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치(小痴) 허련(許鍊)
선주아빠 ・ 2019. 4. 10. 2:59
설옹관(雪擁關) 족자 종이에 담채, 70 x 36 cm
얼마전에만 해도 남도지역 어느곳을 방문해도 쉽게 실내공간 벽에는 많은 그림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남도에는 많은 작가들이 왕성한 활동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해남의 윤두서(尹斗緖, 1668년 ∼ 1715년) 일가 3대와 진도의 허련의 일가를 잇는 5대에 이르는 화가에 허백련, 오지호 등 국내를 대표하는 거목들이 수두룩하면서 그의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어 그림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을 것이다..
그 중심의 남종화의 거목으로 진도 출신 허련(許鍊 1809 순조 9∼1892 고종 29)이 있었다, 조선 말기의 선비화가이다.
그의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마힐(摩詰), 호는 소치(小痴).노치(老痴).석치(石痴)이며 조희룡(趙熙龍).전기(田琦) 등과 함께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제자로 글, 그림, 글씨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불렸다. 스승을 따라 추사체를 쓰기도 했다.
그는 중국 당나라 남종화와 수묵산수화(水墨山水畵)의 효시인 왕유(王維)의 이름을 따라서 ‘허유(許維)’라고 개명하였고, 마힐은 왕유의 자를 따른 것이다.
오월강각도(五月江閣圖) 족자 종이에 수묵, 99.2 x 48.5 cm
1808년 2월 7일 전라남도 진도(珍島)에서 허각(許珏)의 5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허균(許筠)의 후예 가운데 진도에 정착한 허대(許垈)의 후손이기도 하다. 그림으로 유명해진 이후 헌종의 배려로 1848년 고부감시(古阜監試)를 거쳐 친임회시 무과에 급제하고, 관직은 지중추부사에 오르는 음서로 특혜를 얻는다.
또한 헌종을 배알해 임금이 건넨 붓과 벼루로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임금이 지방 출신의 한미한 화가를 이처럼 가까이 한 것은 극히 예외적인 일이었기에, 당시 허련의 명성이 얼마나 드높았던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초년에는 해남의 윤선도(尹善道) 고택에서 윤두서(尹斗緖)의 작품을 통하여 전통화풍을 익혔다.
이후 1839년 32세 때 대흥사 초의(草衣)의 소개로 서화를 추사 김정희(金正喜)에게 보였다가 작품의 솜씨에 감복한 추사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여 당대의 제일가는 3절의 대표적인 인물 김정희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서화를 수업하는 행운도 따른다 .
그러나 덕분에 화가로서의 면모뿐 아니라, 스승에겐 충실한 제자였으나 가족에겐 무심했고 본부인을 두고도 이중결혼을 하는가 하면, 자식을 편애해 무능해 보이는 넷째 아들을 머슴처럼 부리다 뒤늦게 그림 소질이 발견되자 태도를 돌변하는 등 편벽된 성품을 보이기도 했다.
허련의 인간적 일면도 엿볼 수 있는 전형적인 예술가의 길을 걷는다.
오원 장승업과 더불어 ‘조선 말기 화단의 두 거장’으로 불렸던 화가 허련...
김정희로부터 중국 북송의 미불(米芾), 원말의 황공망(黃公望)과 예찬(倪瓚), 청나라의 석도 1840년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되자 해남까지 배웅하였고 이듬해 제주도로 건너가 여려차례 서화수업을 받았다.
제자 소치가 묵파초를 그렸기에 제목을 이렇게 읊어 적는다.題小癡墨芭蕉
소치 화백 눈 속에 파초를 그려 내니 / 망천을 거슬러라 신운이 없을 수가
연북에 피어 있는 삼백 송이 수선화는 / 파초와 둘 아니다 문수에게 물어 보소
小癡雪裏作蕉圖 直溯輞川神韻無 硯北水仙三百朶 與蕉不二叩文殊
김정희가 9년간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3번이나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 도합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김정희를 모실 정도로 지극한 제자였기에 당연히 가정에는 무심할 수 밖에는...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회화세계를 구축하여 김정희일파 가운데 남종화풍을 토착화시킨 화가로 지목된다. 소치의 지화에 제하기에[題小癡指畫]
손톱 자국 나사 무늬 이야말로 별난 수법 / 천연에서 나타난 이기(離奇)와 휼궤로세
만약 그림 속에서 삼매를 참할진댄 / 천룡이라 일지선을 서슴없이 취하리다
爪迹螺紋是別傳 離奇譎詭自天然 若從畫裏參三昧 卽取天龍一指禪
19세기 화단을 부초처럼 주유했던 허련은 김정희를 통하여 명사들과 폭넓게 교유하였으며, 1846년에는 권돈인(權敦仁)의 집에 머무르며 헌종에게 그림을 바쳐 궁중과 인연을 가지게 되었고, 왕과 여러 차례의 접촉을 가졌다.
당대의 명류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회화세계를 풍부하게 하였으며, 남종화의 문기(文氣)와 화경(畵境)을 깊게 하였다. 1846년 헌종에게 '설경산수도'를 바쳤고 극찬을 받았다. 1856년 추사가 타계하자 고향 진도로 낙향하여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짓고 정주하였다.
