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1524. [역경의 열매] 장순흥 (1-30)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 있다” 주님 말씀 일찍 깨달아
어릴 때부터 남들에게 주는 것 좋아해
친구들에 사탕 나눠주다 돈 다 떨어져
누나 수학숙제 대신해 주고 용돈 마련
장순흥 한동대 총장이 1955년 모친 이정송 권사와 돌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지난 40년을 뒤돌아보니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과학자 교육자 행정가로서 달려온 삶을 살았다. 1982년 카이스트 원자력공학과 교수로 부임해 30여년간 후학을 양성했다. 대한민국 원자력발전소 기술 자립에 기여했으며, 2014년부턴 하나님의 대학인 한동대 총장을 맡아 글로벌 기독 인재 육성에도 힘쓰고 있다.
나는 1954년 5월 6일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서 태어났다. 3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유복한 가정이었다. 이북 출신인 아버지는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영어도 잘하고 학구적인 분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대령이었는데 얼마 후 장군으로 진급하셨다.
육사 3기였던 아버지는 박정희 대통령보다 1기 후배였다. 소장 진급 후 1969년 예편했다. 아버지가 사단장 시절 강원도 철원 본부를 놀러 갔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는 경북 김천 출신의 인텔리였다. 김천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에서 약학을 전공했는데 기차 여행을 하다가 두 분이 만났다고 했다.
우리 집은 필동 대한극장 근처에 있었는데, 학교 진학에 맞춰 종로구 사직동으로 옮겼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남들에게 무엇을 주는 것을 좋아했다. 서울 덕수초등학교에 다닐 때 일이다.
“순흥아, 나 사탕 좀 줘.” “어, 그래. 여기 있어.” 나는 누가 달라고 하면 거절을 못 했다. 친구들에게 뭐든지 퍼주다 보니 항상 돈이 모자랐다. 무엇이든 주면 기분이 좋았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라는 주님의 말씀을 일찍부터 깨달은 것 같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누나의 산수 문제를 풀어주기로 한 것이다. “누나, 친구들한테 사탕 사주려면 돈이 좀 필요한데. 얼마 좀 줄래?” “그럼 네가 내 수학 숙제해줘. 그럼 100원 줄게.”
누나가 돈을 준다는 말에 두 학년 위인 누나의 숙제를 해줬다. 중학교 때도 마찬가지였다. 누나의 수학 숙제는 늘 내 몫이었다. 자연스럽게 수학 실력이 부쩍 늘었다. 그렇다고 과외를 받았던 것은 아니다. 논리적인 것과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아버지는 말씀을 많이 하지는 않으셨다. 아침 일찍 일어나셨는데 늘 손에 책이 있었다. 어머니도 아버지 옆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부모님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일찍 일어나고 책 읽는 습관을 배운 것 같다.
덕수초등학교에선 반에서 10등 안에 들면 경복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늘 잘 할 수 있다며 격려해 주셨다. 어머니도 공부하라고 잔소리하시는 분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 5남매는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이 배어 있어서 그런지 좋은 대학에 진학했다.
교회는 덕수교회에 출석했다. 지금 서울 태평로 조선일보 자리에 있었다. 얼마 후 성북동으로 이전했는데, 당시는 최거덕 목사님이 담임을 맡고 있었다. 지금은 원로목사가 되신 손인웅 목사님은 그때 전도사님이었다.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녔지만 그리 열심을 내지는 않았다.
당시 경복고는 경복중을 졸업한 480명을 뽑고 다른 중학교 출신 240명을 뽑았다. 1969년 경복고에 무시험으로 입학하고 1970년 겨울 방학 때 인생의 중대한 사건이 벌어졌다.
약력=서울대 핵공학 학사, 미국 MIT대학원 핵공학 석·박사, 카이스트 원자력공학과 교수, 카이스트 대외부총장, 한국원자력학회장, 과학기술훈장 창조장, 제34회 인촌상 수상, 현 한동대 총장.
* [역경의 열매] 장순흥 (1)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 있다" 주님 말씀 일찍 깨달아
* [역경의 열매] 장순흥 (2) 죽음에 대한 고민으로 우울증… 성경 말씀 통해 극복
* [역경의 열매] 장순흥 (3) 고등부 회장 맡아 무료 수업해가며 전도에 매진
* [역경의 열매] 장순흥 (4) "신앙이 공부보다 우선"… 고3 시험기간에도 예배
* [역경의 열매] 장순흥 (5) '복음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 학업과 복음 전도에 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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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역경의 열매] 장순흥 (2) 죽음에 대한 고민으로 우울증… 성경 말씀 통해 극복
허무주의 빠져 공허함으로 교회 찾았다
“믿는 자마다… 영생 얻게” 머리에 남아
믿음의 중요함 깨달은 후 우울증 사라져
장순흥(오른쪽) 한동대 총장이 1969년 서울 경복고 재학시절 학교 친구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모습.
1969년 청와대 옆 서울 종로구 효자동에 있는 경복고에 진학했다. 열심히 공부했더니 좋은 성적이 나왔다. 공부에 자신감이 붙었다. 문제는 70년 초 겨울방학 때 발생했다. 문득 인생이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 생겼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못해도, 잘 살아도, 못 살아도 결국은 죽음이다.’ 갑자기 허무감이 밀려왔다.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는데,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럼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슬럼프가 시작됐다. 내가 아무리 성공적인 삶을 살아도, 훌륭한 삶을 살아도 결말은 딱 한 가지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죽음뿐이구나. 결국, 내 삶의 시나리오는 내 노력으로 내 맘대로 쓸 수 있지만 죽음이라는 결론은 선택할 수 없다. 이건 언젠가 내게 닥쳐올, 너무도 분명한 확실한 결론이다.’ 생각의 꼬리가 꼬리를 물었다. 그럴수록 우울증의 수렁에 빠져들어 갔다.
그 당시 나의 심리 상태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것은 톨스토이의 ‘참회록’에 나온 우화였다. 사자에 쫓기던 사람이 우물 속으로 피하지만 우물 속에는 커다란 뱀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사람은 우물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겨우 매달렸는데, 잡고 있는 관목 가지를 쥐가 갉아 먹는 상황이었다. 그때 그는 나뭇잎 끝에서 떨어지는 꿀을 핥아 먹으며 순간의 달콤함을 만끽한다.
딱 내 모습이었다. 허무주의와 우울증에 빠졌던 나는 콜라에 빠져들었다. ‘톨스토이의 우화에 나오는 인간이 죽음 앞에서 아무 의미도 없는 꿀맛에서 행복을 느꼈다. 나한테는 콜라 맛이 그런 거네.’ 아무 의미도 없이 그저 콜라가 주는 순간의 시원함과 달콤함이 위로를 줬다.
그렇지만 콜라 맛의 기쁨이 얼마나 오래갈 수 있었겠는가. 한낱 탄산음료로는 공허함을 채워줄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울증은 점점 더 심해졌다. ‘아, 이래서는 안 되겠다.’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2학년이 시작된 3월 첫째 주일 서울 덕수교회를 내 발로 찾아갔다. 어쩌면 살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교회에 들어서자마자 예배당 벽에 붙어 있던 큼지막한 말씀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나는 마치 자석에 고정된 듯 오랫동안 그 구절을 읽고 또 읽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요한복음 3장 16절을 펼쳐 놓고 계속 들여다 봤다.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고 이내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후 오랜 시간 깊은 묵상으로 이어졌고 이 말씀을 통해 마침내 믿음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믿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한 가닥 삶의 희망이 보였다. ‘아, 이거다. 이게 해답이다.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실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독생자를 믿음으로써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있고, 또 멸망치 않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 길을 가겠다.’
신기하게도 그동안 나를 지배하고 있던 허무주의와 우울증은 안개 걷히듯 사라졌다.
***[역경의 열매] 장순흥 (3) 고등부 회장 맡아 무료 수업해가며 전도에 매진
30명이던 고등부 학생 90명까지 불어나
수양회서 손인웅 강도사의 로마서 강해
‘믿음으로 구원…’ 평생 믿음의 자산 돼
장순흥 한동대 총장이 고등부 학생회장을 맡던 시절 서울 덕수교회. 당시 교회는 서울 중구 조선일보 자리에 있었다.
1970년 3월 주님을 믿고 구원의 확신을 받은 순간부터 우울감은 사라졌다. 늘 공허했던 마음이 채워졌다. 내면의 풍요 속에서 감사가 이어졌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교회를 본격적으로 나가기 시작한 그다음 주일은 마침 고등부 회장을 뽑는 날이었다. 당시엔 고등부에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 별로 없었다.
“새로 나온 순흥이가 회장을 맡는 게 어떻겠습니까.” “좋습니다. 고등부에도 새로운 피가 수혈돼야 합니다.” 학생들과 고등부 선생님은 나를 회장으로 추천했다. 아마 내가 의욕에 가득차 보였던 것 같다. 그렇게 엉겁결에 30명이 출석하는 덕수교회 고등부의 회장직을 맡게 됐다.
교회에 제대로 다니지 않다가 회장을 맡았으니 그 자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랐다. “회장은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주보를 만들어야 하지. 하지만 무엇보다 제일 좋은 건 고등부 회원을 많이 늘리는 거야.” ‘아, 무작정 아이들을 많이 데리고 오면 되는구나.’
아기가 첫걸음마를 떼듯 겨우 교회에 첫발을 디딘 나는 2주 만에 학생 전도라는 최전선에 뛰어들었다. 마치 다윗이 어떠한 준비나 무기도 없이 골리앗을 처음 만났듯 회장이라는 직책과 함께 아무런 지식이나 경험도 없이 전도라는 사명 속에 던져졌다. 열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전도에 매진했다.
당시 나는 전교 10등 안에 들었다. 고등부 학생회장을 맡으면서 아이들에게 수학과 과학을 토요일 오후에 무료로 가르쳤다. 봉사하는 마음으로 수학과 과학을 가르치면서 전도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그리고 ‘굿 뉴스 포 모던 맨’(Good News for Modern Man)이라는 영어 성경을 함께 공부했다.
그러다 보니 전도도 절로 되고 수학과 영어 실력은 더 늘게 됐다. 2살 많은 누나의 수학 숙제도 해주면서 용돈까지 벌었다. 그 돈으로 아이들에게 간식을 사주면서 전도는 빛을 발했다. 그 결과 고등부가 90명까지 불어났다.
전도를 열심히 했던 특별한 원인이나 이유는 없었다. 그냥이었다. 이상하게 전도가 즐겁고 행복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주님이 나에게 주신 달란트를 처음 사용하게 됐던 첫 전도이자 훈련 과정이었던 것 같다. 그때는 달란트니 전도니 그런 것도 모르고 그저 회장이니까 아이들을 교회에 많이 데리고 와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주님께서 나에게 전도라는 공부와 훈련을 시키신 것 같다.
그해 7월 경기도 양평으로 고등부 여름수양회를 갔다. 강사는 훗날 덕수교회 담임목사님이 되신 당시 손인웅 강도사님이었다. 그때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주제로 로마서를 강해했는데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복음을 확고하게 전해주셨다.
1970년은 내 인생에 매우 중요한 시기다. 그해 3월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으로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면, 7월은 로마서 강해로 믿음의 은혜를 받았다. 이제 와서 보니 그때의 성경 공부가 내 믿음을 성경 말씀 위에 굳건히 서게 했고, 내 일생을 이끌어가는 믿음의 자산이 됐다.
***[역경의 열매] 장순흥 (4) “신앙이 공부보다 우선”… 고3 시험기간에도 예배
수요일, 토요일, 주일 예배는 반드시 참석
초 5 때 ‘한국의 에너지 부족’ 문제 들은 후
서울대 원자력공학과 목표로 공부해 입학
장순흥(왼쪽 네 번째) 한동대 총장이 1971년 서울 종로구 경복고등학교 교정에서 같은 반 친구들과 함께했다.
1970년대만 해도 교회 주보는 ‘가리방’이라는 방식으로 제작했다. 요즘이야 컴퓨터로 작업해 손쉽게 출력하지만, 그때는 등사판을 롤러로 밀어서 한 장 한 장 만들었다. 철필로 등사지 위에 글씨를 쓰고 고무 롤러에 잉크를 묻혀 등사지를 누르면 등사지 아래 있는 종이에 글씨가 새겨졌다. 매주 토요일 아이들에게 수학 문제 풀이방법을 가르쳐주고 같이 주보를 만들었다.
서울 경복고 안에서도 왕성하게 전도 활동을 펼쳤다. 대표적인 전도대상자는 강윤식 기쁨병원 원장이었다. 강 원장은 한 학년 후배였는데, 성실하고 착했기에 눈에 띄었다. “윤식아, 너 일요일에 뭐하니.” “네, 장 선배. 이번 주에는 특별한 일 없어요.” “그래, 그럼 나랑 덕수교회에 좀 가자.” “교회에요?”
교회 문지방을 넘어본 적이 없는 강 원장은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했다.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지,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면서 학생회장을 그에게 물려줄 정도였다. 강 원장은 훗날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90년대 국내 최초로 대장 항문질환 전문병원을 개원했다. 운영난을 겪던 서울모테트합창단의 전폭적인 후원자가 되어 병원에 연습홀을 마련해 줄 정도였다. 그는 세계선교사대회에도 큰 기여를 했다.
고3 때도 전도는 계속되었고 대학입시라는 커다란 인생의 터널이 있었지만, 수요예배와 토요일, 주일 고등부 예배를 위해 교회에서 보냈다. 시험 준비로 바쁜 수험생이 일주일에 3일을 교회에서 보낸 것이다.
이때는 ‘신앙이 공부보다 차원이 높다. 신앙 다음이 공부다’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오히려 ‘시험이 내일인데 교회에 가야 하나. 나의 신앙은…’이라는 선택적 시험에 빠질 때 믿음의 질서는 흐트러지고 갈등은 생기게 된다. 나에게 신앙이 공부보다 우선한다는 공식이 생기고 난 후부터는 어떠한 불안감도 존재하지 않았고 갈등도 생기지 않았다.
