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 박준수 법사 , 사회: 혜안, 인례: 심진, 헌향: 자명행 , 헌다: 연오행, 명조, 발원문: 송파 27구 명등 바라밀, 현안보고 : 법회장, 음악: 마하보디 합창단, 지휘자, 반주자, 촬영 및 방송: 방송담당 대원3구 법회팀, 취재: 미디어팀 , 방역 및 안내: 대원 3구, 법회팀, 보광당 좌석 배치: 청정팀, 법회 및 기본교육후 보광당 청소:: 송파 17, 20구, 대원 4구, 법회보 제작 : 법회보팀, 법회보 배부: 송파 17구 법회, 데스크 안내: 법당 안내팀, 새법우 안내: 새법우 교육팀, 엘리베이터 안내 : 송파 27구, 재 공양물 준비 : 보문부, 떡 및 생수 보시 : 송파 6, 7, 9구, 중랑구. 보현행자의 서원 : 회향분
아직은 가을이건만, 별안간 겨울로 달음질치는 듯이 추워진 날씨입니다. 그러나 외부의 어떤 환경에도 아랑곳없이 법회를 오시는 분들이나 봉사자들로 불광 법회의 아침 풍경은 한결같습니다. 정상화가 이렇게 힘들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이 불광 법회를 지키기 위해, 사 측에서 보광당을 쇠사슬로 차단하여 공양실, 로비, 일주문 앞에서 이어가던 불광 법회, 메가폰 고성으로 법회를 방해하던 종무실장님의 소란, 에어컨을 켜주지 않던 무덥던 날 흘린 땀, 난방 없어 손발이 꽁꽁 얼어 손난로나 담요에 의지하며 법회 보던 우리들이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면 이 쌀쌀한 날씨가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보광당에서 법회를 볼 수 있는 지금이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불광 형제들은 난방도 되지 않는 또 한 철의 겨울을 맞아야 하는 것인지 그것은 알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힘을 모아 Step by Step으로 정상화로 가고 있습니다.
송파 6, 7, 9구, 중랑구에서 준비한 떡과 생수가 준비되었고, 법회로 안내하시는 안내팀들이 각각 자리하고 있습니다.
천수경을 독경하여 법당을 맑히고, 인례 거사님께서 타종을 치시니 부처님 전에 헌향, 헌다를 올립니다. 혜안 거사님의 인사말씀으로 법회가 시작 됩니다.
금주의 법문 : 박준수(변호사) 법사
금주의 법어 : 세상은 如夢幻泡影이다
우선 불광 법회 여러분의 초대에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불교를 접 한지는 대학 때부터 불교가 좋아서 지금까지 지내온 것 같습니다. 그동안 제가 터득한 바를 와서 이야기를 했으면 해서 왔습니다. 초대에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불교를 시작할 때 이렇게 배웠습니다. 부처님 제자니까 우선 부처님 말씀을 크게 믿어야 되겠지요. 뭘 믿어야 될까요? 우리는 만물이 각각 제각기 존재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부처님 가르침의 골수는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도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성향미촉법 수상행식이 바로 마음이고 마음이 색성향미촉법 수상행식이다. 예컨대 거울과 영상이, 거울이 영상이고 영상이 거울이지 그것이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어야 되겠지요. 우린 불자니까.
금강경을 보면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이 세상 만물은 꿈과 같다. 이 세상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요? 부처님 말씀이 그러니까 믿어야 되겠지요. 그러나 어찌 나는 꿈으로 안 보일까? 이것에 대의심(大 疑心)이고 대분심(大憤心)을 가지라는 것은 그 질문 앞에 절실 하라는 것입니다.
고집멸도(苦集滅道)가 사성제(四聖諦)입니다. 고통의 원인은 뭘까요? 그것은 집(集), 즉, 둘이 아닌 것을 만물로 보는 것에서 고통이 시작 된다고 봅니다. 비교하게 되고 그로인해 갈등하게 되니 그것이 고해(苦海)이고 사바세계라 합니다. 비교하는 것을 끝내려고 한다면 만물이 둘이 아닌 것을 봐야지 끊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四聖諦)의 가르침이라고 봅니다.
