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이병철 회장이 묻고 철학자 김용규가 답하는 신과 인간에 관한 근본적 통찰, 김용규 지음
삶의 마지막 순간,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신과 인간에 관한 절박한 물음! 그리고 그에 대한 인문학적 답변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1987년 타계하기 직전 24가지 질문을 남겼다.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에서 시작하여 ‘종말은 언제 오나’에 이르는 이 질문들은 삶의 마지막 순간 누구나 품을 수밖에 없는 신과 인간에 관한 절박한 물음이다. 고(故) 이병철 회장의 질문인 동시에 우리 모두의 질문이기도 한 이 숙명적인 문제들을 철학자 김용규가 진지하게 성찰한다. 신학과 철학에 대한 지은이의 깊은 통찰에는 신의 존재 여부, 종교와 과학의 관계, 영혼의 존재와 역할, 지구의 종말 등 신과 인간을 둘러싼 모든 궁금증에 대한 해답이 담겨 있다. 또한 최근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새로운 무신론에 대한 지은이의 단호한 일침은 과학과 종교의 소통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하는 우리 시대 인문주의의 정수다.
1. 이병철 회장이 죽음을 앞두고 신과 인간에 관해 묻다
삼성그룹을 창건한 이병철 회장은 1987년 타계하기 직전 가톨릭교회 정의채 신부에게 네 쪽짜리 질문지를 보냈다. 이 질문지에는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신은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인간이 죽은 후에 영혼은 죽지 않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 등 단아한 필체로 쓰인 24개의 질문이 담겨 있다. 이 질문들은 하나같이 어투가 도전적이고 호흡이 긴박하지만, 동시에 내용이 신중하고 순서가 정연하다. 찬찬히 살펴보면 신과 인간에 관해 우리가 품을 수 있는 거의 모든 궁금증이 포함되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은 이병철 회장이 남긴 신과 인간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다루는 책이다. 이 질문들은 삼성그룹이라는 굴지의 기업을 만든 이병철 회장의 질문이기에 특별하지만, 동시에 죽음을 앞둔 인간이라면 누구나 품을 수밖에 없는 질문이기도 하기에 보편적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절박하다. 세상에서 이룬 모든 일이 헛되고 죽음 후에 찾아오는 모든 것이 불확실한 삶의 마지막 순간, 인간이라면 누구나 해답을 갈구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 문제들. 이 책은 우리 모두가 한번은 마주해야 하는 이 숙명적 문제들을 진지하게 성찰하여 삶의 의미를 곱씹고 그 가치를 다시 발견하게 한다.
2. 신을 이야기하는 철학자 김용규가 그 질문에 답하다
신에 대한 이해를 통해 서양문명의 심층을 파헤친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13편의 문학작품을 실마리 삼아 철학의 길과 삶의 해법을 제시한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흥미진진한 지식 소설 《알도와 떠도는 사원》 등 대중과 소통하는 철학 교양서를 집필해온 철학자 김용규. 그는 이 책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정점’으로서의 신을 이야기한다. 철학의 본분은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선택하고 그것을 향해 스스로 변화하게 하는 것이기에, 신을 이야기함으로써 가치들이 소멸하고 삶이 공허해진 현대인들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다.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터주어야 한다는 소명을 갖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들에 대해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목사도, 신부도, 스님도 아닌, 철학자인 그가 신과 인간의 관한 이병철 회장의 물음에 답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사람인 이유다.
이 책에서 지은이가 견지하는 것은 ‘인문학적 관점’이다. 기독교 특정 종파의 관점이나 신학적 경향을 지지하지 않고, 인문학적 관점과 언어로 신과 인간, 종교, 과학 등에 관한 다양한 문제들을 논의한다. 종교적 문제들의 개념을 정리하고 논리를 분석하며, 그에 대해 독자들이 어떤 입장을 가질 수 있는지까지 설명한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다소 낯설 수 있는 종교적 담론들을 거부감 없이 접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독자들은 신학과 철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지은이의 통찰에서 신과 인간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3. 종교해악론에 일침을 가하고 균형 잡힌 시선을 제시하다
2001년 9·11 테러 사건 이후 종교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이에 발맞춰 《만들어진 신》의 리처드 도킨스, 《종교의 종말》의 샘 해리스, 《주문을 깨다》의 대니얼 데닛, 《신은 위대하지 않다》의 크리스토퍼 히친스, 《우주에는 신이 없다》의 데이비드 밀스 등을 위시한 ‘새로운 무신론자’들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종교가 인류에게 해롭고 불필요하기 때문에 반드시 없애야 한다는 종교해악론과 종교말살론을 주장하며, 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런데 과학자인 이들의 주장은 정말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이야기일까?
