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계림의 풍광(風光)과 전통문화 탐방 장흥 문화원장 김기홍님의 글을 재편집하였습니다 ( 편집/스토니) ●장흥에서 11시간만에 도착한 계림. 2008년 6월 19일부터 6월 23일까지 세계거석문화협회(회장 유인학)가 주관한 중국 계림의 역사문화를 탐방하였다. 33명의 여행단이 다녀온 곳은 다음과 같다.천하제일의 풍경 이강(漓江), 도연명이 극찬한 세외도원(世外桃源), 자연의 신비 은자암(銀子岩), 다양한 모습의 월량산(月亮山), 천년의 정기 대용수(大榕樹), 양삭의 수상가무(水上歌舞)쇼 , 계림의 전망대 복파산(伏波山), 곰과 호랑이의 묘기 웅호산장(熊虎山莊), 소수민족(瑤族)의 민속마을 용승(龍勝)과 온천, 계림의 최고봉 요산 (堯山), 양강사호(兩江四湖)중의 삼호(杉湖) 중국 계림시는 산수가 수려하여 풍광이 아름다운 지역이고 세계적 연출가인 장이머우(張藝慕) 감독의 인상유삼저(印象 劉杉姐)란 대형 수상 가무쇼(水上歌舞쇼)가 계림 양삭(陽朔)의 무대에서 매일 공연되고 있어서, 우리 고장의 ‘정남진 물 축제‘와 연관하여 물과 관련되는 공연을 관람하고 싶었다. 특히 계림은 소수민족이 많이 살고 있어 그들의 생활상과 전통문화를 직접 접해 보고 싶은 충동도 일어났다. 하늘이 무척이나 맑은 6월 19일 10시, 장흥을 출발한 여행단 11명은 돈밧재를 넘어 월출산을 바라보고 서울을 거쳐 인천국제공항에서 오후 7시 20분에 전세기 중국 동방항공에 탑승하여 계림국제공항에 도착하니 밤 11시30분이다. 장흥에서 출발한지 꼭 열 한시간만이다. ●천하제일의 이강(漓江) 계림 여행의 첫날인 6월 20일 아침, 새소리에 일찍 잠이 깨어 창밖을 내다보니 호텔 뒤 낮은 산언덕 바위 틈새에 자생하고 있는 이름 모른 나무에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었다.이제부터 계림의 역사문화탐방 일정이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절경속의 신선이 된 듯한 한 시간의 유람은 너무 짧았다. 유람을 마치고 선착장으로 돌아오는 유람선 부근에서 어부 1명이 1인용 뗏목을 타고 ‘가마우지’란 새를 이용하여 물고기 사냥을 하고 있었다. 가마우지는 이강(漓江)의 명물 가운데 하나이며, 그 가격이 황소 한 마리 보다 더 비싸다고 한다. 이 어부는 우리와 함께 강변에 하선하여 양 어께에 가마우지를 메고 한화 1천원씩을 받으며 우리와 함께 기념사진 촬영에 응해주었다. 이강 유람을 마치고 출발한지 한 시간쯤 지났다. 계림의 농촌 풍경에 심취되어 돌아오다 보니 어느덧 계림시 회선로(會仙路)에 도착하였다. 버스가 멈춘 광장 옆에는 큰 건물이 있었고, 그 건물 벽에는 명방국예관(茗坊國藝館)이란 간판이 걸려 있었다. 안내에 따라 2층으로 올라가니 빨간 유니폼을 입은 젊은 여인들이 우리 일행을 맞이해 주었다. 이곳은 중국의 전통문화의 하나인 차 문화를 연구하면서 차와 과자류를 판매하는 곳이었다. 여행객들이 외국 여행을 할 때마다 관광객의 의사와 상관없이 들리게 되는 곳이 관광상품 판매장이다. 이와 같은 특산품 전시 판매장은 정부의 지시에 의하여 필수 코스로 되어 있다. 이번 3일 간의 여행 기간에도 네 곳( 차茶, 진주, 나텍스, 실크 등의 매장)을 의무적으로 들렀으며, 가는 곳마다 약 한 시간정도의 시간을 보냈었다. 차 판매소의 가까운 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뒤에도 자리를 옮겨 “해(海)의 성(星)‘이란 진주매장을 들르게 되었다. 나는 진주 쇼핑매장에 들어가지 않고 건물 밖의 정원을 거닐며, 그 곳 풍광을 완상(玩賞)하였다. 기온이 우리나라보다 5℃이상 높아 날씨가 몹시 무더웠다. 정원의 거목 숲 속에서는 제 철을 노래하는 매미들의 합창이 무성(茂盛)하였다. ●민속문화의 집성지 세외도원(世外桃源) 차창 밖에 한없이 펼쳐진 평야와 귤밭, 그리고 촌락 등은 그동안 내가 상상했던 것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들이 마구 나타나, 나는 이국의 정취에 흠뻑 빠져 황홀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지나가는 길목에서 계림여유고등학교(桂林旅遊高等學校)란 건물도 눈에 띄었다. 