천국에 가게 될 것입니다.
먼 훗날 우리가 떠난 자리에서 사랑의 싹 나고, 사랑의 꽃이 피고, 사랑의 열매가 맺히게 될 것입니다.
야곱이 누구입니까? 사냥에서 돌아와 허기져 있던 형 에서에게서 팥죽 한 그릇을 주고 장자의 명분을 빼앗은 사람이 야곱입니다. 그리고 장남인 에서의 축복을 가로채기 위해 아버지 이삭을 속인 사람입니다. 살아가는데 있어서 야곱만큼 두뇌회전이 빠르고 손익관계가 빠른 사람이 없었습니다. 좋게 말하자면 영리한 사람이지만 그에게 손해를 본 사람이라면 교활하고 약삭빠른 사람으로 평가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에서를 속인 일 때문에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자기를 죽이려 하는 형 에서를 피해 외삼촌이 살던 밧단 아람으로 도망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밧단 아람에서 그는 외삼촌 라반의 둘째 딸 라헬을 보고 사랑에 빠졌습니다. 약삭빠른 야곱이 사랑에 빠진 것입니다. 신부에게 주는 결혼지참금으로 라헬을 위해 7년을 일하면서도 야곱은 그 7년이라는 시간을 며칠처럼 여겼습니다. 라헬을 신부로 맞이하기 위해 7년동안 손꼽아 오던 날이 다가왔습니다. 21절입니다.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7년동안 라반의 일꾼으로 일하면서 얼마나 많은 순간을 라헬과 눈 맞추며 이 날을 기다려왔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이 둘의 관계를 다 인정하고 있었고, 드디어 결혼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첫날 밤을 보내고 아침에 눈을 뜬 야곱이 발견한 신부는 자신이 그토록 기다려왔던 신부 라헬이 아니었습니다. 천하의 야곱이 속아 넘어간 것입니다. 에서와 아버지 야곱을 속여 장자권의 명분과 축복을 가로챈 천하의 야곱이 기가막히게 속아 넘어간 것입니다. 이럴 때 쓰는 속담이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입니다. 그러고 보면 야곱의 비상한 머리는 아무래도 외갓쪽에서 물려받은 것 같습니다. 사실 둘째 아들이었던 야곱이 맏아들 에서를 속이도록 부축인 것도 어머니 리브가 아니였습니까? 아무래도 외갓집쪽의 머리가 비상한 것 같습니다. 야곱이 정말 상상치도 못한 순간에 외삼촌에게 속아 넘어갔습니다.
야곱이 이 어처구니없는 일에 대해서 외삼촌에게 따집니다. 25-27절입니다.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 라반이 이르되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또 나를 칠 년 동안 섬길지니라
약삭빠른 야곱보다 한 차원 더 머리가 비상한 외삼촌 라반의 설명입니다. 라반은 큰 딸 레아의 결혼문제과 7년동안 자신의 일을 한 일꾼이 결혼함으로 일손이 부족해지는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는 묘수를 부린 것이었습니다. 결혼을 물릴 수는 없으니 큰 딸 레아와의 일주일간의 결혼식을 마친 뒤 야곱이 정말 원하는 라헬도 아내로 보내주되 대신 7년을 더 일하도록 요구합니다. 출가하지 못한 큰 딸의 결혼문제와 야곱이 결혼해서 떠나가면 필요한 일꾼의 부족함을 한꺼번에 해결하기 위해 라반이 계획적으로 벌인 일이었습니다. 야곱이 라헬과 결혼하기 위해 7년을 기다려왔기 때문에, 언니보다 동생을 결혼시키는 것이 지방의 전통에 어긋나는 일이었다면 언니 레아를 7년기간동안 먼저 결혼시켜야 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입니다. 그런데 7년이라는 충분한 기간이 있었는데 레아를 결혼시키지 않았다는 것은 레아에게 핸디캡이 있든지, 청년들에게 매력적이지못한 레아였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17절에서 ‘레아가 시력이 약하였다’ 라는 구절을 통해서 짐작해보자면 사람들이 보기에 레아는 시력장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야곱이 라헬과 결혼하기로 약조된 7년의 시간동안 라반이 레아를 결혼시키지 않았던 것은 결혼시키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레아와의 결혼을 치르고 난 야곱은 선택의 여지 없이 자신이 사랑하는 라헬을 위하여 또 다시 7년동안 라반의 일꾼으로 일해야 했습니다. 26-30절입니다. 라반이 이르되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또 나를 칠 년 동안 섬길지니라 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 칠 일을 채우매 라반이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 라반이 또 그의 여종 빌하를 그의 딸 라헬에게 주어 시녀가 되게 하매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여 다시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더라
야곱의 생각에 또 다른 7년이라는 시간은 전혀 계획에 없던 바였습니다. 라헬과 더불어 자식을 낳으면 행복한 가정을 꾸려 나갈 계획에 부풀어 있었던 야곱에게 또 다른 7년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시간이었습니다. 또한 자신이 레아의 남편이 되는 것은 상상치도 않았던 일이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레아의 남편이 되었고, 일꾼으로서 7년을 더 일해야하는 상황을 맞닥치게된 야곱은 무슨 생각을 하였겠습니까?