지은이는 이 책에서 종교해악론을 펼지며 종교는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새로운 무신론자들의 부당한 공격에 일침을 가한다. 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무신론을 주장하는 것과 종교의 부작용을 이유로 종교해악론을 주장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마치 생화학무기, 원자폭탄 등 과학이 가진 위험성을 근거로 과학이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억지이고 과학이 없어진다고 해서 전쟁과 테러가 함께 없어지는 것이 아니듯, 새로운 무신론자들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다. 이 외에도 지은이는 새로운 무신론이 가진 많은 논리적 오류를 지적하며 과학과 종교의 소통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되묻는다. 종교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이 같은 논의는 균형 잡힌 시선으로 합리적 길을 찾는 우리시대 인문주의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지은이 인터뷰
▶ 고 이병철 회장의 24가지 질문은 모두 직설적이고 호흡이 긴박합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들어가는 말’에서 이 질문들이 “내용이 신중하고 순서도 정연하다”고도 하셨는데요. 어떤 점에서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이 회장이 남긴 질문들의 내용을 살펴보면 한 무신론자가 기독교를 공격하기 위해서, 또는 치기 어린 호기심으로 던진 물음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질문 하나하나가 무신론자든 기독교인이든,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해보았을 만한 것들이지요. 신중하게 골랐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질문들이 기독교 조직신학 체계에 맞춰 신론, 그리스도론, 성령론, 교회론, 종말론의 순서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우연이라 보기가 어렵지요. 아마 이 회장의 질문을 누군가가 다시 정리했거나, 아니면 이 회장 자신이 기독교 신학체계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 24가지 질문 중 대답 내용이 중복되는 열세 번째 질문과 기독교·유대교·불교 등 종교의 특징을 묻는 열한 번째 질문을 제외한 22가지 질문을 다뤄주셨습니다. 이 중 답변하는 데 가장 고심했던 질문은 무엇이었나요?
이 회장이 남긴 질문 하나하나가 답하기에 책 한권으로도 부족할 만큼 크고 무겁습니다. 그래서 모두 고심하면서 답했어요. 그 가운데서도 특히 답하기에 어려웠던 것은 기독교 밖에서 뿐만 아니라 안에서조차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질문들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천국과 지옥의 문제에 대해서는 교파와 신학자에 따라 의견이 분분하고 논쟁이 매우 뜨겁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이런 질문에 대해 모두가 만족할 만한 답을 찾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 리처드 도킨스, 샘 해리스, 대니얼 데닛, 크리스토퍼 히친스, 데이비드 밀스 등 ‘새로운 무신론자’들에 대한 단호한 일침이 인상적입니다. 이들의 주장은 무엇이며 왜 문제인가요?
종전의 무신론자들은 자기가 신을 믿지 않는다는 의미로 무신론을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2001년 9?11사태 이후 등장한 ‘새로운 무신론자’들은 달라요. 그들은 종교는 망상이고 온갖 전쟁과 테러의 온상이기 때문에 없애버려야 한다는 종교해악론 내지 종교말살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주장이 가진 문제점은 이렇게 생각해보면 바로 드러납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인류는 고대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당대의 첨단무기로 전쟁과 테러를 자행했고, 그 첨단무기들의 생산에는 항상 당시 첨단과학이 이용되었기 때문에 과학은 해로운 것이며 아예 없애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가정하지요. 어떻습니까? 과학이 가진 위험성 때문에 과학을 아주 없애버려야 할까요? 또 과학이 없어진다고 해서 전쟁과 테러도 함께 없어질까요? 아니지요! 설령 다소의 위험과 부작용이 염려된다고 해도 과학 역시 인류가 보존하고 발전시켜나가야 할 소중한 자산입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지요. 과학이든 종교든 그것의 부정적 측면을 최소화하고 긍정적 측면을 최대화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합리적입니다.
