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오피니언
강대국 외교의 중요성, 120년전 ‘英日동맹’에서 본다[박훈 한국인이 본 20세기 일본사]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입력 2022-04-01 03:00
#청나라인 수천 명 흑룡강 수장 : 1900년 흑룡강(아무르강)에서 참극이 벌어졌다. 만주에 진출한 러시아군과 청군 사이에 작은 충돌이 벌어지자, 러시아군이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하던 청나라 민간인 3000명(5000명 혹은 그 이상이라는 설도 있음)을 학살하고 흑룡강에 수장시켜 버린 것이다. 이를 구실로 일본인들은 ‘아무르강의 유혈이여’, ‘우랄의 저편’ 같은 노래를 부르며 반러감정을 선동했다. “서기 1900년, 한없이 긴 아무르여. 러시아인의 횡포에 청나라 백성, 죄 없이 죽은 수 5000명 (중략) 아아, 잔학한 야만족에게 원한을 갚을 때가 되어 (중략) 금빛의 백성이 드디어, 드디어 야마토 민족이 싸울 때가 되었네, 싸울 때가 되었네.”(야마무로 신이치 ‘러일전쟁의 세기’) ‘금빛(황인종)’의 청나라 사람에 대해 동정을 보이며, 같은 금빛의 야마토(일본)가 원한을 갚아야 한다는 인종론으로 전쟁을 선동하고 있다. 백인종의 침탈에 맞서 황인종을 지킨다는 일본의 전쟁논리는 그 후 변화해간다. 러시아와 전쟁하기 위해서는 영국과 미국 정계의 지지를 얻어야 했고, 런던과 뉴욕 공채시장에서 돈을 조달해야 했다. 인종전쟁론은 방해가 될 것이었다. 그래서 ‘의전(義戰)’으로 프레임을 바꾸었다. 그러나 일본 국내에서 인종전쟁론의 설득력은 강력했고, 을사늑약으로 일본이 한국 독립의 약속을 깰 때까지는 한국에서도 그에 공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외교 참패 韓, 성과 거둔 日 : 20세기 들어 일본 국내 정치도 크게 변화했다. 1900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정우회라는 정당을 스스로 만들어 네 번째로 총리가 되었지만 7개월도 안 돼 물러났다. 이토의 영향력도 예전 같지 않았다. 그 뒤를 육군대장 가쓰라 다로가 이어받았고 외무대신에는 고무라 주타로가 임명되었다. 이들 모두 메이지유신의 원로가 아닌 사람들이다. 원로들은 대외강경책에는 대체로 신중했다. 그러나 세대교체가 된 새 내각은 그렇지 않았다. 한국을 보호국화하려 했고 방해가 된다면 러시아와도 일전을 불사할 태세였다. 원로 중 강경파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조차도 이들을 세상 물정 모르는 풋내기라고 일갈했다. 러시아가 만주에서 미적대는 것은 이들의 강경책을 부추겼다. 러시아와 일본이 한판 붙으면 위험해지는 건 대한제국이었다. 고종은 외교라인을 가동했다. 1900년 방곡령으로 유명한 조병식을 주일공사로 파견해, 일본 정계에 한국의 중립화를 설득했다. 일본은 냉담했다. 고무라 외무대신도, 재야의 거물 고노에 아쓰마로도 중립국은 자신을 지킬 정도의 힘은 있어야 되는 거라며 코웃음을 쳤다. 그 대신 한일동맹을 제안했다. 러일전쟁이 나면 중립국 말고 일본 편이 되라는 얘기였다. 실제로 전쟁이 발발했을 때 고종이 전시중립을 선포했지만,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일본에 협력하도록 강제했다. 우리가 국사 시간에 배운 한일의정서(1904년)다. 한국의 외교가 처참하게 실패하는 동안, 일본 외교는 미증유의 성공을 거뒀다. 영일동맹의 체결이다(1902년). 영국은 유라시아 전역에서 남하하는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을 벌여왔다. 한국에 관심은 없었으나 러시아가 차지하는 것은 좌시할 수 없었다.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영일동맹을 생각해냈고 일본 정부도 마다하지 않았다. 러시아와의 전쟁을 반대했던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러시아를 방문해 협상하고 있었다. 결국 협상 타결에 실패해 영일동맹 체결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의 위협이 된 영일동맹 : ‘해가 지지 않는 제국’ 영국이 극동의 신흥국에 불과한 일본과 동맹을 맺자, 일본인들은 좋아 어쩔 줄 몰랐다. 당시 런던 유학 중이던 문호 나쓰메 소세키는 “마치 가난한 사람이 부잣집과 인연을 맺어 기쁜 나머지, 종과 큰 북을 두드리면서 마을을 뛰어다니는 것” 같다며 냉랭한 시선을 보냈다. 영일동맹하에서 세계 최강국 영국은 한국의 보호국화에도 고종 폐위에도 찍소리도 하지 않았다. 