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정리
굼실거리는 파도가 느릿하게 다가와 보트의 옆에 부딪치며 부서졌다.
어둠에 잠긴 동해 바다. 그 망망대해의 한 가운데를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 보트의 중앙에 한은 가부좌를 틀고 바위처럼 앉아 있었다.
간간이 그가 보트 뒤편 수면을 향해 손을 한 번씩 휘저을 때마다 거대한 압력에 짓눌린 바닷물이 용트림을 하며 보트를 밀어냈다. 그때마다 보트는 허공으로 떠올라 단숨에 수십 미터를 전진했다.
정면의 칠흑과도 같은 어둠을 응시하던 한은 눈을 감았다.
그가 도착했던 해변에서 하루 만에 다시 그를 배웅해야 했던 양범구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서운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양범구는 웃으며 한을 배웅했다.
후일 반드시 코가 삐뚤어지도록 한잔하자면서.
한은 양범구에게 약속을 지키겠다고 말한 후 해변을 떠났다.
그는 그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말이다.
안으로 침잠해 들었던 그의 정신이 깨어났다.
멀리 깜박이는 빛이 시야에 들어왔던 것이다. 빛이 떠 있는 곳은 강재은과 약속한 도킹 지점이었다. 그녀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배에서 내려준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한을 바라보는 선원들의 시선은 괴물을 보는 듯했다. 칠흑 같은 어둠에 잠긴 대한 해협을 침투용 소형 보트를 타고 절반이나 건너오다니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강재은의 시선은 선원들의 시선과는 달리 미소를 담고 있었다.
한의 무모한 작전(?)에 이미 만성이 된 탓이기도 했고 그만큼 한을 믿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의 앞에 다가선 강재은은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내밀었다.
한이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김석준 씨가 연락을 바라고 있어요.
그녀는 일본에서 한이 어떤 일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물어볼 생각도 없었다. 한은 남기호에게 일본으로 밀항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을 했고, 남기호는 이유 불문하고 그를 도우라는 지시를 그녀에게 내렸다.
그녀는 한이 자시에게 일본행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않는 것을 서운해 하지 않았다. 아마 한은 남기호에게도 일본행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이 대명회에 집착하고 있었고, 그녀는 그의 이번 일본행도 한이 구했던 비전이라는 책자에 기록되어 있던 대명회의 일본 조직과 관련된 일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대명회는 위험한 조직이었지만 그렇다고 국정원이 일본 내의 비밀 조직에 개입할 필요는 없었다.
아마도 한은 국정원이 직접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는 듯했다.
그것이 그가 일본행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이유일 것이라고 그녀는 확신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임한은 국가 조직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설명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석준이가? 한은 그녀가 내민 핸드폰을 받았다. 강재은의 핸드폰은 위성으로
연결되는 장비여서 공해상에서도 통화가 가능하다.
왜?
김석준은 립 서비스 수준의 말을 일체 생략한 한의 질문에 쓴웃음을 지었다. 한은 정말 익숙해지기 어려운 스타일이었다.
야쿠자들을 정리해야겠다. 더 볼 것도 없어.
파악은?
꼬리에 불붙은 강아지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너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자기들 딴에는 조심한다고 하는데 어차피 시야에 들어온 자들이라 감시는 쉬워. 그리고 그들을 처리하면서 신도철이라는 자도 손을 좀 봐줄까 한다. 인맥이 대단한 자야. 너에 대한 정보 수집의 정점에 그자가 있다.
김석준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분노가 서린 그의 말을 들으며 한은 그가 눈앞에 있기라도 한 듯 고개를 저었다.
야쿠자만 정리해라. 그자는 내가 처리하겠다.
직접? 그럴 만한 자가 아닌데?
이유가 있어.
짤막한 한의 대답에 김석준은 혀를 찼다.
알았다. 야쿠자들만 자기들 나라로 돌려보내마.
너무 심하게 다루지는 말아라.
남 얘기하지 마라!
투덜거리며 김석준이 말을 이었다.
언제 오냐?
지금 가고 있다.
그래? 일본에 간 일은 잘 된 거냐?
음. 한은 전화를 끊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강재은이 차분한 시선으로 한을 보며 말문을 열었다.
일본에서 하고자 했던 일은 잘 마무리된 모양이군요.
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기색에서 어딘지 무거운 느낌을 받은 강재은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물었다. 그때 구름 속에 숨어있던 달이 얼굴을 내밀자 검게만 보이던 수면이 매혹적인 은빛으로 물들었다.
두 시간을 더 가면 포항이 보일 것이다.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이 시간에?
이 층의 소파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던 스즈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계를 보며 되물었다. 새벽 두 시였다.
누구야?
