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사회, 자연, 이 세 가지는 인간의 투쟁이며 동시에 세 가지 필수조건이다.
믿어야 하기에 사원이 있고, 창조해야 하기에 도시가 있으며, 살아야 하기에 쟁기와 배가 있다. 그러나 언뜻 해결책으로 생각되는 이 세 가지는 다시 전쟁을 야기 시킨다.
이들로부터 미지의 어려움이 탄생한다.
인간은 미신과 편견과 자연력의 형태로 나타나는 갖가지 난관에 부딪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을 짓누르는 3중의 아난케, 즉 도그마의 아난케, 법의 아난케, 사물의 아난케다.
나는 <파리의 노트르담>에서는 종교를, <레 미제라블> 에서는 사회를, 이 책에서는 자연을 그렸다.
인간을 둘러싼 이 세 가지 운명에는 인간의 내적 운명이자 가장 숭고한 아난케인 인간의 마음이 뒤섞인다.
1866년 3월, 오트빌 하우스에서
빅토르 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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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새해선물. 폭풍우. 포르리외에서 온 배 한 척이 에스플라나드에서 어제 실종됨.
1월 2일, 로캔느에서 세 돛배가 실종됨. 미국에서 온 배였다. 7명 사망. 21명 구출.
1월 3일. 우편선이 오지 않았다.
1월 4일, 폭풍우가 계속되고 있다.
1월 14일. 비. 낙반. 1명 사망.
1월 15일. 거친 날씨. 폰호가 출항 못함.
1월 22일, 돌풍. 서쪽 해안에서 다섯 척이 난파당함.
1월 24일, 폭풍우가 지속되고 있다. 사방에서 난파당함.
이 대양의 구석에는 휴식이란 거의 없다.
그런 까닭에 불안해하던 고대 시인 리우아르헨에 의하면 바다의 예레미야, 갈매기의 외침소리가 끝없는 질풍 속에서 수세기를 걸쳐 울려 퍼진다.
그러나 군도를 향해하는데 있어서 거친 날씨만이 가장 큰 위험은 아니다.
돌풍은 거세고 그 맹렬함은 경고가 된다.
배는 다시 항구로 돌아오거나 돛의 중심을 아래쪽으로 옮기면서 감속 운행한다.
바람의 힘이 강해지면 돛줄임줄을 완전히 졸라 매고 곤경에서 빠져나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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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볼테르를 증오한다.
마치 볼테르라는 말에는 사탄의 이름과 같은 발음이 나는 듯하다.
볼테르에 관해서 말 할 때면 모든 종류의 분열이 극복된다.
몰몬교는 영국 성공회와 의견이 투합되고 그 일치는 분노로 자라나, 모든 종파가 하나의 증오로 똘똘 뭉친다.
파문당한 사람 볼테르는 모든 프로테스탄트 교파의 교차지점에 있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로마의 카톨릭은 볼테르를 미워하고 제네바의 프로테스탄티즘은 그를 증오한다는 것이다.
저주는 점점 더 커진다. 칼라스와 시르방 사건, 신교도 박해에 대항하는 설득력 있는 책들도 아무 소용없다.
볼테르는 교리를 부정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볼테르는 신교도들을 옹호했지만 그들에게 공격을 당했다.
교리를 저버린 배은망덕자라고 기소당했다.
생 델리에에서 연설하기로 되어있던 어떤 사람은 만일 연설 중에 볼테르를 언급한다면 그 캠페인은 실패할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을 정도이다.
과거를 이야기하는 한 볼테르는 거부당할 것이다.
그는 천재도 아니고 재능도 없고 기지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 보라.
그는 늙어서도 모욕을 당했으며 죽어서까지 추방을 당했다.
그는 영원한 논란의 대상이며 그것이 바로 그의 영광인 것이다.
조용히, 정당하게 볼테르를 말할 수 있을까?
한 인간이 한 세기의 발전을 구현하고 그 세기를 지배했을 때는 그에 대한 비평보다는 증오가 우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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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를 많이 먹는 어부들은 대가족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법칙은 집집마다 아이들의 수가 일곱 여덟에 이르는 노르망디 군도 내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이것은 양심의 문제와 관련되는 특별한 문제들을 파생시킨다.
배를 조종하는 사람, 파일럿의 첫 번째 의무는 무엇인가?
파일릿에게는 모름지기 조난당한 뱃사람들에게 헌신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이고 아버지에게는 아이들에게 헌신할 의무도 있다.
그 역시 조난당할 수도 있다.
목숨을 무릅쓰는 것은 혼자일 때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대가족의 일원일 때는 문제가 달라진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 배 한 척이 난바다에서 조난당했을 때, 그가 도움을 주러 간다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때 파일럿은 두 가지 난파의 사이에 놓인다.
그가 없으면 침몰할 위험에 처한 선원들의 난파와 그가 없으면 생계가 곤란해 질 아이들의 난파
이다. 끔찍한 딜레마다.
그의 가족을 생각해야 하기에 영웅주의는 몸을 판다.
그는 대가 없이 사람을 구해 주는 천사가 아니다. 그에 해당하는 비용이 있다.
종종이러한 기묘한 인간의 탐욕 때문에 바다에서, 먹구름 아래서, 번개 아래서, 암초 앞에서 가격이 흥정된다. 구조행위를 흥정하는 것이다.
한 사람은 목숨을 팔고 다른 사람은 그것을 산다.
사느냐 마느나가 문제다.
선행은 거저 주기를 원치 않는다.
난파될 위기에 처한 사람은 제안된 금액이 너무 높다고 생각한다.
가공할만한 선행의 문턱에서 고작 몇 푼을 가지고 논쟁이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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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오는 길이지요?
"조심해요. 가까이 오지 말아요. 앞 돛대가 당신을 덮치겠어요."
“어디서 오는 길이지요?”
"모르겠어요."
"어디로 가는데요?
"몰라요"
“도와줄까요?
"조심해요. 내겐 돛대 하나밖에 안 남았어요. 그게 당신을 덮치겠단 말이오"
"도와줄까요?