여행과 관광을 전문으로 하는 학교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강(漓江) 유람 후 4시간 30분 만에 두 번째 여행지인 세외도원에 도착하였다. 세외도원은 산수가 아름다운 곳으로 , 계림의 계양로(桂陽路)에 위치하여 시 중심부로부터 약50km정도 떨어져 있다. 중국의 유명한 문학가이자 시인인 도연명(陶淵明, 376-427)이 지은 도화원기(桃花源記)가 전해 오면서 사람들은 이 책속에 묘사된 정경(情景)을 자신들의 마음에 간직된 이상세계로 여기어 이곳을 ‘世外桃源’ 이라 부른다고 한다. 세외도원에서는, 중국인들이 기나 긴 역사가 이어가는 동안 파생(派生)된 소수민족의 전통문화를 그대로 전승하면서, 현시대에 들어 그들의 생활문화를 관광 상품화하여, 내적(內的)으로는 소수민족보호책으로 그들의 생활을 돕고, 외적(外的)으로는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대외에 널리 알리어, 국위를 선양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매표소를 지나자 연자호(燕子湖)라 부르는 조그마한 호수주변 곳곳에 중국전통 건축물이 이채롭게 자리 잡고 있고, 조그마한 유람선5-6척이 정박해 있었다. 이 호수는 상공에서 내려다보면 제비모양과 흡사하다하여 ‘제비호수’라 부른다고 한다. 두 척의 유람선에 분승하여 좁고 긴 호수를 돌며 약 1시간동안 수천년전의 중국의 원시세계로 들어가 그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체험하게 되었다. 관광객의 시야에 나타난 협곡의 호수가에는 사공이 낚시를 드리우고 있고, 동굴 밖 우측 언덕에는 도화림(桃花林)이 조성되어 중국의 옛 정취를 자아내는가 하면, 뱃길 좌측 언덕의 종려나무마다 물소의 해골이 무시무시하게 걸려 있어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도 했다. 또한 숲속에는 원시인들이 기거하는 움집이 있고, 그 앞 물가의 언덕 에 세워진 원시적인 무대 위에서 남녀 젊은이들이 웃통을 벗어 제치고 아랫도리는 나무껍질 같은 것으로 가리고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춤을 추고 있는 듯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마치 너무 성난 사람처럼 보였고,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절경을 바라보며 은자암 동굴로 가는 도중 유인학 총재는 어제 날짜(2008.6.19)의 조선일보에 실린 “세계자연유산에 이름 올린 지 1년, 제주(濟州))가 웃는다.” 란 제하(題下)의 신문기사를 들추기면서 “장흥의 고인돌이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등록이 될 경우, 세계 문화유산 보유군(保有郡)이란 명성과 함께 관광과 홍보 등의 시너지 효과를 얻어 장흥군이 발전하는데 큰 기틀이 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은자암(銀子岩)과 월량산(月亮山), 그리고 대용수(大榕樹) 오후 3시40분 세외도원을 떠나 은자암 동굴 앞에 도착하였다. 은자암풍경구는 양삭에서 3km, 계림 중심지에서 85km 지점의 여포현 마령진에 위치해 있다. 동굴은 개발된 2km 구간에 다양한 유형의 종유석이 형성되어 있으며, 마치 보석과 산호와 비치로 만든 궁전과 같은 예술의 궁전이었다. 동굴의 내부는 습기가 많고 더워 곳곳에 선풍기가 작동되고 있었지만, 온몸에서 나는 땀은 그칠 줄 몰랐다. 그 산 아래에는 이강이 흐르고 있으며, 강변에 1천여 년 전에 뿌리내려 끊임없이 가지를 뻗어 생명력을 과시하며 천년의 정기를 뿜는 ‘대용수(大榕樹)’란 나무가 있었다. 높이가 17m이고 둘레가 7.5m이며, 나무 가지가 태양을 가려 땅을 덮는 면적이 무려 100㎡나 된다. 이 나무는 가지에서 기근(氣根)이 땅으로 뻗어내려 지주근(支柱根)이 된 독특한 나무이다. 열매는 무화과를 닮았다고 하며, 천년 묵은 이 나무는 관광명물이 되어 날마다 관광객을 끌어 들이고 있다 ●양삭(陽朔)의 수상 가무쇼(水上歌舞쇼) 오후 6시, 인상유삼저(印象劉三姐)의 고장 양삭(陽朔)에 도착했다. 