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구곡, 그 풍치를 즐기고 노래하다 ⑤ 화양구곡 암서재(巖棲齋) 우리는 늘 선입견을 지니고 삽니다. 산 중턱 고즈넉한 곳에 암자가 있으면 당연히 승려가 수행하던 암자라 여기기 쉽습니다. 또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지나갑니다. 그러나 내용을 알고 나면 자신이 선입견에 빠져 있었음을 느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세상 모든 일들이 생각대로 아님을 느낄 때 우린 좀 더 신중하고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는 것을 느낍니다. 현대는 가히 SNS를 통한 소통의 시대입니다. 온갖 SNS 전달 매체를 통해 날아드는 각종 정보를 깊이 따져 읽고 보기엔 시간이 촉박한가 봅니다. 현대인들의 정보 획득 습관은 상당히 표피적입니다. 때로는 제목만 보고 전체를 예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금만 길어도 끝까지 보지 못하는 조급증도 있습니다. 책이나 글을 읽어도 내용이 깊고 무거운 글이나 책은 아예 읽지 않으려는 습관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진지하게 사물을 보고 진위를 따지며 읽는 것을 힘들어 하는 것이 현대인의 습관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짧게, 간단하게, 재미있게’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깊은 생각과 진실이 기댈 공간이 드물 때가 많습니다. 금사담 위의 암서재(巖棲齋)를 볼 때도 그렇습니다. 지나가는 많은 사람이 금사담 위의 암서재(巖棲齋)를 보면서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암자로 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송시열이 화양구곡에 와서 처음으로 지었다는 독서당입니다. 이걸 생각하면 앞에서 본 금사담은 화양구곡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송시열이 주자의 무이구곡을 생각하면서 이경억으로부터 화양동을 얻어 거처하면서 자기 생각대로 가장 좋은 곳에 집을 지었지요. 그리고 그곳의 이름을 암서재(巖棲齋)라 하였답니다. 거듭 말하지만 송시열은 철저한 주자(朱子) 추종자입니다. 유학도였지만 공자에까지 미치지 못했습니다. 조선시대의 학문을 하는 학자들의 학문 계통을 보면 서인들은 대체로 율곡을 통해 주자를 알고 주자를 알았으면 맹자를 통하여 공자를 아는 것으로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남인과 복인인 동인들은 퇴계를 통해 주자에 이르고 다음 맹자를 통해 공자에 이르는 길입니다. 유학의 궁극적 길은 공자의 마음으로 가는 것인데 많은 선비가 공자를 입으로는 달달 외웠으나 공자의 진면목에는 이르지 못했지요. 송시열도 그런 것 같습니다. 송시열은 율곡의 학통을 이었다고 하나 실제로는 율곡을 건너뛰고 주자에 이르렀고 주자의 학문 중에서도 예학과 형식주의에 상당히 빠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송시열은 주자를 닮고 주자의 예학을 철저하게 현실화시키려 한 선비같이 여겨집니다. 그것은 암서재(巖棲齋)에서도 나타납니다. 송시열이 1669년(현종 10년) 암자를 지어 놓고 그 이름을 암서재(巖棲齋)라고 한 것은 주자의 시 「반초은조(反招隱操)」중 :그 아래 쓸쓸히 지내는 늙은이 있어(下有寒棲老翁)“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주자는 자신을 한서(寒棲)라고 지칭하였는데 송시열은 자신이 화양동에 큰 바위 위에 거처한다는 의미로 한(寒)을 암(巖)으로 바꾼 것입니다<박용만<화양동에 서린 꿈> 『노강서원 화양서원』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9) 이처럼 송시열은 암자 이름 하나에까지 주자를 원용해 왔지요. 사실 금사담은 계곡으로는 매우 완만한 곳입니다. 화양계곡은 제9곡인 파천에서부터 매우 가파르게 흘러 내려옵니다. 그 물길은 제5곡인 능운대에서부터 완만해집니다. 그러다가 제4곡인 금사담에 이르러서는 유속이 거의 사라지고 못처럼 물이고인 상태를 보입니다. 그러니 금사담은 모래가 쌓이고 햇살이 물빛이 빛나게 된 것이지요. 이 물은 제2곡인 운영담에 이르기까지 완만하였을 것입니다. 지금은 운영담 앞에는 보를 만들어 물을 가두었기에 더 유유자적하게 보입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암서재(巖棲齋)는 금사담 바위 위에 고즈넉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암자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3칸이랍니다. 