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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존재 의미와 역할론
박현솔(시인)
시인에 대한 인식은 예로부터 동양과 서양이 사뭇 달랐는데 서양에서 시인은 죽을 자와 신적인 것의 중간자로 인식하여 존재 자체와 존재 망각 사이의 매개자 역할을 하는 자라고 보았다. 존재의 근원에 가까이 가닿고자 하는 자로서 세계 내 존재인 현존재이자 본래성을 회복하도록 이끄는 결단의 선구자로 인식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대의 당면한 결핍과 필요를 읽어내어 그것을 헤쳐나갈 사명을 걸머진 자로서 시대성에 대한 고찰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반면에 동양에서 시인은 물질보다 정신의 깊이를 추구함으로써 인위를 버리고 비움의 경지에 이르는 자로서 자연과의 조화를 통해 물아일체의 경지에 이른 자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우주의 모든 변화는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법칙에 따라 순환하고 그것에 순응하여 유에서 무가, 무에서 유가 발현되는 것임을 깨닫는 자라고 보았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볼 때 동양의 관점은 서양의 관점에 비해 시인의 존재 의미와 역할에 대해서 다소 수동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서양은 시인에게 신과 인간의 중간자적 입장에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앞으로 전진하는 데 있어 도구로서의 역할을 부여하였다면 동양에서 시인은 스스로의 본질에 집중하고 정신적인 것을 중히 여기며 자연과 합일된 조화로 순환론적 세계관을 지닌 존재로 인식된 것이다. 이러한 동·서양의 서로 다른 역할론은 현대로 접어들면서 인식의 조화를 통해서 상호보완적으로 절충되어 나아갔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의미들을 염두에 두고 현대적인 관점에서 시인의 존재 의미와 역할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눈, 그것은 총체, 그것은 부품
알 수 없는 무엇이다
지운 것을 듣고, 느낌도 없는 것을 볼뿐더러
능선과 능선 그 너머의 너머로까지 넘어간다
눈, 그것은 태양과 비의 저장고
네거리를 구획하고 기획하며 잠들지 않는
그 눈, 을 빼앗는 자는 모든 걸 빼앗는 자다, 하지만
그 눈, 은 마지막까지 뺏을 수 없는, 눕힐 수 없는
칼이며 칼집이며 내일을 간직한 자의 새벽이다
양날이지만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수천수만, 아니 그 이상의 팔이라 할까
(나부끼지 않지만 죽지 않았습니다. 바람-그냥 보냅니다. 대충 압니다. 나누지 않은 말 괜찮습니다. 여태 잎으로 수용하고 뿌리로 살았거든요. 대지의 삶은 적나라한 게임입니다. 간혹 구름이 움찔하는 건 어느 공검에게 허를 찔렸기 때문, …일까요?)
공검은 피를 묻히지 않는다
다만 구름 속 허구를 솎는
그를 일러 오늘 바람은 시인이라 한다
공검은 육체 같은 건 가격하지 않는다
- 정숙자 「공검」
정숙자 시인의 「공검」에서 화자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실제와 관념을 넘나드는 곳이다. 눈의 본질적인 의미와 기능, 눈의 은유적 사유를 따라가다 보면 눈의 본모습이 감지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또 적당한 거리감으로 모호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화자는 눈을 통해서 자연과 조화롭게 어울리면서 때로 그것에 순응하는 자세로 유연하게 살아왔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지문의 형식에서 드러나고 있는데 “바람-그냥 보냅니다.(…)여태 잎으로 수용하고 뿌리로 살았거든요.”에서 자연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자의 순환론적 세계관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다만 “육체 같은 건 가격하지 않”고 “피를 묻히지 않”으며 “허구를 솎”을 뿐이라는 점에서는 그것이 생명을 죽이는 살상용 무기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눈의 의미는 환유적으로 미끄러지며 본래의 의미에서 변주되면서 다양한 의미를 생산하지만 그것을 따라가는 상상력은 결국에는 칼과 시인이라는 종점에 다다른다. 세상에 널린 허구들을 잘라내고 본질을 꿰뚫어서 세상에 드러내고자 하는 존재. 화자의 눈에 그런 존재는 “시인” 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즉 유연함으로 감각의 끝간 데까지 확장된 “눈”을 가진 존재는 오직 시인 뿐이라는 것이다. 이 시에서 시인의 존재 의미와 역할에 대한 사유를 보면 시인은 존재의 근원에 가닿고자 하는 자로서 인식되고 있다.