그것이.
고마쓰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을 본 스즈기는 짜증이 났다.
도대체 누구야?
미친놈입니다.
스즈끼의 기색에 긴장한 고마쓰가 어깨를 굳히며 대답했다.
미친놈?
인터폰으로 야쿠자를 손보러 왔다고 밝힌 놈입니다.
뭐? 허허허.
고마쓰의 말을 들은 스즈끼는 화도 나지 않는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일단 들여보내라. 어떻게 생긴 놈인지 얼굴이나 보자. 게다가 그놈이 그렇게 말했다는 것은 우리 정체를 안다는 뜻이니 어떻게 알았는지 확인해봐야겠다.
예.
허리를 꺾은 고마쓰가 일 층으로 내려갔다.
안에서 나온 자가 문을 열자 김석준은 큰 걸음으로 저택 안에 들어섰다. 그가 들어선 직후 사내는 대문을 닫고 단호한 손길로 빗장을 질렀다. 사내의 손놀림은 버턴 하나로 열 수 있는 자동문을 손으로 직접 열어준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그가 찾아온 곳은 서울 외곽에 위치한 이 층의 전원주택이었는데 담장을 성곽처럼 쌓아 보이지 않았고 정원은 초등학교 운동장만 했다. 재벌 회장의 별장이라도 됨직한 이곳이 스즈끼가 마련한 이나가와구미의 한국 거점이었다.
정원에서 저택의 현관문까지 어느새 검은 양복을 입은 이십여 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인의 장막을 치고 있었다. 대여섯 명은 손에 일본도를 들고 있었고, 잠을 자고 있다가 일어난 자들이 반 이상이었지만 그들은 살벌한 표정으로 김석준을 응시하고 있었다. 누구라도 주죽이 들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였지만 그들 사이를 성큼성큼 걸어가는 김석준의 얼굴엔 전혀 긴장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걸어오는 김석준의 얼굴에 긴장감 대신 떠올라 있는 여우 있는 미소를 본 사내들의 눈빛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그들은 그가 어떤 목적으로 이곳을 방문했는지 알고 있었다. 마쓰다가 그들에게 스즈끼의 비상 명령을 전하며 찾아온 자의 목적도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본 김석준은 단단한 몸매의 소유자이긴 했지만 혼자에 불과했다. 그가 대단한 실력을 가진 자라 해도 한 주먹이 열 주먹을 당할 수는 없는 것이고, 그들은 그의 한 주먹이 자신들의 열 주먹에 해당할 정도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나가와구미에서 고르고 골라 보낸 자들인 것이다.
그들에게 김석준은 호랑이 입 안으로 걸어 들어온 미친놈이었다. 사내들은 김석준의 방문 목적이 밝힌 대로라면 그를 살려서 둘려보내지 않을 작정을 하고 있었다.
사내들 사이를 통과한 김석준은 현관문 앞에 서 있는 스즈끼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스즈끼와 2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걸음을 멈췄다. 그가 걸음을 멈추자 십여 명의 사내들이 그와 스즈끼 사이에 벽을 만들고 나머지 사내들이 그의 좌우와 뒤쪽을 포위하듯 막아섰다.
정면에 있는 사내들 중 두 명은 칼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김석준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 미소를 바라보는 스즈끼의 시선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넌 누구냐?
이름을 알아서 뭐에 쓰려고? 국 끓여 먹으려나!
김석준은 싱긋 웃으며 느릿한 어투로 대답한 후 뒷짐을 졌다.
예의가 없는 자로군.
스즈끼의 입에서 음산하다 싶을 만큼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런 스즈끼를 향해 김석준은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쥐새끼처럼 숨어 움직이는 자에게 지킬 예의 같은 것은 없거든.
그의 말을 들은 사내들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그들은 모두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자들이다.
입이 걸레 같은 자구나!
서로 듣기 좋은 말을 할 자리는 아니잖나? 게다가 난 내 친구와는 달라서 원래 쪽발이라면 민간인까지 싫다. 야쿠자라면 두 말할 필요도 없고. 더구나 목이 뻣뻣한 야쿠자는 더 싫어하지.
이곳을 어떻게 알고 왔느냐?
쥐새끼 같은 야쿠자들이 떼거리로 몰려다니고 있다는 소문은 벌써 전국에 파다한데 당사자만 모르고 있나 보구만.
작정하고 온 김석준이다. 그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까닭이 없었다.
죽고 싶으면 집에서 칼 물고 죽는 것이 더 편했을 텐데 굳이 이곳까지 올 필요가 있었을까?
스즈끼의 두 눈이 피 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시뻘겋게 되고 있었다.
