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21 章 결투(决斗)
자연의 변화란 원래 종잡을 수 없는 것인데, 그 중에서도 특히 날씨는 사람의 마음보다 더 변덕이 심하다.
조무기와 당오가 결투를 벌이려는 순간 따사한 햇살이 내리 쬐던 사자산(狮山) 일대에 갑자기 강한 돌풍이 일었고, 순식간에 먹구름이 하늘을 덮어 주위는 어두워졌으며 습기도 짙어져 금새 큰비라도 쏟아질 기세였다.
바람이 더욱 강해짐에 따라 마주 선 두 사람의 옷자락이 시끄럽게 펄럭였지만, 마치 너른 벌판 끝에 우뚝 솟아 있는 사자산처럼 그들은 거센 바람에도 흔들림 없이 서 있었으며, 그들 수중의 장검(长剑)들 역시 언제라도 마주한 적을 죽음으로 몰고 가려는 결의를 보여주듯 검신을 번쩍거리며 마주선 이의 가슴을 겨누고 있었다.
두 사람이 수중에 검을 워낙 견고하고 안정되게 쥐고 있는 까닭에 바람이 더욱 거세지는 와중에서도 검신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
물론 당오가 그리도 안정된 자세로 검을 굳건히 쥐고 있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
그러나 조무기는 지금 치솟는 분노에 어쩔 줄 몰라 해야 하고, 분노에 휩싸인 사람은 충동적이어야 하는데, 어찌 오히려 태산(泰山)처럼 안정된 모습을 보인단 말인가?
이는 잘못이었다.
당오라는 강호의 준걸과 마주한 자리에서 그런 모습은 더욱이 잘못된 것이었다.
당오가 이런 잘못을 놓칠 리 없었다.
그런데 그는 조무기를 의심하기보다는 오히려 조무기의 안정된 모습에, 다시 말하면 조무기가 격분된 상태에서 적을 맞았음(临敌)에도 불구하고 침착함을 견지하고 있는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조무기의 마음 수양(修养)이 남다르고 뛰어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조무기는 당오의 눈에 돌연 감탄의 빛이 어리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그리고 당오가 왜 자신에게 감탄하고 있는지 바로 깨달았다.
절대로 당오가 자신에 대하여 감탄하게 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자신을 얕보고 경시하여 허점을 드러내게 만들어야만 비로소 이길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즉시 임기응변을 꾀했고 검을 쥔 손을 아주 미세하게 떨기 시작했다.
일반인들로서는 도저히 관찰할 수 없는 이런 미미한 동작이라도 당오의 눈을 벗어나지는 못 할 것이다.
역시 당오는 즉시 알아차리고 냉소를 금치 못했다.
'자세히 보니 조무기는 생각했던 것만큼은 냉정하지 못하구나.'
당오는 비록 조무기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보았지만 아직은 공격을 시작하기에 최상의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가장 좋은 기회는 좀더 뒤에 올 것이다.
더 기다려야 한다.
조무기 역시 당오의 태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오처럼 냉정함을 유지하며 관찰은 하되, 웬만한 기회에는 가벼이 움직이지 않고 기다리면서 반드시 결정적 시기가 도래해야 비로소 손을 쓰는 사람이 강호상에 얼마나 있겠는가?
당오의 무서움을 새삼 느낀 조무기는 미세한 손 떨림과는 반대로 마음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당오의 침착함과 냉정함을 극복할 방법을 생각해내야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은 당가보의 세력권이므로 계속 시간만 끌며 대치할수록 자신에게 불리해질 뿐, 그는 별수 없이 먼저 공격을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물론 분노가 극에 달한 듯한 연기는 계속해야 했다.
조무기의 입에서 돌연 커다란 호통 소리가 터져 나왔는데, 그것은 마음의 고통을 견디지 못해 미쳐 버린 사람이 외치는 절규와도 같았다.
외침과 동시에 그는 수중의 장검으로 당오에게 연속으로 13초(招)를 공격했다.