"당신 배에 몇 사람 있지요?
"셋이오"
“내 돛대가 당신네 배를 덮치면 당신네는 침몰할 거요. 썩 비켜요."
“내가 가 버리면 당신이 침몰할 텐데."
"하느님, 맙소사!
“게른제로 데려다 줄까요? 난 조종사요."
"게른제가 어디요?
“바로 저기요."
"틀려요. 그건 제르세잖아요."
"틀리다니요. 게른제라니까요."
"하느님, 맙소사!
"배 이름이 뭐지요?
“빨랑트"
“어디 출신이시오?”
“포르트리외"
“목적지는?”
“뉴편들랜드”
“배엔 뭐가 있지요?”
"열아홉 사람에 짐이 더 있어요."
“도와줄까요?”
“누구시오?"
"조종사요"
“이름은?"
“레티비에"
“어디 출신?”
"생피에르 뒤 부와"
“오하느님!"
"얼마면 되겠소?”
"오십 파운드"
“이십오 파운드?”
"아니. 오십"
"아니. 이십오"
"그럼 난 가겠소."
“썩가버려요.”
"당신들은 좌초했어요. 거기는 돌 뿐이요. 저기 경중 소리가 안 들려요? 십오 분 후면 당신들은 죽어요."
"사십 파운드?”
"아니. 사십오로 합시다."
"사십오에 갑시다!”
그리고 레티비에는 갈랑트를 구조했다. 이것이 그 끔찍한 흥정의 실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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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의 능력을 과장하지는 말자
인간이 이무리 그럴지라도 창조의 거대한 윤곽은 그대로이다.
궁극적인 덩어리는 전혀 인간에게 속한 차원이 아니다.
미세한 것을 움직일 힘은 있지만, 전체에 대해서는 아니다. 그리고 그래야 마땅하다.
전체는 신의 섭리에 의한 것이다.
자연의 법칙은 우리를 초월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것은 그저 표면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땅에 웃을 입히거나 벗긴다. 산림의 벌채는 웃을 벗기는 것과 같다.
그러나 축에서 도는 지구의 속도를 늦추는 것, 궤도 내에서의 지구의 운행에 박차를 가하는 것, 하루에 지구가 태양을 도는 78,000리와의 거리에 단 1투와즈에를 덧붙이거나 떼어내는 것,
세차를 수정하는 것, 빗방울 하나를 없애는 일은 결코 할 수 없다.
(주 : 세차 - 천체의 작용에 의하여 지구 자전축의 방향이 조금씩 변하는 현상. 이 때문에 천구(天球)의 적도와 황도가 변하고, 그에 따라 춘분점이 해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하늘의 이치는 하늘의 이치로 존속된다.
인간이 기후는 변화시킬 수 있을 망정 계절은 변화시킬 수 없다.
변화시킬 수 있다면 달을 황도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게 해보라!
저명인사들까지도 몇 명 포함되는 일군의 몽상가들이 지구에 영원한 봄을 만들기를 꿈꾸었다.
극과 극의 계절인 여름과 겨울은 우리가 방금 말한 그 황도의 위치에서 지구의 축이 지나치게 기울어짐으로 인해 생긴다.
여름과 겨울을 없애기 위해서라면 그 축을 바로 세우기만 하면 될 것이다.
이보다 간단한 것이 어디 있을까.
극점에 지구의 중심까지 이르는 말뚝을 박고, 거기에 사슬을 매어, 지구 밖에 그것을 당길 만한 티를 잡아 자각 100억 마리의 말로, 이루어진 100억 개의 그룹을 만들어 당기게 하면 축은 바로 설 것이고, 봄은 끝없이 계속 될 것이다. 보다시피 쉬운 일이다.
다른 곳에서 에덴을 찾자. 봄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자유와 정의는 더욱 가치 있는 것이다.
에덴은 정신계에 속하는 것이지 결코 물질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롭고 정의로워지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평온함은 내적인 것이다.
우리의 영원한 봄이라는 것은 바로 우리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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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강도의 땅이 아니었던가? 영국은 식인종의 땅이 아니었던가?
겸손한 마음으로 문신을 새긴 우리의 조상을 생각하자.
산적질이 번창하던 곳을 상업이 지배한다. 찬란한 변신이다.
수세기 세월이 만든 작품일 뿐만 아니라 분명히 인간이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은 군도가 훌륭한 모범을 보여 준다.
이런 작은 나라들이 바로 문명의 증거이다.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기리자.
이러한 소우주는 인간의 위대한 형성과정의 모든 단계를 보여 주는 축소판이다.
제르세, 게른제, 오리니, 먼 옛날 해적의 소굴은 오늘날의 공장이 되었다.
과거의 암초가 이제는 항구이다.
역사라고 부르는 파란곡절의 연속을 주의깊게 살펴보는 보는 사람에게, 문명의 태양 앞으로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나타나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는 바다의 밤과 같은 이 민족보다 더 감동적인 볼거리는 없을 것이다.
어둠 속의 인간이 몸을 돌려 여명을 마주한다.
이보다 위대한 것도 이 보다 비장한 것도 없다.
과거의 악당, 오늘의 노동자.
과거의 원시인, 오늘의 시민.
과거의 늑대, 오늘의 인간.
그는 옛날보다 덜 오만해졌는가? 아니다.
단지 지금의 오만은 빛을 향해 가는 것이다.
연안이나 강기슭의, 성실하고 친근한 오늘날의 상선과 호모 호미니 몬스트룸을 신조로 삼는 괴물 같은 옛 전함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는 그 얼마나 눈부신가!
자연의 장벽은 이제 다리가 되었으며, 장애물은 도움이 되었다.
이 민족이 해적이었던 바로 그곳에서 이제는 조종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왕성하고 대담하다.
이 땅은 성실의 땅이 되어 가는 한편 모험의 땅으로 남아있다.
출발점이 미미했던 만큼 사람들은 그 진보에 더욱 감동을 받는다.
