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대 초반, 수많은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조국을 떠나 무장독립투쟁을 벌였다. 만주, 간도, 연해주 등이 그 주무대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은 지구 반대편 미국땅 네브라스카주의 한 군사학교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이승만이 평생의 정적으로 지목했던 박용만이 있었다. 모든 국민은 군인이 되어 조국을 되찾아야 합니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역사저널 그날, 오늘은 코리아 스쿨보이 미국의 중심에서 독립을 외치다 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오늘의 맞춤 패널 박재민씨가 아주 범상치 않게 시작을 열어주셨어요.
박재민/배우: 반갑습니다.
일동: 너무 반가워요.
이윤석/개그맨: 얼마전에 M본부에 진짜 사나이 300이란 프로그램에서 박재민씨가 최후의 1인으로 남았어요. 오늘도 자리 배치가 딱이에요~ 진짜 사나이(박재민)~ 가짜 사나이(이윤석), 그냥 사나이(심용환)~ 그냥 사나이(류근)~
류근/시인: 그런데 박재민씨는 특이하게도 연기자로 평창올림픽 때 스노우보드 명해설자로 화제를 모았잖아요. 스노우보드 통역은 물론이고 미국에서 발간된 엣세이집을 번역을 할 만큼 영어에 능통합니다. 문무를 겸비한 엄친아예요. 재수없이~?
최원정: 그런데 제 입장에서는 이렇게 허약한 지식인들만 보다가 이렇게 건강한 청년을 만나니까 기분이 좋습니다. 자, 오늘 박재민씨가 짧게 연기한 박용만이라는 인물이예요. 미국에서 무장투쟁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인데 확실히 알고 계셨어요?
박재민: 제가 잘 알고 있는 분은 안창호 선생님이나 이승만, 이런 분들을 알아도 박용만 이라는 이름은 사실 저도 처음 들었어요.
이윤석: 사실은 저도 박용만하면 회장님! 회장님! 전화 좀 받으세요 이래야 좀 익숙하지~
류근/시인: 이승만이 평생의 정적으로 지목한 인물이 박용만이라고 하잖아요. 처음 듣는 이름이 자꾸 등장하는데 오늘도 또 많이 배워야겠어요.
심용환/역사작가: 박용만 하면 미주 한인사회에서 안창호, 이승만 못지 않는 저명인사이기도 하고 이분의 독립전쟁론이라는 것도 탁월한 독립방략으로 인정을 받았던 인물이었습니다.
신주백/한림대학교 HK연구교수: 1910년을 전후로 해서 박용만의 행적을 보면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한인 소년병학교를 1909년에 네브라스카주에 있는 커니市에서 세웠다 라는 건데,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최초의 해외 한인군사 군인장교양성학교라고 보시면 됩니다. 미주의 덴버에 와있던 여러 독립운동가들이나 항일의 뜻을 동조하는 사람들, 애국동지대표회의에서 우리 이렇게 합시다 제안을 해서 지지를 받고 호응을 받아서 만들어진 학교라고 보시면 됩니다.
류근: 정치력이 있었다는 뜻이네요.
신주백: 그렇죠.
박재민: 외국에서 그런 학교를 설립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의미가 있겠네요.
류근: 신흥무관학교 설립이 1911년도인데 그것보다 빨랐다는 얘기 아닙니까 (1909년 한인소년병학교 설립),
최원정: 그러니까 해외에 최초의 한인무관학교를 세운 인물은 박용만 선생님이다.
신주백: 그렇죠.
심용환: 당시 그의 나이가 29살이었어요.
이윤석: 29살이면 저는 그때 친구를 군대에 보내고 있었는데요.
류근: 나는 29살 때 대학생 때 썼던 가사가 비로소 작곡이 돼서 그걸 녹음을 들었을 때 나이가 그 나이예요. 그러니까 그 노래가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입니다.
--------------김광석 기타 연주--------------그대 보내고 아주 지는 별빛 바라볼 때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최원정: 류근 시인님은 소년급제(?) 하신 스타일이네~ 처음부터 잘 되셨네요.
이윤석: 29살까지 다 했네요. 그 뒤가 문제구나~
일동: 폭소~
박재민: 29살이면 저는 그러니까 최근이라~
류근: 말하지마~ 말하지마~
박재민: 대학원 다니면서 발송 열심히 하고 있을 땐데 사실 그때 생각을 하면은 사회에 대한 조명을 갖고있던 나이인데 이억만리 떨어진 외국에서 그것도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 사관학교를 창설을 했다. 이거는 정말 상상이 안되네요.
이윤석: 대단한 거죠.
심용환: 그 당시 헤이스팅스 대학이 군사훈련 프로그램이 잘 갖추어져 있었구요. 한인소년병학교가 대학의 지원을 받았다고 해요. 미국대학 교정에 태극기가 나부끼면서 조국의 독립을 불태우는 모습, 상상하거나 기분이 좋으면서도 약간 이상해요. 말하면서도 낯설어요.
박재민: 제가 실제로 그 당시의 기사를 가져왔는데~ 지역 신문에 났던 기사이거든요. -----Military School of the Koreans Closed Summer Term Last Week and Will Open Again Next Year---------the school is located just one mile west of the court house in Kearney, school closed last week after successful term. 기사 내용을 보면 소년병학교의 설립, 훈련시점, 위치, 간단한 내용들이 적혀 있는데 대개 재미있는 것은 기사 자체가 우호적이예요.
이윤석: 전체적으로 호의적이네요~?!
류근: 활자모양부터가 호의적이야~
-----------------한국인 군사학교 지난주 여름휴가를 마치고 내년에 다시 열릴 예정, 군사학교는 커니시(市) 재판소에서 1마일 서쪽에 위치, 지난주에 성공적으로 (여름)학기를 마쳤다. 커니 세미-위클리 허브(1909년)
심용환: 이 헤이스팅스 대학에서 한인들에게 건물 1동을 주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20 에이커의 땅도 제공합니다. 건물과 땅을 주고 거기다가 침대, 식탁, 주방기구, 일체를 다 지원합니다.
이윤석: 박용만이 뭘 어떻게 했길래 이 정도 지원을 해 주죠?
최원정: 굉장히 모든게 다 좋았던 거 같애요. 이런 거 따올려면 영어도 굉장히 유창해야 할 거구~ 많이 알아야 되구~
신주백: 박용만은 미국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어요. 우선 대학에 들어가서 (네브라스카 주립대) 간부후보생 과정을 다녔고 본인도 졸업하고 예비역 장교로 예편을 한 거죠. 다른 하나는 내가 소년병학교를 운영하면서 성경을 가르치겠다. 동양인에게 기독교를 전파할 수 있다는게 굉장히 중요한 명분이었기 때문에 현지 유지들한테 큰 호응을 받았던 측면도 있습니다.
