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고려와 거란과의 전쟁 답④
흥화진은 거란의 1차 침입(993) 당시 서희가 외교 담판으로 획득하고 개척한 강동 6주(흥화진, 용주, 귀주, 통주, 철주, 곽주)의 하나였으며, 양규는 거란의 2차 침입 당시 활약하였던 인물입니다.
따라서 (가)에 들어갈 내용은 거란입니다.
중국의 5대 10국의 혼란을 틈타 거란이 요를 건국한 후(916) 발해를 멸망시키고(926) 연운 16주를 차지하여 세력을 떨쳤습니다.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적대시하며 배척하였어요. 송이 중국 대륙을 통일하자 고려는 송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거란은 송을 공격하기에 앞서 고려와 관계 개선을 시도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하였습니다(993). 이때 서희는 소손녕과 회담하여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알리고, 북방 지역의 교통로를 확보하면 송과의 관계를 끊고 거란과 교류하겠다고 약속하자 거란은 압록강 일대에 6개의 성(강동 6주)을 쌓아 고려의 영토로 편입하는 것을 승인하고 물러갔어요.
그러나 고려가 송과 친선 관계를 계속 유지하자, 강조의 정변을 구실 삼아 거란이 다시 침입하였습니다. 이때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이 나주까지 피난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어요. 그러나 곽주 등에서의 양규군의 활약에 위협을 느낀 거란은 고려가 신하의 예를 갖춘다는 조건을 제시하자, 이를 받아들이고 물러갔습니다.
이후 거란은 현종의 입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고려가 이를 거절하자 다시 침입하였습니다. 거란군은 개경 근처까지 진출했지만 고려군의 저항에 부딪혀 퇴각하였고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은 귀주에서 퇴각하는 거란군을 크게 물리쳤어요(귀주 대첩, 1019). 이후 고려·송·요 사이에 세력 균형이 이루어졌으며, 고려는 개경에 나성을 쌓고 압록강 입구에서 동해의 도련포에 이르는 지역에 천리 장성을 쌓아 북방 민족의 침략에 대비하였습니다.
① 윤관은 별무반을 조직해 동북 지방 일대에 있던 여진족을 몰아내고 동북 9성을 축조하였습니다(1107).
② 김윤후는 몽골의 2차 침입(1232) 당시, 처인성(용인) 전투에서 승군과 부곡민들을 이끌고 살리타를 사살하여
몽골군을 퇴각시켰습니다.
③ 최무선은 화포를 이용하여 진포(금강 하구)에 침입한 왜구와 적선 500척을 격퇴하였습니다(진포 대첩, 1380).
④ 거란의 2차 침입 직후 거란을 불력으로 물리치기 위한 염원을 담아 초조대장경을 조판하였습니다(1011~1087).
⑤ 공민왕은 원이 차지하고 있던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하였습니다(1356).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거란의 침입과 격퇴
①제1차 침입(성종 12년, 993):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여, 고려가 차지하고 있는 옛 고구려 땅을 내놓고 송과 교류를 끊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외교 담판에 나선 서희가 거란과 교류할 것을 약속하는 대신,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인정받고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확보하였다.
②제2차 침입(현종 원년, 1010): 고려가 송과의 외교 관계를 끊지 않자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삼아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왔다. 개경이 함락되었으나 양규가 후방에서 선전하자 거란군은 고려 현종의 친조를 조건으로 물러갔다.
③제3차 침입(현종 9년, 1018): 거란은 소배압이 10만 대군으로 침입해 왔으나 귀주에서 강감찬 등이 지휘하는 고려군에게 섬멸되었다(귀주 대첩, 1019).
④ 거란과의 전쟁 결과: 고려와 송, 거란 사이에는 세력 균형이 유지되었다. 고려는 개경에 나성을 쌓아 도성 수비를 강화하였으며, 압록강 어귀에서 동해안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아 거란과 여진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고려와 여진
①윤관의 동북 9성 축조: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편성한 다음, 여진족을 북방으로 밀어 내고 동북 지방 일대에 9개의 성을 쌓았다(1107). 그러나 수비상의 여러움 등으로 다음해에 여진족에게 돌려주었다.
②금의 건국과 압박: 여진족은 세력을 키워 만주 일대를 장악하고 금(金)을 건국하였으며(1115), 거란(요)을 멸망시킨 뒤(1125) 고려에 군신 관계를 요구해 왔다. → 당시 집권자였던 이자겸이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고, 금과 무력 충돌을 피하기 위해 금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몽골의 침입과 항쟁
제1차 침입(1231) | 의주를 점령 → 귀주성에서 박서의 저항 → 길을 돌려 개경 포위 → 몽골의 요구 수용 |
제2차 침입(1232) | 몽골의 무리한 요구에 반발, 최우가 강화로 천도(백성은 산성, 섬에 들어가 항쟁하도록 지시) 후 몽골의 침입에 항전, 처인성(용인) 전투에서 처인 부곡민의 항전, 김윤후가 살리타 사살, 대구 부인사에 보관 중이던 초조대장경 소실 |
제3차 침입(1235~39) | 황룡사 9층 목탑 소실, 팔만대장경 조판 시작 |
제4차 침입(1247) | 몽골의 침입, 원 황제의 죽음으로 철수 |
제5차 침입(1252) | 충주성에서 김윤후의 승전 |
제6차 침입(1254~59) | 충주성 부근 다인철소민의 승리, 쌍성총관부 성립(1258, 철령 이북 빼앗김) |
몽골과의 강화(1259) | 고려를 직속령으로 완전히 정복하려던 계획 포기 |
■ 삼별초의 대몽 항쟁(1270~1273)
① 배경: 무신 정권의 붕괴와 몽골과의 굴욕적 강화에 반발
② 항쟁: 강화도(배중손의 지휘) 진도(용장성 쌓고 저항) 제주도(김통정의 지휘)
③ 의의: 항몽 사상과 자주성 보여줌, 일부 민중의 지지로 장기 항쟁이 가능했음
몽골의 칸, 쿠빌라이가 인정한 고려의 대몽 항쟁 뒤에 원종으로 즉위한 고려의 태자가 1259년에 강화를 위해 원의 쿠빌라이를 만났다. 그 때 쿠빌라이는 "고려는 만 리나 되는 나라이다. 옛날 당 태종도 몸소 쳐들어갔으나 항복받지 못했는데, 이제 그 세자가 스스로 왔으니 하늘의 뜻이다."라고 하면서 크게 반가워했다. 그는 고려의 끈질긴 항쟁으로 고려를 완전히 굴복시키지 못한 사실을 이렇게 표현하면서 앞으로 고려의 제도와 풍속을 존중하겠다는 정책을 밝혔다. |
고려 시대 국경선의 변화
미래엔 교과서 자료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의 격퇴
유사 기출문제
거란과 관련된 문제
23회 고급 10번 문제
10. 서희의 업적 답③
고려 시대의 대외 관계는 거란(요) → 여진(금) → 몽골(원) → 홍건적과 왜구와의 순으로 전개되었다는 흐름을 먼저 파악해 두어야 합니다.
문제에 제시된 자료에 '고려 초의 문신으로 993년(거란의 1차 침입)에 외교로써 군사적 충돌을 막고 영토를 확장(강동 6주)한 인물'이라고 나와 있으니, 이 인물은 거란의 1차 침입 때 거란과 외교 담판을 통해 강동 6주를 획득한 서희입니다.
성종 12년 거란이 고려를 침략하였다. 소손녕이 서희에게 말하였다.“그대의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으니, 고구려 땅은 우리의 땅인데 당신들이 침범하였다. 또, 우리와 국경을 마주하면서도 송을 섬겼기에 출병한 것이다.”서희가 대답하였다. “아니다. 우리나라는고구려를계승하였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였다. …… 압록강 동쪽의 여진을 내쫓고 우리 옛 땅을 돌려준다면 어찌 서로 왕래하지 않겠는가?”
① 충렬왕 때 원이 서경(평양)에 설치하였던 동녕부(1270~1290)를 고려에 반환하였습니다.
② 4군 6진은 세종 때 최윤덕과 김종서가 개척하였습니다.
세종 때에는 북방의 여진을 몰아내고 4군(최윤덕, 1433)과 6진(김종서, 1449)을 설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오늘날과 같은 국경선을 확정하였습니다.
③ 거란 1차 침입 때 서희가 외교 담판를 통하여 거란의 후퇴와 강동 6주를 획득하였어요.
④ 동북 9성은 예종 때에 윤관이 별무반을 조직해 동북 지방 일대에 있던 여진족을 몰아 내고 축조하였어요(1107).
⑤ 공민왕은 무력으로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하였어요(1356).
쌍성총관부는 몽골이 철령 이북의 땅을 다스리기 위해 1258년에 설치한 관부였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21회 고급 20번 문제
20. 의주(義州)의 역사 답③
회차마다 해설을 하면서 계속 강조하지만, 특정 지역의 역사, 유물을 파악하는 문제는 꼭 1문 이상씩 출제되는 중요한 유형이니, 유사문제까지 집중에 풀어보세요.
역사를 공부할 때, 역사의 무대에 해당하는 지역을 알아두는 것이 필요하죠. 지리부도나 역사부도 등을 통해 우리 역사의 무대가 되었던 지역, 주요 도시 등의 위치를 파악해두는 것이 좋아요. 부도를 보고 숨은그림 찾기를 하듯 서로 찾아보기를 하면 재미있게 지역을 익힐 수 있습니다. 이런 방법을 통해 여기가 평양, 의주, 한양, 공주, 부여, 대구, 경주 등을 정확히 알 수 있어야 해요. 그 다음에 그 지역에 있었던 주요 역사적 사실이나 유물 등을 공부하면 됩니다.
