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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2일 맥추감사주일예배 설교내용 –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예물. / 志願する心からの献げ物。
본문; 신명기 16:9-12
신 16:9 ○"그로부터 일곱 이레를 세는데, 밭에 있는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시작하여 일곱 이레를 세십시오. 10 그리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주신 복을 따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예물을 가지고 와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께 칠칠절을 지키십시오. 11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그 곳에서, 당신들과 당신들의 아들과 딸과 남종과 여종과, 성 안에서 같이 사는 레위 사람과 떠돌이와 고아와 과부까지도 함께 주 당신들의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해야 합니다. 12 당신들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것을 기억하고, 이 모든 규례를 어김없이 잘 지키십시오."
9. あなたは七週を数えねばならない。穀物に鎌を入れる時から始めて七週を数える。10. そして、あなたの神、主のために七週祭を行い、あなたの神、主より受けた祝福に応じて、十分に、あなたがささげうるだけの収穫の献げ物をしなさい。11. こうしてあなたは、あなたの神、主の御前で、すなわちあなたの神、主がその名を置くために選ばれる場所で、息子、娘、男女の奴隷、町にいるレビ人、また、あなたのもとにいる寄留者、孤児、寡婦などと共に喜び祝いなさい。12. あなたがエジプトで奴隷であったことを思い起こし、これらの掟を忠実に守りなさい。
오늘은 우리 하치오지영광교회가 창립된 지 15년 만에 처음으로 지키는 맥추감사주일입니다. 맥추감사주일이란 한 해의 농사 중에 가장 먼저 추수하는 첫 열매인 보리를 거두고 난 것으로 감사하며 지키는 절기입니다. 이는 우리나라가 지켜 오는 독특한 교회력이면서, 동시에 구약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칠칠절, 즉 맥추절의 의미를 떠올리며 지키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출애굽기와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이 반드시 지켜야 할 세 번의 절기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유월절, 오순절이라고도 하는 칠칠절, 그리고 수장절이라고도 하는 초막절입니다. 각 절기의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과정과 가나안 땅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시기에 역사하시고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께 제사와 예배로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절기로 지켜 왔지요.
그 세 절기 중의 두 번째가 바로 ‘칠칠절’입니다. 그리고 출 23:16에서는 칠칠절을 맥추절로 지키라고 기록하고 있지요.
너희는 너희가 애써서 밭에 씨를 뿌려서 거둔 곡식의 첫 열매로 맥추절을 지켜야 한다. ... (출 23:16a)
그런데 이 칠칠절과 오순절은 같은 절기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유월절에서부터 일곱 주간(7번의 7일)을 헤아려서 지킨다고 하여 칠칠절이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마침 그 시기가 이스라엘은 전반기 농사인 보리의 수확을 시작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첫 열매를 수확한 기쁨과 감사에 대한 고백으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며 즐거움을 나누는 절기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칠칠절은 오순절로 불리기도 하는데요. 우리 기독교회의 역사에서 오순절에는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성령강림의 사건이 있었던 날로서, 성령강림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기독교회는 칠칠절인 오순절을 성경강림절로서 지키면서 또한 맥추절도 기억하며 지킵니다. 이에 대한 적지 않은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한국교회의 전통은 이 맥추절을 지킴으로 한 해의 전반부를 돌이켜보고, 감사의 마음과 그 고백으로 그 해의 후반부를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는 절기로 지키고 있는 것이지요.
특별히 보릿고개라는 경제적으로 잔혹할 정도의 궁핍과 고통의 시기를 경험했던 한국교회는 그 가난과 굶주림이라는 환난 가운데에서도 소망을 주시고 믿음으로 그 역사적인 경제의 고난을 이겨내게 하신 은혜를 감사하는 절기로서 각별한 의미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풍족하고 가난과 궁핍으로 극심한 고통과 고난을 겪는 이들이 소수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하기에 맥추감사주일의 감동을 실감 나게 체감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큰 어려움과 고난이 없는 삶을 살고 있더라도 내면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는 여전히 궁핍하고 고난스러운 일들은 계속되는 것 또한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번 주간에 여러분에게 올해의 전반기에 감사할 것을 찾아보자고 권유해 드렸습니다. 그 감사의 제목들을 주님께 올려 드리며 함께 예물을 드리자고 또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혹시 지난 주간에는 찾지 못하셨다면 이번 주간에는 꼭 찾아서 감사의 제목만이라도 꼭 주님께 봉헌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감사할 것을 찾아보자고 권유하면 감사할 것을 찾지 못하겠다고 하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어려운 일, 곤란한 일, 답답한 일, 우울한 일, 고난스러운 일, 고통스러운 일, 불편한 일, 불행한 일들을 생각하는 것이 더 쉽겠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감사에 관한 책을 쓰신 어떤 분이 이런 내용을 쓰셨습니다.