류근: 그러면 미국 네브라스카주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겁니까?
박재민: 미합중국의 지도를 준비해 봤습니다. 네브라스카가 어디인지 모르시는 분들이 많으세요. 혹시 류근 시인님이 미국의 정중앙을 한번 딱 찍어 주시겠어요? 어디쯤인지?
이윤석: 내가 찍을게요. 정중앙 여기~(손가락으로)~
박재민: 어, 맞습니다. 답은 여기가 네브라스카입니다. 정중앙에 있는 주이구요. (네브라스카주-미국 중북부 내륙 평야에 위치하며 농목업이 최대 산업), 주도는 리커 라는 곳이구요. 인구 자체는 많지 않구요. 굉장히 넓은 땅에 시골 같은 느낌입니다. 그리고 여기 별표가 있는 곳이 인디애나 주이구요 박재민 생가(?)가~
이윤석: 이 친구 맹랑하네~
류근: 본인이 만들어서 직접 거기다 별표까지~
신주백: 기개는 좋은데 이해는 할게요. 그런데 생가란 말 쓰면 안됩니다.
이윤석: 만주라든지 연해주 이런 쪽은 한반도랑 가깝잖아요. 그러니까 무장투쟁의 근거지가 될 만하다 싶은데 미국은 멀고 게다가 정중앙이니까 왜 여기다 했을까 싶긴해요.
심용환: 1900년대초 대륙횡단 철도 놓고~~서부를 개척하고 노동력이 필요하니까 1905년부터 네브라스카에 이곳에 한인들이 많이 몰려들게 돼었구요. 박용만 같은 경우도 한인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알선해 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박재민: 미국 대륙횡단열차가 깔리고 노동력이 많이 필요했던 시기에다 유타나 콜로라도, 특히 네브라스카 쪽에 숭무(崇武)사상이 굉장히 강하던 시기였데요. 그런 부분도 박용만 선생이 좀 고려하지 않았을까~
신주백: 남북전쟁 이후에 그 지역에다가 대학교를 허가 해줘요. 그 중에 하나가 네브라스카 주립대학교입니다. 그런데 단서조항이 있었어요. 유사시에 2년과정 초급장교를 양성해야 한다.
류근: 일종의 군사학교 개념이네요.
신주백: 그렇죠. 아까 말씀한 숭무사상이란게 그것과 연관이 있어서 대학 설립조건이 그러니까 이 대학 자체가 그런 부분에 굉장히 우호적이고 국내에서도 의병이 1908년에 들어오면서 일본의 탄압에 의해서 싹 가라앉는데 바로 그 싯점이었던 거죠. 장차 미래를 위해서 군인사관을 양성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이곳에다 사관훈련학교를 세웠던 거죠.
최원정: 독립전쟁의 지휘관을 양성하겠다는 포부가 있었던 거죠.
신주백: 당시에 박용만의 중요한 구상은 이 학교에서 양성된 군인을 만주나 연해주로 보내서 거기에 독립군을 육성하는 지휘자로서 활동할 수 있도록 이곳 사관학교를 키웠다고 보면 되는 거죠.
박재민: 찾아보니까 이 당시 소년병 학교 군가가사가 있더라구요. 가사를 읽어드리면-----
흑룡강 맑은 물 남부 만주 푸른 풀 넓은 들
우리말 안장 벗겨라 국민군 군가 부르세
신주백: 가사 자체에서 벌써 그게 드러나죠.
이윤석: 보낼 생각이 없었으면 미시시피 맑은 물로 부를 건데 만주로 보내야 되니까 이렇게 불렀네
류근: 그러면 박용만은 왜 미국엘 간걸까요? 그 당시라면 정치적 망명 내지 유학일 가능이 높은데~?
심용환: 유학을 간 겁니다. 뭐냐하면 박용만은 숙부의 손에서 자랐더라구요. 숙부 이름이 박희병인데 1895년에 일본국비유학생 출신이었구 1896년에 미국 로어노크 대학에서 2년간 공부합니다.
최원정: 파리강화회의 대표 김규식과 같은 대학이네요? 이강을 모시고 갔다왔다잖아요.
심용환: 그런데 돼게 조카를 아꼈던 것 같애요. 박희병이 조카를 늘 데리고 다녔고 이렇게 되다보니까 유학생활도 따라서 같이 하게 되는 거고 거기서 개화파 지식인들도 많이 만나게 되고 교류를 하게 되니까 그 속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라고 우리가 판단할 수 밖에 없는 거죠.
신주백: 박용만의 학부졸업논문이 아메리카 혁명입니다. 이 내용의 핵심은 뭐냐하면 미국이 독립하는 과정에서 영국의 압제와 수탈을 싸워서 이겼다 그것도 무장투쟁을 통해서 싸워서 이겼다 그래서 그들이 독립과 자유를 획득했는데 우리도 일본과 싸워서 미국처럼 독립과 자유를 획득해야 되는게 아니냐~
심용환: 우리가 보통 미국에 유학을 가서 고학력을 얻고 돌아와서 출세한다는 이런 개념이 우리 사회에 많은데 이분은 미국에 가서 미국을 독립투쟁의 근거지로 삼겠다고 하니까 발상 자체가 완전히 다른 거예요.
이윤석: 소년병 학교 생활은 어땠는지 이것이 참 궁금하네요.
--------------사진이 말하는 그날, 심용환---------여기는 네브라스카 한인소년병 학교의 사진들을 한번 모아 봤습니다. 먼저 소년병 학교 생도들이 대학생활에서 찍은 단체사진입니다.-----여느 미국의 대학생들 처럼 육상, 미식축구, 야구 등 이런 것들을 즐기면서 체력을 단련하는 모습들을 우리가 볼 수 있죠.
박재민: 야구를 하는 팀이거든요.
심용환: 그렇죠 그렇죠.
류근: 미국인도 있네요
최원정: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섞여서 학교생활을 했다는 얘기잖아요.
심용환: 미국인들이 이들을 뭐라고 불렀느냐 스쿨 보이라고 불렀습니다. (코리안 스쿨보이-미국인들이 일과 학업을 병행하는 한인학생들을 가리키는 말), 오늘 타이틀에도 나왔었죠.
최원정: 코리안 스쿨 보이 오늘의 제목~
심용환: 소년병 학교에 입교하면 스쿨 보이들의 스케줄에 군사훈련이 들어있는 거죠. 미군이 남북전쟁 때 사용했던 총기로 훈련했다고 합니다. 교관들은 구한말 광무군인출신들이었고 학생들의 수가 한때는 한 60명 정도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근데 이 중에서 한 분이 나오죠. 이 분이 최고령 생도입니다!!
최원정: 소년 같지는 않으신 분입니다.
박재민: 저분이 40대 초중반이 아닐까?
