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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역 폭발 사고 당시 삼남 극장이 처참하게 파괴된 모습입니다.벌써 49년전의 일입니다.)
<112>
"지금은 집에 와 있어,"
"그래."
"언니가 부탁하는데 좋은 곳이 있으면 알아봐줘."
"알았어. 무슨 뜻인지 언니의 마음 알아.내가 한번 알아봐줄께."
"큰일이다. 이제 장가도 가야 하는데 시골에 있으면 어느처녀도 시집오지 않으려고 하는데 늘 동생 때문
에 걱정이네."
"잘되겠지. 너무 걱정하지마."
"꼭 부탁한다."
"언지 동생 만나 봐야겠네. 아무리 좋은 직장이라도 본인이 마다 하면 안되지. 본인의 의사도 들어 봐야
겠어."
"잘해낼거야."
누나와 영희 누나는 전화로 연락이 되고 나 역시 영희 누나는 나를 만나기 위해 우리집에 일부러 이리에
서 오신 모양 이었다. 나는 생각지도 않는 생각에 누나의 말을 듣고 달려온 사촌 누나 나는 아버지와 어머
니가 보는 앞에서 그리고 누나가 보는 앞에서 동생을 위한 취직 문제를 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병수야."
"왜? 누나"
"너.지금 서울에서 내려왔다고 했지."
"응,"
"너 지금 서울에서 내려온 이유도 길자 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너 피부병에 걸려서 서울에 못올라간
다는 것 다 알구 있어. 너 누나 말대로 이리에 가볼래."
"이리."
"그래.이리.전라북도에서 살기 좋은 도시야."
"서울보다 나은 거야."
"응. 그래. 지금 매형과 함께 이리에서 지내고 있어, 니가 이리에 와준다면 우리집 에서 머물면서 직장을
구해보는 거야."
"그것도 괜챦은데."
"시골보다 휠씬 좋지."
"근데 이리가 어디에 있지."
"서쪽으로 가다보면 군산있지."
"응.그건 아는데."
"군산 옆에 바로 익산이야.너 이리화약 폭발 사건 알지."
"이리역 폭발사고가 난 장소."
"응.그래 맞어."
"그럼 김제 다음에 익산 익산 다음에 군산."
"그래. 바로 그거야. 니가 허락만 한다면 금방이라도 이리에 데리고 갈 수가 있어. 언제까지고 부모님 앞
에서 신세는 질수가 없쟎냐. 직장을 구하면 혼삿길도 열리고 여자도 만날수가 있지. 너의 혼사문제는 염
려 하지 말아라 이 누나가 다 알아서 마련할 터이니까 직장만 꾸준히 다녀."
"서울보다 낫다면 생각해볼께."
"그래 기다리마."
"영희야 어떼."
"생각은 있나봐 조금 시간의 여유를 줄테니까 지가 알아서 하겠지."
"그랬으면 좋겠네."
영희 누나는 나를 믿고 있었다. 이리이면 지금의 익산을 말하는 것이다. 오래전에 이리역 열차 화약폭발
사고가 있었던 그 자리가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이리와는 전혀 다른도시라 생각하였다. 누나의
말대로 익산은 전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인데 만경강과 연결 되어 있고 김제와 군산이 자리잡고 있는
중앙에 있는 도시였다. 이리라는 도시가 지금은 익산으로 변경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리에 처음 올때부터
인연이 깊은 도시임을 실감이 나있었다. 서동의 역사가 흐르는 도시 익산 미륵산이 자리잡은 역사의 숨결
을 자랑하는 익산에 살게 된 이유도 사촌누나의 덕분이었다. 당시 누나는 마동에서 살다가 아파트로 이사
하고 지금은 김제 원평에서 살고 계시지만 그 당시만해도 영희 누나는 잘사는 편도 아니지만 그래도 나에
게는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사촌누나가 이리에 살면서 내직장을 마련하고 나도 내나름대로 직장을 마련하
(익산 체육공원에서 백만송이 국화축제 대회의 모습)
기 위하여 집에서 기다리었다. 그런데 어느날 집에 있는 데 2년 후배인 권희가 나랑같이 서울에 올라가자
고 하였다.
"서울,"
"응."
"또 서울에 가자구."
"내가 알아본 일자리는 새로운 직업이야. 형과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미리 예기 하는 거라구."
