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은 준하와 60대 중반의 최일만,
최일만: 이제 대충 끝난 건가?
준하: (보다가) 근로자들 임금하고 퇴직금은 어떻게 처리하실…….
최일만: (자르며) 달 보면 짖는 게 개야. 회사 망했다면 임금 달라고 악악대는 게 노존가 뭐 그 치들이고. 부도나서 깡통 찬 처지에 거기까지 어떻게 챙기나. 지금까지 내 덕에 다 밥 먹고 살았으면 된 거지. (다른 톤으로) 아직 서류 상으로 기한이 안 된 게 있다면서.
준하: (불쾌한 기분이지만) 청주땅이 조카분한테 소유 이전한지 아직 만 일년이 안 돼서 조금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최일만: 그때까지 시간 좀 끌어 줘야지 뭐.
옅은 미소를 띄고 준하를 보는 최일만.
45. 교도소. 거실. 저녁
화집을 뒤적이고 있는 신영.
책갈피에서 나오는 정사각형의 색종이.
교도관이 지나갈 때 마다 그쪽을 의식하는 신영.
46. 준하의 차. 국도. 저녁
주차장처럼 늘어선 차들.
그 가운데 초조하게 핸드폰 액정 시계를 열어 보는 준하.
47. 교도소. 거실. 저녁
점호 시간 부근.
교도관들 복도를 오가며 거실을 점검한다.
종이로 작은 배를 접고 있는 신영.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접던 것을 책갈피에 끼워 넣는다.
그때, 신영의 거실 앞에 서는 교도관.
48. 접견실. 저녁
다소 지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는 준하.
교도2에 의해 안으로 들여보내지는 신영.
준하: (교도1에게) 잠깐 자리 좀 비켜 주실 수 있죠?
두 사람을 보는 교도관1, 조용히 밖으로 나간다.
둘만 남겨진 실내.
준하: 미안해요. 너무 늦어서.
신영:…….
준하: 나와줘서 고마워요. 우리 서있지 말고 앉을까요?
신영: (앉는)
준하: (털썩 앉고 신영을 보다가) 몰랐는데 이마 위쪽으로 상처가 있네요.
신영:……. 낮에 이모가 다녀가셨어요.
준하: (피식 웃고) 재밌는 분이세요. 이모.
신영: 나 때문에 그렇게 귀찮은 일 겪고 있는 지……. 몰랐어요.
준하: 유일한 가족이니까 어쩔 수 없어요.
신영: 친정 식구 거두면서 가족들한테 내내 눈치보고 사신 분이에요. 더는 귀찮게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준하: (보다가) 그럴게요.
신영:…….
준하: 이제 내 차례죠? (편하게 고쳐 앉으며) 오늘 참 피곤했거든요. 일 얘기 하기 싫은데 그냥 좀 앉아있다 갈게요.
신영:…….
준하: 난 한달이면 보통 재판을 스무 번쯤 해요. 그 스무 번을 다 이렇게 열심히 하는 건 아니고 하기 싫은 게 대부분이에요. 아주 하기 싫어 죽겠어요. 처음엔 일하는 거 재밌고 좋아했는데……. 신영씨 만나고 알았어요. 왜 일하는 게 재미없어 졌는지.
신영: (보면)
준하: 언제부턴가 내가 사람들한테 도움을 주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냥 일하고 있는 건데……. 다들 도와달라고 부탁하니까 우쭐해 져서는……. (신영 보며) 신영씨가 도와달라고 안 매달려서 고민 좀 했거든요. 바보같이. 정말 바보짓일지도 몰라요. 내가 하는 일들…….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준하, 씁쓸한 웃음을 접으며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
그런 준하를 보는 신영.
준하: 목숨이 걸린 사람 앞에서……. 나 너무 한심하죠?
신영: (보는)
노크 소리.
여교1: (E) 점호 시간 다 돼갑니다.
서로를 보는 둘.
준하: (담백하게) 난 신영씨가 좋아요. 그래서 친해지고 싶고
도움이 된다면 돕고 싶어요. 진심으로…….
신영: (보는)
준하: 신영씨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다시 노크 소리.
준하: (보다가) 갈게요. 갈 시간이 됐나봐요.
법정에서 다시 봐요
아쉬운 듯 자리에서 일어서는 준하.
준하: 내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요. 들어준 걸로 답이 된거 같애요.
보는 신영.
49. 준하의 원룸. 밤
옷도 벗지 않은 채로 침대에 벌렁 눕는 준하,
눈을 말똥말똥 뜨고 천장을 보다가 빨래바구니에 농구공을 들고 밖으로 나간다.
50. 교도소. 밤
재소자들에 섞여서 잠들지 못하는 신영.
51. 태진그룹. 입구. 아침
라면 등을 끓여 먹고 있는 시위대.
그 앞으로 차를 주차하는 준하.
준하, 차에서 내려 저벅저벅 시위대로 걸어간다.
준하를 보는 사람들.
52. 로펌. 황변호방. 낮
안을 기웃대는 김변, 최변.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책상에 앉아있는 황변과 정장.
심각하고 삼엄해 보이는 분위기.
앞을 지나다가 두 변의 뒤에 와서 서는 사무장.
사무장: 뭔 일이에요?
김변: 서선배가 노조한테 최회장 별장을 가르쳐 줘서 지금 한바탕 난리래요.
사무장: 미쳤네. 완전히 미쳤어요.
최변: (부러운 듯) 어쨌든 서 선배 멋지다. 그렇게 안 봤는데.
확 열리는 문.
급히 사무장의 서류를 가져다 뒤적이는 시늉을 하는 김변, 최변.
황변호, 정장과 함께 엘리베이터 쪽으로 간다.
정장,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황변.
황변: (사무장에게) 서준하 지금 어딨어요? 당장 전화 해 보세요.