이때 그가 사용한 검법은 소동루에게 전수받은 것이 아닌, 아버지 조간이 가르쳐 준 '대풍십삼식(大风十三式)'이라는 가전검법(家傳剑法)이었다.
대풍십삼식은 말 그대로 13개의 검식(剑式)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의 초식(招式)은 역시 13초(招)로 구성되어 있는데, 초반의 검식들은 완만하게 진행되다가 나중에는 쾌속무비한 게 마치 강풍과 폭우가 미친 듯 몰아치는 기세로 전개되는 특징이 있다.
그가 방금 전개한 수법은 13식 중 제1식 '대풍기혜(大风起兮)'였다.
당오는 반격을 할 생각이 없는지 수비 자세를 굳건히 하더니, 수중의 장검을 좌우로 열세 번 번뜩여 조무기의 13초 공세를 하나하나 저지하였다.
제1식 13초를 마친 조무기는 일단 멈칫하며 뒤로 일 보 물러서는 듯 보였으나 홀연히 다시 몸을 전진시키며 공세를 이어갔다.
곧바로 제2식 '사풍세우(斜风细雨)' 13초가 전개되며 당오의 전신 열세 군데의 혈도를 목표로 순차적으로 찔러갔다.
사풍세우(斜风细雨)는 말 그대로 바람에 가랑비가 바람에 날리듯, 검이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히 날다가 갑자기 좌우로 방향이 바뀌면서 상대의 혈도를 공략하는데, 매 초가 변화무쌍한 가운데 촘촘함이 구비되어 상대로 하여금 마치 이슬비에 온몸 구석구석이 젖어 드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당오는 조무기의 두 번째 초식을 대하고는 이는 단지 몸을 피하는 것만으로는 대처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그동안 견지하던 수비 자세에서 벗어나 즉시 당가 고유의 검법을 전개하여 맞섰다.
쨍쨍거리는 쇠끼리 부딪는 소리가 연속으로 울려 퍼지며, 두 사람의 장검은 정확히 열세 차례 맞부딪쳤다.
대개 강호상에서 알려진 검법들은 상대의 검이 공격해 오면 가능한 한 몸을 피하며 반격을 가하는 수법이 대부분인데 비하여, 당가검법의 특징은 가능하면 매 초마다 자신의 검이 상대의 검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당가보가 강호상에서 명성을 날리는 것이 검법이 아니고 암기(暗器)란 것을 상기하면 이해하기 쉽다.
즉 당가의 검법은 호쾌하게 큰 공간을 휘저으며 전개되는 것보다는 백병전의 단병상접(短兵相接) 방식으로 접전의 범위를 가능하면 작게 만들게끔 고안된 것이다.
검들끼리 서로 맞닥뜨려지면 초식의 급격한 전환이 어려워지고 서로의 간격이 좁혀진 상태에서 운신할 수 있는 공간이 최소화 되어, 당가의 독문(独门) 암기가 위력을 발휘하는 데 한층 유리한 상황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무림에서 흔히 사용되는 암기라 할지라도 서로가 접근한 상태에서는 피하기 더욱 어려운 법인데, 하물며 발사되는 암기가 당가보의 것이라면 더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그런데 조무기는 당오가 의도하는 검과 검의 상박(相搏)을 조금도 꺼리지 않는 듯, 공세를 늦추지 않고 사풍세우를 전개해 나갔다.
당오가 만약 암기로 그를 상하게 하려고 했다면 진작에 사용했지 아직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었을 거라고 굳게 믿었기에 당오와의 접근전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오는 조무기의 그런 의도를 알아챘지만 그 역시 상대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자신의 무공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고 조무기의 몸과 마음이 결투하기에 최선의 상태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조무기는 그가 존경하며 따르던 상관숙부를 백옥조룡(白玉雕龍) 계획에 속아 넘어가 자신이 살해했다는 사실을 방금 알게 되지 않았는가?