계림시의 중심부로부터 65km거리이다. 기원전 590년 수나라 때 양삭현으로 설치된 오래된 역사도시이다. 도시 내에는 서양의 거리가 자리 잡고 있고, 날씨가 더운데도 길거리에는 동ㆍ서양인들이 가득하다. 수상 가무쇼(水上歌舞쇼)인 ‘인상유삼저‘를 관람하기 위해 이곳에 왔지 않은가 싶다.공연장 인근 고급호텔(新西街國際大酒店)에서 저녁을 먹고 공연장으로 들어갔다. ‘아, 여기가 공연장인가! 하고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진경산수(眞景山水)인 2km의 이강(漓江)과 12개의 산봉우리인 산천지(山天地)를 무대와 배경으로 삼아 수상 가무쇼를 하는 이곳을 보고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시작 30분전에 착석하여 기다렸다. 관람좌석은 3천석정도라고 한다. 저 멀리 출연배우로 보이는 50여명이 노랑 옷을 입고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전방100m지점의 수상무대에는 하얀 스크린이 세워져있고, 약 50m의 전방 강 가운데에는 붉은 천이 깔려 있다. 바다와 같이 넓은 강물 위에 어둠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공연 10분 전에 우측 강가에서 무수한 출연진이 줄지어 들어오고 좌측 강물 위에 수십 척의 배가 들어오고 있다 밤 여덟시, 드디어 종이 울리고 음악이 시작되면서 조명이 꺼진다. 저 멀리 스크린에 조명이 비치고 한 사람이 출연되자 어린이의 대사가 울려 퍼진다. 그리고 2km의 넓은 강과 12개의 산봉우리를 배경으로 한 무대에 화려하고 오색찬연(五色燦然)한 조명이 비친다. 너무나 환상적인 꿈의 전경(前景)이 펼쳐진다. 이렇게 해서 1시간 동안, 붉은 천과 사람이 물속으로 들어갔다 물 위로 나오는 것이 반복되면서, 수상무대에서 대사와 노래, 춤과 횃불의 향연(饗宴)이 이어진다. 이러한 장면이 연출될 때마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형형색색의 조명이 비치고 꺼질 때의 장면은 너무너무 매혹적이고 환상적이었다. 대사를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기대감에 찬 상상력과 예술의 상상력이 생각과 압축으로 감행(敢行)된다. 예술의 극치인 ‘인상유삼저(印象劉三姐)의 내용은 이 지역 소수민족의 전설을 극화(劇化)한 것으로, 남여간의 사랑 이야기를 음악과 무용과 대사 그리고 물과 빛을 조화롭게 펼친 수상 가무쇼이다. 인상(印象)은 이미지(image)를 말하며, 劉三姐’는 이 공연의 여주인공이다. 이 가무쇼는 중국의 국제적인 연출가이며, 2008 베이징올림픽의 개막식을 연출, 진두지휘한 장이머우(張藝慕)감독과 무대와 가무를 감독하는 왕조가, 판웨 두 명의 조감독이 지역주민 600명(장예모감독의 예술학교학생300명포함)을 동원하여 5년 반 동안의 준비 끝에 세계무대에 올려 논 걸작품이다. 공연중에 출연진 수십 명의 몸에 100여 개의 전등을 달고 나오는 장면과 여주인공 유삼저가 초승달 위에서 연기(演技)하는 장면은 관객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끝 부분에 여주인공이 천위로 올라가고, 또 퇴장할 때의 조화로운 음악과 조명이 너무 좋았다. 그리고 새소리와 물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노래에 맞춰 아이들과 가마우지(새)를 어깨에 메고 퇴장하는 장면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이 공연으로 인해 ‘오지(奧地)의 도시인 양삭시(陽朔市)가 진정한 문화 ․관광도시로 변모하면서 이 지역의 경제가 살아나고, 소수민족의 자부심이 되살아났다’고 한다. 체격이 작은 양삭(陽朔)의 소수민족이 이 가무쇼를 준비하는 과정에 얼마나 많은 힘이 들었겠는가를 상상해 보면 정신이 아찔할 정도이다. 5년 반 동안의 혹독한 훈련(연습)과 2km의 강과 12개의 산봉우리를 조명하는 작업은 참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해냈다. 