이런 방법으로 공부한 분은 지도에 제시된 (가)가 설명을 읽지 않고도 의주임을 알 수 있어요(제시된 설명은 의주를 차악하는 데 그다지 도움을 주지 못하네요.). 만약 헛갈리면 답지 중에 다른 지역을 가르키는 것을 찾아내면 되겠죠?
지도에서 알 수 있듯 압록강 하류에 위치한 의주는 중국으로 가는 국경 관문이었어요.
의주와 관련하여 시대별로 살펴보죠.
삼국 시대에는 의주 맞은편인 압록강 너머에 있는 서안평을 점령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배웠죠?
고려 전기에는 거란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거란의 1차 침입(993) 당시 서희의 외교적 노력으로 강동 6주를 획득하면서 고려의 영토가 되었어요. 고려는 이때 획득한 압록강~청천강 하류 지역에 강동 6주를 설치하였는데, 흥화(의주)·용주(용천)·통주(선천)·철주(철산)·귀주(구성)·곽주(곽산)가 그것이었어요.
고려 말 우왕 때에 명이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려 하자, 최영은 이성계를 시켜 요동 정벌을 단행하였는데, 이성계는 위화도(의주 소속)에서 회군하여(1388) 최영을 제거한 뒤,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고 이후 조선을 건국하였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임진왜란 당시(1592)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피난을 가기도 했습니다(의주 파천).
조선 후기에는 사상이었던 만상이 의주를 중심으로 대청 무역을 주도하면서 재화를 많이 축적하였습니다.
① 거란의 1차 침입 당시 서희는 거란 장수 소손녕과의 외교적 담판을 통해 이 지역을 포함한 강동 6주를 획득하였어요.
② 이성계는 명을 공격하러 가기 위해 의주에 속한 위화도에 군대를 주둔하였다가 회군하여 실권을 장악하였습니다.
③ 김종서가 여진족을 몰아내고 개척한 6진은 두만강 하류 일대인 종성, 온성, 경원, 경흥, 회령, 부령이었어요.
④ 선조는 임진왜란 때 왜군을 피해 평양, 의주까지 피난하여야 했습니다.
⑤ 만상은 의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대창 무역을 주도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12회 고급 47번 문제
47. 의주, 단동 지역의 역사 답②
이런 유형의 문제들은 자주 출제됩니다.
12회 시험 3번 문제도 이러한 유형 중의 하나였죠?
특정 지역을 표시하고 그 지역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통시대적으로 묻거나, 그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유물들을 묻는 문제들이 자주 출제됩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교재에서 다뤄주기 힘든 부분입니다.
그 지역과 관련된 여러 사실들, 여러 시대의 관련 사실들을 스스로 조직해 풀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평양 지역, 강화도 지역, 원산 지역, 서울이나 한강 유역, 충주 지역, 공주나 부여, 경주 지역, 고령이나 김해 지역 등을 표시하고 관련 사실들을 묻거나 유물을 묻는 문제들이 출제될 수 있으니 공부할 때 스스로 이러한 부분들을 정리, 조합해 보는 연습을 해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자 그럼 이 문제를 풀어볼까요?
지도에 표시된 지역은 한반도의 신의주 지역, 그리고 중국의 단둥 지역입니다.
이 지역과 관련한 탐구 활동을 하려면 이 지역과 연관이 있는 내용이어야 하니 살펴봅시다.
① 이륭양행...어디서 많이 들어봤죠?
이륭 양행은 아일랜드 사람인 쇼가 중국 단둥에 설립(1919. 5)한 무역회사 대리점이었습니다.
여기 사무실 2층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교통국 산하 단둥 교통국을 두어 비밀리에 군자금을 운반,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어요. 부산에 있던 백산 상회가 같은 역할을 했답니다.
쇼는 1920년에 의열단의 무기 수송을 돕다가 발각되어 일제에 체포되었답니다.
② 서전서숙은 이상설 등이 중국 길림성 연길현 용정에 설립(1906)한 민족 교육 기관이었어요.
아래 지도를 보면 도움이 되겠네요.
③ 용암포는 압록강 하구의 항구로, 러시아는 이를 강제 점령하고 조차해줄 것을 요구하였던 사건(1903)입니다.
④ 거란의 1차 침입(993) 당시 서희는 거란 장수 소손녕과의 외교적 담판을 통해 강동 6주를 획득하였어요.
강동 6주는 아래 지도를 참고하세요.
⑤ 후금의 1차 침입인 정묘호란(1627) 때 정봉수와 이립 등은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연합해 후금과 싸웠어요.
정봉수는 용골산성에서 큰 전과를 올렸어요.
따라서 지도에 표시된 지역과 관계없는 내용은 ②번, 정답은 ②번입니다.
3회 2급 10번 문제
10. 태조 왕건의 북진 정책 답③
고려 태조 왕건의 정책을 알아보는 문제네요.
신라의 김부(경순왕)나 후백제의 견훤이 고려에 귀부하기 전에도 고려 태조가 서도(서경)에 행차해 북방을 순수하고 (고구려)옛 땅을 되찾고자 했다고 나와 있네요.
이는 태조 왕건의 여러 정책 중 북진 정책을 의미합니다.
태조 왕건은 건국(918) 직후부터 고구려 옛 영토 회복을 위한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나라 이름도 옛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뜻으로 고려라 하였죠.
태조는 고구려의 수도였던 서경(평양)을 중시하여 이곳을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삼았습니다. 태조는 서경에 자주 들러서 북방 지역을 순시하며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또, 고구려의 영토를 차지한 거란을 무도한 나라로 여기고 적대시하였습니다(만부교 사건).
이러한 북진 정책의 결과로 태조 말년에는 청천강에서 영흥에 이르는 국경선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① 태조는 건국 직후부터 고구려 영토를 회복하려는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한 것도 옛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지은 것이죠.
② 만부교 사건(942)은 거란(요)이 낙타 50필을 보내자 태조 왕건이 사신은 섬으로 유배 보내고 낙타는 만부교에서 굶겨
죽인 사건입니다.
이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적대시하고 북진 정책의 의지를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③ 고려 태조 당시 여진족은 큰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흩어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태조 때 북진 정책에 위협이 되는 북방 민족은 나라(요)를 세운 거란족이었습니다.
여진은 동북 9성 반환(1109) 이후부터 급속도로 성장하였습니다.
④ 고려의 3경(京)은 개경(개성), 서경(평양), 동경(경주, 후일 남경(서울))인데, 서경은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중시되
었습니다.
⑤ 태조는 북진 정책을 추진하며 북방 영토를 넓혀 청천강~영흥에 이르는 국경선을 확보하였습니다.
이는 신라 통일 직후의 대동강에서 원산만 국경보다 북쪽으로 확장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에 대한 문제도 제시합니다.
금과 관련된 문제
24회 고급 12번 문제
12. 고려 숙종(1095~1105)의 업적 답②
문제의 자료에 숙종이라고 나와 있네요.
조선 시대 숙종이 더 유명하니 헛갈릴 수도 있으나, 동생이자 승려인 의상, 윤관 등이 등장하니 고려 시대 숙종임을 알 수 있어요.
그리고 [보기]에는 조선 숙종의 업적이 제시되어 있지 않네요.
숙종은 즉위 초 개경에서 남경(지금의 서울)으로 도읍을 옮기려는 남경 천도론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숙종은 동생 대각국사 의천의 주전론(화폐 주조론)을 받아들여 삼한통보, 해동통보, 해동중보 등 동전과 활구(은병)라는 은전을 만들어 유통시켰으나, 널리 유통되지 못하였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여진족이 점차 강성해져 고려 국경에 출몰함으로써 군사 충돌이 자주 일어났어요. 이에 1104년에 윤관 등 숙종이 임명한 측근들을 중심으로 여진 정벌이 이루어졌지만 예상외로 완강한 여진의 저항으로 1차 정벌은 실패합니다. 이에 윤관은 숙종에게 건의하여 별무반을 편성합니다 이듬해 숙종이 서거하자 즉위한 그의 아들 예종은 부왕의 유지를 계승하여 즉위 2년(1107) 윤관을 사령관으로 하여 제2차 여진 정벌을 단행하여 여진을 몰아내고, 동북 지역에 9성을 수축하게 되죠.
ㄱ - 고려는 숙종 때 윤관의 지휘 아래 여진 정벌군을 파견하였으나 기병 위주의 여진에게 패하게 됩니다.
이에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신기군(기병), 신보군(보병), 항마군(승병)으로 구성된 별무반을 창설합니다.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족을 북방으로 밀어 내고 동북 지방 일대에 9개의 성을 쌓았습니다(1107).
ㄴ - 삼별초는 최씨 정권기에 조직된 군대입니다.
최우가 치안 유지 등 야간 경비를 위해 설치한 야별초가 확대된 것으로 좌별초, 우별초, 그리고 몽골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군사들로 신의군(神義軍)을 조직, 이를 좌 ·우별초와 합하여 조직한 군대입니다.
삼별초는 최씨 무신 정권을 유지하는 사병적 요소도 있었습니다만, 대몽 항쟁기에는 대몽 항쟁을 이끌었습니다.
ㄷ - 고려는 성종 때 철전인 건원중보를 만들었고 숙종 때에 삼한통보, 해동통보, 해동중보 등 동전과 활구(은병)라는
은전을 만들었으나, 널리 유통되지 못하였습니다.