"서울 어디인데...."
"목동에 있는 곳인데 공항과 가까운 곳이야."
"공장은 무엇하는데..."
"응.옷걸이 만드는 공장,월급도 쎄고 잠자리도 재워주고.밥도 먹고 몸만 가면 된다고."
"서울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냐."
"응."
"누군데."
"사촌벌 되는 사람인데 옷걸이 만드는 사장이라고...일손이 없어서 사원 모집중이래."
"누나."
"왜?"
"나 서울 다시 올라갈래."
"또 서울에...."
"응. 월급도 많이 주고 잠자리나 먹여주는 것 옷도 준데 다 공짜인데 몸만 가면 된다고 한다네."
"그래.영희누나는 이 소식을 모를 텐데...."
"누나가 전화로 연락하면 되 쟎아.실망시키지 않도록 말이지."
"알았어.그런데 잘 된일이지만 이번 서울에 올라가면 다시는 시골에 내려 올 생각하지 말어."
"알았다니깐.내가 어련히 알아서 할까봐."
나는 2년 후배의 말을 듣고 다시 서울에 올라가기로 하였다. 서울에 내려온지 단 6개월만에 그 이듬해인
1981년도 6월 중순경에 다시 서울로 상경하게 되고 내가 두번째로 서울로 올라간곳은 공항동위치에 자리
잡은 목동이었다, 목동에서 생활 하면서 나는 직장을 구했고 후배와 함께 공장에 취직 하였는데 옷걸이 만
드는 공장이었다. 마침 사람이 없어서 사원들을 모집 중이라 한다. 사장의 말로는 일단 사원이 모집되는데
로 공장을 가동하고 제품을 만들 계휙이었다. 생산량이 많으면 야간일도 할 수 있다고 하였다.야간 경우에
는 10시나 11시정도 까지 작업을 한다고 하였고 월급은 톡톡하게 준다고 사장은 늘말해 주었다. 나는사장
의 말을 듣고 2년 후배와 함께 서울에서 지내기로 하였다. 일단 영희 누나에게 약속을 취소하고 그저 잘지
내고 있다는 안부만 전해 주었다. 오히려 영희 누나에게 실망감을 안겨주는 듯하여 미안하기도 하였다.
"누나.저예요."
"병수로구나."
"미안해서 어떡하죠.다시 서울에 올라오게 되었는데...."
"알고 있다. 길자 언니가 이야기 해주더구나.그래 어디에 있든지간에 성실하게 기술을 익히고 돈벌어.그
저 이 누나는 니가 건강하고 공장에 잘다니기를 바랄뿐이란다. 그러니 너무 심려치 말고 니 일이나 열심
히 해."
"영희 누나.언제 뵈올께요."
"그래 알았다."
"자주 전화 할께요."
"고맙구나.근데 너 아니?"
"무슨 소리인데요."
"길자 언니가 재혼했다는 소식 말이지."
"재혼이라고요."
"그래 좋은 남자와 만나서 잘 살고 있다고 전번에 부산에서 전화가 왔더라."
"축하 할일이네요."
"너의 안부 꼭 전하라고 일러주더라."
"그럼 시골에는 누나가 안 계시네요."
"그렇지.부산으로 가서 매형이랑 잘 살건데...명절때나 자주 들리지 평상 때는 자주 못 오쟎아."
"맞아요. 매형은 잘 지내고 계시지요."
(필자가 1981년 당시 서울 양천구에 있는 신정동 거리의 모습과는 많이 변한 것 같습니다.)
"그럼,너의 안부 잘받았다고 너의 매형한테 전할깨."
"예,영희 누나,큰집에도 평안하시고요."
"그래."
그해 여름은 무척 더웠다. 내가 목동에 있는 줄을 알고 복기가 일부러 나를 찾아 왔다. 나의 소식에 대하
여 알고 싶고 또 서울에 올라 왔으니 이번에는 잘 해보라고 격려까지 하고 내가 피부병에걸려서 고생했다
는 소식을 듣고 복기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복기가 다녀간 이후로 해숙이로부터 전화가 걸려오고수
미로부터도 안부소식이 끊이지 않았다. 매달에 한 번씩 시골집 에다가 전화를 하고 그리고 동생들이나 친
척집에도 가끔 전화를 넣어 주었다. 내가 두번째로 서울에 올라와서 옷걸이 공장에 취직 하였으니 다시는
시골에 내려 가지 않을거라고 생각을 하였다, 후배의 도움으로 다시 서울 생활을 하였지만 그래도 신림동
에 있을 때보다는 편안한 것 같았다. 서울에 올라왔어도 그들의 소식을 못 듣고 있었다. 이제 현재가 중요
하다. 어떻게 기술을 익히고 배우면서 돈을벌어야 하는지 고심을 하기도 하였다. 사장도 언제나 마음이너
그러웠다. 사원의 사소한 일까지도 신경을 많이 써주었고 가끔 회식도 갖었다.