일찌감치 대학은 서울대, 학과는 원자력공학과로 목표를 잡았다. 이유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선생님께 들었던 이야기 때문이다. “한국은 석유, 천연가스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에너지가 부족하다 보니 겨울마다 사람들이 땔감을 확보하느라 산에 가서 나무를 마구잡이로 베어냈고 그만 민둥산이 되고 말았다.” ‘아, 에너지가 매우 중요한 문제이구나. 나중에 한국의 에너지 확보에 기여하는 인물이 되고 싶다.’
당시 입시제도는 학력고사로 기본 학력을 인정받고 대학마다 본고사로 합격자를 가렸다. 서울대는 본고사로 국어 영어 수학 과학을 봤다. 수학은 두 학년 위의 누나 숙제를 봐주다가 실력이 부쩍 늘었기에 자신이 있었다. 영어는 교회 친구들과 영어성경으로 공부했기에 실력이 어느 정도 됐다. 과학은 원래 재미가 있었고 국어는 어느 정도 했다.
당시만 해도 경복고는 매년 300여명을 서울대에 보냈다. 한 반에 20여명의 합격자가 나올 정도였다. 내신의 비중이 높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의대보다 공대의 점수가 높던 시절이다 보니 전자공학과와 기계공학과, 원자력공학과의 점수가 높았다. 나는 주님 주신 훈련을 잘 통과한 덕에 72년 서울대 원자력공학과에 입학했다.
***[역경의 열매] 장순흥 (5) ‘복음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 학업과 복음 전도에 최선
병역면제 판정 후 토플시험·서류발급 등
미국 유학 절차 밟느라 한창 바쁠 때도
전도 여행 등 예수전도단 활동 적극 참여
장순흥(오른쪽) 한동대 총장이 1977년 예수전도단에서 전도활동을 함께한 이상업 목사와 함께 야외로 향하고 있다.
당시 서울대 공과대는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있었다. 지금의 서울과학기술대 자리다. 1972년 대학 입학 후에도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을 전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죄를 짓기 시작했고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지만 창조주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구세주로 보내주셨습니다. 성경은 그분을 믿는 자마다 영생과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그분을 영접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서울 덕수교회 대학부 회장을 맡으면서 학업과 복음 전도에 최선을 다했다. 청년회 회장도 맡았는데, 담당 교역자가 없어서 대신 말씀을 전하기도 했다.
복음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였다. 누가 돈을 준다고 해봤자 기껏해야 몇백억, 몇천억은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명은 줄 수 없었다. ‘그래,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저 사람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복음을 전하는 기회가 닿는 대로 힘써 전하자.’
나의 복음 전도 활동에 기름을 부은 사람은 서울대 1년 선배인 김영훈 대성그룹 회장이었다. 우리 부모님과 김 회장 부모님은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평소 신앙이 좋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대학에서 김 회장과 동생 김성주 회장을 직접 만나보니 깊이가 남달랐다.
“순흥아, 예수전도단 모임이 있는데 한번 가볼래?” “예수전도단이 뭔데요.” 당시 예수전도단은 서울 명동성당 근처 YWCA 건물 지하에서 모임을 했다. 수도권에서 모인 청년 1500여명이 한자리에 모여 주님을 높였다.
“예수님 찬양 예수님 찬양 예수님 찬양합시다.” “이날은 이날은 주의 지으신 주의 날일세 기뻐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세.” “주 예수 사랑 기쁨 내 마음속에 내 마음속에 내 마음속에.” 1970년대 한국교회를 휩쓴 복음성가는 그곳에서 나왔다. 청년들로 꽉 찬 그곳은 정말 복음의 용광로였다. 어렴풋하게 기억이 나는데, 오정현 사랑의교회 목사도 그곳에서 내수동교회 청년 리더로 참여했다.
모임의 설교는 데이비드 로스(오대원) 목사님과 예수원 설립자인 대천덕 신부가 했다. 전체 모임 리더는 현재 케냐 선교사로 활동하는 임종표 선교사님이 했다. 임 선교사님은 25세이던 1973년 한국예수전도단을 세웠다. 여섯 살 차이가 나는 임 선교사님은 복음 전도의 열정이 대단했고 일 처리에 탁월했다.
그 시절 내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과 그들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실력을 갖출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한 끝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서 실력을 갖춰야겠다고 생각했다. 이후 병역 의무를 마쳐야 유학을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신체검사부터 받았다. 그런데 한쪽 눈이 아주 나빠 방위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부친이 현직 장성이라는 이유로 깐깐하게 다시 정밀검사를 했고 오히려 병역면제 판정이 나왔다.
1976~77년은 토플시험 준비, 서류 발급 등 미국 유학 절차를 밟느라 한창 바쁠 때였다. 하지만 전도 여행 등 예수전도단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한 번뿐인 젊음을 주님께 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장순흥 (6) “한국 원자력 발전에 이바지하겠다”… 미국 유학길
걸음마 단계 있던 한국의 원자력 발전
기술 자립 이루도록 돕고 싶은 마음에
MIT 대학원 핵공학과 지원 장학생 입학
장순흥(뒷줄 오른쪽) 한동대 총장이 1977년 미국 MIT 대학원 재학 시절 보스톤한인교회에서 청년들과 함께했다. 당시 장 총장은 청년 회장으로 활동하며 복음전도에 힘썼다.
서울대 원자력공학과에서 수업을 들으면서 늘 떠올랐던 생각이 있다. ‘한국은 원자력과 관련된 물리학 및 기초이론 과목은 잘 가르쳤다. 하지만 원자력 발전소 설계를 위한 공학 및 설계 관련된 경험자가 거의 전무하다.’
당시만 해도 한국은 미국 도움을 받아 원자력 발전소 시공만 하는 걸음마 단계에 있었다. 1971년부터 미국 웨스팅하우스에서 개발한 가압 경수로형 원자력 발전소를 부산 기장에 짓던 시절이다. 고리 1호기는 1978년 완공됐다. 아시아에서 두 번째, 세계에서 21번째였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미국의 선진적인 원자로 설계 기술을 습득해 한국이 기술자립을 이루도록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그러던 중 미국 대학에 원서를 보내게 됐다. 그리고 예수전도단 활동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데 힘썼다.
어느 날 미국에서 연락이 왔다. MIT였다. ‘미스터 장, 축하합니다. 당신의 입학을 허락합니다. 연구장학생 후보로 선정되었습니다.’ 얼떨떨했다. 사실 MIT는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곳이었다. 왜냐하면 7~8년간 한국인 유학생을 일절 받지 않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당시 이란 정부가 MIT에 큰 기부를 했다는 이유로 이란 출신의 유학생들에게 기회를 주다 보니 아시아계 유학생에겐 자리가 없었다. 그런데 내가 원서를 낸 77년 갑자기 입학 허가가 난 것이다. 게다가 장학생까지 됐다.
‘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의 나라를 위해 복음 전도에 힘썼더니 이런 복을 주시는구나. 말씀대로 주님께서 정말 삶을 책임져 주시는구나.’
맨 먼저 축하해준 분은 아버지다. “순흥아, 미국의 좋은 학교에 합격했구나. 축하한다. 지금껏 잘 해왔듯 앞으로도 잘하리라 믿는다.” 아버지는 미국 유학 경험이 있기에 MIT의 명성을 익히 알고 계셨다. 어머니는 아들을 먼 타지에 보낸다는 생각을 하셨는지 기뻐하시면서도 이내 걱정이 되는 눈치였다. “어머니, 미국에 가서도 열심히 살겠습니다. 박사가 되어서 한국 원자력 발전에 기여하는 인재가 되겠습니다.”
유학 준비를 마치고 그해 가을 김포공항에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착용하니 유학을 간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하나님이 나에게 아주 좋은 기회를 주셨다. 미국에 가서도 복음전도에 힘쓰겠다.’
미국 보스턴에 정착했다. 교회는 보스톤한인교회로 정하고 한국에서 하듯 전도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한인교회에는 청년부가 없었다. 그래서 새로이 유학 온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청년부를 만들었고 나는 회장을 맡게 되었다. 대부분 유학생이라 다들 형편이 어려웠다. 나도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전도를 위해선 차가 필요했다. 그래서 중고로 크라이슬러 닷지 승합차를 사서 매주 6~7명을 태우고 교회로 향했다.
미국의 신앙생활도 한국과 큰 차이가 없었다. 전도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유학생 전도에 주력했다. 매주 주말 전도에 힘쓰다 보니 공부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가장 중요한 전공필수 과목의 첫 번째 중간고사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역경의 열매] 장순흥 (7) 시험 예상문제 모두 적중… “완벽한 모범답안” 교수 칭찬
주일에 종일 예배드리고 유학생 돌보다
전공 필수과목 시험 공부시간 빠듯해져
나만의 문제해결 공부법으로 시간 줄여
장순흥(왼쪽) 한동대 총장이 1978년 나상천 박사와 미국 매사추세츠주 MIT 메인홀 앞에서 찰스강을 바라보고 있다.
유학 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복음을 전했던 일이다. “혹시 제가 성경에 대해 5분간 이야기해도 될까요. 아시다시피 미국 문화가 기독교 문화이고 성경의 문화잖아요.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책인 성경은요….” 아무리 불신자라 하더라도 성경 이야기를 짧게 해주겠다고 하면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그때는 복음 전하는 일이 ‘나에게 가장 큰 선물’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복음을 전하는 순간이 정말 기뻤으며 행복한 마음으로 충만했다. 보스턴의 많은 유학생을 보스톤한인교회로 인도했다.
1977년 매주 전도에 힘쓰다 보니 어느새 첫 학기 전공 필수인 핵물리 과목의 시험이 돌아왔다. 주일은 종일 예배드리고 전도한 유학생을 돌보다 보니 시간이 빠듯했다. 기숙사에 돌아오니 저녁 9시30분이었다. 시험 범위는 300쪽이었다. 공부는 해야 하는데, 가슴이 턱 막혔다.
‘하나님, 제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이곳 MIT까지 유학을 왔습니다. 그런데 시험 성적이 나쁘게 나오면 학업도 게을리하면서 미쳐서 전도만 한다는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기도를 마치고 책을 폈다. 그리고 내가 만약 교수님이었다면 어떤 문제를 냈을까 생각하면서 5개 문제를 만들어봤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한 답안을 일목요연하게 써 내려갔다. 2시간 이내에 마칠 수 있었다.
다음 날 시험시간이 됐다. 미국인 동급생들도 밤을 새운 눈치였다. 그 친구들은 워낙 체력이 좋다 보니 며칠간 밤새우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시험 문제를 받았다. ‘세상에, 내가 어제 뽑았던 5개가 거의 그대로 나왔다. 오, 주님 감사합니다.’ 미리 정리했던 내용을 술술 풀어냈다. 가슴 깊은 곳에서 감사와 뿌듯함이 밀려왔다.
며칠 후 교수님이 답안지를 돌려주며 이렇게 말했다. “미스터 장, 완벽해요. 어떻게 내가 생각하는 모범답안을 그대로 적었습니까. 유학 온 지 얼마 안 돼 쉽지 않을 텐데 대단합니다.” 교수님이 학생들 앞에서 추켜세우는 데 감사의 기도만 나왔다.
물론 유학 생활은 고됐다. 문득 고향이 그립고 부모님과 형제자매가 그리웠다. 하지만 일시적 감정이었다. 남의 고민을 도와주고 복음을 전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어려움을 겪는 다른 유학생을 돕다 보면 내 고민을 할 시간도 없었다.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를 줄이는 나만의 공부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교적 단시간에 석·박사 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던 것도 문제 해결 중심의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이런 질문을 던졌다. ‘오늘 배운 내용 중 핵심은 무엇일까. 무엇이 문제이고 그 문제를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교수님이 시험 때 문제를 내신다면 어떤 문제를 낼까.’
일례로 역사 시간에 임진왜란을 배웠다면 단순히 사건 발생 연도와 정황만 외우는 암기식이 아니라 왜 이런 전쟁을 맞이했고 앞으로 제2의 임진왜란을 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나만의 대비책을 짜봤다. 그렇게 문제 중심의 공부를 하던 78년 1월이었다. 보스턴에 눈이 많이 온 어느 날이었다.
***[역경의 열매] 장순흥 (8) 선배 전도하다 선배 여동생에게 마음 “저와 평생을…”
내 이야기 경청하는 모습에 반해 결혼
MIT 박사로 졸업 후 미국 벡텔사 입사
원자력 발전소 설계·시공 전 과정 경험
장순흥(오른쪽) 한동대 총장이 1979년 11월 미국 보스톤한인교회에서 김경미(오른쪽 두 번째)씨와 결혼예배 후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왼쪽은 당시 MIT 경영대학원에 다니던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과 아내 김영명씨.
1978년 1월 MIT가 있는 미국 보스턴에는 눈이 많이 왔다. 식료품점을 찾아갔지만 음식이 모두 팔렸다. 총각 유학생들은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식사를 해결했다.
나는 끼니도 해결하고 전도도 할 겸 MIT 선배 집에 갔다. 저녁 시간이었는데 선배가 반갑게 맞이했다. 식사 후 곧바로 전도에 들어갔다. 선배의 여동생은 사과를 깎으면서 내 이야기를 경청했다.
당시 선배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없었다. “선배님, 우리 인간은 유한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선배님을 향해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과 네가 믿는 하나님이 다르지 않잖아.” “그런 관념적인 하나님 말고요.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아유, 그런 옹졸한 하나님이라면 안 믿겠네.”
밤새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불쌍히 여기셔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분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 천국행이 결정됩니다.”
선배는 구원 문제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선배보다 내 이야기에 더 깊은 고민을 한 것은 선배의 여동생이었다. 나보다 세 살 위였다. 몇 번 만나다 보니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 자매가 사람을 무척 편하게 해준다. 혹시 나와 평생 함께할 배우자는 아닐까.’ 그래서 용기를 내서 프러포즈했다. “혹시 저와 평생을 같이할 수 있겠습니까.” “예….”