그리고 거기 오르내리기도 그리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 교통이 불편했던 당시에는 심산 구곡이었을 것입니다. 송시열은 이곳에서 기거하면서 독서와 사색을 통해 말년을 유유자적하며 보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자가 무이구곡을 학문과 사상의 본고장으로 삼았듯이 암서재를 자신의 학문과 사상의 본고장으로 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송시열의 소망은 그의 사후에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뒷날 제자들이 화양동에 서원(화양서원)을 짓고 그를 받들며 그의 학문과 사상을 추종하였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송시열은 암서재를 지어 놓고 매우 흡족했던 모양입니다. 그가 화양동에 와서 지은 시(詩) <화양동에서 비온 뒤에(華陽洞雨後)>에서 “굽이치는 물길이 비록 용문산 어구를 뚫을지언정 자주산을 넘어뜨리기는 어려우리(縱破龍門口 難傾砥柱山 종파용문구 난경지주산)”라 하였듯이 아무리 황하의 물결이 거세도(세파가 거세도) 지주산(황하 중류에 있는 우뚝 솟은 바위산-황하강은 이 산을 가운데 두고 갈려져 흐른다. 지주산은 거센 황하의 물결에도 꿈쩍 하지 않는다)처럼 흔들리지 않는 의지를 가지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겠지요. 송시열은 1669년 12월 암서재에서 그런 마음을 다음과 같은 시로 읊습니다. 溪邊石崖闢(계변석애벽) - 계곡변 바위 벼랑 열렸으니 作室於其間(작실어기간) - 그 사이에 집을 지었노라 靜坐尋經訓(정좌심경훈) - 조용히 앉아 경서의 가르침을 탐구하여서 分寸欲躋攀(분촌욕제반) - 분촌이라도 그 높은 곳을 오르려 애쓴다네 -<華陽洞巖上精舍吟 송시열 기유년(1669, 현종10) 12월>/송자대전 권3>- 崖(애)는 벼랑 언덕, 가파른 절벽을 의미하며 闢(벽)은 열다 는 뜻입니다. 作室於其間(작실어기간/ 그 사이 집을 지었느라)라고 하였으니 암서재는 계곡위 벼랑 위 바위 사이에 세웠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슬아슬한 자리이지요. 마치 도를 닦는 선인(仙人)들이 거처하는 자리인 듯합니다. 그곳은 물소리 새소리 바람 소리 외에는 찾아올 것이 없으니 조용할 수밖에 없지요. 거기에 조용히 앉아 경서의 가르침을 탐구하겠다고 했으니 그 각오가 남다릅니다. 그러니 분촌(分寸)이라도 아껴야 합니다. 쉴틈 없이 학문에 정진하여 높은 경지(聖學-성인의 학문)에 이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지요. 이 시만 보면 송시열은 복잡한 정치의 세계는 안중에도 없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송시열의 삶은 정치 현실과 떨어질 수 없는 삶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송시열이 1669년(현종 10년) 암서재를 지을 당시 그의 나이 63세입니다. 어쩌면 나이가 들어 낙향하여 은둔하고 싶어 하는 나이입니다. 아마 송시열도 그것을 강하게 바랐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현실 정치에 예리한 칼날 같은 주장을 일삼던 송시열을 세상은 그냥 놔두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가 암서재를 지어 놓고 은거하면서도 현실 정치와 떨어질 수 없었던 것은 그의 성격 탓이기도 했지만, 당시의 정치적 상황 때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송시열은 당시 당파에서 노론의 영수였기 때문입니다. 그를 따르는 정치적 추종 세력은 송시열을 찾아들고 가르침을 청하였을 것입니다. 송시열이 쓴 암서재의 시(詩)는 지금도 암서재에 결려있다고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직접 가서 확인하지 못한 것입니다. 암서재는 절벽 위에 세워졌지만, 동쪽으로 솟은 석대(席帶)에는 넓은 바위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빼곡하게 앉으면 수십 명은 앉을 수 있습니다. 천년으로 이루어진 강당이지요. 송시열은 이곳에서 찾아오는 제자들을 모아 놓고 강론도 하고 풀류도 읊으며 세시국도 논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송시열을 따르는 제자들은 이곳을 학문과 정치적 논쟁의 근거지로 삼았을 것입니다. 송시열 이후 수많은 송시열 계열의 선비들이 화양구곡과 암서재를 다녀갔지요. 