새둥지의 알테기에 묻은 새똥은 비상하는 새의 펼쳐진 날개폭을 경탄하게 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르망디 군도라고 하면 해적질을 떠올린다.
사방을 비춰주는 전기 등대의 도움으로 파도와 암초의 미궁을 건너 위풍당당하게 항해하는 매력적이고 차분한 현대식 배 앞에서 인간이 이룩한 확실한 발전으로 인해 편안히 양심을 논하면서, 그 옛날 이따금씩 희미한 달빛이 보일 뿐인 시커떤 파도 위를 극심한 바람으로 불꽃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장작불에 의지하여 나침반도 없는 샬루프선을 타고 이 갑에서 저 갑으로 항해하고 있는 옛 선원들을 떠올리며 그들이 범죄자 같고 야수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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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바다 사람들이 살았던
옛 노르망디 땅의 한 구석에,
오늘의 내가 은거하고 훗날의 내가 묻힐
혹독하고도 부드러운 게른제 섬에,
나를 반기는
아무도 소유할 수 없는 바위에
이 책을 바친다.
Victor Hu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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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7년에 게른제의 마지막 마법사의 화형식이 보르다쥬 광장에서 있었다.
이 광장은 1565년부터 1700년에 걸쳐 마법사 11명의 화형식이 치러 졌던 곳이기도 했다.
보통 그들은 죄를 시인했다. 고문을 해서 자백하게 했기 때문이다.
보르다쥬 광장은 사회와 종교를 위해 다른 일을 하기도 했다.
이교도들의 화형식을 거행했던 것이다.
마리 튀도르 통치시기에 위그노교도였던 어머니와 두 딸의 화형식이 있었다.
두 딸 중 한 명은 임신 중이었고 화형대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 속에서 해산을 했다.
사료에 의하면 그녀의 배가 터졌다.
그리고 거기서 살아있는 아기가 튀어나왔다.
갓난아기는 그 커다란 불구덩이 속에서 밖으로 굴러 나왔고 한 구경꾼이 아기를 들어올렸다.
그러나 독실한 카톨릭 교도였던 대법관 엘리에 고슬랭은 아기를 다시 불 속으로 집어 던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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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죽음으로 아들은 실의에 빠졌다.
오래전부터 비사교적이었던 그는 모든 인간적인 접촉을 피하고 있었다. 그렇게 고립되어 있었다.
이제 그의 삶은 허무하다.
둘이 있을 때에는 삶을 산다는 것이 가능하지만 혼자서는 삶을 계속해 나갈 수 없을 것 같이 여겨지고 마침내는 포기하고 만다.
그렇게 절망의 첫 번째 단계를 지나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죽음을 보고 삶을 보며 가슴속에는 처절한 피눈물을흘리면서도 허락하게 되는 것이다.
질리아는 젊었고 상처는 잘 아물었다.
그 나이 때에는 마음의 살도 잘 돋아나기 때문이다.
슬픔은 조금씩 지워져 그를 둘러싼 자연과 뒤섞였으며 그 속에서 매력적으로 변해갔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멀어지고 자연에 이끌렸다.
그리고 점차 고독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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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그는 읽고 쓸 줄 아는 불쌍한 남자였다.
그는 아마도 생각하는 사람과 꿈꾸는 사람의 경계선에 있었을 것이다.
생각하는 사람은 소망하지만 꿈꾸는 사람은 받아들인다.
고독은 단순한 사람들에게 덧붙어서 그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복잡하게 만든다.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성스러운 두려움에 잠기게 된다.
질리아의 정신이 빠져 있었던 어두움은 모호하지만 서로 매우 다른 두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나는 질리아 안에 존재하는 무지라고 하는 약점이었으며 또 하나는 질리아 밖에 존재 하는 신비라고 하는 무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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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리아는 몽상가이다. 그래서 그는 거만하기도 하고 소심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만의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아마도 질리아의 내면에는 환각적인, 어떤 동상에 사로잡힌 듯한 면이 있었던 것 같다.
환각은 앙리 4세 같은 왕에게도, 마르와 같은 농부에게도 똑같이 일어날 수 있다.
미지의 세계는 가끔씩 인간의 영혼을 놀라게 한다.
갑작스레 어두움이 찢기고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지만 곧 어둠의 장막이 닫힌다.
이러한 환상들은 때때로 사람을 변모시키기도 한다.
낙타 부리는 사람을 마호메트로, 염소지기 여인을 잔다르크로 변모시킨다.
고독은 상당 부분 고귀한 착란상태를 드러낸다.
그것은 타는 덤불숲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이다. 거기에서 신비로운 생각의 떨림이 나온다.
박식한 사람은 투시자로, 시인은 예언자로 변하게 한다.
거기에서 시나이 산의 성서 호렙, 최후의 심판 날에 트럼펫이 울려 퍼지는 세드롱, 옹보, 델포이의 카스탈리아 우물에서 영감을 받은 시인의 흥분, 델포이의 첫 번째 달 뷔시용 월의 계시가 생겨난다. 그리하여 제우스의 신탁 장소 도도나에서 펠레이아가, 아폴론의 신탁이 이루어진 델포이에서 페모노에가, 레바데에 신탁을 새겨놓은 건축가 트로포니우스가, 케바르 위에서 유태인 선지자 에제시엘이, 라신느의 희곡 테바이드의 제롬이 나온다.
대개 환상을 보는 상태는 인간을 압도하고 멍하게 만든다.
인간을 성스러운 백치로 만드는 법도 있는 것이다.
회교의 탁발승은, 마치 백치가 갑상선종을 견뎌내듯이 그의 환상을 짐으로 진다.
비템베르그의 다락방에서 악마를 상대로 얘기하는 루터, 방의 병풍으로 지옥을 가린 파스칼,
흰 얼굴의 보숨 신과 대화하는 아프리카의 검둥이 마술사 등은 모두 같은 현상으로서, 그것이 스며들어가는 뇌의 힘과 크기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변모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루터와 파스칼처럼 위대한 존재로 남을 수도 있고, 마술사처럼 바보로 남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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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오트는 번창했다. 메스 르티에리는 자신이 무슈 르티에리가 될 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게른제에서는 쉽게 무슈가 될 수 없다.