사무장: 지금요? (눈치 보다가 핸드폰 단축키를 누르는)
준하E: 여보세요.
사무장: (서둘러 끊으며) 수화기가 꺼져 있다는 대요. 지금.
황변: (할 수 없다는 듯) 연락 오면 바로 들어오라고 하세요. 그리고……. 이번 일에서 손떼라고 전해요.
방으로 쾅! 들어가 버리는 황변.
53. 로펌. 로비. 낮
로비 적당한 구석에서 전화를 하는 사무장.
사무장: 대체 어딥니까? 지금.
54. 준하의 차. 낮
준하: 회사로 들어가는 길인데요.
55. 로펌. 로비. 낮
사무장: 여기 올 생각말고 전화기나 꺼놔요. 당장. (황변호가 지나가자) 이만 끊어요.
황변과 목례하고 밖으로 나가는 사무장.
56. 준하의 차. 낮
전화를 끊는 준하, 괜히 피식 웃음이 나는.
유턴해서 시원하게 달리는 준하의 차.
57. 신영아파트. 경비실. 저녁
벌써 졸고 있는 경비.
소주랑 간단한 안주거리가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입구에 서있는 사무장,
경비실 작은 창을 두드리며 씩 웃어 보이는 사무장.
58. 법정. 낮
변호인 석의 준하.
준하: 일심 재판부에서 받아들인 살해 계획과 살인에 대해 이의 제기합니다.
대기 석에서 서류를 넘기던 황변호, 준하를 본다.
판사도 준하를 뜨악해서 본다.
준하를 한번 힐끔 보고 다시 서류로 돌아가는 박검.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피고인 석에 앉아 있는 신영.
증인 석의 경비.
준하: 증인은 일심에서 사건 당일 새벽에 외부 출입 흔적이 전혀 없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근무시간이 어떻게 되죠?
경비: 자정에 교대해서 아침 8시까지 근무합니다.
준하: 사건 당일 날도 같은 시간에 근무했습니까?
경비: 그날은 제가 상가 집에 갔다오느라고 새벽 3시쯤인가 교대했습니다.
준하: 그렇다면 새벽 3시 이전 출입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시겠네요?
박검: 이의 있습니다. 성종훈의 사망 추정 시각은 새벽 4시 30분에서 5시 30분 사이 입니다. 새벽 3시 이전의 출입 여부는 본 재판과 무관한 일입니다.
준하: 제3자가 범인이면 미리 침입해 한 두 시간 후 살해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판사: 이의 기각합니다. 변호인 계속하세요.
준하: 신고를 받고 그곳에 갔었다고 했는데, 어떤 신고였죠?
경비: 밤새도록 물소리가 나서 시끄럽다고 했습니다.
준하: 새벽 3시 이후가 아니라 ‘밤새도록’ 이라고 했단 말이죠?
경비:……. 네.
준하: 이상입니다.
판사: 반대 심문 하세요.
박검: 발견 당시 피고인이 증인에게 도움을 청했습니까?
경비: 아니오.
박검: 만약 외부 침입자가 피고인의 남편을 살해했다면 증인에게 도움을 청했겠죠?
준하: 이의 있습니다.
박검: (자르며) 이상입니다.
증인 석의 증인, 30대 의사.
의사: 신경외과 전문읩니다.
준하: 죽은 성종훈과 같은 병원에 근무하셨죠?
의사: 네.
준하: 부검의 소견서를 보면 죽은 성종훈의 위 내에서 다이어드팜 성분이 발견됐는데, 다이어드팜에 대해 아십니까?
의사: 신경안정제나 수면제 등에 들어있는 성분입니다.
준하: 그 성분이 들어있는 약을 복용하신 적이 있습니까?
의사: 업무에 시달리다 보면 스트레스 때문에 가끔 복용하기도 합니다.
준하: 죽은 성종훈도 그 약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었겠죠?
박검: 이의 있습니다.
판사: 변호인. 유도심문은 삼가 하세요.
준하: 알겠습니다. (다시 의사에게) 일반인이 그 성분의 약을 쉽게 구할 수 있습니까?
의사: 구할 수는 있지만 신분증 확인 등 절차가 까다롭습니다.
준하: 증인은 제 부탁으로 부검의 소견서를 다 검토 하셨습니다.
의사: 네.
준하: 성종훈의 몸엔 경동맥을 포함한 다섯 군데에 상흔이 있습니다. 상흔엔 어떤 특징이 있죠?
의사: 모두 손상됐을 때 치명적인 상황을 초래 할 수 있는 부분들입니다.
준하: 성종훈에 비해 약자이면서 초범인 피고인이 찾아서 찌를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 까?
의사: 제가 비록 법의학자는 아니지만 신경외과 전문의로서 소견을 가지고 볼 때, 처음 사람의 몸을 대하는 사람의 범행일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준하: 범인이 초범일 확률이 적다는 말씀이시죠.
의사: 네.
준하: 이상입니다.
판사: 반대 심문하세요.
박검: (자리에서 일어서 의사 앞에 서며) 외람된 질문이지만 박사님께서 어떤 사람을 죽인다고 가정했을 때 물론 지금처럼 초범일 경웁니다. 박사님께서는 상대의 어느 부분을 공략하시겠습니까?
준하: 이의 있습니다.
판사: 반드시 대답할 필요는 없습니다.
의사:……. 물론 급소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제가 의사이기 때문에 가능한거고 보통 사람들이 절박한 상황에 놓였을 때 경동맥을 정확히 찾아 찌른 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박검: 보통 사람이 아니고 외과 간호사라면 어떻습니까.
서기에게 서류 한 부를 내미는 박검.
박검: 피고인 이신영이 92년 3월부터 95년 11월까지 간호 조무사로 근무한 춘천소재 건민외과의 근무 기록 사본입니다. 이상입니다.
준하를 보는 의사.