79년 11월 아버지는 멀리 미국까지 아들의 결혼식을 위해 직접 와 주셨다. 미국 보스톤한인교회에서 은혜로운 결혼예배를 드렸다. 신혼집은 학교 부근 아파트에 잡았다. 81년 2월, 첫째 아들 노아를 낳았다. 그리고 그해 5월 박사학위를 받고 MIT를 졸업했다.
곧바로 미국 벡텔사에 입사했다. 벡텔사는 한국에 4개, 대만 2개, 미국 4개의 원자력 발전소를 설계·시공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원자력 발전소 설계부터 시공까지 전체 과정을 경험했다. 현장에 나가보니 MIT의 기술력이 기업보다 훨씬 앞서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때 나에겐 원자력 발전소 설립, 건설, 허가, 운전이라는 완전한 기술 자립의 원대한 꿈이 있었다. 순수 대한민국 기술로 세계에 우뚝 서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단순 물리학에만 머물지 않고 원자력 전체 시스템을 익히는 데 주력했다.
당시 보스턴에는 유명한 사람들이 유학 생활을 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MIT에는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이 유학 생활을, 하버드대에는 도올 김용옥이 공부하고 있었다.
유명 인사뿐만 아니라 신앙적으로도 훌륭한 분들도 많았다. 예를 들어 김인수 고려대 교수님과 김수지 이화여대 교수님 부부는 정말 좋은 신앙인으로 훌륭한 인격을 가진 분들이었다. 또한 성경공부를 같이했던 유학생도 많았다. 훗날 이분들은 한국교회에 긍정적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유학생 수련회인 코스타(KOSTA) 태동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역경의 열매] 장순흥 (9) 한국서 원자력공학과 설립 소식에 사표 내고 귀국
28세 최연소로 카이스트 교수에 임용
유학 시절 믿음의 동역자들 많이 만나…
신앙 좋은 박사들과의 인연 삶에 큰 힘
장순흥(가운데) 한동대 총장이 1981년 5월 졸업가운을 입고 미국 보스턴 MIT 교정에서 아내 김경미(오른쪽)씨, 장평훈 박사와 함께했다.
1977년부터 81년까지 보스턴 유학 시절 믿음의 동역자를 많이 만났다. 특히 MIT에는 믿음 좋은 한국 유학생이 많았다. 처음 보스턴에 도착했을 때 만난 분 중에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분들이 있다. 박사 후 과정에 있던 김인수 교수와 그의 부인 김수지 교수다.
이분들은 신실한 크리스천 리더로서 성경공부에 열심을 다했다. 김 교수 부부와의 인연은 한국에 와서도 카이스트에서 계속됐다. 같이 공부하던 조준호 선배는 공부가 끝난 후 보스톤한인교회 장로가 되어 보스턴 교계 활동을 열심히 했다.
MIT에 온 지 1년 정도 지났을 무렵, 또 다른 믿음의 형제를 만났다. 나보다 1년 늦게 온 노희천 박사다. 노 박사 역시 인연이 카이스트까지 계속됐다. 훗날 한국에 돌아왔을 때 카이스트에서 만난 김영길 김인수 교수, 노희천 박사는 나와 더불어 카이스트 기독 모임을 이끄는 핵심 멤버가 됐다.
특히 김영길 교수를 도와 창조과학회를 태동시켰고 한국 땅을 넘어 전 세계에 하나님께서 펼치신 창조질서를 과학적으로 변증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훗날 김영길 교수와 노 박사는 온누리교회 창립과 더불어 한동대학교 개교에도 큰 역할을 했다.
보스턴으로 유학 온 장평훈 박사는 MIT 기독 유학생을 모아 성경 공부를 시작했다. 장 박사는 훗날 카이스트에서 다시 만났다. 장 박사의 주선으로 홍정길 목사님이 매년 MIT를 방문해서 성경을 가르쳐 주셨다. 이 만남은 유학생 사회에서 그 범위가 확대됐고 훗날 코스타(KOSTA·국제복음주의 학생연합회)의 기초가 됐다.
많은 사람이 과학과 신앙을 이분법적으로 별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훌륭한 과학자 중에는 신실한 믿음을 가진 이들이 많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 질서의 위대함과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믿으며 학문과 신앙의 통합을 이루고자 노력한다. 이분들과의 만남이 한평생 과학자이자, 신앙인으로서 나의 삶에 큰 도움이 됐다.
박사 과정을 마친 후 벡텔사에서 1년간 일하는데, 고국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서울 홍릉 카이스트에서 원자력공학과를 설립한다는 것이었다. ‘아,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준비해 주신 길이다.’
당시 어머님의 병환으로 걱정하던 터라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좋은 시기라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의 원자력 기술 자립을 위한 인재 양성과 기술 개발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카이스트에 원서를 냈다. 며칠 뒤 한국에서 교수로 채용됐다는 연락이 왔다. “오 주님, 감사합니다. 그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며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는 것을 최우선에 놓고 나머지는 부수적으로 열심히 했을 뿐인데, 이렇게 복을 주시는군요. 주님은 언제나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 한 일보다 더 많이 부어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벡텔에 사표를 내고 귀국 절차를 밟았다. 82년 나는 당시 최연소로 카이스트 교수에 임용됐다. 28세의 나이였다.
***[역경의 열매] 장순흥 (10) 스물여덟에 카이스트 부임… 원자력 기술 자립에 몰두
후학 키우며 한국형 원자로 설계에 심혈
한편으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 찾다
기독학생 20~30명과 함께 전도에 나서
장순흥(앞줄 가운데) 한동대 총장이 1982년 서울 공릉동 카이스트 연구실에서 원자력공학과 석사과정 학생들과 함께했다. 조원진 박사, 최종호 국제원자력기구 전문가, 백원필 차기 한국원자력학회장, 김명기 원자력기술사, 나기용 두산중공업 원자력BG장(뒷줄 왼쪽부터).
카이스트는 1982년 3월 원자력공학과(현재 원자력 및 양자공학과) 학생을 처음으로 뽑았다. 나는 그해 7월 귀국해 28세에 교수로 강단에 섰는데, 연구원 과정에는 나보다 나이 많은 학생이 꽤 있었다. 당시 교수는 먼저 부임하신 전문헌 교수님과 단둘이었다. 학과의 목표를 원전 기술 자립에 두고 인재 양성과 기술 개발에 초점을 맞췄다.
나는 원전 설계 수업을 맡았는데 한국형 원자로 설계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선 원자력 기계공학, 원자력 전기공학, 원자력 화학공학이 바로 서야 했다. 특히 원자력 안전도 중요했다. 그래서 안전 규제에도 굉장히 신경 썼다. 원자력 안전교육과 연구를 통해 설계 인력과 규제 인력을 동시에 양성하는 그런 연구실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때부터 연구원들과 함께 한국형 경수로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필순 한국에너지연구소 대덕공학센터장과 자주 대화를 나눴다. 한 센터장은 이북 출신으로 공군사관학교와 서울대 문리과를 졸업하고 미국 일리노이대 석사, 캘리포니아대 박사를 거쳐 70년대부터 국방과학연구소에서 무기 국산화 사업에 참여했던 석학이다.
그분은 내가 카이스트에 부임하던 해에 한국원자력연구소의 전신인 한국에너지연구소에 부임했다. 원자력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기술 자립에 대한 의지가 굉장히 강했다. 내 수업에 와서 가끔 청강도 하고 수업을 마친 뒤 점심을 하며 대화도 많이 나눴다.
“센터장님, 한국이 강대국이 되려면 반드시 원전기술 자립을 이뤄야 합니다. 우리 기술로 원자력 발전소를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장 교수님, 어떻게 그렇게 젊은 나이에 원자력 기술 자립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까. 어떻게 하면 되겠소.” “노심 계통설계와 핵연료 설계만 잘하면 한국은 자립할 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원자로 계통 설계나 핵연료 설계를 할 수 있는 곳은 한국에너지연구소뿐입니다.”
한 센터장은 내 말에 귀를 기울여줬다. 당시 한국에너지연구소가 원자력 발전소 개발 사업을 벌이는 것에 주변의 반대가 컸다. 산업부와 한국전력은 기술 자립보다 미국 웨스팅하우스사와 의존적 관계에 머물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한 센터장은 반대를 무릅쓰고 원자로 계통 설계와 핵연료, 노심 설계 기술 개발 사업을 수주했다. 나도 기술 자문을 통해 귀국 전부터 꿈꾸던 원전 설계 기술 자립을 위해 도왔다. 당시는 국내 원자력공학과에서 배출하는 박사는 5명밖에 되지 않던 시절이다. 카이스트는 1년에 10명씩 박사 과정을 선발했으니, 원자력 분야의 많은 인재가 카이스트로 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카이스트에서 원자력 발전소 건설의 기술 자립에 힘쓰면서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했다. 정답은 간단했다. 지식을 전달하는 교수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실천하는 복음 전도자가 되는 것이었다.
90년 카이스트가 대전으로 이전한 후에는 매주 금요일 기독 학생 20~30여명과 함께 대전역을 나갔다. 전도지와 도시락을 나눠주며 복음을 전했다. 그때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만났던 과학자가 있었다. 원자력안전기술원 초대 원장이셨던 이상훈 박사님이었다.
***[역경의 열매] 장순흥 (11) 미국서 배운 원전 기술, 석박사 과정 수업에 녹여내
이후 졸업한 학생들 한전에서 크게 활약
틈틈이 꽃동네 전산시스템 설치 돕고
전도현장 누비다 나만의 전도법도 고안
장순흥(앞줄 왼쪽 다섯 번째) 한동대 총장이 1983년 서울 근교에서 카이스트 원자력공학과 학과 창설 교수인 전문헌(앞줄 왼쪽 여섯 번째) 교수, 석사과정 학생들과 야유회를 갖고 기념 사진을 촬영했다.
원자력안전기술원 초대원장이었던 이상훈 박사님은 국내 원자력 안전 규제의 기틀을 놓은 분이다. 한국은 원자력 발전소 영광 3, 4호기(현 한빛 3, 4호기) 건설을 계기로 원전 설계, 제작, 건설 기술에서 자립했다. 안전 규제 수준도 국제적 수준이 됐다. 이때 원자력 안전 규제 기준을 만들다시피 한 분이 이 박사님이었다.
카이스트 원자력공학과 교수로 있을 때 나는 매주 월요일 오후면 이 박사님을 만났다. 그는 원자력의 생산 및 이용에 따른 재해로부터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 1990년 설립된 원자력 안전 규제 전문기관의 수장이었다. 이 박사님은 나와 나이 차가 스무 살가량 났지만 늘 깍듯이 대해줬다. “장 교수님, 노심 설계에서 이 방법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아, 박사님 그것은 냉각재 상실사고 해석부터 처리하고 가야 합니다.”
나는 MIT와 미국 벡텔사에서 습득한 원전 설계 기술의 핵심을 카이스트 석박사 과정 수업에 녹여냈다. 특히 원자력 기술 자립의 원년 멤버라 할 수 있는 고 한필순 박사와 이 박사에게 강조했던 노심 설계, 원자로 계통 설계, 핵연료 설계 방법의 깊이 있는 이야기도 그대로 전수했다.
카이스트를 졸업한 학생들은 한국전력에 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간부가 되는 제도가 있었다. 한전이 카이스트에 매우 우호적이었는데, 이런 분위기가 기술 자립에 큰 도움이 됐다. 또한 연구소 연구원들을 위한 연구원 석박사 과정도 생겼다. 어느 해는 카이스트에서 배출한 원자력 박사 수가 그때까지 한국에서 나온 원자력 박사 총 수와 같을 때도 있었다.
카이스트 석박사 과정이 성공했던 이유는 노심 설계나 원자로 계통 설계의 주역이 모두 연구원 과정생이었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문제 중심 프로젝트 수업을 통해 배우고 연구한 것이 현장에서 팀워크로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82년 귀국하고 보람을 느꼈던 일도 있었다. 84년 충북 음성의 꽃동네 회장인 오웅진 신부를 만났는데, 한날은 이런 요청을 했다. 꽃동네에 100만명의 회원을 관리할 수 있는 전산시스템을 설치해 달라는 것이었다. “장 교수님, 우리 꽃동네가 후원 회원을 관리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전산시스템을 좀 설치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멋도 모르고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해 “알겠습니다” 하고 덜컥 약속했다.
지금 생각하면 무엇을 믿고 그랬는지 모르겠다. 시스템을 개발하는 데 막대한 비용과 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가능하다는 믿음이 있었다.
설치에 필요한 큰 금액을 도와줄 후원자가 필요했다. 우여곡절 끝에 최종적으로 현대전자 정몽헌 회장이 회사 홍보 차원에서 컴퓨터 서버 프린터를 아주 싼 가격에 설치해줬다. 그것도 전산 시스템 설치 후 회비가 들어오면 천천히 내는 조건이었다. 주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전도현장을 누비다가 2000년 초에 나만의 전도법을 고안했다. 성경을 5분 이내에 요약해주는 ‘5C 전도법’이었는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역경의 열매] 장순흥 (12) ‘5C 전도법’ 개발… 믿지 않는 이들에 확실한 복음 전달
성경의 가치와 중요성 대부분 잘 알아
5분 이내로 성경 요약해 알려준다 하면
가벼운 마음으로 귀 기울이고 들어줘
장순흥 한동대 총장이 1994년 한국원자력학회가 개최한 공개토론회에서 원자력 발전을 위한 장기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바쁜 일과 속에서도 대전역 전도는 계속됐다. 그때 다양한 상황에 대처하는 훈련과 내공, 영적·심리적 공격 등이 있었다. 어떤 공격에도 견딜 수 있는 맷집을 얻게 되는 중요한 시간이었다.
거리 전도도 필요하지만 결실은 관계 전도를 할 때 나타났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5분 이내에 확실히 전달할 수 있을까.’ 그래서 ‘5C 전도법’을 개발했다. 대부분 성경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해서는 잘 알기에 5분 이내로 성경을 요약해서 알려준다고 하면 가벼운 마음으로 귀를 기울였다.
