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하는 감리교회와 재건파 이규갑 ․ 전효배 연회장
일제의 억압 통치로부터의 해방은 우리 민족에게는 참 자유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깨닫게 했던 역사적 쾌거였다. 일제는 한민족 말살 정책을 펼치며 우리의 것을 모두 없애는 일에 혈안이었다. 광복은 진정 우리의 것을 회복하고 복원하라는 시대적 사명을 안겨 주었다. 교회의 재건 운동은 당면 과제였고 이를 위해서 선결 과제가 바로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는 일이었다. 그것이 친일세력들에 대한 단죄이다. 이들이 통리사로, 감리사로 있는 한 감리교회는 내부의 혼란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감리교회는 일제의 잔재 청산 문제로 인해서 극심한 내홍을 겪게 되었다. 해방된 조국에 남북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던 나라의 형편과 다를 바 없이 결국 감리교회도 재건파와 복흥파로 나누어지면서 분열의 시기를 맞이했다. 재건(再建)이란 말은 일제의 잔재는 없애고 교회를 다시 세워야 한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복흥(復興)이란 말은 일제에 동조하거나 가담한 것은 불가항력적이라고 변명하면서 1930년대의 교회로 다시 일으키자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재건파 중부연회 이규갑 연회장
1945년 7월 일제는 소위 종교통합정책을 시행하여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을 조직했다. 한 달 뒤 해방이 되자 이 교단의 임원들은 발 빠르게 ‘일본’이란 말을 삭제하고 ‘조선기독교단’으로 바꾸었다. 1945년 9월 8일 이들은 서울에서 남한만의 교단대회를 소집하고 이를 남부대회라고 칭했다. 1946년 4월 30일~5월 2일까지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제2차 남부대회는 ‘각 교파가 각자 성격대로 활동’하기로 결정했다.
해방 후 교파 교회의 재건은 감리교회가 먼저 시작했다. 1945년 9월 8일 새문안교회에서 소집된 남부대회에서 이규갑, 변홍규 목사 등 수십 명이 ‘감리교회는 따로 재건하겠다’고 선언하고 회의장을 퇴장했다. 이들은 재건파라고 불리었는데 그해 11월 동대문교회에서 감리교회 재건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규갑, 변홍규, 전효배, 권성집, 구성서, 김광우 목사들과 윤성범, 이봉구, 이찬용, 장시화, 라사행 목사 등 일부 소장파 목사들 중심으로 한 재건파는 기독교 조선감리회 재건을 위해 1946년 4월 4일 서울 냉천동 감리교신학교 강당에서 기독교 조선감리회 중부․동부 연합연회를 개최하였다. 이 날 이규갑 목사는 재건파가 감리교 정통의 법적 계승자임을 선언하였다. 이날 연합연회에서 감리교회 재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중부연회는 연회장에 이규갑 목사, 서기에 김영렬(金永烈) 목사를 선택했다. 동부연회장은 연회장에 변홍규 목사, 서기에 라사행 목사를 선택했다. 연합 연회 참석자는 모두 85명이었다. 이로써 재건파의 중부연회와 동부연회의 조직으로 감리교회의 재건 문제가 일단락되었다.
이 연회에서 기독교 조선감리회 유지위원회 위원장인 이규갑 연회장은 다음과 같은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1939년 이후 왜인의 탄압정책 속에 우리 교회가 내정 간섭을 받은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로 인하여 된 행정이나 규정된 것은 일체 차를 부인하고 금번에 기독교조선감리회에 속한 목사들과 각 구역에서 선임한 신도 대표들로 구성된 중부연회와 동부연회는 기독교 조선감리회의 법적 상속자요 새 조직체가 아님을 선언하노라.”
그러나 하나 되는 감리교를 위해 재건파는 복흥파들과 연합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1948년 1월 22일부터 기독교 조선감리회 중부․동부 연합연회를 동대문교회에서 개최하였다. 여기에서 중부연회장에 이규갑 목사, 서기에 김광우 목사, 동부연회장에 전효배 목사, 서기에 조영제 목사를 각각 선임함으로써 감리교회는 분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각 파는 모두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며 평행선을 달리게 되었다.
이규갑(李奎甲, 호 雲湖) 목사는 1887년 11월 5일에 충남 아산군 인주면 공세리에서 아버지 이도희(李道熙)와 어머나 박안나 사이에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충무공의 9대손으로 애국심이 강했다. 1900년 13세 때 부친을 여의고 나라를 위해 큰 일하겠다고 결심하고 상경하여 1906년 한성 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1907년 일제의 헤이그 밀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퇴위시키자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는데 이때 이규갑은 강단을 뒤로하고 충남 홍주 의병에 참가하여 운양관으로 활동하였고 1909년 교사로 일하다가 1910년 일본 헌병대에 체포 투옥되었다. 한일합방 특사로 출감한 그는 1911년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신조선당’이란 지하조직을 결성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협성신학교에서 수학하던 중에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과에서 공부하였고 귀국 후에는 공주 영명고등학교 교감으로 재직, 지하 운동에도 참여했다. 직산 예성학교를 설립하여 영세한 아동의 교육을 담당하다가 비밀결사사건으로 일본 헌병에 검속 되어 공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14년 출옥한 이규갑은 이화학당 출신 교사인 이애라(1894~1921)와 결혼하였다. 1917년에 평양으로 가서 교편생활 하다가 신홍식, 길선주, 안세항 등과 함께 독립운동 평양 대표로 선출되었으며 1919년 2월 상경하여 삼일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이규갑의 부인 이애라는 평양경찰서에 수감되어 있다가 풀려나와 남편의 부탁대로 전북, 충남, 수원 등지에 산재해 있던 여성들을 지하 독립운동 부인회를 조직하였고 사역하여 아현동으로 향하던 중 일본 헌병에게 체포당하였다. 백일 된 아이를 길바닥에 내동댕이친 채 투옥되어 아이는 숨지고 말았다. 1921년 석방되어 교편 잡다가 남편 이규갑을 찾아 30명의 가족들과 함께 만주로 향했다. 함경도 경흥 옹기항에서 다시 체포되어 악독한 고문을 받고 사경에 이르자 석방되었지만 남편을 만나지도 못한 채 별세했다.