도시 중심부에 탐진강을 끼고 있고, ‘제1회 정남진 물축제를 개최한 우리 장흥군의 관련인사들은 인상유삼저를 한번쯤 관람해 보고,’정남진물축제‘의 발전방안을 깊이 모색하고 좋은 아이디어도 창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계림시의 전망대 복파산(伏波山) 이틀간의 강행군과 수면부족으로 피로를 느끼면서 호텔 출발, 5분 후에 오늘의 첫 관광지인 복파산(伏波山)에 도착하였다복파산(伏波山)은 계림의 중심 동북쪽 이강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데, 당나라 때 복파 장군의 묘가 있었다고 해서 이름 부르게 되었으며, 계림의 시가지와 독수봉, 첩체산이 한 눈에 보인다. 복파산 밑에는 환주동(環珠洞)이 있고, 강변 쪽에는 200여 개의 석불상(石佛像)이 암벽에 조각되어 있는 천불암 동굴이 있다. 360개의 계단을 밟고 7분 만에 정상에 도착하였다. ●동물의 기교를 볼 수 있는 웅호산장(熊虎山莊) 40여분간의 복파산 관광을 마치고, 당초계획에 없었던 웅호산장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들르지 않으면 안 될 곳인 나택스 공장으로 들어가 또 1시간 20분 동안을 지체하고 나왔다. 소중한 시간에...얼마 후 웅호산장에 도착, 정문안으로 들어갔다. 웅호산장은 여러 나라의 각 지방에서 가져온 호랑이와 사자, 말, 낙타, 돼지, 원숭이 등 1,000여 마리와 공작, 뱀 등을 사육․번식하고 동물에 관해 연구하는 곳이다. 우리는 승강무대에서 약 1시간동안 아슬아슬한 각종 ‘동물의 기교의 쇼’를 구경하였고, 이어 호랑이의 낙원으로 가는 도중에 초원(草原)에서 큰 호랑이가 순식간에 황소를 물어 죽이는 끔직한 장면(관광객을 위한 연출)을 보았다. 육식동물의 세계는, 흔히 힘센 동물과 힘이 약한 동물 간에 잡아먹고 먹히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현상이 벌어진다. 사람의 세계 역시, 예나 지금이나 이와 유사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크게는 국가 간의 전쟁이 그런 현상의 일부분이며, 작게는 이번에 우리가 탐방한 지역의 소수민족이 그 어느 땐가 강한 자의 공격에 못 이겨 깊은 산간지대로 밀려들어갔던 현상을 들 수 있다. ●오지(奧地), 소수민족의 민속마을 계림시의 서북쪽에 위치한 용승현(龍勝縣)의 민속마을을 찾아갔다. 길은 매우 좁은 콘크리트 포장과 비포장 도로였으며, 높은 산 아래의 좁은 계곡에는 긴 강이 흐르고 있었다. 이름하여 용승강이다.발달되지 않은 작은 농촌을 지나 깊은 산골로 가는 길옆의 산록에는 대나무가 산을 덮고 있었고, 곳곳에는 가문비나무와 비슷한 침엽수가 자생하고 있었다. 용승으로 가는 길목의 주유소에서 휴식을 할 때, 현지인들의 전통문화의 하나인 묘를 관찰하는 기회를 가졌다. 남들이 휴식을 취하는 시간을 이용하여 뛰어 올라간 산자락 언덕 위에는 다섯 기(基)의 묘가 밀집되어 있었다. 전부 소형이며, 봉분 앞부분에 석축이 되어 있고, 피장자의 성명이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우리나라 공동묘지를 연상하면서 규모와 형태는 약간 다르지마는 둘레석과 묘비를 보고 우리민족의 조상숭배 정신과 유사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웅호산장을 출발한지 3시간이 지나 도착한 용승 민속마을은 용승 각족자치현(龍勝各族自治縣)에 속하며, 묘족(苗族),요족(瑤族), 장족(壯族) 등 소수민족이 모여 사는 곳이다. 이들의 선조들은 약 700여년 전에 강한 자(漢族)의 힘에 못 이겨 쫒기고 쫒기다가 이곳으로 피해 들어와 심곡(深谷) 산비탈과 계곡에 삶터를 잡고 뿌리를 내렸다고 한다. 길가의 구멍가게 앞에 서있던 여인들이 길손들을 따뜻이 맞이해 주었다. 그들은 대부분 붉은 상의와 검은 치마를 입고 있었고, 장발을 머리에 동여 메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과 눈빛에서는 순박하고 맑고 밝은 모습이 보였으며, 어딘지 모르게 정겨운 느낌을 주고 있었다. 나는 두 세장의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그들의 뒤를 따라 뒷산언덕에 자리 잡은 전통가옥으로 들어갔다. 