“첫 번째 C는 창조(Creation)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하나님 형상을 닮은 인간,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두 번째 C는 죄(Crime), 타락(Corruption)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본인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고 했는데, 인간은 뱀의 꾀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는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인간을 널리 사랑하셔서 십계명과 선지자를 보내시지만, 인간은 계속해서 죄를 짓습니다. 결국 구약에서 메시아를 보내시겠다고 예언하십니다.
세 번째 C는 예수 그리스도(Christ)입니다. 신약을 보면 예수님은 우리 죄를 사하기 위해서 구세주로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후 3일 만에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으로 승천하시는 놀라운 기적을 보게 됩니다. 특히 요한복음 3장 16절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죄를 사하시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복음의 핵심을 전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C는 교회(Church)입니다. 사도행전은 교회가 확장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마지막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머무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해서 교회가 생겼는데 교회가 확장됨으로써 로마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확장됩니다.
마지막 C는 완결(Completion)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결국 세상의 완결이 이루어지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인해 완결됩니다. 그때 새 하늘과 새 땅, 즉 천국이 오게 됩니다.”
1980년대 원자력연구원과 한전 간 관계가 그리 좋지 않았다. 원자력연구원은 과학기술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한전은 동력자원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소속이었기 때문에 양쪽 기관을 설득하는 게 쉽지 않았다. 나보다 늦게 카이스트 원자력공학과에 부임한 윤용구 이병휘 교수님이 양쪽 부처를 설득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전문헌 교수님도 학과 창립과 초기 운영 방향에 큰 공헌을 했다.
연구원 과정 수업에는 프로젝트 수업이 많았다. 수업에는 원자력 발전소를 설계하는 인력과 안전 규제를 하는 인력이 함께 수강했다. 그래서 수업시간 서로 허심탄회하게 논의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것이 바른 방향으로 기술을 개발하게 하고 안전 규제 실력도 높이는 계기가 됐다.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한국 원자력발전소 설계에 안전감압장치를 적용한 것이었다.
***[역경의 열매] 장순흥 (13) 내 이름 딴 ‘장스 밸브’ 설치로 원전 기술 자립 성공
원전 시공 전 안전성에 결정적 문제 발견
한국 기술력 소개하며 미 CE와 한전 설득
완공 2년 앞두고 ‘설계 변경’ 답변 받아내
장순흥(왼쪽 세 번째) 한동대 총장이 1999년 오스트리아 빈 국제원자력기구(IAEA) 본부에서 열린 국제원자력안전자문단(INSAG) 회의에서 전문위원으로 참석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1982년 미국 벡텔사에서 근무할 때 웨스팅하우스의 ‘쓰리 루프’(3-loop)형 원자력 발전소를 경험했다. 반면 한국의 원전기술 자립 대상 사업은 미국 CE사의 시스템80이었다. 1300MW급 원전을 1000MW로 줄여 한국에 가져오기로 했다. 원전 시공을 하려면 반드시 확률론적 안전성 평가라는 것을 해야 한다. 이것은 사고 전개 시나리오를 분석해서 위험도를 정량적으로 분석하는 안전성 평가방법이다.
‘어떻게 하면 원자력 발전소의 중대 사고를 줄일 수 있을까. 만일 사고가 발생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완화할 수 있을까.’ 이런 관점에서 시스템80 원전을 분석했다. 그 결과 원전이 여러 가지 장점이 있었지만, 원자로 계통의 압력을 낮추는 안전감압장치가 없다는 결정적 문제를 발견했다.
안전감압장치는 원자로와 냉각계통의 압력을 낮춰 과압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냉각수가 원활하게 투입되도록 돕는 장치였다. 카이스트 원자력공학과 석박사 과정 학생들과 원전설계 수업을 하면서도 시스템80 원전을 놓고 토론 수업을 하는 데도 이 문제가 가장 큰 결점으로 나타났다.
“교수님, 시스템80에서 안전감압장치가 없으면 원자로 냉각계통이 고압 상태가 됩니다. 그러면 원자로 용기에 균열이 생겨 노심용융물이 격납건물 내로 분사되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이렇게 되면 격납건물의 온도와 압력이 급격하게 상승해 건물 손상이 생깁니다.” “여러분이 시스템80의 문제를 잘 봤습니다.”
문제는 CE사와 한전을 설득하는 게 힘들다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원전을 설치할 때도 안전감압장치를 설치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도 하지 않는 장치를 유독 한국에서 해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안전을 위해 무조건 해야 합니다.” “추가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물러설 수 없었다. 안전은 원자력 발전의 최우선 가치였다. 원자력연구원과 CE 관계자를 만나 설득하고 토론회도 열었다.
“저는 미국 MIT에서 액체금속로의 안전성 평가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한국에는 나와 같은 원자력 전문가가 많습니다. 한국의 원자력 기술력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올라섰습니다. 내가 보기엔 영광 3,4호기(현 한빛 3,4호기) 설계는 당신들의 실력과 대등하다고 봅니다.”
나는 학계와 당시 동력자원부에 문제 제기를 계속했다. 결국 발전소 완공 2년을 앞두고 CE사에서 답변이 왔다. “프로페서 장, 당신의 뜻대로 설계를 변경하겠습니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95년쯤 영광 3,4호기가 완공됐고 원자력 발전소 기술 자립을 이뤘다. 한전에선 “우리가 참조했던 시스템80보다 중대 사고가 일어날 확률을 10분의 1로 획기적으로 줄어들었다”고 홍보했다. 지금도 그 장치는 내 이름을 따서 ‘장스 밸브’(Chang’s valve)라고 부르고 있다.
학회에 이런 사실이 알려지고 한국 원자력 산업의 위상이 많이 높아졌다. 나는 92년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국제원자력안전자문단(INSAG, International Nuclear Safety Advisory Group) 위원으로 위촉됐다.
***[역경의 열매] 장순흥 (14) 카이스트 교회·선교 사역 맡아 많은 기독 교수 배출
학교 이전으로 대전에서 신앙생활 하게 돼
소수로 시작한 카이스트 기도회 크게 부흥
교회 출신 졸업생들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장순흥(왼쪽 두 번째) 한동대 총장이 2007년 카이스트선교회 임원과 함께했다. 장갑덕 카이스트교회 목사, 장 총장, 고정훈 루미컴 대표, 이용훈 UNIST 총장, 노시경 카이스트선교회 간사(왼쪽부터).
1991년 카이스트가 서울 홍릉에서 대전 대덕으로 이전하면서 나 역시 서울 덕수교회를 떠나게 됐다. 당시는 교회가 사회봉사관을 건립하고 3부 예배를 신설하는 등 부흥하고 있었다. “손인웅 목사님, 학교가 대전으로 이전하면서 부득이하게 그곳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저런, 덕수교회에 꼭 필요한 분이신데 아쉽습니다. 장 교수님.”
대전에서 첫 신앙생활을 했던 곳은 한밭교회였다. 고 김덕복 목사님이 담임목사로 시무하시던 교회였다. 김 목사님은 원래 오스트리아 비엔나 한인교회를 담임했다. 그러다 대전으로 옮기게 됐다. 김 목사님과 인연은 내가 국제원자력기구(IAEA) 업무 때문에 오스트리아 빈을 자주 방문하면서 시작됐다.
95년에는 김동명 목사님과 ‘죽으면 죽으리라’의 저자 안의숙 사모님이 대전 대덕연구 단지에 교회를 개척했다. 나는 김 목사님의 강력한 권고로 당시 목사님이 이끌던 성경공부에 참석했다. 목사님은 하나님의 심정, 돌아온 탕자, 용서받은 탕자의 자세 등을 강조했다. 그 당시 목사님과 함께한 성경공부를 통해 많은 은혜를 받았다. 마침내 김 목사님이 마지막으로 개척한 새누리교회에 출석하게 됐다.
또한 케냐 선교사로 떠난 임종표 목사님에 이어 카이스트교회를 헌신적으로 섬긴 장갑덕 담임목사님과 함께 교회 지도 교수로 섬기게 됐다. 90년대에는 카이스트 교회에서 함께 사역하던 존경하는 두 분의 교수님께서 각각 다른 학교로 떠나셨다. 김인수 교수님은 고려대로, 김영길 총장님은 한동대로 떠나시게 됐다. 두 분의 거목이 떠난 뒤 나는 카이스트교회와 카이스트 선교 사역에 관련된 많은 일을 맡게 됐다.
카이스트교회 기도회는 90년대부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소수의 인원만 모였는데 2000년 이후 많은 이들이 참석했다. 당시 100명 가까운 교수님이 후원해 주실 정도로 부흥했다. 특히 이용훈 교수님(현 UNIST 총장) 등이 기도회, 선교회의 훌륭한 동역자로 섬겨 주셨다. 지금도 카이스트선교회는 많은 선교사를 배출하고 후원하고 있다. 또 카이스트교회 출신의 많은 카이스트 졸업생이 졸업 후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면서 많은 기독 교수들이 배출됐다. 한동대에도 카이스트교회 출신 교수들이 다수 재직하고 있다.
한국형 경수로는 90년대 중반 완성됐다. 차세대 한국형 경수로(APR1400) 사업이 92년 시작돼 2002년 완성, 표준 설계 인가가 마무리됐다. 2009년 UAE에 수출했던 그 유명한 원전이 바로 이 노형이다. 나는 이 사업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했다. 특히 개념 설계와 표준 설계 인가에 관여했다.
APR1400 사업이 마무리돼 갈 때 학교에서 이런 제안이 들어왔다. “장 교수님, 카이스트 발전을 위해 헌신하지 않겠습니까. 원자력 발전소를 궤도에 올려놓은 추진력이면 학교 경영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래서 2001년부터 카이스트의 행정 보직을 맡게 됐다. 이후 10년간 기획처장 교무처장 대외부총장 교학부총장 등을 맡으며 카이스트와 한국 대학 사회 혁신이라는 새로운 사명을 맡게 됐다.
***[역경의 열매] 장순흥 (15) 연공서열 버린 ‘테뉴어 제도’… 교육의 질·성과 높여
미 유수대학처럼 최고 교수진 확보 위해
서열 관행 따르지 않고 심사 강화하자
좋은 교수 많아지고 예산도 7배 급성장
장순흥(오른쪽 다섯 번째) 한동대 총장이 2006년 7월 서남표(오른쪽 일곱 번째) 카이스트 총장의 취임식에 참석했다. 단상에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던 로버트 러플린 총장이 이임사를 밝히고 있다.
47세이던 2001년부터 카이스트 기획처장을 시작으로 학교 주요 보직을 맡았다. 당시 홍창선 총장님이 재직 중이었는데 나노 시대가 시작됐다. 카이스트는 나노펩(나노종합기술원)을 유치했다.
2004년에는 의과학대학원을 유치했다. 연구를 원하는 의사들을 뽑아서 의사들의 연구 능력을 향상할 수 있었다. 또한 정문술 선생의 기부를 통해 바이오시스템학과(현 바이오 뇌공학과)를 설립해 바이오와 IT를 처음으로 융합한 학과를 만들었다.
2004년부터 2010년까지 두 분의 외국 국적의 총장을 모시면서 대외부총장과 교학부총장으로 일했다. 미국 스탠퍼드대 출신의 로버트 러플린 총장 때는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 프로젝트를 유치했다. 이를 통해 카이스트는 연간 200억원씩 5년간 총 1000억원의 국고를 유치했다. 이 사업을 통해 교수의 테뉴어(정년보장) 제도 강화, 영어강의 강화, 건물 개보수까지 했다.
후임 서남표 총장도 개혁 사업에 앞장섰다. MIT 출신의 서 총장은 카이스트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교육에 큰 개혁을 이뤘다. 일부에서는 서 총장의 강력한 개혁 정책에 대한 비판도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그분 이후 대학 교육의 질이 훨씬 높아졌다는 평가가 많다.
특히 가장 힘들고 기도도 많이 했던 과업은 교원 테뉴어 및 혁신적인 교원 임용 시스템이었다. 반대도 심했고 갈등도 컸기에 스트레스가 컸다. 그러나 세계 정상급 대학은 이미 최고의 교수진 확보를 위해 테뉴어 심사를 강화하고 있었다. 미국 하버드대는 상위 20%만, 스탠퍼드대는 20~30%만 테뉴어를 보장했다. 반면 한국은 연공서열에 따른 혜택 관행 때문에 심사 통과율이 100%에 육박했다.
2007년 테뉴어 제도를 시행했는데, 한번은 심사 대상자의 3분의 1을 재계약하지 않은 때도 있었다. 재계약을 못 한 교수들은 다른 대학으로 추천하거나 초빙교수를 맡기는 등 후속 조치에 신경 썼다. 교육의 질과 성과는 상승했고 훌륭한 교수가 더 많이 임용됐다.
당시 교수가 400여명이었다. 서 총장은 늘 “학과 교수 정원을 없앨 테니 좋은 후보가 있으면 다 올리라”고 했다. “장 부총장님, 좋은 교수를 뽑으면 연구비를 많이 벌어옵니다. 재정적으로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사람만 좋으면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교수는 돈을 벌어오는 사람이지 돈을 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교수는 오히려 자산입니다.” 나와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 후 교수 자원이 600명으로 늘어났다.
내가 처음 보직을 맡은 2001년만 해도 카이스트의 예산이 1000억원이었지만, 2010년엔 7000억원에 육박했다. 양적으로 10년 사이에 7배 성장을 이룬 것이다.
외국 학자의 눈에는 한국의 고등학생, 특히 고3 학생들은 너무나도 불행해 보였다고 한다. “장 부총장님, 한국 학생들은 온종일 학교 교육을 받고도 학원 수업에 과외까지 받고 새벽 2~3시 지쳐서 잠들더군요. 부총장님이 직접 대학 입시 제도를 개혁해 보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학 입시 개혁을 담당했고 그때 탄생한 것이 바로 입학사정관 제도였다.