실수를 자책하 듯 눈을 감았다가 신영을 보는 준하.
(인서트)
욕실에서 피범벅이 된 채 실랑이를 벌이는 종훈과 신영.
미동도 없이 그대로인 신영.
방청석에서 준하를 보는 사무장.
증인 석의 30대 여약사에게 기록을 제시하는 박검.
박검: 증인이 기록한 이 장부에 의하면 1월 30일 주민등록번호 711204-2067510 이신영에게 신경안정제를 판매했는데, 맞습니까?
여약사: 네.
박검: 어떤 성분의 신경안정제였죠?
여약사: 다이어드팜입니다.
고개를 드는 준하.
박검: 그 성분의 약을 가령 3~4알 정도 투여하면 어떤 상태가 됩니까?
여약사: 그 정도면 의식을 잃게 돼요.
박검: 저항할 수 없는 완전 무방비 상태가 된단 말이죠?
여약사: 네.
박검: 약을 산 사람이 피고인 맞습니까?
여약사: 맞습니다.
검사 석으로 돌아가 서기에게 서류 한 부를 건네는 박검.
검사: (짧게 준하를 보다가) 사건 하루 전인 2월 4일 받은 피고인의 임신 중절 수술 기록을 증거자료로 제출합니다.
놀란 얼굴로 짧게 신영을 보는 준하, 급히 일어선다.
준하: 이의 있습니다. 본 재판은 성종훈의 사망에 관련된 재판이지 피고인의 사생활을 들추는 재판이 아닙니다.
박검: 피고인의 살인 계획성을 입증할 중요한 자료입니다.
판사: 이의 기각합니다. 계속하세요.
박검: 살인을 저지를 정도의 증오를 가진 남자의 아이가 필요했을까요? 피고인은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낮에는 아이를 죽이고, 밤에는 남편을 죽였습니다. 이상입니다.
(인서트)
욕조에 거꾸로 떠있는 남자의 시신.
허한 표정의 신영, 눈을 감는.
판사: 반대 심문 있어요?
신영을 보고 있는 준하, 자리에서 일어서는,
준하: 이신영씨.
판사: 피고인이라고 부르세요.
준하:……. 피고인.
신영:…….…….
준하: 피고인은 지난 2월 5일에 자신의 아파트에서 독극물과 메스로 남편을 죽이고 도주 하려다 붙잡혔어요. 피고인은 남편을 메스로 찌른후 방에 들어와 옷을 갈아입고 화 장을 하는 중에 검거됐다고 진술했는데 사실입니까?
(인서트)
불안한 얼굴로 세면대에서 피묻은 자신을 닦아내고 있는 신영.
그대로 앉은 신영.
준하: (검사 보며) 맞죠?
박검: (수긍하는)
준하: (신영 보다가 판사 보며) 사건 현장을 담은 비디오 테이프를 증거물로 제출합니다.
사건 현장과 수사 기록 어디에도 범행 당시 입었다는 피고인의 옷가지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준하를 보는 박검.
준하: 피고인은 경찰과 검찰에서 강압에 못이겨 허위자백 한 거예요. 맞죠?
신영:…….
준하: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피고인이 남편 성종훈을 죽였습니까?
신영:…….
보는 재판부와 박검, 방청석의 사무장.
변호인 대기석의 황변과 김변, 최변들.
준하: 죽이지 않았죠?
신영:…….
준하: (다소 흥분한) 죽이지 않았죠?
(인서트)
화장대에 멍하게 앉아있는 신영.
신영:…….
준하: 대답해요 이신영씨.
박검: 이의 있습니다. 지금 변호인은 아직 채택되지 않은 증거물을 앞세워 본 검사와 재판부를 모독하고 있습니다.
판사:……. 변호인, 중단하세요. 다음 공판은 2주 뒤 8월 17일 오후 2시에 하겠습니다.
신영을 보는 준하.
준하를 보는 황변호와 김변들.
뒤늦게 준하를 보는 신영.
59. 로펌. 저녁
불편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오는 준하, 사무장.
게시판 앞을 지나는데 준하에게 축하 인사하는 사람들.
게시판 앞에서는 사무장과 준하.
연수 일정이 앞 당겨졌다.
반갑지 않은 얼굴의 준하.
60. 로펌. 로비. 저녁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꺼내 소파로 가는 사무장.
각자 음료수를 든 김변, 최변이 사무장을 사이에 두고 앉는다.
최변: 안 죽인 건 확실한 거에요?
사무장: 거야 본인이 입 다물고 있는데 누가 안대요?
최변: 난 아무래도 이신영이가 범인 같애.
김변: 살해 동기가 없잖아. 정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별다른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최변: 그럼 정부나 재산 있으면 죽여도 된단 말이야?
김변: 그럴 수도 있단 얘기지.
최변: 그럴 수 있긴 뭐가 그럴 수 있어.
김변: 왜 갑자기 말꼬리를 잡고 늘어져 또?
최변: 야, 꼬리 잡힐 짓을 했잖아 니가.
이어지는 실랑이.
가운데서 황당하게 보는 사무장.
한참을 하다 문득 사무장을 의식하고 멈추는 두 변호사.
사무장: 뭐 하는 거래요 지금. 꼭 부부싸움 하는 거 마냥.
당황스런 기색의 두 변.
사무장이 먼저 웃으면 따라 웃으며 어색하게 마무리 하는.
김변: (어색하게 허허 웃으며) 오늘 커피 맛있네요.
사무장: (허허 웃으며) 그거 콜라에요.
잠시……. 큰 소리로 껄껄 웃는 두 변.
같이 웃는 사무장.
61. 로펌. 황변방. 저녁
서류를 책상에 탁탁 쳐서 정리하고 있는 황변.
황변: 다른 거 없어. 지금 하는 국선 빨리 처리해서 넘기고 연수 뜰 준비하라구.