그런 조무기는 심적으로나 무공 면으로나 상태가 무척 저하되어 있을 거라 굳게 믿었다.
그래서 당오는 아직까지는 당가검법만으로 대처할 뿐 암기를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조무기의 공격이 그의 목숨을 위협하게 될 경우는 당연히 암기가 제 역할을 할 것이다.
한편 조무기는 제2식 '사풍세우(斜风细雨)'의 전개를 마칠 무렵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풍십삼식의 특징은 초반에는 매우 부드럽고 느리게 전개되다가 점차 중반 및 후반으로 가면서 더 강경해지고 빨라진다. 그래서 처음 1식과 2식은 물론 이어지는 몇 개의 초식들도 전개 속도가 빠르지 않고 운용도 완만한 편에 속한다.
그는 지금 원한에 사무쳐 실성한 듯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어떻게 유연한 수법만을 계속 사용한단 말인가?
반드시 미친 듯이 거친 수법을 써야만 했다.
잘못을 깨달은 조무기는 제2식 사풍세우를 마치는 즉시 제11식 '광풍급우(狂风急雨)'로 건너뛰었다.
검기(剑气)가 뻗쳐 지나는 곳에선 광풍이 몰아치며 소나기가 퍼붓듯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무수한 낙엽들이 하늘로 말려 오르거나 사방으로 휩쓸려 날아다녔다.
광풍급우의 매 초가 전개될 때마다 그 기세란 게 마치 어느 전설 속 거인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포효하는 듯하였다.
광풍(狂风)!
당오의 옷소매가 찢기듯 나부꼈다.
급우(急雨)!
사나운 빗줄기처럼 내려치는 검기가 당오의 전신 요혈을 베어가고 찔러갔다.
그러나 당오 역시 대단했다.
그는 광풍 속에서 우뚝 서 있는 커다란 나무 같았다.
옷소매는 펄럭이는데 몸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수중의 장검으로 세찬 맞바람을 일으키며 강한 빗줄기처럼 찔러오는 상대의 검초 하나 하나를 모조리 막아내고 있었다.
검과 검이 맞부딪는 소리가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열세 번 울렸고, 곧이어 바람이 멎고 비도 그쳤다.
땀이 흥건한 조무기의 얼굴은 붉어질 대로 붉어져 격분한 사람의 표정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조무기가 의도한 바였으니, 그는 광풍급우를 전개하는 도중에 고의적으로 내력을 촉발시켜 얼굴이 잔뜩 충혈되게 만들어, 마치 분노가 극에 달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의 얼굴색을 연출해 낸 것이었다.
그 다음 제12식 폭풍폭우(暴风暴雨)가 시작되었다.
폭풍폭우는 제11식 광풍급우처럼 빠른 속도로 전개되었지만 공격의 방향이 달랐다.
광풍급우(狂風急雨)는 오로지 상대의 전면만을 공격하였으나 폭풍폭우는 당오의 몸 주위 열세 군데의 요혈들을 노리며 검이 분산되어 휘감고 찔러가는 수법이었다.
그런데 당오는 이런 초식에 대해 무척 익숙한 듯, 상대의 몸이 움직이는 대로 자신의 위치를 변화시켜 조무기의 검이 어느 방향에서 공격해 오던, 마주 본 상태를 유지하며 검으로 막아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더욱 놀라운 일이 발생하였다.
조무기가 열두 번째 검초에서 일부러 작은 허점을 드러내어 상대를 유인하려 하였고, 이에 속은 듯 당오가 그 허점을 공략해 왔는데, 문제는 이때 검의 빠르기가 그야말로 번개같아서 조무기는 의도했던 반격은커녕 자신의 몸을 지키기에 급급해 할 수밖에 없었다.
조무기가 의도적으로 허점을 노출한 상태에서 대비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당오의 공격에 몸을 상하고야 말았을 것이다.