***[역경의 열매] 장순흥 (16) 입학사정관 전형 고안해 한국의 교육환경 바꿔놔
수능에만 목숨 거는 주입식 교육서 탈피
자기 주도 학습과 창의력·잠재력을 평가
일반고 확대 적용, 현 수시 제도의 근간
장순흥(가운데) 한동대 총장이 2007년 4월 카이스트 교학부총장 시절 입시제도 개선 관련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장 총장 왼편은 이광형 당시 교무처장으로 현재 카이스트 총장을 맡고 있다.
2005년부터 나는 카이스트 교학부총장으로 로버트 러플린, 서남표 총장이 강조하던 대학 입시 개혁을 총괄했다. 대학수학능력시험 같은 천편일률적인 입시 제도에선 희망을 발견할 수 없다고 봤다. 그래서 다양한 학교 활동과 인성, 수행 과제 등을 평가하는 학교생활기록부를 살펴보는 입학사정관 전형을 고안해 2007년부터 카이스트에서 시행했다. 이것이 오늘날 수시 입시제도의 뿌리라 할 수 있다.
그 당시 고등학생은 대학입시의 절대적인 지표인 수능에만 목숨을 걸었다. 그렇다 보니 학교에서 오후 6시가 되어도 집에 못 가고 야간 자율학습에 학원까지 다녔다. 학생은 학생대로 시험을 잘 보기 위해 과도한 주입식 교육에 힘들어했다. 학부모는 학부모대로 과도한 사교육비를 감당해야 했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려면 학원을 통해 시험 점수를 받는 현실을 과감히 바꿔야 한다. 카이스트가 앞장서 학교 수업에 충실하고 자기 주도 학습능력이 있는 학생을 선발한다면 파급력을 미칠 것이다.’
그래서 입학사정관제를 과학고부터 적용했다. 전국의 과학고 교장을 초청해 일찍 마치는 학교, 자기 주도 학습을 강조했다. 운동 독서 인성 체력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래서 학교생활기록부, 수능시험, 대학별 고사라는 성적 중심의 획일적 학생 선발 체계를 과감히 탈피했다. 카이스트의 인재상인 창의력, 잠재력을 가진 학생을 선발하기 위해 서류 평가와 심층 면접을 했다. 심층 면접은 과학기술 글로벌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 개인 면접과 토론, 토의 면접을 했다. 타인과 원활한 소통 능력, 논리 전개 능력, 창의적 아이디어를 도출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지 확인했다. 첫 입학사정관 전형은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2008년부터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과학고에 시범 운영하던 입학사정관 제도를 전국 일반고에 확대 적용하자고 했다. 그래서 카이스트에서 일반고 학생 200명을 선발했다. 이것이 오늘날 수시 제도의 근간이 됐다.
대학입시 개혁의 핵심은 대학·대학원 교육이 아닌 입시 교육에만 과도하게 집중된 한국의 교육환경을 바로잡는 데 있다. 중등교육 과정의 피로도를 과감히 줄이고, 스스로 공부하는 자기 주도 학습능력을 고등교육 과정에서도 꾸준히 학습을 이어가는 것이 핵심이다. 이런 목표와 비전을 제시하며 개혁을 이끈 결과 카이스트는 교육 예산 캠퍼스 확장 등에서 괄목한 성장을 이루었다.
최근 입시 비리 사태 때문에 ‘과정 중심’ 평가인 수시 제도를 줄이고 이전처럼 ‘결과 중심’ 평가인 정시를 확대하자는 목소리가 높다. 수능과 정시 비중이 높아지면 어떻게 될까. 소위 교육 특구라 불리는 서울 강남, 목동 8학군 등지로 학원 수요가 다시 몰리고 수도권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게 될 것이다.
반면 수시 제도와 입학사정관제가 활성화되면 사교육 기관이 몰린 교육 특구 지역 수요가 감소한다. 지방과 수도권의 고등교육과 지역균형 발전이 이뤄질 수 있다. 그래서 한국의 교육문제는 국가 균형발전의 결정적 요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물론 제도가 악용될 수도 있다. 문제점은 수정·보완해가며 정시와 수시라는 양대 축으로 입시제도를 운영해야 한다.
***[역경의 열매] 장순흥 (17) UAE 원전 수주… 위축된 연구개발 분위기 살아나
금융위기로 침체된 과학기술 연구 분야
해외 원전 수주로 반전시키려 입찰에 총력
지도층 직접 만나 안전 문제 논란 설득해
장순흥(오른쪽) 한동대 총장이 2010년 5월 카이스트 교학부총장 시절 한국형 원전수출에 기여한 모하메드 빈 자이드 알 나흐얀 UAE 아부다비 왕세자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한 뒤 악수하고 있다.
2007~2008년 카이스트 부총장직을 수행하며 테뉴어 제도, 입학사정관 제도와 같은 과감한 개혁을 했다. 많은 분이 학교에 좋은 인상을 받았는지 류근철 박사님과 김병호 박병준 회장님이 각각 578억원, 300억원을 쾌척하고 KI 건물을 기부해주셨다.
이후 온라인 전기차, 모바일 하버 같은 굵직한 정부 프로젝트를 따내며 카이스트의 전성기를 이뤘다. 2009년은 특히 나에게 의의가 컸던 해다. 직전 해에 금융위기가 터졌고 그 여파로 연구개발(R&D)이 상당히 위축되는 분위기였다.
서남표 총장님의 호출이 왔다. “장 교수, 이럴 때일수록 과학기술 R&D를 더 활성화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청와대와 관계자를 접촉해 뜻을 전해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뭐를 더 해야 하나’하는 고민을 안고 청와대와 정부 관계자를 많이 찾아다녔다. 그때 만났던 분들이 한결같이 “원자력 산업에서 뭔가를 해내면 좋겠다”고 의견을 던졌다. 당시 윤진식 청와대 정책실장이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그해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사업의 입찰평가(Bid evaluation)가 있었다. ‘아, 이거다.’ 그렇게 원자력 사업이 정말 전광석화같이 진행됐다.
당시 UAE 원전 사업을 알아보니 입찰 평가가 2009년 안에 다 끝나기로 돼 있었다. 그래서 윤 실장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번 프로젝트는 우리가 수주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정부에서 강력히 도와주십시오.” 사실 UAE 원전 수출 때 이명박 대통령이 많은 역할을 했다. 하지만 대표단 구성 및 실질적으로 많은 지원을 해준 사람은 윤 정책실장이었다.
나는 대표단의 교육담당으로 참여했다. 기본적인 임무는 UAE의 원자력 고급 인력을 양성하는 방안을 논의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론 APR1400의 안전성에 대한 설득이었다. 그 일을 내가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우선 대표단 중에 원자력 안전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특히 2002년 표준설계인가 때 나는 안전 전문위원장으로 참여한 경험이 있었다. APR1400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 때문에 원자력 안전에 관련해 UAE의 지도층에게 직접 안전 문제를 설득했다.
UAE 측에서 송곳 같은 질문을 던졌다. “APR1400이 한국 표준설계인가만 받은 거 아닙니까.” “미국 설계인증도 얼마든지 받을 능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APR1400’이 미국 인증을 받은 ‘System 80플러스’보다 개선된 기술이 훨씬 더 많습니다.”
UAE에서 문제를 제기한 이유가 있었다. 한국의 원전 기술이 다른 국가보다 가격은 싸지만, 안전성은 떨어진다는 소문이 있었다. 경쟁사에서 “한국 원전은 가격만 싸지 안전하지 않다”고 계속 공격해왔다. 그래서 단순하게 ‘설계 인증받은 System80 플러스보다 더 개선됐다’ ‘한국에서 신고리 원자력발전소 3, 4호기가 곧 가동한다’ ‘APR1400의 거대 실험 장치인 아틀라스는 이미 가동되고 있다’는 세 가지 논리로 파고들었다. 지금도 2009년 12월을 잊을 수 없다. “원전 수주를 한국과 하겠습니다.”
***[역경의 열매] 장순흥 (18) 후쿠시마 원전 사고, 부실한 사후 대처에 피해 눈덩이
숨기기에 급급 정보 공유 않고 눈치만
사고 매뉴얼도 없어 대피 과정 큰 혼란
반면교사 삼아 안전 위해 더 노력해야
장순흥(오른쪽) 한동대 총장이 2012년 2월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 조사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할 때 다카하시 다카시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장과 함께했다.
2009년 12월 UAE 원자력발전소의 건설·운영권을 따낸 원전 수주는 대한민국 원자력 역사에서 획기적 사건이었다. 원전 수주 이후 UAE와 건설 국방 방산 의료 등 다양한 분야의 협력을 이뤘고 중동과 새로운 협력 분야가 생겼다.
2011년 3월 11일 UAE 원전 기공식에 참석하려고 인천공항을 떠날 때였다. “긴급 속보를 알려드립니다. 일본 후쿠시마에서 대지진이 발생했습니다.” 동일본 대지진의 여파는 컸다. 후쿠시마에 있던 원자력발전소가 손상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나는 한국원자력학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그해 말 5명으로 구성된 후쿠시마 원전사고 조사위원회 국제자문단의 자문위원으로 선임됐다. 리처드 메저브 전 미국 원자력규제위원장과 앙드레 클라우드 라코스테 프랑스 원자력안전규제당국 의장, 라스 에릭 홈 국제방사선방호위원(ICRP) 전 위원장, 차 쿼한 중국 환경부 수석 엔지니어였다.
이듬해 2월 사고 현장을 방문했다. 조사위원회에 참석하면서 자꾸 드는 생각이 있었다. ‘이 사람들이 뭔가를 숨기려 하는구나.’ 후쿠시마 1호기는 쓰나미로 인한 디젤 발전기 침수 몇 시간 후에, 2,3호기의 경우에는 2~3일 후에 중대 사고가 발생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그걸 사고 발생 후 3개월 뒤 중대 사고라고 공식 인정했다.
회의 중에도 다들 조용했다. 서로 눈치만 보고 모르겠다는 말로 일관했다. 이렇게 정보 공유를 안 하고 쉬쉬하는 분위기는 자국민에게 불안감만 증폭시킬 뿐이었다. 나아가 타 국가와의 관계에서도 일본에 대한 불신만 커지게 했다.
알고 보니 일본은 원자력발전소에서 모든 전원이 상실되는 사고에 대한 매뉴얼이 없었다. 사고 초기 방사선 검출 측정에 실패했고 정부와 기관 사이에 비효율적 정보 전달로 측정 데이터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주민 대피 과정에서 혼란이 컸다. 일본 정부는 ICRP의 비상 대피 권고 기준을 보수적으로 잡았다. 그리고 이 기준에 따라 주민 11만명을 대피시켰다.
문제는 이 지역이 시골이라 대부분 노인이었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많은 인원이 대피하다 보니 이동 중 심리적 스트레스나 지병 때문에 몇 분이 돌아가셨다. 방사선 피해로 돌아가신 분은 하나도 없는데 말이다. 뒤늦게 대피한 사람도 있었다. 그렇지만 방사선 때문에 신체 건강에 이상이 생긴 경우는 하나도 없었다.
일본 정부가 대피 기준으로 잡은 방사능 피폭량(20mSv/년) 기준 역시 인체 영향을 기준으로 잡은 것이 아니었다. 그냥 보수적인 기준이었다. 실제로는 옥내 대피 권고만으로도 충분했다. 오히려 방사성 물질이 많은 사고 초기에 밖으로 대피하는 것보다 어느 정도 사고가 진정된 후 대피하는 것이 노인 사망자를 줄이는 방법이었다.
현장을 보면서 이런 결론을 내렸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천재지변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대비를 소홀히 하고 사후 대처가 부실해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졌다. 이것은 전형적인 인재다. 각국의 원자력 종사자는 원자력발전소의 절대 안전을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
***[역경의 열매] 장순흥 (19) 원자력 옹호가 빌 게이츠, 한국형 원자로에 큰 관심
지구온난화 최적 해결책이란 믿음으로
기술 자립 경험 공유하고 싶다며 초청
연구 개발·공동 설계까지 합의하게 돼
장순흥(오른쪽) 한동대 총장이 2012년 8월 미국 시애틀 테라파워 사무실에서 빌 게이츠와 원자력 발전 기술 보급을 위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
2012년 8월,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인 빌 게이츠의 초청을 받아 미국에 갔다. “마이크로소프트 경영에서 물러나서 자선사업을 하다 보니 사람들 생활에서 전기가 무척 중요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OECD 통계를 분석해봤더니 전기가 제일 값싼 나라가 바로 한국이었습니다. 에너지 자원이 하나도 없는 나라가 어떻게 전기를 싸게 공급할 수 있는가 확인해보니 그 이유가 바로 원자력이더군요.”
당시 한국은 원자력발전소를 20기 이상 돌리고 해외에 수출까지 한 원자력 강국이었다. 기후변화 협약을 고려하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기를 싸게 공급할 수 있는 건 현실적으로 원자력밖에 없다고 했다. 그래서 한국 원자력의 핵심 맴버인 사람들을 찾다가 내가 초대된 것이었다.
그는 한국의 원자력 발전과 기술에 관심이 대단했다. 특히 한국의 기술 자립 경험을 공유하고 싶어 했다. 가장 관심을 가진 기술은 미래형 액체금속로인 소듐냉각고속로(SFR)였다.
2012년 미국 시애틀로 초청받은 이후, 2013년에는 빌 게이츠가 한국에 와서 또 한 번 만나게 됐다. 그때 박원석 당시 원자력연구원의 소듐냉각고속로 사업단장도 동석했다.
그렇게 빌 게이츠가 2013년 한국 방문을 계기로 소듐냉각고속로 설계를 협력하기로 논의했다. 아쉬운 것은 연구 개발 및 공동 설계를 같이하는 것까지는 합의했는데 건설까지는 성사가 안 됐다.
빌 게이츠는 지금도 대표적인 원자력 옹호자이다. 그가 원자력을 선호하고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었다.
