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없는 설움
조 흥 제
며칠 전에 허태기 시인 『여울목에 피는 꽃』시집 출판 기념회에 갔었다. 시집 내용이 특이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로 나누어 250여 편의 시를 양장에 예쁘게 담은 심혈을 기울인 시집이다.
그 자리에 며칠 전 시집을 우편으로 보내 왔으나 축하 메시지도 못 보낸 수필가 김청 선생이 있어 시집 출간을 축하한다고 인사했다. 김청선생은 ‘역경을 성공’으로 이끈 입지전적인 분이다.
10여 년 전 소월문학회 회원들은 경상남도 고성에 있는 시비 제막식에 참석했다. 세상을 떠난 지 70여 년이 지난 고인을 등단시키고, 아울러 시비를 세우는데 갔었다. 회원 김선생의 부친 시비 제막식이었다.
김선생은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고향인 경남 고성에 집을 지으면서 많이 머물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작고하신 아버지께서 해방되기 전에 아마추어로 문학 활동을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뒤늦게 작품을 찾아서 등단 절차를 밟고 시비(詩碑)를 해 드리고자 했다.
아버지는 1915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마산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금융조합에서 근무하던 중 독서 사건으로 경찰서에서 고문을 받았다. 그래서 직장을 내놓고 일본 명치대학에 입학했다. 성적이 우수했던지 졸업 후 궁내성에서 근무하라는 제의를 뿌리치고 귀국하여 사설 고성문화원에서 봉사했다. 조선총독부의 강권으로 함흥공립상업학교에 발령이 나서 마지못해 가서 근무 중 과로로 쓰러져 귀향하여 병석에 눕게 되었다. 집이 가난하여 제대로 병구완을 할 수 없었던지 부인은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고깃국이라고 끓여 주었을 정도로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다섯 살 먹은 아들을 남겨두고 29세 때인 1944년에 눈을 감았다. 부인은 개가하지 않고 어린 아들을 잘 키우고자 갖은 고생을 다 했다. 어머니의 기대대로 아들은 잘 자라서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박사학위까지 받았으니 얼마나 뿌듯했을까.
김선생은 사회생활을 마치고 뒤늦게 글을 쓰고 싶어 한국문인 연수원의 문을 두드렸다. 거기서 공부하는 한편 고향에 집을 지었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께서 시와 수필 등 문학작품을 발표하셨다는 말을 듣고 찾아 나섰다. 아버지는 마산 상업학교 학창시절 동아일보 등 각종 문예전람회에 작품을 다수 출품했고, 금융조합 사보에 시를 개재한 것도 찾아냈다. 1938년에 동인지 ‘등화’에 제판 겸 인쇄인으로 활동할 때 발표한 ‘식탁, 편지’ 등이 파본으로 남아 있던 것도 발굴했다.
사단법인 새한국문학회에서 고인의 애석한 삶과 문학적 업적을 기리고자 등단을 주선하고 소인(素人) 김석규(金碩奎)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기념시비 헌정을 위한 제막식을 고향인 고성에서 거행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소월문학회 회원을 주축으로하여 재경 고성문우회원 10여명 등 80여 명이 2015년 11월7일 8시에 대절 버스 2대에 타고 출발했다.
1시경 현장에 도착하니 마을 입구에 하얀 천으로 가린 비석이 있었다. 비가 와서 천막 두 동을 세우고 그 안에 의자를 갖다 놓고 하객들이 앉았다. 제막(除幕)을 하니 오석(烏石)으로 된 하트 형 시비와 둥근 모양의 시비가 나란히 있다. 시비 하나의 제목은 이민열차, 옆의 것은 식탁(食卓)이었다. 시비는 한 개를 세우는 것이 상례인데 한 사람의 것을 두 개 세우는 것은 드문 일이다. 옆에는 ‘열녀 최둘선여사추모비(烈女崔◯善女史追慕碑)’라고 쓴 시비가 있다. 어머니의 열녀비라고 한다.