김석준의 말이 그의 살기를 극도로 자극한 것이다. 깊은 심호흡을 하며 들끓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킨 그의 말이 이어졌다.
휴우 내가 약속하지. 네 뼈와 살로 개밥을 만들어주마.
개꿈은 꾸고 싶은 대로 꿔라. 말리지 않겠다. 그리고 나도 하나 약속하지. 너희들은 걸어서 이 나라를 떠나지 못한다, 단 한 명도.
흐으.
이를 악문 스즈끼의 입에서 짐승 같은 신음 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의 인내가 한계에 달한 것이다. 그는 오른손을 짧게 횡을 그었다.
스즈끼의 손이 움직이는 순간 김석준은 오른쪽으로 반걸음을 이동했다. 비켜선 그의 옆구리로 흰색을 날을 번쩍이며 한 자루의 칼이 아래에서 위로 비스듬히 스쳐 지나갔다. 스즈끼의 공격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그의 뒤에 있던 자가 손에 들고 있던 일본도를 휘두른 것이다.
칼을 휘두른 자의 안색이 눈에 띄게 변했다. 코앞에 있던 김석준의 움직임을 놓쳤기 때문이다. 그는 허공을 벤 칼을 거두기 위해 손목을 움직이려 했다.
헉!
그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신음이 터졌다.
어느새 그의 손목은 김석준의 왼손에 잡혀 있었다. 김석준이 등을 보인 채로 손에 힘을 주자 사내의 몸이 주르르 그에게 끌려갔다. 사내의 얼굴이 노랗게 변하는 순간 김석준의 왼 팔꿈치가 사내의 안면을 송곳처럼 강타했다.
퍼억!
코와 입이 한꺼번에 부서지며 비명도 지르지 못한 사내가 훌떡 뒤로 한바퀴 재주를 넘으며 바닥에 나가떨어졌다.
김석준을 에워싸고 있던 사내들이 눈을 크게 떴다. 칼 빛이 번뜩이고 그 칼을 쥔 사내가 쓰러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사내들 중 상황의 변화를 정확하게 읽어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스즈끼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시력으로 김석준의 움직임을 따라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시작부터 칼질이라 이거지. 그래, 한번 뛰어 보자구!
김석준이 흥이 나는 듯 크게 소리를 지르더니 마차 양 떼 속으로 뛰어드는 한 마리 늑대처럼 정면의 사내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정면에 있던 사내들 중 칼을 들고 잇던 사내 두 명은 동료가 쓰러지는 순간 이미 칼을 꺼내 들고 있었다. 김석준이 달려들자 그들은 한 걸음씩 앞으로 나서며 칼을 상단에서 하단으로 번개처럼 그어 내렸다. 무서운 기세가 서린 칼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칼은 절반도 내려오지 못하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김석준이 가볍게 발을 구르자 그의 신형이 두 자루의 칼이 엑스자로 교차하는 지점의 윗부분을 바람처럼 통과했기 때문이다. 눈앞에서 달려들던 그의 모습이 허깨비처럼 사라지자 칼을 휘두르던 자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 순간 허공으로 도약하며 가슴으로 끌어당겨 직각으로 구부러졌던 김석준의 두 다리가 퍼지며 그의 신형이 풍차처럼 회전했다. 회전하는 그의 발끝에 칼을 든 자들의 관자놀이가 걸렸다.
퍽, 퍽.
사내들의 관자놀이가 도끼에 맞은 것처럼 함몰되며 그들의 손에서 칼이 떨어졌다.
사내들의 몸이 그 자리에서 스르르 무너질 때 김석준은 발끝에서 전해지는 반탄력을 이용해 허공을 미끄러졌다. 허공에서 1미터를 수평으로 전진한 후 떨어져 내리는 그의 발밑에 경악으로 눈을 부릅뜬 스즈끼의 얼굴이 자리 잡고 있었다.
김석준이 도약하고 그의 정면을 막고 있던 부하 두 명이 주저앉은 후 김석준의 발길이 그의 머리에 도달한 것은 그야말로 순간적이었다. 그의 품속에는 정주호를 통해 구한 권총이 있었지만 권총을 꺼낼 틈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자신의 미간으로 내려 꽂히는 김석준의 구두 뒤 굽을 응시하는 스즈끼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렸다. 그 안색은 어두운 한밤중에 공동묘지에서 도깨비불과 마주친다면 지을 법한 그것이었다.