“1차원적인 감사는 조건부(If) 감사이다. 만약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되거나 더 많이 갖게 되면 감사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항상 자신이 갖지 못한 것만을 불평하는 어린아이 수준의 감사일 뿐이다.
2차원적인 감사는 무엇을 받았기 때문에(Because) 하는 감사이다. 이러한 감사는 받은 것 중에 일부를 드리는 감사다. 상대방과 비교하되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이 받은 것을 감사하는 단계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3차원적인 감사는 불행을 당해도, 힘들고 어려워도, 일이 안 되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 하는 감사이다. 이는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다.”
여러분 모두 잘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8)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는 중에 제 아내가 맥추감사예물로 드릴 감사제목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 질문을 듣고 무엇을 감사할 것인가를 잠시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감사할 것에 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구원받은 자로서 세상에서 맞닥뜨리는 여러 가지 불편, 부당함의 걸림돌을 경험하게 하시고, 그것으로써 주님을 기뻐하며 체감하게 하는 디딤돌로 삼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니 주님께 감사합니다.”
좀 멋있게 썼지요? 그런데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그랬습니다.
우리 삶에 얼마나 많은 불편함이 있고, 얼마나 많은 부조리함이 있습니까? 또 얼마나 많은 불의함과 납득할 수 없는 고생과 고난과 황당한 일들이 많이 있나요? 그러나 오히려 그러한 걸림돌들이 있음으로 주님께 찾아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 걸림돌들이 주님을 향해 눈을 들 수 있는 디딤돌이 된 것이죠.
야곱은 자신의 고약하고 거짓된 행동으로 도망을 가는 중에 루스라는 곳에서 노숙을 하게 됩니다. 한스럽고 후회스럽고 고생스런 그곳에서 돌 하나를 베개로 의지 삼아 잠을 잡니다. 그리고 그 잠자는 가운데 꿈에서 하늘로 연결된 계단을 보게 됩니다. 꿈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약속을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창 28:16-17)
야곱은 자신의 잘못된 선택과 허물, 그리고 못된 행실의 결과로 인해 생긴 갈등과 불화를 피하여 도망을 가던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야곱까지도 기억하시며 회복의 가능성을 보여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꿈에 만나고 마음과 생각을 추스르지요.
마찬가지 우리도 우리의 잘잘못의 여부와 상관없이 세상의 부조리함과 불의, 그리고 불편함으로 마음이 낙심되고 좌절하고 실망합니다. 그러나 그때가 바로 우리가 감사할 절호의 찬스입니다. 그런 불의함까지, 그런 불편함까지 경험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는 능력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것이지요. 오히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며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맥추감사주일의 감사는 이렇게 황량한 우리의 부조리한 삶에서도 생존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자원하는 예물로 드리는 감사의 절기인 것입니다.