ㄹ - 노비안검법을 실시한 것은 광종입니다.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실시해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수입 기반을 확대하였어요. 또한 과거제를 시행하여
유학을 익힌 신진 인사를 등용하여 신구 세력의 교체를 도모하였어요. 지배층의 위계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국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황제를 칭하고, 광덕, 준풍 등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ㄱ, ㄷ으로 묶인 ②번입니다.
고려 시대의 화폐
① 건원중보 : 성종 때 발행된 철전
② 활구, 해동통보(해동중보), 동국통보, 삼한통보 : 숙종 때 발행(의천의 건의가 영향을 줌)
③ 저화 : 공양왕 때(1391) 발행된 종이 화폐
22회 고급 18번 문제
18. 별무반 답②
문제에 제시된 사료를 보면, '이 부대'는 기병의 필요성에 의해 편성된 부대, 신기군, 신보군, 항마군으로 편성되었다고 나와 있네요.
이렇게 편성된 특수 부대는 별무반이고, 별무반은 윤관의 건의로 여진을 정벌하기 위해 편성하였다는 것 알고 계시죠?
말갈이라 불리던 여진족은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말과 화살 등을 바쳤고, 고려는 식량과 농기구 등을 주어 그들을 경제적으로 도와 주면서 회유 정책을 펴서 포섭하였지요. 그러나 12세기에 거란이 쇠퇴하자, 여진족이 점차 강성해져 완옌부가 여진족을 통일하면서 그 세력이 천리장성 부근까지 남하하여 고려와 충돌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고려는 숙종 때 윤관의 지휘 아래 여진 정벌군을 파견하였으나 기병 위주의 여진에게 패하게 됩니다. 이에 고려는 기병 부대인 신기군, 보병 부대인 신보군, 승병 부대인 항마군으로 구성된 별무반이라는 특별 부대를 편성합니다. 즉 문무 산관(文武散官) 서리로부터 군민, 현민에 이르기까지 말을 가진 자는 기병인 신기군, 말을 갖지 못한 자와 20세 이상의 남자로 과거를 준비하는 자가 아닌 사람은 보병인 신보군, 그리고 승려들은 항마군으로 편성하였죠.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 정벌을 단행하여 여진족을 물리치고 동북면 지역에 9성을 설치하였습니다(1107). 그러나 여진족이 잃은 땅을 돌려주기를 간청하는데다 방비하기도 어려워 9성을 곧바로 돌려줍니다(1109).
① 2군 6위는 고려의 중앙군이었습니다.
2군은 국왕의 친위 부대, 6위는 수도 경비와 국경 방어를 담당하였어요.
② 별무반은 여진을 정벌하기 위해 조직한 특별 부대였습니다.
③ 별무반은 상비군이 아니라 임시로 조직된 부대였어요.
고려 시대 일정한 급료를 받는 상비군으로는 2군 6위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대개 직업 군인으로 편성되었는데,
군적에 올라 군인전을 지급받고 그 역은 자손에게 세습되었습니다.
④ 도방과 삼별초에 대한 설명입니다.
경대승이 처음 설치한 도방은 삼별초와 함께 최씨 정권을 유지하는 핵심 군사적 기반이었어요.
⑤ 몽골에 끝까지 항전한 삼별초에 대한 설명이죠.
고려 정부가 몽골과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자, 대몽 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 아래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들은 장기 항전을 계획하고 진도와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대몽 항쟁을 계속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19회 고급 13번 문제
13. 고려의 금에 대한 사대 요구 수용(1125) 답②
고려가 건국, 발전한 시기에는 거란(요), 여진(금), 몽골(원) 등의 북방 유목 민족 국가들이 차례대로 국가를 세우고 강성하였습니다.
건국 초에는 거란이 고려 중기에는 여진이, 고려 후기에는 몽골이 고려에 침입 또는 위협을 가하였죠.
제시된 장면을 보면, 금이 군신 관계를 요구했고, 조정에서는 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장면이니, 이를 이해하기 위한 탐구 활동을 찾으면 되겠네요.
고려의 동북방에는 한때 말갈이라 불리던 여진족이 부족 단위로 흩어져 반독립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고려는 이들에게 교역을 허용하는 등 경제적 도움을 주면서 회유, 포섭하는 정책을 폈어요.
그러나 12세기 초 부족의 통일을 이룬 여진족이 고려의 국경까지 남하하면서 고려군과 자주 충돌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고려는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신기군, 신보군, 항마군으로 구성한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편성해 여진족을 북방으로 밀어 내고 동북 지방 일대에 9개의 성을 쌓았습니다(1107).
여진족은 그 후에 더욱 세력을 키워 만주 일대를 장악하고 금을 건국하였으며(1115), 거란을 멸망(1125)시킨 뒤 고려에 군신 관계를 요구해 왔습니다. 조정에서는 논란이 치열하게 일어났으나, 당시 집권자였던 이자겸이 금과 무력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였습니다(1125).
①, ③ 몽골과 관련된 탐구 활동입니다.
강동의 역(1219) 이후 고려에 무리한 요구를 일삼던 몽골은 고려를 방문했던 몽골 사신 저고여가 귀국길에 피살된
사건(1225)을 구실로 대군을 이끌고 침략합니다(1231). 이후 고려는 약 40여 년 동안 대몽 항쟁을 전개하게 됩니다.
당시 최씨 무신 정권을 이끌던 최우는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1232), 항전과 외교를 병행하면서 저항하였습니다.
② 금이 고려에 군신 관계를 요구할 당시 고려에서는 이자겸이 집권하였을 때입니다.
④ 고려 말 공민왕(1351~1374)은 원·명 교체기의 혼란 상황을 이용하여 반원 자주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⑤ 명이 철령위를 설치하고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려고 한 때는 고려 말 우왕(1374~1388) 때입니다.
이를 계기로 최영은 이성계를 시켜 요동 정벌을 단행하였으나(1388),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을 제거한
뒤,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여 본격적인 개혁의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13회 고급 24번 문제
24. 고려와 여진과의 관계 답①
이 문제는 주어진 자료에서 (가) 세력이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답지에서 답은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자료에서 '송 황제'라는 것에서 이 시기가 중국의 송나라, 그러니 우리나라는 고려 시대임을 파악할 수 있어요.
두번째 자료에서 '전성기를 맞아 우리나라를 신하라고 부르게 하고자 하였다. 윤언이(윤관 아들)……우리나라 사람들의 자손……신복이 되어 차례로 임금께 조공을 바쳐 왔고'라는 내용들에서 이 나라가 여진(금)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여진에 대해 살펴보죠.
고려 초 동북방에는 한때 말갈이라 불리던 여진족이 부족 단위로 흩어져 반독립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진은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말과 화살 등을 바쳤고, 고려는 식량과 농기구 등을 주어 그들을 경제적으로 도와 주면서 회유 정책을 펴서 포섭하였지요.
그러나 12세기에 거란이 쇠퇴하자, 여진족이 동북 아시아 지역에서 점차 강성하기 시작하여 완옌부가 여진족을 통일하면서 그 세력이 천리장성부근까지 남하하여 고려와 충돌하게 됩니다.
이에, 고려는 숙종 때 윤관의 지휘 아래 여진 정벌군을 파견하였으나 실패하자, 기병 부대인 신기군, 보병 부대인 신보군, 승병 부대인 항마군으로 구성된 별무반이라는 특별 부대를 편성합니다. 그리하여 예종때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 정벌을 단행하여 여진족을 물리치고. 동북면 지역에 9성을 설치하였습니다(1107). 그러나 여진족이 잃은 땅을 돌려주기를 간청하는데다 방비하기도 어려워 9성을 곧바로 돌려줍니다(1109).
여진족은 그 후에 더욱 세력을 키워 만주 일대를 장악하고 금을 건국하였으며(1115), 거란을 멸망시킨 뒤(1125) 고려에 군신 관계를 요구해옵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논란이 치열하게 일어났으나, 당시 집권자였던 이자겸이 금과 무력 충돌을 피하기 위해 중신(윤관의 아들 윤언이 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금과 사대의 예를 맺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고려와 금은 평화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북진 정책은 한동안 중단될 수밖에 없었지요.
② 고려가 화포를 이용해 외적을 물리친 첫 싸움은 진포 싸움입니다.
최무선은 화포를 개발하고 이를 이용하여 진포 싸움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렀습니다(1380).
③ 비단, 약재, 서적, 자기는 고려가 송에서 수입한 물품입니다.
고려는 여진에 농기구, 곡식, 포목 등을 수출하고, 은, 모피, 말 등을 수입하였습니다..
④ 서희의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획득한 것은 거란의 1차 침입 때(993)입니다.
⑤ 정동행성 설치는 몽골(원)과 관계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4회 고급 18번 문제
18. 윤관의 동북 9성과 관련된 내용 답④
문제에 제시된 첫번째 자료는 윤관이 여진족을 북방으로 몰아내고 동북 9성을 개척(1107)한 후 영토를 표시하는 비석을 세우는 장면을 그림 그림(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나옵니다.),
두번째 자료인 지도는 동북 9성의 위치에 대한 학자들의 설(함흥이라는 설과 두만강 일대라는 설)을 표시한 것입니다.
따라서 두 자료 모두 동북 9성 개척, 즉 고려와 여진과 관련된 자료들이니 이와 관련 있는 사료를 찾으면 되겠네요.