며칠 만에 돌아와 대문을 들어서던 한의 눈매가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이곳에 있으리라고 예상하지 않은 숨소리가 그의 귓전을 간지럽게 했기 때문이었다. 거칠고 짧은 숨소리는 그 주인이 보통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1층의 도장은 커튼이 쳐져 있었지만 그 사이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가 없는 사이에도 밖으로 나가 있는 유승우를 제외한 이석기 등 세 명은 열심히 수련 중이었다. 그들의 가늘고 긴 숨결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한은 뚜벅이며 이 층으로 올라갔다. 세 사람은 명상에 잠겨 있었지만 그의 기척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에 대한 관심을 끄고 다시 수련에 열중할 터였다.
그의 걸음은 보폭이 자로 잰 듯 일정하고 내딛는 발에 실린 힘이 동일했다. 그것은 김석준도 흉내 내지 못하는 걸음걸이였고 그 소리는 그들에겐 익숙한 것이었다.
이 층으로 올라선 그가 현관을 열고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 있던 남기호가 손을 들어 아는 척을 했다. 한이 집으로 들어서며 느낀 숨소리의 주인공은 남기호였다.
그였기에 일 층에서 수련하는 사람들이 조용했던 것이다.
밤 귀신 같구먼.
한의 시선이 정면으로 부딪쳐오자 남기호는 멋쩍은 표정이 되었다. 그와 한의 관계가 특별하긴 했지만 지금은 남의 집을 방문하기엔 적당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거실에 걸려 있는 식계는 새벽 다섯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부드러운 눈길로 한을 보던 남기호의 시선이 강렬해졌다. 그는 정색을 하며 말을 이었다.
남의 나라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는 묻지 않겠네. 시오가마의 해변 숲 속에서 폭탄이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는 사람들의 얘기도 하지 않겠어. 하지만 석준이가 한 일에 대해서는 물어야겠네.
한이 김석준과 통화한 것은 세 시간 전이었다. 그는 포항에 도착한 후 강재은이 준비한 헬기를 타고 오산비행장까지 왔고 그곳에서 차를 타고 수원으로 왔다. 한은 자신과 통화를 마친 후 지금까지의 세 시간 사이에 김석준이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놈 성질이 좀 급한 편이죠.
그의 말에 남기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성질만 급하면 다행이지. 야쿠자를 손보는 것에 대해 뭐라 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일 때 얘기야. 그들을 병신으로 만들라고 정보를 준 것이 아닐게야.
많이 다쳤습니까? 많이 다친 정도가 아니야. 일곱 명은 평생 한쪽 손을 쓸 수가 없게 되었고, 열네 명은 전치 4개월에서 6개월의 중상일세. 병원 하나의 중환자실이 그들로 꽉 찼어.
죽은 자는 없나 보군요.
담담한 한의 말에 남기호는 맥 빠진 얼굴이 되었다.
그들이 야쿠자이긴 하지만 우리나라에 들어와 범죄를 저지른 흔적은 없어. 일본 대사관이 벌컥 뒤집혔네. 그들이 야쿠자에게서 받은 정보를 토대로 작성한 몽타주는 김석준의 것이야.
조심시키겠습니다.
석준이가 그들을 험하게 다루도록 한 건 자네 뜻이었나?
석준이는 제 친구지 부하가 아닙니다. 그 녀석의 판단이었습니다.
남기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일 년 동안 김석준을 가르친 적도 있었고 개인적으로 그의 호쾌한 기풍을 좋아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김석준은 점점 다루기 어려워지고 있었다.
그가 김석준을 좋아하는 만큼 불안도 비례해서 커져갔다. 김석준이 하는 일은 뚜렷한 명분을 갖고 있었지만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부분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은 남기호의 불안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남기호는 그와 같은 공무원이었으니까.
석준이가 심하게 손을 쓴 탓에 여러 사람이 곤란해진 듯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이득은 있습니다.
그게 뭔가?
야쿠자들이 함부로 이 땅에 발을 들여놓지는 못할 거라는 겁니다. 야쿠자들은 우리나라 조폭에게 형님 대접을 받으려고 합니다. 조직의 규모나 사업영역이 우리나라 조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니까요. 우리나라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야쿠자는 조폭과의 관계를 이용해 우리나라에 들어오려고 계속 시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이나가와구미가 당한 일로 야쿠자들은 우리나라로의 진출을 심각하게 재고하게 될 겁니다. 암흑가에서 힘은 정의입니다. 힘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세계가 그 세계라는 건 부장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석준이는 이 땅에서도 사람이 있다는 것을 힘으로 증명한 겁니다.
한은 대명회 일본지회의 한국 내 정보 수집 시도 또한 야쿠자가 병원으로 실려 가며 함께 무산되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남기호는 야쿠자들이 한국에 온 이유가 국내 거대 조폭이 무너지며 생긴 빈자리를 기웃거리기 위해서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 남기호를 일부러 긴장시킬 필요는 없는 것이다.