친족대표, 재경고성군 문인회장, 이철호 한국문인 이사장의 축사에 이어 주인공의 인사말이 있었다. ‘다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어 아버지의 얼굴도 기억 못 한다. 어느 날 길을 가는데 어떤 어른이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어서 대답 했더니 돈 만 원 짜리를 주어 고마워했다’는 얘기를 했다. 본인이 그 자리에서 얘기는 안 했지만 아버지를 얼마나 그리워했는가는 미루어 생각할 수 있다. 식이 끝나고 가족을 소개하였다. 부인에 이어 아들 내외와 손자-손녀도 소개했다. 아들은 미국 유학 때 여자 유학생을 만나 결혼한 사이로 부부가 연세대학 교수로 재직한다고 했다. 아들도 잘 나고 며느리도 예뻤다. 하객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축하해 주었다
허태기선생의 출판기념회를 끝내고 집에 와서 김청선생의 시집『움 트는 고독』을 펼쳐 보았다. 150여 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갈피갈피에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내용이 숨겨져 있다. 그 중에 두 편의 시에 눈길이 머물렀다.
어머니 영별 길
어머니 아주 떠나시던 날/ 병든 가슴 깊이를 어찌 잴까/ 작고 작아져 티끌의 무게다/ 그 한 생애 못한 말/ 마지막 그 모습/ 차라리 천상의 평온/ 세상 시름 다 놓은 얼굴/ 날개 대신 더하더이다…….
짧은 열정의 나팔꽃 아버지
먼 빛 눈 속에 심어 준/ 아버지 맥박/ 이미 그 자식 종심에 이르러도/ 당신 얼굴 숨결에 오시네/ 생애토록 거듭거듭 그리움에 잠겨/ 맑고 높은 하늘/ 구름으로 오시려나/ 뒷산 솔밭 사이 부는 바람에/ 얼굴을 비벼 보네…….
나도 6‧25 사변 때 임진강을 배로 건너다 아버지와 헤어졌다. 전쟁이 앞서가 고향으로 들어가 북한군 치하에서 살았다. 9‧28 수복이 되어 피란 갔던 사람들은 다 들어왔는데 아버지는 안 오셨다. 마을 사람들은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측은한 눈길을 우리 뒤에 주었다. 먹고 살 길이 없어 어머니는 개성 가서 물건을 사다 인근 마을로 다니면서 일용품을 파셨다. 개성까진 왕복 32㎞다. 힘든 일을 안 해 본 어머니는 물건을 담은 광주리를 이고 하루에 그 먼 거리를 다녀오시려면 얼마나 힘드셨을까. 나는 어머니를 따라 다니면서 물건 값으로 받은 곡식을 지고 다녔다. 사변 전에 같이 놀던 아버지 있는 아이들이 마당에서 뛰어 노는 것이 부러웠다. 어느 날 꿈에 임진강에 빠진 나를 아버지가 손잡아 건져 주셨다. 꿈을 깨고 아버지가 잡아 주셨던 따뜻한 손을 잡고 옆에서 주무시는 어머니가 들을까 보아 숨 죽여 울었다.
어느날 ‘편지요’하는 소리를 듣고 뛰어나갔더니 대문 안에 누런 봉투가 떨어져 있었다. 아버지에게서 온 편지였다. 한 걸음에 할아버지께 갖다 드렸더니 다 읽으신 할아버지는 굵은 눈물을 흘리셨다. 할아버지가 눈물 흘리시는 것은 처음 보았다. 어머니는 그날 개성 물건 사러 가셨다. 편지 봉투를 들고 어머니 마중을 나갔다. 날이 저물어도 오시지 않아 조촘조촘 간 것이 2㎞가 넘는 사천내 다리까지 갔다. 어둠 속에서 흰옷을 입고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오는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하고 달려갔다. “네가 웬일이냐.” 평소에는 마중을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서 편지 왔어요.” “뭐야!”우리 모자는 다리 위에서 포옹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나는 부모님 8순 때 찍은 사진과 조부모님 환갑 때 찍은 사진 앞에 우리가 6·25 사변을 헤쳐 나온 회고록 『아버지 찾아 삼만리』를 놓아 드렸다.
나는 1년여 동안 아버지와 떨어져 있었어도 그렇게 그리웠는데 김청선생은 영영 아버지 없는 설움을 겪으면서 어머니가 고생을 하면서 벌으시는 돈을 가지고 공부하였으니 아버지를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그래서 반듯하게 자라 자식도 잘 키우고 본인도 수필, 소설, 시로도 등단하여 한국 문단에 우뚝 섰으니 천국에 계신 부모님도 기뻐하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