▶ 도킨스 등 새로운 무신론자들에 대한 논의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당면한 문제들에 대한 목소리 또한 날카롭습니다. 현실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교회를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삼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 덕에 한국 교회는 지난 30년 동안 눈부신 성장을 했지만, 온갖 부작용도 여기서 발생했습니다. 교회는 복음을 전파하고 구현하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지요. 따라서 교회는 이 목적에 합당할 때만 정당합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화형에 처하려는 대심문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사역을 위해서라면 교회의 어떠한 사역도 허용된다. 그리고 교회의 성스러운 사역을 위해서라면 어떤 불의도 허용된다. 그래서 그는 재림한 그리스도를 처형하려고 합니다. 나는 이런 생각을 간단히 ‘교회 이데올로기’라고 부르는데, 바로 이것이 11세기에 신의 이름으로 예루살렘 성을 피로 물들인 십자군의 논리였고, 16세기 유럽의 가톨릭이 중남미 각국에서, 17세기 이후 프로테스탄트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자행한 온갖 만행 뒤에 숨은 진실이었지요. 또한 오늘날 한국 교회가 반복하고 있는 숱한 과오들의 뿌리입니다. 그래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교회가 참으로 행복한 때는 교회가 하느님의 약속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중요시하지 않을 수 있을 때다”라는 파스칼의 말이지요.
▶ 현대 사회에서 신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신이란 무엇일까요? 스콜라 신학의 문을 연 캔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는 신을 ‘최고 생명’, ‘최고 이성’, ‘최고 행복’, ‘최고 정의’, ‘최고 지혜’, ‘최고 진리’, ‘최고 선성’ 등등, 요컨대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정점(頂點)’으로 파악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지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신이 죽고 진리가 사라졌습니다. 가치들이 소멸하고 세계가 공허해졌지요. 무신론과 허무주의가 횡행하고 삶의 이정표들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갈 길을 잃었지요. 한마디로, 오늘날 우리는 ‘가치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내 생각에는 바로 이것이 우리의 삶을 힘들고 어렵게 하는 근본원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힐링’이 아니지요. 삶의 가치를 회복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꾸 신을 이야기하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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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을 다시 뛰게 할 『잊혀진 질문』, 차동엽 신부
생의 밑바닥을 흐르는 거부할 수 없는 물음들!
가톨릭 사제이지만 연 600회 강연을 소화하며 대중과 소통해 온 우리 시대 멘토이자 밀리언셀러 〈무지개 원리〉의 저자인 차동엽 신부가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두고 있는 생각, 즉 ‘도대체 무엇을 위한 인생인가’라는 의문을 마음 밖으로 끌어냈다. ‘한번 태어난 인생, 왜 이렇게 힘들고 아프고 고통스러워야 하나?’, ‘우리는 왜 자기 인생에 쉽게 만족하지 못할까?’, ‘악인의 길과 선인의 길은 미리 정해져 있나?’ 등 인생에 대한 근본적 물음 15가지와 거기에서 파생된 동시대인들의 절실한 물음 11가지에 대한 따뜻하고 친절한 저자만의 해법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이 책은 절망의 한복판에서 부르는 차동엽 신부의 인생에 관한 질문과 해답을 담아낸 책이다. 24년 전 삼성그룹의 창업자 고 이병철 회장이 가깝게 지내던 신부님께 남긴 ‘인생에 관한 절실한 질문 24가지’를 바탕으로 저자가 완성한 책이다. 차동엽 신부는 모두가 살기 어렵고 희망이 없다고 아우성인 이 시대에 독자들에게 살아가야 하는 분명한 이유를 제시하고, 우리들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인생의 참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해법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들려준다.