꿈보다 해몽이 좋군.
남기호는 머리 아프다는 표정으로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들이 야쿠자라는 건 일본 대사관도 알고 우리나라 경찰도 알고 있네. 그 때문에 일본 측도 공식적으로 문제 삼지는 못하고 있어. 그렇지만 경찰청에 그들을 박살낸 자를 잡아달라는 압력이 여러 경로를 통해 강력하게 들어가고 있네. 경찰청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도록 손을 썼지만 당분간 석준이에게 눈에 띄는 행동은 삼가라고 전해주게. 내 전화번호를 알면서도 전화를 안 받아. 욕 먹을 짓을 했다는 것은 아는 모양이야.
남기호는 혀를 차며 말했다. 내색하지 않으려 하지만 김석준이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말을 마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은 싱긋 웃으며 남기호와 함께 일어나 그를 배웅했다.
남기호가 떠난 호 한은 수련을 위해 마련한 거실의 한편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는 이틀 동안 한숨도 자지 않았다. 그가 이박 삼일 동안 이동한 거리를 생각한다면 당장 그 자리에 쓰러진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체력이라면 철인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을 그도 피로를 느끼고 있었지만 누울 시간이 없었다. 날이 밝으면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그는 천단무상진기를 끌어올렸다. 근육과 경락에 쌓여 있던 피로가 조금씩 사라져 갔다. 삼매경(三昧境)에 빠진 그의 숨결이 끊어질 듯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한은 골목길에 차를 세웠다. 그가 있는 곳은 한남동의 고급 주택가였다. 담장이 성벽을 연상시키는 저택들이 골목의 양편으로 연이어지는 곳이었다.
한은 100여 미터쯤 걸어간 호 거대한 철문 앞에 섰다. 폭 4미터, 높이 3미터는 됨직한 검은색의 철문은 같은 높이의 폭이 작은 쪽문을 오른쪽에 달고 있었는데 특별한 무늬나 장식은 없었지만 은은한 광택이 나서 문 앞에 선 사람을 위압하는 구석이 있었다.
그가 철문 앞에 서자 철문에 연결된 경비실의 문이 살짝 열리더니 삼십 대 초반의 사내 얼굴이 나타났다. 이마가 좁고 눈매가 위러 치켜 올라간 것이 경비원으로 적격이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험악한 인상의 사내였다.
무슨 일이오?
저택만큼이나 고압적인 말투였다.
한은 사내를 응시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사내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 시선을 비꼈다.
임한이 찾아왔다고 신도철 씨에게 연락하시오.
통보하듯이 말을 마친 한은 몸을 돌려 거리에 시선을 두었다. 그의 훤칠한 등을 보며 입을 벙긋거리던 경비원은 저택 안으로 연결된 직통 전화를 집어 들었다.
건방진 방문자에게 한마디를 하고 싶었지만 그는 말을 하는 대신 전화를 집어 드는 쪽을 택했다.
지하 금융계의 황제라는 신도철의 저택 경호팀에 속한 그였다. 몸을 쓰는 실력을 객관적으로 인정받은 자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도 오늘 방문한 사내에게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그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잠시 후 거대한 철문이 무게에 어울리지 않게 미끄러지듯 절반이 갈라지며 열렸다.
무심한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서던 한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멈추고 싶어 멈춘 것이 아니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검은색과 회색의 양복을 입은 건장한 사내들로 대문과 저택 사이의 정원이 메워지고 있었다. 언뜻 보아도 삼십 명은 되어 보였다. 그들이 그의 앞을 막아선 것이다.
그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때 그의 앞을 막아섰던 자들의 가운데가 물결처럼 갈라졌다.
나타난 자는 삼십 대 중반 정도였는데 나이에 비해 몸매가 단단하고 눈매가 칼날을 보는 것처럼 날카로운 자였다.
네가 임한이냐?
사내는 뚝뚝 끊어지는 음성으로 물었다.
정주호가 신도철의 개가 됐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게 너로군.
한의 말을 들은 정주호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변했다.
그는 스즈끼가 임한을 언급한 후 신도철에게 임한이 어떤 자인지 들을 수 있었다.
신도철은 임한에 대해 현직 경찰이며 무서운 능력을 가진 자라고 했다. 그러나 임한이 현직 경찰이고 또 그가 현역을 떠난지 아무리 오래 되었다고 하지만 그를 면전에 두고 개 운운하는 소리를 하리라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 그였다.
허 제 정신이 아닌 자라고 들었지만 설마 했는데 정말이었군.
너 같은 심부름꾼을 상대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신도철이 나를 보기 전에 손부터 보라고는 하지 않았을 텐데.
정주호는 이를 갈며 비켜섰다. 한의 말이 맞았다.