조그마한 돌계단으로 축조된 좁은 골목 길 언덕에서 10여명의 남자들이 무리지어 중국의 전통 농악기를 치며 길손을 맞이해 주었다. 그들이 치고(연주)있는 악기는 크기가 작지만, 우리나라의 농악기의 성격을 지닌 사물(四物:꽹과리,쟁,북,장고)이 있었으며, 그들 고유의 전통 음박(音拍)과 음률(音律)에 맞춰 소리 내어 흥을 돋우고 있었다. 나는 이 장면을 보고 온 몸으로 전해 오는 전율 같은 감동을 받았다. 중국인들은 그들의 ‘전통 민속’을 멸실하지 않고 고이 간직하여 중국의 어느 곳을 가든지, 곳곳마다 세계인들에게 보란 듯이 그들의 옛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노변이나 무대에서 1명 또는 수 백명이 출연하여 관광객을 대상으로 연주하고, 공연하고, 또 민속공예품을 전시판매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현실과 비교하여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56개의 인종과 13억의 인구를 통합하여 대국을 이끌어 가는 그들의 저력은 어디에 있을까? 그들은 조상들의 얼과 혼이 담긴 민족정신을 이어가면서 그 나라의 정체성(正體性)과 주체성(主體性)을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전통문화와 자연유산을 밑거름으로 하여 지금은 경제대국으로 줄달음질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요족 여인들을 따라 전통가옥으로 들어갔다. 전통가옥은 20여 평 정도의 목조와가 3층 귀틀집으로, 모든 생활을 집안에서 할 수 있도록 설계된 집이다. 1층에는 대바구니와 질그릇 등 생활도구가 있었으며, 2층은 우리 나라의 아파트의 거실처럼 비교적 넓은 공간이고, 거실 좌측 입구에 방이 하나, 그리고 우측에 조그마한 두 개의 방이 있었다. 방안에는 조그마한 침대가 놓여 있었으며, 책상 위에 TV와 손가방이 놓여 있었고, 벽에는 옛날 우리나라에 서양문물이 들어 올 때, 우리들이 서양인을 동경했던 것처럼, 서양의 배우(?) 사진이 붙여 있기도 하였다. 침침한 2층으로 안내한 그 여인들은 땅에 닿도록 길게 길러 동여맨 머리모습을 보여주면서 이색적인 옷차림으로 인사를 하고 프로그램 순서에 따라 손님맞이 행사를 진행하였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우리를 이색적인 세계로 끌어들였다. 그들이 보여주는 가무(歌舞)의 가사 내용은 “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가깝고 먼 나라에서 귀한 손님이 와 주시니 고맙고 반갑습니다. 중국에서는 한국 문화를 좋아합니다” 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박수로 답례를 할 때에 그들의 입에서는 ‘아리랑’이 흘러 나왔다. 너도나도 억누를 수 없는 감흥(感興)이 울어나 합창을 하고 또 손에 손을 잡고 거실을 돌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간을 가진 뒤 그들은 또 긴 머리를 풀어 보이고, 아줌마와 처녀의 머리 형태를 구분하여 보여준데 이어, 우리 여행단의 대표 총각(?)으로 선발된 박단장과 박단장이 지정한 미모의 처녀와 결혼하는 전통 혼례식의 체험을 하기도 하였다. 그들이 한잔한잔 따라주는 유차를 마시고 밖으로 나와 또 그들이 주는 토종술을 마시는 순서로 요족 민속마을의 탐방을 마무리하였다. ●용승의 노천온천(露天溫泉)과 용척제전(龍脊梯田) 계림여행의 마지막 밤은 계림 용승온천호텔(hot spring hotel)에서 보냈다. 온천과 호텔이 들어선 곳은 광서계림시 용승현(廣西桂林市龍勝縣)이며 계림시 중심부에서 134km 떨어진 심산유곡(深山幽谷)이다. 호텔 로비에 들어서자 다른 호텔에서는 보기 어려운 소형무대를 보았고, 그 무대 뒤에 계단식 전답(龍脊梯田)이 담긴 배경사진이 장식되어 있음을 보았다. 우리는 저녁식사를 마친 후, 온천용 까운으로 갈아입고 호텔 뒤의 노천 온천으로 갔다. 그곳 시간으로 오후 7시 40분인데, 산골에는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슬리퍼를 신고 찾아가는 야트막한 언덕 길 좌측에 100평쯤 되게 보이는 풀장이 있고, 그곳으로부터 약120m정도 올라간 지점에 각기 온도와 규모가 다른 네 개의 야외 온천이 있었다. 