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웅 단군의 신선도를 말하는 화랑세기는고려, 조선 때에도 있었다.
* 필자에게 오늘아침 깜짝 놀란만한 일이 하나 벌어졌다.
이는 화랑의 계보를 적은 화랑세기라는 책을 보증하는 책 때문이었다.
우선 화랑세기란 어떤 책인가? 부터 말한다.
화랑세기는 신라 성덕왕 때 학자 김대문 이 화랑의 계보를 기록한 책으로써 신라의 정치 문화 사회 역사 등에 대한 연구 및 화랑의 정체의 연구에 매우 중용한 자료이다.
특히 여기에는 우리의 상식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신라인들의 문란한 성생활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책들은 여러 차례 몽고와의 난을 겪으면서 소실되었고 또 이조에 들어오면서 세조 예종으로 이어지는 구서령으로 우리의 다른 역사서적과 함께 없어졌던 것으로 추정 되었다.
그러던 것이 1989년 처음으로 부산에서 재야 사학자 이태길 선생에 의해 필사본이 공개 되었고 학계에서는 뜨거운 관심을 갖기도 했지만 한편 엄청난 위서의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 이유는 이 책에 써진 내용은 지금까지 학계에서 주장하고 써온 역사적 사실과는 너무 다르기 때문이었기 때문에 근대에 어떤 심심한 작자가 창작 했으리라는 것이었다.
이는 마치 근대에 환단고기가 나타나자 기존 학계에서는 그 내용이 자기네가 지금껏 저술하고 가리킨 내용과 엄청나게 다르기 때문에 이것이 위 서라는 육하원칙도 세우지 않은 채 그저 위 서로 몰고 있는 것과 같다.
또 이 학자들의 학설을 믿는 학생들은 지금도 환단고기는 계연수나 이유립의 창작품이라고 우기는 사람이 많아 필자는 환단고기 에서는 가필은 좀 있을망정 위서는 아니라는 증거 23 개를 필자의 카페에도 제시한바 있다.
이 화랑세기도 필자가 읽어본 바에 의하면 위서일수가 없다는 증거가 너무도 많았다.
즉 이 책에 의하면 화랑이란 명칭은 풍월주(風月主), 풍류도(風流徒)원화(源花), 여랑(女郞)국선(國仙)선도(仙道) 선관(仙官) 등 이라고 한자로 기록돼 있다.
그렇다면 그때 우리 말로는 뭐라고 했을까?
이 책의 저자 김대문은 화랑도를 왜 풍월도라고도 했는지 여게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없다. 즉 그는 전해지는대로 그대로 쓴 모양이니 더욱 진실한 면이 엿보인다.
필자가 그간 연구해온 우리 말과 원시한글인 가림토는 바로 천부인으로 만들어 졌고 그래서 ㄱ ㄴ ㄷ...ㅎ 등 우리 말이나 글자 하나 하나에는 우리 상고사가 기록돼 있다는 이론을 가지고 이것을 밝혀보면
우선 花郞이란 화랑에 우리의 약방의 감초 격 접미사 '이' 가 붙으면 '화랭이' 가 되고 화랭이는 지금 국어 사전에도 남자무당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 말의 뿌리를 캐 보면 '환앵이' 가 된다.
환앵이는 환한 것의 앵이 가 된다.
앵이는 지금도 우리말에 송판 같은데 옹이가 박혔다 할 때 쓰는 결이 뭉처 진것 을 말한다.
그러니까 환앵이는 환한 것이 뭉쳐진 것이다.
여기서 환한 것은 환한 무리(桓國)를 말하는 것이고 그들은 지금으로 부 터 대략 6 천년전 지금 바이칼 호 부근에 사시던 북방계 몽골리안 의 일족이었다.
여기의 지도자가 바로 환한님 > 화나님 > 하나님 이 된 것이고 하편 환님 이라고 하던 것이 환인(桓因)이라는 한자로 기록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아드님이 바로 환웅으로 무리 3 천과 함께 고조선을 세운 분이다.
그는 하느님께 늘 제천의식을 치렀다.
이 제천의식이 바로 무속(巫俗)이다. 그러니까 지금 무당의 원조는 바로 환웅이다.
여기의 중추적 인물은 당연히 환웅이다.
이 환웅을 우리말로 하면 환앵이 가 된다.
이 환앵이 환앙이를 한자로 쓰면 화랑이 된다.