첫째, 화석에너지는 이산화탄소 같은 온실가스를 배출하기 때문이다. 빌 게이츠는 기후변화 대응에 대한 열렬한 옹호자다. 그는 지구온난화 문제로 화석에너지는 점차 줄여나갈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둘째, 신재생 에너지가 결코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신재생 에너지는 간헐적으로 생산된다는 점 때문에 전기 저장 시설이 필요하다. 그런데 전 세계 배터리를 모두 끌어모아도 가장 전기가 많이 필요할 때의 전력을 10분밖에 충당하지 못한다. 그 때문에 전기를 대량으로 안정적으로 공급하는데 신재생 에너지는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현실적인 에너지원이 원자력이라는 것이다. 원자력만이 원활하고 안정적으로 대량의 전기를 공급할 수 있고, 가격도 저렴하며 온실가스도 없으니 지구온난화 속도를 늦출 수 있는 최적의 해결책이라는 것이 빌 게이츠의 생각이었다.
빌 게이츠는 원자력 공학 분야의 전문가인 나와 기술적ㆍ이론적 의견을 주고받을 정도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원자력에 대해 스스로 공부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 마크 저커버그처럼 세계를 변화시킨 사람들은 무엇이 다른 것일까.’ 나는 당시 카이스트 부총장직을 맡고 있었기에 세상을 변화시킬 인재를 만들려면 학습자(학생)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세 사람은 공통점이 있었다. 대학은 중퇴했지만, 평생 스스로 필요한 분야를 찾아 공부하는 자기 주도적 학습능력과 문제 발견, 해결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장순흥 (20) ‘하나님의 대학’ 한동대 차기 총장 권유에 고민
개교 초부터 어려운 일 함께하며 관심
김영길 초대 총장도 강력하게 권해
“주님 원하시는 길이 어디입니까” 기도
장순흥(오른쪽) 한동대 총장이 2014년 2월 경북 포항 한동대에서 열린 2대 총장 취임식에서 김영길(왼쪽) 초대 총장, 김범일 전 이사장과 함께했다.
2012년 12월 19일 실시된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됐다. 대통령 당선인은 나에게 인수위에서 함께 일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교육과 과학기술 분야를 책임지는 인수위원으로 참여했다.
인수위 활동을 통해 박근혜 정부의 핵심 사업이었던 미래창조과학부(현 정보통신과학기술부)를 기획·발족하게 됐다. 2013년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면서 정부 내에서 과학기술 분야의 중요한 일들을 감당해 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았다. 박근혜 정부 출범 시 과학기술 분야에 중요한 정책들을 제시한 사람으로서 막중한 책임감이 느껴졌다.
그뿐만 아니라 카이스트에서도 해야 할 일들도 많았다. 카이스트에서 30년간 연구와 교육에 전념을 다 한 교수이자 10년 이상 주요 보직을 경험했기에 카이스트의 연구 교육 행정 정책수립 등 여러 분야에서 할 일이 많았다.
원자력 분야에서도 UAE원전 수출 이후 진행 예정이던 여러 연구 등 할 일이 산적했다. 비슷한 시기 몇몇 한동대 이사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장 교수님, 차기 한동대 총장에 응모해 주십시오.”
개교 초기부터 숱한 어려움을 이겨내시고 한동대의 놀라운 발전을 끌어낸 김영길 총장님도 전화해서 강력히 권유했다. “이제 나는 한동대 총장으로서의 그 임무를 내려놓습니다. 장 교수께서 차기 총장 공모에 응해 주십시오.”
사실 나는 한동대 개교 초기부터 김영길 총장님, 노희천 교수와의 인연으로 많은 관심을 두고 있었다. 특히 97년 한동대가 무척 어려울 때 학교 측에 ‘갈대상자’ 후원자 모집 아이디어를 제공했고 학교가 재정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2007년부턴 한동대 이사, 이사장으로서 학교 관련해 많은 일을 하고 있던 시기였다. 한동대가 가진 경쟁력과 장점부터 어려움과 고난에 이르기까지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을 책임지고 미래창조과학부라는 큰 그림을 그린 사람으로서, 교육과 연구를 이끌어 온 카이스트 교수로서, 그리고 국가의 에너지 산업을 선도하는 원자력 전문가로서 고민이 컸다. 마지막으론 ‘하나님의 대학’인 한동대가 대내외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시기,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하나님의 대학으로서 다시금 우뚝 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몰려왔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에 대해 혼란스럽던 시기였다.
국가적으로 과학기술 분야의 주요 요직으로 갈 수 있는 길이 많았다. 그 길은 모두가 생각하는 넓고 편한 길이었다. 하지만 한동대 총장직은 달랐다. 내부적으로 선린병원 분리로 발생한 부채 해결 등의 문제가 있었다. 또 지난 19년간 한동대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세계적인 글로벌 대학으로 이끌어 오신 김영길 총장님 이후, 첫 변화를 겪어야 하는 자리라 부담감도 상당했다.
대외적으로는 학령인구 감소와 반값 등록금 문제 등 재정적으로 지방의 사립대가 감당해야 하는 어려움이 산적하던 시기였다. 이때 나는 말씀을 붙잡고 기도로써 나의 갈 길을 알려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하기 시작했다. “주님, 제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주님이 원하시는 길이 어디입니까.”
한동대 이사회는 두 차례 총장 공모에도 적임자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장순흥 (21) 한동대 총장 부임… ‘문제 해결 중심 교육’ 강조
‘하나님의 대학’ 방향과 정체성 고민하다
‘세상을 바꾸는 10대 프로젝트’와 더불어
재능·창의 발휘할 수 있는 교육정책 발표
장순흥(왼쪽) 한동대 총장이 201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미네르바대학 사무실에서 벤 넬슨 설립자와 악수하고 있다.
“주님 뜻이라면 지원하겠습니다.” 주님 뜻이었다. 한동대는 두 번의 총장 공모를 했지만 적당한 후보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세 번째 총장 공모에 응했다. 그리고 한동대 역사상 두 번째 총장에 선임되었다. 카이스트에서 10년간 주요 보직을 맡으면서 얻게 된 교육 행정의 철학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두 외국인 총장에게서 배운 혁신적인 정책을 한동대에서 펼칠 수 있게 됐다.
2013년 말, 한동대 총장 내정자로 확정됐다. 학교가 앞으로 추구해야 할 방향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고민하고 기도했다. ‘총장으로서 한 학교를 이끌어 나가는 것뿐만 아니라 한동대가 하나님의 대학으로서 정체성을 더욱 공고히 해야 한다.’ 고민과 기도 끝에 발표한 것이 ‘세상을 바꾸는 10대 프로젝트’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지역발전 프로젝트 ②통일한국 프로젝트 ③아프리카 프로젝트 ④창업활성화 프로젝트 ⑤스마트 파이낸싱 프로젝트 ⑥차세대 ICT(정보통신기술) 프로젝트 ⑦차세대 자동차 및 로봇 프로젝트 ⑧지속가능한 에너지·환경 프로젝트 ⑨차세대 의식주 프로젝트 ⑩건강-복지 프로젝트.
이와 더불어 실천하는 인성·영성, 문제해결 중심교육, 각 사람의 달란트를 통해 창의력과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교육시스템 구축 등의 교육 정책을 연이어 발표했다.
“순흥아, 큰일 났다. 아버지가 위독하다. 빨리 올라오거라.” 2014년 2월 4일, 한동대학교 총장 이·취임식을 시작하기 직전이었다. 곧이어 아버지께서 소천하셨다는 연락이 왔다. 하지만 한동대 역사상 처음으로 실시하는 총장 이·취임식 행사는 여러모로 의미 있는 행사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나는 학교 행사를 먼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행사를 마치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찾아뵐 수 있었다.
총장으로 부임하면서 계속 강조해 온 것은 문제해결 중심교육이었다. 이 교육의 모티브는 유학 시절 첫 번째 시험에서 나왔다. 시험을 하루 앞두고 ‘교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가 무엇일까’ 고민한 끝에 5개 문제를 스스로 찾았고 그 해답까지 구했다. 그것이 다음 날 시험 문제로 그대로 나왔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때 문제해결 중심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이것은 2018년 미국 출장 시 방문한 미네르바대학에서 만난 벤 넬슨 미네르바대학 설립자를 통해서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넬슨은 기존 대학 교육에서 탈피한 새로운 대학 교육 모델을 제시했다. “장 총장님, 저도 문제해결 중심교육을 중점적으로 하는 미네르바대학 커리큘럼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총장 취임 후 끊임없이 문제해결 중심교육을 강조했다. 그 결과 한동대는 교육부가 주관하는 대학교육 혁신지원 사업을 비롯한 다수의 평가에서 최우수 등급(A등급)을 받았다. 각종 소프트웨어 중심대학 등 국고 사업에서도 우수한 성적으로 국고 지원을 받았다.
또한, 다수의 재학생이 LG 글로벌 챌린지를 비롯해 각종 공모전에 지원해 좋은 성적을 거뒀다. 8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런 교육 철학은 한동대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역경의 열매] 장순흥 (22) 낮은 자의 모습으로 섬기는 선순환 전통 26년간 지켜
정직·성실 통한 인성·영성 교육 목표로
선배가 신입생에게 학교생활 알려주고
세족식 통해 후배 섬기는 모습 보여줘
장순흥(왼쪽) 한동대 총장이 2014년 2월 경북 포항 한동대 캠퍼스 안에서 진행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한스트’에서 학생의 발을 씻겨주고 있다.
한동대가 개교 초기부터 강조해온 것은 정직과 성실을 통한 인성·영성 교육이다. 한동대 슬로건인 ‘와이 낫 채인지 더 월드’(Why not Change the World)를 위해 가장 기본은 인성과 영성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학문적으로 탁월하고 우수한 인재라도 인성과 영성이 밑바탕 되지 않으면 세상을 변화시킬 훌륭한 인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김영길 초대 총장님께서 말씀하신 장인 ‘공’(工)자형 교육 모델은 바로 이러한 한동대의 교육 철학에서 시작됐다. 인성과 영성을 바탕으로(一), 학문적 탁월성을 쌓고(I), 그 위에 국제화된 역량(一)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한동대가 추구하는 장인 공(工)자형 교육 모델이다.
한동대는 개교부터 학생들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인 ‘한스트’(HanST)를 주관하고 있다. 재학생 선배들은 한스트를 통해 신입생에게 학교생활을 자세히 알려준다. 하나부터 열까지 낮은 자의 모습으로 섬기는 한동대의 선순환적 전통은 26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선배의 강압적인 말투와 얼차려 같은 건 한동대에서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한스트 때 교수와 선배들이 신입생들에게 세족식을 해준다. 선배가 후배를 사랑하는 가장 한동스러운 모습인 것이다.
훌륭한 인성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려고 한동대는 개교 초부터 현재까지 무감독 양심시험을 치르고 있다. 몇 년 전 설문조사에서 몇몇 학생들은 부정행위의 유혹을 느낀 적이 있다고 했다. 실제로 부정행위를 했다고 응답한 학생도 있었다.
하지만 그 학생도 학교가 추구하는 정직과 성실이라는 인성 교육에 자신의 행위가 잘못된 것임을 인지했으며, 추후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고 깨닫게 함으로써 시험감독을 통해 부정행위를 방지하는 것보다 몇 배 더 큰 효과를 가져온 것이다.
내가 부임한 뒤 ‘한동만나프로젝트’를 실시했다. 한동만나프로젝트는 한동대 학생 중 경제적 이유로 식사를 거르는 학생을 돕는 프로젝트다. 부임 초기 교내 의견을 청취하다가 경제적 어려움으로 식사를 거르는 재학생이 7%나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빨리 이 문제를 해결해야겠다. 보통 3000원인 학생 식당 밥을 경제적 어려움이 있는 학생만 자율적으로 100원만 내고 먹을 수 있게 하면 어떨까.’ 그래서 한동만나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학생들은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양심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적은 학생이 혜택을 보고 있었다. ‘당초 예상보다 훨씬 적은 수의 학생이 이용하고 있구나. 이를 보더라도 한동대 학생들이 매우 정직하구나.’ 학교는 2016년부터 현재까지 4만8000끼니를 제공했다. 약 6억원의 기부금을 통해 지금도 한동만나프로젝트는 계속되고 있다.
한동대에는 선교사 자녀(MK)와 목회자 자녀(PK)가 전체 재학생의 20%를 차지한다. 특히 학생 면담을 하다 보니 선교사 자녀와 미자립교회 목회자 자녀들이 경제적 이유로 원활하게 학업을 이어나가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역경의 열매] 장순흥 (23) 변화하는 사회가 요구하는 진정한 글로벌 대학으로…
국제화는 미래 대학교육 모델 핵심 전략
세계 곳곳서 선교하는 졸업생 많아지고
미 벤처산업 심장부에 한동대 센터 설치
장순흥(오른쪽) 한동대 총장이 2017년 7월 이스라엘 히브리대 내 한동대 센터 개소식을 갖고 에셔 코헨 히브리대 총장과 악수하고 있다.
2014년 한동대 총장 취임 후 대내외적 어려움이 컸다. 광야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길을 찾았다. ‘새로운 대학교육 모델을 제시하라. 변화하는 사회가 요구하는 글로벌 인재를 양성하라.’
글로벌 관점에서 한동대가 서울 밖에 있는 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진정한 국제화는 학령인구 감소를 앞둔 지방대가 살아남는 핵심 전략이었다. 사실 한동대의 영문명은 설립 초기부터 ‘한동글로벌 유니버시티’(Handong Global University)였다. 해외 선교사 자녀(MK)의 입학률이 높았고 MK 재학생 비율도 20%에 이르렀다. 또 한국에 로스쿨 제도가 도입되기 전부터 미국 변호사 양성이 가능한 로스쿨을 운영하고 있었다.
한동대는 개교 당시부터 선교에 깊은 관심과 열정이 있었다. 졸업생 중에 피지 말라위 멕시코 캄보디아 베트남 등 열악한 선교지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많았다.
일례로 2001년 한동대 공간환경시스템 건축선교 동아리 NIBC(Not I But Christ)는 캄보디아에서 교육선교를 하고 있으며, 베트남에선 ‘한동건설’을 설립해 베트남 저소득층을 위한 중저가 아파트를 짓고 있다. 지금까지 1000여 세대의 아파트를 건설했다.