그들은 암서재에서 송시열의 시를 보고 차운하여 시를 읊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송시열을 그리워하며 찬양하였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당시 송시열의 정치적 계파가 얼마나 단합되고 강했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송시열의 후학 중에 김원행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김원행이 화양구곡 암서재에 결린 송시열의 시를 보고 차운(次韻-한시(漢詩)에서, 남이 지은 시(詩)의 운자(韻字)를 따서 시를 짓는 일이나 그 방법)하여 시를 지었습니다. 先生讀書處(선생독서처) - 선생이 글을 읽던 곳 危欄出巖間(위란출암간) - 높은 난간 아슬아슬한 바위 사이에 있네 一株寒松在(일주한송재) - 한그루의 추위를 견딘 소나무 남아 있어 留與後人攀(유여후인반) - 머물다가 후인들과 더불어 더위잡아 오르네 김원행『미호집』권1 <암서재에서 삼가 벽에 걸린 우암 선생의 시에 차운하다(巖棲齊 敬次尤庵先生壁上韻)> 그리움과 존경심이 묻어납니다. 누구를 그리워하고 존경하는가요? 先生(선생)은 누구일까요? 당연히 송시열입니다. 그러니 先生讀書處(선생독서처)는 바로 송시열 선생이 독서하던 곳인 암서재를 지칭합니다. 그곳에 후학인 김원행이 있습니다. 危欄出巖間(위란출암간)은 암서재의 위치를 묘사한 것이지요. 아슬아슬한 바위 난간 사이에 있습니다. 그곳에 一株寒松在(일주한송재) 즉 한그루의 추위를 견딘 소나무 남아 있다고 하네요. 여기서 소나무는 단순한 사물로서의 소나무가 아닙니다. 송시열을 지칭한 것입니다. 추위를 견딘 한 그루의 소나무이니 송시열을 지조와 절의를 지킨 우뚝 솟은 인물로 말한 것이지요. 추사 김정호의 <세한도>에서 공자(孔子)가 말한 “일년 중에서 가장 추운 시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그대로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고 한 대목을 떠올립니다. 김원행은 송시열을 그런 인물로 평가하고 존경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더욱 그리운 것입니다. 마지막 행에서 攀(반)은 ‘더위잡을 반’으로 ‘무엇을 붙잡고 오르다’ ‘의지하다’의 뜻을 가집니다. 김원행은 거기 머물고 있습니다. 後人(후인)은 뒤따르는 사람들, 자기처럼 송시열을 존경하는 후학들을 지칭할 것입니다. 그들과 서로 의지하여 오르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른다는 것은 어디에 오른다는 것일까요? 암서재라는 하나의 사물에 오르는 것만을 가리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학문적 지향 즉 송시열의 학문적 가르침과 지향을 따라 오르겠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송시열을 존경하고 그리워하는 모습이 곳곳에 배어 있습니다. 그러면 김원행은 왜 그토록 송시열을 존경하고 따르게 되었을까요? 김원행과 송시열은 특별한 관계입니다. 김원행은 송시열의 학통을 이은 중심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김원행(金元行, 1703년 2월 14일(음력 1702년 12월 29일)~ 1772년 8월 5일(음력 7월 7일))은 조선 후기의 학자입니다. 그리고 김원행의 집안은 대대로 강력한 서인 노론 집안입니다. 본관은 안동이며 자는 백춘(伯春), 호는 미호(渼湖), 운루(雲樓)입니다. 뒷날 받은 시호는 문경(文敬)입니다. 1719년(숙종 45) 과거시험을 봐서 진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벼슬은 그게 끝이었습니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 관직을 하사했으나 모두 사양했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산림학자(山林學者)로 살았습니다. 산림학자란 벼슬을 하지 않고 산림에 묻혀 학문 연구와 저술 활동에 매진하던 학자들을 말합니다. 김원행이 산림학자가 된 이유는 그 가정사의 트라우마 때문인 듯 합니다. 그의 증조부는 김수항이며 조부는 김창집(金昌集), 부친은 김제겸(金濟謙), 모친은 은진송씨(恩津宋氏) 병원(炳遠)의 딸이자 송준길(宋浚吉)의 증손입니다. 송준길은 송시열과 같은 시대의 송시열의 가까운 집안입니다. 후사 없이 사망한 5촌 종숙(從叔)인 김숭겸(金崇謙)에게 양자로 입양되어 김창협(金昌協-김수항의 손자)의 손자가 됩니다. 그의 조부 김창집은 노론의 4 대신의 한 사람입니다. 경종 초기(1722년~1723년)에 발생한 [신임옥사] 때 조부 김창집과 생부 김제겸이 유배되었다가 처형되었습니다. 