그가 아침 열 시도 되지 않은 지금 시간에 신도철의 집에 들른 것은 최근 그의 일상처럼 되어버린 문안 인사 때문이었다. 인사를 마치고 막 돌아가려는 참에 한이 저택을 방문했고, 신도철이 부하에게 한을 데리고 들어오라는 지시를 내리는 것을 듣고 그도 함께 나왔다.
한의 얼굴을 보고 싶기도 했고 그가 신도철을 만나게 하기 전 위압감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정주호가 한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몰랐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그럼 볼일이 끝나고 볼까!
정주호는 평소의 얼굴빛을 회복하며 그의 앞을 지나가는 한을 향해 말했다. 탁하게 가라앉은 그의 음성에서 살기가 진득하게 묻어났다.
바빠서 그럴 시간이 있을까 모르겠군.
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정주호를 한번 힐끗 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씩씩거리며 꾹 움켜쥔 주먹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사내들 사이를 통과해 저택 안으로 들어선 한은 거실 중앙에 서 있는 사내의 모습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거실 중앙에 서 있는 사람은 신도철이었다. 그는 오른손을 들고 있었는데 작고 미끈한 은색의 쇳덩어리가 그 손안에 들려 있었다. 그것은 권총이었다.
한을 바라보는 신도철의 안색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그의 눈만은 마치 타오르는 것처럼 뜨거웠는데 그 뜨거운 살기가 옮아 붙기라도 한 듯 권총은 금방이라도 한의 가슴을 향해 불꽃을 피워 올릴 것만 같았다.
권총이 겨누어지고 있는 상황인데도 별 표정의 변화 없이 태연하게 신발을 벗고 거실로 올라온 한이 신도철과 3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묵묵히 그런 한을 보고 있던 신도철이 말문을 열었다.
실물로는 처음 보는 것인데도 무척이나 익숙하군. 한시도 널 잊은 적이 없었다.
날 그렇게 그리워하는지는 몰랐소.
언제 널 씹어 먹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인지 손꼽아 헤아려야 했거든.
대화를 하려고 왔는데 쉽지 않겠군.
한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대화? 흐흐흐. 내 아들이 아직도 식물인간과 다름없는 신세인데 감히 네가 나와 대활 나누기 위해 찾아온단 말이냐?
바로 그 문제로 대화를 나누려 하는 거요.
한의 대답을 들은 신도철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무슨 소리냐?
권총부터 치우는 것이 어떠시오. 총구를 보면서 말을 하고 싶지는 않은데.
한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자 신도철은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권총을 내렸다.
그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아들 신현민의 병세였다. 한의 처리는 나중에 고민해도 될 문제였다. 신도철은 권총을 손에 쥔 채 허벅지에 올려놓은 자세로 소파에 앉았다. 그가 허벅지에 뉘여 놓은 권총의 총구는 여전히 한을 향한 채였다.
한이 신도철의 맞은편 소파에 앉자 어느 틈에 들어왔는지 정주호가 한이 앉은 소파의 바로 뒤편에 섰다. 손만 뻗으면 한의 머리가 닿는 위치였다. 그의 뒤로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거실로 연이어 들어오더니 한을 중심으로 날개를 펴듯 빙 둘러섰다.
한은 자신의 뒤에 포위망이 구축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저들 정도의 능력으로는 머릿수가 아무리 많아야 그에게 어떤 위협도 되지 않는 것이다.
할 말이 뭐냐?
당신 자식, 그리고 함께 있던 자들도 정상으로 고쳐주겠소.
던지듯 내뱉은 한의 말을 들은 신도철의 안색이 흥분으로 붉게 변했다.
정말이냐?
농담을 하러 이곳에 온 것이 아니요.
아이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 역시 너로구나!
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신도철은 자신도 모르게 손에 쥐고 있던 권총을 다시 한 번 힘주어 잡아보았다. 그의 눈앞에 있는 말단 형사는 불가사의 한 능력을 가진 자였다.
상대의 신분과 상관없이 그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아이들을 고쳐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 이유가 있을 텐데?
그렇소. 당연히 조건이 있지.
어떤 조건이냐?
당신 돈이 필요하오.
돈?
현금 동원 능력이 대한민국 최고라고 알고 있소. 그 돈의 일부를 어떤 곳에
기부해주었으면 하오.
기부? 투자도 아닌 기부? 신도철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소파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쏘는 듯한 시선으로 한을 보던 신도철이 말을 이었다.
얼마나 기부해달라는 것이냐?
천억 정도요.
신도철의 등이 퉁기듯 소파에서 떨어졌다.
제정신이냐?
물론이오.
