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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기다리는 사람들
센강 아래쪽, 앙리 4세 다리에서 뻗어나간 무프타르 거리에는 오래된 건물이 많다. 그중 하나인 3층 건물의 3충이 박미정의 사촌언니 박은희의 집이었다. 치과의사인 그의 남편이 아침 일찍 몽마르트의 병원으로 출근을 하면 방이 다섯 개짜리 큰 집에는 여섯 살짜리 아들 하나와 그들 셋이 남게 된다. 박은희는 프랑스 유학을 왔다가 학교에서 지금의 남편인 랑베르를 만나 국제결혼을 한 것이다. 랑베르는 30대 중반으로 검은 눈동자에 이목구비가 수려한 미남이었다. 박은희도 남에게 빠지지 않는 미인인지라 그들이 외출하면 주위의 시선이 모인다. 다정다감한 성격의 랑베르가 오히려 언니보다 더 신경을 써주는 형편이어서 박미정은 파리 생활에 빠르게 적응해가고 있었다.
오후 4시가 되자 정장 차림의 박은희가 응접실로 나왔다. 볼게 화장을 한 얼굴에 귀걸이가 반짝이고 있었다.
「오늘도 좀 늦을 거야. 기다리지 말고 자.」
미안한 듯 웃음을 띠운 그녀가 다가와 박미정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그녀는 랑베르와 시내에서 만나 친구들 모임에 가는 것이다.
「응, 걱정 말고 놀다와.」
「앙드레한테는 너무 많이 먹이지 말고.」
「알았어, 언니.」
박은희가 응접실을 나가자 집 안은 조용해졌다. 학교에서 돌아온 앙드레는 놀이방에 박혀서 저녁 먹으라고 부를 때까지 나오지도 않을 것이다. TV리모컨을 들어 채널을 이곳저곳 눌러보던 박미정은 곧 스위치를 끄고는 소파에 길게 앉았다. 예비학교의 가을 학기 수강신청을 해놓았으니 그때에는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 전공을 무엇으로 해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창가로 다가가 섰다. 김상철이 근대리아에서 탈출한 것을 그녀가 알게 된 것은 사건이 일어난 지 일주일쯤 지난 후였다. 우연히 한국식당에 들어가 묵은 신문을 들치다가 사건을 읽게 된 것이다. 그후부터는 하루에 한 번씩 식당에 들렸기 때문에 김상철이 도쿄 우에노의 여관에 묵었다가 다시 잠적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었다.
거리에 사람들이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여름휴가 때에는 텅 비어 한낮에는 관광객들만 가끔 지나가던 거리였다. 이제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다.
그녀는 석상처럼 서서 아래쪽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루에 한 번 식당에 들러 신문을 읽고 돌아오는 길에 마켓에서 장을 봐오는 것이 요즘의 일과이다. 그러나 이제는 외출도 하지 않고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이다. 박미정은 저도 모르게 긴 숨을 내려쉬었다.
자신은 김상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탈출 보도를 읽었을 때부터 가슴속에 싹튼 생각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크고 굳게 자리 잡고 있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당치 않은 상상이며 욕심이라고 스스로를 억눌러도 보았다. 이렇게 버려두었다가는 상처만 커질 뿐이라는 계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처도 욕심도 나중에 생각할 문제였다. 그의 전화나 또는 만남을 상상하는 것이 요즘의 그녀에게는 단 하나의 희망이었다.
「수심에 젖은 얼굴이야, 섹시한데.」
이렇게 말한 것은 건너편 건물 4층의 창가에 서 있던 박항석이다. 도로 폭이 20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앞쪽 3층 건물의 창가는 손에 닿을 듯이 가까웠다. 거기에다 망원경까지 눈에 대고 있었으니 주근깨라도 보일 판이다
「이봐, 커튼을 조금 더 닫아. 틈새가 너무 넓다.」
뒤쪽의 소파에 기대앉은 현민규가 짜증스럽게 말하자 박항석은 커튼을 닫았다.
「이쪽에 나 있는 창문이 20개도 넘는단 말이야. 그리고 햇볕의 반사로 커튼 안쪽은 보이지도 않아.」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는 듯 박항석이 그를 흘겨보았다.
그들은 안기부요원으로 본래 국립미술학교의 연구생이 사용하던 이방을 빌린 지 일주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한 달 계약으로 3천 달러를 건네자 그는 두말 하지 않고 방 열쇠를 건네주고 지금은 때늦은 여름휴가를 즐기고 있다.
이제 박항석은 커튼 사이로 건물의 현관과 3층의 창문을 내려다보았다.
「제기, 정말 죽겠구만. 기약도 없고, 낌새도 없이 맨날 이 지랄이니.」
박항석이 혼자소리로 투덜거렸다.
2, 3일 전부터 그의 말버릇이었으므로 현민규는 잠자코 잡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하루 12시간씩 2명씩 2교대 근무였으니 짜증이 날 만도 했다. 12시간에서 1시간 간격으로 창가에 앉아 눈을 떼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현민규의 옆쪽 탁자 위에는 커다란 금속제 가방이 뚜껑이 열려진 채 놓여져 있었는데 그것은 전화도청 장치였다. 일주일 전에 가족이 모두 집을 비웠을 때 요원 둘이서 집 안에 들어가 도청장치를 설치해 놓고 나온 것이다. 이제 집 안에서 전화를 걸거나 걸려왔을 때 가방 속의 수신기와 연결되어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통화내용을 들을 수가 있다.
「어제 이야기 들었는데, 염태식이가 병가원을 냈다는 거야. 간이 나쁘다고 6개월짜리로.」
박항석이 말하자 그제야 현민규가 잡지에서 시선을 뗐다.
「병가원을? 그렇다면 내년 초에 계장 진급이 어렵겠는데.」
「진급은 이미 물건너 갔어. 김상철이를 놓쳤을 때부터‥‥ 죽지 않고 산 것만 해도 다행이지, 그 친구.」
「그 일 없었으면 진급 0순위였는데.」
「글쎄, 운이라니까! 아마 병가원도 진급이 물건너 간 줄 알고 선수친 것 같아.」
그렇게 말하던 박항석이 목을 뽑더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2층의 할망구가 오늘은 시장 보러 가는 것이 조금 늦는군.」
그러더니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최 형이 그러던데 아예 한국신문을 집으로 배달시켜 주는 방법을 만들자는 거야. 한국식당까지 따라갔다가 돌아오는 것이 지겨워서 죽겠다면서 말이야.」
박미정이 집을 나오면 감시자 한 명은 서둘러 뒤를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집 안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보다도 더 지겨운 일이었다. 똑같은 길을 같은 페이스로 걷는데 이제 그들은 눈을 감고도 세 개의 사거리를 지나 횡단보도를 다섯 개 건너 한국식당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새끼, 이렇게 애타게 기다리는 여자가 있는데 도대체 어디서 뭘하고 있는 거야?」
박항석이 다시 투덜거렸으나 현민규는 잡지에서 눈을 들지 않았다.