거기다가 친형 김성행과 친아우 김탄행이 경종의 독살을 꾀한 죄목으로 처형됩니다. 나머지 일족도 처형되거나 유배되는 등 멸문의 고비를 겪었습니다. 그러니 그에게 관직은 죽음의 길로 여겨졌을지 모릅니다. 그의 학문은 귀양지에 배소 된 어머니의 도움으로 『孟子맹자』를 읽는 것으로 출발합니다. 그리고 율곡 이이(李珥)와 송시열의 문집을 탐독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철저한 서인 노론의 학통을 잇게 됩니다. 1725년(영조 1) 조부와 아버지가 신원(伸冤)되었으나 과거를 포기하고 고향에서 학문만 열중하였습니다. 1740년 내시교관(內侍敎官)을 제수받고 1750년 위솔(衛率)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 1751년 익찬(翊贊) ·지평(持平), 1754년 서연관(書筵官)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습니다. 1759년 왕세손(王世孫: 正祖)이 책봉되자 세손의 교육을 위하여 영조가 그를 불러들였으나 상소를 올려 사퇴하고 응하지 않았습니다. 1761년 공조참의(工曹參議)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 ·세손유선(諭善)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양하였습니다.(네이버 지식백과, 김원행) 그가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사양한 것은 아마 신임옥사 때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 뻔한 사건에 대한 트라우마일 것입니다. 그는 산림학자로서 초야에 묻혀 학문 연구와 서예에만 몰입하였습니다. 그래서 조선 후기 집권 계층인 노론의 빛나는 가문의 후손으로서 그 학통을 이은 명망 있는 학자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당시의 서인들에게는 송시열을 종주로 받드는 주자학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 학파 내에서도 낙론과 호론의 대립이 있었습니다. 그 대립은 김창협과 권상하의 학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권상하의 제자인 이간(李柬)은 김창협의 학설을 이어 이재와 함께 낙론의 중심이 되고, 권상하의 제자 한원진(韓元震)은 권상하의 학설을 이어 호론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김창협의 손자이자 이재의 문인인 김원행은 자연히 낙론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학자로 활동하였습니다.(**낙론의 입장에서의 김원행은 김창협의 학설을 답습하여 주리(主理)와 주기(主氣)의 절충적인 입장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심(心)을 이(理)라고도 하지 않고 기(氣)라고도 하지 않으며, 이와 기의 중간에 처하여 이기(理氣)를 겸하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것은 바로 이황(李滉)의 주리설과 이이(李珥)의 주기설을 절충한 김창협의 학설을 계승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학통을 이은 제자로는 아들 이안(履安)과 박윤원(朴胤源) · 오윤상(吳允常) 이 있고 노론계의 초기 실학자인 홍대용(洪大容) · 황윤석(黃胤錫) 등이 있습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처럼 김원행은 송시열의 학통을 이은 정통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러니 김원행과 송시열은 뗄 수 없는 관계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송시열을 그리워하고 존경하는 마음은 그윽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암서재를 찾은 김원행은 송시열을 숭배하고 존중하는 시를 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김원행 외에 화양구곡과 암서재를 찾아 송시열의 시를 차운하여 그리워하며 시를 읊은 사람은 많습니다. 그중에 홍직필이란 사람도 있습니다. 우선 그의 시를 보겠습니다. 大老藏修地(대로장수지) - 큰 어른께서 수양하는 마음을 품은 곳 臨溪屋數間(임계옥수간) - 계곡에 자리한 몇 간의 재실 巖阿今寂寞(암아금적막) - 바위 언덕 지금은 적막하니 高躅邈難攀(고촉막난반) - 높은 자취 아득하여 따라 오를 길이 없구나 홍직필『매산집』권1, <암서재에서 우암선생의 시에 삼가 차운하다(巖棲齋 謹次 尤庵先生韻)> (박용만 「화양동에 서린 꿈」 『노강서원, 화양서원』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에서 재인용 이 역시 송시열에 대한 그리움과 존경심이 그윽하게 묻어납니다. 