천억 원을 투자도 아니고 기부를 하라는 말이냐? 너는 내가 너의 제안을
받아들이리라고 생각하고 이 자리에 왔단 말이냐? 그런 미치광이 같은 제안을!
모든 협상의 성공 확률은 어차피 50퍼센트요. 나머지 50퍼센트는 실패지. 수락하고 안하고는 당신 마음이지만 협상의 조건으로는 적당하다고 생각하오. 내 목숨을 노렸던 것을 용서해주는 데다가 당신 자식이 정상으로 돌아온다는 조건이니까. 천억이 큰돈이긴 하지만 당신에겐 그리 부담스러운 액수가 아니라고 알고 있소. 날 노렸던 당신의 행위에 대해 내가 책임을 묻지 않는 조건은 당신에게 별 의미가 없겠지만 그 돈의 기부로 당신 자식이 정상으로 돌아온다면 오히려 부족하지 않소?
신도철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곧추세웠던 등을 다시 기댔다. 가늘게 뜬 그의 두 눈이 쏘는 것처럼 한을 응시했다.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던 권총을 만지작거리던 그가 스산한 미소를 지으며 말문을 연 것은 일분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너는 그것이 제대로 된 협상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만 내 생각은 다르다. 그렇게 애를 써도 잡을 수 없었던 네가 제 발로 걸어서 이곳까지 왔는데 내가 왜 너와 협상을 해야 하느냐? 너는 그냥 현민을 고쳐주면 된다. 대신 너를 온전하게 이 집에서 나가게 해주마. 어떠냐? 내 제안이 네 제안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
신도철의 말을 들은 한의 입에서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도 신도철과 제대로 된 대화가 이루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살아오며 안 좋은 예감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잘 들어 맞아왔다. 이번에도 역시 그러했다.
그 생각은 변함이 없는 거요? 내가 생각할 여유를 주면 어떻겠소?
허허허허, 갈수록 가관이구나. 너는 네가 지금 어떤 입장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느냐? 나라면 몰라도 네가 그런 여유를 부릴 처지라고 생각하느냐?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신도철의 마지막 말은 벼락 치는 듯한 고함이었다. 그의 치켜 뜬 두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신도철의 고함소리와 보조를 맞추기라도 하듯 한이 앉은 소파의 뒤에 장승처럼 서있던 정주호가 단숨에 한의 목을 굵은 팔뚝으로 휘어 감았다.
목뼈가 부러지기 전에 회장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어떻겠느냐?
정주호는 한의 목을 감은 팔에 서서히 힘을 주며 말했다. 소시 적 씨름과 유도로 몸을 가다듬은 정주호의 완력은 정평이 나 있었다. 하지만 한은 목을 약간 들었을 뿐 여전히 무심한 안색으로 신도철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당신과 말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랐소. 이후에 일어나는 일은 당신이 책임져야할 거요.
얼마든지 책임을 지마.
신도철이 비웃으며 한의 말을 받았다.
그 순간이었다. 허벅지 위에 놓여져 있던 한의 오른손이 번개처럼 위로 솟아올랐다.
한의 정수리에 턱을 대듯이 몸을 밀착하고 있던 정주호는 한의 어깨가 움직이는 것을 느꼈지만 그것에 대한 반응을 할 수가 없었다. 한의 손이 움직이는 속도는 그가 반응하는 속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컥!
한의 손가락 사이에 목울대를 잡힌 정주호의 얼굴이 금세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정주호의 입에서 신음이 터지는 것과 함께 한은 손가락을 움직였다. 정주호의 몸이 붕 들리며 그의 머리 위로 공중제비를 돌아 신도철이 앉아 있는 소파를 향해 날아갔다.
콰당탕!
으헉.
상황의 변화는 너무나 빨라서 신도철은 소파에서 등을 떼기도 전에 거세게 날아든 정주호의 몸과 부딪쳐야 했다. 그를 포위하고 있던 사내들이 정신을 차리고 달려들었을 때 한은 이미 신도철의 손에 들여 있던 권총을 빼앗아 들고 쓰러진 신도철의 머리맡에 서 있었다.
멈춰!
그의 입에서 짤막한 한마디가 떨어지자 그를 향해 움직이던 건장한 사내들이 말 잘 듣는 아이들처럼 멈춰 섰다. 그들의 동공은 작게 수축된 채 손발을 떨고 있었는데 한의 말에 실린 천단무상진기의 기세가 그들의 심령을 강타했기 때문이다.
상황은 신도철과 정주호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쓰러진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바닥에 누워 있었다. 한의 한마디에 몸이 마비되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게 된 탓이었다. 장내에 있는 자들은 한을 보며 공포에 떨고 있었다. 지금 그들의 눈앞에 일어난 일은 그들의 이해 영역을 벗어난 것이었다.