박미정이 훑어보는 것은 신문의 사회면이다. 그녀는 정치, 경제, 문화면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므로 커피 한잔 마시고는 10분이면 다시 식당을 나오는 것이다. 그들은 그녀가 무엇을 찾고 있는가를 알고 있었으므로 지루함 속에서 조금 긴장감을 찾기도 했다.
심재택이 차장실에 들어서자 제3차장 오학수가 머리를 끄덕이며 눈으로 앞자리를 가리켰다. 지난번에 근대리아 파동으로 안기부의 수장 이하 간부급 대부분의 이동이 있었고 오학수도 신임이다. 그러나 그는 심재택과 부산에서 같이 근무했던 인연이 있었으므로 서로를 잘 알고 있는 사이였다.
「상황이 아주 좋지 않아. 누군가가 총대를 메야 될 것 같아.」
오학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북한계가 급격히 세를 늘리고 있어. 상대적으로 장인규 세력이 위축되다 보니까 놈들은 이제 공개적으로 근대리아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단 말이야.」
「운영위원회더러 책임을 지라고 하지요.」
「그자들이 책임을 질 인물들인가? 김상철이 북한계를 배후에서 조종한다고 하는 자들인데.」
「암적인 존재입니다. 하지만 저희들로서는 불가항력입니다.」
오학수가 입맛을 다셨다. 세를 늘리는 것은 북한계 뿐만이 아니다. 삼합회는 공공연히 중국인 행사를 열어 주민들을 결속시켰고 마피아도 이미 전의 기반을 회복해 놓고 있었다. 그것에 대한 근대리아의 대비책은 경비대원을 현재의 4800명에서 I5000명으로 늘린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운영방식에 문제가 있었다고 하면 당장에 북한 프락치로 몰리는 상황입니다. 지금은 강회장도 속수무책인 형편인데 저희들이 어떻게‥‥‥」
심재택의 말에 오학수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근대리아 안보의 실무 책임자였지만 근대리아의 정책을 결정하는 운영위원회에 한 번도 참석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회의에 참석하는 부장 손에 여러 차례 쥐어준 상황분석 자료는 번번이 다시 들려왔는데 모두 안보수석 박정규에 의해서 거부당한 것이다.
「박정규가 상황을 모를 리가 없어.」
오학수의 목소리가 다시 낮아졌다.
「이제야말로 근대리아가 북한 손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말이야.」
「‥‥‥‥」
「무조건 경비대원만 늘린다고 되는 일이 아니야. 근대에서 반발이 대단해,」
「저는 요즘 20년 가까운 이 생활에 환멸을 느낍니다, 차장님.」
「솔직한 자네 생각을 듣자. 자네가 이 상황에 대해서 느낀 것을.」
「글쎄, 차장님. 그것이 무슨 소용이 ‥‥」
그러자 오학수가 눈을 치켜떴다. 50대 초반의 그는 조그만 체격이었지만 강단이 있는 인물이다.
「잔소리 말고, 어서.」
「근대리아는 곧 북한 손에 떨어집니다. 조선족 주민들 속으로 북한조직이 깊게 파고들 테니까요.」
「근대그룹은 그놈들이 잘 자라도록 토양에 잔뜩 비료를 뿌려준 셈이 되었습니다. 근대리아의 조선족은 새로운 형태의 공산주의 사회를 만들 겁니다. 관리자 놈들은 적응력을 키웠으니까요.」
「‥‥‥‥」
「김상철은 그들을 견제하고 어쩌면 흡수시켜 버릴 수도 있었던 스폰지 역할을 해왔었지요. 그리고 힘으로도 제압해왔습니다.」
그는 머리를 들어 오학수를 바라보았다.
「저는 그놈을 믿습니다. 절대로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는 놈이지요. 확실한 자유인으로 개성이 강한 놈이었습니다.」
「그놈 이야기는 그만해. 이미 끝난 일이니까.」
「화가 나서 그럽니다,」
「그래도 그놈은 우리 요원 다섯 명을 쏴 죽였어. 엄청난 일이야.」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근대리아를 위해 마피아와 전쟁을 치르고, 그것도 이기고 돌아왔는데 난데없이 체포했으니.」
「‥‥‥‥」
「우리도 병신이 되었지요. 박정규와 전창낭, 거기에서 경비본부장으로 연결된 선에서 일이 결정되었으니까요. 우린 사건이 끝나고 나서야 보고를 받았지 않습니까?」
오학수가 다시 입맛을 다셨다.
「그만해 둬라. 곧 잡히거나 죽게 될 놈이니까. 근대리아 일이나 생각해,」
그들이 산책이라고 부르는 찬국식당까지의 도보 왕복을 마치고 박항석이 방에 들어섰을 때는 오후 3시가 되어 있었다. 오전과 오후, 이렇게 12시간씩 나눠 근무를 하고 있어서 산책은 대개 오전반인 최병국 조가 맡았는데 오늘은 박미정이 오후에 집을 나섰던 것이다. 그는 미리 신문을 읽어본 터여서 오늘자 한국신문의 사회면에 김상철의 기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뒤를 따르면서 답답했었다. PC로 신문의 사회면을 읽는 방법도 있었던 것이다.
「아니, 음료수 안 사왔어?」
그의 빈손을 보고 현민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내가 사오라고 두 번이나 말했잖아? 음료수 없이 어떻게 저녁을 먹는단 말이야?」
「이런 젠장, 얘가 곧장 집으로 가는데 날더러 어쩌라고?」
박항석이 따라 소리치면서 소파에 앉았다.
「오늘은 마켓에도 들리지 않더란 말이야, 망할 년이.」
현민규가 혀를 찼다.
「할 수 없이 내가 나갔다 와야겠군.」
창가의 의자에 앉아 있었던 그는 창문을 향해 말했다.