ㄱ - 거란의 1차 침입(993) 당시 서희가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 외교 담판 과정에서 한 말로, 서희는 외교 담판으로
강동 6주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ㄴ - 별무반은 윤관의 건의로 여진을 정벌하기 위해 편성한 특수 부대죠?
별무반은 문무 산관(文武散官) 서리로부터 상인, 복예 및 주민, 부민, 군민, 현민에 이르기까지 말을 가진 자는 기병
인 신기군, 말을 갖지 못한 자와 20세 이상의 남자로 과거를 준비하는 자가 아닌 사람은 보병인 신보군, 그리고
승려들은 항마군으로 편성하였습니다.
ㄷ - 쌍성총관부 회복은 몽골(원)과 관계 있습니다.
ㄹ - 고려사 윤관전에는 윤관이 정복한 동북 9성에 대해 동으로는 화곶령(火串嶺)에 이르고 북으로는 궁한이령(弓漢伊
嶺)에 이르며 서로는 몽라골령(蒙羅骨嶺)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ㄴ, ㄹ로 묶인 ④번입니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과 관련된 문제
27회 고급 12번 문제
12. 묘청의 난 답③
지도를 보면 1135년 서경을 중심으로 일어난 난, 1136년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의 서경 점령이 나타나 있으니,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자겸 집권 당시 금의 요구에 굴복해 군신 관계를 맺었고, 이자겸의 난으로 궁궐이 불타면서, 왕의 권위는 실추되고 민심도 크게 동요하였습니다. 인종은 이자겸의 난을 수습한 뒤 보수적 문벌 귀족을 견제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며 국방력을 강화하려는 개혁을 추진하였어요. 당시 인종의 측근 세력은 윤언이 등 소수의 개혁적 문벌 귀족과 묘청, 정지상 등 서경 세력이었습니다.
도참 사상을 수용한 승려 묘청은 황제를 칭하고(칭제) 연호를 사용할 것(건원)과 풍수지리설에 바탕을 두고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고 금을 정벌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인종은 묘청의 주장에 동조하여 서경에 대화궁을 짓고 그 안에 토착 신을 섬기는 팔성당을 설치하였어요. 그러나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개경 귀족 세력은 도참사상을 배격하고 기존의 유교 질서를 유지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서경 천도가 불가능해지자, 묘청은 서경에서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고 하여 난을 일으켰어요(묘청의 난, 1135). 이들은 서북 지방의 대부분을 점령하는 등 한때 위세를 떨치기도 했지만, 김부식은 정지상 등 서경 천도를 지지한 세력을 제거하고 반란 진압에 나서 1년 만에 진압하였습니다.
① 을지문덕은 수의 별동대 30만 대군을 살수(청천강)에서 크게 무찔렀습니다(살수대첩, 618).
② 당이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신라는 당을 상대로 하는 고구려 부흥 운동을 지원하면서 나·당
전쟁을 벌여 매소성 싸움(675)과 기벌포 싸움(676)에서 승리를 거두고 당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었습니다.
③ 묘청을 비롯한 서경 세력이 서경 천도와 금국 정벌을 주장하며 난을 일으키자, 김부식은 관군을 이끌고 이를
진압하였습니다.
④ 거란은 2차 침입 이후 현종의 입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고려가 거절하자 다시 침입하였습니다.
강감찬은 거란의 3차 침입을 귀주에서 크게 물리쳤습니다(1019).
⑤ 공민왕 당시 홍건적은 두 차례 고려에 침입하였는데, 2차 침입(1362) 당시에는 개경까지 침입하여 공민왕이
안동까지 피난 가는 위기를 겪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18회 고급 12번 문제
12.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이 일어난 시기 답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도 자주는 아니지만, 종종 출제됩니다.
문제 난이도도 어렵지 않게 출제되는 편이니 출제되면 꼭 맞을 수 있도록 공부해 두세요.
'서경에 궁궐을 세워 거처를 옮기면'은 서경 천도를 주장하는 내용이고, '칭제 건원할 것'을 주장하고 있으니, 이 두 가지 사실로 서경 천동 운동(1135)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자겸의 난(1126) 이후, 인종은 왕권 강화와 민생 안정 등을 목표로 한 정치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개경 중심의 보수적 관리들과 묘청, 정지상을 중심으로 한 지방 출신의 개혁적 관리들 사이에 대립이 벌어졌습니다. 묘청 세력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평양)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주장하며 서경에 대화궁이라는 궁궐을 짓고, 황제를 칭할 것과 금을 정벌하자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김부식이 중심이 된 개경 귀족 세력들이 이를 반대하자 묘청 세력은 서경에서 난을 일으켰으나(1135), 김부식이 이끈 관군의 공격으로 약 1년 만에 진압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개경파와 서경파의 비교
인물 | 사상 | 대외 정책 | |
개경파 | 김부식 중심의 중앙 귀족 | 보수적 유교 사상, 신라 계승 의식 | 금의 사대 요구 수용 |
서경파 | 묘청, 정지상 등의 지방 세력 | 전통 사상(풍수지리설), 고구려 계승 의식 | 자주적, 진취적 (칭제 건원, 금국 정벌) |
13회 고급 10번 문제
10.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답①
문제에 제시된 사료는 국사 공부할 때 봤던 것이고, 또 시험에도 자주 나오는 자료라서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겁니다.
'서경 전역(戰役)', '일천년래 제일대사사건'이라는 개념, 거기에 사료 출처가 신채로가 저술한 <조선사연구초>라고 제시되어 있으니 묘청의 서경 천동 운동에 대한 것임을 금방 알 수 있죠?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도 자주 나오는 문제입니다.
잘 알아두고 이런 문제 나오면 꼭 맞자구요.
사료의 (가)에 들어갈 인물은 김부식, (나)는 묘청입니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에 대해 써머리해보자구요.
이자겸의 난 이후, 인종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며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 개혁을 추진합니다. 이 과정에서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 관리들과 묘청, 정지상을 중심으로 한 지방 출신의 개혁적 관리들 사이에 대립이 생깁니다. 예나 지금이나 보수와 진보는 개혁의 방향을 놓고 대립하는 것은 똑같네요. 김부식이 중심이 된 개경 귀족 세력은 유교 이념에 충실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확립하자고 주장하였습니다. 반면, 묘청 세력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평양)으로 도읍을 옮겨, 보수적인 개경의 문벌 귀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자주적인 혁신 정치를 시행하려 하였습니다. 이들은 서경에 대화궁이라는 궁궐을 짓고, 황제를 칭할 것과 금을 정벌하자고 주장하였지요. 그러나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개경 세력의 반대로 서경 천도를 통한 정권 장악이 어렵다는 것을 파악한 묘청 세력은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 하며 서경에서 난을 일으킵니다(1135). 그러나 김부식이 이끈 관군의 공격으로 난은 약 1년 만에 진압됩니다.
이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의 성격을 규정하면, 문벌 귀족 사회 내부의 분열과 지역 세력 간의 대립, 풍수지리설이 결부된 자주적 전통(불교+도참사상) 사상과 사대적 유교 정치 사상의 충돌, 고구려 계승 이념에 대한 이견과 갈등 등이 얽혀 일어난 것으로, 귀족 사회 내부의 모순을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② (나)의 묘청에 대한 설명입니다.
(가)의 김부식은 유학자였기 때문에, 유교 이념에 충실하고자 하였습니다.
③ 교정도감과 정방은 최씨 무신 정권의 핵심 정치 기구였어요.
그리고 군사적 기반은 도방과 삼별초를 들 수 있어요. 최충헌은 최고 집정부의 구실을 하는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력을 행사하였고, 사병 기관인 도방을 설치하여 신변을 경호하였어요. 최충헌의 뒤를 이은 최우도 교정도감을
통하여 정치 권력을 행사하였고, 더 나아가 자기 집에 정방을 설치하여 모든 관직에 대한 인사권을 장악하였습니다.
④ 고려 초 광종 때의 사실입니다.
광종은 공신과 호족 세력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국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칭제건원 정책, 즉 황제를
칭하고, 광덕, 준풍 등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이전에 일어난 이자겸의 난(1126) 당시 개경의 궁궐 일부가 불에 타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3회 1급 16번 문제
16. 정지상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답②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서는 한국사와 관련 있는 문학 작품을 자료로 제시하고 이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묻는 문제들이 1문제 정도씩 매회 출제됩니다.
한시를 원문으로 주고 묻는 문제라 의외로 이 문제를 보고 좌절하는 분들이 많을 수도 있겠지만, 최근에는 한문 사료는 거의 출제되지 않으니 어려워 마세요.
"비 개인 긴 언덕에는 풀빛이 푸른데 / 그대를 남포에서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대동강 물은 그 언제 다 마를 것인가 /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하는 것을."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배웠던 기억이 나시죠?
읽어보면 느끼겠지만 이 시는 이별의 정한(情恨)을 담은 정지상의 ‘송인(送人)’이라는 한시입니다.
가슴이 찡하죠....ㅜㅜ
정지상은 풍수 지리에도 관심을 기울여 묘청, 백수한 등과 함께 삼성(三聖, 세 명의 성인)으로 불렸던 인물입니다.
그는 서경 출신으로 일찍이 이자겸과 함께 난을 일으킨 척준경을 탄핵해 그를 유배케 하였으며, 유언이 등과 함께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하는 소를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묘청 등과 함께 서경 천도 운동, 칭제 건원, 금나라 토벌 등을 적극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정치인으로서만이 아니라, 뛰어난 시인으로서 문학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입니다.