그 아드님 단군도 역시 무당 이었다.
그 증거는 단군의 무속을 그대로 이어받은 세습무(世襲巫)를 단골레 > 당골레 라 하기 때문이다.
이 화랑도를 화랑세기 에서는 풍월도 라고도 하는데 이 풍월도와 화랑도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아 보자.
풍월(風月) -風 은 바람 풍 자이고 月 은 달 월 자이다.
이것을 붙여보면 바람 달 > 바달 이 된다.
우리 국조가 檀君이다. 이건 우리말로 밝달 임금이다.
여기서 檀은 박달나무 단 자인데 '달' 이란 음 달, 양달 하는 땅 이다. 그러니까 '밝달'은 밝은 땅이다.
그렇다면 우리 가림토를 다 없애버리고 우리말을 한자로 쓰는 과정에서 이 밝은 땅을 어떻게 기록했을까?
경우에 따라서는 檀 으로 쓸 수가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風月 이라고 쓸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풍월도란 단군의 도를 말한다.
원화(源花) 여랑(女郞) - 여자 화랑이다. 기록에 의하면 아름다운 소녀를 뽑아 치장을 시킨 다음 화랑을 만들었는데 그들간 질투가 심하여 폐지 했다지만 그보다 우리 고유사상은 중국의 사상에 밀리어 아주 천하게 되었다.
즉 우리는 지금 국산은 별볼일 없는 것으로 치고 그 풍속까지 미제를 좋아 하듯이 옛날 선조들도 그랬다.ㅎㅎ
화랑은 후대로 내려 오면서 특히 불교가 들어오면서 화랭이라 하면 천한 것 중의 천한 것이 되었고 박수무당 유녀 사당패 쯤으로 전락했다.
또 이 단군을 모시는 별직 이 삼시랑(三侍郞)인데 지금은 " 거지 삼시랭이 같은 놈" 이라고 욕을 하는데 쓰여지고 있다.
이때 남자들은 그 위신 때문에 단군의 道를 전하는 화랑도를 할수도 없고 그렇다고 단군의 도를 전하던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버릴 수도 없어 그 아내에게 시켰다.
이게 지금 무당 하면 모두 여자인 것의 시초가 됐다.
국선(國仙)선도(仙道) 선관(仙官) - 필자는 먼저 황웅 단군이 모두 무당이라 했는데 무당 이라면 현재 우리의 상식으로는 매우 천하고 미신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황웅이나 단군은 하느님께 제천의식을 치르려면 제사장 으로 써 엄한 의식이 있었고 이는 지금 무당들이 하는 푸닥거리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즉 신선도에 의해서 행사를 치른 것이다.
그래서 화랑의 원래 말은 국선화랑(國仙花郞), 즉 나라에 선도를 행하는 화랑이 있다는 말이다.
또 최치원의 난낭비(鸞郎碑), 즉 황웅과 단군을 찬양하는 비 서문에도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었다(國有玄妙之道)라는 말이 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옛부터 선도(仙道)가 있었다고 했는데 이 선도를 중국 노자 장자의 도교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고 광성자니 연단술이니 점성술로 착각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이는 천부당 만부당한 말이다.
이 나라에 선도가 있었다는 말은 화랑의 계보를 그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아 쓴 화랑세기 저자 김대문 서문에도 나타난다.
즉 김대문은 신라 성덕왕때 학자로 마지막 풍월주의 아들로 그 아버지가 화랑의 계보를 끝내지 못하고 죽자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옛 부터 전해지는 선사(仙史)에 보태탬이 되고자 쓴 책이 바로 화랑세기 라는 지문만 보더라도 화랑의 역사가 신선도의 역사 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책 서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 화랑은 선도이다. 우리 나라에는 옛 부터 신궁을 받들어 하늘에 큰 제사르 지냈다."
그러나 이 선도는 불교가 들어오면서부터 큰 앞박을 받았고 이조에 들어오면서 부터는 태백일사를 쓴 이맥의 말과 같이 만약 누가 조의선인(早衣仙人), 즉 선도 이야기만 해도 엄청난 비난의 화살을 받았다.
즉 오직 중국의 사서오경이나 주자의 성리학이 아닌 학설이면 완전 이단 취급을 받아 벼슬길에서도 쫓겨났다.