「정말 짜증나는구만. 이게 무슨 꼴이야? 열흘이 가깝도록.」
그의 말을 귓가로'흘리며 잡지를 뒤적이던 박항석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는 소스라쳐 자리에서 일어섰다가 권총의 총구에서 발사되는 섬광을 보면서 뒤로 넘어졌다. 한 발에 심장을 관통당한 것이다. 그때에는 이미 현민규도 일어서 있었으나 그는 비무장이었다. 무겁고 걸리적 거렸으므로 권총집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창을 등지고 어정정한 자세로 서 있는 현민규를 바라보며 사내가 빙그레 웃었다. 동양인이었으나 김상철은 아니다. 양복차림에 조금 허리를 굽히고 권총을 똑바로 겨누고 있는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는 온몸에 찬 기운이 스쳐가는 것을 느꼈다. 사내의 두 눈은 죽은 생선의 눈 같았다. 사내가 옆걸음으로 두어 걸음 돌았으므로 현민규도 그를 바라보며 몸을 틀었다. 그 순간 현민규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놈은 창에 총알자국을 내지 않으려는 것이다. 창 앞에 서 있는 자신을 쏜다면 창문 밖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현민규가 와락 몸을 창으로 돌리는 순간 사내의 총구에서 다시 섬광이 튀었다. 둔탁한 총성이 방 안을 울렸고 박항석과 같이 심장이 뚫린 그는 벽에 등을 부딪치며 넘어지더니 금방 숨을 멈췄다.
마파척은 권총 끝에 배인 화약 냄새가 가시기를 기다리는 듯 총구를 허공에 대고는 서너 번 휘저었다. 그리고는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여유 있는 태도였다.
「누구세요?」
문 앞으로 다가간 박미정이 불어로 묻자 저쪽에서는 잠시 대답이 없다.
「누구세요?」
「저… 김상철 씨가 보낸 사람입니다.」
낮으나 또렷한 영어가 들리는 순간 박미정은 온몸을 굳혔다
보안경을 통해 밖을 내다보자 사내 한 명이 초조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박미정 씨, 계십니까?」
사내가 다시 묻고는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동양인으로 훌쩍 큰 키에 마른 체격이다. 조금 어깨가 굽어져 있었으므로 평범한 샐러리맨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였다.
박미정은 문의 고리를 풀었다. 가슴이 커다랗게 고동을 쳤고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진 것이 느껴졌다. 문이 열리고 사내는 방 안으로 들어서더니 우선 주위를 살펴보았다. 흐린 시선이었다.
「놀라시게 해서 미안합니다. 저는 김상철 씨의 부하로 진이라고 합니다.」
사내가 낮으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아직 응접실의 복판에 서 있는 채로였다.
「저는 한국인이지만 중국에서 태어나 한국어를 모릅니다. 근대리아에 들어와 김상철 씨 밑에서 일을 한지 일 년이 되었습니다.」
「그가 무슨 일로 저를‥‥‥」
「만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이곳은 한국 안기부의 감시를 받고 있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박미정이 머리를 젓자 그는 턱으로 탁자 위에 놓인 전화기를 가리켰다.
「전화도 도청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건너편 건물에도 두 사람이 24시간 이곳을 감시하고 있지요.」
「‥‥‥‥」
「지금은 그들이 잠시 자리를 비웠지요. 하지만 시간이 30분밖에 없습니다.」
「그는 어디에 있는데요?」
「홍콩.」
박미정이 퍼뜩 머리를 들었다.
「홍콩이요?」
「일본에서 겨우 홍콩으로 왔습니다. 더 이상 움직이기가 어려워서요.」
「‥‥‥‥」
「절박한 상황입니다. 마지막으로 꼭 만나야겠다고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렇습니다. 한국 기관뿐만 아니라 인터폴에서도 쫓고 있으니까요.」
온몸의 기력이 떨어진 박미정이 소파의 등받이에 겨우 몸을 기대고 섰다.
사내가 그녀에게로 한 걸음 다가와 섰다.
「저도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보스의 지시를 받고.」
「‥‥‥‥」
「지난번 근대리아에 오셨을 때 저택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만, 그때 병이 나셔서 제가 의사를 데려왔었지요. 그래서 얼굴을 알고 있는 제가 이곳에 온 겁니다.」
박미정이 똑바로 섰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준비를 해야겠으니까.」
「그냥 간단히 ‥‥ 시간이 없습니다.」
사내가 불안한 듯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옷가지만 간단히 추려 가시면 됩니다. 다른 건 제가 준비해 왔으니까요,」
그로부터 3시간쯤 후인 오후 7시경, 생제르맹 데 프레에 있는 케이레 호텔의 객실 안이다. 전화기를 움켜쥔 홍경준의 얼굴은 하얗게 굳어 있었다. 그는 박미정의 감시 책임자로 케이레 호텔이 감시본부인 것이다.
「네, 지금 요원 세 명이 현장에 나가 있습니다.」
그가 소리치듯 말을 이었다.
「박미정은 집 안에 없습니다. 예, 아마 김상철이 요원들을 해치고 바로 박미정을 데리고 간 것 같습니다.」
전화를 받는 사람은 고위층인 제3차장 오학수였다. 그는 사전보고를 받자 직접 홍경준에게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오학수도 목청을 높였다.
「여기서도 조처를 할 테니 넌 그곳에서 사건을 수습해라. 무슨 말인지 알겠나?」
「예, 차장님, 알겠습니다.」
「도청장치는 치웠겠지?」
「예, 차장님.」
「김상철에 대한 수사협조 의뢰가 프랑스 당국에 전달될 것이다. 그리고 오늘 중으로 이곳에서도 전담반이 그곳으로 출발한다. 기다리도록.」
수화기를 내려놓은 홍경준은 땀이 배인 이마를 손등으로 닦았다. 앞에 서 있던 요원이 불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박항석과 현민규가 피살체로 발견된 것은 한 시간쯤 전이었다. 한 시간에 한 번씩 보고하던 아파트 감시조가 두 시간 동안 연락이 없었으므로 이쪽에서 사람을 보냈던 것이다. 홍경준이 머리를 들었다.
「최병국이한테 연락해서 준비가 되었으면 경찰에 신고를 하라고 해.」
머리를 끄덕인 부하가 전화기를 쥐었다. 현장에는 요원 세 명이 도청장치를 치우고 무기들을 회수하는 등 프랑스 당국에 문제가 되지 않도록 현장을 수습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시체 두 구를 치울 수는 없는 것이다. 서둘러 최병국과 통화를 하는 부하의 목소리를 귓가로 들으며 홍경준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시체를 발견한 지 한 시간이 조금 넘었다. 그러나 그들이 피살된 것이 몇 시간 전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는데 아마도 김상철은 지금쯤 박미정을 데리고 유유히 도망치고 있을 것이었다.
「이 새끼 , 어디 두고보자.」
눈을 치켜뜬 홍경준이 혼자소리처럼 말했다.
한국이었다면 이미 전국에 수배령이 내려졌을 상황이었는데 이곳에서는 한 시간
을 헛되게 보낸 것이다.