이곳 온천수는 지하 1,200m에서 솟아오르며, 많은 광물질이 함유된 평균 40-50℃라고 한다. 우리는 여행에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입고 갔던 까운을 벗고, 수영복차림으로 욕탕으로 들어갔다.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풀장과 작은 온천 두 곳을 번갈아 가면서 몸을 담그고, 마지막으로 이색적인 닥터피쉬탕(溫泉按摩漁湯, Docter fish fool)으로 들어갔다. 피라미 같은 물고기가 때를 먹기 위해 다리 피부를 쪼아대는 간지러운 감촉을 느끼며, 남녀동료들과 이국의 낭만에 취해 있을 때에 중국의 여자 탈렌트가 풀로 들어와 곁에 앉는다. 이때에 황홀경(怳惚境)에 젖어 저절로 시상(詩想)이 떠올랐다. 하루 해가 저물어 발길 멈추는데 다음날 아침. 우리는 용승호텔을 출발하여 어제 왔던 S자 길을 따라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이 지역 인근에는 계단식으로 조성된 논밭으로 덮여진 산과 마을이 많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現象)을 용척제전(龍脊梯田)이라 한다. 험난한 지형의 고지대까지 산 전체를 덮고 있는 용척제전은 약600-700년전, 원나라 때에 시작하여 100여년간에 걸쳐 산을 개간하여 조성된 전답이며, 전답의 인근 곳곳에 소수민족(苗族)이 조그마한 마을을 형성하여 그들 나름대로 평화롭게 살고 있다고 한다. 고지대에서 생활하고 있는 이들 요족들은 청색의 옷을 즐겨 입고, 틈만 나면 스스로 옷에 수를 놓는다고 한다. 지금 그들이 살고 있는 고지대 마을에는 관광객이 머물며 먹고 잘 수 있는 식당과 숙소가 있어, 동서양의 관광객이 많이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나는 신비스런 용척제전의 집단지를 직접 가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한 채, 고지대가 아닌 산자락의 계단식 전답과 도로변의 이색적인 경관을 바라보면서 계림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버스가 멈춰 창밖을 바라보니, 도로 확장공사로 파헤쳐진 흙이 도로를 가로막고 있었고, 차량 출입금지(道路封閉)란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으며, 그 앞에는 앞서간 5대의 차량도 멈춰 있었다. 우리 일행은 버스에서 내려 차가 소통될 때까지 그 도로를 따라 좌편에 흐르고 있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15분 동안 걸어나아 갔다. 언덕아래 강가에는 문자 그대로 일엽편주(一葉片舟)를 탄 어부가 고기를 낚고 있었고, 우측 벼논에서는 한 농부가 분무기를 등에 짊어지고 농약을 살포하고 있었다. 그 곳으로부터 약 200여 m 전방 강변에는 전통 목조기와집과 3-5층의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로 이루어진 큰 마을이 있었다. 나는 그 길을 걸으면서 과거와 현대가 혼합되어 형성된 건축물과 마을, 그리고 도로공사로 파헤쳐진 흙더미 속에 주민들이 버린 생활 쓰레기가 노출된 현장을 보고, 이곳 역시 시대의 변천에 따라 주민의 생활환경이 변모되고 현대화되어 가고 있음을 느끼기도 했다. ●계림의 최고봉 요산(堯山) 용승호텔에서 출발한 지 4시간 만에 계림시에 도착하여 중식을 한 후, 실크제품 판매장(40분)을 경유하여 계림의 유일한 흙산인 요산(堯山)으로 향했다. 요산은 계림 중심부에서 약 7km 지점의 정강로(靖江路)에 위치한다. 요산으로 가는 길목에서 고대와 현대의 것으로 보이는 능묘(陵墓)가 집단화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소나무 숲속에 자리 잡은 삭도(索道케이블카)건물 입구에는 다른 관광지에서 보듯이 요산경구(堯山景區)란 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우리는 케이블카(2인용 리프트)를 타고 정상으로 올라 갔다. 