꿈에서 답을 찾아봅시다. 어젯밤 꿈을 꾸었어요. 어떤 꿈에는 나도 있었고 너도 있었고 친구들도 있었고 산천초목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것이 실재 하지 않는 꿈이라, 우리가 꿈을 생각하면 꿈속의 모든 것은 실재 하지 않는 이미지 아니었어요? 그런데 이 현실도 꿈이라고 하니까 꿈속에서 나는 무아(無我)라, 실재 하지 않는 이름일 뿐이야. 너도 이름일 뿐이고, 나도 이름일 뿐이고 꿈속에선 만물이 모두 이미지였고 이름일 뿐이었다. 불교 가르침은 ‘나‘뿐이다라고 가르치지 않나요?. 천상천하에 나 홀로다, 꿈을 꾸는 덕분입니다. 세상만물은 이미지인데 꿈을 꾸는 때만이 홀로 드러나므로 ’천상천하 유아독존’
만약 우리가 꿈에서 꿈이라고 깨달았다면 진실은 무엇일까요? 실재는 아마 ‘깨달음‘일 것입니다.
‘꿈이로구나.’ 깨닫는 것이 조사선에서 이야기하는 일구(一句)아닐까요?
‘뜰 앞의 잣나무로구나‘, 또 ‘똥을 닦는 막대기로구나‘ 가 ’꿈 속에서 꿈이로구나‘ 깨닫는 그것이 아닐까? 현실도 금강경에 보면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그렇듯이 우리가 과거로 돌아갈 수가 없잖아요 그것은 실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재나 미래도 실재하지 않는 이미지이기 때문에 잡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엔 공간도 실재하지 않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서로 연기하기 때문에 시간이 무너지면 공간도 무너집니다. 그래서 ’한 물건도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재는 무엇일까요? ’한 물건도 없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지와는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우리 몸도 시간이 없다면 공간도 없는 것이라, 어제의 몸도 찾을 수 없고, 현재나 미래의 몸도 찾을 수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다 무너지니까, 몸도 어제의 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금강경 사구게만으로도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이 몽땅 들어있다고 봅니다. 사구게만이라도 수지 독송하면 그 복덕이 갠지스강의 모래알만큼의 칠보무더기와도 비교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을 꿈이라고만 볼 수 있다면 ‘천상천하 유아독존’, 즉 우리는 각자가 자기의 왕궁을 갖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세계를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주스님들께서도 지극한 ‘道’는 어렵지 않고 열반도 어렵지 않다고 말을 합니다. 그것은 비교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모든 고(苦)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고해'가 어디서 오나 했더니 '비교하는 데서 오는 것'을 제가 알았어요. 비교만 하지 않으면 갈등이 없다는 답은 알았으나, 이 만물을 그대로 실재하는 것으로 아는 한은 비교를 하지 않을 수 없지요. 선함과 악함,, 아름다움과 추함, 있는 것, 없는 것이 있으므로 어떻게 비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금강경에 답이 있어요.‘여몽환포영’이라 해서 모든 것이 이미지라고 했을 때 제가 무릎을 쳤습니다. 이것이 비교 안 하고 살 수 있는 길이고 답이라고 보았습니다.
대학교 때 대각사에서 반야심경 강의를 들었을 때 ‘최종 마지막 진실은 마음’이 라고 들었어요. 마음 앞에서는 모든 차원이 다 이름일 뿐이라는 것을 짐작은 했어요. 그런데 그건 도무지 해결이 안 되더라 구요
그 후 경봉 스님을 뵈었을 때, 글을 하나 써 주셨어요. ‘어약청강수 용등만리운(魚躍淸江水 龍騰萬里雲)’ ‘고기는 맑은 강물에서 놀고 용만이 만리 구름 밖에 올라간다.’ 하는 뜻을 그땐 몰랐습니다.
지금 보니 우리 중생은 시간과 공간이 실재하는 줄 알고 시간 공간을 바탕으로 해서 살고, 용만이 시,공간을 넘어서서 만리 밖에 오른다는 뜻이었습니다.