파리발 로이터 통신으로 한국 기관원 두 명의 피살사건이 보도된 것은 다음 날 오전이다. 그리고는 석간신문에 특파원들의 흥분이 그대로 드러난 내용이 사회면의 톱을 장식했는데 이제는 김상철을 살인마라고 부르는 일간지도 있었다.
그날 저녁, 아예 집에다 연락도 하지 않은 채 강미현은 이태원의 카헤에서 최희은과 마주앉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파리행 결심을 굳히고 아버지한테는 이태리 밀라노의 현지공장 취재의 허락까지 맡아놓은 상태였던 것이다. 근대기획의 직원들과 밀라노에 도착해서는 그곳에서 혼자 파리로 간다. 파리의 근대그룹 현지법인 담당자들은 놀랄 테지만 그들에게 자신이 파리에 와 있다는 소문을 내도록 하는 것이 그녀의 계획이었다. 김상철이 파리에 온다면 그것을 모를 리가 없다. 그리고 자신을 찾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 수사당국이 김상철과 박미정을 추적하고 있다던데, 이건 한 편의 드라마다. 아니, 드라마틱한 액션 영화야.」
술잔을 든 최희은이 강미현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실내였지만 그녀의 반들거리는 두 눈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차라리 잘 되었어. 그 일이 조금만 늦게 일어났다면 삼류 멜로물이 될 뻔했으니까, 물론 눈물의 주인공은 네가 되었겠지, 가엾은 것.」
그러자 강미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럴 때일수록 심한 말을 뱉는 것이 최희은의 성격이다. 그것이 어설픈 위로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한 모금에 위스키를 삼킨 강미현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조금 의외야.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막판이야, 보이는 것이 없어서 그랬겠지.」
이제 최희은의 목소리도 조금 낮아졌다.
「감시하고 있었던 모양인데‥‥그 죽은 두 사람이, 할 수 없지 않았겠니? 만나려면,」
잔잔하고 낮은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으므로 강미현은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고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최희은이 혼자서 술잔을 채우고는 홀짝이며 마셨다.
「오늘 오후에 들었는데‥‥‥」
생각난 듯이 강미현이 입을 열었다.
「이실장한테서 전화가 왔었어. 김상철 씨가 오사카의 안인석이를 찾아갔다는 거야. 도쿄에서 오사카로 간 것이지.」
「‥‥‥‥」
「안인석이가 신고를 했는데, 물론 언론에 보고는 안 되었고! 박미정이를 찾아갈 것 같은 눈치를 보였다고 했다는 거야.」
「그것은 네가 잘 짚었다.」
그리고는 최희은이 코웃음을 쳤다.
「파리로 간다는 것 말이다. 족집게다.」
「‥‥‥‥」
「이제 끝났어, 진짜로.」
술병을 든 최희은이 강미현의 잔에 술을 채웠다.
「넌 이혼녀와의 경쟁에서 넉아웃 당한 거야. 그래서 널 위해 내가 금방 말을 만들었는데 ‥‥ 김상철이는 제 분수에 맞는 상대를 꿰차고 도망친 거야. 어때?」
쓴웃음을 지은 강미현이 술잔을 들어 한 모금에 넘겼다.
최희은이 말을 이었다.
「화실에서는 김상철이가 멋있다고 애들이 그러더라. 그런 사랑을 한 번 받아보았으면 좋겠다는 애도 있고‥‥ 미친 것들이지. 막상 제 앞에 그런 일이 닥치면 팬티에 오줌을 찔끔대다가 도망칠 것들이,」
「다 남의 일이니까 그런 야단법석을 떠는 거야. 그런데 이건 네 일이야. 네 인생이 걸린 문제라고. 미현아, 꿈 깨.」
「누가 꿈꿨니?」
강미현이 그녀를 쏘아보았다.
「난 한 번도 그런 적 없어.」
「번번이 착각해오구선 ‥‥‥」
「그 사람 만날 때까지는 아니야.」
술잔을 든 강미현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렇게 된 이상 나한테 연락을 해오겠지. 그리고 확실하게 해줄 거야.」
「그때까지는 너도 입 닥쳐 .」
그러자 의외로 최희은이 잠자코 술잔을 들었다. 이제는 부드러운 노랫소리가 카페 안을 흐르고 있었다.
자바 섬의 동북단에 위치한 술라바야는 인도네시아 제2의 항구도시이다. 바로 건너편의 마두라 섬에서는 유전이 발굴되고 있는데다 자바 해협을 건너면 거대한 원시림의 땅 칼리만탄에서 생산되는 원목 등이 집결되는 요충지인 것이다.
술라바야의 해변가. 마악 석양이 지고 있어서 바다는 짙은 남색이 되었고 수평선 위의 하늘은 이미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넓게 펼쳐진 모래사장 위로 바다의 껍질을 한꺼풀씩 벗겨내는 것처럼 파도 끝의 횐 물거품이 차례로 몰려왔다. 눅눅한 바닷바람이 스치면서 바다냄새가 맡아졌다. 탁자 위의 신문이 바람에 날려 바닥에 떨어졌으나 김상철은 바다를 향해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술라바야의 모텔에 투숙한 지는 열홀 째가 되어가는 중이다. 본래의 목적지는 자카르타였는데 그곳에서 다시 국내선 비행기로 술라바야로 이동한 것이다. 하바로프스크에서 그는 여섯 개의 여권을 만들어 놓았고 이한 등도 모두 서너 개씩의 여권을 가지고 있어서 입출국할 때마다 다른 여권을 사용했지만 모두 러시아 여권이라는 것이 약점이었다.
나무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최복수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형님, 식사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그는 화려한 남방셔츠에 바지차림으로 표정이 밝다. 시베리아를 벗어나지 못했던 그들에게 이번의 유랑이 김상철과는 다른 감정일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한이가 올 시간이 되었는데, 오면 같이 먹자.」
「예, 형님.」
고분고분 대답한 최복수가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50평이 넘는 2층 목조건물에 묵고 있었는데 독립된 방갈로식 모텔로 뒤쪽에는 수영장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주위가 어두워졌다. 이쪽으로 밀려오는 파도의 횐 끝만 겨우 보일 뿐, 바다는 짙은 어둠에 묻혀 있었다. 밝은 날에는 마두라 섬의 서쪽 해안에서 반짝이는 민가의 불빛이 보였지만 오늘은 흐린 때문인지 그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래쪽에서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리더니 나무계단을 서둘러 밟아 오르는 발자국 소리가 났다. 이한이다. 2충의 불은 아직 켜지 않았으므로 그는 윤곽만을 드러낸 채 다가와 섰다.