한의 손가락이 번갈아 통겨지자 정주호를 비롯한 사내들이 눈을 감았다. 한은 오랜만에 일선지력(一線指力)을 사용했다. 사내들의 혼혈(混血)을 찍었으니 삼십 분 정도는 정신을 잃고 있을 것이다.
한은 천천히 무릎을 구부리며 쪼그려 앉았다. 그의 시선이 공포에 떨고 있는 신도철의 두 눈과 부딪쳤다.
당신이 손을 잡으려고 했던 자들이 운영했던 재단이 있소. 그들의 뜻은 엉뚱한 곳에 있었지만 일 자체는 아주 바람직한 것이었지. 그들은 능력이 있어도 가난 때문에 공부를 할 수 없는 젊은 친구들을 유학까지 보내주었소. 하지만 그들은 이제 그 재단에 자금을 댈 수가 없게 되어 버렸소. 그래서 당신 돈이 필요했던 거요. 당신은 내 제의를 거절한다고 했지만 나는 당신의 거절을 받아들일 수가 없소. 시간이 좀 더 있다면 다른 후원자들을 찾아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 중국에 유학을 가 있는 천여 명의 젊은이들이 생활비가 없어서 귀국해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오. 당신이 기부할 돈은 그들에게 단비와 같소.
한의 두 눈에 무시무시한 신광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그 눈을 바라보는 신도철의 얼굴이 아득해졌다.
당신의 아들과 그 친구들은 오늘이 가기 전 정상으로 돌아올 거요. 당신이 약속을 비켰으니 나도 약속을 지키는 것이지.
한의 두 눈이 은은한 금빛 광채로 물들었다. 섭혼대법이 아니었다. 천단무상진기가 십일 성을 넘어 극성(極成)에 다가서면서 한은 무상진기이 기세(氣勢)만으로도 섭혼대법으로 얻을 수 있는 효과와 비슷한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한은 무상진기의 기세로 타인의 정신 상태를 뜻대로 만드는 힘을 사용하는 것은 가능한 피하려고 했지만 지금은 사용해야 할 때라고 판단했다.
호국회의 한국지회가 갑작스럽게 붕괴되면서 그들이 운영하던 일성재단은 공중에 뜬 것처럼 흐트러져 버렸다. 운영자들이 한꺼번에 사라지고 자금의 원천 역할을 하던 한국지회가 붕괴되었으니 일성재단의 운명은 정해졌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성재단은 그 운영자들의 배후 의지만 제거한다면 반드시 존속해야 할 단체였다. 능력이 있어도 돈이 없어 뜻을 펴지 못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일성재단은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이 신도철을 찾은 것이다. 일성재단의 붕괴를 막기 위해서.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한은 신도철에게 강제적인 방법이 아니라 다른 방법을 썼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일성재단에서 중국으로 유학을 보낸 학생들의 수는 천여 명에 달했고, 매달
그들에게 보내는 자금의 규모도 30억에 달했다. 그 자금이 마비되면서 중국
유학생들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들에겐 당장 생활비와 학비가 필요했다.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한은 신도철에게 다른 방법을 사용했을 지도 몰랐지만 현재로서는 신도철이 그의 제안을 거절했을 때 그의 마음을 돌릴 다른 적절한 방법이 없었다.
신도철의 눈동자는 자석에 붙은 쇠붙이처럼 한의 두 눈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 시간이 지난 후 신도철은 일성재단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가 될 것이다.
저택을 걸어 나오는 한의 앞을 막아서는 자는 없었다. 신도철과 정주호가 저택의 현관까지 나와 정중히 배웅을 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한이 나선 후 저택의 대문은 다시 닫혔다. 아직 열한 시도 되지 않은 시간 이어서 골목은 인적이 없었다.
자신의 승용차를 타기 전 한의 시선이 잠시 신도철의 저택을 향했다.
금제는 일 년 간이오. 그 시간이면 석준이가 기반을 다질 것이고 당신이 원하지 않으면 자선 사업가 행세를 하지 않아도 될 거요. 금제는 내 생사 여부와 상관없이 일년 후엔 자동적으로 풀릴 테니까.
한은 이어지려는 생각을 끊고 차의 시동을 걸었다.
그는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고민을 오래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책임을 져야 할 상황에서 그것을 회피한 적이 없었다. 그 책임을 지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다 해도 그는 그것을 피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갖고 있는 변하지 않는 삶의 원칙 중의 하나였다.
인적이 없는 고급 주택가 골목길에 이곳에서는 좀처럼 들을 수 없는 거친 디젤엔진의 시동 음이 울려 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