反擊作戰(2)
元山, 咸興地區戰鬪
- 목차 -
1. 敵情과 海兵隊作戰計劃
2. 杆城地區掃蕩戰
3. 高城지구 소탕전
4. 馬轉里지구 전투
5. 東陽지구 전투
6. 元山防禦作戰
7. 咸興地區防禦作戰
1. 敵情과 海兵隊作戰計劃
仁川에 상륙하여 남진하는 미 제7사단과 洛東江전선에서 북상하던 미 機甲 제1사단이 9월27일 西井里에서 연계를 갖게 되면서부터 적의 부분적인 반격조차 없게 되었다.
북진하는 육군 제1군단 제3사단은 10월1일 襄陽부근에서 38도선을 넘고 10월10일 元山을 점령한 후 계속 진격하여 10월19일에는 赤都,平壤을 점령하였다. UN軍의 '평양' 입성으로 적, 인민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거의 없어지고 UN군 및 국군은 韓滿국경으로 맹진격을 계속하였다.
한편 퇴로를 차단당한 적은 智異山을 비롯하여 太白山脈 및 38도선 이북 산악지대로 잠입하여 유격전으로서 지방의 치안을 교란할 뿐만 아니라 가증하게도 주둔부대에 대한 공격도 감행하기도 하는 그런 상황이었다. 더욱이 38선상의 '태백산맥'의 줄기인 金剛山 산악지대는 적의 독무대일 뿐만 아니라 북으로 도주하는 적의 유일한 통로로서 심지어 연락소까지 설치하는 형편이었다.
이에 따라 이 지구의 소탕전이 시급히 요청되므로 京仁地區作戰과 北漢江遮斷作戰을 끝마친 海兵隊는 仁川을 출항하여 해로로 元山방면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 작전은 미 해병 제1사단과 협동하여 수행하는 새로운 작전이었으며 海兵隊 제3대대 및 제5대대는 10월7일 오후 승선을 완료하고 '원산'을 향하여 '인천'항을 출항하였으며 제1대대는 10월18일 LST艇에 승선하여 강원도 墨湖로 향하였고 제2대대는 '목포'지구의 치안을 담당키 위하여 10월18일 18:00시 LST 丹陽號로 각각 '인천'을 출항하였다.
1stMarDiv, Wonsan, 10/26/50
元山에 상륙한 해병대는 平壤-元山선을 차단하고 차단선이남의 산악지대에서 준동하는 적을 소탕함으로써 UN군의 平元大路 이북의 작전을 유리하게 하는 임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묵호'방면으로 출동한 제1대대는 '묵호'에 상륙하여 이 지구에 경계배치하고 東海岸지구로 북상하는 적을 '강능', '삼척'지방에서 포척, 섬멸하고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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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대와 제5대대를 탑재하고 '인천'을 출항한 Victory호는 永興灣을 중심으로 부설된 적의 機雷로 인하여 '원산'입항이 약간 지연되어 10월27일 '원산'에 상륙하게 되었다. '원산'에 상륙한 해병대는 제3대대를 미 해병 제7연대에, 제5대대를 미 해병 제5연대에 각각 배속시켰다.
제3대대는 제9중대, 제10중대, 제12중대, 제11중대, 및 본부중대 순으로 상륙용 주정으로 상륙한 후 미 해병대에서 제공한 차량에 분승하여 德源으로 향발하였으며 德源天主敎會에서 宣誓하였다. 제3대대는 미 해병 제1사단과 협동하여 長津湖방면에 집결한 적을 공격, 섬멸하기 위하여 사단본부작명에 의거하여 10월29일 咸興으로 이동하였으나 다시 사단작명으로 배속해제되어 18:30시 咸興제일중학교를 출발하여 '원산'으로 복귀하였다. 또한 제5대대 역시 10월30일 미 제10군단작명에 의하여 미 해병 제5연대의 배속에서 해제되어 '원산'으로 복귀하였다.
'원산'만 일대 지형도
LST 801艇으로 '묵호'에 상륙한 제1대대는 江陵, 三陟방면의 적정을 수색하고 우군과 연락을 취하고저 하였으나 당시 蔚珍, '강능', '삼척', 및 '묵호' 등지의 패잔병은 五臺山을 타고 '양양', 高城, 通川방면으로 도주하였음으로 부대는 '묵호'에 주둔하기보다 '원산'에 상륙하여 북상, 도주하는 패잔병을 '통천'방면에서 섬멸할 것을 결정하고 10월26일 '묵호'를 출항하였다.