준하: 일정을 좀 미뤘으면 합니다. 예정보다 너무 앞 당겨졌어요.
황변: 우리쪽에 맞춰 움직이는 일정 아니야. 서준하, 딱 보면 몰라? 그 여자가 죽였어. 죽여놓고 할말 없으니까 쇼하는 거라구. 무모하게 덤비지 말고 범행 시인하고 선처 부탁해.
그게 그 여자 돕는 길이야.
준하: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황변: 잔소리 말라구? 어쨌든 재판 길게 끌어서 연수 포기할 거 같으면 미리 말하라구. 서준하 빠진대면 가겠다는 사람 줄을 섰으니까.
짧은 한숨을 뱉고 돌아서는 준하.
황변: 오늘부터 이신영 건 판공비 결재 안 나니까 그런 줄 알어.
멈춰 섰다가 그냥 나가는 준하.
황변: (하던 일로 돌아가서는) 죽일 놈 보듯 그러지 마. 나도 국선 포함해서 착한 일 많이 하는 사람이야.
준하: (돌아보면)
황변: 제발 현실감을 좀 가져. 잘 하다가 요즘 왜 그래? 여름 다 지나 더위 먹었어?
나가버리는 준하.
황변: (뒤에 대고) 돈 되는 일 좀 하자. 응?
씁쓸하게 보는 황변.
62. 접견실. 저녁.
마주 앉은 준하와 신영.
강하게 신영을 보는 준하.
눈 맞추지 않는 신영.
두 사람을 보다가, 일어서 밖으로 나가는 여교도1.
신영을 보며 준하, 문이 닫힘과 동시에,
준하: 이신영씨가……. 죽였어요?
신영: (본다.)
준하: 죽였어요?
신영: (여전히)
준하: 정말 죽인거면 죽였다고 말해요. 지금.
신영: (떨리는 눈으로 그렇지만 강하게 준하를 본다.)
말없이 보는 둘.
신영: 죽였어요.
준하:…….
신영: 그러니까 그만 와요. 이제.
보는 두 사람.
63. 와인바. 밤
제법 고급스런 분위기의 바.
사무장, 들어와 두리번거리다 스탠드의 준하를 보고 간다.
이미 취기가 도는 준하.
사무장: 웬일이래요? 이런 데로 다 부르시고.
준하: 오늘 사무장님 취하게 해 드리려구요.
사무장: 변호사님이 취하고 싶은 게 아니구요?
준하: (술을 따르며) 같이 일하면서 한번도 사무장님 취한 걸 못 봤거든요.
사무장: (잔을 받으며) 선수가 링에서 쓰러지면 숟가락 놔야죠.
준하: (술을 따르며) 저 더 취하기 전에 부탁 하나 할게요. 이신영씨 수술한 병원 기록들 좀 다 찾아 주실래요?
사무장: 공술 없네.
다시 한 잔을 털어 넣는 사무장, 이상하다.
사무장: 마시던 술이 아니라 그런지 술인지 쥬슨지 시큼털털 하네.
보는 준하.
64. 포장마차. 밤
포장을 열고 들어오는 사무장과 준하.
아주머니와 인사 나누며 자리를 잡는 사무장.
사무장: 사장님 여기 꽁치 고등어 만한 놈으로 한 마리 굽고, 소주 한 병 줘요.
준하의 잔을 채우는 사무장.
준하, 거침없이 들이붓는다.
사무장: (마시고는) 이제야 술맛이 나네.
준하: 그러게요.
사무장: (다시 채우며) 오늘 힘들었죠?
준하: 아니요. (또 마시고) 좋은데요. (취한 듯) 참, 제가 아까 병원 기록 부탁했나요?
한 잔을 더 마시고는 그대로 불판으로 푹 쓰러지는 준하.
놀란 사무장, 준하를 얼른 일으키고 손님들과 아줌마 의식하며,
사무장: (어색하게 웃으며) 자기가 꽁친줄 아나, 불판으로 왜 겨올라가 겨올라가긴.
허허, 웃는 사무장.
준하, 다소 비틀대며 큰 소리로 웃는다.
사무장, 바닥에 떨어진 숟가락 등을 줍는 동안, 등받이 없는 원의자에 앉아있는 준하.
웃다가 어두워지는.
65. 준하원룸. 밤
입은 채로 침대에 누워 한쪽 귀퉁이가 떨어진 포스터를 보고 있는 준하.
66. 교도소. 거실. 밤
어두운 거실에 웅크리고 앉아 화집을 넘겨보는 신영.
문득 자신에게 화가 나는지 몇 장을 거칠게 넘기다가 탁 덮어 버린다.
67. 준하원룸. 밤. 꿈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준하.
여자의 그림자가 준하 곁을 맴돈다.
다가와 빠른 동작으로 준하의 심장에 칼을 꽂는다.
눈을 뜨는 준하.
눈 앞에 있는 건……. 신영.
68. 준하원룸. 밤
그대로 누운 채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숨을 몰아쉬고 있는 준하.
이내 진정하고 다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머리맡에 놓인 신영의 화집을 보게 되는 준하.
몇장 넘기는데 정사각형 종이가 준하 가슴위로 떨어지고 책 귀퉁이에 <또 울고 있다. 바보같이…….>라고 적힌 것이 눈에 들어온다.
69. 농구구조물. 새벽
멀리 보이는 혼자 농구하고 있는 준하.
70. 신영아파트. 몽타주. 아침
열리는 현관문.
혈흔이 군데군데 희미하게 말라 있는 바닥을 훑는 시선.
(인서트)
들것에 실려 나오는 성종훈의 시신.
시선은 거실을 지나 침실로 들어간다.
침대……. 신영과 성종훈의 결혼 사진……. 화장대를 보는 시선.
(인서트)
화장대에 앉아있다 체포되는 신영.
다시 거실을 지나 욕실로 들어가는 시선.