평민 남자와 무슈 사이에는 오르기 어려운 등급이 많다.
피에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예로 들어보자.
첫 번째 등급은 아무런 칭호 없이 이름만으로 피에르라고 부른다.
두 번째 등급은 베쟁(또는 브와쟁) 피에르, 세 번째 등급은 페르 피에르, 네 번째 등급은 시외르 피에르, 다섯 번째 등급은 메스 피에르, 그리고 최상의 등급이 바로 무슈 피에르이다.
이러한 계급은 땅에서 솟아 나와 창공으로 이어진다.
그 속에 계급주의적인 영국 전체가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끼어든다.
이는 실로 다양한 계층을 이루며 위쪽으로 올라 갈수록 영예로운 것이다.
무슈(젠틀맨) 위에는 에스퀴르(에퀴예)가 있고 에스퀴르 위에는 슈발리에(평생토록 사용하는 시르라는 호칭을 곁들여)가 있으며 그 위로는 바로네(세습되는 호칭인 시르와 함께) 그 다음은 스코틀랜드에서 리어드(영주)라고 부르는 로르, 바롱(남작), 비콩트(자작), 콩트(영국에서는 어얼, 노르웨이에서는 자알이라 부름), 마르키(후작), 뒤크(공작)로. 이어지며 그 위에는 영국 특유의 패어가 있고 그 위에 왕실의 혈통인 왕자와 왕이 있다.
계급은 평민에서 부르주아, 부르주아에서 바론느타쥬, 바론느타쥬에서 패리, 패리에서 왕족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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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범선은 원하기만 한다면 출자자를 찾을 수 있었다.
투자자본은 끝끝내 증기기관에 등을 돌리고 돛을 고집했다.
게른제에서는 뒤랑드가 하나의 사실이기는 했으나 증기선이 정칙은 아니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진보와 대면한 거부의 악착스러움이다.
사람들은 르티에리에 대하여 말하곤 했다.
"지금은 좋아, 하지만 그것이 되풀이되지는 않을 걸."
르티에리의 예는 다른 사람들을 고무시키기는커녕 두렵게 만들었다.
아무도 두 번째 뒤랑드가 되는 위험을 감수하려고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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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발, 여자의 발, 아이들의 발. 이 모든 발들은 잠을 자고 있었다.
이들 발의 저편에는 헛간의 으슴푸레한 빛 속에 박혀 있는 눈이 몸통, 형체, 졸고 있는 머리, 기력 없는 늘어짐, 두 가지 성의 누더기, 빈곤 속의 잡거 등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인간의 끔찍한 광맥을 분간하고 있었다.
이 침실은 모두의 것이었다. 그들은 한 주당 2수를 지불했다.
발들이 우물에 닿아 있었다.
폭풍우가 치는 밤에는 그들의 발 위로 비가 내리고 겨울밤에는 그들의 몸뚱이 위로 눈이 내리곤 했다.
이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이름 없는 이들.
그들은 저녁이 되면 이곳에 와서 아침이 되면 떠났다.
사회질서는 이 보잘것없는 인간들로 인해 복잡해진다.
어떤 이들은 돈도 내지 않고 하룻밤을 위해 슬그머니 들어온다.
대부분은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온갖 악, 온갖 비천함, 온갖 오염, 온갖 괴로움, 똑같은 진흙 침대 위를 짓누르는 똑같은 잠.
이 모든 사람들의 꿈은 좋은 옆 사람을 만나는 것이었다.
장례식을 떠올리는 이 음울한 만남의 장소에서 피로, 쇠잔, 깨어나는 취기, 빵 한 조각도 없이 마땅한 생각도 없이 걷고 또 걷기, 감긴 눈꺼풀의 창백함, 회한, 갈망, 쓰레기가 뒤섞인 머리카락, 죽은 시선의 얼굴, 어둠의 입술로부터의 입맞춤 등 이 똑같은 악취 속에서 움직여 뒤섞이고 있었다. 이 큰 술통 속에서 인간의 발효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들은 숙명에 의해서, 여행에 의해서, 전날 배의 도착에 의해서, 출감에 의해서, 우연에 의해서, 밤에 의해서 이 간이 숙소에 던져졌다.
운명은 매일 이곳에 그 빗물받이를 비웠다.
원하면 들어갔고 가능하면 잠을 잤으며 감행할 수 있으면 말을 했다.
이곳은 밀담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둘러 뒤섞였다.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잠을 잠으로써 모든 것을 잊으려고 애썼다.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많은 죽음을 택했다.
매일 저녁 다시 시작되는 뒤죽박죽된 임종의 고통 속에서 두 눈을 감곤 했다.
그들은 어디에서 남아돌던 사람들일까?
가난했기 때문에 사회에서 물거품처럼 파도에 밀려 난 것이었다.
이불을 삶을 지푸라기조차도 넉넉지 않았다.
맨 살을 드러낸 육신이 맨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기진맥진해서 잠이 들었고 아침에는 관잘이 뻣뻣이 굳은 채로 통증을 느끼며 깨어났다.
난간도 덮개도 없이 언제나 큰 입을 벌리고 있는 우물은 깊이가 30피트나 되었다.
비가 그 속으로 떨어져 내리고 오물이 스며들고 뜰에서 나오는 찌꺼기들은 모두 그 속으로 흘러들었다. 물을 긷는 두레박이 옆에 있었다. 목마른 사람은 거기서 물을 마셨다.
삶에 지친 사람은 거기에 빠져 죽었다.
사람들은 퇴비 속의 잠으로부터 우물 속의 잠으로 슬쩍 미끄러져 들어갔던 것이다.
1819년에는 열 네 살짜리 아이의 시신을 그 속에서 꺼낸 일도 있었다.
이 집에서 위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소속'이 되어야만 했다.
바깥 세상의 보통 인간은 이곳의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알고 있었을까?