"전에는 어디에 있었나."
"신림동입니다."
"그래.자네 고향은 전북 진안이랬지."
"네 맞습니다."
"이제 고향도 같으니까 든든하겠구나, 권희 너도 이제 2년선배를 데리고 있으니 외롭지도 않구 말이야."
<113>
"형.우리 공장에 와 주어서 늘 고마워."
"고맙긴 나도 마찬가지인걸."
"잘 지내보자.서로의지하면 힘이 되어주니까?"
"사장님도 시골 출신인가요."
"그래 나도 어렸을 때 부모님 따라서 자네처럼 농사일도 해 보았지."
사장도 시골출신이라 우리의 시골 출신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아는 모양이었다. 고향은 어딘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가끔 회식을 통하여 즐거운 대화도 오고 갔었다. 군대 이야기도 들려 주면서 사회의 경험도 솔직하
게 털어놓는 사장의 사유도 알 것 같았다. 사장이 자라온 과거이며 부인과 만나는 과정을 통하여 첫사랑의
고백도 들을 수가 있었다. 결혼후에 서울에 살면서 직장을 잡았고 그래서 돈을 많이벌어 옷걸이 공장을 차
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공장을 차리고 사장이 되기까지는 우리들 처럼 많은 경험을 하게 되고 힘들었던 이
야기를 늘어 놓을 때마다 한 마음 한 뜻이 되었다. 아무리 서울 생활이 힘들어도 서로 가족처럼 잘 우애 하
고 도우면 모든 어려운일은 잘 해결될거라고 약속을 하였다. 공장장은 경상도 상주 출신 이었다. 공장장의
나름대로 많은 경험을 털어 놓기도 하였다. 성질은 불 같지만 화해 하는데는 금방 사그라드는 기분 이었다.
어떤 때는 기분이 좋다하여 자기가 술을 낼 때도 있고 대부분은 사장이 많이 술을 살 때가 많았다.
"자네는 술도 못 마시는가?"
"예."
"술도 못 마시면 무슨 재미로 사노."
"나도 술은 못 마시는디요."
"원래 전라도 양반들은 술도 못 마시고 담배도 못 피우니 인생 사는 맛이 나겠나. 서로 어울리다 보면 술
한 잔정도 해야 하지.안그러나."
"공장장님 미안합니다. 그려도 노는것은 우리 전라도가 화끈한디요."
"또 지역 감정인가."
"지역 감정이 아니랑께요."
"그라믄 뭐꼬. 우리 갱상도(경상도) 출신도 노는것은 화끈하게 놀지.어찌 전라도 출신 뿐이노."
"야,야, 전라도가 어떻고 경상도가 어떻나. 우리는 한 가족이라. 같은 배에 탄 사람이니 즐거워도 우리일
이고 괴로워도 우리 일이지."
"맞데이. 틀림 없는 우리 가족이 아니가.그래도 내사 갱상도 출신이지만 전라도 출신도 인정이 많구마."
"그러니께 가족이제요. 공장장님. 안그라요."
"맞다 맞어. 이 조그마한 땅덩어리에 지역 편 가르는것은 안 좋지예. 남과 북으로 갈라지는 것도 원통한
일인기라. 우리는 하나가 되어 어려운 고비도 해쳐 나갈수가 있다. 안카나. 억수로 좋은화합인데 뭐가두
렵노."
"그라믄 맞지라. 틀린 말이 아니재."
그렇다. 오늘의 현실 남과 북이 갈라진 이 비극의 현실인데. 서로 지역감정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은 어찌
(사장과 사원과의 호흡은 잘 맞아야 회사가 잘 돌아간다)
보면 대한민국의 불행이 될지도 모르는 바이다. 지역 관계 따질 것없이 서로만나면 가족이 되고 하나가되
는 것이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로 나누어지었지만 지금은 하나이다. 이제 남과 북이 통일된다
는 것은 우리 대한민국의 사람들의 소원이기도 하고 희망이다. 우연히 들어보는 공장장의 경상도 사투리.