욕조와 타일 바닥에 남은 혈흔들…….
(인서트)
피를 흘리며 욕실을 오가는 남자의 나신.
돌아보는 남자.
(F. O)
E: 준하의 휴대폰 멜로디.
(F. I)
지친 얼굴의 준하.
준하: 여보세요. 네.
71. 산부인과. 낮
벽에 붙은 태아의 초음파 사진을 보고 있는 사무장.
사무장: 기록들은 다 찾았는데, 살해 동기만 더 강해진 거 아닌가 모르겠어요. 그나저나 지금 어디예요?
72. 욕실. 낮
준하: 화장실이요. 볼 일 보는 게 아니고 갇혔어요. 참……. 회사 들어가시면 저 연수 다음 기회에 가겠다고 전해주세요. 황변호사님 한테요. 그렇게 됐어요.
열리는 문.
지친 얼굴로 변기에 걸터앉아 핸드폰을 받고 있는 준하.
73. 신영아파트. 엘리베이터. 낮
엘리베이터 안의 준하와 열쇠수리공.
준하를 위 아래로 훑으면 준하: 역시 같이 훑는다.
다시 앞을 보는 둘.
열쇠 밤새 아르바이트하느라 잠도 못잤는데 뭐 이깟 일에 전문 인력을 부르고 그러세요?
준하: 간단한 거였나 보죠.
74. 신영의 아파트. 거실. 낮
안으로 들어와 문손잡이 커버를 벗겨보는 준하.
뭔가 감 잡은 얼굴로 거실에 서 있는.
거실에 드리운 방범 창 그림자에 갇힌 듯 보이는 준하.
가만히 창 밖을 내다보는 준하의 얼굴.
E: 소란한 법정의 소음.
75. 법원, 로비, 낮
걸어오는 준하, 금속 탐지기를 통과해 계단을 올라간다.
76. 법정. 낮
증인 석의 이모, 피고인 석의 신영을 보며 글썽인다.
이모를 보는 신영.
준하: 피고인은 증인과 왕래가 잦았습니까?
이모: 띄엄띄엄 오곤 했어요. 지 남편한테 붙잡혀 끌려간 이후론 한번도 못 봤구요.
준하: 그게 언제죠?
이모: 3년 전 언니 기일 부근이니까……. 97년 4월 15일쯤이요.
증인 석의 산부인과 의사.
산부의: 97년 4월 16일입니다.
(인서트)
만신창이가 된 채 침상에 실려 빠르게 응급실로 들어가는 신영.
산부의 (E): 외부 충격에 의해 아이가 자연유산 됐고, 환자 상태가 너무 심해 외과로 트랜스퍼 시켰습니다.
준하: 낙태 시술하신 걸로 아는데 그 이유가 뭐였죠?
산부의: 산모가 임신 중인걸 모르고 ‘신경안정제’를 복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준하: 어떤 성분의 신경안정제였죠?
산부의: 다이어드팜입니다.
박검: 약을 복용한 사실을 확인하셨습니까?
산부의: 환자에게 들었습니다.
박검: 확인도 않고 시술했단 말입니까?
산부의: 이신영씨는 3년 전부터 제가 권유해서 그 약을 복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따로 확인하는 절차는 필요 없었습니다.
증인 석의 남자 의사.
남의 독방에 수감됐을 때 폐소공포 증세로 저희 병원으로 옮겨온 적이 있습니다.
준하: 폐소공포증은 어떻게 나타나는 증상이죠?
남자의사: 남의 쉽게 말하면 갇혀 있는 것에 대한 공포죠. 문이 닫혀 있는 것만으로 산소가 없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처음엔 잘 모르다가 한 두 시간이 지나면 괴로워지기 시작하고 일반적으로 서너 시간이면 의식을 잃기도 합니다.
준하: 그런 증상이 생기는 이유를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남의 유전적인 것일 수도 있고, 후천적으로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유괴나 감금 등 심한 정신적 충격이 요인이 되죠.
증인 석의 이모.
준하: 폐소공포증에 대해 들으셨죠?
이모: 네.
준하: 피고인에게 이전에도 그런 증세가 있었습니까?
이모: 아니요. 오히려 혼자 방에 틀어박혀 뭔가 하는 걸 좋아했어요. 7년을 같이 살았지만 한 번도 쓰러지거나 그런 적 없었네요.
준하: 피고인의 어머님이나 증인한테도 그런 증상은 없죠.
이모: 그럼요. 그런 게 있단 말을 여기서 처음 들었으니까요.
준하: 그럼 유전적인 이유의 증세는 아니란 얘기네요.
준하, 사진과 서류를 서기에게 넘긴다.
준하: 사건 현장이자 피고인과 죽은 남편이 6년간 거주했던 아파트 사진입니다.
여느 아파트와 비슷해 보이지만 한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서기에게 사진들을 받아보는 판사.
준하: 문 손잡이를 봐주십시오.
복잡한 감정이 얽히는 신영, 신영의 얼굴.
(인서트. 신영의 아파트)
욕실 문으로 내던져지는 신영,
공포에 떨며 들어가지 않으려고 버둥댄다.
버티는 신영을 가격해서 욕실 안으로 쳐 넣는 성종훈.
거칠게 닫히는 욕실 문. 잠기는 문고리.
준하(E): 모든 방의 문손잡이가 반대로……. 그러니까 밖에서 잠그고 안에선 열쇠가 있어야만 열 수 있는 상태로 되어있습니다.
미친 듯이 욕실 문을 두드리는 눈물 범벅의 신영.
벌컥 열리는 문. 벗은 몸의 성종훈.
흠칫 물러서는 신영.
욕실 바닥에 팽개쳐진 신영의 옷.
빈 욕조 안에 벗겨진 채 멍한 얼굴로 앉아있는 신영.
반쯤 열린 욕실 문으로 보이는 종훈의 하반신.