아니다. 그들은 냄새로 서로를 알아 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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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으로 까다로워지는 바다는 여러 가지 힘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합성물이며, 배는 여러 가지 기계장치로 만들어진 하나의 합성물이다.
여러 가지 힘은 무한한 기계장치와 같지만 여러 가지 기계장치는 제한된 힘에 불과하다.
우리가 항해라고 부르는 이 전투는 무궁무진한 것의 한쪽 진영과 지적인 것의 다른 쪽 진영, 이 두 유기체 사이에서 시작된다.
하나의 구조 속에서의 의지는 무한과 균형을 이룬다.
무한, 그것 역시 하나의 구조를 지닌다.
요소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스스로 알고 있다.
분별없는 힘이란 전혀 없다.
인간은 여러 가지 힘을 염탐하여 그 행적을 발견하려 애쓴다.
법칙이 발견될 때까지 싸움은 계속되는데 그 싸움에서 볼 때 증기선의 항해는 바다의 어느 지점에서나 어떤 때에나 인간의 천재적 재능이 쟁취 한 일종의 영원한 승리인 것이다.
증기선의 항해는 배를 길들이는 놀라운 힘을 지니고 있다.
증기선의 항해는 바람의 지배를 약화시키고 인간의 지배를 강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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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자의 삼십 년 세월이 이 남자를 짓눌려왔다.
그는 악한 사람이었으나 정직과 짝을 이루고 있었다.
원하지 않는 상대와 결혼한 남자의 증오처럼 그는 덕을 중오했다.
그는 언제나 범죄를 계획하고 있었다.
성인이 되면서부터 허울뿐인 준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속으로는 악마였다.
강도의 마음으로 선량한 인간의 가죽을 쓰고 살았다. 온순한 척하는 해적이었다.
정직함의 포로였다. 순진함이라는 미라의 관속에 갇혀 있었다.
망나니에게 알맞은 찌그러진 천사의 날개를 등에 달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존중을 과중하게 받았다. 정직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도 힘든 일이다.
악한 생각을 하면서도 선한 말을 하며 언제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인가!
그는 죄악의 유령이자 공명정대함의 유령이었다.
이 모순이 그의 운명이었다.
그는 태연해야만 했으며 어디에 내놓아도 떳떳해야만 했고 속에서 생기는 거품을 걷어내야 했고 이를 갈면서 미소 지어야 했다. 그에게 있어서 덕은 숨통을 죄는 것이었다.
그는 입으로 그손을 깨물고 싶어하는 인생을 지냈다.
하지만 깨물기를 원하면서도 입맞춤을 해야만 했다.
클뤼뱅은 솔직히 그가 억압당해 왔다고 생각했다.
왜 부자로 태어나지 않았던 것일까?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십만 파운드의 유산을 받았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을 것이다. 왜 그는 그런 부모를 만나지 못했던 것일까?
그것은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왜, 인생의 온갖 즐거움을 주지 않아 그가 노역을, 즉 속이고 배신하고 파괴하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일까?
왜 사람들은 그를, 이런 식으로, 잘 보이려 꾸미는, 굽실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려고, 사랑 받고 존경받으려고 애쓰는, 밤낮 자신의 얼굴과는 다른 얼굴을 해야 하는 고문형에 처한 것일까? 감추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폭력이었다.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게 하는 사람을 증오하는 법이다.
마침내 때가 왔다. 클뤼뱅은 복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에게? 모두에게, 그리고 모든 것에게.
르티에리도 그에게 언제나 선을 베푼 것은 아니었다. 그것도 불만의 씨였다.
그는 르티에리에게도 복수하고 있었다.
자신이 참아야 했던 대상이 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있었다.
그는 원수를 갚고 있었다.
그를 선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의 적이었다.
그는 그런 사람들의 포로로 지내왔던 것이다.
클뤼뱅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탈출에 성공했다.
그는 인간 세상 밖에 있었다. 사람들이 그를 죽었다고 여기는 것이 그의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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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 마리 알코크가 멧살리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카디에르와 루비에 수녀를 보라.
클뤼뱅, 그 역시 베일 속에서 살아왔다. 뺀뺀스러움은 언제나 그의 열망이었다.
그는 매춘부와 치욕을 인정하는 뻔뻔스러움을 부러워했다.
자신을 매춘부보다 더 매춘부라고 느꼈으며 처녀로 인정받는 것에 반발했다.
그는 냉소주의적인 탄탈로스였다.
마침내 이 암초 위에서, 이 고독 속에서 솔직해 질 수 있었다.
그는 진정한 그 자신이었다.
충심으로 스스로를 가증스럽다고 느끼는 것은 얼마만한 쾌락인지!
지옥에나 있을 법한 모든 항홀경을, 클뤼뱅이 그 순간에 맛보았던 것이다.
은폐의 연체이자가 그에게 지불되었다.
위선은 그가 투자한 자금이며 사탄은 이자를 지불한 것이다.
사람들이 사라지고 보이는 것이라고는 하늘밖에 없게 되자 클뤼뱅은 뻔뻔스럽게 되었다는 것에 도취되었다. 그는 나는 망나니다! 라고 자칭했고 그것이 만족스러웠다.
인간의 양심에 있어서 이와 유사한 일이 일어난 일은 결코 없었다.
위선자의 분화, 어떤 분화구도 그것에 견줄 수 없다.
거기에 아무도 없어서 매우 기뻤지만 설령 누군가가 있었다고 해도 유감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목격자의 앞에서 소름끼치는 존재가 되는 것을 즐겼을 것이다.
인간이라는 족속의 면전에 대고 "멍청한 것! 이라 말하는 것을 행복해 했을 것이다.
아무도 없다는 사실은 그의 승리를 공고히 했지만 그 가치를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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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으로 하여금 자신을 꼼꼼히 뜯어보도록 강요하는 것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목에는 쇠고랑을 차고 네거리의 단위에 선 노예는 그를 향해 몸을 돌리도록 강요하는 모든 구경꾼들을 지배하는 폭군이다.
그가 서있는 단상은 대좌와도 같은 것이다.