701艇의 水路안내를 받으며 적이 부설한 機雷를 피하면서 '원산'에 입항하여 10월 28일 明沙十里에 상륙하여 元山高級中學校에 숙영하였다. '원산'에 집결한 해병대는 제3대대 및 제5대대를 金剛山 산악일대에서 준동한는 적을 포촉, 선멸하기 위하여 '원산'을 출발하여 松島津방면으로 향하게 하였다.
제5대대는 우선 庫底에 상륙하여 도보로 高城으로 향하였으며 제3대대는 제1대대와 함께 '송도진'에 상륙하였다. 이와같이 38도선이북 동해안 각지에 상륙한 해병대는 '고성'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11월4일 각 대대는 이 지역에 집결하였다.
太白山脈을 타고 북상하는 적은 '금강산악' 및 乾鳳寺산악에 근거를 두고 東海의 要所,'송도진', '고성', '거진', '간성, 등 일대의 부락을 습격하고 있어서 지역의 형세는 자못 騷然하였다. 또한 '삼척', '강능', '양양' 등지로부터 패잔병들이 간단없이 북상 중에 있었으므로 '고성'에 집결한 해병대는 이들 패잔병 소탕을 위한 면밀한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즉 제5대대는 예비대로서 사령부일대를 경비하고 제1대대는 '고성'-'철원'을 통하는 철도를 기간으로 동측의 적을 소탕하기 위하여 우선 '송도'- '간성'을 통하는 철도와 도로를 확보하게 하고 제3대대는 '고성'-'철원'을 통하는 철도의 서측의 적을 소탕하기 위하여 우선 '고저'-'고성' 간의 도로를 확보케 하였다.
2. 杆城地區소탕전
乾鳳寺일대에 근거를 둔 패잔병 약 3,000명은 주로 소총과 약간의 경기를 소지하고 杆城지역일대, 海上里, 八音里, '원천리'일대에 출몰하고 있었다. 더욱이 11월5일 현재로 '원천리'에만 1,500명의 패잔병이 주둔하고 있었다하니 그 수는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고성'에서 '간성'에 도착한 제1대대는 '간성'병원에 위치하고 제2중대는 '간성'동북방 고지에, 제3중대는 '간성'서남방 고지에, 및 제4중대는 '간성읍'내에 각각 배치하였다.
11월6일 부대대장 金鍾植 대위가 지휘하는 제2중대와 제3중대로 편성된 공격부대는 제4중대로부터 81mm 박격포 4문, 중기 4문의 배속을 받고 6일 07:00시를 기하여 '원천리'를 공격하여 7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 8명의 귀순병을 얻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이어 10월7일과8일도 계속하여 '해상리'를 비롯한 부근일대를 수색하였다.
3. 高城地區소탕전
高城地區의 잔적소탕을 담당한 해병대 제3대대는 11월5일 대대병력을 溫井里로 이동하여 이곳을 중심으로 萬物洞일대를 수색할 것을 결심하였다. 적정수집에 노력하던 중 적 약 3,000명이 水洞里, 姑味成里에 출현했다는 적정을 입수하자 대대장 金潤根 소령은 '온정리'로의 부대이동을 중지하고 '간성'에 주둔 중인 제1대대와 합동하여 이 적을 협공하기로 결심하였다.
먼저 제1대대를 '고미성리'를 공격하게 함으로써 도주하는 적을 그들의 퇴로인 普玄里에서 제3대대가 포촉, 섬멸할 작전계획하에 제3대대는 '보현리'로 이동하려 하였다. 때마침 입수된 정보에 의하면 패주일로에 있던 적은 교전할 사기와 의욕조차 잃고 도주하기에만 바쁜 꼴이라하며 제1대대의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북상 도주하였다는 것이었다.
제3대대는 이 적을 '계잠령'에서 포촉하고저 百川橋里로 이동하여 부근일대를 수색하였으나 종내 접적이 없었다. 적은 해병대의 공격을 두려워하여 산악지대의 도처에서 불규칙적으로 출몰하여 민가에서 식량을 약탈하고 있었으며 11월7일에는 新垈里부근에 500-700명의 적이 집결하였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다음날 8일 08:00시 주력을 '경고'로 이동, 배치하고 제9중대가 '신대리'를 공격하였으나 역시 접적치 못하였다.