이윤석: 그래도 소년병 학교인데~
심용환: 무려 52세 이십니다! 성함은 조진찬이구요. 사실은 소년병 학교라고 이름을 부르기는 하는데, 생도들의 나이 같은 경우는 10대 중반의 어린 학생으로부터 시작해서 50대 노동자들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구요. 그런데 특히 이분은 자신의 농장을 소년병학교 훈련장으로 내놓을 만큼 열정적인 분이셨습니다. 자기 농장을 훈련장으로 내놓기도 하고 자기 아들과 함께 소년병 학교에 입교하기까지 하십니다.
일동: 대단한 분이네요.
이윤석: 제가 아는 가장 바람직한 멋진 기부입학 사례가 아닌가
일동: 맞습니다.
심용환: 그런데 여기 조진찬이 남긴 말이 있습니다. 이건 특별히 제가 읽기 보다는 연배가 비슷하신 우리 류근 시인님께서 읽어주세요.
류근: 내 비록 늙었으나 왜놈에게 총을 쏘기는 늙은이의 총알도 젊은이 총알만큼 뜨겁지 않겠는가.
이윤석: 너무 멋있다. 총알은 공평하다.
심용환: 내 총알도 뜨겁다.
최원정: 한인소년병 학교 이름을 잘못 지은게 아닌가 생각도 들고~
신주백: 아마 제 생각컨데는 네브라스카 한인 군사학교 이러면 미국이 동의를 해줬을까요 소년 그러면 보이스카우트 개념과 비슷해서 오히려 그런 부분에서 우호적인 작명이 아니었을까
이윤석: 우리가 난민들을 보호해 줘야 되지만 그분들이 갑자기 군사학교를 세우고 그러면 마음적으로 동정은 가지만 조심스럽게 걱정이 될게 아니예요. 그런거까지 미리 생각을 한 거네요.
최원정: 작명 센스가 아주 지혜롭습니다.
심용환: 한인 소년병학교 스케줄은 6시기상 12시까지 일하고 식사를 하구요. 저녁까지도 훈련합니다. 밤에는 공부를 해야합니다. 그런데 박용만이 소년병학교 생활에 기록한 내용 중에 특히 인상적인 대목이 있는데 한번 읽어드릴게요.-------------스쿨 보이라 불리는 이들은 구차한 일이 많지만 그 자격은 장차 독립전쟁의 지휘관이다. 이렇게 지내는 것이 소년병 학교의 생활이요. 이렇게 견디는 것이 소년병 학교의 참는 힘이요. 또 이렇게 참는 것은 소년병 학교의 풍속이다.
최원정: 조국을 위해 쓰이는 그날까지 계속 담금질! 아! 멋있다!
신주백: 생활과 인내와 습관, 이 세가지를 명확히 강조하네요.
이윤석: 스쿨 보이가 밀리터리 맨이 될 때까지~~
박재민: 제가 좋아하는 영화에 나왔던 대사와 비슷하네요. <스타워즈> 제다이를 양성할 때 제다이들한테 이렇게 얘기 하거든요. 언젠가 때가 오니 힘을 그때 쓰도록~ 인내심을 가져라 100여년전에 정말로 어린 소년들이 미국땅에서 영화에 나올법한 인내심을 갖고 각고의 노력을 통해서 양성이 되고 있었네요.
이윤석: 아, 조선의 제다이들이었네~
박재민: 그렇죠.
최원정: 어떤 분들이 배출이 됐나요?
신주백: 여기 목적 자체가 학교를 졸업하면 만주나 연해주로 보내는 것도 하나의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김장호 라든지 박철후 란 분은 만주나 연해주로 파견되긴 했어요. 그리고 한편에서는 이것이 갖고 있는 한인들의 정신, 불굴의 정신, 개척정신 이런 것들이 학교 교육 과정에서 단련되었기 때문에 여기를 졸업하신 분들 중에 정한경 박사, 미주 한인 중에서 두번째로 학위를 받으신 정한경 박사라든지, 유명한 기업가 이셨던 유일한 선생은 이 학교출신이죠.
이윤석: 유일한이란 이름 많이 들어봤죠? 유한양행 설립자, 우리 강산 푸르게~푸르게~
신주백: 1904년 유일한 선생이 열살 때 아까 박용만을 데리고 갔던 박희병 선생이 유일한 선생을 같이 데리고 갑니다. 같이 데리고 가서 같이 살아요. 커니市나 덴버市에서 같이 살기도 하고 직업 속에서 같이 살기도 하고 그래서 유일한과 박용만은 막역한 사이이기도 한데 13살 때 소년병 학교에 들어가서 16살에 졸업하는데 첫 졸업생이 1911년에 배출이 되는데 유일한 선생이 최연소 1회 졸업생이죠.
심용환: 남 다르다.
이윤석: 졸업생 중 유일한 16살!
박재민: 이 유일한 선생이 참 대단하신게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육군의 전략정보처 라는 부처가 있습니다. (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2치 세계 대전 당시 미국 전략사무국으로 한국광복군을 훈련시킴), OSS 라는 곳인데 한국담당 고문으로 활동을 하셨다고 합니다. LA에서 한인국방경비대를 창설하기도 했는데 이때 한국침투를 위한 작전에 투입이 되고자 훈련을 받으셨지요. 이때 작전의 임무가 뭐냐면 한국과 일본의 후방에 침투를 해서 교란하는 작전을 세우고 이때 공수훈련을 받았는데 나이가 유일한 선생 50세 때였다고 합니다.
류근: 이건 진짜 아까 그 52세의 학생도 있었고 그 정신을 그대로 유지해온 거잖아요.
신주백: 50세에 낙하산 훈련받았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예요.
최원정: 당시 국내 진공작전을 펼쳤다는 거잖아요.
신주백: 준비를 한 거죠.
이윤석: 진짜 사나이네요.
박재민: 냅코작전계획이라는 작전이었는데 (냅코작전 NAPKO PROJECT-1945년 1월 전후 미국 OSS에서 계획했던 한반도 상륙작전), 실제로 나이를 떠나서 정말 이 당시에 독립운동을 하시는 모든 분들이 나이를 떠나 모든 사람들이 총알은 뜨겁다 라는 마음으로~
류근: 이분이 해방 이후에 지금까지도 이름을 알만한 그런 기업을 성공시킨 사업가 이지만 사실은 이분이 유명해진 건 그게 아니죠. 자기의 모든 부를 사회에 환원했죠. 학교를 설립하고 사후에 보니까 모든 재산을 장학재단과 YMCA에 기부했더라구요.