떨리는 손으로 눈물과 이마의 피를 닦는 신영.
준하(E): 피고인은 결혼 후부터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자신의 아파트에 감금당한 채 남편으로부터 상습적인 폭행을 당해왔습니다.
법정
준하: 피고인이 발견된 침실 역시 마찬가집니다. 피고인은 사건 당시 경비에 의해 발견되기 직전까지 폐소공포증으로 인한 심신미약 상태로 침실 안에 갇혀있었던 것입니다.
박검: 피고인이 범인이 아니라면 왜 외부로 도움을 청하지 못했죠? 또 살해흉기인 메스엔 왜 이신영의 지문만 남아있습니까?
준하: 메스 세트는 외과의였던 성종훈의 서재에 있었고, 서재는 가정주부인 이신영의 손길이 자연스럽게 닿을 수 있는 곳입니다.
서기에게 서류를 건네는 준하.
준하: 피고인과 죽은 성종훈이 사용한 전화요금 영수증입니다.
97년 4월 이후부터 3년간 발신정지 상태에서 기본 요금만 부과되었습니다.
피고인이 외부로 도움을 청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집안 어느 곳에서도 피고인이 갈아입었다는 성종훈의 혈흔이 남은 옷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상입니다.
앉는 준하.
보는 박검.
판사: 의견 말씀하시죠.
박검: 피고인 자신이 무죄를 주장하지 않는 상황에서 과학적 입증이 안된 무죄 정황은 변호인의 심증에 의한 억측일 뿐 판결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피고인 역시 재판기간 내내 일체의 진술을 거부하는 등 반성의 기미가 전혀 없고, 치밀한 계획에 의한 살인이란 점, 또 그 행위가 극히 잔인했던 점등을 비추어 일심과 마찬가지로 피고인을 사형에 처해주시기 바랍니다.
판사: 변호인 최후변론 하세요.
준하: 피고인의 묵비권과 재판을 거부하는 행동들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피고인은 체포라는 방법을 통해서 밖에 그 집을 나올 수 없었던 그 순간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삶을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보호받아야 할 가정에 감금된 채 스스로는 아무 것도 선택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살아있는 모든 날들이 피고인에겐 죽음이었습니다. 그런 피고인에게 침묵은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잠시 신영을 보는 준하.
신영, 미동도 않고 앉아 있다.
준하: 그 동안 재판을 통해 밝혀진 무죄의 증거들은 물론 심증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유죄의 증거 역시 심증에 의한 것입니다. 따라서 본 사건의 판결에 가장 중요한 기준은 형사법의 대헌장에 명시된 무죄추정의 원리라 할 것입니다. 유, 무죄의 확증이 없는 이 사건의 판결에 과연 확실한 무죄의 증거가 없기에 유죄를 선고할 것인가, 아니면 확실한 유죄의 증거가 없기에 무죄를 선고할 것인가 본 재판부에 묻고 싶습니다.
피고인 석의 신영을 보는 준하.
준하: 그 동안 본의 아니게 피고인을 힘들게 했던 것……. 사과합니다. 미안해요.
보지 않는 신영.
준하: 이상입니다.
판사: 피고인, 일어나세요.
일어서는 신영.
판사: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세요.
어떤 기대감으로 신영을 보는 준하.
담담하게 서있는,
신영:……. 없습니다.
뭔지 실망스러운 기분이 드는 준하, 괜히 서류를 챙기는.
77. 법정. 복도. 낮
계단을 내려오는 준하.
준하 뒤에서 내려오고 있는 박검,
박검: 서변호사님.
돌아보는 준하.
나란히 걷게 되는 두 사람.
박검: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런데…….이신영이 서변호사님한테는 자기 결백을 주장하던가요?
준하, 박검을 빤히 본다.
박검: (웃으며) 다른 뜻이 아니라, 거의 모든 피고인들은 자기결백을 주장하거든요. 근데 이번 경우는 들은 기억이 없어서……. 혹시 변호사님한테는 얘길 했나 해서요.
준하:…….
기다리고 있는 사무장을 보고는,
박검: 실례 많았습니다.
준하와 사무장에게 각각 목례하고 한쪽으로 사라지는 박검.
준하, 복도 안쪽으로 사라지는 박검을 본다.
78. 법정
빈 법정.
판사E: 본 사건의 검찰측 주장인 흉기의 지문, 알리바이 등
79. 농구구조물. 아침
아이들이 농구하는 모습을 보면서 운전석에 앉아있는 준하.
농구를 보고는 있지만 마음은 신영의 선고 법정에 가있다.
판사E: 피고인 이신영의 성종훈에 대한 살인 혐의에 의심이 가는 바는 있으나 범죄의 결정적인 증거는 될 수 없다고 사료되는 바 형사소송법 제325조에 의거 다음과 같이 판결한다.
80. 법정. 낮
판사: 주문 원심을 파기한다. 피고인 이신영 무죄.
눈을 감는 신영.
81. 교도소 앞 . 낮
들어오는 준하의 차.
교도소 정문 맞은 편에 차를 세우는 준하.
이모E: 전 괜찮은데 애들하고 바깥양반이 어찌나 꺼리는지……. 신영이한텐 면목 없어 못 가볼 거 같네요.
준하, CD를 뒤적여 골라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교도소 앞에 서 있는 신영.
더운지 소매를 걷고 손수건을 꺼내 머리를 올려 묶는다.
그런 신영을 보고 있는 준하, 망설이지만 내리지 못한다.
여전히 보고 있는 준하.
그 모습 그대로 서 있는 신영.
그녀 곁으로 호송버스도 지나가고……. 자동차. 교도관들도 지나간다.
어둑해지는 교도소 앞.
결국은 차에서 내리려는 준하.
그대로 섰던 신영, 걷기 시작한다.
조심스럽게 신영을 따라가는 준하.