이와같이 제3대대는 '고성'을 중심으로 연일 광범위한 패잔병의 색출작전을 감행하였으나 접적치 못한채 사령부 명령에 의하여 9일 松島津에 집결하여 제5대대와 함께 미 제10군단 예하에 배속되어 다시 '원산'을 향하여 이동하였다.
제3대대가 '원산'으로 이동한 후 '고성'지구는 '간성'에 있는 제1대대가 통합 담당하게 되었다. 제1대대는 제1중대만을 '간성'에 배치하고 주력은 '고성'으로 이동하였다. 11월14일 15:30시 제1대대는 乾鳳寺를 공격하려 하였으나 '건봉사'의 적은 이미 산악지대를 통하여 북상 도주하여 버렸기에 상당한 병력이 '고미성리'에 집결되어 있을 것으로 예상되어 '고미성리'를 공격할 것을 결심하였다.
제1대대장 高吉勳 소령은 제1중대를 '건봉령'을 넘어 泗川里로 진격케 하고 제3중대 및 제4중대를 차량으로 '갈마현'으로 진출케 하여 14일 06:00시를 기하여 남북으로부터 협공케 하였다. 그러나 '고미성리'의 적의 주력은 이미 도주해 버리고 잔적 약 500명 마저 해병대의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산중으로 둔주해 버렸다.
이에 따라 제1대대의 면밀한 '고미성리'작전도 수포로 돌아가고 계속 적정수집에 노력하던 중 18일 新垈里방면에 적 패잔병 약 70명이 출현하였다는 정보에 접하자 李西根 소위는 즉시 2개 분대를 지휘하고 '신대리'를 공격하여 5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해병대의 공격과 추격에 패주하던 적은 퇴로를 잃고 長箭-通川 간의 해안통로를 위협하였다. 이때 항시 출동준비를 하고 대기 중에 있던 제1대대는 즉시 부대대장 金鍾植 대위가 제2중대와 제4중대의 1개 소대를 지휘하여 11월16일 04:30시 열차편으로 '통천'으로 급히 출동하였다.
通川에 도착한 金鍾植부대는 주로 철교와 '통천'발전소의 경비에 임하는 한편 '고성'- '통천' 간의 도로의 확보 및 경비에 임하였다. 11월25일 '고성'에 주둔 중인 제1대대본부에서는 李西根 소위를 2개 소대를 지휘하여 內金剛, 新豊里일대를 수색하게 하고 한편 裵東赫 소위를 1개 소대를 지휘하여 襄陽까지 수색케 하므로써 동해안 도로일대의 경비를 엄중히 하였다. 더욱이 '통천'파견대에서는 中垈里발전소를 수색하는 등 부근일대의 적을 색출하기에 노력하였다.
11월27일 제1대대는 작명에 의거 安邊으로 이동하고 제5대대제23중대만이 '통천'에 잔류하여 발전소일대의 경비임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러는 중에 제23중대는 新高山 등지의 경계에 임하고 있던 제5대대 주력과 함께 12월3일 咸興에 도착하였다.
4. 馬轉里地區전투
해병대가 '원산'에 상륙한 이래 가장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한 곳이 바로 馬轉지역이었다. 당시 '마전리'에는 미 해병 제7연대소속 1개 중대가 준험한 馬息嶺에 파견되어 보급로를 확보하고 있었다.
이 지역의 적은 남한일대에서 타격을 받고 북상한 패잔병들로서 平壤-元山 간의 대로일대에서 정규군과 합류하여 재편성되어 전선에 투입된 부대로서 전선에 개입된 중공군과 호응하여 유격전으로 平元大路를 위협하고 있었다. 더욱이 이들 적은 만약 중공군의 공세가 예상대로 주효하면 즉시 '원산'을 공격하려는 전략적인 잔류부대였다. 이 적은 사기도 자못 왕성하였고 또한 무기도 대부분 소지하고 있었다.
'원산'에 도착한 제3대대는 즉시 미 해병대 제7연대장으로부터 "제7연대제3대대와 합동작전으로 '마전리'에서 북상, 패주하는 적, 인민군을 저지, 섬멸하라"는 명령을 받고 미 해병대의 알선 차량으로 '마전리'로 향발하여 요소에 부대를 배치하고 적의 야습에 대비하여 11월10일 18:30시부터 익일 06:30시까지 화기취급을 엄금하고 경비에 임하였다.