책 속으로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묻게 해줍니다. 음식점에 갔는데 종업원의 서비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사장 나오라고 그래!” 하고 항의하듯이, 우리는 살면서 문젯거리가 생길 때 하늘에 대고 삿대질을 합니다. 이를 빗대어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고통으로 대표되는 한계 체험을 ‘최종적 포괄자’를 위한 암호라고 말했습니다. 어떠한 것이 되었든지 사람이 겪는 어려움은 ‘최종적 포괄자’ 하느님을 찾게 하는 구실이 된다는 것입니다. 고통으로 말미암아 자신과 최종적 포괄자와의 상관관계를 짚어보면서 더 넓고 높은 안목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생긴다는 말입니다.〈한번 태어난 인생, 왜 이렇게 아프고 힘들고 고통스러워야 하나?〉중에서(36쪽)
홀로 운전을 하거나 일을 하는 동안 또는 설거지나 청소를 하는 동안, 그 침묵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자신의 내면과 대화를 시도해볼 수도 있습니다. 주어진 일, 습관이 시켜서 하는 일을 멈추고, 잠깐 나 자신에게 묻는 것입니다. ‘지금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너를 어떻게 대해줄까? 너 참 사느라고 고달프지?’ 이는 독백 같지만 엄연한 대화입니다. 매너리즘에 빠진 내가 내면의 ‘나’와 나누는 소통인 것입니다. 이 대화는 우리가 절친과 나누는 대화보다 훨씬 진솔하고 따뜻합니다. 침묵과 친해지기 위해 가벼운 산책이나 여행으로 시야를 넓힐 수도 있습니다. 오직 나와 일대일로 대면하는 세상 속에 뛰어들면 새삼 진정한 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외로움과 고독은 어떻게 다른가요?〉중에서(129쪽)
‘이런 천하의 나쁜 놈’들에게 벼락을 내리시지 않는 신은 신이 아니거나 아니면 없거나 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누군가 울분을 터트린다 해도, 그 ‘의로운 분노’는 옳습니다. 고집스럽게 성실의 법칙을 따라 사는 노력파보다 교묘하게 사기의 법칙으로 사는 요령파가 더 잘사는 꼴을 봐주기란 정말로 분통 터지는 일입니다. 만일 신이 있다면 왜 이런 어거지가 용납될 수 있을까요? 초간단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신은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적어도 현세에서는 말입니다. 흔히 신은 상선벌악賞善罰惡으로 인간의 행위에 보응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상선벌악의 시행은 궁극적으로 사후 또는 종말의 때에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 정설입니다. 현세에서 그 중간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마지막 때로 유보되어 있을 뿐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죄인 또는 악한 사람에게 회개(또는 회심)의 기회를 주기 위한 신의 자비가 그 이유입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양심이라는 것이 있으니 언젠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마음을 고쳐먹기를 기다려주는 신의 자비가 바로 그 답답한 침묵의 이유입니다.
〈악한 사람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례는 대체 뭔가?〉중에서(177~178쪽)
흔히 꿈의 로드맵을 그려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나는 이를 굳이 마다하지도 않지만 적극적으로 권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이를 꿈의 ‘계획농법’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습니다. 이는 꿈에 농약도 주고 비료도 주고, 때 되면 인위적으로 전지도 하면서 꿈의 결실을 보려는 접근법입니다. 이렇게 하면 꿈이 이루어질 확률은 높아질 수 있겠지요. 하지만 꿈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부작용이 남습니다. 주위 환경의 피해, 잔류농약 그리고 건강의 이상 등. 이런 이유로 나는 꿈의 ‘유기농법’ 내지 ‘태평농법’을 권합니다. 꿈이라는 나무를 파종만 하고 생태의 이치에 맡기는 것입니다. 오로지 생태적으로만 경합하고 상생하면서 열매를 맺도록 말입니다. 그러면 아마도 소출이 적어지겠지요. 하지만 그 꿈의 결실은 주위 환경과 농부 그리고 이웃들에게 자연의 환상적인 풍미를 선사할 것입니다.〈꿈을 향해 달려가지만, 꿈은 자꾸 도망가고 이를 어찌해야 하나요?〉중에서(357쪽)
성경은 이러한 인간의 근본적인 질문, 의심에 대하여 다양한 장르의 예화로 답한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지만 그 고통은 신을 만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고통을 그런 과정으로 생각하면 희망이 생기고 위로가 된다는 것이다. 신은 존재 자체이며 나와 특별히 통한다. 오만(자만)과 편견은 신을 부정하는 죄다. 마치 아담이 신과 동등해 지려고 실과를 먹고 신과 등을 돌려 에덴 동산을 떠난 것 처럼 ...
첫댓글 욥기를 읽으면 신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하게 한다. 고통은 에덴 동산을 떠난 인간을 다시 신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는 신의 선물이라는 것인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