조무기는 당오와의 싸움에 있어서는 잔꾀에 의지하지 말고 진정한 실력으로 일체의 소홀함이 없이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한편 당오는 그 나름대로 해석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백옥조룡의 성과로 조무기에게 생겨난 심리적 불안정이 그러한 허점을 만들어 냈다고 여기고는 속으로 크게 기뻐하였으나, 조무기가 순식간에 그 빈틈을 숙련되게 보완하는 것을 발견하자 기쁨에 겨웠던 마음이 갑자기 가라앉아 버렸다.
동시에 그는 조무기가 허점을 고의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으며, 만약 그렇다면 조무기에게는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다고 유추하였다.
첫째는 상대를 유인하는 것이었고 두번째는 만약 유인해내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방심하게 만드는 것.
무엇이 되었든지 조무기는 겉보기와는 달리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당오는 다소 긴장이 되었다.
조무기의 이어지는 대풍십삼식의 마지막 초식은 천둥과 번개가 번갈아 내리친다는 의미의 '뇌전교가(雷电交加)'로서, 내력(內力)으로 검을 발출할 때 우레와 같은 소리가 동반되며 검초 하나하나의 미세한 변화가 번개 치듯 빠른 검식이었다.
검신이 비바람 속의 번갯불처럼 번쩍이고 '우르릉 쾅' 천둥 소리를 내며 당오의 상반신의 대혈들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당오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오늘 조무기와의 싸움에서 택한 일련의 수법들에 매우 만족해 하고 있었지만, '뇌전교가'가 일단 전개되자 그는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더이상 수세만 취하다가는 사나운 검초에 몸을 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지금 같은 접근전에서 암기를 발출하면 조무기를 죽일 수는 있다손 치더라도, 자신마저 같은 운명이 되고 마는 동귀어진(同归于尽)을 면할 수 없을 것이고, 이는 당오처럼 총명한 사람이 결코 선택할 리 없는 방법이다.
당오가 즐기고 있던 우월감은 어느덧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극도의 경계심이 자리잡았다.
당오는 심기일전 정신을 집중하여 경쾌한 신법으로 위치를 좌우전후로 잽싸게 변환시켜 가며 수중의 장검으로 섬광을 번뜩이며 조무기를 찔러갔는데, 그의 검이 마치 기다란 뱀으로 변신한 듯 검풍이 상대의 몸을 휘감고 검광은 혀를 날름거리며 조무기의 전신 요혈을 깨물 듯 공략하였다.
이는 당문 고유의 검법이 아니라 당오가 소동루(萧东楼)에게서 해약(解藥)과 교환하여 배운 '영사검법(灵蛇剑法)'이었다.
조무기도 소동루로부터 이 검법을 배운 적이 있다.
자연히 이 검법의 형식에 익숙하여 변화가 어디에 있는지 등 일련의 흐름을 꿰어차고 있었기에 그는 당오의 검이 다음 순간 어디를 향할지, 허점은 어디에 있는지 미리 알아 손쉽게 대응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쉽게 공략은커녕 당혹스러운 지경에 빠져들며 자칫하면 반대로 몸을 상할 뻔하였다.
실은 당오가 영사검법에 당가보의 암기 수법을 혼합시켜 사용하였기에 원래의 검법과는 상당히 달라졌고, 조무기는 당오의 영사검법에 그런 변화가 가미된 것을 몰랐기 때문에, 그로서는 당오의 허점을 찌른다고 했을 때 그것은 허점이 아니라 실은 함정이었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뇌전교가(雷电交加)'는 쾌속(快速)을 생명으로 하는 검법이었기에, 검초의 전개와 변환이 신속하게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함정을 빠져나올 수 있었지, 하마터면 당오의 검에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결국 아무런 성과도 없이 '뇌전교가'를 끝으로 대풍십삼식을 마친 조무기는 어쩔 수 없이 소동루에게서 전수받은 절세의 검법 중 하나인 '귀수팔식(鬼手八式)'을 전개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일단 우위를 차지한 당오는 상대에게 잠시의 여유도 주지 않고, 표범처럼 날쌔게 몸을 날려 조무기의 신변 가까이 다가서더니 '영사출동(灵蛇出洞)'의 수법으로 그의 오른 손목을 찔렀다.