이때부터 제3대대는 사령부로부터 이탈하여 미 해병대와 합동작전을 수행하게 되었고 상황은 날로 긴박함을 고하는 전투를 예상하여 전 장병은 정신무장을 더욱 견고히 하였다.
11월11일 제3대대는 馬轉里지구에 경계, 배치되어 있었으며 '마전리'후방에 위치한 後陵山일대에 약 500명의 패잔병이 약간의 중화기를 소지하고 준동하고 있음을 탐지하였다.
이때 제3대대장 金潤根 소령은 즉시 전 장병에게 출동을 명하고 직접 부대를 지휘 '후능산'일대에 잠복한 적을 공격하였다. 출동부대는 전후 4시간에 걸친 교전끝에 이들 패잔병을 격퇴하였다. 이 전투에서 출동부대는 60명의 적을 사살하고 쏘식장총 1정, 기병소총 7정 기타 실탄 다수를 노획하였다.
다음날 12일 차량정비와 연락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오던 통신소대장 李斗贊 중위와 부관 沈善澤 소위 이하 9명은 馬轉里중복에 도착하자 적군, 인민군 약 50명의 기습을 받아 약 1시간에 걸친 교전을 계속한 끝에 적은 6명의 시체를 유기하고 도주하였으나 이 전투에서 沈善澤 소위가 전사하고 또한 3명의 해병이 전사하였다.
적은 또다시 약 1개 대대의 병력으로서 裕洞里에 출현하였다. 제3대대장 金潤根 소령은 제9중대장 黃泳 중위의 지휘하에 馬轉里-裕洞里 간의 도로일대를 공격케 하였다. 제9중대장 黃泳 중위는 해병대원 140명을 지휘하여 11월12일 10:20시 '마전리'를 출발하여 적의 전초진지를 넘어 '유동리'를 기습하여 다대한 전과를 올리고 이 적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출동부대가 통과한 움푹진 지대에 약 100명의 적의 복병이 매복하고 있었음을 미처 알지 못하였다. 이들 복병들은 '유동리'에서 패배한 그들의 주력과 호응하여 역습으로 출동부대를 포위할 기세였다. 이때 제9중대장 黃泳 중위는 즉각 SCR-300 무선통신기로 본부에 연락, 지원을 요청하여 야포 및 박격포의 지원으로서 12:00시 이들을 격퇴하고 출동부대는 위험을 모면하였다.
11월13일 전일 '유동리'에서 패배한 적이 다시 月山里에 집결하였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제10중대장 鍾德遠 중위가 병력을 인솔하고 출동하였다. 출동부대가 도로를 따라 수색, 전진 중 적의 전초진지의 매복병으로부터 불의의 사격을 받자 즉시 전투배치하고 교전에 임하였으나 적은 주력부대의 지원으로 증강됨에 따라 부득기 안전지대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공격부대에 배속된 제12중대 선임장교의 침착한 행동과 중대장의 용감하고 주도면밀한 지휘로 근소한 희생을 내었을 뿐만 아니라 야포 및 박격포의 지원하에 역습을 감행하여 적을 격퇴하였다. 야간이 되자 적은 야음을 이용하여 제3대대 진지에 공격하여 왔다. 이때 제3대대는 그 동안 입수한 정보를 종합한 결과 이미 이같은 적의 공격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대기태세에 있었다.
적의 기습이 시작되자 제3대대는 즉시 배치하여 공격해 오는 적을 진전에서 3분 간의 교전끝에 완전히 격퇴하였다. 제3대대에서는 계속하여 朴東烈 중위가 지휘하는 제11중대를 '유동리'일대를 수색하게 하였다.
전일 공격에서 실패한 적은 또다시 야음을 이용하여 제3대대 진지에 정찰대를 투입하여 왔으나 黃泳 중위가 지휘하는 제9중대에 의하여 곧 격퇴되었다. 적은 연일연야 압도적인 병력을 투입하여 정찰활동과 국부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왔으나 해병들은 그때마다 용전하여 적을 격퇴하였다.
전과 및 피해는 다음과 같다.
전과: 사살 152명 사상 154명 포로 3명
피해: 전사 2명 부상 11명
5. 東陽地區戰鬪
平-元大路일대에서 출몰하는 敵, 人民軍은 그 수가 2,500여 명으로서 阿虎飛嶺, 上自開洞, 下自開洞, 土基里, 및 東陽 등지에 약 1개 중대의 병력을 배치하여 부근일대에서 준동하고 있었으며 '마전리'서방 70km 지점인 陽德에는 UN군 1개 대대가 방어에 임하고 있었다.