2017년 아프리카 말라위 대양대를 방문했을 때 일이다. 말라위 수도의 숙소를 사용했는데, 낙후된 상수도와 난방시설로 하루에 1시간만 온수를 사용할 수 있었다. 거기서 열매나눔(Merry Year International) 말라위 지부에서 교육사역을 하는 한동대 졸업생 김소정 동문을 만났다.
“말라위에서 사역을 시작한 후 처음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할 수 있어 너무 좋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선교를 위해 수많은 불편함을 감수하는 동문의 자세에 큰 감명을 받았다. ‘아, 이들처럼 어려움을 감수해내며 세계 곳곳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헌신하는 졸업생들이 많다는 것은 한동대가 글로벌하다는 증거다.’
한동대는 한국의 동쪽 해안 도시의 작은 대학이다. 하지만 성경의 성지와 미국 벤처산업의 심장에 한동대 센터를 설치·운영한다면 강한 대학이 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2015년 이스라엘 히브리대를 방문해 학술문화 교류협정을 맺고 지속적으로 교직원과 학생을 파견했다. 히브리대는 이스라엘 총리와 노벨상 수상자를 다수 배출한 인문 공학 창업 명문대다. 아인슈타인이 대학 설립에 기여한 것으로도 유명한 세계 최고의 대학 중 하나다. 2017년에는 에셔 코헨 총장을 만나 히브리대 안에 ‘한동대 현지센터’를 열기로 협정을 맺었다.
2015년 3월엔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크리스천 네트워크를 활용해 현지 스타트업 업체 대표를 만났다. 그리고 한동대 학생 창업 및 투자 유치 설명회를 했다. 이후 매년 ‘한동 스타트업 경진대회’를 개최하고 우수한 아이디어를 낸 한동대 학생 5~10명에게 실리콘밸리 중장기 연수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2019년 8월엔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실리콘밸리 무역관과 협약을 체결했다. 한동대의 글로벌 우수 기술을 세계시장에 내놓고 글로벌 창업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역경의 열매] 장순흥 (24) 한동대, 유엔 NGO 콘퍼런스 열어 개도국 지속 개발 힘써
유엔·국제기구와 협력 프로그램 통해
작지만 강한 글로벌 교육 산실로 성장
로스쿨 졸업생, 국내외 사회발전 기여
장순흥(앞줄 오른쪽) 한동대 총장이 2015년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제2차 UNAI 서울포럼에 참가하고 있다. 왼쪽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가운데는 이리나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
한동대가 아시아·아프리카 대학으론 처음 유엔 NGO콘퍼런스 주관 대학에 선정되고 2016년 5월 경주에서 행사를 개최했다. 당시 나는 조직위원장이었다.
“한동대는 1995년 개교 이래 ‘세상을 변화시켜라’를 핵심 표어로 내걸고 세계와 함께 더불어 사는 융합형 인재 양성에 매진해왔습니다. 앞으로 유엔 등 국제기구들과 긴밀한 협력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한동대를, 작지만 강한 글로벌 융합인재 교육의 산실로 키우겠습니다.”
총장 취임 후 한동대의 강점인 개도국 지원 교육 프로그램을 활성화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특히 지속가능한 개발과 세계시민 교육 등 유엔 각 기관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강화하며 학생들이 세계 시민 자질을 갖추는 데 애를 썼다.
2016년은 유엔이 2030년까지 추진하는 지속가능한 발전 목표에 지구촌이 힘을 모을 것을 당부하는 원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유엔 NGO 콘퍼런스는 개발도상국에 그것을 어떻게 전파하고 교육해 목표를 이룰 것인지 논의하는 자리였다.
행사를 경주에서 열게 된 과정은 이렇다. 처음엔 서울이나 제주도에서 열자는 목소리가 컸다. 그래서 관계자들을 만나 경주에서 개최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경주는 일본 교토 못지않은 역사와 전통을 가진 천년고도입니다. 국제 행사를 치를 인프라를 갖췄기에 개최지로 손색이 없습니다.”
1998년 반기문 유엔 전 사무총장이 오스트리아 대사로 있을 때 나는 국제원자력기구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때의 인연으로 2014년 남태평양 사모아에서 한동대가 개최한 유엔 아카데미임팩트 포럼에 반 총장이 참석해 힘을 실어줬다. 당시 행사 주제는 작은 섬나라의 기후변화와 지속가능한 에너지 개발이었다.
한동대는 2007년 아시아 대학 최초로 유네스코 유니트윈(UNITWIN) 주관 대학으로 선정되는 등 일찌감치 유엔과 인연을 맺었다. 유네스코 유니트윈은 17개국 28개 대학·기관과 결연해 개발도상국 인재를 양성하는 국제화 교육기관이다.
2011년에는 유엔 아카데믹 임팩트(UNAI) 글로벌 허브 기관으로도 선정됐다. UNAI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뉴욕 유엔본부에서 출범시킨 국제교육 협력협의체다. 2015년 한동대와 김영길 전 총장이 회장을 맡고 있던 UNAI 코리아가 공동으로 개최한 제2차 UNAI 서울포럼에는 반 사무총장과 이리나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 등 국내·외 교육 관계자가 대거 참여했다.
한동대와 UNAI의 협력은 계속됐다. 2019년 한동대에 반기문글로벌교육원이 설립됐으며, 전인적 세계시민교육(GRACE·Globally Responsible and Advanced Citizenship Education)을 통합적으로 제공하는 ‘김영길 그레이스 스쿨’ 개원까지 이어졌다.
한동대의 국제화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축은 2002년 설립한 아시아 최초의 미국식 로스쿨인 한동국제법률대학원이다. 미국 변호사 자격을 가진 교수들이 100% 영어로 수업을 진행한다. 한동대 로스쿨을 거쳐 미국 변호사가 된 졸업생은 458명으로 합격률은 70%에 이른다. 이들은 국내외 로펌과 기업에서 글로벌 법률 전문가로서 사회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역경의 열매] 장순흥 (25) 포항 지진으로 대학 외벽 붕괴에도 인명 피해는 없어
재난 대비 기구 발족한 날 지진 발생
“모두 무사하도록” 기도 되뇌며 학교로
학교 정상화 위해 솔선수범 본관 사수
장순흥(오른쪽) 한동대 총장이 2017년 11월 16일 경북 포항 한동대에서 이낙연(가운데) 국무총리와 김관용 경북도지사에게 재난 현장 브리핑을 하고 있다.
2017년 11월 15일. 한동대 총장으로서,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잊을 수 없는 사건이 터졌다.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그날은 경기도 고양 킨텍스에서 이낙연 국무총리 주재하에 국무총리 자문기구인 국민안전안심위원회의 발족식과 첫 번째 회의가 있었다.
국민안전안심위원회는 각종 재난 상황을 예방·관리하고 정책 수립에 도움을 주는 자문기구이다. 위원회는 18인의 전문가로 구성돼 있었는데, 나는 원자력 안전 전문가로 참석했다. 그날 회의에서 재난은 예방하는 게 가장 좋고 예방을 한다 해도 발생하는 재난 상황에 대해 가능한 한 빨리 조치하고 복구해야 한다고 의견을 밝히고 있었다.
회의 직후인 오후 2시 29분이었다. 대한민국 역사상 전례 없던 지진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더더욱 놀란 것은 진앙지가 한동대가 위치한 경북 포항 흥해읍이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재난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가 발족한 날 재난 상황이 발생했다.
휴대전화 불이 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는 긴급 상황 보고 절차에 따라 총장인 나에게 상황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교내 느헤미야홀의 외벽 벽돌이 떨어지는 장면이 언론을 통해 방송되기 시작했다.
“하나님 제발 한동대에는 어떠한 인명 피해도 없고 모두 무사할 수 있도록 지켜 주세요.” 기도가 저절로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 길로 포항으로 향했다. 포항으로 내려오는 길에도 기도는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최종적으로 인명피해는 없다는 연락을 받고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저녁이 돼서야 포항에 도착했다. 무너진 학교를 재건하고 그에 따른 비용, 학교를 떠나 각자의 보금자리로 대피한 학생에게 어떻게 수업을 진행할 것인지 갖가지 인간적 고민이 머릿속에 온통 가득했다. 밤을 새우고 어느덧 새벽이 밝아왔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6) 이 말씀을 읊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새벽기도를 드리고 난 후, 학교 건물들을 직접 돌아보기 시작했다. 무너진 학교 내부를 돌아보며 하나님의 대학, 한동대를 어떻게든 정상화해야 한다는 의지가 생겼다. 4시간 동안 학교 전체 건물을 살펴봤다. 2개의 건물을 제외하고는 기둥의 상태가 양호했다.
아침이 되어 교내 리더십을 불러 긴급 교무회의를 진행했다. 다들 붕괴의 위험성 때문인지 건축한 지 20년이 넘은 본관(현동홀)에서 회의하는 것을 주저했다. 하지만 추가 붕괴 위험은 없다고 확신했고 무엇보다도 빠른 행정의 정상화를 위해 리더십부터 솔선수범해 본관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행정업무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대학본부 건물부터 정상화 돼야 학교 전반의 정상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 무엇보다도 구주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에 지금 겪는 이 지진으로 인해 우리는 오히려 더 큰 축복을 내려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나도 모르게 맘속에서 샘솟았다. 이러한 믿음 때문이었을까.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장순흥 (26) 포항의 미래 걸린 지진 원인 규명… 촉발 지진으로 확인
한동대 교수진 중심 특별조사단 꾸려
저명한 지진 전문가와 함께 공동조사
결과 발표 후 지진 도시 오명 벗어나
장순흥(오른쪽 두 번째) 한동대 총장이 2018년 4월 경북 포항 한동대에서 열린 ‘지진·지열발전 관련 공동연구단 출범식’에서 포항 지진의 원인을 설명하고 있다.
지진으로 학생들은 각자 집이나 안전한 곳으로 대피했다. 교내에서 대면 수업을 진행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차피 모든 건물을 보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차선책으로 온라인 수업을 시작했다. 이때 시작한 온라인 수업이 훗날 코로나19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팬데믹 상황 속 많은 대학이 개강을 늦추고 겨우 온라인 수업 시스템을 구축해 학기를 늦게 시작했다. 하지만 한동대는 지진 때 터득한 온라인 강의 노하우가 있기에 예정 시기에 맞춰 새 학기를 시작했다.
지진 이후 하나님께선 우리가 상상도 못 한 또 다른 큰 축복을 준비하고 계셨다. 지진 발생 1년 전인 2016년 9월 대한민국 지진 관측 이래 가장 심한 규모 5.8의 경주 지진이 발생했다.
그래서 원자력안전위원회에 이런 의견을 전달했다.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 경주 지역 전반에 지진계를 설치하고 계속 모니터링할 필요가 있습니다.” 원자력안전위원회는 국내 최고의 지진 관련 원자력 안전 전문가로 손꼽히는 이진한(고려대) 김광희(부산대) 교수가 있었다. 두 분에게 경주 인근에 지진계를 설치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래서 포항 인근에도 많은 지진계가 설치됐다.
포항 지진 직후 다양한 전문가의 의견이 나왔다. 원래 포항이 환태평양 지진대에 속해 있으므로 자연 지진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었다. 하지만 이진한 김광희 교수팀의 데이터를 분석하니 지진 진앙지가 포항에 위치한 지열발전소 근처였다. 진앙의 깊이도 10㎞ 이내였다.
‘아, 이건 자연 지진이 아니다. 지열 발전에 따른 촉발(유발) 지진일 가능성이 크다.’ 나는 즉각 한동대 교수진을 중심으로 지진특별조사단을 꾸렸다. 그리고 외부 지진 전문가와 함께 공동 조사를 시작했다.
외부에선 회의론이 많았다. “한국에서 조사위원회를 꾸려서 제대로 된 진상 조사가 된 적이 있습니까.” “자연 지진이냐 인공 지진이냐는 문제는 포항의 미래가 걸린 문제입니다. 훗날 이 지역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날 것입니다.”
결국, 적극적인 조사 요구로 정부 주도하에 지진 원인 규명에 들어갔다. 국내외 저명한 지진 전문가로 구성된 정부 주관 포항지진특별조사단은 1년 5개월간 조사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2019년 3월 20일 “포항 지진은 지열 발전으로 유발(촉발) 지진이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다.
여파는 컸다. 지진 도시라는 오명을 씻었다. 물가와 부동산 가격이 안정세에 접어들었고 포항 지역의 경제와 관광 산업이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한동대 역시 지진 피해에도 불구하고 19일 만에 전반적인 복구 작업을 완료했다. 대피했던 학생을 다시 학교로 불러올 수 있게 됐고 남은 2017학년도 2학기를 잘 마무리했다.
또한, 2018학년도 입시도 지진의 여파와 지방 사립대라는 핸디캡이 있었지만 예년보다 더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다. 복구에 필요한 60억원 가량의 비용도 하나님께서 차고 넘치게 채워주셨다. 한동대 개교 이래 가장 큰 위기와 고난의 순간에 하나님은 당신의 대학인 한동대를 잊지 않으시고 더 큰 축복을 준비해 주셨다.
***[역경의 열매] 장순흥 (27) 한동대 재건 눈물로 기도… 국내외서 도움의 손길 이어져
NIBC 동문들, 직접 찾아와 피해 복구
포스코·현대제철은 철강재 무상 지원
한 교회에선 거액의 성금 보내주기도
20년 넘게 무밭으로 방치됐던 한동대 서쪽 지역에 2019년 5월 준공된 ‘김영길그레이스스쿨 및 반기문글로벌교육원’ 전경.
지진 후 순간마다 하나님께 이 위기를 극복할 방법을 알려 달라고 눈물로 간구했다. 집, 학교뿐 아니라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의 기도는 온통 한동대 재건에 맞춰져 있었다.