그리고 우리가 전하는 전라도 사투리. 여종업원의 소박한 서울 말씨 이제는 하나의 가족이되어 살아 가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 둘은 술을 못 마시기는 하여도 회식자리에는 빠짐 없었다. 언제나 회식 자리에는 늘
사원들의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회사생활을 통하여 서로 불편한점을 느낀다면 서슴없이 토론하는 그러한
장소였다. 서로 일을 하다보면 서로 얼굴을 붉힐 때도 있지만 인간 관계에 있어서 화해하는자리는 언제나
회사의 발전을 위한 기름길이었다.
"아줌마도 술은 한잔 하시네요."
"예,조금은 하지요."
"한잔 더 드시게라."
"됐어요."
"아저씨는요?"
"한잔 더 줘요.역시 병수씨가 따라주는 술맛이 괜챦네요.ㅎㅎㅎ"
"고향이 어디시랬수."
"전라도 진안이요."
"마이산 있는 고장이요."
"네.맞는데요."
"좋은 곳에서 사시는데요.ㅎㅎㅎ"
"뭘요."
"그라믄 예전 직장은 어디에 근무하고 있었습니꺼?"
"서울 신림동에서 동명전자라는 전자부품회사에서 다니었지요."
"그란데 와 그만 두었는지요.무슨 사연이라도 있는기라."
"사연은 무슨 사연입니까?"
"몇년동안 있었습니까"
"3년하고 6개월동안 있었지요."
"오래도 다니었네요."
"경리 아가씨는 여기에 입사한지 오래 되었습니까?"
"글쎄요. 저는 이곳에 들어온지 얼마 안 되어서요."
"아,그러십니까?집은 어디인데요."
"안양인데요."
"조금은 먼데요."
경리 아가씨도 어울리면 술을 잘 마시는 편이다. 그러나 많이는 마시는 편이 못되고 마셔봐야 서너잔 정
도였다. 그러면 나는 그에 비하면 비애주가라 할까? 사내가 되어서 술을 마시지 못한 다면 말도 안된다고
핑계를 대었지만 사실은 사실 대로 이야기 할 뿐이었다. 커피도 뽑아 주면 늘 고맙다고 말하는 그녀 20대
초반이라 한창 꽃이 피어날 시기 였다. 찰랑 찰랑 긴 머리에 웃음을 주는 그녀 비록 짧은 미니 스커트를입
으면 입을 수록 어느 남자고간에 그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남자는 없을 것이었다. 취미는 뜨개질이고
라디오 듣는것 산책하고 펜팔 보내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그녀를 만나는 순간 얼굴이 홍시처럼 빨갛
게 보여서 대화를 나눌줄을 모르고 있었다. 시골에서 살아온 과거이기는 하지만 나는 아가씨를 사귈지 모
르는 수줍은 남자였다. 그래서 여자와 이성교재를 나눈다는 것은 나의 미래적일 뿐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그러나 사회에 적응하다 보면 여자를 만나 사랑을 하는것도 좋은 체험이라 생각 하였다. 가끔 기숙사에
들리면 호기심이 많은지라 나는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부끄러움을탔고 후배인 권희도 나를보고 부러
워 하는 눈치였지만 속마음을 털어내지 못하였다. 같은 고향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녀와 사귀
기에는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첫사랑이라고 고백할 껏 가지는 가지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 미국으로 건너
간 여자 동창생을 생각하면 우수운 일이지만 다 지나간 일을 기억 할 수가 없었다.
"형."
"뭐여."
"그 여자 어떼."
"별루다."
"내가 볼때는 잘 생겼는데,,,,,"
(인간 관계는 사회의 기본 질서입니다,)
"그럼 니나 가져라."
"나도 여자에 대한 관심이 없는걸,그래도 형은 그녀가 마음이 드나봐."
"쓸데 없는 소리마."
"형.한번도 여자 사귀어 본 일없지."
"그래."
"한번 사귀어봐 좋은 일이 있을테니까?"
"난 여자만 만나면 오금이 저리는데...니는 안그러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 여자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사실은 좋아하지만 사춘기 때는 다 그런게 아니야."