「형님, 다녀왔습니다.」
그는 술라바야 시내로 들어가 블라디보스토크의 송길수와 통화를 하고 온 참이다. 이틀에 한번 정도로 김상철은 송길수로부터 근대리아의 상황을 보고받고 있었던 것이다.
「형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한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으므로 김상철이 일부러 가볍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근대리아의 일이 아닙니다.」
「‥‥‥‥」
「파리에 계셨던 박미정 씨가 납치당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도대체 누가?」
「한국언론이 크게 보도하고 있다는 겁니다. 모두 형님이 그렇게 하신 줄로‥‥박미정 씨를 감시하고 있던 안기부 요원 두 명을 사살하고 납치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두서는 없었지만 이한은 송길수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빠짐없이 말하고 나서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형님, 혹시 이것도 한국 정부의 장난이 아닐까요?」
박미정이 홍콩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오후 5시였으니 시차까지 포함하면 꼬박 하루가 걸린 비행이었다. 비행기 안에 있을 때는 그래도 나았지만 막상 공항의 입국 심사대 앞에 서자 박미정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진선생은 이미 옆쪽의 심사대를 통과해서는 그녀를 바라보며 서 있었으나 그것으로 안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비행기로 오셨지요?」
이렇게 말하면서 세로로 앉아 있던 세 명의 심사관중 가운데 앉은 사내가 물었을 때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싱가포르 에어 725편입니다.」
사내는 그녀의 여권을 손에 쥐고 있었는데 조금 지친 듯한 표정이었다.
「관광하러 오셨군요.」
「예.」
사내가 머리를 끄덕이면서 스탬프를 찍자 박미정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심사대를 통과하자 진선생이 다가왔다. 얼굴에 웃음을 띠우고 있었다.
「눈에 띄게 긴장하고 계시는군요. 걱정하지 마시라는데도.」
그는 가운데에 있는 사내하고는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박미정이 들고 있는 여권은 붉은 색의 중국 여권이다. 진선생은 이미 그녀의 중국 여권을 준비해 왔는데 최근의 모습인 자신의 사진까지 붙어 있었다.
그들은 면세점 사이를 걸어 곧장 검색대를 지났다. 짐이라고는 각각 손가방 하나씩뿐이었으므로 검색할 것도 없다. 이제 마지막 관문을 지났다고 생각하자 박미정의 마음도 조금 가벼워졌다. 프랑스 출국과 홍콩 입국이 모두 끝난 것이다. 그가 만들어온 여권은 그의 말대로 중국 정부가 발행한 것이 확실한 모양이었고 미리 홍콩의 공항에까지 손을 써놓은 것이다.
택시 정류장으로 다가가던 박미정은 무의식중에 손을 들어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비행기가 홍콩에 가까워지면서 생겨난 버릇이었는데 입국 심사대 앞에서는 잊고 있었다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구룡반도의 어느 혼잡한 길가의 건물 앞에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저녁 8시가 되었을 때였다. 인도에는 행인들이 들끓었고 늘어선 가게에서 울리는 소음으로 거리는 떠들썩했지만 활기에 차 있었다.
진선생이 앞장서서 입구로 들어섰다. 5, 6층은 되어 보이는 건물이었는데 간판과 빨래, 뻗어 나온 테라스 등으로 지저분한 분위기였다. 박미정은 가방을 옮겨 쥐며 그의 뒤를 따랐다. 서민층이 밀집되어 살고 있는 곳이어서 어수선한 차림의 남녀가 좁은 복도를 걷는 그들을 스치고 지났고 양쪽의 벽 안에서는 갖가지 소음이 들렸다.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웃음소리, 거기에다 어느 곳에선 남녀가 싸우는 모양이었다.
진선생이 2층의 계단을 오르다가 힐끗 그녀를 돌아보았다. 머리칼을 매만지며 뒤를 따르던 박미정이 얼굴에 웃음을 띠우자 그는 다시 발을 떼었다. 3층의 좁은 계단을 오르자 그는 곧장 안쪽의 복도로 들어섰다. 박미정은 갑자기 잠깐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조용한 곳에서 옆방이라도 좋으니 잠깐 숨을 돌리고 나서 김상철을 만나고 싶은 것이다. 앞장서 걷던 진선생이 멈춰서더니 힐끗 이쪽을 보고는 주먹으로 문을 두드렸다. 그와 두 걸음쯤 옆에서 멈춰선 박미정은 가늘고 긴 숨을 내려쉬었다. 입국 심사대 앞에서와는 경우가 다른 긴장감이 엄습해왔으므로 그녀는 두근대는 가슴을 억제하려는 듯 어금니를 물었다.
문이 열리자 진선생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들어가시지요,」
안으로 들어선 박미정은 지저분한 방 안에 서 있는 두 사내를 바라보았다. 허름한 옷을 걸친 그들은 무표정한 시선으로 그녀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진선생이 들고 있던 가방을 방 안의 의자 위로 내던지더니 사내들과 중국어로 빠르게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자 한 사내는 안쪽의 문을 열고 사라졌고 다른 한 사내는 방 안을 치운다.
「거기 앉으세요.」
저고리를 벗어 다시 의자 위로 던지면서 진선생이 턱으로 낡은 소파를 가리켰다.
「어서, 피곤하실 텐데.」
소파로 다가간 박미정이 한쪽 끝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넥타이를 끌어내리던 그가 문득 머리를 돌려 박미정을 내려다보았다.
「사장님은 지금 집 안에 안 계십니다. 이제까지 기다리고 계시다가 일 때문에 어젯밤에 나가셨다는군요.」
「그동안 이곳에서 쉬고 계시라고 하셨답니다. 이곳이 지저분하기는 해도 갖출 건 다 갖췄지요, 위험하니까 밖으로 나가지 마십시오. 경찰 정보원이 깔려 있으니까요.」
「그분은 지금 어디 계시는데요?」
박미정이 겨우 묻자 그는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다시 일본에 가셨답니다. 하지만 곧 오실 겁니다. 제가 부인을 모시고 왔다고 연락을 할 테니까요.」
시테 섬의 중심부에 있는 파리 경시청 안이다.
홍경준과 최병국은 담당 수사관 미셀의 사무실에 앉아 있었는데 방 안의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미셀은 30대 중반으로 비대한 체격에 대머리였다.