조무기는 변초할 틈도 없이 서둘러 몸을 뒤로 일 보 물러섰으나 당오 역시 같은 속도로 몸을 전진시켜 '영사출동'이 계속 손목을 노리게끔 달라붙었고, 조무기는 즉시 한 걸음 더 뒤로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당오는 줄기차게 같은 거리를 유지했고 그의 검 끝은 조무기의 손목을 끊임없이 노리는 상태가 계속되었다.
당오의 이 같은 행보는 조무기로 하여금 '영사출동'과 같은 평범한 초식이라도 일관되게 운용함으로써 큰 효과가 발휘된다는 것을 깨우치게 만들어 주었다.
애석하게도 그런 섭리가 자신의 손이 아니라 상대의 손에 의하여 행해지고 있는 것을 목도해야만 하는 것이었지만, 아무튼 싸우는 와중에 적의 수법에 곤란을 겪으면서도 커다란 깨달음을 얻은 셈이었다.
그래서 그는 물러서는 도중 돌연 '노한추거(老汉推车)'의 수법을 발동하여, 마치 쇠약한 늙은이가 힘겹게 수레를 밀 듯 내력이 실린 왼손을 아주 단조롭게 앞으로 밀어냈고, 순간 매서운 경풍(劲风)이 한 줄기 당오를 향해 발출되었다.
당오로서는 상대의 손목을 찌르는데 거의 성공했다고 회심의 미소를 짓는 순간, 뒤로 물러서기만 하던 조무기가 예상치 못한 평범한 수법으로 반격을 가하자 순간 대처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양패구상(两败俱伤)을 감수하고 조무기의 일 장을 감수하는 것은 자신의 손해가 크다고 보았기 때문에, 부득불 조무기의 오른 손목을 찌르려던 장검을 수습하여 내습해 오는 조무기의 왼손 방향으로 돌렸다.
그러나 조무기의 왼손 '노한추거'가 실은 허초(虚招)일 줄이야!
당오가 검의 방향을 바꾸는 틈을 이용하여 조무기는 '귀수팔식(鬼手八式)'의 기수식(起手式)인 '귀귀괴괴(鬼鬼怪怪)'를 마치 유령처럼 소리도 없이 전개하여, 오른손의 장검으로 당오의 가슴 앞에 산재한 여덟 군데의 요혈을 찔렀고, 놀란 당오는 황급히 한 걸음 뒤로 물러난 뒤 변형된 '영사검법'으로 대응하였다.
이후 그들 두 사람의 지(智)와 용(勇)을 다한 박투(搏斗)는 서로가 뒤엉킨 채 한 시진 이상을 이어갔는데,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그들은 싸움이 너무도 격렬하여 조금도 한눈을 팔 수 없었기에, 그들 주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전혀 알아차릴 수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떡 장수, 완탕 파는 이 등 온갖 직업의 사람들이 모여들더니 부근의 지형지물에 몸을 숨기고는 숨을 죽인 채 두 사람의 용호상박(龍虎相搏)을 구경하고 있었다.
당오는 검술로만 싸워서는 절대 조무기의 적수가 되지 못하고, 유일하게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결국 기회를 틈타 암기를 쓰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그렇지만, 강호상 자신의 위상을 생각해서라도, 더 나아가서는 상관연련(上官怜怜)의 마음이 향했던 연적(戀敵)을 정정당당히 검술로써 이기고 싶었기에, 그는 암기 사용을 최대한 억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목숨을 부지하기에 급급해지면 무슨 신분 지위를 따질 수 있겠으며 체면 따위로 생명을 잃는 위험을 감수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당오의 왼손은 이미 품안에 들어가 독암기를 쥐고 있었다.