"그래도 동창생이나 동생은 몰라도 어찌 남의 여자한테 사랑을 고백할 수가 잇겠냐,"
"어머.여기 계시엇군요."
'아가씨다.'
"뭐하고 계세요.커피나 드시지 않고,....."
"왠 커피요."
"제가 사는거예요.아저씨들 심심할까봐."
"경리 아가씨는 이름이 어....어떻게 되나요."
"최윤숙이라고 불러요,"
'앵.최윤숙.'
언뜻 머리에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최윤숙'아가씨치고는 좋은 이름이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듯한
기분이 들었다. 상냥하게 대하는 그녀를 볼 때 나는 무엇으로 답을 얻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나는 후배
와 얼굴을 마주보면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몸매는 정말로 황홀할 만큼 매력을 지닌여자였다. 키가
멀쓱하데 자라고 흰 부리우스에 걸친 브레지어가 쏙눈에 뜨엿다. 유방을 가리는 브래지어 끈이 속살과 함
께 비쳐 들었다. 짧은 스커트 차림에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사뿐히 다가 오면서 대접을 받기에는 처음 이
었다. 어쨌든 서울에 올라와서 아가씨를 만나는것은 행운이라고 생각을 하였다. 정말 서울에 올라오면 여
자들이 많다더니 다들 서울여자 치고는 다 미인이었다. 그녀 역시 안경을 쓰고 다녀서인지 더욱얼굴이 이
뻐 보였다. '최윤숙' 좋은 이름이었다. 나이를 물어보고 가족을 소개 하는것 기본적의 일이지만 나는 후배
를 통하여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는 이렇게 상냥스럽고 친절한 아가씨인줄을 몰랐다. 그런데 사귀고 보니
괜챦은 여자였다. 살은 빠지기는 했는데 몸 무게는 정상정도 였다. 방긋 웃는 그녀의 입술이 마치 앵두 처
럼 붉다. 화장은 짙은 색은 아니어도 화장 냄새가 풍기었다.
<114>
누나는 내가 서울에 올라온지 얼마후 부산으로 내려가시었고 그 뒤로 재혼하여 새로운 남편을 만났는데
고향은 상주라 하였다. 내가 집에 있을 때도 여러번 누나를 만나러 선을 보러왔다며 나한테도 소게받았고
인사를 나눈적이 있었다. 누나는 두번째 매형을 만나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조카 이름을 남원이라 하
였다. 누나는 어린아들과 부산에서 함께 살면서 누나네 집에 들린적이 있었다.
"삼촌."
"많이 컸네."
"잘 지냈어요."
"그래,엄마는 잘 지내고...."
"예,삼촌.시골에 있을 때 보담 많이 변했네요."
"그래.너도 나 보고 싶었지."
"외할머니는 건강하시지요."
"그럼."
"너 학교 졸업하기전에 엄마 따라 부산에 내려왔지."
"예."
"아빠는?"
"아빠는 사고로 돌아가시었어요."
"저런,"
"그럼 엄마와 너와 함께 사냐."
"예.그래도 외할머니 생각이 나는데요,외할아버지랑 밤을 따고 감을 따던 생각이 나던데요."
"어서 가자."
(여자들은 아름다워지기 위하여 화장을 한다.)
"누나."
"너 왔구나."
"이제 막 도착했어요."
"먼길 오느라 수고많았다."
"남원이도 많이 컸네요."
"그래. 외할머니댁에서 자란 탓인지라 새까맣게 그을리었다."
"벌써 그렇게 되었네요. 간난 아이때 누나가 데려오던 조카인데 많이 커부렀어요."