모든 사람의 주의가 쏠리 는 중심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승리인가?
구경꾼의 눈동자가 시선을 주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하는 것은 최고 권력의 여러 형태 중 하니다.
악을 이상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오명은 영광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내려다본다.
그들은 무엇인가의 위에,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온 세상에 공개된 형틀은 대좌와 유사한 점이 없지 않다.
전시된다는 것은 주목받는다는 것이다.
악한 세계에는 분명히 죄인 공시대의 쾌락이 있다.
로마에 불을 지른 네로 황제, 비겁하게 팔라스티나를 점령한 루이 14세, 나폴레옹을 서서히 죽인 섭정 죠르쥬, 문명세계의 면전에서 폴란드를 무참하게 살해한 니콜라스도 분명히 클뤼뱅이 꿈꾸었던 쾌락과 같은 것을 맛보았을 것이다.
엄청나게 빗발치는 경멸은 그것을 당하는 자에게 위대함이 줄 수 있는 것과 같은 효과를 만들어준다.
누군가에 의해 가면이 벗겨지는 것은 실패지만 스스로 가면을 벗는 것은 승리다.
승리는 그것을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을 모욕하기 위해 계산된 도취, 오만하고 경솔한 자기만족, 미처 날뛰는 벌거숭이 상태이다. 자극히 행복한 순간이다.
위선자의 생각들은 하나의 모순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모든 비열함은 일관된 논리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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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이 담즙이다. 에스코바르가 냉소주의자 사드 후작과 나란히 있다.
그 증거는 레오타드이다.
철저히 악한 위선자는 그의 내면에 사악의 양극을 가지고 있다.
사제의 한 극이요 아첨꾼의 다른 한 극이다.
그는 악마와 마찬가지로 양성이다. 위선자는 무시무시한 악의 신 헤르마프로디토스다.
그것은 혼자서 수태한다.
스스로 생겨나고 스스로 모습을 바꾼다.
아름다운 면을 보고 싶으면 그대로 보고 무시무시한 면을 보고 싶으면 돌려놓고 보면 된다.
클뤼뱅은 그의 내면에 혼란한 생각들의 이러한 모든 그림자를 갖고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거의 분간하지는 못했으나 무척 즐기고 있었다.
밤에나 볼 수 있을 지옥 불꽃의 움직임이 그의 마음속 사고의 연속이었다.
클뤼뱅은 그렇게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뱀이 벗어놓은 제 허물을 보듯 자신의 성실했던 허울을 보고 있었다.
누구나 그 성실성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심지어 자신도 어느 정도는 그랬다.
그는 잠시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고 믿을 테지만 그는 부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길을 잃었다고 믿을 테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이용하여 기막히게 골탕 먹인 꼴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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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의 속성은 끝까지 희망을 갖는 것이다.
위선자는 기다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위선은 추악한 회망일 뿐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 거짓의 끝은 악덕이 되는 덕으로 이루어진다.
이상하게도 위선에는 신념이 있다.
위선자는 악을 행해도 상관없다는 덤덤함에 신앙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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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암초 속에는 시체 안치소가 있었다.
여기는 바위에 섞인 금속 혼합물의 변질에 의해, 저기는 곰팡이에 의해, 다양하게 착색된 바다의 거친 돌들이 군데군데 무시무시한 자주 빛으로, 의심이 가는 녹색 빛으로, 진홍빛의 튀어 묻은 자국으로, 살인이나 물살에 관한 생각을 떠오르게 하고 있었다.
벽 위에서는 암살이 자행된 방에서 묻어난 발자국을 보는 것만 같았다.
사람들의 으스러짐이 거기에 그들의 흔적을 남겨 놓은 것 같았다.
수직으로 선 바위는 임종의 고통이 축적되어 새겨져 있는 듯했다.
어떤 곳에서는 살육의 흔적이 아직도 철철 흘러 넘쳐 벽은 흥건하게 젖어 있고 거기에 손가락을 갖다 댄 이상 피를 묻히지 않고서는 떼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살육의 붉은 빛이 도처에서 나타났다.
나란히 나있는 이중 절벽의 발치에, 수면이나 수면 아래로 흩어진, 또는 침식으로 수척한, 때로는 진홍색이며 때로는 검거나 보라색인, 괴물같이 생긴 둥근 조약돌들은 내장과 비슷해 보였다.
살아있는 허파들이나 썩은 간들을 보는 것 같았다.
거인들의 뱃속을 거기에 비워놓은 것 같았다.
이러한 양상은 바다라는 소굴에서는 흔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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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질리아 아래로 몇 피트 떨어진 곳, 용해된 보석과도 같이 매혹적인 물의 투명함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그 무언가를 알아보았다.
긴 넝마같이 생긴 물체가 흔들리는 물결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이 넝마는 떠다니는 게 아니라 항해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딘가의 목적지를 향해 신속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이 누더기 형체는 끝이 뾰족한 어릿광대의 지팡이 모양을 하고 있었다.
흐늘흐늘한 그 뾰족한 끝이 물 속에서 구불거리고 있었다.
그 물제는 물에 젖기조차 힘든 먼지로 뒤덮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끔찍한 차원을 넘어서 불쾌했다.
이 형체 안에는 키메라 같은 괴물의 성향이 들어 있었다.
외형을 갖춘 하나의 실체가 분명한 한 그것은 살아 있는 존재였다.
이 형제가 지하 동굴의 어두운 쪽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듯하더니 그 속으로 처박혔다.
물의 농도가 그것 위에서 더 진해 졌다.
이 윤곽은 그렇게 미끄러져 가다가 음산하게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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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함만이 무지에서 오는 소심함에 필적할 만 하다.
무지로부터의 행위가 감히 벌어지려고 할 때는 그 안에 어떤 지침이 있기 마련이다.
이 지침은 곧 진정한 직관으로서, 간혹 복잡한 사고의 체제에서보다는 단순한 영혼 속에서 더욱 명확해지기도 한다.
무지는 인간을 선동하여 시도하게 한다.