한국이 합병되어도 영국을 비롯한 서양 각국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서둘러 정동의 공사관을 떠났다. 강대국에 대한 외교가 얼마나 결정적인가를, 영일동맹과 1953년 한미동맹은 생생히 보여준다. 영일동맹은 러시아에 위협이었다. 일본도 러시아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지만, 양측의 요구는 좁혀지지 않았다. 일본은 한국에 대한 우월적인 지위를 인정해주면, 만주에 대한 러시아의 권리를 인정하겠다고 했다. 이에 대해 러시아는 만주는 일본이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라고 일축했다. 협상의제를 한국 문제로만 하려는 생각이었다. 러시아는 한반도 북위 39도 이북을 중립화할 것, 러시아 함대가 대한해협을 자유로이 항해할 수 있을 것 등을 요구했다. 이때 이미 한반도를 반으로 나누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이다. 만주와 한국을 교환(만한교환론)하려던 일본의 의도는 무산됐다(가토 요코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협상이 진행되는 사이 민간에서는 주전론이 비등했다. 전쟁을 말려야 할 언론인, 학자들이 부추겼다. 뭐에 홀렸던 것일까. 일본 젊은이만 20만 명을 희생시킨 이 전쟁을 꼭 해야 할 이유란 무엇이었던가? 한국을 장악하지 못하면 일본의 방위는 정말 위태로웠을까? 시베리아철도도 동청(東淸)철도도 아직 개통되지 않은 마당에 러시아가 정말 한국을 식민지화할 수 있었을까? 흑룡강에서 죽어간 청나라 사람들을 애도하던 그 마음으로 요동반도 반환을 받아들이고, 일본열도 전수방위를 전략으로 삼을 수는 없었을까? 이렇게 묻는 사람들은 ‘아군에 총질하는 자’로 재갈이 물려졌다. 사상과 언론의 세계에서 ‘아군에 총질하는 자’는 언제나 필요한 존재들이며, 이들의 입을 막으려는 것이야말로 이적행위다. 애국의 이름으로 진짜 이적행위를 하는 자들이 횡행하는 가운데, 마침내 일본 해군은 러시아를 선제공격했다.
* 12.23 생활성서 소금항아리 2022-12-23 주님 손은 약손
루카 복음 1장 57-66절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말을 못하게 된 즈카르야가 다시 말을 하게 되었을 때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참을 헤매다 한 줄기 빛이라도 발견한 것마냥 엄청난 기쁨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부제 때에 신학교에서 테니스를 치다 한쪽 눈에 공을 세게 맞았던 적이 있습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보이더니 즉시 다친 쪽 시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안과에서는 홍체 조절 근육이 손상되어 시력이 회복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사제 서품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앞을 못 보게 되다니….’
매일 아침마다 눈을 떠도 보이지 않는 눈을 바라보며 ‘난 이제 끝이구나’ 하는 절망적인 생각뿐이었습니다. 한쪽 눈으로 생활하기는 참 힘들었습니다.
기도할 힘도 없고 의지도 없는, 무기력과 괴로움이 서서히 저를 잠식했습니다.
그렇게 암흑 같은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그날도 역시 희망 없는 마음으로 눈을 떴는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한 달 만에 다친 눈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쓰시고자 하시는구나!’ 하는 기쁨과 함께 온 세상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주님의 손길이 나를 보살피고 계신다는 생각에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렸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당신의 손길로 보살펴주십니다. 믿음을 굳건히 하여 걱정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고 주님의 손길에 우리 자신을 맡깁시다.
걱정 말아요 그대! 주님의 손길이 당신을 보살피고 지켜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