누나네 집에 들리기 위해 나는 진안에서 고속버스편으로 부산에 들린적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부산은 먼
거리였다. 남원이가 간난아이때 모정리로 데리고 와서 어머니의 품안에 안겨기르게 되었다. 남편은 교통사
고로 죽고 이제 누나의 생활이 여유치 않아 당분간 누나는 모정리에 있는 어머니 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그
때 당시는 나도 시골에 있을때였다. 입학식을 시켜주시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마음은 무거웠지만 그래도 외
손자라 맡아 기를 수밖에 없었다. 누나의 이야기를 들으면 너무나도 긴사연이고 남원이를 낳아서도 상주에
있는 고모댁에 떨어져 사는동안 어린조카에게 구박을 하는 고모의 마음이 너무나도 야속했다. 우선 남원이
아빠가 죽자 어린남원이는 엄마의 품안에서 떨어져 살아야 하는 아픈세월을 보내야 했었다. 몇달동안 엄마
품에 떠난 어린 조카이지만 고모의 구박에 못이겨 고모네집에서 튀쳐나오기도 여러번 있었다. 옷에다가 오
줌을 누웠다 하여 추운 겨울에 밖으로 내 보내 집에 들어서지도 못한 계모같은 고모 등살에 못이겨 아들 남
원이는 엄마 없는 서러움 때문에 많이 울었다. 누나도 어린 자식을 고모네 집에 맡기고 사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는가. 어린 아들의 울음소리를 들을때는 누나의 가슴은 천갈래 만갈래 찢겨지는 아픔을 견디어야 했
다. 상주에 있는 큰 고모는 남원이 아빠가 죽자 재산권을 탐내는 동시에 우선 남원이를 상주에 있는 큰고모
댁에 맡긴것이었다. 누나는 몇달동안 거리에서 잡상인 노릇을 하다가 공장에 들어가서 돈을 벌기위하여 몸
부림치며 살아왔다. 누나는 참다 못해 중신 아비와 싸우기도 하고 결국은 누나의 품 안에 안긴 어린 조카는
모정리에 있는 친정에다가 아들을 맡기고 살아온 누나. 모정 초등학교에서 5년 동안 마치고 결국은 아들을
부산으로 데리고 내려 가서 사는 도중이었다. 누나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정말로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매형의 발길 질에 채여 머리를 다치고 말았다. 누나의 기막힌 사연 어찌 이 말을 남기지 않을 수가
없을까?
"누나 힘드시었죠."
"나야 힘들긴 우리 남원이도 삼촌이 보고 싶다고 해서...."
"그래도 언젠가는 부산에 들리려고 했는데 마침 잘 되었어요. 마침 시골에서 쉬고 있는 터라 잠시 들리고
싶어서 며칠전에 집에서 누나에게 전화를 드린거요."
"삼촌.우리집에 계속 머물거지."
"남원아.그래 삼촌하고 오래 살고 싶지."
"응."
"외할머니가 너 보고 싶다던데...."
"나두 보고 싶어.외갓집에 가고 싶어. 밤도 따고 감도 따먹고 싶어."
"누나.조카 정말로 똑똑한 아이여요."
"지 아비 닮아서인지 똑똑하고 영리하지.그래도 내 말이라면 잘 들어."
"삼촌이 오는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데.버스 터미널에서 한참동안 엄마와 기다렸지."
부산 사상터미널에서 버스에서 내린나는 어린조카의 마중을 나와 함께 누나네집에 도착하였지만 그래도
누나의 형편은 어려운지경속에서 살아나가고 있었다. 누나는 때마침 가구공장에 다니시었고 아침새벽 이
면 가구공장에 나가 일을하면서 아들 남원이의 학비를 모으고 있었다. 누나는 내가 부산에오자 얼마나 반
가워 하시는지 나역시 마음이 짜랏하게 느껴지었다. 누나도 객지생활을하면서 얼마나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나는 부산에 있으면서 은수형님 댁에들리고 그리고 문현동에 계시는 당 숙부도 만나 서로의 안부
소식을 주고받으며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시간을 보내었다. 누나와 나와 조카는 용두산 공원에 들
려 부산시가지를 구경하면서 남원이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들려주었다.
"남원아."
"왜 삼촌."
"공원에 오니 좋지."
"응. 좋아. 그것도 엄마랑 외삼촌이랑 오니까 좋아."
"우리 남원이는 좋겠네 공원에 와서 좋은 것도 보고 그리고 놀이도 하고...."
"저기 보이는 다섯게의 섬이 있지."
(여기가 바로 부산에 있는 사상 시외버스 터미널이지요.)
"예.저 섬이 무언데요."
"부산의 명물 오륙도란다."
"조용필의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서 나오는 저 섬이 바로 오륙도라고요."
"그래. 저 섬만 지나면 바로 일본의 대마도가 눈앞에 보이지."
부산의 명물 태종대나 그리고 광안리 해수욕장이나 그리고 용두산 (龍頭山 )공원은 볼거리가 너무 많다.