홍경준은 그의 불친절이 인종에 대한 편견 때문인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런 놈일수록 겉으로는 그렇지 않게 보이는 법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때가 되면 본색을 드러내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놈은 파리의 두 곳 공항에 두 남녀의 여권번호만 체크했을 뿐, 수십 군데의 국경 출입국 관리소에는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
미셀이 머리를 들고 홍경준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입출국 심사대에서 일일이 여권심사를 하지 않아요. 비자가 필요 없는 국가의 여권을 가진 사랑들은 여권만 흔들어 보이면 통과시킵니다.」
그가 육중한 몸을 의자에 기대자 턱의 주름이 세 개로 늘어났다.
「프랑스에 있는 모든 항롱사와 여행사에 박미정과 김상철의 여권번호와 신상명세를 보내주었으니 그쪽에서 연락이 올지도 모릅니다. 물론 바보같이 제 여권을 보이고 탑승했다면 말이오.」
홍경준은 불어에 익숙했으므로 그의 비꼬는 듯한 말투를 그대로 알아들었다.
「미셀 씨, 공항에 두 사람의 사진을 보냈습니까?」
「물론이요, 팩스로 보냈습니다.」
「김상철이 러시아 여권을 사용하고 있으니 박미정의 여권도 미리 러시아 여권으로 만들어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겠군요. 그래서 러시아 여권을 가진 동양인을 주의해서 체크하라고 통보했습니다.」
이미 사건 이후로 수백 대의 비행기가 프랑스를 떠났고 육로나 해상으로 떠난 사람들은 수백만이다. 홍경준을 맥이 풀렸다.
미셀이 의자를 삐걱이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그런데 당신들, 박미정의 아파트에 도청장치를 해두었더군요.」
「‥‥‥‥」
「당연하지요, 우리라도 그랬을 테니까. 앞 건물에서 멀거니 바라보기만 할 수는 없지요. 사건이 신고된 후에 조사반이 아파트에서 도청장치를 바로 찾아냈소.」
「‥‥‥‥」
「남의 나라에 와서‥‥ 더구나 프랑스 시민의 주택에 무단 침입해서 도청장치를 설치했다는 건 대단히 큰 문제요. 그렇지 않습니까?」
「미셀 씨, 그건‥‥‥」
미셀이 손을 들어 홍경준의 말을 막았다.
「지금 고위층이 언짢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도 이렇게 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분이 썩 좋은 것은 아니요, 선생.」
이것으로 미셀이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닌 것만은 확인된 셈이었다.
밀실에 앉아 술잔을 비우고 있던 흥기천이 흐린 시선을 들어 어둑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근대 타운 깊숙한 곳에 있는 중국인 마을의 마약방이다.
홍기천은 마약을 하지 않는 대신 술이 셌다. 50도짜리 보드카도 약하다면서 물처렁 마셨는데 그가 취해서 흔들리는 모습을 본 부하는 없다.
밤 11시가 넘어 있었지만 안쪽의 마약방은 만원이었다. 마약방에는 중국식 빨대를 이용해서 아편을 마시는 전통적인 방법을 썼는데 철저한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신분이 확실한 중국인이 아니면 아편방 근처에는 얼씬할 수도 없는 것이다.
안쪽이 조금 술렁이더니 방문이 열리면서 양필성이 들어섰다. 그는 전임 대형인 진대원이 제거된 후로 근대리아 삼합회의 실질적인 2인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양필성은 홍기천의 앞자리에 앉았다. 홍기천은 회주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사내다.
「대형, 마파척은 홍콩에 있습니다. 조금 전에 구룡에 있는 곽 선생한테서 연락이 왔습니다.」
말소리를 낮춘 그가 말을 이었다.
「곽선생한테도 비밀로 하고 있어서 정확한 소재는 아직 알 수가 없다고 하던데요,」
「마파척, 그놈은 신의가 있는 놈이다.」
술잔을 든 흥기천이 느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놈이 진대원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분명해. 그놈이 목적도 없이 근대리아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을 리가 없어.」
양필성이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마파척이 찬드라라는 가명을 쓰고 타운 호텔에 투숙하고 있는 것을 안 것은 우연이었다. 마파척은 간부급들도 이름만 들었지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는데 타운 호텔에 들렀던 간부급 하나가 그를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런지 얼마 되지 않아 마파척은 타운 호텔을 떠나 자취를 감추었다.
홍기천은 마파척과 예전에 몇 번 거래를 해본 경험이 있었다. 유리컵에 담긴 보드카를 꿀꺽이며 마시고는 그가 손등으로 입가를 씻었다.
「마파척의 용도는 단 한 가지뿐이야. 너는 진대원이 어떤 용무로 그를 불렀을 것 같나?」
「시기적으로나 상황으로 보아도 한 가지뿐입니다. 김상철의 제거지요.」
「‥‥‥‥」
「진대원은 김상철을 제거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양필성이 입맛을 다셨다.
「진대원이 죽은 이상 거래대상이 없어진 형편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용무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술병을 기울여 잔에 술을 채우던 홍기천이 빈병인 것을 깨닫고는 병을 내려놓았다.
「죽기 전에 계약을 했을 수도 있지, 이미 계약금을 받은 상태이고.」
「‥‥‥‥」
「20여 년 전에 홍콩의 부간이라는 거간꾼이 죽기 전에 흑사회의 전태대를 죽여 달라고 거금을 내놓고는 죽었다. 전태대가 일년 후에 목이 잘려 죽자 우리 삼합회에서도 그 해결자의 신의를 칭송한 적이 있었다.」
「그 해결자는 누구였습니까?」
양필성이 묻자 홍기천이 눈을 껌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모른다. 어쩌면 뜨내기 강도였는지도.」
「‥‥‥‥」
「부간이 거금을 내놓았다는 것을 본 놈도 없고 증거도 없다. 소문일 뿐이었고.」
「우리도 회원들에게 신의와 충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 사건을 미화, 과장시킨 혼적이 있다. 그러나 마파척 같은 성격의 해결자는 그것을 교훈으로 삼고 살아왔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마파척이 아직도‥‥‥」
「상관없는 일이다.」
홍기천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김상철이 파리에서 날뛰거나 쥐새끼가 구멍 드나들듯 마파척이 홍콩을 들락거리는 것에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이제 그놈들 모두 우리와는 인연이 멀어진 놈들이니까.」
「장인규의 말을 누가 믿는단 말이냐?」
신문을 내던진 유장석이 창가로 다가가 섰다. 아침 햇살이 곧게 뻗은 대로 위에 하얗게 부서지는 9월초의 맑은 날씨였다.
「그리고 장인규도 직접 들은 말이 아니지 않아?」
뒷짐을 지고선 그가 혼잣말처럼 내뱉자 이대각이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우리야 그 말을 믿고 싶지만 이거 증거로 내세울 게 있어야 말이지요.」
소파에 기대앉은 그의 말투는 가라앉아 있었다. 한국에서 공수된 신문은 연일 김상철의 파리 잠입과 살인, 박미정과의 인연에다가 근대리아에서의 활약상을 흥미 위주로 보도하고 있는 증이었다.