이같이 平-元大路를 위협하고 있던 적은 일익 증강되고 있었으며 더욱이 中共軍의 공세가 날로 강대해짐에 따라 '마전리'에 주둔하고 있던 해병대 제3대대는 '양덕'에 주둔 중인 미군과 연계를 갖기 위하여 11월16일 11:00시 제11중대, 제12중대, 본부중대, 제10중대, 및 제9중대의 순으로 행군하여 접적 없이 東陽으로 이동하였다.
11월17일 東陽里에 도착한 제3대대는 20:00시 완전히 진지구축을 완료하였다. 정보에 의하면 적은 약 1,500명이 소화기로 무장하고 '동양리'남방 4km 지점인 孔眞里, 松山里, 德岩里일대에 잠복하고 있으며 약 1,000명의 적이 '마전리'-'동양' 간의 수송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九龍里에 근거를 두고 '상자개동', '하자개동'일대에 출몰하고 있다고 하였다.
11월20일 '구룡리'일대의 적이 '토기리'일대에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고 있다는 적정을 입수하자 제3대대제11중대장 朴東烈 중위는 이 적을 섬멸하기 위하여 출동하였으나 접적치 못하고 '자개동'으로 이동하여 이 지구에 경계배치하였다.
李昌煥 三曺
이때 출동한 제11중대의 1소대의 李昌煥 三曺는 尖兵분대장으로서 선두에서 행군 중 돌연 중화기로 장비한 적 약 200명으로부터 기습사격을 받았다. 중대는 곧 산개하여 전투배치하였을 때 이미 첨병분대장은 과감히 적진에 돌입하여 적의 중화기를 제압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적의 흉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에 격분한 제11중대 전장병은 중대장 朴東烈 중위의 진두지휘하에 적진에 육박, 공격하였으나 적은 수적으로 우세할 뿐만 아니라 중장비를 갖추고 지형의 이점을 이용한 맹사격으로 인하여 제11중대는 전진을 저지당하고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제11중대는 박격포의 연 3발의 사격 신호로 본부에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적의 화력은 빗발치듯 날라오고 있었으며 시간이 갈수록 더욱 치열해지고 있었다. 중대장은 더 이상 지원만을 기다리는 것은 자멸을 초래할 뿐임을 판단하고 화기소대의 사수인 韓奎澤, 부사수 洪順葛 및 탄약수 朴泳 등의 지원사격하에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다음날, 11월21일에도 적은 계속하여 東陽里일대에 병력을 증강하고 있었으며 土基里에 또다시 침입하는 등 발악적인 출몰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제11중대는 '토기리' 및 '자개동'일대를 수색하면서 敵影을 찾았으나 별다른 접적은 없었다.
제3대대는 연일 계속된 수색정찰과 이동으로 장병들의 심신의 피로는 극심하였고 특히 보급지원에 커다란 타격을 받아 작전상의 고초는 적지 않았다. 당시 '동양'-'마전리' 간의 보급로는 완전히 적의 위협권내에 있었다. '원산'에 주둔 중인 보급부대는 수차 보급로 타개에 노력하였으나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11월23일 07:00시 보급부대는 전차의 엄호를 받으며 차량 10대에 보급품을 적재하고 '마전리'를 출발하였으며, 때를 같이하여 '동양'에 주둔 중인 제3대대는 九龍里에서 보급부대를 호송하기 위하여 '토기리'를 경유 '구룡리'까지 전진하였다. '구룡리'에 도착한 제3대대는 돌연 적으로부터 중화기의 사격을 받게 되자 곧 전투배치하고 적과 교전을 시작한 제3대대는 약 7시간에 걸친 교전끝에 적을 격퇴하고 보급로를 확보한 후 보급품을 수송하기 시작하였다.
이같이 '동양'에 주둔 중인 제3대대의 보급지원이 여의치 못함을 인지한 적은 병력을 증강하고 유격활동을 지속하였다. 한편 25일에는 '양덕'에 주둔 중인 미군이 철수하고 治安隊가 대신하여 경비에 임하고 있었으나 成川, 孟山 등지로부터의 적의 압력으로 철수하게 되자 적은 '동양'에 주둔 중인 해병대 제3대대를 고착시켜 놓고 섬멸하고저 위협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하여 제3대대는 '원산'으로부터의 지상보급이 완전히 두절되어 공수보급에 의종할 수밖에 없었다.
