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에 물들어가는 것처럼
천둥과 번개에 소나기까지 온다는 일기예보가 무색하게 날씨가 화창하다. 그래도 오후 들어 비 소식이 있으니 산책은 오전에 하기로 했다. 가볍게 차려입고 오늘도 ‘나는야 나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나의 연인 연지못으로 간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포도나무도 어느새 자라서 하우스 안을 가득 채웠다. 길가에 심어놓은 묘목도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베란다에서 키우는 상추는 말 그대로 화초처럼 자란다.
땅에는 힘이 있는 것 같다. 농수로 옆에 어르신들이 키우는 텃밭이 있다. 상추랑 가지와 오이를 꽃밭처럼 가꾸어 놓았다. 얼마나 잘 자라는지 부러울 정도이다. 햇살과 바람과 비가 키우는 것 같다. 날마다 지나가면서 안부를 묻는 나의 사랑도 한 수저 정도는 되지 않을까? 기특하고 대견해서 지나갈 때마다 눈을 맞추고 인사를 한다.
모내기를 준비하는 농부의 분주한 모습에서 활기가 넘쳐난다. 선화리 들녘도 잠에서 깨어나 엉덩이가 들썩들썩한다. 모판을 줄줄이 서서 나르는 모습을 보면서 어릴 적에 모내기 풍경과 다를 바가 없음에 정겨움이 느껴졌다. 모판을 나르는 사람들이 외국인이다. 이제는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빈 논으로 물이 쉼 없이 들어간다. 내 논에 물들어가는 모습을 보니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는 말이 생각난다. 갓 심은 모가 타들어 가는 것을 보면서 애타는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논에 물이 가득 차는 모습을 바라보니 나도 부자가 된 기분이다.
머지않아 모내기를 시작할 것이다. 건너편 텅 빈 물 논에 파릇파릇한 새 모가 심어지고 있다, 지금은 이양기로 모내기를 하지만 어릴 적에는 사람들이 직접 모를 심었다. 중학교 다닐 때 대민지원이라고 모심기 봉사활동을 군인 아저씨들과 나간 적이 있다. 학생들은 못줄을 잡거나 새참을 나르는 일을 도와드렸다. 직접 해보고 싶은 학생은 논에 들어가서 모심는 일을 해보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호기심은 많아서 모심는 것을 해보고 싶었다. 논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다. 미끄덩거리고 푹푹 빠지는 느낌이 신기하면서도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거머리까지 있어서 군인 아저씨들이 여자 스타킹을 신고 논에 들어간 기억이 난다. 중간에 쫓겨나서 쟁반에 막걸리와 전을 들고 나르던 기억이 난다.
금계국이 상큼한 미소로 맞아준다. 초록이 짙어가는 길섶에 훌쩍 큰 키에 가냘픈 몸매로 하늘하늘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꽃길을 걷노라면 가슴이 터질 듯 행복감이 젖어 든다. 감사한 마음에 눈물이 핑그르르 돌 때도 있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나만 행복한 것은 아닌가.’ 나무 의자에 앉아서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연잎을 보면서 멍 때리기를 한다.
연잎은 엄마로도 오고 은사님으로도 오고 보고 싶은 친구로도 오다가 경전으로 오기도 한다. 연잎은 매일 다르게 나에게로 온다.
내 삶에서 고마운 사람을 꼽으라면 제일 먼저 손가락을 꼽을 친구가 있다. 피 하나 섞이지 않은 남이지만 나에게 너무도 큰 은혜를 베풀어준 사람이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고마웠다고 감사하다고 기도를 한다. 잊지 않고 살아가야 할 영혼의 친구다. 그런 친구가 있어서 내 삶이 아름답다. 오늘은 연잎으로 친구가 나에게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