다시 법정스님을 뵈었을 때, “너, 이 세간법이 철로 만든 감옥이라면 불법도 감옥인데 그 부처님 말씀을 그대로를 따라가면 그것이 굴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세간법의 굴레에서 또 부처님 말씀을 따르면 그것은 ‘황금으로 만든 감옥’이라 말씀하시며 부처님 말씀도 놓아야 부처님의 가르침에 도달 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무슨 말씀인지 몰라서 그때 조사선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1.祖師禪
조사선(祖師禪)을 두고 문자를 세우지 않고 경전 밖에서 마음에서 마음을 전한다(不立文字 敎外別傳 以心傳心)는 가르침이라고 한다.
부처님 가르침의 골수는 불이(不二)다.
둘이 아닌 것이 이름으로 인하여 만물(萬物)로 나누어진 것이다.
있는 그대로는 이름 이전으로 둘이 아닌데 어찌 언어 문자로 말 할 수 있으며, 언어 문자로 말 할 수 없는 것을 어찌 언어로 구성된 경전(經典)으로 전할 수 있겠는가? 하는 반성(反省)에서 나온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조사선(祖師禪)은 마음을 바로 보여주는 것, 직지인심(直指人心)으로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전(傳)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때로는 죽비를 들어 마음을 보이고
때로는 고함을 질러 마음을 보이고
때로는 방망이 맛으로 마음을 보이고
때로는 “뜰..앞..의..잣..나..무..다” 외쳐 마음을 보여
마음에서 마음을 전한 것이다.
2.수행중심(修行中心)의 소승(小乘)의 가르침을 시작으로 경전중심(經典中心)의 대승(大乘)의 가르침을 거쳐 유식(唯識)을 꽃 피우면서 마지막으로 나온 것이 조사선(祖師禪)이니 이 조사선(祖師禪)이야 말로 최상승선(最上乘禪)이라함은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말하자면 불이(不二)를 傳하는 방법(方法)이 업그레이드(upgrade) 되어온 셈이다.
육조 혜능께서 五祖 홍인의 法을 이어받아 10여년 산속에 숨어 살다가 廣州 법성사에 이르러 자신의 신분을 밝히니 그 절 인종 법사가 물었다.
인종 “당신이 五祖 홍인의 인가를 받은 法은 무엇입니까?”
혜능 “단지 見性만을 말할 뿐 禪定과 解脫은 말하지 않습니다.”
인종 “어찌 禪定이라는 수행은 말하지 않는 것입니까?”
혜능 “禪定이란 수행을 통한 見性은 부처님 가르침인 不二法에 어긋 납니다. 그러므로 見性만을 말할 뿐입니다”
3.(1) 釋迦는 금강경에서 일체 萬物은 꿈같고 환영 같고 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개 불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한다(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하는가 하면,
다시 대저 모양을 가진 모든 것은 실체가 없어 이름일 뿐이니 만약 이와 같이 볼 수 있다면 바로 如來에 눈을 뜰 것이다(凡所有相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하였다.
그렇다면 일체 만물이 모두 實體가 없는 이름이요 그림자일 뿐이라면 한 물건도 없다는 것이다.
혜능의 말대로 本來無一物이다.
한 물건도 없다면 萬法 모두 스스로의 自性이 없다(萬法無自性)는 것이다.
즉 스스로는 어느 것도 아니어서 相對槪念의 도움을 받아야 무엇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예컨대 “있다”가 성립되려면 “없다”의 도움을 받아야하며, “착함”이 성립되려면 “악함”의 도움을 받아야 하며, “아름다움”이 성립되려면 “醜”함의 도움을 받아야 하듯이 모든 말이 상대 개념을 의지하여 성립되는 것이므로 그 혼자서는 實體가 없는 이름이요 그림자 일 뿐이라는 것이다.
(2)남악 회양스님이 六祖를 뵈었을 때 육조는 회양에게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물었다.
회양은 이 질문을 받고 깜깜하여 돌아가 8년 만에 다시 육조를 찾아와 “한 물건이라 해도 어긋납니다.”하였다.
이는 “나”라고 하여도 어긋납니다. 는 뜻이다.
“無我”를 밝힌 것이다.