20일 제3대대는 최종적으로 보급로를 타개, 확보하기 위하여 '마전리'에 주둔 중인 미 해병대 제7연대로부터 전차 4대, 항공기 4대 및 야포의 지원하에 龍浦里로 진출하였다. 도중 銀畓洞, 石山里 및 '자대동'일대에서 우세한 적과 조우하였으나 이를 격퇴하고 보급로의 타개에 성공하고 '용포리'에서 보급품을 인수하였다.
이날 밤 적은 1개 연대의 병력으로 '동양'의 아군진지를 포위, 공격하여 왔다. 제3대대는 신속한 행동으로 전투배치하여 약 10시간 여의 교전끝에 이를 격퇴시켰다.
11월27일에는 제3대대에 탄약을 보급하기 위하여 미군의 지원으로 '마전리'에서 '동양'으로 향한 보급부대가 '백개동'일대에서 저의 기습으로 인하여 미군 70여 명이 전사하고 50여 명의 부상자를 내었고 박격포탄 1,800발을 피탈당한 대참사가 발생하였다.
이에 대하여 제3대대는 이 탄약이 孔眞里방면으로 운반될 것을 예상하고 제9중대장 黃泳 중위에게 즉시 '공진리'로 출동할 것을 명하였다. 제9중대는 전진 중 土基里에서 적의 기습을 받아 이들과 교전하여 적을 격퇴하였으나 출동목적은 이루지 못하고 귀대하였다.
11월29일, 東陽일대에서 준동하던 적은 孟山지구에서 산맥을 타고 남하한 정규군과 합류하여 중박격포로 장비된 1개 연대 병력으로서 '동양'을 포위하고 아군 진지에 박격포 사격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소화기로 장비된 제3대대의 고전은 형용하기 조차 어려운 정도였다.
한편 陽德지구에서는 포격이 은은해지고 있는 가운데 적은 이중 삼중의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아군 진지에 무수한 박격포 사격을 시작하였다. 제3대대는 상황을 판단한 후 불리함을 알고 '동양'에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철수작전에는 막대한 희생과 격전이 예상되었음으로 전장병은 대대장과 운명을 같이 할 것을 각오하고 최후의 일각까지 해병의 감투정신을 발휘할 것을 마음 깊이 결의하고 연일 계속되는 격전으로 피로한 몸을 이끌고 철수로를 타개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12월2일 '동양'을 출발한 제3대대는 '토기리'에서 '자개동'까지 약 8km를 철수하는 동안 잠복, 대기한 적으로부터 죄우로 간단없이 공격당했으나 해병들은 이를 격퇴하면서 '용포리'까지의 철수에 성공하여 그곳에서 '마전리'로부터 도착한 지원부대와 합류하였다.
이와같이 겹겹이 중첩된 포위망을 끝내 돌파할 수 있었던 것은 대대장 金潤根 소령의 뜻을 받들어 전장병이 명예로운 죽음을 각오한 상하일치의 대응과 상경하애의 해병정신의 발로의 결과였다.
전과: 사살 190명 사상 130명 쏘식장총 58정 경기 1정
피해: 전사 2명 부상 4명
6. 元山防禦作戰
自開洞일대에서 東陽지구의 해병대 제3대대를 위협하던 적은 제3대대가 '마전리'로 철수함에 따라 '마전'지구로 집결하고 12월2일에는 적의 대부대가 馬息嶺을 넘어 元山으로 지향하였고 또 다른 약 3,000명의 적은 德源지구에서 준동하고 있었으며 더욱이 '원산'시내에는 적의 유격대의 활동이 성행하여 자못 암담한 사태를 이루고 있었다.
11월27일 高城, 通川지구에서 '원산'남방 葛麻로 이동한 제1대대와 東陽에서 철수한 제3대대는 미군과 협동하여 이 지역의 방어에 임하였다. 12월4일을 기하여 아군은 전부 咸興으로 철수하였고 '원산'에는 해병대 제1대대와 제3대대외에는 미 구축함 4척만 남아 방어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당시 해병대의 임무는 '원산'을 사수하려는 그런 적극적인 방어는 아니고 '원산'을 방어하므로써 가능한한 병력의 손실을 최소로 줄이고 비행장의 확보와 군수물자의 반출을 용이하게 하는 것이었다.