하루는 아내와 함께 무너진 학교를 위해 뜨겁게 기도했다. 기도 중에 2015년 베트남 출장 때 만난 ‘NIBC’(Not I But Christ) 동문이 떠올랐다. NIBC는 한동대 공간환경시스템공학부(건축, 토목, 도시환경 전공) 출신 졸업생들로 구성된 기업이다. 베트남에서 크게 건축 사업을 하고 있었다. 때마침 베트남에서 연락이 왔다. “총장님, NIBC 동문입니다. 지진 피해가 크지요.” 그리고 동문들이 직접 포항까지 날아와 피해 규모 파악과 복구에 많은 도움을 줬다. 복구 금액으로 60억원가량이 필요했다.
3분의 1이 특별재난지원금 명목으로 지자체에서 지원했다. 나머지 3분의 2는 정말 뜻하지 않은 여러 손길을 통해 채워졌다. “장 총장님이시죠? 하나님께서 후원하라고 하십니다. 1억원을 보내겠습니다.” “예?” 특별히 한동대와 관계를 맺고 있지 않던 어느 교회에서는 거액의 성금을 보내왔다. 순간순간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는 나날이었다.
포스코와 현대제철에서도 철강재를 무상으로 지원해줬다. 건물 피해 복구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처럼 국내·외 여러 도움의 손길을 통해 지진 복구가 어느 정도 완료될 무렵이었다. ‘이번 기회에 부임 초기부터 품었던 한동대 서쪽 지역 개발을 시작하자.’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자 폐허 같던 한동 땅에 다시금 새로운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지진 이후 짧은 시간에 복구를 완료하고 그때 생긴 자신감으로 한동대의 서쪽 개발 사업을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다행인 것은 2019년 6월 30일 별세하신 김영길 전 총장님의 마지막 유업이었던 세계시민교육의 배움터인 ‘김영길그레이스스쿨 및 반기문글로벌교육원’을 준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NIBC와 손잡고 개교 이래 20년 넘게 무밭으로 방치되던 서쪽 공터에 건물을 준공했다.
김 전 총장님은 준공식 당시 투병 중이라 직접 행사에는 참석할 수 없었지만, 온라인으로 행사 장면을 생생하게 보시고 그 누구보다도 기뻐하셨고 축하해 주셨다. 세월이 흘러 그때를 뒤돌아보니 총장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선물을 드린 것 같아 한편으로는 큰 위안이 되었다. 2019년 5월 27일, 지진 발생 후 1년 5개월 만에 지진 피해를 완전히 복구하고 새로운 건물까지 준공했다. 지난해 6월에는 새로운 기숙사인 갈대상자관을 준공했다.
만약 우리가 지진이라는 큰 피해를 보고 충격과 실의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 놓고 누군가의 도움만 바라고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한동대는 지금처럼 다시 일어설 수 없었을 것이다.
정말 우리의 구세주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온전히 믿고 그 믿음으로 시련에 담대히 맞서 싸워나간다면 그 시련과 고통 뒤에는 더 값진 열매로 채워주신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한동인의 내면에는 주님을 향한 믿음의 마음이 더 커졌다고 할 수 있다.
***[역경의 열매] 장순흥 (28) 코로나 19 어려운 상황 겪으며 주님의 예비하심 알게 돼
교내 병원 설치 학생·교직원 건강 살피고
포항 사태 겪으며 비대면 수업 미리 준비
직원들은 급여 일부 반납 재정 손실 막아
장순흥(앞줄 오른쪽 세 번째) 한동대 총장이 2017년 4월 경북 포항 한동대 캠퍼스 내에 설치된 '보아스 메디컬' 개원 예배에서 관계자들과 함께했다. 장 총장 왼쪽이 장응복 장로, 오른쪽은 고준태 원장.
2020년 3월 세계보건기구(WHO)는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 즉 팬데믹을 선언했다. 국내외 대학은 비대면 수업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2020년 1학기 개강 연기를 시행했다. 초유의 사건이었다. 학사 운영, 교수학습, 방역 및 학생 관리에 큰 변화가 있었다.
“주님, 우리에게 닥쳐온 이 위기 상황을 주님의 지혜와 용기로 슬기롭게 잘 해결하게 인도해주십시오.”
감사하게도 한동대는 연기 없이 원래 예정대로 3월 2일부터 학기를 시작했다. 2017년 발생한 포항 지진 사태를 겪으며 교수와 학생들이 웹과 모바일로 어디서든 학습할 수 있는 화상 강의 클라우드 플랫폼 시스템을 구축해놨기 때문이었다.
한동대의 코로나19 극복에 큰 힘이 되었던 또 다른 주님의 계획이 있었다. 2017년 4월 한동대 내에 개원한 ‘보아스 메디컬’이었다. 한동대 총장 취임 후 학생의 건강을 책임질 교내 병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년간의 노력 끝에 한동대 첫 명예박사님이자 평생 의사로 섬긴 온누리교회 장응복 장로님의 협조로 학교에 병원을 설치했다.
어려움에 빠진 나오미와 룻을 회복시킨 보아스의 이름을 따서 병원 이름은 ‘보아스메디컬’로 했다. 또한 한동대 구성원들이 마음까지 회복해 돌아갈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며 흔쾌히 초대 원장으로 고준태 박사님이 취임했다.
덕분에 우리 학교는 코로나 안심병원 수준의 안전보건 수칙을 이행할 수 있었다. 발열 점검, 마스크 착용, 엄격한 사회적 거리를 유지했다. 특히 고 박사님과 생명과학부 교수를 중심으로 지역 보건소와 긴밀히 협력해 학교가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보건의료 환경을 제공했다. 그래서 2021년 1학기까지 단 한 명의 확진자 없이 학사 운영을 했다.
국내 코로나19 상황이 절정에 치닫던 3월 교무회의를 열었다. “코로나로 휴학생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기숙사는 1개월간 공실로 운영됐습니다. 재정적 손실을 줄인다는 취지에서 저의 급여 일부를 반납하겠습니다.” “그럼 저희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교무위원들도 자발적으로 동참해 줬다.
이러한 한동의 공동체 정신은 리더십으로부터 모든 교직원까지 확대됐다. 총장으로서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팬데믹 고난을 극복하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는 로마서 8장 28절 말씀을 체험했다.
2020년 1학기를 마무리할 때였다. ‘비대면 수업으로는 한동대 고유 특성인 신앙훈련과 공동체 인성교육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2학기부터 모든 강의를 대면·비대면으로 동시 운영했다. 안심병원 수준의 방역대책을 펼치자 3000명이 넘는 학생이 안심하며 캠퍼스로 돌아왔다. 학생들은 기숙사에 머물며 실험, 실습 교과목 수강, 신입생 인성교육 등을 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하나님은 지진과 코로나라는 고난과 시련 말고도 다른 시험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더욱 강하게 하셨다.
***[역경의 열매] 장순흥 (29) 한국 최초 선교사대회 개최… 희망과 은혜 나눠
매회 미국서 열린 ‘한인세계선교사대회’
선교에 깊은 열정 가진 한동대서 주최
학문적·인적 참여 통해 산학 협력 이뤄
지난 7월 15일 경북 포항 한동대에서 개최된 ‘2021 한인세계선교사대회’에서 전 세계 한인 선교사들이 함께했다.
지난 40여년간 한인세계선교사대회는 미국 휘튼대와 아주사대에서 열렸다. 2016년 미국에서 열린 제15차 대회 현장에서 이런 의문이 들었다.
‘대회 이름에 한인이라는 말을 넣어 놓고 세계선교사대회를 한국에서 한 번도 개최하지 않았다니.’ 미국에서 만난 한인세계선교사회(KWMF·Korean World Missionary Fellowship) 선교사로부터 그 이유를 들었다. “재정적 이유로 한국에서 개최하는 게 어렵습니다.”
한동대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인재를 양성하는 하나님의 대학’으로 1995년 개교했다. 따라서 선교에 깊은 관심과 열정을 가진 대학이다. 1997년 피지 선교 활동 중 강경식 권영민 학생이 순교할 정도로 선교의 순수성이 있는 대학이다.
‘만약 기독교 대학이 선교와 복음 전도에 소홀해진다면 많은 기독 대학처럼 세속화의 길에 접어들 것이다. 선교사 대회 유치는 한동대의 정체성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래서 KWMF에 제16차 한인세계선교사대회를 주최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KWMF는 한동대가 기숙사를 갖춘 초교파 대학이며, 선교 방향성과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장소 대여에만 그치지 않고 선교 전략·비전을 제시하는 능동적 역할까지 해야겠다.’ 대회 이후에도 세계 각지의 선교사를 지원하고 전략을 제시하는 ‘한동대 글로벌 사명원’의 밑그림은 이때 나왔다.
한인세계선교사대회는 2020년 7월 개최 예정이었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으로 대회 개최가 불투명해졌다. 한동대와 KWMF 임원회는 결국 대회 연기를 공지했다.
‘하나님께서 한국 최초로 열리는 선교사대회를 위해 마음의 준비를 더 할 것을 말씀하시는구나.’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인간의 한계를 봤다. 한동대와 KWMF 임원회 모두 겸손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다.
드디어 2021년 7월 ‘2021 한인세계선교사대회’가 한동대에서 열렸다. 대회는 과거 미국에서 장소만 빌리던 행사와 분명 차이가 있었다. 한동대의 학문적·인적 참여를 통해 선교사와 산학 협력을 이룰 수 있었다. 또한, 한동대 선교사 자녀(MK) 학생으로 구성된 160명의 자원봉사자가 현장 선교사와 교류했다.
한인세계선교사대회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한국 선교, 성찰과 제안’이라는 주제로 성찰과 통찰, 제안, 소망의 4가지 주제로 진행됐다. 한국의 선교 방식을 돌아보고, 위기를 모색하며 현재 상황을 통한 희망과 은혜를 나눴다.
특히 ‘선교사 중심의 대회’로 축이 이동했다. 과거만 해도 설교 중심, 대형교회 목회자 중심으로 행사가 진행됐다면, 이번에는 선교사가 직접 프로그램을 짜면서 현장에서 활동하는 선교사의 피부에 와 닿는 내용으로 구성했다.
또 복음 전파는 선교사만의 사명이 아니며 기독교인 모두가 사명자로 자세를 가져야 함을 인식했다. 특히 다수의 선교사 은퇴를 앞둔 상황에서 차세대 선교사와 현지인 선교사 육성의 필요성을 도출할 수 있었다. 한동대는 이번 대회를 통해 기도와 후원을 받는데 그치지 않고 전문성과 신앙을 나누는 전문교육 기관이 될 수 있음을 경험했다.
***[역경의 열매] 장순흥 (30·끝) ‘하나님의 대학’ 한동대, 세계 선교의 전초기지로 키워
달란트 활용 기술·지식 선교 현장에 접목
복음 전파하는 전문 선교사의 역할 커져
지속적인 선교사역 도움 주기 위해 노력
장순흥(왼쪽 네 번째) 한동대 총장이 지난 1일 경북 포항 한동대에서 온라인으로 세계선교 전략가인 루이스 부시 박사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있다.
한국의 기독교가 부흥할 수 있었던 비결은 복음을 전해준 미국 선교사의 선교 전략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미국 선교사들은 직접 활동하면서도 한국 목사와 선교사를 육성, 후원했다. 이들이 다시 목회와 선교 활동에 뛰어들면서 재생산 구조를 만들었다.
한인세계선교사대회를 준비하며 새로운 선교 전략과 선교사의 현지 문제 해결이 절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음의 내용은 영원히 변하지 않지만, 선교 방법과 전략, 파송 선교사의 현지 문제 해결은 한국교회와 모든 크리스천이 함께 풀어야 할 숙제다. 전통적 선교와 더불어 사이버 공간과 문화 콘텐츠 등 다양한 분야의 선교 전략이 필요한 때다. 개방된 세계화 속 각국의 현지 선교사 육성 전략에 힘을 쏟아야 한다.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달란트를 활용해 지식과 재원을 선교와 연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기술과 지식을 선교 현장에 접목해 복음을 전파하는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한동대는 지속적으로 선교사역을 지원하기 위해 한동글로벌사명원(Global Mission Institute)을 한인세계선교사대회에 발맞춰 개원했다. 한동대 교수 등 기독 교수들이 100여개의 부속센터를 맡아 지역과 기능별로 선교사를 도울 수 있는 구체적 전략을 짜고 있다.
최근에는 ‘10/40 윈도우(Window)’ ‘4/14 Window’ 등을 제시한 세계선교 전략가인 루이스 부시 박사에게 한동대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으며, 한동글로벌사명원 특별고문에도 위촉했다.
개교 이래로 ‘하나님의 대학’을 표방해 온 한동대는 세계 선교의 전초 기지이자 전문인 선교사를 양성하는 최고의 기관이 되겠다는 비전을 갖고 있다. 이것은 글로벌한 기독교 대학, 선교 중심 대학이 될 때 가능할 것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1970년대 서울 덕수교회 고등부 회장, 서울대 시절 예수전도단, 미국 유학 시절 보스톤한인교회 등을 통해 복음의 사명과 신앙의 뿌리를 만들어 주셨다. 82년부터는 카이스트 원자력공학과 교수로 불러주셔서 대한민국 원자력 기술 자립과 원자력 수출, 입시제도와 대학 교육 혁신의 도구로 사용해 주셨다.
특히 2014년엔 한동대 총장으로 불러주셨다. 한동대에선 문제 해결 중심교육과 인성교육을 강조하며 다음세대에게 하나님의 뜻을 심어줄 수 있었다. UNDPI NGO 콘퍼런스 주관학교로 국제화의 길을 내어주셨으며, 성경읽기운동(PRS)이 교직원을 포함한 전교생에게 퍼져 한동의 문화로 자리잡게 해주셨다. 또한 ‘동성애와 동성 결혼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내놨다.
2021년에는 한인세계선교사대회를 통해 한동대가 ‘하나님의 대학, 선교 중심대학’임을 분명히 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고 주신 사명에 따른 결과였다. 포항 지진과 팬데믹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의를 구했다. 좋으신 하나님은 위기 때마다 함께해주셨다. 때로는 위기가 축복으로 변하기도 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의 조건이 떠오른다. 비록 앞에 놓인 길이 가시밭길이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명자의 길을 걷고 싶다. 그렇게 오늘도 주님 앞에 두 손을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