1922년 이규갑은 미감리회 제15회 조선연회에서 월취(Herbert George Welch) 감독에게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를 시작하였다. 10여 년 간 블라디보스토크와 만주에서 목회, 교육,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25년 이규갑 목사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애국동지 김낙권(金洛權)의 장녀 김애일라와 재혼했다. 김애일라 역시 3․1운동 때 투옥 되었다가 가석방된 여인이었다.
1926년에 귀국하여 신간회 경성동지회 위원장으로 활동하였고 1928년부터 1931년까지 돈암, 월곡, 우이동, 창동교회를 담임하고 1933년 광희문교회, 1935년 의정부교회를 담임하였다. 그의 이런 활동으로 인해 그는 36회나 검거되어 감옥에 들어갔다. 광복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재무부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1946년 4월 5일 기독교조선감리회 유지위원장으로 선임되어 감리교회 재건운동에 힘을 쏟았다.
1950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문교사회분과 위원장에 피선되었다. 1952년 순국선열 유가족위원장, 1956년 충국열사기념사업회 회장, 1959년 대한기독교반공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1963년 5월 동지회 의장 및 민주공화당 고문, 국민외교협의회 이사장으로 일했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지금의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에 해당되는 건국공로훈장단장(單章)을 받았고, 1969년 중앙여자 중학교 고등학교 가 주최한 3․1 운동지도자 찬하회에서 찬하 및 표창을 받았다. 1970년 노환으로 별세하여 아산군 선영에 안장되었다.
재건파 동부연회 전효배 연회장
동부연회장으로 선임된 전효배(田斅培) 목사는 경기도 강화군 양도면 삼흥리에서 유학자 전병규(全炳奎)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와 함께 개종한 후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상동청년학원을 졸업하고 1918년에 그의 부친이 설립한 흥천학교 교사로 일했다. 삼일 독립운동 후 목회에 뜻을 두고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1928년에 제14회로 졸업하여 목사안수를 받았다. 1922년에는 삼청교회 전도사로 파송을 받았다. 특히 삼청교회에서는 특별기도회를 열어서 특별한 은혜가 있었고 애통하고 죄에서 돌아서는 사람들이 많았다(기독신보 1923.4.11.). 이때 전효배 전도사는 평신도 지도자 박경환과 1922년에 삼청교회에 파송받고 여성선교를 추진한 컨로우(Marion Lane Conrow, 簡雨路, 簡義路) 여선교사 등과 호흡을 맞춰 목회하여 삼청교회가 침체를 벗고 새로운 활력을 얻었다.
1924년 9월에 왕십리교회, 1928년 제21회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베이커(James C. Baker) 감독의 집례 하에 집사목사 안수를 받고 1929년에 용두동교회로 부임하였다. 용두동교회에서는 청년지도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청년회를 재조직하였다. 덕분에 교회는 많이 젊어졌고 선교활동도 활발해졌다. 또한 중단된 유치원도 다시 시작하였다. 목사관과 전도부인 주택 건축하였다. 그는 행정에 능하여 용두동교회 교적부를 정리하였는데 교인들의 정확한 인적상황, 이동상황을 기록하여 후세에 남겨 그 교적부가 잘 보관되어 있다. 1933년 3월에 동대문교회, 1935년 용두동교회로 담임과 경동지방 감리사를 겸하여 부임했다. 예배당 건축을 준비하던 중에 전 목사는 935년 5월 광희문교회로 부임했다.
성품이 강직하고 정의감에 투철했던 그는 일제 말기에 남다른 수난을 겪었다. 1942년 10월 총회를 앞두고 한국감리교회를 이끌고 갈 적임자는 양주삼 목사라는 인식하에 선거운동 하다가 일제에 끌려가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복권된 전 목사는 1946년 재차 광희문교회로 부임하여 감리교 재건에 앞장섰다. 재건파에 가담하여 1948년 1월 22일에 동부연회장에 피선되었다. 1949년 금호동교회를 시무하던 중 6․25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그해 8월 23일에 인민군 정치보위부원에 연행되어 행방불명(行方不明)되었다. 다른 교역자들과 함께 납북되어 순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족으로는 부인 유인배 여사와 종철, 종옥 두 아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