이윤석: 소년병학교의 정신이 무엇인지 보여준 그런 분이예요. 박용만은 타고난 군인같애요. 기질 자체가 평소에도 군복을 갖춰 입고 다니셨다구요. 특히 국민개병설이 있는데 여기에 그의 가치관과 사상이 확실히 드러납니다. 군사를 양성하는 일은 국민의 빚이요 나라를 방비하는 것은 국민의 의무다. 모든 국민이 병영의 의무를 철저히 해야 한다 라는 입장을 확실하게 표명하셨습니다.
이윤석: 그러니까 모든 국민이 군인이 되어야 한다. 이런 주장인데 나라가 거부할 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 저의 의지를!
최원정: 이윤석씨와 저랑은 같이 간호병으로 갑시다.
이윤석: 언제든지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신주백: 자기 장점을 살려서 전쟁에서 기여하면 될 것 같구요. 박용만은 그런 점에서 잘 움직였던 사람인 것 같애요. 왜 그러냐하면 본인이 군복을 입고 활동을 하다가 아, 이제는 미국 본토가 아니라 하와이 지역으로 가서 내가 뭘 좀 다시 새로운 걸 꾸며야 되겠다 라고 생각을 해서 가정부(假政府)를 조직하기 위해서 1912년에 하와이로 이주합니다. 그곳에 가서 독립전쟁을 체계적이고 큰 그림을 그려 볼려고 하는 움직임을 시작하죠.
류근: 가정부 라고 말씀 하신게 임시정부를 말씀하신 거죠?
신주백: 맞습니다. 무형의 임시정부~
최원정: 그러니까 1912년 하와이에 당시 5000여명의 한인들이 있었다면서요? 굉장히 충분한 인력조건을 갖고는 있었네요.
신주백: 5천명의 인원을 가지고 하와이 지역을 조직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와이 처럼 서간도, 시베리아 연해주 지역에도 지방총회를 건설해서 임시정부 네트워크를 만들어서 독립전쟁을 좀 더 체계적으로 준비한다 라는 조직적으로 구상하고 그런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도록 당시 하와이에서 국민보 라는 신문이 발간되고 있었는데 (국민보-미주 독립운동단체 대한인국민회 기관지), 본인이 거기서 주필로서 그것에 몰두하고 당위성을 설명하는 글들을 많이 썼어요.
이윤석: 아, 주필까지!
최원정: 글도 많이 쓰셨구나! 확실히 문무를 겸비하신 분이 맞아요.
심용환: 그게 맞습니다. 계속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는게 포부가 크다 라는 느낌이 들어요. 해외 한인들을 통합할 수 있는 하나의 조직을 만들고, 자치의 형태로 운영되면서, 역동적인 거죠. 중앙이 있고 지역이 있어서 자율적인 걸 인정해 주지만 중앙이 있는게 분명하고 이 시스템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하자고 주장하는 거니까 정말 엄청난 포부구요. 실제로 박용만 같은 경우는 그 아까 말씀하셨던 국민회의 영입해서 군사양성조직인 대조선국민군단을 창립하게 되는 거죠.(대한인국민회 연무부->1914년 6월 대조선 국민군단 창립),
류근: 맨날 군복입고 다녔다고 해가지고 무력만을 중시했다고 볼 수 있는 거예요. 자신만의 고유한 청치이론을 갖춘 선구적인 사상가였다 이렇게 판단이 됩니다.
이윤석: 임시정부가 만들어가기 전에 최초의 설계를 박용만이 했다라는 걸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심용환: 하와이로 이주를 했으니 거기서 또 뭔가 해봐야 되지요. 국민군단 안에 당연히 사관학교가 있어야 됩니다. 1913년 11월 오아후섬 카할루우 지역에다가 1660에이커, 방대한 파인애플 농장인데, 이 농장을 경영하던 박종수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 박종수라는 분이 박용만의 포부에 공감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농장을 군사교육에 활용할 수 있게 지원합니다. 땅을 내놓게 됩니다. 이 싯점에 안원규 라는 분도 1200불 정도를 군단운영에 쓰라고 희사를 합니다.
신주백: 1914년이 되니까 218명의 학생이 있을 정도로 상당히 호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네브라스카주에 있는 한인병학교하고 대조선국민군단병학교하고 다른 점이 있어요. 네브라스카주에 있는 한인병학교는 방학때만 오는 학교입니다. 하와이에 대조선국민군단병학교는 농장에서 일하면서 하는 둔전병제의 원리를 채용한 것입니다. (둔전병제-평상시에는 토지를 경작하여 식량을 자급하고 전시에는 전투원으로 동원), 물론 한인병소년학교도 그런 원리가 있지만 그건 일시적인 거예요. 농장에서 일한다는 차원에서 보면 대조선국민군단병학교가 훨씬 둔전병제 원리에 충실했던 군사학교다 라고 보시면 됩니다.
최원정: 일하면서 군사훈련을 받고 하루 일과가 만만치 않았겠는데요~
박재민: 요즘은 투잡은 힘들어요.
심용환: 아까도 스케줄이 엄청났었잖아요. 이곳은 더 엄청납니다. 일단 오전 4시 기상, 5시에 아침을 먹고요. 오전 7시부터 농장 작업에 들어가요 그리고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군사훈련을 받고요. 다시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농장작업을 합니다. 그리고 오후 7시부터 공부를 합니다.
이윤석: 진짜 사나이 300에서는 그때 몇시쯤 일어났어요?
박재민: 전 6시 기상이요.
이윤석: 그런데 여긴 4시 기상이예요. 4시 기상 4시~ 진짜 사나이 300에 가는게 낫겠죠?
박재민: 둘다 안갈래요. 진짜 사나이가 정말 힘들었거든요. 정말 힘들었는데 새벽 4시 기상해서 오후 7시에 학교교육이 또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신념과 믿음이 없이는 중간에 무너질 수 밖에 없을 거예요.
류근: 새벽 4시면 집에 갈 시간인데~
이윤석: 대단한 체력은 물론이고 정신력이예요~
최원정: 박용만의 독립전정쟁론을 들으면 들을 수록 안창호 선생님의 실력양성론이나 이승만 박사의 외교독립론과 굉장히 굉장히 다른 노선이잖아요. 지금 빅3가 너무나 다른 노선을 걷고 있는데 이분들이 과연 친했을까 하는 의문이 드네요.
류근: 좀 그랬으면 좋을 것 같지 않아요.
신주백: 오늘 지금 우리가 이야기 나누는 이 싯점, 1910년대에는 저 세분이 친했습니다. 이승만-안창호-박용만, 저 세분이 어떻게 친했냐 안창호 선생은 기본적으로 성격이 부드러웠어요. 그러면서 박용만 하고도 친하고 이승만 하고도 어울리고 박용만이 어려울 때는 도와주기도 하고 후원을 해주기도 했구요. 이승만은 사실은 박용만과 더 특별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사실은 의형제였습니다.