무지는 몽상을 이끌어내며 그 신비로운 몽상은 곧 힘이 된다.
지식이 때때로 인간을 당혹스럽게 하고, 종종행동을 만류한다.
항해에 조예가 깊은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는 희망봉 앞에서 우회하는 혁명적 항법을 썼다.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학식 높은 우주형상지리학자였더라면 결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지 못 했을 것이다.
몽블랑을 등반한 두 번째 인물은 학자인 소쉬르였고, 첫 번째 등반 자는 목동인 발마였다.
이런 경우들은 예외적이긴 하지만, 이 모두가 과학적 원리를 벗어나지 않으며 규칙의 체계를 갖추고 있다. 무지한 사람은 발견하고, 학식 있는 사람은 발명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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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강한 성품은 숭고하기까지 하다.
용감한 자는 오직 한 길만을 가고, 꿋꿋한 자는 오직 한 가지 기질만을 가지며, 담대한 자는 오직 한 가지 덕을 갖고 있다.
끝끝내 진실 속에 있으려는 완강함에 그 위대함이 있다.
이렇듯 위대한 사람들의 거의 모든 신비는 인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인내와 용기의 관계는 바퀴와 지렛대의 관계와 같다.
그것은 용기를 끊임없이 쇄신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목표물이 지상의 것이든 천상의 것이든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는 길은 오직 한가지뿐이다.
지상의 경우는 바로 콜럼버스에 해당되고, 천상의 경우는 곧 예수에 해당된다.
그 엄청난 십자가로부터의 영광이 되살아난다.
의식에 반박하지 않고 의지를 누그러뜨리지 않으면서 그렇게 고통을 감내해내고 승리를 얻는다.
저신적 현상의 질서 속에서 낙하하는 것은 비상의 가능성을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
추락으로부터 상승효과가 태어난다.
평범한 이들은 허울 좋은 장애에 직면하여 쉽게 포기하고 말지만 강인한 영혼의 소유자들은 그
렇지 않다.
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불확실한 가능성이며, 정복은 확고한 신념이다.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이 돌팔매질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면 온갖 종류의 합당한 이유를 제시할 수 있다. 합리적인 반론의 무시는 패배했지만 순교라는 이름의 숭고한 승리를 낳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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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차분한가? 그것은 어둠의 심연이다.
밤이 요동치는가? 그것은 혼돈의 심연이다.
그 무한함은 거절하면서도 동시에 허락한다.
체험은 불가능하지만 추측은 가능하다.
무수한 빛의 반점들이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을 더욱 검게 만든다.
어둠 속의 그 반점들은 석류석, 형광물질의 반짝거림, 별들이다.
미지의 공간에 있는 확실한 존재들.
이 빛에 다가가려 한다는 것은 두려운 도전이다.
이는 절대적인 창조의 지표들이다.
더 이상 거리를 측정할 수 없는 곳에 위치한 증거물들이다.
어둠의 끝을 어떤 숫자로 표현하기란 불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 그 깊은 공간은 존재한다.
빛을 발하는 미소한 점 하나, 또 하나, 또 하나.
그것은 감지할 수조차 없는 미세한 것이요, 거대한 것이다.
이 빛은 불씨가 되고, 불씨는 별이 되고, 별은 태양이 되고, 태양은 우주가 되고, 우주는 마침내 무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무한의 공간 앞에서 모든 숫자는 제로이다.
그 우주는 존재하고 있음에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이 우주의 존재들을 확인하면서 ‘아무 것도 아닌 존재’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 것’의 차이를 느낀다.
설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다를 수 없는 것이 바로 하늘이다.
이러한 명상으로부터 고귀한 현상이 일어난다.
넋을 잃게 만드는 응시 앞에서 영혼이 확장된다.
경외는 인간의 고유한 감정이다. 짐승은 이러한 두려움에 무지하다.
인간의 지성은 이 존엄한 공포 속에서 자신의 소멸과 그 증거를 발견한다.
어둠은 분리되지 않는 일체다.
그래서 공포가 생긴다.
동시에, 어둠은 복합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불안감이 생긴다.
어둠의 일체성은 우리 영혼을 휘갈겨 저항할 의지를 앗아간다.
어둠의 복합성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을 살피게 한다.
갑작스럽게 닥치는 위험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어둠에 굴복하면서도 여전히 우리는 방어 태세를 늦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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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성 앞에서는 복종하고 복합성 앞에서는 경계한다.
어둠은 하나이지만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다.
신비스러운 다양성은 물질로도 보이고 개념으로도 감지 된다.
어둠은 침묵하면서 공격할 기회를 엿본다.
밤, (이 대목을 쓴 저자가 어딘가에서도 말했듯이) 그것은 특별한 창조의 고유하고도 일반적인 상태이며 우리도 그 일부를 차지한다.
공간에서와 마찬가지로 시간 속에서도 짧은 낮은 별빛이 스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밤에 산재하는 경이로움이란 어떠한 현상들의 마찰 없이는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며, 이러한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마찰이 존재의 삶에 타격을 가한다.
그런 구조상의 마찰로부터 우리가 '악 이라 부르는 요소가 생겨난다.
우리가 악을 느끼는 이 어둠 속에는 신의 질서에 대항하는 잠재적 부정, 즉 이상에 반박하는 것들을 함축하는 신성 모독의 사건들이 행해진다.
악은 머리가 수 개 달린 무언지 모를 기형학적 형태로 그 광대한 우주적 총체를 복잡하게 만든다. 반항하려고 하는 모든 것에 악은 존재한다.
그것은 폭풍우와도 같아서 선박의 항로를 뒤흔든다.
악은 흔돈의 세계를 좋아가며 세상의 탄생을 가로막는다.
‘선'은 단일성을 띠고 있으나 ‘악’은 도처에 존재하는 편재성을 띠고 있다.
악은 합리적 체계 속에 있던 삶의 조화를 깨뜨려 새로 하여금 파리를 먹어치우게 하고 행성으로 하여금 지구를 휩쓸어 버리게 한다. 악은 창조를 삭제하는 줄을 긋는다.