철로 한켠에 침목들 쌓여있다
하나 같이 일자로 입을 다물고 있다
세상은 열차처럼 떠들어대는 자들의 몫인 것 같지만
달리는 자들의 세상 같지만
침묵하는 자들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다는 것을
한 생을 한 자리에서 누워 침목은 침묵으로 말한다
침목은 지축을 울리며 달리는 열차의 굉음을
제 몸으로 받아내어 잘게 잘게 땅으로 분산시키고
이윽고 침묵을 남긴다
지반이 꺼지지 않도록
철길을 받치고 종착역까지 옮겨주는 것은
저 말 없는 것의 힘이려니
저 켜켜이 쌓여있는 침목들은 어디론가 실려가
누군가의 길이 될 것이다
떠들 게 없어서가 아니라
떠들어서는 안 되는 것을 안다
침목 혹은 침묵
- 복효근 「침묵의 힘」
복효근 시인의 「침묵의 힘」은 서사나 이미지의 흐름이 단정하면서도 그 의미가 과하지 않고 언어유희도 적절해서 힘 조절이 잘된 시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침목”에 대한 사유가 펼쳐지고 있는데 철로 위를 달리는 “열차”는 물질문명을 이룬 자본주의를 의미하는 듯하고 “침목”은 생태적이고 자연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 두 대립적인 관계에서 화자가 주목하는 것은 자연적인 것으로 현대의 물질문명을 조용히 떠받치고 있는 자연적인 것에 대해서 인간이 간과하고 있던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이 세상이 물질적인 것 혹은 떠들어대는 자들에 의해서 돌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연적이고 침묵하는 자들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김수영의 「풀」에서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풀은 눕고(…)바람보다 늦게 누워도/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바람보다 늦게 울어도/바람보다 먼저 눕는다”와 같은 맥락의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이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존재와 사물들에 대한 사유가 깊이 있고 통찰력 있게 조명되면서 무엇보다 “떠들 게 없어서가 아니라/떠들어서는 안 되는 것을 안다”는 부분에서 한 번 더 자본주의와 떠들어대는 자들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시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침목이라는 사물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을 바로잡기 위해서 화자는 오랫동안 그것을 관찰하고 그것에 몰입함으로써 물아일체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 그로 말미암아 자본주의를 떠받치고 있는 자연적인 것과 침묵으로 일관하며 자신의 일을 해내는 사람들의 진정한 존재 의미를 간파함으로써 인간과 자연이 서로 조화를 이룰 때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더 발전할 수 있음을 깨닫고 있다.
나는 바람을 다룰 줄 아는 들판을 갖고 있다
오늘은 무풍의 날
먼 숲에서 나무 쓰러지는 소리가 들리고
달이 지켜보고 있다
내가 소유한 것은 쓸쓸함이 만들어낸 가장 쓸쓸한 영지
가슴에 들판이 있는 사람은 곧 무덤이다
마법 같은 일이다 착한 마법이 아닌
서서히 안개가 밀려온다 안개는 내일로부터 밀려온다
불투명한 미래의 입자에 잠식되는 동안
나는 오랜만에 잠이 든다
폭풍이 몰아치는 꿈이었다 집으로 돌아간 소녀는 영원히 오지 않았다 성문은 굳게 닫히고 성으로 향하는 황금길은 녹슬었다 이상하게도 폭풍은 고요했다
양들이 풀을 뜯어 먹은 자리에선 다시는 풀이 돋지 않는다
숲의 나무들이 쓰러지고 나면 새로 자라는 나무는 없다
양들은 숫자를 셀 때마다 한 마리씩 사라진다
이곳은 강력한 결계지
오늘은 나의 들판을 들여다 보시라
황량한 거리를 걷고 있는 뒷모습이 보이는 게 낯설지 않고
무엇인가 헤어진 듯한 느낌이 든다면
사랑을 할 때도 사랑이 멈추지 않는다면
당신도 들판을 갖고 있다
지금은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걷어 햇살을 들이고
커피를 마시다 문득 잊고 있던 음악을 들을 수도 있다
저녁 약속을 떠올리며 행복해 하고 산책을 나서기도 한다
이 모든 걸 달이 지켜보고 있다
연민의 눈동자다
- 윤위섭 「오즈」