신영, 교도소를 돌아나가는 택시에 몸을 싣는다.
택시를 따라가려다 포기하는 준하.
82. 택시안.
따라오려다 오지 못하는 준하의 차를 보는 신영.
83. 신영의 아파트. 저녁
열리는 현관문.
잠시 그대로 선 신영, 들어간다.
불을 켜보지만 켜지지 않는.
싱크대에 물도 나오지 않는다.
거실에 말라붙은 혈흔을 내려다보는 신영.
발코니 창으로 노을이 드는 거실.
거실 한곳에 앉아 마른 걸레로 잘 닦이지도 않는 혈흔을 닦아내는 신영.
닦다가는 멈추고, 멍하니 발코니 밖을 보며 힘없이 벽에 기댄다.
창살이 갈라진 창을 보다 문득 벌떡 일어서는 신영.
침실로 들어가는 신영.
결혼사진을 들고 나와 현관문을 열고 버린다.
가지런히 놓여진 부부찻잔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신영.
집안의 모든 문들을 활짝 열어 놓기 시작한다.
모든 문이 열려진 아파트 가운데 서 있는 신영.
84. 준하원룸. 밤
책상에 앉아있는 준하.
신영의 서류들을 보다가 스탠드를 꺼버린다.
TV를 켜서 진행중인 티비 드라마를 물끄러미 보다가 그것도 꺼버리는 준하.
85. 신영아파트. 밤
열린 침실 문으로 보이는 침대에 웅크리고 누운 신영.
초점 없는 눈. 흐르는 눈물.
그대로 아침이 되는 침실.
86. 로펌. 아침
마주 오는 사람들을 유연하게 피하거나 목례를 하며, 서류를 한 짐씩 안고 걷는 준하와 사무장.
준하: 최민기씨 교통사고 목격자 어떻게 돼가죠?
사무장: 사고현장에서 행상하던 상인들 쪽으로 수배 중입니다. (게시판에 연수 공고를 지나치며) 이신영한테는 연락 없죠.
준하: (보는)
사무장: 아무리 변소 들어갈 때 나올 때 다르다지만 연수까지 포기하고 한 재판인데…….
대꾸 없이 빠른 걸음으로 앞서 가는 준하.
따라가다 속이 불편한지 한곳에 서류를 내려놓고 노선을 바꾸는 사무장.
87. 로펌. 화장실. 아침
급하게 들어와 무심결에 제일 앞에 있는 화장실의 문을 여는 사무장.
키스하고 있는 김변과 최변.
화들짝 떨어지며 서로를 보는 세 사람.
정적 속의 셋.
사무장, 멍한 얼굴로 문을 닫는다.
잠시 섰다 돌아서는데 역시 멍한 얼굴로 서 있는 황변호.
흠칫 놀라는 사무장.
88. 로펌. 황변방. 저녁
책상에 놓여지는 사표.
황변 보면, 최변과 김변이 서 있는.
아닌 것 같으면서도 어쩔 수 없는 표정의 황변.
89. 로펌, 저녁
방에서 나와 퇴근하는 준하와 사무장.
유리창으로 황변방의 상황을 보게되는.
90. 포장마차. 밤
불 판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술잔을 앞에 놓고 앉은 준하와 사무장, 김변, 최변.
준하: 어떻게 나한테까지 말 안할 수가 있냐?
김변: 그냥 기회가 없었잖아요. 차라리 잘됐어요. 그 동안 눈치보는 것도 힘들었는데.
준하: 앞으로 뭐 먹고살려고 나도 아직 못 던진 사표를 던져?
최변: 개업해야죠. 태어나서 지금 껏 배운 기술이라고는 이것 뿐인데.
씁쓸하게 웃는 두 변.
옆에서 조용히 술만 마시던 사무장.
사무장: (술잔을 꺾고) 일년 차 때 벌써 뚜마담들 수첩에 올라서는 열쇠 몇 개씩 챙겨들고
장가드는 치들 보다 만 배는 폼 납니다. 두 분
그저 사랑한다 그러면 그 사람이 누구건, 어떤 처지건 중요한 게 아니어야죠. 안 그렇습니까?
사무장을 빼꼼히 보는 두 변.
사무장: 제가 너무 나섰습니까?
웃지만, 그럼에도 씁쓸하게 술잔을 들어야 하는 두 사람.
둘을 보다가 같이 술잔을 드는 사무장.
그들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준하.
91. 준하 원룸.
신영의 서류와 비디오 테입을 박스에 정리하는 준하.
책상 서랍에서 신영의 교복 입은 사진이 나온다.
의자에 앉아 사진을 보는 준하.
스탠드 불빛 아래 환하게 웃고 있는 신영.
(F.O)
92. 신영아파트. 아침
햇살이 들어오는 침실.
침대에 웅크려 간신히 잠들어 있는 신영.
그때, 들리는 초인종 소리
번쩍 눈을 뜨는 신영, 놀란 사람처럼 몸을 벌떡 일으킨다.
침구를 반듯하게 정리하고 급히 화장대로 가 옷매무새를 다듬는다.
립스틱을 꺼내 빠르게 바르는 신영, 바르다가……. 멈춘다.
화장대 거울로 보이는 결혼사진이 걸렸던 빈 공간.
허한 표정으로 섰다가 티슈를 뽑아 입술을 닦는다.
다시 들리는 초인종 소리.
93. 신영의 아파트. 복도. 아침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는 신영, 주위를 살피지만 아무도 없다.
들어가려는 신영의 시선에 보이는 난간 위에 떨어져 있는 노란 은행잎.
신영, 나와 가만히 은행잎을 집어든다.
올려다보는 하늘.
94. 신영의 아파트. 침실. 아침
화장대에 앉아 준하의 명함을 보다가 그냥 서랍에 넣어버리는 신영.
자신을 보다가 문득 일어서 옷장을 연다.