심용환: 일단 인연이 되는 계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학교에서 배웠던 보안회, 박용만이 황무지 개척권에 반대하는 보안회 투쟁활동을 하다가 1904년경에 한성감옥에 수감이 됩니다. 거기서 옥중동지로 이승만을 만난거예요. 이듬해 박용만이 미국에 갈 때는 이승만이 자기 아들 이봉수를 맡길 정도의 특별한 관계였습니다.
최원정: 그러면 아들을 맡길 정도면 보통 사이가 아니란 얘긴데~
박재민: 정말 가족이었던 얘기네요.
심용환: 그리고 사실 이승만 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작품이 독립정신이란 작품이 유명한데, 이 독립정신 원고를 한성감옥에서 썼는데 이걸 로스앤젤레스에서 출간할 수 있는 것도 박용만 때문입니다. 박용만이 출간을 하게 해줍니다.
최원정: 진짜 끈끈한 사이였네요.
신주백: 그런 이승만을 박용만이 1913년에 당시 하와이로 와라 초청을 합니다. 본인이 국민보 주필하면서 이승만이 와야 된다 왜 와야 되느냐 한인의 교육활동을 위해서 이 사람이 필요하다 초청해야 되는 명분을 설파하면서 이승만을 하와이로 초청하는 거죠.
심용환: 1914년 8월 30일에 박용만이 중심이 된 국민군단병학교의 개교식이 열리게 됩니다. 하와이 한인사회 사람들이 오고 거창하게 개교식이 열리는데 500여명의 군중이 모인 상태에서 누가 연설을 하느냐 이승만이 연설을 합니다. 연설의 주제는 믿음, 큰 환영을 받았죠.
박재민: 이게 요런 내용이면 사실 영화 소재로도 괜찮을 것 같애요. 사관생도들이 도열해 있는데 이승만이 연설을 하는데 그 앞에 박용만 선생이 눈빛을 보는데 눈에서 눈물이~ 나의 의형제여! 민족의 혼을 불태워 보자!!
신주백: 형제이자 동지!
이윤석: 지금까지는 좋잖아요. 박용만과 이승만, 만만아니야, 분위기가 지금 자신만만, 패기만만, 여유만만, 득의만만, 그런 분위기예요. 아주 좋은 분위기예요.
박재민: 이게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는데~
최원정: 이렇게 박용만 이승만 이라는 걸출한 지도자를 앞세워서 독립투쟁을 준비해 갔는데 이 미주 한인사회에 분열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왜 일까요?
-----------이상협 아나운서 등장: 안녕하십니까? 미국에서 전하는 그날 추적 60초 입니다.-----------------1915년 하와이 한인사회에서는 심각한 폭력사태가 연이어 발생하고 있습니다. 호놀루루 경찰까지 동원돼 치안을 유지할 정도라고 하는데 현지신문 기사들을 보십시오. 하와이 한인들 간에 싸움이 확산되다 법정에선 한인들 살해위협을 당하다 법원까지 간 한인폭동사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 사건의 배후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박용만 지지세력과 이승만 지지세력의 대립이 원인이 되었다는 겁니다.
최원정: 안타깝네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더니 분열을 넘어서 유혈사태까지~
심용환: 1915년 박용만의 지지자 중에 김종학 이란 인물이 대한인 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장으로 취임을 합니다. 그런데 이때 공금횡령 사건이 하나 발생을 해요. 갈리면서 내분이 심각해지는 상황이 되구요.
신주백: 이때 김종학을 체포하라고 주장했던 반대자가 바로 이승만 지지세력이었어요. 그러니까 이승만은 김종학의 후임으로 자신을 지지하는 정인수 라는 사람을 임시총회장으로 임명해야 된다 라고 주장까지 합니다.
심용환: 그 김종학이 3개월만에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요. 사실 수습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이승만 지지자 측에서 공격을 멈추지 않습니다. 이승만 세력이 박용만 세력에게 폭력 테러를 가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현지 신문기사가 충격적입니다. 호놀루루 한인 3벽 50명이 (중략) 국민회관에서 의결하고 박용만을 추종하는 파당을 몰수이 죽이기로 작정했다 아예 보도가 이렇게 나오고 있는 거죠. 그리고 박용만은 폭동을 피해 시에라 선을 타고 호놀루루를 떠났다.
박재민: 그 내부에 세력 싸움이 유혈사태로 번지면은 한인회 전체가 흔들리잖아요. 이것도 어떻게 보면 그 당시 미주에서 활동하던 두 거물 정치가의 세력 싸움으로 봐야 할까요?
신주백: 주도권 싸움인 것은 맞습니다. 한편에서는 주도권 싸움인데 그걸 좀 더 넓혀보고 깊게 보면 독립운동의 전략, 방법과도 맞물려 있는 것으로 보면 될 것 같애요. 우선 박용만은 우리가 그동안 쭉 이야기를 나누었듯이 박용만은 전쟁을 통해서 독립을 해야 한다. 그런 신념을 갖고 있고 그에 맞추어서 모금도 하고 장학회도 세우고 그랬잖아요. 이승만은 박용만의 이런 행동에 대해서 무척 위험한 선택이다. 그리고 이미 일본은 세계 열강의 일원인데 어떻게 일본과 싸워서 이기냐 그럴 바에야 미국을 비롯한 열강들의 여론과 양심에 호소해서 그들의 지지를 받는 방법으로 독립을 획득하자 라고 하는 전략과 방법의 차이가 그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심용환: 정말 이런 말까지 합니다. 무슨 말을 하느냐 하면 박용만의 군사투쟁은 돈키호테식 병정놀이 대조선국민군단을 지원하는 것은 시루에 물을 붓는 것이며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이다. 동포들의 피땀 어린 독립성금이 군사놀이로 탕진되고 있음이라.
신주백: 이건 비하적인 표현이잖아요. 군사놀이 라는 용어 자체가~
류근: 군사학교는 실체라도 있죠.
최원정: 이승만은 외교론을 주장하고 박용만은 전쟁을 불사해야 된다. 무장독립투쟁을 해야 된다. 외교냐 전쟁이냐 이런 고민에 지금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박재민: 저는 전쟁을 더 주장했을 거 같애요. 실제로 헤이그 특사가 불과 몇 년전에 실패를 했고 그 당시 서구 열강들이 미국이나 러시아 들이 그네들 끼리의 카르텔이 형성이 되어 있었거든요. 과연 대한민국의 외교력이 통했을까 저는 통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에 저는 전쟁론을 불사해 가지고~
류근: 간헐적인 게릴라 전으로 일본에 타격을 입힐 수는 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의 군사력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회의적이예요.
심용환: 그러면 외교독립론을~
류근: 당시 실력도 실체도 없는 나라에서 외교로 독립을 쟁취한다? 과연 실현 가능성이 있었겠느냐
심용환: 그럼 뭘 주장하시는 거예요?