大老(대로)는 누구일까요? 당연히 송시열입니다. 예로부터 大老(대로)라 일컫는 사람은 큰 어른입니다. 큰 어른이란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이라기보다는 고매한 인격과 학문을 이룬 가장 존경하는 어른을 말합니다. 그 큰 어른이 수양(修)하는 마음을 품은(藏) 곳(地)이니 어디를 지칭할까요? 당연히 암서재(巖棲齋)입니다. 그 암서재는 계곡에 자리한 몇 간의 재실이니 크지 않습니다. 여기서 數間(수간)은 많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란한 숫자를 의미하지요. 암서재는 소박한 재실 즉 독서당입니다. 그런데 그 암서재가 있는 바위 언덕이 지금은 寂寞(적막-고요하고 쓸쓸함) 합니다. 왜 적막할까요? 바로 大老(대로) 즉 송시열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미 큰 스승인 송시열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묻어나지요. 그런데 마지막 행에서 그런 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여기서 高躅(고촉)은 말 그대로 높은 자취입니다. 학문과 업적, 인품이 뛰어남을 말하는 것이지요. 邈(막)은 아득하다, 멀다 묘연하다는 것이니 도저히 그것에 이를 수 없음을 말합니다. 攀(반)은 높은 곳에 이르기 위해 무엇이든 붙잡고 매달리는 것을 말하지요. 바로 송시열의 학문과 업적 인품이 너무나 뛰어나고 고매하여 감히 따르려 해도 따라잡을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자신의 학문과 인격의 부족함을 한탄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행에서는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겸허함이 묻어나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송시열의 학문과 인격과 업적을 드높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홍직필은 왜 이토록 송시열을 그리워하고 찬양하며 존경하는 것일까요? 홍직필 역시 김원행처럼 서인의 노론으로서 송시열의 학통을 이은 사람입니다. 홍직필의 본관은 남양(南陽). 초명은 홍긍필(洪兢弼)이며 자는 백응(伯應)·백림(伯臨), 호는 매산(梅山)입니다. 서울 출신이며 병마절도위 홍상언(洪尙彦)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현감 홍선양(洪善養)이고, 아버지는 판서를 지낸 홍이간(洪履簡)입니다. 그는 1776년(영조 52)에 태어나 1852년(철종 3)에 죽었으니(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송시열의 얼굴조차 모릅니다. 송시열의 학통을 이은 한참의 후학이지요. 그는 어릴 때부터 재능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7세 때 이미 한자로 문장을 지었고, 17세에는 이학(理學)에 밝아 성리학자 송시열의 학통을 이은 박윤원(朴胤源)으로부터 오도유탁(吾道有托: 올바른 도를 맡길 만함)이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1801년(순조 1) 부모의 권유로 사마시에 응시해 초시에 합격했으나 회시에서 실패하여 그때부터 성리학에 전념하였습니다. 당시의 원로 명사인 송환기(宋煥箕)·이직보(李直輔)·임로(任魯) 등과 연령을 초월해 교유하였으며, 특히 오희상(吳熙常)과 가장 오래 교유했는데, 그로부터 유종(儒宗: 유학자의 으뜸)이라 일컬어지기도 했으며 이봉수(李鳳秀)로부터는 학문이 가장 뛰어나다는 칭찬을 받기도 했습니다. 1810년 돈녕부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814년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로 제배되었습니다. 이때 동궁(東宮: 뒤의 翼宗)이 새로 세자에 올라 당시의 유명 인사들을 뽑아 매일 서연(書筵)을 열 때 발탁되었습니다. 1822년 장흥고봉사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838년(헌종 4)에 이조에 재학(才學)으로 천거되어, 이듬해 장악원주부·황해도도사에 임명되고, 1840년에는 군자감정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습니다. 다음 해 경연관(經筵官)에 천거되고, 이어 지평을 거쳐 집의에 이르렀습니다. 