① 만적의 난 때 만적이 한 말입니다.
③ 고려 말 온건파 사대부인 정몽주의 단심가 중 일부입니다.
이방원은 역성 혁명을 반대하는 이방원을 불러 '하여가'를 읊으며 그를 회유하려 하였으나, 정몽주는 '단심가'를
읊어 이에 거절하는 뜻을 확실하게 비췄어요. 이후 정몽주는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게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④ 윤봉길이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를 하기 전에 남기고 간 말입니다.
⑤ 세조 때 남이 장군이 지은 '북정(北征)'이라는 시입니다.
2회 2급 24번 문제
24. 금의 사대 요구에 대한 고려의 입장 답②
문제에 제시된 “윤언이 묘지명”을 보면, 여진족이 고려에 사대 요구를 해오자 “우리나라가 어찌 거꾸로 그들의 신하가 될 수 있습니까?”라며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ㄱ - 윤언이는 자주파, 북진파 인물이었습니다.
ㄴ - 여진은 고려 건국 초부터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며 조공을 바쳐왔으나 금을 세운 뒤에는 오히려 고려에
군신 관계를 요구해 왔습니다.
ㄷ - 이 시기는 여진족은 세력을 키워 만주 일대를 장악하고 금을 건국하고(1115), 거란을 멸망시킨 뒤 고려에 군신
관계를 요구해 왔던 시기입니다. 이에 당시 집권자였던 이자겸, 그리고 김부식 등은 금과 무력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였습니다.
ㄹ - 묘청, 정지상 등 서경파의 서경 천도와 금나라 정벌 주장은 이자겸의 난(1126) 이후의 주장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ㄱ, ㄷ으로 묶인 ②번입니다.
몽골과 관련된 문제
26회 고급 18번 문제
18. 삼별초의 활동 답②
제시된 신문 기사에 나타난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여 봉기, 강화도를 떠나새로운 근거지로 삼았던 성터, 김통정의 지휘'라는 내용을 통해 (가)에 들어갈 것이 삼별초임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몽골의 1차 침략(1231) 이후 정권을 이끌던 최우는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주민을 섬과 산성으로 들어가게 하여 장기 항전을 이끌었습니다. 이 시기 육지에서는 처인성에서 승려 출신 김윤후가 부곡민과 합세하여 몽골 장수 살리타를 사살하였으며, 충주성에서도 노비 등 천민 계층이 몽골에 저항하여 싸웠어요.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자 몽골과의 강화를 지지하는 무신들이 집권자 최의를 제거하고 고려는 독립과 풍속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몽골과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였습니다(1270).
그러나 최우가 양성한 삼별초는 몽골과의 강화에 반대하여 배중손의 지휘 아래 강화도에서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들은 진도(용장산성)와 제주도(항파두리성)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장기간 항전하였으나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에게 끝내 진압되었습니다(1273).
ㄱ, ㄷ - 삼별초는 고려의 관군과 몽골군의 연합 부대에 의해 제주도에서 진압되었어요.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 아래 진도로 옮겼으나 여·몽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패하여 배중손이 전사하고 진도가
함락되었어요(1271). 이에 김통정의 지휘 아래 다시 제주도로 근거지(애월 항파두리성)를 옮겨 항쟁하였으나
끝내 여·몽 연합군에게 진압되었습니다(1273).
ㄴ - 항마군은 별무반의 일부입니다.
윤관의 건의로 조직된 별무반은 신기군(기병), 신보군(보병), 항마군(승병)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족을 물리치고 동북 9성을 개척하였어요.
ㄹ - 도방에 대한 설명입니다.
도방과 삼별초는 최씨 무신 정권을 유지하는 군사적 기반이었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ㄱ, ㄷ으로 묶인 ②번입니다.
21회 고급 11번 문제
11. 삼별초 답④
삼별초에 대해서는 오랜만에 출제되었네요.
'고려 왕실이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한 이후 진도로 옮겨 배중손의 지도로 끝까지 대몽 항쟁을 한 군사 조직'이라고 했으니, 대몽 항쟁을 주도한 삼별초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자료에 '삼별초', '박서', '김윤후', '처인 부곡', '충주 관노', '최우의 주도로 강화도 천도', '팔만 대장경(재조 대장경)' 등이 제시되면 대몽 항쟁과 관련된 자료임을 파악하면 됩니다.
삼별초는 최우가 치안 유지 등 야간 경비를 위해 설치한 야별초(夜別抄)가 확대된 것으로 좌별초, 우별초, 그리고 몽골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군사들로 신의군(神義軍)을 조직, 이를 좌 ·우별초와 합하여 조직한 군대입니다.
별초(別抄)란 ‘용사들로 조직된 선발군’이라는 뜻이랍니다.
삼별초는 최씨 무신 정권을 유지하는 군사적 기반으로, 사병적(私兵的)인 요소도 있었습니다만, 대몽 항쟁기에는 전투에 앞장서 대몽 항쟁을 이끌었습니다.
고려 조정이 몽골과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자(1270), 대몽 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 아래 개경 환도를 반대하며 개경 정부와 몽골에 항전하기로 결정합니다. 이들은 장기 항전을 계획하고 강화도에서 진도로 내려가 용장산성을 쌓고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전라, 경상 연해 지역에 대한 세력을 확보합니다. 또한 이 당시 국제적으로 일본에 협력을 요청하는 외교 문서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여·몽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진도가 함락되자(1271) 김통정 등 그 일부는 다시 제주도로 근거지(애월 항파두리성)를 옮겨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결국 진압되었습니다(1273).
① 고려의 지방군인 주진군에 대한 설명입니다.
고려의 지방군은 국경 지방인 양계에 주둔하는 주진군과 5도의 일반 군현에 주둔하는 주현군으로 이루어졌습니다.
② 삼별초는 상비군이었습니다.
유사시 향토 방위를 담당하는 예비군은 조선 시대의 잡색군이 대표적입니다.
③ 조선 시대 임진왜란 당시 설치(1594)된 훈련도감에 대한 설명입니다.
훈련도감은 임진왜란 때에 왜군을 물리치는 데 효과적인 편제와 군사 훈련 방식을 모색하다 창설되었어요.
훈련도감은 포수(총포), 살수(창), 사수(화살)의 삼수병으로 편성되었는데, 이들은 장기간 근무를 하고 일정한 급료를
받는 상비군으로서, 의무병이 아닌 직업 군인의 성격을 가진 군인이었습니다.
④ 삼별초는 최씨 무신 정권을 유지하는 군사적 기반이라는 사병적인 요소도 있었습니다만, 대몽 항쟁기에는 전투를
이끌었습니다.
⑤ 고려 시대의 지방군인 주현군에 대한 설명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2회 2급 14번 문제
14. 삼별초 답④
이 문제는 제시된 자료에서 '삼별초'라는 군사 조직임을 쉽게 알 수 있어요.
삼별초는 최충헌을 계승하여 무신 정권을 잡은 최우가 치안 유지 등 야간 경비를 위해 설치한 야별초(夜別抄)가 확대된 것으로 좌별초, 우별초, 그리고 몽골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군사들로 신의군(神義軍)을 조직, 이를 좌 ·우별초와 합하여 조직한 군대지요.
별초(別抄)란 ‘용사들로 조직된 선발군’이라는 뜻이랍니다.
삼별초는 최씨 무신 정권을 유지하는 군사적 기반으로, 사병적(私兵的)인 요소도 있었습니다만, 대몽 항쟁기에는 전투에 앞장서 대몽 항쟁을 이끌었습니다.
고려 조정이 몽골과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자, 대몽 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 아래 개경 환도를 반대하며 개경 정부와 몽골에 항전하기로 결정합니다.
이들은 장기 항전을 계획하고 강화도에서 진도로 내려가 용장산성을 근거지로 세력을 확보해 나갑니다.
먼저, 진도와 가장 가까운 전라도 연해 지역의 세력 확보에 주력하였으며 제2단계로는 후방의 배후지가 되는 제주도, 3단계는 경상도 남부 연해 지역 일대에 대한 지배권의 확보하여 진도를 중심으로 전라, 경상 연해 지역에 대한 일정한 세력 확보에 삼별초는 성공합니다. 또한 이 당시 국제적으로 일본에 협력을 요청하는 외교 문서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몽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진도가 함락되자(1271) 김통정 등 그 일부는 다시 제주도로 근거지(애월 항파두리성)를 옮겨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결국 진압되었습니다(1273).
삼별초의 대몽 항쟁은 고려인의 자주 정신을 보여 준 것이며, 장기간에 걸친 이들의 항쟁은 몽골에 굴복하는 것에 반발하는 민중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ㄱ - 몽골의 2차 침입(1232) 당시, 용인 처인성 전투에서 승려 출신 김윤후가 부곡민들과 합세하여 살리타를 사살하여
몽골군을 퇴각시켰습니다.
ㄷ - 쌍성총관부는 공민왕 때의 일로, 삼별초와 관련 없지요?
공민왕은 반원 자주 정책을 펴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수복했습니다(1356). 이때 이성계와 그의 아버지 이자춘의
협력이 절대적이었는데, 이를 계기로 이들 부자는 개경으로 진출힐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ㄴ, ㄹ로 묶인 ④번입니다.
16회 고급 38번 문제
38. 남해안 섬과 관련된 역사 사실 답④
이 문제는 선사~현대까지 공부한 내용들을 남해안 각 섬과 관련시켜 종합적으로 체크해 보는 문제입니다.