윤의섭 시인의 「오즈」는 판타지 소설 ‘오즈의 마법사’를 창작의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서 화자는 마법사로 등장하고 있으며 오즈라는 공간 역시 일상적이지 않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화자의 내면에 있는 “들판”은 어둡고 쓸쓸하며 약간은 삭막한 곳으로서 나쁜 마법이 펼쳐지는 곳이다. 즉 활기나 희망적인 삶은 존재하지 않고 음울한 죽음만이 가득한 곳이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것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화자의 마법으로 인해서 그렇게 변해버린 것이기도 하다. 가슴에 들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죽음에 대한 사유가 강력하게 화자를 점령하고 있다는 것이다. 화자는 언젠가는 죽을 인간의 한계를 미리 알고 그것을 벗어날 수 있는 초월적 힘을 가진 존재로 설정되고 있다. 그리고 초월적 존재와 인간 사이에서 삶과 죽음의 사유를 개진하면서 삶에서 희망을 찾는 평범한 존재에게 시선이 집중되도록 유도하고 있다. 화자의 들판과 “당신”의 들판이 서로 유사함을 자각하게 함으로써 세상의 많은 존재들이 인간으로서 감당해야 할 본질적 아픔이나 비극을 피할 수가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반복적인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에서 존재의 비의가 번져가는 걸 확인하게 된다. 이 시에는 곤경에 처한 현실에서 자신만의 전략으로 이를 헤쳐나갈 사명을 가진 자가 시인이라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있다. 즉 죽을 자와 신적인 것의 중간자이고 존재 자체와 존재 망각 사이의 매개자로서 존재를 일깨우는 역할을 하는 자가 시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세상의 사건들이 무심코 흘리는 말들에게도 전경이 있고 후경이 있지
말하자면 창세기나 요한계시록 같은 거야
나무가 떨구는 낙엽에도 전경이 있고 후경이 있다는 거 넌 아니?
바람이 불 때 떨어지는 낙엽과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떨어지는 낙엽은
전혀 다른 전언을 감추고 있다는 거
세상의 모든 말들에는 마음이 있어서
작은 감각 하나에도 마음과 마음 사이의 거리가 느껴지지
우리 집 가까운 곳에 벽제가 있어서
이따금 집 앞을 지나가는 영구차를 볼 때가 있어
내가 사는 곳이 원당(元堂)인데 어감만 보면 천당 바로 밑 동네처럼 느껴져
원당에서 벽제를 생각하면 원당이 벽제의 전경 같은데
벽제에 가서 원당을 생각하면 벽제가 원당의 전경 같지
전경이 후경보다 앞에 있으므로 서열이 먼저라는 것은 착각이야
삶과 죽음, 인간의 나이 차가 우월한 것이 아니듯
말에도 나이가 느껴지기는 하지만 나이로 쉽게 서열을 매길 순 없어
얼마 전 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한 아내가 평소 무심하던
내 마음을 흔들어 놓은 건 그동안 나 몰래 숨어있던 말의 어떤 전언 때문이야
그 때 나는 문득 아내 몸에 숨어있던 병에 내 무심이 후경이 된 것 같아서
아내의 아픈 몸이 내 마음을 후려치는 느낌이었어
세상에는 무수한 말들이 있지만
어느 날 문득 내게 오는 말들은 그동안 자신이 숨겨온 의미를
내 앞에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져놓지
그럴 때 나는 돌연 그 말의 후경이 되어 등 뒤의 나를 발견하지
바람의 낙엽과 스스로 떨어지는 낙엽, 벽제와 원당 사이
건강하던 아내와 병마와 싸우는 아내 사이에도
내가 모르는 말과 말의 거리가 숨어있어
그 거리가 느껴지는 순간 내게서 멀어진 등을 직감하지
- 박남희 「아포칼립스」
박남희 시인의 「아포칼립스」는 신약 성경의 요한계시록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하느님이 감추어진 미래의 비밀을 드러내어 보여주었다는 의미이다. “말”과 “마음”의 전경과 후경에 대한 사유가 변주되고 있는 이 시에서는 몸이 아픈 아내와 화자 사이에서 무심코 오가는 말에서 평소엔 자각하지 못했던 마음의 거리가 감지되는 걸 느끼게 된다. 화자의 그런 자각이 있기까지는 두 사람의 관계가 그렇게 멀어지고 있는 줄 모르고 있다가 아내의 병을 계기로 화자의 일상적인 사고와 인식에 충격이 가해지고 관계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다. 만약 그때 아내의 병이 발현되지 않았다면, 아내가 자신의 슬프고 우울한 감정을 꺼내지 않았다면, 화자가 두 사람이 멀어지고 있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면 이들의 관계는 회복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화자는 자신에게 보여지는 징후와 전언의 암시를 통해서 관계의 파탄을 막게 된 것이 제목의 의미처럼 신의 의도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화자는 어떤 결단을 통해서 타자들과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지에 따라 현존재의 세계가 달라지기 때문에 늘 깨어 있는 상태에서 자신과 주변의 상황을 주시하며 잘 대처하는 존재가 현시대도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는 모든 관계들 속에서 자신과 타자가 본래적인 자기를 상실하지 않도록 살피면서 당면한 결핍과 필요를 감지하여 그것을 헤쳐나가는 사명을 가진 자가 시인이라고 보고 있다.