묵란도 (墨蘭圖) 44.9 × 23.8 Cm
또 허련은 1866년 상경하고 1877년 70세에 흥선대원군을 만났으며 대원군은 그를 두고 "평생에 맺은 인연이 난초처럼 향기롭다(平生結契其臭如蘭)"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1887년 벼슬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까지 이르다 1893년 9월 6일 8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그와 교우관계를 가진 인사들로는 해남의 우수사 신관호(申觀浩), 정약용(丁若鏞)의 아들 정학연(丁學淵), 민승호(閔升鎬).당대 최고의 세도가였던 김흥근(金興根).정원용(鄭元容).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고위 관료 권돈인, 난초 그림으로 유명한 민영익(閔泳翊) 등이 있다.
그는 49세 때부터 진도에 귀향하여 화실인 운림산방(雲林山房)을 마련하고 제작활동에 몰두하였다.
허련이 말년에는 지방을 떠도는 유랑화가의 처지로 전락했으나,정착한 이래 진도의 운림산방은 이제는 허련 개인의 거처라는 의미를 넘어 호남 회화의 상징적 장소 또는 호남 남종화의 성지로 불리게 된것은 결코 우연은 아니다.
운림산방(雲林山房)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에 지방 출신으로 유일하게 중앙의 서화계에서 인정받고, 다시 지방에 직접적 영향을 끼친 유일한 화가인 허련 회화의 존재감을 알리는 대명사가 된 것이다.
이후 19세기는 물론 20세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호남의 그림과 미술 문화를 논할 적에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하는 곳이 운림산방(雲林山房)이 되었다.
-허련은 신분 면에서도 스승 김정희가 최고의 양반가문 출신 천재였던 데 비해, 제자 허련은 궁벽한 유배지에서 태어난 몰락한 양반 출신의 직업적 화가였다.-
1866년에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선면산수도 (扇面山水圖) 등을 남겼고, 1867년에는 몽연록 (夢緣錄) 등 소치실록(小痴實錄)을 저술하였다.
소치 허련은 다방면의 화재에 능통하였지만 산수화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산수화는 황공망.예찬의 구도와 필법을 바탕으로 하였으면서도 붓끝이 갈라진 거친 독필(禿筆)의 자유분방한 필치와 생편한 담채의 색감에서 독특하고 개성이 두드러진 화풍을 엿볼 수 있다.
산수도(山水圖) 종이에 수묵담채, 39.6 X 81.4cm
그러한 산수화 외에 진한 먹을 대담하고 능란하게 구사한 사군자.모란.파초.괴석.노송.연화 그림도 특징적인 개성미를 지녔다. 스승 김정희도 “압록강 동쪽으로 소치를 따를만한 화가가 없다(鴨水以東 無此作矣).”든지, “소치 그림이 내 것보다 낫다.”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김정희가 황공망과 예찬의 화풍으로 대변되는 중국 남종화를 모범으로 삼아 조선의 진경산수화를 비판하자, 허련은 스승의 회화관을 받들어 문기 어린 남종화에 일생을 바쳤고, 이를 고향인 호남 지방에 전파했다.
때문에 그가 고향 진도에 건축한 운림산방은 오늘날 호남 남종화의 성지로 불린다. 허련이 거처했던 화실 이름에서 기인한 운림산방의 화맥은 넷째 아들 미산 허형(1862~1938)을 시작으로 손자인 남농 허건(1908~1987), 족손인 의재 허백련(1891~1977) 등 5대에 걸쳐 이어졌으며, 이들이 중심을 이룬 호남화파는 한국 근.현대 전통회화사에서 뚜렷한 존재감으로 호남 화단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그의 토착화된 화풍은 아들 형(灐)에게 전수되고, 손자 건(楗), 방계인 허백련(許百鍊) 등으로 계승되어 현대 호남화단의 주축을 이루었다.
유작으로는 산수도첩 山水圖帖.오백장군암도 五百將軍巖圖. 방예찬죽수계정도 倣倪瓚竹樹溪亭圖.방석도산수도 倣石濤山水圖.선면산수도 扇面山水圖.누각산수도 樓閣山水圖.김정희초상 金正喜肖像 등이 있으며, 이밖에 모란.괴석.사군자 등 많은 양의 작품이 전한다
스승 김정희초상(金正喜肖像)을 그려주자 시로 답례하기를
통미라 이장길의 후신을 지녔다면 / 소동파 여윈 관골 전인(前因)을 만들었네
장심을 난정에다 굳이 비교한다면은 / 정무본 신룡본이 어느 게 참일는지
長吉通眉攝後身 坡公瘦顴作前因 匠心若較蘭亭面 定武神龍孰是眞
사부로서 그리는 이 지금은 전수 없어 / 관아재(조영석) 떠난 뒤로 백십 년이 내려왔네
반남이라 세상을 비식할 문장 솜씨 / 정능을 묵연에다 시험한 데 지나잖네
士夫畫者今無傳 觀我齋來百十年 潘南黼芾文章手 不過精能試墨緣/又題小翠寫慈屺像
[출처] 소치(小痴) 허련(許鍊)|작성자 선주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