95. 버스. 아침
‘이상 기후’에 관한 라디오 뉴스가 들리는 버스 안.
좌석에 앉아 밖을 내다보는 신영.
창 밖으로 전시회 등의 플랭카드가 즐비한 인사동 풍경이 지나간다.
보는 신영.
96. 준하원룸. 아침
막 샤워를 마친 듯 한 준하 침대에 걸터앉아 통화를 하고 있다.
준하: 사무실 개업 선물이면 뭘 사야 되죠? 사무장님은 의견 없으세요?
문득 침대 맡에 신영의 화집을 발견하는 준하.
97. 인사동. 상점. 낮
상점유리로 보이는 거리.
공기돌이나 딱지 등 예전 물건들이 가득한 상점.
천천히 걷는 신영, 신기한 듯 상점 안을 들여다본다.
98. 인사동. 유료주차장. 낮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준하.
99. 인사동. 길. 낮
종이로 싼 커다란 액자를 안고 화랑에서 나오는 준하, 울리는 핸드폰.
멀리서 농악, 또는 퍼포먼스 팀의 퍼레이드 소리가 들리는.
액자를 안고 통화하며 멀리 오는 퍼레이드를 피해 얼른 길을 건너는 준하.
퍼레이드를 보기위해 길 가로 몰려든 사람들.
길 가운데로 지나가는 긴 행렬.
준하: (지르듯) 인사동이요……. 그림으로 샀어요. 풍경이 좋아서요.
준하, 무심히 퍼레이드 쪽을 돌아보는.
길 건너편에서 이쪽을 보고있는 신영.
통화하던 수화기를 내리는 준하.
두 사람 사이로 한 무리의 행렬이 지나간다.
신영을 찾으러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준하.
신영 역시 같은 방향으로 천천히 움직인다.
행렬 너머에 신영이 보이지 않자 빠르게 걷기 시작하는 준하.
잠시 엇갈려 다른 곳을 보다가 정면을 보면, 그곳에 두 사람이 서있다.
행렬이 빠지고, 길 가에 서서 구경하던 사람들 길로 섞여 들어오기 시작해도.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서있는 두 사람.
100. 인사동. 카페. 낮
가만히 커피를 마시는 신영,
탁자 옆에 세워둔 준하의 액자를 본다.
준하: 같이 일하던 동료 둘이 사무실을 새로 개업했어요.
말없이 각자 차를 마시는 둘.
준하: 어떻게……. 지냈어요?
신영:…….
준하: 잘 지냈어요?
신영:…….
준하: 대답 없는 건 여전하네요.
신영: 미안했어요……. 그때…….
준하: (쑥스럽게 웃으며) 뭐……. 그런 걸 다 사과하고 그래요……. 어쨌든 목소리 들으니까 좋네요.
신영: 오늘……. 처음 나왔어요. 바깥에
유리너머의 거리로 시선을 돌리는 신영.
101. 인사동 데이트. 낮
거리행사. 난장. 자선 공연. 사람들.
인사동 속 두 사람의 여러 모습들.
길에서 큰 개를 만나는 두 사람.
무서워 가지 못하는 준하와는 달리 다가가 목을 쓰다듬는 신영.
만져보라고 권하지만 고개만 흔드는 준하.
신영, 웃는다.
준하: 여기 좋아하나 봐요?
신영: 네?
준하: 인사동 좋아해요?
신영: 좋아해요. 오늘 처음 와 봤지만.
준하: 배 안고파요?
신영: (보면)
준하: 생선 좋아해요?
신영:……. ? (고개 끄덕이는)
준하:……. 갈비는요?
신영:……. 좋아해요.
준하: 쌀도 좋아하죠? 쌀…….
보는 신영.
102. 인사동, 작은 주점, 저녁
낮은 천장아래 오밀조밀 흩어진 탁자들.
탁자마다 그득그득 사람들이 들어 차 있다.
한쪽의 신영, 의자가 기우뚱거려 다소 불편한 모습.
부옇게 된 안경을 벗어 닦다가 그런 신영을 보고,
준하: (혼잣말 비슷하게) 연기가 왜 다 이리로만 오지…….
신영:……. ?
준하: 자리 좀 바꿔요.
신영: (보는)
차려진 고갈비와 꼭지 떨어진 술주전자.
주전자를 드는 준하.
보면, 어느새 바꿔 앉은 둘.
신영의 잔에 술을 반만 채우는 준하.
자신의 잔을 채우는데 의자가 기우뚱한다.
준하: 이래 보여도 여기 되게 유명한 집이에요.
신영: 자주 오나봐요.
준하: 물론……. 첨이죠.(웃는)
신영: (싱거워서 같이 웃는)
준하: 근데 다시 오게 될 거 같은데요.
신영:……. ?
준하: (능청스럽게) 이신영씨가 마음에 들어하는 거 같아서요.
신영: (어색하면서……. 좋은면서……. 그런 웃음)
준하: 사람 맘이 참 이상해요. 일부러 이런 구질구질한데로 뭘 먹으러 모여든다는 게. (하며 이면수를 떼어 입으로 던져 넣는) 먹어봐요.
신영: (먹다가 천진한 얼굴이 되며) 우리집이 그랬거든요. 어릴때…….
준하: 어릴 때면……. 춘천집이요?
신영: (웃으며 고개 젓는) 더 어릴때요. 어딘지도 잘 기억 안나는데……. 엄마아빠랑 살던 우리집 지금 생각해보면……. 이랬던 거 같애요.
준하: (의자를 양쪽으로 절룩이며) 여기요?
신영: 단칸방이었는데……. 쓰레기통 옆에 밥통이 있었구요. 밥통 옆에 걸레 놓구, 그 옆에……. 요강 있구, 요강 옆에……. 내 책상이 있었어요.
준하: (웃으며) 요강 옆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