행사에 초대된 열두 사람
원탁을 가운데 놓고 둘러앉아 있다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 사람들 앞에
물컵 열두 개는 수위가 다 다르다
원탁을 보고
연못이라 생각한대도 잘못될 건 없지
연못 속에는 으레 달이 가라앉아 있으니까
달을 건지려는 손이 달빛을 타고 내려온다
한 손은 늘어진 나뭇가지를 붙잡고
한 손은 연못의 달을 향해 뻗고 있는
원숭이들
산란한 눈빛들
물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어서
달을 꺼내기 어렵지
내 앞에 펼쳐진 달을
한 모금씩 뜯어먹을 때마다
뱁새처럼 좌우로 곁눈질한다
시계 제로의 연못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 박수소리
가지가 부러진다
허우적거리는 원숭이들
달 속으로 녹아들고
인화성 강한 물질처럼
나는 달아오른다
얼굴이 점점 붉어진다
온도에 따라 물이 되는
버터나 초콜릿처럼
열두 명의 사람은 하나였다가
수십 수만이었다가
연못 속의
원숭이를 다 셀 수는 없다
- 이순현 「원탁」
이순현 시인의 「원탁」은 화자와 타자들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상반된 견해 차이가 묘한 긴장감을 자아내는 시이다. 어떤 행사에 “열두 사람” 중 한 사람으로 초대된 화자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여기에서 초대된 “열두 사람”은 마치 예수의 제자들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고, 화자와 어떤 접점을 통해서 그곳에 초대된 사람들인 것 같다. 원래 원탁은 회의나 모임 참가자들이 대등한 관계에서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도록 배려한 공간이다. 하지만 여기에 참석한 사람들의 “물컵”은 “수위”가 모두 달라서 표면적으로 감추려고 했던 관계의 서열이 주최 측의 의도에 의해 자연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장 서열이 높은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모임의 주된 안건에는 깊게 다가가지 못하고 연못 속의 “달”로 상징된 떡고물을 얻어먹기 위해서 박수와 웃음으로 호응하고 있다.
그런데 모두가 이 꼭두각시놀음에 동참하는 것은 아니어서 그것을 지켜보는 독자는 그 대립점이 흥미롭게 느껴진다. 화자는 원탁에 둘러앉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면 그렇게 처신할 것인지 의아해한다. 그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과 반응에 몹시 불편해하면서 그들을 “원숭이”로 평가절하하고 줏대도 없는 존재들로 치부하고 있다.
따라서 화자는 사람들이 존재 망각을 통해서 자기의 본래성으로부터 멀어지며 세상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판단이 흐려지면 그 무리에 휩쓸려서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세계와 관계 맺는 사고방식과 자세는 중요하고 어떤 태도와 입장을 견지하는지에 따라 현존재의 세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시인의 존재 의미와 역할은 세계 내 존재인 현존재들이 본래성을 회복하도록 각성시키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이끄는 존재임을 알 수가 있다.
다섯 편의 시들을 읽고 감상하면서 과거의 동․서양의 시인론이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잘 전달되고 있는지, 오늘날의 시인에 대한 존재 의미와 역할에 대해서 표본으로 삼은 다섯 명의 시인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들여다볼 수 있었다. 시인은 죽을 자와 신적인 것의 중간자로서 존재의 근원에 가닿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자이고, 자연과 조화를 이뤄야 함을 자각하였으며, 물아일체의 경지에 이르고자 애쓰면서, 존재 자체와 존재 망각 사이의 매개자로서 존재의 본래성을 잃지 않도록 타자들을 자각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존재의 본래성을 망각했을 경우에 그것을 다시 회복하도록 일깨우며, 모든 관계들에서 결핍을 감지하여 그것을 헤쳐나가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과거의 동․서양 시인들의 존재 의미와 역할론이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전달되고 있으며 진리와 자유를 추구하고 성스러움을 염원하면서 자신과 타자들, 더 나아가 확장된 시대의 요구를 수용하는 매개적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박현솔
제주 성산 출생. 아주대 대학원 졸업(국문학 박사).
1999년 《한라일보》 신춘문예와 2001년 《현대시》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달의 영토, 해바라기 신화, 번개와 벼락의 춤을 보았다와
시론집 한국 현대시의 극적 특성, 초월적 세계인식의 전망과 이데아가 있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2005, 2008).
현재, 계간 문학과 사람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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