리프트 카에서 내리자, 언제 누가 촬영을 하였는지, 우리가 리프트카를 타고 오는 모습이 담긴 사진 1매를 제시하며 2000원을 받는다. 계림에서 최고봉(最高峰, 909m)인 정상으로 올라갔다. 정상에서는 계림의 전 시가지와 36,000개의 산봉우리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계림의 풍광과 산봉우리를 내려다 본 일행 모두가 탄성을 자아냈다. 정상에는 곳곳에는 또 다른 관광시설이 있었지만, 가이더의 시간 독촉에 못 이겨 그곳을 가보지 못하고 도착20분 만에 하산하고 말았다. 가이더는 관광상품 쇼핑시간에는 여유를 주지만, 여행객의 목적인 문화탐방 시간에는 여유를 주지 않는다. 우리가 이렇듯 시간에 쫓기며 찾아가는 다음 코스는 묻지 마라 코스였다. 중국을 여행할 때마다 필수적으로 찾게 되는 곳, 발 맛사지 장이다. 최근 들어 이 맛사지가 점점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원래 중국의 남쪽 지방에서 고유의 지압이 상품화되었고, 이곳의 맛사지가 가장 유명하다고 한다. 발 맛사지를 한 다음, 방을 옮겨 한 시간 동안의 전신 맛사지를 받았다. 손과 팔, 발과 다리 그리고 전신의 맛사지를 받았지만 피로는 회복되지 않았다. 3일간의 계림 여행일정은 마지막 단계로 접어들었다. 2008년 6월 22일 오후 7시 20분, 발 맛사지 장소의 인근에 있는 ‘경상도’란 식당으로 찾아 들어갔다. 한국에서만 먹을 줄 알았던 돼지 삼겹살과 상추 안주로 중국술을 마시며, 계림여행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회식을 가졌다. 유총재의 건배 제의에 이어, 2.3명의 추가 건배제의로 정감과 흥겨움이 무르익어 갔다. 그러나 아쉽게도 다음 시정(時程) 때문에 회식은 막을 내리고, 마지막 관광지로 발길을 돌렸다. ●마지막 관광지, 삼호(杉湖)의 야경(夜景) 계림, 양강사호(兩江四湖)중의 하나인 삼호(杉湖)주변에서 버스가 멈췄다. 양강(兩江)은 이강(漓江)과 도화강(桃花江)을 말하며, 사호(四湖)는 옥룡호, 계호, 용호, 삼호 등의 네 개의 호수로 이루어 져 있다.버스에서 내리자, 낮선 두 사람이 우리의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다가 유람선을 타기 위해 선착장으로 가는 우리일행의 뒤를 따르고 있어 불안감이 들었다. 그 들은 겹친 우산을 한손에 들고 여행단의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박선생의 뒤를 바짝 따라가고 있었다. 나는 그 때 어깨 뒤에 손가방을 메고 가는 박선생에게 다가가 ‘수상한 사람이 뒤를 따르고 있으니 주의 하라’는 귀띔을 해 주었다. 우리 일행이 선착장에 도착할 때에 어디에선가 악! 하는 여자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그 괴한이 공주에서 온 k사장의 가방 쟈크를 열고 있는 것을 목격한 부인이 깜짝 놀라 고함을 지른 것이다. 우리는 위험한 순간을 모면하고 정박해 있는 유람선에 올랐다. 유람선에는 외국인 네 명이 앞자리에 동승하였고, 뒷자리에는 40세정도로 보이는 중국인 악사(樂士) 1명이 해금 같은 전통 악기를 들고 앉아 있었다. 우리는 악사가 들려주는 음악을 들으며 아름다운 도시, 아름다운 호수를 약 한 시간 동안 유람을 하였다. 호수 가운데 높이 세워진 금탑(金塔42m)과 은탑(銀塔35m)에서 내려 비춘 오색찬연(五色燦然)한 불빛은 계림의 밤하늘을 아름답게 장식하였고, 호수에 떠있는 수많은 다리와 호수가의 누정(樓亭)에서 비춰지는 네온 등불은 온 호수를 뒤 덥고 있어, 그야말로 환상적인 경관을 이루고 있었다. 호수에는 세계 각국의 유명한 다리를 모방한 다리가 곳곳에 세워져 있었고, 호수 가에 지어진 누각 같은 무대에서는 전통 옷을 곱게 입은 무희들이 가무(歌舞)를 하고 있었으며, 유람선 옆에서는 뗏목을 탄 태공이 가마우지로 고기를 잡고 있어 너무너무 이색적이었다. 깊어가는 이국의 여름밤에 유람선에 동승한 중국인 악사는 계속 동․서양의 음악을 번갈아 가며 연주해 주었다. 중국 음악에 이어 라쿰파르시타 등의 서양음악과 아리랑과 도라지, 나의 살던 고향 등의 한국 민요가 연주되었다. 유람객은 자기가 알고 있는 노래가 나올 때마다 저절로 합창을 하였다. 