용두산 공원에서 내려다 보이는 부산 시가지의 모습에 하얀 물결을 타고 흐르는 배들의 모습이 한폭의 그
림이 되어 보였다. 바닷바람이 송도쪽에서 불어오고 광안리를 지나려면 부산 영도다리를 건너야 했다. 동
쪽으로는 오륙도와 일본 대마도 섬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거제도가 보이고 북쪽으로는 김해공항이 남쪽으
로는 부산항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부두마다 외국 선박이나 국내 선박으로 가득 차 있었고 해안도로마다
방파제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방파제 반대쪽에는 자갈치 시장이 자리를 잡고 들어오는 선박 이나 나가는
선박을 맞이하는 장소였다. 부산의 바닷바람은 그리 찬 바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부산 치고는 우리 나라
에서 두번째로 가는 대 도시이며 동양에서는 항구도시중에서 큰 대 도시였다. 금정산 아래로 이어지는 실
날같은 정맥과 같은 철도와 그리고 동맥으로 이어지는 경부 고속도로가 서울까지 이어 지고 있었다. 보름
동안 누나네 집에서 머무는 동안 남원이와 함께 외갓집 이야기를 해 주었고 남원이는 시골에 있었던 일들
을 기억하고 있었다. 외갓집에서 학교를다니면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어린추억을 담아내고 있었으니 모
정리에서 지내던 일들은 쉽게잊혀지지 않았다. 남원이와 헤어지면서 아쉬움을 남기었지만 그래도 누나는
모처럼 동생이 부산에 들리자 무척 반가운 모양이었다. 나는 부산에 다녀오고 나서 집에 있다가 서울로다
시 상경하여 옷걸이 공장에서 지내고 있었다. 누나의 한 맺한 사연이 많다보니 누나의 이야기를 다꺼내도
이 지면에서는 모자랄 지경이었다. 어쨌든 서울에 올라와보니 변한 것은 사실이었다. 부산 누나한테 오랫
만에 전화를 넣어 주는 것이 오래 되어서 그 뒤로 소식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모정리는 유서 깊은 산골마
을이었다. 조상 대대로 이어지는 고향 땅이지만 정이란 것은 항상 남게 되는 것이었다. 남은 서울 생활은
내인생에 있어서 잊지 못할 하나의 추억이었다. 누나의 살아오는 과정에서 험난한 길은 많았다. 누나의소
녀시절 중학교 때의 시절. 가출하면서 때로는 부모님의 마음을 상하게 했던 일. 아니면 나를 등에 업고 어
머니 한테 젓을 물리던 시절 이제는 다 지나간 하나의 기억 밖에 남지 않았다. 시골에 있을 적에는 누나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동생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무수한 세월을 보내었는데...이제는 하나의 꿈이었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용담에 있는 외갓집 이나 신정리 이모부댁 아니면 금산 음대리 이모님댁에 들리 기도
하고 용평리에사시는 막내 이모님이나 고모댁에 들리어서 시간을 보내던것이 이제는 아련한 기억만 남아
있다. 그땐 누나 친구들이 많았는데...다들 객지에 나가 사느라고 소식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서울에 올라
와서 후배와 함께 공장에 취직하면서 힘든 일도 많았지만 늘 언제나 편한 날도 많았다. 고향 생각이 날 때
면 부모님께 안부전화를 넣어주거나 편지로 써 드리었다. 늘 아들의 목소리가 생각나면 전화 하시던 아버
지이지만 나는 그 이전에 아버지 에게 미리 전화를 드리기도 하였다. 6개월간 서울에 있으면서 새로운 삶
에 대한 느낌도 많았다.서울에서 여자를 만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도 않는 일이었다.여자를 만나면 미
국에 건너간 동창생이 생각이 났는데 그것은 잊은지가 한 참 오래 되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아가씨를 만난다는 것은 처음인데..."
"형. 이곳에 오면 누구든지 여자를 만나게 되었는디.형으로써는 행운이 가득한 걸."
"쓸데 없는 소리."
"지금쯤 형이 시골에 있을 때 생각해봐.저렇게 좋은 아가씨를 만나겠어."
"야, 부끄럽다."
"촌스럽기는...남자라면 한번 만난것도 좋은일이여."
"그럼 니는...."
"나도 몇번은 만난적은 있는데..."*
(부산 태종대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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