그러나 이 선도의 명맥은 비밀리에 면면히 이어져 이조 초 까지만 해도 한선도나 국선도가 권극중, 북창 정렴 등에 의해 맥이 이어지고 있었고 경전도 우도 경전이니 좌도 경전이니 하는 것도 있었다 한다.
그러나 이 역시 역사 속에서 잠잠 하더니 지금은 국선도 등이 나타나고 이것을 현대화한 단학이니 단월드니 외래어로 꼬리가 붙은 단체가 나타났다.
그러나 필자가 알기로는 이들 도의 단체는 이 도의 핵심이 되는 어떤 경문이 없는 것 같다.
이왕 국선도를 행할 바에는 환인 황웅 단군으로 이어지는 신지녹도문 천부경을 그 주된 핵으로 삼을 만도 한데 이 신지녹도문이 해석이 되질 안으니 그 예찬서에 불과한 최치원의 81 자를 하느님 교훈인 천부경으로 알고 그 의미도 모르는 채 외우고 있을 뿐이며 여기에 절 까지 시킨다.
그러면 회원들은 사이비 종교라고 비난을 하고 아무리 우리의 옛 道 라고 설명을 해봐야 헛일이라고 한다.
이건 맞는 말이다. 즉 우리는 지금 종교도 국산은 사이비 이다.
종교도 불교나 기독교처럼 외래종교만이 명품이다. ㅎㅎ
이상 화랑과 화랑세기를 말했는데 이번에는 이 화랑세기가 없는 책을 누가 가공한 위작이 아니라는 증거를 제시 한다.
이는 우선 김부식의 삼국사기 제 47, 열전 제7 의 김흠운(金欽運)조에 나타난 김부식의 논은 화랑세기의 내용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한다.
즉 " 진훙왕 법흥왕 무열왕에 이르기 까지 화랑이 무려 200 여명이 나와왔는데 김흠운과 같은 사람을 그 대표적 인물로 뽑았으나 화랑세기 에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
또 각 훈의 해동 고승 전에서도 신라 말에 이르기까지 200 여명의 화랑이 나았다는 말은 김부식의 말과 일치하고 있다.
특히 그 가운데 "사선(四仙) 이 가장 어질었으니 화랑세기 에서 말하는 바와 같다" 고 한 말은 김부식이 화랑세기를 읽었다는 말이다.
이 말고도 삼국유사 등에도 화랑 이야기가 나오는데 직접 화랑세기를 거론하지는 않았으니 생략한다.
그런데 바로 오늘 필자는 깜짝 놀란 사건 한나가 벌어 졌다.
우리말의 뿌리를 연구하는 필자는 다산 정약용의 아언각비(雅言覺非)를 인터넷으로 청구해 오늘 받아 보았는데 여기에 화랑 이라는 대목에서 그는 그 말의 어원을 바로 화랑세기를 인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용
花郞者新羅貴遊之名也 今以巫夫倡優之賤 謂之花郞非矣 唐令狐澄新羅國記云 "擇貴人子弟之美者 傳粉裝飾 名曰花郞 國人皆尊師之" 東史云 花郞皆飾 徒衆雲集 相磨以道義 相悅以歌樂 遊娛山中無遠不至 "金大問 花郞世企云 忠佐賢臣 從此而出 良將勇卒 由是而生" 意者 花郞服裝
袨麗 而今之倡夫 亦服裝袨麗 故冒是名與(화랑은 신라 때 귀족 유람단체의 이름이다. 지금 무당이나 광대 등 천한 무리를 화랑이라고 이르는 것은 잘못이다. 당나라의 영호징 의 신라국기에 이르기를 귀인의 자제로써 아름다운 사람을 가려서 분 발라 곱게 단장하여 이름을 화랑이라 했는데 나라 사람이 모두 이를 존경하고 본받았다. 동사(우리나라 역사서)에 이르기를 화랑제도가 이미 마련되자 많은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서 혹은 서로 도의를 연마하고 혹은 서로 노래와 풍류를 즐기고 산속으로 유람하며 먼데까지 가지 않은 데가 없다. 김대문의 화랑세기에 이르기를 충성된 재상과 어진 신하가 여기로부터 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이 이로부터 생겨났다"
그러니까 화랑세기는 이조 정약용 때 까지 있었고 정약용도 읽었다는 말이니 1989년 처음으로 부산에서 재야 사학자 이태길 선생에 의해 공개된 화랑세기가 이태길 선생이나 그 주변인물이 위작했다는 학계의 주장은 터무니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