“지선아 사랑해”를 쓰신 이지선 교수님은 최근에 발간된 자신의 책을 통해 23년 전에 만난 사고 이전의 삶으로, 그리고 그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 부조리하고, 어쩌면 불행하고 고난스러운 시기를 통해 오히려 하나님을 분명히 만나고, 새로운 삶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는 마치 욥의 고백과 같은 고백인데요. 욥은 극심하고 사악한 고난의 시기를 지나고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 42:5)
저와 여러분은 지금 어떤 불편함과 부조리함과 불의함과 그리고 불행의 걸림돌을 마주하고 있습니까? 그 걸림돌을 딛고 서면 내 앞의 장벽으로 가려졌던 시야가 열리며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놀라운 축복의 소망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것을 믿습니다. 주변 환경이 풍족하고 순탄하고 형통할 때 그 분위기를 타고 자신이 의지와 상관없이 고백하는 감사보다, 낙심하고 좌절하려는 의지를 거스른 감사가 오늘 우리가 드리는 감사의 제목들이 되는 것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10절에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들의 태도와 자세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바로 “마음에 우러나오는 예물을 가지고 오라”고 하십니다. 개역성경은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물은 바로 주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드릴 것을 명령하십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주시려는 곳은 어디일까요? 예 바로 성막, 성전이 있는 곳을 뜻하지요. 오늘날 성전은 존재합니까? 이 질문의 답은 ‘아니오’이면서 동시에 ‘예’입니다. 건물의 성전을 말하자면 ‘아니오’가 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이 머무는 성령의 전인 성전을 말씀하시자면 ‘예’가 답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이 그 성전이라고 성경은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3:16)
다시 말해 성전인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이는 교회에 자원하는 심령으로 자신의 힘을 헤아려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예물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헌금의 진정한 능력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헌금의 액수는 현실적인 의미에서 볼 때 중요하게 볼 수 있겠지만, 영적으로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뻐하며 드리는 헌금이어야 합니다.
만일 헌금이 부담되고, 헌금할 힘을 주님께서 주시지 않았다고 믿어지면 헌금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주님께서 기쁨으로 헌금할 것을 감동하게 하시고, 힘에 넘치게 헌신하여도 주님께서 길을 열어주신다는 마음이 분명하시다면 헌금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헌금의 액수를 헤아리지는 않으시지만, 분명히 헌금하는 이의 마음은 있는 그대로 받으십니다.
그런데 헌금은 단지 영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으로 드린 그 금전들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실질적으로 이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이며, 우리의 영적 가족인 교회 공동체가 우리의 현실에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여건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헌금은 더더욱 투명하고 공정하게 관리해야 하는 것이고, 우리교회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헌금하는 것이 부족하면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교회와 지체들을 통해서 채우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공동체의 경제적 부담을 우리 스스로가 감당하는 것은 매우 성경의 가르침에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일이기도 하지요. 성경은 교회 공동체도 가정과 마찬가지로 경제적인 자립을 위해서 일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살전 4:11)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살후 3:12)
교회는 단지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단체가 아닙니다. 이 땅에 복음을 전하여 사람다운 삶의 본을 보이는 공동체입니다. 또한 복음을 믿는 주님의 성도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붙들고 살 수 있게 서로 돕는 가족 공동체이기도 합니다. 현실 안에서 존재하기 위해 현실적인 재정적 힘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교회를 건사하기 위해서만 헌금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헌금이라는 예물을 통해 우리가 주님께 감사한 것을 고백합니다. 감사하고 사랑하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이 땅의 현실에서 이루기 위해 눈에 보이는 재정적인 헌신으로 동참하는 것입니다. 돈을 모아야 하기에 억지로 헌금하거나, 어떤 심리적 서비스를 받았기에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 해의 중간을 지내며 내게 허락하신 모든 것에 감사한 마음으로 예물을 주님의 이름을 두시기로 약속하신 곳에 드리는 것이 헌금의 진정한 정체성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정성과 감사의 고백으로 교회는 이 땅에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의 사명에 헌신할 수 있는 현실적인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내 삶의 모든 경험들과 열매들에 감사함으로 헌신하여 주님께 기쁨이 되는 존재로 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며 이 세상의 그 어떤 부조리한 환경에서도 감사할 것을 찾는 눈이 열리시길 축복합니다. 풍족하지 않는 일상에서 단지 생존을 위한 보리 한 줌을 열매로 주신 것에도 기뻐하며 감사함으로 즐거워할 수 있는 믿음을 저와 여러분에게 채워주시길 기도합니다. 또한 불의하고 불안하며 불편한 현실의 걸림돌을 견딤으로 오히려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지평을 볼 수 있는 내면의 디딤돌을 삼을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채워주시길 또한 축복합니다. 우리가 자원하여 기쁨으로 드린 이 예물들과 헌신이야말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현실적으로 증언하고 고백하는 실질적인 자원이 되는 것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마음이 우리의 어떤 기가 막힌 현실과 마주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수 있는 강력한 심령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런 견고한 내면으로 언제나 예수님과 동행하는 감격스러운 일상을 누리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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