특정 지역을 주고 그 지역의 선사~현대까지의 역사, 문화유산 등을 체크해 보는 문제가 꼭 출제되는데 이 문제도 그 유형의 문제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러한 유형의 문제는 매회마다 꼭 출제되니 공부할 때 이러한 부분을 염두해 두고 각 지역과 관련된 역사+문화유산을 정리해 보세요.
이 문제는 간단하게 설명하겠습니다.
(가)~(마)의 섬은 지명이 제시되어 있으니 그 섬과 관련된 답지가 맞는지 틀리는지만 파악하면 되겠네요.
① 진도는 고려 시대 몽고 침략 당시 삼별초의 대몽 항쟁지로 유명하죠.
삼별초는 개경 환도에 반대하며 강화도, 진도, 제주도로 옮겨 가며 4년간(1270~73) 항쟁하였습니다. 그리고 임진
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수군을 이끌고 명량(울돌목, 진도와 해남 사이) 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둔 것이기도합니다.
② 완도는 통일 신라 때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상권을 장악하고 중국·일본과 무역하던 곳으로 잘알고 있죠?
③ 거문도와 관련된 역사 사실로는 거문도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조선이 러시아와 연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전세계에서 대립하던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1885~1887)하였습니다.
④ 프랑스군이 침략한 병인양요가 일어난 곳은 강화도입니다.
한산도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학익진이라는 독특한 전법으로 일본군에게 대승을 거둔 한산도대첩이 가장
먼저 떠오르죠? 한산도는 임진왜란 당시 삼도 수군 본영(제승당)이 있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⑤ 거제도는 6·25 전쟁 때 북한군 포로 수용소가 있던 곳으로, 오늘날에는 조선소로 유명합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15회 고급 20번 문제
20. 제주도에 대한 탐구 답④
제주도에 대한 설명입니다.
제주도는 일찍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신석기 유적으로 고산리 유적 등이 있습니다.
제주도는 고려 시대 대몽 항쟁기에 삼별초가 마지막까지 항거한 곳이다. 몽골은 삼별초의 항쟁을 진압한 후 이곳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일본 원정을 준비하고 목마장을 설치하였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유배지로도 활용되었어요.
① 네덜란드 상인인 벨테브레이와 하멜은 조선 후기 효종 시기에 일본으로 가다가 난파 당해 제주도에 표착하였습니다.
이들은 한양으로 이송되어 훈련도간에 소속되어 신식 무기 등을 만드는 일에 동원되었습니다.
② 삼별초는 강화도, 진도, 제주도로 옮겨 다니면 대몽 항쟁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제주도에 항파두리성을 쌓고 최후까지 항전하였으나 끝내 진압되었습니다.
③ 조선 후기 제주도에서 활동한 김만덕은 상업 활동으로 부를 쌓아 제주도의 빈민 구제 활동에 앞장 섰습니다.
④ 조선 후기에 정제두는 강화도에서 양명학을 연구하며 강화학파를 형성하였습니다.
⑤ 광복 후 남한만의 단독 선거인 5·10 총선거 실시해 반대해 제주도에서는 4·3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15회 고급 13번 문제
13. 몽골의 2차 침입 때 처인 부곡민들의 대몽 항쟁 답⑤
문제에 제시된 사료는 이규보가 지은 <동국이상국집>이네요.
사료에서 나타난 핵심개념어는 '처인 부곡', '살리타 사살'이네요.
처인(현재의 용인) 부곡에서 그들과 큰 싸움이 벌어졌는데, 여기서 살리타를 사살했다는 것이네요.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그들'은 몽골군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몽골의 1차 침입(1231)을 맞아 박서의 분쟁 등에도 불구하고 개경이 포위되자 고려는 몽골과 강화를 맺습니다.
그리고 몽골은 고려 내정을 간섭하기 위해 다루가치를 남겨 두고 철수합니다.
무신 정권은 대몽 항쟁을 결심하고 장기적인 항쟁을 하기 위하여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전국의 주민들에게 산성과 섬으로 피난할 것을 지시하였어요.
이러한 배경 속에서 몽골군이 고려에 재차 침입(1232)해 왔습니다.
그러나 몽골군에 맞서 처인성 전투에서 김윤후가 이끄는 승병과 처인 부곡민이 몽골군 사령관 살리타를 사살하자 몽골군은 철수하게 되죠.
고려 정부는 공을 세운 이들에게 상을 내리는 한편, 처인 부곡을 일반 군현인 처인현으로 승격시켜 줍니다.
ㄱ - 처인성 전투는 몽골군을 물리친 전투입니다.
거란군을 물리친 전투로는 양규의 귀주 승리, 강감찬의 귀주 대첩을 들 수 있어요.
ㄴ - 몽골 침입 당시 왕은 강화도에 천도해 있었습니다.
왕이 나주까지 피신하였던 것은 고려 현종 2년(1011)에 거란의 침입을 받았을 때입니다.
그리고 고려 말 홍건적의 침입 때 공민왕이 안동까지 피난을 가기도 했지요.
(이와 관련하여 안동 놋다리 밟기 풍속이 남아 있다는 것도 알아두세요.)
ㄷ - 처인 부곡을 일반 군현으로 승격시켜 주었습니다.
향, 부곡, 소는 일반 행정 군현과 달리 특수 군현이었어요.
여기에 소속된 주민들은 일반 군현민보다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하고, 거주 이전의 자유도 제한되었지요.
따라서 부곡이 일반 군현으로 승격되면 부담도 낮아지고 거주 이전의 자유도 보장됩니다.
ㄹ - 고려 시대 향, 부곡, 소의 주민들은 일반 군현민보다 더 많은 부담을 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ㄷ, ㄹ로 묶인 ⑤번입니다.
12회 고급 15번 문제
15. 고려 강화도 천도 시기의 사실 답⑤
문제에 제시된 지도를 보니 중성을 쌓은 곳은 섬이네요.
그리고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고 강도(江都)라고 불렀다고 나와 있는데,
우리나라 역사상 섬으로 천도한 경우는 몽골의 침입 때 강화도로 천도한 것이 유일합니다.
몽골의 1차 침입(1231) 이후 무신 정권은 몽골과의 장기 항전을 위해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1232), 주민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킨 뒤 항전과 외교를 병행하면서 저항하였습니다.
고려 정부가 강화도라는 섬으로 천도한 이유는 몽골이 유목민족이라 기마 전술을 위주로 한 육지에서의 싸움에서는 강하지만 수전에서는 약하다고 보고 이를 이용하기 위한 것입니다.
몽골은 여러 차례 고려에 침입해 피해를 입혔지만 일반 민중은 물론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노비와 부곡 지역의 주민까지도 몽골에 대항하여 싸우는 등 40여 년 동안 끝까지 몽골에 항쟁하게 됩니다.
몽골과의 전쟁이 계속되자 고려 조정에서 몽골과 강화를 맺자는 주화파가 득세하고, 최씨 정권이 무너지자 고려 정부는 몽골과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게 됩니다(1270).
① 12세기 초 부족의 통일을 이룬 여진족이 고려의 국경까지 남하해 자주 침입해오자 고려는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편성한 후, 여진족을 북방으로 밀어 내고 동북 지방 일대에 9개의 성을 쌓았습니다(1107).
② 이자겸의 난(1126) 이후, 묘청 세력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평양)으로 도읍을 옮겨, 보수적인 개경의 문벌 귀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자주적인 혁신 정치를 시행하려 합니다. 이들은 서경에 대화궁이라는 궁궐을 짓고,
황제를 칭할 것과 금을 정벌하자고 주장하였지요. 그러나 김부식을 중심으로 하는 개경 귀족들의 반대로 묘청 세력은
서경 천도를 통한 정권 장악이 어렵게 됩니다. 결국 묘처 세력은 서경에서 난을 일으켰으나(1135), 김부식이 이끈 관
군의 공격으로 약 1년 만에 진압되고 맙니다.
③ 정동행성은 원이 일본 원정을 준비하기 위하여 설치했던 임시 기구였으어요.
그러나 일본 원정이 실패로 끝난 이후에도 계속 유지하여 내정 간섭 기구로 삼았습니다.
④ 시헌력은 조선 후기에 도입된 역법(달력)입니다.
고려 시대에는 원의 내정 간섭 시기에 원의 수시력을 도입하여 사용합니다.
⑤ 몽골과의 항쟁 시기 대구 부인사에 보관하고 있던 대장경의 판목과 경주의 황룡사 9층탑 등이 몽골군에 의해 불타는
피해를 입었어요. 이에 고려는 민심을 모으고 불력으로 몽골군을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을 조성 사업을 시작합니다.
고종 23년(1236)에 강화도에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제작하기 시작하여 16년 간의 대역사 끝에 고종 38년(1251)에
완성하였는데, 이것이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11회 고급 14번 문제
14. 각 지역에서의 대몽 항쟁 답③
이 문제도 1점짜리 수준 문제입니다.
일단 대몽 항쟁이라고 했으니 몽골과의 항쟁 내용을 가지고 풀어나가면 되겠지요?
(가)는 귀주라고 나와 있네요.
몽골의 1차 침입 때 박서는 귀주성에서 한 달 동안의 격전 끝에 몽골군을 물리쳤습니다.
(나)는 용인(처인성)이네요.
처인성은 김윤후가 이끄는 처인 부곡민으로 구성된 민병, 그리고 스님으로 구성된 승군이 몽골군을 물리쳤지요.
이때 몽골 장수 살리타를 사살하기도 했습니다.
(다)는 충주네요.