다채로운 삼호의 야경은 밤이 깊어갈수록 더 아름다웠으나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국의 정취에 취해 있는 유람객들에게, 어느덧 약속된 시간이 다 되어갔다. 아름다운 절경과 여흥을 남겨둔 채, 우리 여행단은 배에서 내려 계림 국제공항으로 달려가 밤 11시15분발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하였다. ●계림 문화탐방의 후감(後感) 계림 관광 3일 간의 일정은 너무 짧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쫓기고 쫓긴 시간의 연속 그대로였다.3일간 돌아 본 계림의 산수와 자연환경은 문자 그대로 천하제일이었다. 발길을 옮기는 곳마다 경승지로 가득 차 있어 동서양의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고, 그들은 역사와 전통문화를 기반으로 이 시대에 새 문화를 창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민속문화 집성지(民俗文化集成地)인 세외도원(世外桃源)과 용승(龍勝)의 전통 민속마을, 그리고 양삭시(陽朔市)의 수상가무쇼(水上歌舞쇼)는 우리에게 크나큰 감명(感銘)을 안겨 주었다. 도시와 고속도로를 제외한 전 지역이 개발을 억제한 양, 자연을 훼손한 곳은 볼 수 없었고, 국가정책 전체의 틀 속에서 소수민족 정책과 전통문화 정책은 국민의 인권보다는 보존위주의 정책을 펼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었다. 그 곳 민속촌에서 볼 수 있듯이, 긴 역사에서 파생된 소수민족의 전통문화를 그대로 전승(傳承)하면서 그들의 생활문화를 관광 상품화 하고 있었다. 소수민족의 보호책으로 그들의 생활을 돕는다고 하지만, 21세기 지구촌시대, 국제 문화가 급속도로 변화되어 가고 있는 시점(時點)에 중국의 외딴 곳에 원시문화가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어쩐지 거주이전의 자유와 인권이 다소 제한되고 있는 것으로 직감(直感)할 수 있었다. 어떻든, 세외도원에서의 원시인의 생활상에서부터 역사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전통문화를 총망라(總網羅)한 민속 공연과 민속품 제조시연(試演) 및 전시판매하는 ‘관광시범지구’와 용승(龍勝) 민속마을의 전통가옥과 전통악기 연주 및 소수민족(苗族)의 생활문화의 연출(演出) 등의 관광 상품은 전통문화 보존과 소수민족의 생활보호를 겸한 국가 경제력 향상의 목적이 내포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示唆)하는 바 크다 하겠다. 더욱이 한 연출가의 노력에 의하여 산과 강을 무대삼아, 주민 600명을 동원, 그 지역의 전설을 극화(劇化), 공연(公演)하여 그 지역에 세계 각국의 관객을 유인(誘引)함으로써 지역 경제가 살아나고, 지역민의 자부심이 되살아났다는 것은 경이적(驚異的)인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이번 여행을 하는 동안, 계림의 이강을 바라보면서 장흥의 탐진강을 연상하였고, 세외도원 원시인의 생활상을 보면서 장흥의 고인돌시대의 선사문화를 상상(想像)해 보았다. 또한 용승의 전통악기 연주장면을 보면서 장흥의 ‘버꾸놀이’를, 그리고 양삭의 수상 가무쇼를 관람하면서 ‘정남진물축제’를 예감(豫感)하는 등 장흥의 이상세계(理想世界)를 그려보았다. 시대는 변천하고 있다. 아니 급변하고 있다. 우리가 계림 여행을 다녀온 뒤, 우리 장흥군에서는 제1회 정남진물축제(7.30-8.3)가 있었고, 중국 베이징(北京)에서는 제29회 올림픽이 개최(8.8-8.24)되었다. 이 모두가 그 지역, 그 나라의 번영과 발전을 위한 축전인 것이다. 베이징 올림픽은 그들의 문화와 전통을 자랑하고, 중화민족(中華民族)의 부활과 자국민의 대동단결을 기치(旗幟)로 열렸으며, 궁극적으로 이 올림픽을 발판삼아 정치경제적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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