근대리아는 겉으로는 정상 운영이 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근대시의 상가는 기초공사가 거의 끝나 지금은 외관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투자단들이 경쟁하듯 건물을 짓기 때문인데 이미 근대리아에 진출한 각국의 건설회사만 해도 50여 개가 되어 있었다. 근대시의 골격을 만든 근대리아 측에서 건설시장을 개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부의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 행정위와 운영위의 갈등 해소를 위해 연합회를 발족시켰지만 이제까지 한 번도 순탄한 결론을 내어본 적이 없다. 운영위측은 조선족의 이주부터 제한하려 했는데 그것은 근대리아의 설립 취지부터 부정하는 입장인 것이다. 그러자 이금철을 중심으로 한 북한계 세력의 단결력이 급격히 강해졌고 세력이 커졌다. 삼합회와 마피아도 마찬가지였고 일본에서는 조총련계와 조선인 야쿠자가 밀려들어오고 있다.
경비대를 우여곡절 끝에 2천 명 늘려 7천 명 가까운 병력이 되었지만 유장석도 치안상태의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김상철이 내부를 장악했던 전에는 5천 명의 경비대만으로도 안정된 분위기였던 것이다. 유장석이 창에서 몸을 돌렸다.
「어때? 장인규의 생각은?」
「생각할 것도 없답니다. 만일 누가 끼어든다면 사업장을 정리하고 근대리아를 떠나겠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혼잣말처럼 말을 이었다.
「당연한 일이지. 죽 쒀서 개줄까?」
「전창남과 소명일은 지금 적극적으로 일을 추진하고 있어, 머지 않아 윤곽이 드러날 거야.」
「하라고 내버려 두지요, 뭘.」
불끈 눈썹을 치켜세운 이대각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그 작자들 여태껏 우리한테 그 내용을 상의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관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운영위원장 전창남과 경비본부장 소명일은 근대리아 내부 관리에 있어서 한국인의 조직화된 세력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처음에 김상철의 존재와 그의 잠재력을 부정했던 그들이었지만 지금은 경비대만으로 주민을 장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그들의 대리인과 휘하 조직을 보내 장인규가 통솔하고 있는 김상철의 세력을 흡수한다는 것이었으니 장인규가 강력히 반발할 만도 했다. 이대각이 말을 이었다.
「잘못하면 김상철의 조직마저 분해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현장을 모르는 관리 놈들의 탁상공론이오. 근대리아가 망해도 그놈들은 떠나면 끝입니다.」
「장인규의 입장은 이해하지만 그대로 둔다는 것도 위험해. 세력이 갈수록 약해지고 있어.」
유장석이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김상철의 귀향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장인규도 알아야 돼, 그나마라도 조직을 유지하려면 그런 도움이라도 있어야 한단 말이야.」
그러자 입맛을 다신 이대각이 머리를 저었다.
「아, 글쎄, 제가 입이 닳도록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그런데도 막무가내인 걸 어떡합니까? 차라리 독자세력으로 남을 테니 한국인 조직을 새로 결성하라고까지 한단 말입니다.」
「소명일이하고 같이 갔는데 아예 소명일이하고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불신하고 있었어요,」
「괜찮은 여잡니다. 남자보다 나아요.」
장인규가 전화를 받은 것은 오전 11시 정각이다. 수화기를 귀에 대고는 무의식중에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더니 정시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전화 바꿨습니다.」
「장인규 사장 맞습니까?」
나파스 클럽 사무실에 설치된 직통전화였는데 사내가 영어로 커다랗게 물었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그래요, 납니다.」
장인규는 러시아어뿐만 아니라 영어에도 익숙하다. 그러자 사내가 대뜸 물었다.
「당신은 김상철과 연락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맞지요?」
이맛살을 찌푸린 장인규가 허리를 세웠다.
「당신 누구야?」
「김상철에게 연락을 해야 할 일이 있소.」
「쓸데없는 소리하면 전화 끊겠어.」
「박미정의 생명이 달린 문제요.」
장인규가 말의 뜻을 되새기듯 잠자코 있자 사내는 말을 이었다.
「박미정이 파리에서 실종된 사건은 알고 계시지요?」
「알고 있어.」
「김상철이 한 짓으로 알고 있습니까?」
여유 있는 사내의 목소리에 그녀는 온몸을 굳혔다.
파리사건을 모르는 근대리아의 주민은 없을 것이다. 사건 소식을 듣자마자 장인규가 블라디보스토크의 송길수에게 연락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자 송길수는 그것은 다른 자의 짓이라면서 길길이 뛰었다. 김상철은 파리에 가지도 않았고 지금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들은 이대각조차도 반신반의하는 상황이었고 증거로 내세울 만한 것이 없을 뿐더러 나설 수도 없는 입장이다.
사내가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이 한 짓이오. 김상철 씨는 누명을 쓴 것이지. 나는 그래서 김상철 씨와 연락을 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박미정 씨가 갇혀 있는 곳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당신은 누구요?」
「김상철의 누명을 벗겨주고 싶은 사람으로 알면 되겠지.」
「당신 말을 어떻게 믿지?」
「믿어서 손해 볼 것이 무엇인가 계산해 보시오. 박미정의 생명과 잘 되면 김상철의 살인누명이 벗겨질 상황인데‥‥」
「근대리아 전화는 거의 전부가 경비본부의 감청을 받을 테니 다시 말해드리지요. 파리 사건은 김상철이 한 짓이 아니오, 자, 되었지요?」
「‥‥‥‥」
「내가 김상철과 직접 연락할 수 있도록 해주시오, 박미정의 생명이 달린 일이니까, 어서.」
길게 숨을 내려쉰 장인규가 입을 열었다.
「세 시간 후에 다시 연락을 해줘요. 그때 가부간에 결정을 할 테니까.」
녹음을 들은 소명일은 한동안 책상 앞에 서 있는 박환을 바라보며 입을 열지 않았다. 장인규의 통화 내용이 전화국에 파견되어 있는 경비본부 요원에 의해 녹음된 다음 보고가 된 것이다. 경비본부가 감청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대부분의 조직들은 암호를 쓰거나 때로는 군대용 무전기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이번의 통화는 장인규로서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이윽고 소명일이 박환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그는 정보담당 과장이다.
「이 내용은 기밀이야. 감청 원본을 나한테 가져오고 누설하지 말도록.」
「알겠습니다, 본부장님.」
긴장한 박환이 대답하자 소명일이 다짐하듯 말했다.