이에 六祖는 “그렇다. 네가 본 것이 내가 본 것이다. 잘 지니 거라.”며 그 眼目을 認可하였다.
(3)육조 스님 역시 본래 한 물건도 없다(本來無一物)는 偈頌으로 法을 이었으니 두 분의 眼目이 일치하였던 것이다.
여기 疑問이 있다.
그렇다면 한 물건도 없어 말하는 놈이 없을 터인데 육조가 밝힌“한..물..건..도..없..다.”는 또 무엇인가?
(4)이렇게도 볼 수 있다.
三次元 앞에서 點이나 1차원인 線이나 2차원인 面은 이름일 뿐이다.
같은 논리로 4차원 앞에서는 3차원 역시 이름일 뿐이다.
마음을 마지막 眞實이요 마지막 次元이라 한다면 마음이 품고 있는 모든 次元은 이름일 뿐이다 할 것이다.
(5)釋迦는 금강경에서 過去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現在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未來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하였다.
얻을 수 없으니 實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時間을 얻을 수 없다면 시간과 緣起하는 과거의 空間도 현재의 空間도 미래의 空間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마음뿐이겠는가?
과거의 몸도 현재의 몸도 미래의 몸도 얻을 수 없어 몸과 마음이 모두 허망한 이름이요 이미지 일 뿐이다.
결국 한 물건도 없음이다.
4.한 물건도 없다면,
(1)無限하다 해도 이미지, 有限하다 해도 이미지
둘이다 해도 이미지, 하나다 해도 이미지
있다 해도 이미지, 없다 해도 이미지
과거다 해도 이미지, 현재다 해도 이미지, 미래다 해도 이미지
동쪽이다 해도 이미지, 서쪽이다 해도 이미지
무생물이다 해도 이미지, 생물이다 해도 이미지
식물이다 해도 이미지, 동물이다 해도 이미지, 사람이다 해도 이미지
부처다 해도 이미지, 중생이다 해도 이미지
여자다 해도 이미지, 남자다 해도 이미지
나다 해도 이미지, 너다 해도 이미지
밝다 해도 이미지, 어둡다 해도 이미지
크다 해도 이미지, 작다 해도 이미지
무겁다 해도 이미지, 가볍다 해도 이미지
善이다 해도 이미지, 惡이다 해도 이미지
아름답다 해도 이미지, 추하다 해도 이미지
貴하다 해도 이미지, 賤하다 해도 이미지
옳다 해도 이미지, 그르다 해도 이미지
높다 해도 이미지, 낮다 해도 이미지다.
이를 두고 金剛經은 我人衆生壽者相이 모두 허망한 이름이요 이미지 일 뿐이다. 고 밝히고 있다.
(2)世上을 두고
天國이다 해도 이미지요
地獄이다 해도 이미지요
六道輪迴의 세상이 모두 이미지 일 뿐이다.
(3)우리가 아는 이 世上은 몽땅 이름이요 이미지 일 뿐이다.
우리는 實體가 없는 이름을 알 수 있고 이미지를 알 수 있을 뿐 둘이 아닌 있는 그대로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5.있는 그대로는?
(1)이름以前이요 개념(槪念)이전이므로 알 수가 없다.
고려조 보조국사(普照國師)도 단지 모를 수 있어야 見性이다, 단지불회 시즉견성(但知不會 是卽見性) 하였다.
금강경(金剛經)에서 가르치는 바와 같이 일체 만물은 꿈같고 그림자 같아 如夢幻泡影이다.
우리가 아는 이름이요 이미지의 세상이다.
金剛經은 다시 이렇게만 볼 수 있으면 如來를 볼 수 있다(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하였으니 虛妄한 이미지에 머물지 않고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의 見聞覺知 語默動靜 行住坐臥하는 日常이 모두 지금 여기 둘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時空間 넘어 百尺竿頭 進一步한 생명이요 如來의 드러남인 것이다.
(2)조주가 스승 남전에게 물었다.
조주“道는 무엇입니까?
남전 “日常이 道다.”
조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남전 “어떻게 하면 어긋난다.”
조주 “어찌해야 알 수 있습니까?”
남전 “道는 알고 모르고와 無關하다.”