류근: 그거예요. 그래서 나라를 뺏겼는데 꼭 왜 하나의 노선만이 유효하겠는가 나쁠 때는 외교와 전쟁 병합노선을 써야 한다. 국방과 외교와 교육이 모두 다 필요하다.
이윤석: 둘 다 하면 안될까요? 너무 답답해서 말도 잘 안나오는데~ 미주의 한인들도 의견이 갈리고 리더가 대립을 하고 그러니까 속이 너무 상해요.
----------------------이상협 아나운서 등장: 국민회 공금횡령 사건으로 이미 박용만과 이승만의 사이는 틀어져 있었습니다. 국민회는 교육사업을 위해서 마련해 놓은 부지, 즉 부동산이 있었는데 이승만이 이것을 자신의 명의로 양도해 줄 것을 요구했고 박용만이 단칼에 거절했던 것이죠.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사건은 국민회의 재정권 확보를 두고 벌어졌던 것입니다. 자, 국민회는 어떤 조직일까요. 하와이에서 일종의 준정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5000여명의 한인들이 매년 5달러씩 의무금을 납부하고 상시 35,000달러 되는 거액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쟁점은 바로 돈이었습니다.
이윤석: 이게 시대를 불문하고 부동산이 문제예요, 부동산~~
류근: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걸 개인 명의로 양도해 달라고 하는게 말이 됩니까?
신주백: 사실은 이게 안정적으로 들어오는 수입원이잖아요. 해외 회비로 따져도 이렇게 고정적이고 안정적으로 지속되게 들어오기가 쉽지 않아요. 1920년대 임시정부가 아무리 어려워도 버틸 수 있었던 힘 중의 하나가 미주지역의 동포들이 정기적으로 내는 의연금 때문이었어요.
류근: 지난번 이민편에서 살펴본 것 처럼 하와이 이민이 얼마나 고생한 분들입니까 그 뙤약볕 속에서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면서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그런 분들이 모아서 걷어준 돈인데~
신주백: 이런 이승만이 박용만을 국민보 주필로 다시 임명을 해요. 어떻게 보면 회유책이죠. 그러면서 이승만이 박용만에게 나는 옥중 동지를 잊지 않고 친구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달라 내편이 되든지 아니면 저쪽 편에 서든지 선택하라.
최원정: 완전히 진용논리에 빠져 있는거예요.
신주백: 진용논리에 빠져서 이제는 편 가르기를 명확하게 하기 시작하는 거죠.
심용환: 어떻든 박용만이 이를 받아드릴려고 했는데 이승만은 박용만의 날개꺾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미당국에다가 한인들의 군사활동을 금지해 달라는 요청까지 합니다. 일본군함 이즈모 호가 하와이로 온다고 하니까 박용만이 이를 폭파하려고 한다 이렇게 되면 미일관계가 나빠진다. 그러니까 박용만의 이런 병정놀이, 군사훈련 같은 것을 막아야 된다 라고 하고 미당국에 직접 이 이야기를 하니 결국 박용만은 못견디고 이승만과 절연을 하죠. 절연을 하고 미국을 떠나서 중국으로 갑니다.
최원정: 이게 다 사실인 어예요?
신주백: 네, 사실은 일본군함 이즈모호를 폭파한다고 하는 거짓정보를 미당국에게는 굉장히 민감한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당시 1차 세계대전 때예요. 1차 세계대전 당시에 태평양 지역, 그러니까 미국의 서부, 하와이 지역 일대를 일본 해군이 일정하게 방위를 해주고 있었습니다. 그 방위를 해주는 지휘선이 이즈모 호인데 그 배를 폭파하겠다고 하니 1차 세계대전을 같이한 연합국을 지금 이간질 시킬려고 하는 거잖아요. 용납할 수가 없죠.
이윤석: 그럼 일본 군함 폭파 얘기는 거짓이었어요?
신주백: 거짓정보였죠.
심용환: 자기 세력 확보할려고 지금 의형제와 절연하고 한인들한테 폭력을 행사하고 부동산의 명의 달라고 하고 땅 달라고 하는 요구를 하는 거잖아요. 너무 화가 나네~
박재민: 그 당시 정말 독립을 위해서 힘써 주던 많은 선조들께서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요? 알고 있었으면 또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또 국민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이런 부분에 대해서 참 답답하네요.
신주백: 사살은 몰랐죠. 대한민국 정부수립 초대 대통령,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더욱 더 당시에 사실에 가까운 진실을 이야기 하기가 말하기 어려웠던 시대가 1950년대 까지 였어요.
류근: 그러니까 박용만에 대해서 까맣게 몰랐던 이유 중의 하나가 그런 이유~~
신주백: 그렇죠, 초대 대통령으로서 1960년대까지 집권한 이 기간이~
최원정: 감히 이승만 집권기간에는 박용만에 대한 바른말을 하지 못했던 거죠. 이렇게 앙숙이었는데 어떻게 보면~
신주백: 사실은 박용만만 제대로 이야기 못한게 아니라 만주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제대로 말할수 없던 시기가 1950년대 였어요.
최원정: 아무튼 저는 여기까지 얘기 듣는 순간 가슴이 콩닥 콩닥 해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지금 정말 안타까운 장면들을 목격하고 있는데~, 그 이후에 미주의 한인들은 어떻게 했나요?
신주백: 분열이 진행되는 과정이 아주 첨예했잖아요.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 나누었듯이 그 과정에 일본의 방해 공작, 대조선국민군단이 우리를 공격하려 합니다 라고 일본이 미국측에 이야기 하면서 와해 공작을 벌이는 거죠. 한인사회의 분열에다 일제의 와해공작이 겹치니까 사실상 독립운동의 힘이랄까 상승곡선이 확 껶여 버렸죠.
심용환: 1915년에 하와이 호놀루루 일본 총영사 대리가 보고하는 일제 정찰보고서가 있어요. 보고서에 보면 국민군단에 대한 상황이 자세하게 되어 있습니다. 생도수 218명에 보유하고 있는 목총 400여정에 대해서 목총의 숫자까지 그리고 장교 및 교사 8명, 감독 박용만까지 다 정리가 되어 있어요.
최원정: 그러니까 일본으로 볼 때 위험스런 집단이었다는 거죠.
신주백: 사실은 저도 민족운동사를 연구를 하지만 하나의 정보보고서에 특정한 문제를 이렇게까지 상세하게 쓴 보고서를 찾기 쉽지 않습니다. 그만큼 일본이 대조선국민군단에 예민했고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결과적으로 대조선국민군단은 2년 4개월 정도 있다가 폐교될 수 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하와이 주정부가 허가한 자치기관으로서의 대조선국민군단 내지 조선인 자치운동 내지는 조선인 자치정부가 제 활동을 못하게 되는 상황까지 오게 되는 거죠.