우리 중에도 전혀 계획에 없던 시간과 상황을 보내고 있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잠시 방문하러 갔던 곳에서 벌어진 여러가지 상황과 관계들때문에, 수년의 시간동안, 혹은 수십년의 시간동안 계획에도 없던 시간을 타지에서 보내고 있는 분들도 우리 중에 계실 것입니다. 내가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사람과의 관계때문에 쉽지않은 시간과 상황을 보내고 있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사람과의 만남, 결혼을 통해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분들도 계실것입니다. 그런데 이 야곱의 또 다른 7년이라는 시간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겠습니까? 라반에게 속아 또 다른 7년의 시간을 일꾼으로 살아가는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형 에서를 속였던 자신의 옛모습을 철저히 되돌아보지 않았겠습니까? 어쩌구니 없는 속임수를 겪게 하시고 계획에도 없던 시간을 품꾼으로 살아가는데에는 교활한 야곱, 자신의 머리를 의지해 살아가던 야곱,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며 살아가던 야곱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가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혹시 내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사람으로 인해서, 내가 상상치도 못했던 관계로 인해서 인고의 시간을 겪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 사람, 그 관계, 그 만남과 그 시간은 결코 낭비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가는 시간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헤룻궁에서 바울이 2년여의 시간을 보낸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예루살렘 선교를 위해 바울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이었듯이 지금 우리가 겪고있는 시간과 환경도 결코 우연이 아니라 우리를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속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레아입니다. 레아는 야곱에게서 선택받지 못했습니다. 같은 또래의 청년들로부터도 선택받지 못했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위해 7년을 며칠같이 여기며 일하는 동안 레아는 야곱의 단 하루도 선택받지 못했습니다. 물론 아버지 라반때문에 야곱의 아내가 되기는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야곱이 일한 14년은 모두 라헬을 위한 시간이었습니다. 레아를 위해서는 한 달 아니, 하루도 배당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녀에게는 핸디캡이 있었고, 누구에게도 제대로 사랑받지 못한 존재로 살았습니다. 결혼을 하였지만 남편의 연인은 자신이 아닌 라헬이었습니다.
우리 중에도 많은 사람이 조연으로 살아갑니다. 어쩌면 조연도 아니라 전혀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는 엑스트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사랑받고 인정받는 자리는 늘 나보다 잘 나고 나보다 더 예쁘고 나보다 더 많이 배우고, 나보다 더 좋은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열심히 일은 하고 있지만 나는 마치 큰 기계속에 보이지 않는 작은 부속품처럼 아무도 그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는 자리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차지하고 있고 늘 나의 존재는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레아를 주목하십니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레아의 인생을 주목하십니다. 그런 레아의 상황과 환경을 살피십니다. 31절에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여기서 ‘보다’라는 단어는 상황과 형편을 섬세하게 살펴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레아가 사랑받지 못하는 상황을 살피시고 면밀하게 레아의 환경을 주목하여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주목받지 못하는 우리을 주목하십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우리를 살피시고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시는 분이십니다. 사43:1절에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아무도 나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을때에, “0 0 야! 너는 나의 것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구원한다. 내가 너를 건진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주목하시고 살피시는 레아에게서 첫째 아들이 태어납니다. 그 이름을 르우벤 이라 짓습니다. ‘보라 아들이다’. 둘째 아들이 태어납니다. 그 이름을 시므온 이라 짓습니다. '하나님께 들으셨다', 셋째 아들이 태어납니다. ‘남편의 마음이 이제 나와 통하게 될 것이다’라는 뜻으로 그 아기를 레위라 호명합니다. 넷째 아들이 태어납니다. ‘이제는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리라’ 라는 뜻으로 유다라 짓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속에 아기를 한 명씩 낳아가면서 레아의 신앙은 남편의 사랑을 받아야하는 존재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존재로 변화되고 있습니다. 소외되고 인정받지 못하던 레아가 처음에는 인정받고 사랑받는 존재가 되려고 애를 쓰지만, 그는 하나님의 살펴주심속에 남편의 사랑을 다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존재로 변화됩니다.
“이제는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리라” 유다를 낳으면서 레아는 남편을 의지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신앙의 사람으로 변해있었습니다. 남편에게마저 사랑받지 못하던 레아가 바로 유다를 낳았습니다. 이 유다의 후손으로 다윗이 태어났고, 이 다윗의 자손으로 예수님이 이땅에 태어나셨습니다. 레아에게서 예수가 나셨습니다.
내 인생에 핸디캡이 있습니까? 이 세상 누구도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습니까? 아무도 나를 인정해주지 않습니까? 그런 나를 하나님이 살피십니다. 나를 천하보다 존귀한 자로 인정해주시기에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님마저도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이셨습니다. 아무도 나를 불러주지 않고 인정해주지 않아도, 아무에게서도 사랑받지 못해도 내 인생에는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신 예수님의 가치가 담겨져 있습니다. 내 인생에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오늘 내 상황을 주목하여 보시고 나를 살펴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