제1대대 부대대장 金鍾植 대위는 제5중대 및 81mm 박격포 2개반, 기관총 1개반을 지휘하여 '원산'에 침입하려는 적을 외곽에서 저지하였고 제1중대는 館豊里에서, 제3중대는 中淸里에서 각각 미군과 임무를 교체하고 방어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익 증강되는 적의 공세와 우군의 전투능력을 고려하여 해병대 제1대대는 방어진지를 축소하고 '원산'교외 新高山里, 서동리, 見山里, 星羅里, 및 山祭里 일대에 배치되어 제3대대의 좌측에서 安邊으로부터의 적의 위협에 대비하고 제3대대는 제1대대와 연계하여 德源으로부터의 적의 위협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증강된 우세한 적은 12월5일 文川방면으로부터 약 3,000명이 '덕원'에 침입하여 왔고 馬息嶺을 넘은 중공군은 '덕원'지구에서 '원산'을 공격하려는 기세였다. 12월7일에 이르러 '원산'은 '덕원'으로부터 '원산'교외의 고지로 진격하여 점령한 적진지로부터 포격사격권내에 있었다.
이리하여 '원산'이 적의 수중으로 들어가는 것도 각일각으로 절박하여 왔다. 오랑캐의 발급에 짓밟힐 東海의 요충, '원산'을 철수해야 하는 해병들은 비분을 이기지 못하여 仰天痛哭하였다.
만일 中共軍의 개입이 없었던들 이맘 때는 韓滿國境에 이르러 萬歲소리도 우렁차게 천지를 진동케 하였을 것이고 암흑과 폭정에 시달리던 북한동포는 광명을 찾은 기쁨에 雀躍하였을 것을! 이 어찌 또 다시 철수란 말인가? 이때의 장병들의 斷腸之念은 筆舌로 표현하기에 극히 어려웠다. 그러나 해병들의 의사에 반하여 별도리없이 떠나야만 할 때는 왔다.
제3대대는 우선 제10중대, 본부중대, 제12중대, 및 제11중대의 순으로 이동을 개시하여 부두에 집결하였다. 이때 후위중대인 제9중대에 중박격포로 장비된 약 1,000명의 적이 공격하여 왔다. 중대장 黃泳 중위는 침착하게 부대를 지휘하여 12월7일 14:00시까지 약 3시간 교전을 계속하면서 15명의 적을 사살하고 사상 40명, 쏘식장총 20정을 노획하는 등의 전과를 올리고 부두로 이동하여 제3대대 주력과 함께 곧 LST 845에 승선하여 '원산'을 철수하여 釜山으로 향하였다.
한편 제1대대는 12월7일 元山東海中學校에 집결하여 '원산'비행장으로 향하였다. 제1중대는 비행장 서남해안에, 제2중대는 서쪽일대에, 제3중대는 제1중대의 후방에, 제4중대는 비행장에 각각 배치되어 경비에 임하였다.
翌日, 8일 정오에는 적의 주력부대가 '원산'시내에 돌입하였고 勞動黨 道黨部 및 기타 각 기관들이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같이 긴박한 가운데 제1대대는 최후까지 침착하게 경비를 완료하고 12월9일 16:00시 LST 898정에 승선하여 '부산'으로 철수하였다. 한편 이때 제3 및 제5대대는 '함흥'지구에서 방어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7. 咸興地區防禦戰
韓滿國境까지 진격하였던 友軍은 중공군의 불법개입으로 비분을 억누르면서 국경선에서 淸川江과 興南을 연하는 선까지 철수하는 눈물의 작전을 면치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하여 이후 38도선에서 남하하여 烏山-原州-三陟을 연하는 선까지 철수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러한 전황에 이르러 '원산'지구의 해병대는 12월9일 제1대대와 제3대대는 철수작전을 완료하였으나 '함흥'은 북상한 惠山鎭부대와 長津湖부대(미 해병 제1사단)의 철수지점이었기에 여하한 적의 공세가 있더라도 기필코 확보하여야 할 전략상의 가치를 갖고 있었다.
이 지구의 확보는 미군의 정예부대인 제7사단과 해병대 제2대대 및 제5대대가 담당하게 되었다. 제2대대는 木浦지구에서 잔적소탕에 다대한 성과를 얻고 11월30일 '원산'에 상륙하였다가 곧 '함흥'으로 이동하였으며 제5대대는 新高山 등지의 경계를 담당하고 있다가 12월3일 '함흥'으로 이동하였다.