조무기의 검이 다시 꺽여 들어올 때, 당오 역시 힘을 더하여 부닥뜨렸고, 장검들이 서로 부딪는 순간 검을 통해 발출된 두 사람의 경력(劲力)이 크게 충돌하면서 일어난 폭발에, 밀리듯 그들의 몸은 동시에 뒤편 허공으로 높이 날랐다.
그리고는 하늘에서 재빨리 몸을 한 바퀴 뒤집더니 땅으로 돌아 내리며, 다시 상대를 향하여 공세를 이어가기 위한 준비 자세를 취하려 잠시 멈칫하였다.
이 찰나의 순간, 당오의 손에서 암기가 발출되었다.
당오는 자신이 마음 먹고 쏘아낸 암기가 도중에 저지된다는 일은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실은 강호에 나선 이후 당오가 암기를 사용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일단 암기가 그의 손을 떠났다면 목표를 놓친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고, 당오는 방금 사출된 암기들 역시 하나도 빠짐없이 조무기의 신상에 적중될 것을 의심치 않았다.
한편 조무기는 싸우는 내내, 하시라도 암기 공격이 있을지 몰라 조심하고 대비는 하고 있었지만, 당오의 암기 발출 솜씨가 이리도 상상을 초월해 치명적일 줄을 몰랐다.
그래서 당오의 손이 번뜩이는 순간 조무기는 자신의 명운이 다했다는 것을 인정하며 스스로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천하의 당오가 쏘아낸 암기들이 단 하나도 조무기의 몸에 닿지 않았다.
그렇다고 조무기가 막아낸 것도 아니었다.
암기들을 막아낸 것은 놀랍게도 이것저것 잡다한 먹거리들이었다.
떡이며 전병, 완탕, 유조(油条), 소병(烧饼) 등등이 사방에서 날아들었고, 조무기를 향하던 암기들은 모조리 그것들에게 가서 꽂히거나 부딪치며 땅에 떨어져 버렸다.
잠시 후 조무기는 정신이 돌아왔지만 워낙 크게 놀라 전신에 식은땀이 가득하였으며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이윽고 정신을 수습한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더욱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오(唐傲)가 이미 죽은 채 땅바닥에 엎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를 둘러싸고 있는 한 무리의 장사꾼 차림의 인물들에 의해 당오가 죽임을 당한 것이 분명했다.
조무기는 그들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바로 소동루(萧东楼)의 휘하의 사람들로서 모두 일신에 막강한 무공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인물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소동루가 일단 호출하면 그들은 아무리 먼 곳에 있더라도 즉시 달려오는 충성스런 부하들이었다.
"당신들은 왜 그를 죽였소?"
조무기가 외치듯 큰 소리로 물었다.
"당오가 우리의 주인을 살해했기 때문이오."
하고 떡 장수가 대답했다.
"당신들 주인이라면, 소동루(萧东楼)?"
"그렇소. 그들은 비열한 수단으로 우리 소왕야(萧王爷)를 모살(谋杀)하였소."
"소(萧)왕야? 당신들 주인이 왕야(王爷)였단 말이오?"
"예전에 그러셨지. 물론 우리들에게는 영원히 왕야라오."
조무기는 그제서야 홀연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소동루가 어찌 그리도 돈이 많았고, 구화산의 거처는 얼마나 화려했던지, 또 그가 원하는 것은 언제고 무엇이든 다 가질 수 있었던지... 그는 원래 일국(一国)의 군주(君主)였던 것이다.
조무기가 물었다.
"당오가 무슨 비열한 수단으로 그를 해쳤소이까?"
떡 장수가 그들의 우두머리인 듯 보였다.
"왕야께서는 해마다 각종 진귀한 골동품이나 보물 혹은 드물게는 검법 등으로, 당문에서 해약(解药)으로 바꾸곤 하셨는데, 이 얘기는 당신도 알고 있지요?"
조무기가 고개를 끄덕이었다.