충주는 지광수의 지도 아래 노비와 잡류들이 몽골군에 끝까지 항쟁하고 이를 물리쳤습니다.
5차 침입 때에는 김윤후가 지휘하는 민병과 관노들이 몽골군을 물리치기도 했지요.
6차 침입 때는 충주 다인철소민들이 대몽 항쟁을 전개하였습니다.
(라)는 대구네요.
대구에는 부인사라는 큰 절이 있었는데, 이 절에는 거란 침입 때 불력의 힘으로 이를 물리치기 위해 조판한
초조대장경 6천여 권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몽골의 2차 침입 때 불에 타 소실되었어요.
(마)는 진도(용장성)이라고 표시되어 있네요.
고려 정부가 몽골과 강화를 체결하고 개경으로 환도하자 삼별초는 이에 반대하고 대몽 항쟁을 계속하였습니다.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진도로 이동해 와 용장성에서 항쟁하다가 다시 제주도(항파두리 유적)로 이동해 끝까지
대몽 항쟁을 전개하였으나 결국 진압되고 말았지요.
④ 황룡사 9층 목탑은 경주에 있었다는 거 모르는 분 있나요?
몽골의 3차 침입 때 불에 타 소실되었어요.
엄청 오랜 기간 동안 불에 탔다네요. ㅠ.ㅠ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 삼별초의 대몽 항쟁(1270~1273)
① 배경 : 무신 정권의 붕괴와 몽골과의 굴욕적 강화에 반발
② 항쟁 : 강화도(배중손의 지휘) 진도(용장성 쌓고 저항) 제주도(김통정의 지휘)
③ 의의 : 항몽 사상과 자주성 보여줌, 일부 민중의 지지로 장기 항쟁이 가능했음
10회 고급 18번 문제
18. 고려 시대 강화도와 벽란도에서 있었던 사실 답④
이 문제는 1점짜리로 조금은 쉬운 문제네요...^^
문제에 주어진 지도에 표시된 지역은 강화도와 벽란도, 그리고 시기는 고려 시대이니, 고려 시대에 이 지역에서 볼 수 있었던 모습을 생각하며 풀면 되겠네요.
답지별로 바로 설명합니다.
① 삼별초는 정부가 개경 환도를 결정하자, 환도에 반대하여 강화도에 남아 항전하다가 진도, 제주도로 옮겨다니면서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제주도에서 여, 몽 연합군에게 토벌되고 말았지요...ㅜ.ㅜ
② 지도에 표시된 벽란도 보이시죠? 예성강 어귀에 있던 벽란도는 대외 무역의 발전과 함께 국제 무역항으로 번성하여
송, 요나라 상인들은 물론, 대식국이라 불리던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왕래하였어요.
③ 고려 말 공민왕 때에는 왜구에게 강화도까지 약탈당하고 개경이 위협을 받을 정도였어요.
④ 직지는 청주 흥덕사에거 <직지심체요절>을 인쇄하기 위해 만든 금속활자입니다.
<직지심체요절>은 1377년에 인쇄된,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입니다.
<직지심체요절>보다 앞선 1234년에 <상정고금예문>을 인쇄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현재 전하지 않고 있답니다.
⑤ 강화도 피난 시기 이후에는 강화도 지방을 중심으로 한 간척 사업이 활발히 추진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10회 고급 16번 문제
16. 몽골과의 항쟁 답⑤
제시된 자료가 어느 나라와의 항쟁인지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네요.
그러니 배점을 1점짜리로 제시했겠지요.
문제에 제시된 자료가 <고려사>에 나오니 고려 시대의 사실일 것이고, 내용 중에 '박서'가 나오네요.
서북면 병마사였던 박서는 몽골의 1차 침입 때(1231) 귀주성에서 살리타가 이끄는 몽골군에 맞서 한달 간이나 격전을 벌여 끝내 이를 물리쳤죠?
따라서 (가)에 들어갈 내용은 몽골입니다.
그럼 몽골과 관련된 답지를 고르면 되겠네요.
①, ③은 고려 말 왜구 격퇴와 관련된 인물입니다.
② 양규는 거란의 2차 침입 때 활약한 인물입니다.
④ 고려 말 홍건적의 침입과 관련 있는 설명입니다.
⑤ 임연 어디서 많이 들어봤던 인물이지요?
무신정권 말에 권력을 잡았던 인물로, 임연, 임유무 부자를 마지막으로 무신정권은 끝나게 됩니다.
임연은 몽골과의 전투에서 활약하였으며 이후 무신정권을 잡았던 인물이라는 것 알아두세요.
차라대라는 이름만 봐도 답을 유추할 수 있는 비교적 쉬운 문제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10회 고급 8번 문제
8. 충주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 답④
문제에 제시된 (가) 지역을 지도와 연혁을 통해 유추해 보면 됩니다.
(가) 지역의 연혁을 소개한 내용 중에서 12목, 그리고 뒤에 정비된 8목 중 하나, 다인철소 등을 통해 (가) 지역이 충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를 풀 때 (가)의 연혁 내용으로 이 지역이 충주임을 파악할 수 없다면, 문제에 표시된 지도 (가)가 남한강 유역임을 볼 때 (가)는 충주와 단양 중 한 곳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
충주는 통일 신라의 5소경 중의 하나인 중원경이 었던 곳입니다.
충주는 남한강 유역에 위치하여 조선 시대에 가흥창이라는 조창이 설치되었던 지역입니다.
① 진흥왕 순수비는 창녕비(경남 창녕), 북한산비(서울), 마운령, 황초령비가 있죠?
충주 지역에 세워진 순수비는 없네요.
그리고 가까이에 단양 적성비가 있지만 그건 순수비가 아니니 조금 헛갈릴 수도 있는 답지네요.
② 신라 민정문서는 5소경 중 하나였던 서원경 지역의 4개 촌락에 대한 토지의 종류와 면적, 인구, 가구 , 가호, 노비의
수와 3년 동안의 사망, 이동 등을 기록한 문서로, 서원경은 오늘날의 청주입니다.
③ 주진군은 양계에 주둔하는 지방군입니다.
충주는 고려 시대에 5도 중 하나였던 곳으로, 5도에는 주현군이 주둔하였어요.
⑤ 조선 형평사는 백정들이 차별 철폐를 위해 1923년 진주에서 설립한 조직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8회 고급 18번 문제
18. 천민들의 대몽 항쟁 답④
이 문제이 주어진 자료를 보면, 몽골 침입 당시의 상황이네요.
자료를 보면, 양반 별초와 잡류, 노군 별초가 있었는데, 몽골 군대가 오자 두 부대를 지휘하던 지휘자와 양반 볓로들은 도망가고, 노군과 잡류 별초만이 힘을 합쳐 싸워 몽골군을 격퇴했다는 내용입니다.
이 사료도 고등학교 국가교과서에 그대로 실려있어요.
여기서 나오는 노군은 관청에서 사역하는 공노비를 주축으로 임시 무장 시킨 부대로 생각되며, 잡류는 관청에서 잡역에 종사하는 이들이라고 보면 됩니다.
따라서 이들은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하층민이라고 보면 됩니다.
몽골 침입 당시 활약한 부대나 사람들은 다음 세 가지 정도는 꼭 기억하세요.
관군으로는 1차 침입 당시 귀주성에서 활약한 박서,
그리고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하층민들의 분전.... 즉 충주 관노, 초적, 처인 부곡민,
마지막으로 삼별초...
① 진포 전투(1380)는 진포(금강 하구)에 침입한 왜구를 최무선이 화포를 이용하여 적선 500척을 무찌른 전투입니다.
② 홍산 전투(1376)는 왜구의 침입을 최영 장군이 충남 홍산에서 크게 무찌른 전투입니다.
③ 안융진 전투(993)는 거란의 1차 침입 때 발해 왕족 출신 대도수가 크게 승리한 전투입니다.
이 싸움으로 승기를 잡은 고려는 외교 담판을 통해 강동 6주를 얻어내지요.
④ 몽골의 2차 침입(1232) 당시, 처인성(용인) 전투에서 승려 출신 김윤후가 승군을 이끌고 부곡민들과 합세해 살리타를
사살하여 몽골군을 퇴각시켰습니다.
⑤ 관음포 전투(1383)는 정지가 이끄는 함대가 관음포 앞바다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해전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홍건적과 왜구
27회 고급 16번 문제
16. 최무선이 이끈 진포 대첩 답②
고려는 유목민족이 세운 국가들, 즉 거란(10세기 말~11세기 초), 여진(12세기), 몽골(13세기)의 침입과 압력을 차례대로 겪었어요. 그리고 홍건적과 왜구(14세기 중후반)의 침입도 받았습니다.
제시된 사료에는 왜구의 침입과 최무선의 진포 싸움이 나타나 있으니, 고려 말 왜구의 침입에 대한 것이네요.
고려는 14세기 후반에 북쪽에서는 홍건적, 남쪽에서는 왜구의 침입으로 국토가 황폐해지고 사회가 혼란하였어요.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운 이는 이방실과 이성계 부자였고, 왜구를 물리치는데 활약한 인물은 최영(홍산 대첩, 1376), 이성계(황산 대첩, 1380), 최무선(진포 대첩, 1380), 정지(관음포 대첩, 1383), 박위(쓰시마 섬 정벌, 1389) 등이었습니다.