해병대의 경계임무는 地境里와 史倉里를 연하는 도로를 경계로 서남부 일대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 이미 중공군의 주력부대는 '함흥'주변 일대에서 준동하고 있었으나 치열한 함포사격과 공중폭격으로 인하여 대부대의 행동은 오히려 완전히 봉쇄당했을 뿐만 아니라 '함흥'을 중심으로 반경 30km선 이내에서의 모든 적의 행동은 제한당하다싶이 되어 있었다.
다만 적은 소부대로서 야간을 이용하여 아군의 방어진지에 침투해 올 뿐이었다. 12월3일에는 '흑수리'일대에서 미 제7사단제7연대의 일부가 중공군과 접전하여 고전 중에 있었으나 해병대 제2대대가 '지경리'일대에 경계배치됨으로써 이 적은 도주하였다. 한편 경계배치한 제5대대는 '흑수리'의 미 제7연대의 지시를 받게 되었다.
이같이 경계배치한 해병대는 항상 수색정찰을 계속하면서 부근일대의 적을 색출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장병들의 고충은 적과의 접전보다 연일 영하 20도를 가르키는 혹한이었다.
익일 12월4일 제2대대는 地境지구에서 九萬里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방어선으로 이동하고 제6중대를 香中里로, 제7중대는 章文里지구로, 제5중대는 浦興里로, 제8중대는 西興里로 각각 철수하고 제5대대는 '함흥'을 중심으로 북방 4km지점인 '덕흥리'에 새로운 진지를 구축하였다.
12월6일 제2대대는 적의 적극적인 공세에 대비하여 '함흥'서남방인 東興里, 富平里를 일선으로 제6중대 및 제7중대를 배치하고 廣浦里를 넘어 西興里, 浦興里를 제二선으로 하여 배치하고 대대본부를 新興里에 설치하고 '함흥시'의 적극적인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11월10일 적은 대부대를 투입하여 해병대 진지에 공격을 가하여 왔다. 제2대대는 선전했으나 워낙 수적으로 우세한 적의 공격, 人海戰術에 바탕을 둔 공격으로 인하여 제일선은 돌파당하고 말았다. 해병대는 제이선의 진지를 보강하고 중공군의 계속 침입을 저지하고저 廣浦橋에 철조망을 가설하고 진지를 고수할 것을 결의하고 방어배치하여 기다렸으나 적은 계속하여 제이선에 침투하여 오지 않았다.
12월14일에 이르자 적의 활동은 점차 격렬의 도를 더하고 있음에 따라 제2대대는 다시 작전상 방어선을 축소하여 제5중대는 제8중대가 배치된 西興里의 좌익으로 이동하고 제7중대는 宣德學校의 좌측으로 이동하였다.
이와같이 제2대대와 제5대대는 미군과 협동하여 咸興방어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일익 증강되는 중공군은 '함흥'을 중심으로 압력을 가해 왔으며 또한 '함흥'을 수중에 넣기 위하여 전력을 집중하여 공격하여 왔다.
12월14일 長津湖部隊인 미 해병 제1사단과 미 제7사단이 興南橋頭堡에서 철수를 완료하자(참조: 미 해병 제1사단과 "장진호" 전투) 작전명령에 따라 해병대 제2대대와 제5대대는 12월15일을 기하여 連浦비행장으로 철수, 이동하여 수송기로 '함흥'을 철수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해병대는 월여에 걸쳐 '원산'을 비롯하여 부근일대에서 패잔병의 소탕과 UN군 및 국군의 작전을 엄호하는 등 맡은바 임무를 완수하고 최후까지 '함흥'을 방어한 후 '함흥'을 철수하여 鎭海에 집결하였다.
元山, 咸興地區作戰을 끝으로 北進作戰에 일단 休止符를 찍고 '진해'로 철수한 해병대는 월여에 걸처 맹훈련을 거듭하면서 차기작전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부대를 재편성하였다.
재편성된 부대는 일선을 지원하기 위한 후방사령부와 전투위주의 전방부대로서 제1연대를 분리, 편성하였으며 별도로 獨立第五大隊와 海兵學校를 편성하였다.
재편성된 해병대의 기구 및 직위표
"도솔산 전투"(竇率山戰鬪 1951년6월4일-6월19일) 시 해병 제1연대장 金大植 대령 부연대장 金東河 중령이었으며 작전 중 연대장의 부상(대인지뢰)으로 부연대장이 연대장으로 보임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