(3)있는 그대로인 둘이 아닌 不二 (如來)를 묻는 질문에,
禪師들이
“뜰..앞..의..잣..나..무..다”
“똥..을..닦..는..막..대..기..다”
“동..산..이..물..위..로..간..다”
“마..가..세..근..이..다”
“이..빨..사..이..에..난..털..이..다”
한 것이 모두 있는 그대로의 둘이 아닌 時空間 넘어 지금 여기 마음이요 生命인 如來를 보여준 것이다.
6.(1)天國 人間 地獄 등 六道輪迴의 世上이 우리가 아는 이름이요 이미지 일 뿐이다.
그러한 세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 이름이요 이미지 일 뿐이다.
地獄도 이미지 天國도 이미지다.
이미지 일 뿐인 世上에서 이들 이미지를 實在하는 것으로 妄想을 한다면 천국과 지옥 간에 比較를 피할 수 없어 거기에 安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2)육도윤회(六道輪迴)의 세상 모두 이미지일 뿐 實在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 일 뿐인데 어찌 어느 세상을 取하고 어느 세상을 버리겠는가?
(3)설사 取하고 버린다 하더라도 이미지 일 뿐이어서 取한 바 도 없고 버린 바도 없다.
三祖 승찬 스님도 그의 신심록(信心銘)에서 至極한 道는 어렵지 않으니 다만 비교 간택(比較 揀擇)을 꺼릴 뿐이다(지도무난 유혐간택 至道無難 唯嫌揀擇). 다만 미워하고 좋아함을 그칠 수 있으면 道는 확연하여 명백하다(但莫憎愛 洞然明白) 하였다.
이미지 일 뿐이어서 取하되 취한 바 없고 버리되 버린 바 없어 세상일이 언제나 時空間 넘어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한 지금 여기 여래(如來)의 일이다.
세상 일이 나와 네가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如來의 일이라는 것이다.
7.六道輪迴의 세상 그대로 시공간 넘어 百尺竿頭 進一步한 지금 여기 涅槃이어서 世間이 出世間이요 出世間이 世間이다.
꿈(世間)이 있는 그대로(出世間)요 있는 그대로가 꿈이다.
“뜰 앞의 잣나무”는 世間이요 조주의 “뜰..앞..의..잣..나..무”는 出世間이다.
世間과 出世間을 나눌 수 없어
이미지 일 뿐인 天國이 있는 그대로의 지금 여기 涅槃이요
이미지 일 뿐인 人間世가 있는 그대로의 지금 여기 涅槃이요
이미지 일 뿐인 地獄이 있는 그대로의 지금 여기 涅槃이다.
色卽是空 空卽是色이요 六道輪迴와 涅槃이 둘이 아닌 것이다.
8.너 없는 “나” 뿐이다.
天上天下唯我獨尊이다.
너도 있고 나도 있다고 본다면 妄想이다.
世上을 두고 天國으로 보든 地獄으로 보든 있는 그대로인 둘이 아닌 實在에 대한 나의 解釋일 뿐이다.
현실을 두고 때로는 천국으로, 때로는 지옥으로, 때로는 아귀 등 다른 세상으로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더라도 내가 解釋한 이미지요 이름일 뿐인 世上이다.
如夢幻泡影이다.
이로서 우리는 時空間 넘어 百尺竿頭 進一步한 지금 여기 天上天下唯我獨尊인 如來에 눈 뜰 수가 있는 것이다(卽見如來).
9.(1) 이제 둘이 아닌 如來의 눈으로 世上을 살아간다.
아는 것으로 부터의 자유요 解脫이다.
入廛垂手다.
나 없어,
解釋하되 해석한 바 없고
比較하되 비교한 바 없고
取捨하되 취사한 바 없다.
(2)결국 世上의 모든 일이 時空을 넘어 百尺竿頭進一步 한 지금 여기 天上天下唯我獨尊인 너 없는 나 如來의 일 일 뿐이다.
어찌 실체가 없는 나와 너의 일이겠는가?