이윤석: 그야말로 청춘을 받쳤는데 모든 걸 놓고 돌아서야 되는 코리아 스쿨보이 박용만의 심정이 어땠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많이 아픈데~, 자, 그래서 중국으로 간 박용만은 어떻게 됩니까?
심용환: 독립전쟁의 의지를 포기했던 것 같지는 않고요. 그렇기 때문에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1919년 외무총장으로 선임까지 됩니다.
최원정: 그런데 그때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 이승만~
심용환: 그렇죠
이윤석: 의기투합하나요?
심용환: 박용만이 임시정부에 참여하지를 않습니다.
류근: 선임은 됐는데 참여하지는 않는다는 말이죠.
심용환: 그렇죠. 그렇죠. 그런데 그 이후에 이야기가 급격하게 안좋은 방향으로 흐르는데~ 변절자로 사실은 몰리기 까지 해서~
류근: 박용만이?
심용환: 네,
최원정: 왜 변절을 해요?
심용환: 그래서 동지에게 살해를 당합니다. 1928년 10월 17일 베이징 주택가에서 박용만이 살해당합니다. 그런데 이때 나이가 아직 50이 안되었어요, 47살. 갑자기 급전직하를 해버리니까 저도 되게 당혹스럽더라구요.
이윤석: 이건 너무 비극적인데요~
신주백: 박용만 선생은 사실 강원도 철원 출신인데 철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해명 의열단원에게 살해를 당하죠.
최원정: 고향 사람에게,
신주백: 그게 친일혐의 때문인데 그래서 인제 지금까지 박용만이 상대적으로 저평가받고 있는 이유가 친일혐의 논란인데요. 그 부분은 조금 더 치밀한 접근이 필요하지만 개인적인 입장을 이야기 한다면 박용만이 과연 거기까지 갔을까 라고 의문을 갖고 있어요. 왜 그러냐 하면 그렇다 라는 증거는 없어요. 증거는 없는데 동료들 당시 백범 김구 선생 조차도 의심을 했죠. 박용만은 지금까지 우리가 서로 대화를 나눠봤지만 우리 독립운동이 나라가 망한 직후에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때 정치사상도 정립이 됐죠. 독립전쟁론도 이렇게 명확하게 가야된다고 제안을 했고 그에 대해서 본인이 실천까지 한 사람이잖아요. 그런 영향에서 당시 임시정부에서 외무총장도 해봐라 하고 제안도 받아보고 해서 이런 인물이 갑자기 전향될만한 동기나 이유가 명확하고 뚜렷하지가 않아요. 그렇다고 해서 일본 정보자료에 우리가 심어논 밀정이야 우리가 이렇게 해서 정보를 얻었어 하는 확증적인 내용도 없어요.
심용환: 그런데 왜 그렇게 소문이 돌았나요?
신주백: 당시 박용만이 거물급 인사인데 일제 치하에서 어떻게 가능했겠느냐 라는 거예요.
최원정: 뭔가 총독부와 암묵적인 것이 있지 않았겠느냐~~
신주백: 그게 결정적인 이유예요.
박재민: 그러니까 정말로 어떤 다른 명확한 증거도 없이 이동하는 루트만 보고 의심하는 건 말이 안된다고 하는 거죠.
류근: 심증이네 심증
신주백: 당신 같은 거물급을 일제가 어떻게 그냥 놔주느냐는 거지요. 당신은 당연히 서대문 형무소로 가야할 사람인데~ 이런 부분이 서로 여러가지로 추측하고 의심 받으면서~독립운동 진영 내에서 혐의가 그렇게 굳어지는 상황이었죠.
최원정: 살해 전에 이분의 행보로 봤을 때는 계속 무장투쟁의 길을 걸으셨잖아요.
신주백: 그 전의 행적과 연해주까지 갔다가 다시 상해 북경으로 돌아왔을 때 행적에 일관성이 있어요. 그래서 아, 좀 심증을 가지고 한 인물을 지나치게 역사적으로 단죄를 하는 경우가 박용만 선생이 아닐까 싶어요, (북경을 출발, 나가사키, 경성 등 먼 길을 돌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한 박용만, 복잡하고 위험한 경로를 택한 박용만, 복잡한 여행 경로탓 박용만이 일제 관계자를 만나 자금을 받았다는 소문까지 확산, 박용만은 일시적 수단으로 일본을 이용할 계획이었다고 해명),
최원정: 많은 독립운동가를 만나면서 오늘 같은 경우는 처음인 것 같애요. 오늘 코리안 스쿨보이 미주 한인사회에서 뜨거웠던 독립운동의 열기를 그래도 생생하게 만난 시간이긴 했는데 이분의 일생을 만나면서 어떤 느낌이 드셨는지요?
류근: 아일랜드의 유명한 극작가 조지 버나드쇼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낙관론자가 비행기를 만들면 비관론자는 낙하산을 만든다. 이게 일종의 풍자인데 서로 대척점에 있는 가치가 실은 상호보완관계 일수도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얘기하고 있는거 아닙니까? 그 독립을 챙취하는 방법 역시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었을 텐데 그게 일방의 배타성으로 그냥 좌초하고 실종되어 버렸다는 거 정말 후손으로서 민망하고 안타깝습니다.
이윤석: 생각이 달라서 네편 내편 다툴 수는 있는데 서로를 제거하는 자체가 목적이 돼서는 안되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 라는 걸 좋아하잖아요. 우리대학교 우리가족 우리나라 네편도 내편도 결국은 우리 안에 있는 거거든요. 제 생각에는 더 큰 위험이나 더 큰 적 앞에서는 다 우리 편이란 말예요. 제 생각에는 외교론도 독립전쟁론도 다 우리 편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너무 몽상가의 이상론 일 수도 있겠습니다만은,
박재민: 저는 박용만 선생의 인생이,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처럼 느껴졌어요. 물을 탁 틀면 차갑다가 서서히 뜨거워지잖아요. 그런데 뜨거워져서 콸콸콸 나오는 순간 누군가 물을 잠갔어요.
일동: 아~~아~~
박재민: 이 뜨거운 총알이 나올려고 하는 순간 수도꼭지가 꽉 잠긴 것이라 너무 답답해요.
이윤석: 느껴져요!! 눈에 비누 들어갔는데 수도는 잠겨있고~
박재민: 이럴 때 역사저널 그날 이 회차를 통해서 우리가 다시 한번 수도꼭지를 틀 수 있는 반환점이 되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합니다.
이윤석: 오늘 그래도 수도 꼭지를 돌렸네요.
최원정: 많은 독립운동의 노선들이 있었지만 사상과 철학을 갖춘 무장투쟁 박용만 선생의 올곧은 노선이 없었더라면 사실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 어땠을까 우리 자존심을 지켜 주신거 같애요.