「내 말은 경비본부 내부까지 기밀이란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나?」
「예, 본부장님.」
「세 시간 후에 다시 연락을 하자고 했는데, 그때 장인규가 송길수의 연락처를 알려주겠구만, 송길수는 김상철에게 연락을 하고.」
「그럴 가능성이 많습니다.」
소명일이 찌푸린 얼굴을 한쪽으로 기울였다.
「도대체 이놈이 누구일까? 한국인은 아닌 것 같고‥‥」
「중국계나 일본계 같습니다만‥‥‥」
자신 없는 말투로 박환이 말을 이었다.
「어쩌면 조선족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박미정을 이놈이 납치했단 말인가?」
「이자는 박미정이 갇혀 있는 곳을 안다고, 그래서 김상철에게 직접 연락해서 알려주겠다고 했습니다만.」
「글쎄 그 이유가 뭘까 말이야?」
「‥‥‥‥」
「이 망할 놈이 경비본부가 전화 감청을 하고 있다는 것까지 떠들고, 그래서 김상철이 파리사건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되풀이하는 걸 보면 혹시 김상철이 쇼를 부리는 게 아닐까?」
「예, 그럴 가능성도‥‥‥」
소명일이 와락 눈을 치켜떴다
「가능성, 가능성 하지 말아, 듣기 짜증 나.」
「예, 본부장님.」
장인규가 송길수의 연락처를 알려주고 나면 그것으로 끝인 것이다. 이제 마피아의 간부가 되어 블라디보스토크에 버티고 있는 그에게로 접근해서 뭔가를 알아낼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소명일을 짜증나게 하는 이유였다.
다음 날 오후, 시내에 다녀온 이한이 2충으로 올라왔다. 방갈로 안은 조응했는데 아래층의 최복수와 정기만도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형님, 송길수한테 그자가 전화를 해왔습니다. 3일 후에 홍콩의 메리디안 호텔에 투숙해 있으면 연락하겠답니다.」
그는 김상철 앞으로 다가와 섰다.
「송길수는 부하들을 데리고 홍콩으로 가겠다고 합니다만.」
「쓸데없는 소리.」
김상철이 머리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다.」
사내는 이제 송길수에게 연락을 했고 이쪽도 송길수로부터 전해듣는 상황이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보기관의 도청 위험성은 조금 가셨다고는 하지만 이쪽은 아직 그의 신분도 모르는 형편이다.
「3일 후에 와 있지 않으면 박미정이는 없어진 것으로 알라고 했다는데요.」
「내일 아침에 홍콩으로 떠난다.」
김상철이 말하자 이한이 머리를 끄덕였다.
「예. 하지만 저희들 넷으로는 조금 불안합니다.」
「그놈이 박미정 씨를 데리고 있다지만 아직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놈이 함정을 파놓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
「송길수도 그것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노출된다면 그놈뿐만 아니라 홍콩 경찰, 한국 기관원들한테도 표적이 될 테니까요.」
이것도 송길수가 한 말일 것이다. 경찰 출신인 송길수는 치밀한 사고력을 가진 사내였다.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놈은 근대리아 내부 사정을 잘 아는 놈일 것이다.」
「예, 송길수도 그렇게 ‥‥‥」
「내가 안 가면 박미정은 위험하다.」
「예, 그것도, 하지만‥‥‥」
「이대로 이곳에 있을 수는 없다.」
그의 말을 자른 김상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스듬한 햇살을 받은 바다 위로 짙은 그늘이 덮이고 있었다.
나흘째 되는 날 아침, 박미정은 침실에서 나와 응접실을 건너 식당으로 들어섰다. 지저분한데다가 가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집이었지만 세 개의 방에 식당과 응접실까지 갖추어져 있어서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꽤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아침 8시 정각에 식탁에는 흰밥과 닭요리, 튀김과 수프 등 중국식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오늘도 진선생은 보이지 않았고 사내 하나가 주방 당번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자리에 앉은 박미정이 젓가락을 들면서 식탁에 물잔을 내려놓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저, 부탁이 있는데요.」
물론 영어이다.
사내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미안하지만 신문을 가져다 주셨으면 좋겠는데, 영자신문도 좋지만 한국신문을‥‥거리에 나가면 구할 수 있을 텐데 ….」
「TV도 없어서 조금 답답해요,」
「밖에 나갈 수가 없습니다.」
허리를 편 사내가 표정 없는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오늘 오후에 진형님이 오실 테니까 그때 말씀해보시지요.」
「미안해요. 그렇게 할게요.」
벼르고 있었던지라 그의 차가운 반응에 식욕이 떨어져버린 박미정이 흰밥에 젓가락을 댔다.
집 안에는 다행히 오래된 잡지와 신문, FM 라디오가 있었으므로 사흘 동안 그것을 읽고 들으며 지내왔다. 인터폴이 김상철은 물론이고 자신까지 추적하고 있다는 진선생의 말에 집밖으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진선생은 도착한 다음 날 용무가 있다면서 집을 나갔지만 두 사내는 집 안에 틀어박혀 외출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식당으로 마른 체격의 다른 사내가 들어서자 그들은 빠른 중국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내들이 이쪽을 힐끗거리는 걸 보면 조금 전에 자신이 한 말로 화제를 삼는 모양이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방에서 잡지를 뒤적이고 있는데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단정한 양복 차림의 진선생이 방 안으로 들어섰으므로 박미정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는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신문을 가져다 달라고 하셨다면서요?」
그녀의 앞쪽에 앉으면서 그가 부드럽게 물었다.
「네, 답답해서요, 그런데 ‥‥‥」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은 그녀가 그를 바라보았다.
「김상철 씨는 언제 오실 건가요?」
「지금 오시는 길입니다.」
「밖의 소식이 궁금하십니까?」
「네, 전화도 없다보니까· . 물론 있다고 해도 여기서는 곤란하겠지만, 집에다 연락해서 안심시켜 드리고 싶어요.」
그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곧 김사장님이 오실 텐데, 그때 다시 상의하시는 것이‥‥ 왜냐하면 전화의 발신지 추적이 되면 위험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분하고는 연락이 되셨나요?」
「그럼요, 이제 도착하실 날이 이틀 남았습니다.」
「신문은 제가 나갔다가 내일 사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때까지는 답답하시더라도‥‥‥」
「아녜요. 잡지가 많아서 그렇게 많이 답답하지는 않았어요.」
이틀만 지나면 되는 것이다. 박미정에게 바깥소식에 대한 궁금증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김상철을 중심으로 한 바깥소식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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