소동루가 당오에게서 해약을 받은 후 '강시(僵尸)'라는 기인(奇人)에게 가서 해약을 건네면, '강시'는 해약을 복용 후 강호상에서는 그만이 할 수 있는 일타통혈(一打通穴)의 수법으로 소동루의 막혀 있는 전신 기경팔맥(奇经八脉)을 일시에 타통(打通)시킴으로써, 소동루의 생명을 일 년씩 연장시켜 주곤 하였다는 사실을 조무기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떡 장수의 말은 계속 되었다.
"당오는 올해도 왕야에게 약을 주었지만 실은 해약(解药)이 아니라 독약(毒药)이었소."
조무기는 당오의 풍격(风格)으로 보아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는지 믿어지지 않았다. 도저히 믿을 수는 없었지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은 되었다.
강시(僵尸)는 건네 받은 해약을 복용한 후 소동루의 기경팔맥을 풀어 주기 위한 운공을 시작했지만, 독약이 발작하여 목숨을 잃게 되었고, 치료를 받지 못한 소동루는 구화산의 처소로 돌아온 후 전신의 경맥이 완전히 굳어져 생명을 잃고 말았다.
그리하여 하나는 강호제일검법(江湖第一劍法)의 보유자였고 다른 하나는 강호제일기공(江湖第一奇功) 소유자로서, 강호 무림에서 특출나게 독행(独行)하던 두 절정 고인(高人)들은 애석하게도 목숨을 잃고 말았다.
떡 장수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우리가 나중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해약에 독 성분을 몰래 섞은 사람은 따로 있었소."
"누구란 말이오?"
"당결(唐缺)."
"당결? 그가 왜?"
"그는 당오가 죽어야 당가보를 지배할 수 있으니까."
조무기는 아무 말도 않은 채 고개만 끄덕이었다.
당결은 능히 그럴 수 있는 인물이다.
떡 장수의 말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당결은 착각하고 있었소. 그렇게 한다고 당가보를 장악할 수 없었을 뿐더러,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당가보를 궤멸시키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오."
조무기가 크게 놀라며 다시 물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시오?"
"중원 각지에 흩어져 있던 왕야의 수하 장수들과 병사들이 복수를 위해 소집되었고, 결국 당가보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처단되어 왕야의 영전에 제물로 바쳐졌소. 남은 유일한 인물이 오직 당오뿐이었소."
조무기는 다시 한번 경악했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당가보가 강호에서 완전히 소멸됐단 말인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제 강호상에 대풍당(大风堂)에 맞설 만한 세력은 없는 셈이오."
떡 장수가 말을 마치고 등을 돌리자 다른 모든 이들도 여기저기 흩어진 자신들의 물건들을 챙기더니 일제히 떠나가기 시작하였다.
조무기가 황급히 외쳤다.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아직도 우리에게 볼 일이 있소?"
떡 장수가 물었다.
"나 역시 소(萧)왕야에게 은혜를 입은 몸으로 그의 제자나 다름없소이다. 떠나시기 전 존명이라도 남기..."
조무기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떡 장수가 입을 열었다.
"부질없는 일이오. 왕야께서는 망국(亡国)의 군주였고 우리는 그의 제자 겸 휘하 장수들로서 일심으로 그를 받들어 고토(故土)를 수복하려 하였으나, 그분이 그리도 허무하게 가심으로써 우리의 꿈은 사라진 셈이오. 어쨌든 오랜 세월 우리는 이미 방랑하는 데 익숙해져 있어 앞으로 대강남북(大江南北) 어디를 가게 되든 그곳을 우리의 집으로 삼을 뿐, 이름이나 명호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다네. 젊은 친구, 스스로나 잘 돌보시게."
그들은 떠나갔다.
떠나기 전 떡 장수가 더해준 말 한 마디가 조무기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참, 당가보의 인물들 중 당화(唐花)는 행방이 묘연해 처리하지 못했소. 그리고 왕야께서 숨을 거두시기 전 우리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었소.