신주백: 시청자 여러분들이 오늘 이 프로를 쭉 보셨으면서 느꼈겠지만 박용만은 정말 저평가된 인물이다 라고 그렇게 정리할 수 있구요. 다른 하나는 그러면 박용만을 어떻게 보는게 좋으냐 한다면 1910년에 나라가 망하기 전에 미국가서 병학교를 세웠잖아요. 10년후에 독립전쟁 계속했죠. 무형의 정부까지 만들려고 노력했죠. 그건 뭘 의미하냐면 이 분이 갖고있는 정치적 상상력이 없으면 불가능하거든요. 이 시기에 가장 상상력을 풍부하게 구사했던 독립운동가, 그리고 그런 것이 싯점상 필요했던 시기에 그런 전략을 제시했던 독립운동가, 박용만은 그 점에서 본다면 아까 말씀하신 막힌 수도꼭지를 다시 돌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최원정: 절대 잊어서는 안되는 또 한분의 독립운동가를 만나는 시간이었구요. 다음 시간에는 서대문형무소에 관한 이야기로 다시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49화, “저평가된 독립운동가 박용만”에서 정리).
① 1945년에 해방이 된지 70여년이 지났는데도 지난 시간에 박상진이나 조명하 독립운동가 처럼 박용만 독립운동가도 우리에게 생소한 이름이다. 박용만은 1910년대 미주 한인사회에서 안창호, 이승만과 같이 거물 독립운동가였다. 독립운동을 하는데 박용만은 독립전쟁론으로, 안창호는 실력양성론으로, 이승만은 외교독립론으로 인정을 받았다. 박용만과 이승만이 앙숙관계였다는 사실에 가슴 아프다.
② 박용만 독립운동가는 29살의 나이에 1909년에 미국 네브라스카주 커니市에다 한인 최초의 해외 군인장교양성학교를 세운다. 이는 1911년의 만주의 신흥무관학교 보다 2년이나 빨랐다. 그는 정치력과 우리나라의 독립에 대한 가치관과 철학이 있었다. 박용만은 1896년 버지니아주 미국 로어노크 대학을 졸업했고 학부 졸업논문이 아메리카 혁명이다. (파리강화회의대표 김규식도 로어노크대학 졸업). 숙부의 인도로 개화파 지식인들을 만나고 교류하여 영향을 받았다.
③ 박용만이 세운 네브라스카 소년병학교 출신으로는 김장호, 박철후, 정한경 박사, 기업가 유일한이 있다. 유일한은 13살 때 소년병학교에 입학, 1911년 16살에 최연소 1회 졸업, 1912년 박용만은 독립전쟁을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 미국 본토에서 하와이로 이주, 假政府도 세운다. 하와이에는 5천여명의 한인들처럼 서간도, 연해주 지역도 지방총회 조직 임시정부 네트워크, 당시 하와이 국민보신문의 주필을 박용만이 담당,
④ 1904년경 이승만과 박용만은 한성감옥에 수감, 옥중동지, 이듬해 박용만 미국행, 박용만과 이승만은 각별한 관계, 1910년대 이승만-안창호-박용만은 서로 친했다. 안창호는 기본적으로 성격이 부드러웠고, 박용만과 이승만도 친했고, 이승만과 박용만은 의형제, 1913년 박용만이 이승만을 하와이로 초청, 1914년 8월 30일에 박용만이 중심이 된 국민군단병학교의 개교식에 500여명의 동포가 모인 상태에서 이승만이 연설, 연설의 주제는 믿음,
⑤ 박용만과 이승만을 두고 하와이 한인사회에 분열 시작, 1915년 하와이 한인사회에서 심각한 폭력사태 발생, 박용만 지지세력과 이승만 지지세력의 대립원인, 내용은 전쟁론과 외교론의 주도권 싸움. 나라를 뺏겼는데 왜 하나의 노선만이 유효하겠는가 외교와 전쟁과 교육이 모두 다 필요하다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 답답하다.
⑥ 하와이 국민회는 교육사업을 위해 마련해 놓은 부동산이 있는데 이승만 이것을 자신의 명의로 양도해 줄 걸 요구, 박용만 단칼에 거절, 모든 사건은 국민회의 재정권 확보를 두고 발생, 국민회는 하와이에서 準政府 역할, 5000여명의 한인들 매년 5달러씩 의무금 납부, 상시 35,000달러 되는 현금 보유, 쟁점은 바로 돈, 이승만이 국민회 부동산을 개인 명의로 양도해 달라고 한건 어불성설, 1920년대 상해 임시정부가 아무리 어려워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미주지역의 동포들이 정기적으로 내는 의연금 때문,
⑦ 이런 이승만이 박용만을 다시 국민보 주필로 임명, 회유책, 이승만이 박용만에게 완전히 진용논리에 편 가르기, 이승만은 박용만의 날개 꺾기를 계속, 미당국에다 한인들의 군사활동 금지해 달라는 요청, 박용만이 일본군함 이즈모호 폭파하려 한다는 거짓정보로 박용만을 미국에서 탈출케 함, 박용만은 못견디고 이승만과 절연, 미국을 떠나서 중국으로 갑니다.
⑧ 이승만은 자기 세력 확보하려고 박용만과 의형제를 절연하고 한인들한테 폭력을 행사하고 부동산의 명의 달라고 하고 땅 달라고 하는 요구하는 행위는 용납할 수가 없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초대 대통령을 이승만이 1948년부터 1961년까지 13년간 집권동안 박용만 사건에 이승만이 잘못한 일이 밝혀질 수가 없었다. 이승만 집권 13년간 이승만과 박용만이 앙숙관계란 걸 아무도 말할 수 없었고 모두가 까맣게 몰랐던 이유 중의 하나다.
⑨ 중국에서 박용만이 독립전쟁 의지를 포기했던 것 같지는 않고, 1919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시 박용만 외무총장 선임, 박용만 거부, 1924년~5년, 박용만은 북경을 출발, 나가사키, 경성 등 먼 길을 돌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여행, 복잡하고 위험한 경로를 택한 박용만, 박용만이 일제 관계자를 만나 자금을 받았다는 소문확산, 박용만은 일시적 수단으로 일본을 이용할 계획이었다고 해명, 박용만 행적의 일관성, 박용만은 심증에 의해 역사적으로 단죄를 당함, 친일혐의 때문에 박용만은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저평가받는 이유다.
⑩ 그 이후 박용만의 이야기가 급격하게 안좋은 방향으로 흘러서 변절자로 몰리기 까지, 그런데 증거가 없다. 1928년 10월 17일 박용만은 베이징 주택가에서 같은 강원도 철원 출신 의열단원 이해명에게 살해, 이때 그의 나이 50이 안된 47살. 갑자기 급전직하 너무 비극적인 생을 마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