1844년 특별히 당상관으로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양하였고, 다시 동부승지에 제배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그 뒤 성균관좨주를 비롯해 1851년(철종 2) 대사헌에 전후 두 차례나 특별 배치되고, 이듬 해에는 지돈녕부사에 승배되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그해 7월 형조판서에 제수된 뒤 얼마 되지 않아 죽었습니다. 개천의 경현사(景賢祠)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는 『매산집(梅山集)』 52권이 있고 시호는 문경(文敬)입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이러한 홍직필의 생애를 보면 송시열이나 김원행의 삶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벼슬을 주었으나 사직하기를 여러 번 하였으니 그의 뜻과 학문적 지조가 높았던 것은 인정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옛 선비들은 나라에서 벼슬을 주고 입조(入朝)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극구 사양하는 선비들도 많았지요. 반면에 벼슬을 구걸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이는 오늘날과는 차이가 있지요. 다산 정약용이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목민관(牧民官)은 준다고 아무나 나아가는 자리가 아니라 했듯이 관직이란 준다고 함부로 나아가는 자리가 아닙니다. 오늘날 어떻게 하면 정치에 줄을 대어볼까 궁리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상당히 지조가 있지요. 그런 홍직필에게 최대의 인생 과제는 자신의 인격을 닦고 학문을 세우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심에 송시열이 있었던 것이지요. 김원행과 홍직필의 시에서 송시열에 대한 표현은 차이가 있습니다. 김원행은 송시열을 추위를 견딘 소나무로 비유했으나 홍직필은 大老(대로) 즉 큰 어른으로 비유하여 바위만 남아 선생이 자취를 찾을 수 없음을 한탄합니다. 아마 그것은 둘이 느끼는 송시열과의 시간적 거리를 말해 주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송시열의 높은 자취를 따르고자 하는 마음과 따르기 어려움을 한탄하는 마음은 같습니다. 이러한 후학들의 시와 문장을 통해 보면 지금 우리가 보는 작은 암자 같은 암서재는 화양구곡의 중심 풍경이자 송시열의 학문과 사상을 이어간 산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화양구곡을 다녀가지만 그런 암서재를 단순한 풍치 정도로 지나치는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거기 조선 후기 정치사의 질곡이 숨어 있습니다. 이즈음에 나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떠오르는 시심을 참지 못하여 어설픈 시 하나를 지어 낭송해 봅니다. 그 옛날 학문의 길을 걸었던 선비들, 그 선비들이 선학(先學)을 쫓아 따르려 했지만, 선학은 자취없고 그것을 따르려는 사람 마음만 애태웁니다. 선현의 자취는 말이 없고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뜻모를 즐거움만 있습니다. 그러기에 마음은 고독해지고 그 고독은 늘 자신을 성찰하게 하지요. 그리고 새로운 구도의 길, 학문과 수양의 길을 기도해 봅니다. 암서재에서 고독을 느끼며 -지산 이상호- 내(川) 건너편 암서재 바라본다 아슬하게 치솟은 바위 위 고즈넉이 앉은 암자 하나 거기 수많은 선비 오가며 선학(先學)을 쫓으며 뒤따라 오르려 했다네 존경은 끝없고 오를 길은 아득하여 한탄만 내 짖었다네 오! 아득한 스승의 길이여 여름 나뭇잎은 짙게 드리우고 푸른 하늘은 아득히 드높은 곳에서 먼 전설처럼 굽어보는데 넓은 바위 위에 앉아 강론하던 선비는 간 곳 없어라 이제 글 읽는 소리는 끊어지고 오가는 행인들의 발자국 소리와 담소만이 굽이치는 물결 비추는 햇살 아래 찬란하여라 시간은 깊고 깊어 가건만 고요를 뚫는 물소리는 하염없고 암자는 고즈넉이 고풍을 자아내는데 그리운 넋은 고독 속으로 침참(沈潛)하고 나는 사색에 젖는다 학문과 수양의 길은 멀고 멀어 기도하는 두 손 떨린다. 암서재의 풍경은 볼수록 좋습니다. 멀리서 앉아 바로보기만 해도 독서와 사색의 욕구가 솟구칩니다. 그 아래 금사담의 물결은 햇살에 더없이 빛나고 있습니다. 그 아름다움을 마음에 담고 다음 코스로 이동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