-조무기는 위봉랑(卫凤娘)과 배당(拜堂)을 마치기 전에는 절대 죽을 수 없다.-"
조무기는 당오의 시신을 그의 아버지 옆에 묻고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고 웅장한 사자산(狮山)은,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 소리 외에는 원래의 정적을 다시 찾은 채, 묵묵히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조무기의 가슴 속에는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강호의 패권에 대한 야욕으로 동분서주하던 두 육신이 오후가 다 지나기도 전에 이곳에 뼈를 묻고 누워 있다니!
자식마저 속일 수 있고 친형제들끼리도 골육상쟁을 마다하지 않게 만드는 강호(江湖)란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존재란 말인가?
조무기의 마음 속에 강호란 곳은 더이상 미련을 두고 머물 만한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점점 더 짙어졌다.
대풍당이 강호의 패권을 잡는다고?
언제 또 어떤 세력이 암묵간에 힘을 키워 격렬한 패권 다툼이 다시 일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대풍당은 사공대숙(司空大叔)이 계시다.
피비린내가 끊이지 않는 강호는 나와 더이상 아무 상관이 없다.
그의 머리 속에 구화산(九华山)의 동굴 모습이 떠올랐다.
그곳이야말로 조무기가 유일하게 마음의 평안을 얻고 연검(练剑)에만 집중하기에 더 말할 나위 없이 적합한 곳이었다.
그렇다고 그곳에서 일생을 보낼 것인가?
모르겠다.
언젠가 때가 되면 산에서 내려 올지 모른다.
그리고 길을 가다 불의(不义)를 보면 검을 뽑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화산으로 향하기 전 할 일이 있었다.
한 사람을 찾아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봉랑(卫凤娘).
(21장 마침)
첫댓글 백옥조룡(白玉雕龙) 번역을 마쳤습니다.
고룡(古龙)이 그의 걸작 중 하나인 전편(前篇) 백옥노호(白玉老虎)를 미완(未完) 같은 결말로 봉해 놓았기에, 그 뒤가 궁금하여 중국어 공부 겸 자유번역방에서 도전을 시작한 지 어느덧 10개월이 경과했군요.
어쭙잖은 초보자의 번역을 읽어 주시며 격려하고 지도해 주신 모든 중무동 회원님들께 댓글로나마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그 동안 애 많이 쓰신 정성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지금까지 그저 편하게 잘 보고 있습니다.
수고와 고생하여주신덕분에 재미있게 잘읽었습니다! 더욱더 발전과 건승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동안 수고가 많았습니다.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장로님의 노고로 고룡의 비급 한 편을 일관해서 볼 수 있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감사히 잘 갈무리 해서 읽도록 하겠습니다^^
예측불허의 전개에 더하여 수준 높은 번역물이었습니다.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
고룡의 미번역 작품을 읽을 수 있게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그간의 노고에 다시 한번 감사 인사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그동안의 수고에 감사드림니다.
올려주신 그동안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그동안의 노고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비그친 3월 28일, 일요일의 아침이 조용합니다.
이제 제가 소장하기 위한 갈무리를 마쳤으니 베란다로 나가 창문을 열고 신선한 대기를 호흡하며 기지개를 펴야겠습니다.
새삼 노고에 감사드리면서 항상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백옥노호는 고룡의 작품 가운데에서도 대장부들의 의기가 돋보이는 수작입니다. 그래서 후속작 백옥조룡에 대한 기대가 높았구요. 그러나 대필이 된 데다가 평이 매우 나빴기 때문에 실망하고 있었는데, 덕분에 읽어볼 기회가 생겼습니다. 수고 많으셨고요, 감사드립니다.
수고에 감사드림니다.
대단히 수고하셨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우울할 때 기분좋은 선물 받은 느낌입니다. ^^
쉽지 않은 번역작업인데 잘 마치셨네요.
축하드립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고마운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동안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