최무선은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는 데 화약 무기의 사용이 꼭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중국에서 온 이원이라는 인물에게서 화약을 만드는데 필수적인 염초 제조법을 배워 화약 개발에 성공하였습니다. 고려에서는 1377년에 최무선의 건의에 따라 화약 및 화기 제조를 담당하는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여러 화약 무기를 제작하였습니다. 1380년 금강 하구에 있는 진포에 왜구가 침략해 오자 최무선은 화기로 전함을 무장하여 왜구를 크게 무찔렀습니다(진포 대첩, 1380).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18회 고급 15번 문제
15. 신흥 무인 세력 이성계 답③
주어진 사료는 함주(함흥)에 침입해 온 왜구들에게 관군이 패하자 이성계가 앞장 서 왜구를 모두 전멸시켰던 사건에 관한 것입니다.
따라서 밑줄 친 '그'는 이성계입니다.
그러나 누군인지 몰라도 문제를 푸는 데 아무 이상 없어요.
주어진 사료를 보면, '고려 말 우왕 때 왜구를 물리친 사건'이니 제시된 답지에서 고려 말 상황만 찾으면 됩니다.
고려 후기 공민왕 때에는 홍건적과 왜구가 고려에 자주 침입하였습니다.
홍건적은 원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일어난 한족의 농민 반란군으로, 원에게 쫓겨 고려에 침입하였습니다.
홍건적이 개경까지 침입해 오자 공민왕은 안동까지 피란을 가기도 하였으나. 정세운, 이방실 등이 이를 격퇴하였습니다.
왜구는 일본의 쓰시마 섬에 근거를 둔 해적으로, 일찍부터 해안 지방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였습니다.
공민왕 때에는 왜구에게 강화도까지 약탈당하고, 개경이 위협을 받을 정도였으며,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까지 침입해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당시 왜구의 침입으로 조세의 해상 운송이 어려워져 국가 재정이 궁핍해질 정도였습니다.
이 때 최영, 이성계 등이 나서서 왜구를 토벌하였고 최무선은 화포를 사용하여 왜구를 격퇴하였으며, 박위는 전함 100척을 이끌고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을 토벌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최영, 이성계 등의 새로운 무인 세력이 성장하였습니다.
① 삼별초의 항쟁을 이끌었던 인물은 배중손, 김통정입니다.
② 동북 9성은 예종 때에 윤관이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이끌고 동북 지방 일대에 있던 여진족을 몰아 내고
이 지역 일대에 축조한 것입니다(1107).
③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신흥 무인 세력이 성장하였습니다.
특히, 신흥 무인 세력인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1388) 후 (급진파) 신진 사대부와 손잡고 조선을 건국합니다.
④ 공민왕은 반원 자주 정책을 펼쳐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던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였습니다(1356).
⑤ 여·몽 연합군의 두 차례(1274, 1281) 일본 원정은 충렬왕 때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의 격퇴
5회 고급 20번 문제
20.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답⑤
대화에서 '500여 회나 침입'하였다는 것에서 ‘이들’은 왜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공민왕 때에는 홍건적과 왜구가 고려에 자주 침입하여 어려움을 겪습니다.
홍건적은 원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일어난 한족의 농민 반란군으로, 원에 쫓긴 홍건적이 개경까지 침입해 오자 공민왕은 멀리 안동까지 피란을 가기도 하였으나. 정세운, 이방실 등의 활약으로 이들을 격퇴하였습니다.
고려에 큰 타격을 준 것은 왜구였습니다.
왜구는 일본의 쓰시마 섬에 근거를 둔 해적으로, 일찍부터 고려는 물론 멀리 중국의 해안 지방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였습니다. 특히 공민왕 때에는 왜구에게 강화도까지 약탈당하고, 개경이 위협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조세의 해상 운송이 어려워져 국가 재정이 궁핍하게 되었고,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까지 침입하여 큰 피해를 입히기도 했습니다.
우왕~창왕 시기에 최영, 이성계 등이 나서서 왜구를 토벌하였고 최무선은 화포를 사용하여 왜구를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어서, 박위는 전함 100척을 이끌고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을 토벌하여 그 기세를 꺾었습니다.
이와 같이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최영, 이성계 등의 무인 세력이 성장합니다.
한편 최무선은 화약 무기를 개발하기도 했어요.
<보기>의 ㄱ - 홍건적 침입 당시의 사실이죠.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4회 고급 11번 문제
11. 고려 말 왜구의 격퇴 답②
이 문제는 유사한 문제를 위에서 설명드렸으니 간단하게 해설할게요.
(가) 최영 장군은 충남 홍산에 침입한 왜구를 크게 물리쳤습니다(홍산 전투, 1376).
(나) 진포(금강 하구)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친 이는 최무선입니다.
최무선은 화포를 이용하여 진포에 침입한 적선 500척을 무찌렀니다(진포 대첩, 1380).
(다) 이성계는 운봉(황산)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시켰습니다(황산 대첩, 1380).
(라) 정지는 고려 함대를 이끌고 관음포 앞바다에 침입한 왜구를 해전을 통해 크게 물리쳤습니다(관음포 전투, 1383).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고려 시대의 국경선
13회 고급 17번 문제
17. 우리나라의 국경선의 변화 모습 답③
국경선과 관련하여 묻는 문제는 수능 등에서 출제되었던 문제여서, 언제 한번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도 출제될 것이라 예상했는데 이번에 출제되었네요.
향후 시험에서도 각각의 개별 국경선을 제시하고 그 시기의 모습을 묻는 유형의 문제가 출제될 수 있으니 이번 문제를 통해 시대별, 시기별 국경선의 변화를 꼭 알아두세요.
알아두면 하나도 안 어려워요.
(가)는 대동강 입구~원산만을 잇는 국경선입니다.
이는 신라가 나·당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삼국 통일을 완성한 후의 국경선입니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비롯한 고구려 영토 대부분을 당에게 빼앗겼지만, 이후 발해가 신라 북쪽의 고구려 옛 영토를 차지하죠.
(나)는 청천강 입구~영흥만을 잇는 국경선으로, 고려 태조의 꾸준한 북진 정책 결과 확정된 것입니다.
태조는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고자 강력한 북진 정책을 추진하여 평양을 서경으로 삼고,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적극 개발하였습니다. 그 결과, 청천강에서 영흥에 이르는 국경선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다)는 압록강 입구~도련포까지를 연결한 국경선입니다.
이는 거란의 1차 침입(성종12년, 993) 당시 서희가 거란 장수 소손녕과의 외교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회복한 후의 모습입니다. 3차에 걸친 거란 침략 격퇴한 후 이 국경선을 따라 천리장성을 쌓았습니다.
(라)는 압록강의 초산~길주, 갑주를 잇는 국경선입니다. 이는 공민왕이 회복한 국경선입니다.
공민왕은 반원 자주 정책을 실시하면서 무력으로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하였습니다(1356).
(마)는 압록강~두만강을 잇는 국경선입니다.
이는 조선 세종 때 4군과 6진을 개척한 이후 확장된 압록강~두만강의 국경선입니다.
③ (다)는 거란의 1차 침입 당시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회복한 후의 국경선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고려는 여진이 국경을 자주 침범하자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편성하여, 여진족을
북방으로 밀어 내고 동북 지방 일대에 9개의 성을 쌓았습니다(1107). 동북 9성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명확치 않으나
(다) 국경선 너머로 보고 있습니다(밑에 유사 기출문제로 제시된 4회 고급 18번 문제를 보시면 알겁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고려 시대 국경선의 변화
미래엔 교과서 자료
효율적인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공부법
카페에서 추천하는 부담 없는 [한권으로 끝내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교재로 중요내용을 공부하고
마지막으로 카페에 올려진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기출문제해설을 꼼꼼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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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댓글은
감사합니다....라는 글은 달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문제에 대한 난이도, 자료 등에 대한 느낌이나
개인적인 문제풀이 접근법 등을 달아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유의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댓글 단 분은 등업 안됩니다.
저도 곽주랑 흥화진 보고
강동6주 감잡았고
양규 보고 거란침입 확신했습니다^^
콕 집어서 풀어주셨네요.
이해는되지만 시대순 용어의 정리가 안되어 어렵네요...
볼때마다 느끼지만 연관된 자료가 정말 좋습니다
자세한 관련자료와풀이들이 있어 이해가 갑니다^^
세밀한부분까지 상세한 설명에 놀라지 않을수 없네요
많은 도움이 되겠어요
문제와 관련된 자료들도 같이 있어 개념을 정립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세밀한 설명이 정말 놀랍네요! 감사드립니다.
자료가 연관되어 있어서 좋아요
지역관련된 문제는 지도의 위치를 정확히 알아야 풀기 쉬울것 같습니다
어렵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다시 재정리 하겠습니당
항상 느끼는 거지만 설명이 단순히 선택지만 짚어주는 것이 아니라 문제와 관련된 배경을 인과관계 또는 시간순서대로 정리해주시니 문제를 풀면서도 개념정리가 저절로 되고 정말 좋습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이만한 해설이 없어요!!!
서희 강동육주가 거란이었고. 여진과 동북9성 삼별초
고려숙종 별무반 해동통보 화폐. 고려시대 성종 건언중보에서 해동통보 숙종 저화 공양왕. 별무반 윤관의 건의로 여진정벌(신기군신보군항마군). 이자겸 직권당시 금이 사대요구
몽고 삼별초ㅡ 여몽연합군에의해진압됨제주도와진도로 근거지옮기면서항쟁함 최씨무신정권군사적기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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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건적 왜구 중요ㅠㅠㅠㅠㅠㅠㅠ
11회 고급 14번문제 오타있어요~ 답번호요!! 처음엔 답 3이라고적혀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