(3)둘이 아닌 너 없는 내가 너 와 나로 나뉘고, 다시 善惡 是非 美醜 淸濁 高下 貴賤 優劣 貧富 進步 保守 等으로 나뉜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듯이 이들 역시 둘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緣起하는 兩面일 뿐 둘이 아니다.
이렇게만 볼 수 있다면 如來를 볼수 있다(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여기에 相生의 길이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오색의 단풍이 물드는 행락철이기도 하고, 별안간 날씨가 추워진 일요법회인데도 법문 듣고 자 법회에 참석하신 불광 법회 형제님들.
♬ 찬탄곡 :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김동규 노래. 윤소희 편곡) ♬
눈을 뜨기 힘든 가을보다 높은 저 하늘이 기분 좋아 휴일 아침이면 나를 깨운 전화 오늘은 어디서 무얼 할까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라은 가득한 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램은 죄가 될테니까.
가끔 두려워져 지난밤 꿈처럼 사라질까기도 해 매일 너를 보고 너의 손을 잡고 내 곁에 있는 너를 확인해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
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 아아아아 아아 아아아아- - - - - - 아아아아아 - - - - - - - 아아아 아아아 아- -아
살아가는 이유 끔을 꾸는 이유 모두가 너라는 걸 내가 있는 동안 더 좋은 것은 없을 거야.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수능 백일 기도 축원 : 혜담 스님과 대중 함께
발원문 낭독 : 송파 27구 명등 바라밀 보살님 (불광법회.불광사 정상화 기도 발원)
현안 보고 : 현진 법회장님
법회 끝난 후에 법등 모임을 하고 계신 각구 모습
토요일 오후, 청정팀에서 법당 청소 및 좌석 배치를 하시고 법당으로 들어오시며 절을 할 수 있게 방석 배치도 해 놓으셨습니다.
일요 법회가 끝나고 오늘도 대웅전에서는 금강경 독송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난주 조계사, 동명사, 조계사, 봉은사에서 1인 시위 수행정진과 불광사에서는 원빈 스님 토요 법회에 묵언 시위 중입니다.
원빈 스님 법문에 동참하러 오신 '법우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시던 보살님들을 포함한 초청 법사의 법회의 참석인원입니다.
10월 21일 원빈 스님 초청 법회의 보광당 풍경에 마음이 많이 아려왔습니다.
몇 백 명이 법회를 보는 일요 법회엔 어둑컴컴 하던 보광당이, 텅빈 발코니 석까지 환하게 조명을 밝혀 놓으셨네요. 이것은 무슨 분별심일까요?
패딩을 입고도 쌀쌀한 찬바람이 느껴지던 토요일, 외부에서 방문하시는 분들에게 지금 우리의 이 현실을 알리고자 원빈 스님 초청법회 시작 전부터 불광 형제들은, 불광 사태에 대한 전단지를 나누어 드리며 묵언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묵묵히 서 있던 우리들에게 법회에 오셨다며 주차할 곳을 묻던 어느 보살님이 계셔서 셔터를 내리고 주차장 관리하시던 직원분에게 주차안내를 하니 혹여나 불광 법회 형제인 줄 알았던지 팔로 X자를 그리며 안된다고 하시더니 운전자가 내려서 원빈 스님 법문 들으러 왔다 하니 셔터를 올리고 주차를 시키던, 그 모습엔 주객(主客)이 전도(顚倒) 된 듯하여 실소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건 또 무슨 분별심일까요? 마하반야바라밀_()_
우 리 는 횃 불 이 다. 스 스 로 타 오 르 며 역 사 를 밝 힌 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용맹정진하여 바라밀 국토 성취한다. |
첫댓글 장문의 법문을 녹취하여 올리시고
법회 주변 상황과 소회까지 적어서
다양한 화보를 곁들여 일지를 편집해주시니
흡사 사정 있어 못 나오셨더라도 법회 현장에 함께한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박준수 변호사 법사님의 불교의 핵심은 불이사상이라는 요지의 법문도 좋았습니다.
마음님 수고하심에 감사드립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마음님 여법하게 법회일지 작성해주심에 감탄하고 감사합니다_()()()_
비교하지 않고 간택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바로 열반임을 부처님과 모든 법사님들이 한결같이 말씀하십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