밤의 어둠은 현기증을 일으키는 아찔함으로 가득하다.
어둠 속에 깊이 빠져든 사람은 그 속에 잠겨 발버둥친다.
암흑의 체험을 비유할 만한 다른 고역은 없다. 그것은 존재의 소멸을 경험하는 것이다.
영혼을 안주시킬 완벽한 장소란 없다. 도착지 없는 출발선만 있을 뿐.
모순되는 해답들이 교차하고, 여러 갈래의 의문점들이 동시에 제기되면서 무한대의 억눌림 아래 온갖 자질구레한 현상들이 끝없이 펼쳐진다.
불가사의한 섭리에 따라 식물은 광합성 작용을 하며 살아 숨쉬고, 인간은 사고함으로써 존재의 무게를 더하고, 천체의 움직임은 빛과 중력의 힘을 행사한다.
한없는 어둠 속에서 전개되는 모든 의문들이 어마어마하게 정면 공격을 퍼붓는다.
이러한 현상들이 바로 미지의 세계를 짐작하게 한다.
거대하고 불분명한 공간 속에서 온 우주적 존재가 동시에 출현하는 현상은 시선이 아니라 감성으로 인지된다.
그런 감성으로 인해 보이지 않는 형상이 시각화 된다. 그것이 곧 어둠이다.
인간은 그 어둠 아래 짓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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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둠을 낱낱이 파헤칠 수는 없지만, 전체적인 어둠의 끔찍한 무게는 상당 부분 인식할 수 있다. 이런 집착이 칼데아의 목자를 천문학의 길로 빠져들도록 부추졌다.
의도하지 않았던 뜻밖의 발견들이 창조의 비밀 구멍으로부터 새어 나온다.
은연중에 형성된 과학적 지식이 무지한 자의 의식 속으로 파고들어 새로운 발견을 산출해낸다. 모든 은둔자는 그 불가사의한 세력에 동조하여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연 철학자가 된다.
어둠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둥지를 틀고 있다.
절대의 세력 하에 공간 이동 없이 서식하기도하고, 이동을 하며 서식하기도 한다.
그 안에 불안한 요소가 꿈틀거리고 있다.
그 안에서 어떤 성스러운 형체가 여러 가지 형상을 수행하고 있다.
계획된 사고, 위력, 고의적 운명, 이러한 것들이 그 속에서 하나의 거대한 작품을 공동으로 생성시키고 있다.
두렵고 끔찍한 삶이 바로 그 안에 들어 있다. 별들은 광대함 속에서 진화한다.
그것은 반짝이는 무리, 행성의 군단, 별자리를 형성하는 화분, 신성한 흐름, 유기체의 발산, 편광, 그리고 끌어당기는 힘을 내포한다.
거기에는 융화와 대립이 존재한다. 거대한 파도처럼 우주의 정 반대로 밀려갔다 밀려온다.
그리고 그 중심의 한 가운데 자유롭게 서성이는, 실체를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천체의 내부로는 활기가, 그 바깥쪽으로는 빛이 있다.
떠돌아 다니는 티끌 만한 존재, 이리 저리 분산된 씨앗, 새로이 잉태되는 풍요로움의 굴곡, 결합과 투쟁의 만남, 끝없이 펼쳐지는 상상의 세계, 꿈처럼 닿을 수 없는 거리, 현기증 나는 순환,
헤아릴 수 없는 공간으로 곤두박질치는 세상, 서로 앞 다투어 어둠 속으로 뒤쫓아 들어가는 기이한 현상들, 결정적인 조직체, 회전하는 지구의 숨결, 돌아가는 수레바퀴, 이런 것들 모두가 그 어둠 속에 있다.
지식인은 예견을 하고, 무지한 자는 수긍한 채 두려움에 떤다.
이 모든 것들이 그곳에 존재하다가 빠져나간다.
이들은 정복할 수 없는 것들이며, 인간의 능력으로는 닿지 않는 곳에 있다.
결국 인간은 억압받는 존재에까지 이른다.
자신의 내부에 무언지 모를 검은 실체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그 실체로 인하여 짓밟히고 만다.
도처에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뿐이며, 어디서도 모호한 현상들뿐이다.
이 모두에 가세하여 무시무시한 문제가 대두된다.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우리는 어둠의 밑에 깔린 채 보고,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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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상의 어둠은 계속하여 그 궤도를 돌고 있다.
꽃들은 이 거대한 움직임을 자각하고 있다.
끈끈이대나물은 밤 1시에 피어나고, 원추리는 이른 아침 5시에 잎이 벌어진다.
그들의 규칙적인 활동이 기이하도록 놀랍다.
또 다른 깊이의 심연 속에서 물방울이 한 세계를 형성하고, 적충류가 번식하며, 극미(() 동물로부터 막대한 생식 능력이 퍼지고, 감지하기조차 어려운 미세한 존재가 위력을 떨친다.
그리고 거대한 세력의 이면이 그 정체를 드러낸다.
플랑크톤에 불과한 규조가 1시간 내에 13억의 규조류를 생산해 내는 것이다.
모든 불가사의한 문제들이 동시에 그 의문점들을 제기하는 현상이라니!
거기엔 타협을 모르는 완강함이 있다.
우리는 신앙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 결과 믿음은 강제로 주입된다. 그러나 믿음으로 인해 평온한 상태가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신앙은 무언지 모를 기묘한 형태의 욕구를 지니고 있다.
거기서부터 종교가 생겨난다.
윤곽이 뚜렷하지 않은 믿음처럼 가혹한 건 없다.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주의를 기울이든, 자신의 내부에서 어떤 저항이 일어나든 간에 어
둠을 직시하는 것, 그것은 보는 것이 아니라 숙고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 것인가!
어둠의 현상들로 공조된 세력 아래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그로 인한 압력을 해체시키기란 불가능하다.
어떤 동상이 이 모든 불가사의한 도달점에 부합될 수 있을까?
미숙한 형태로 동시성을 띠며 부조리하게 나타나는 수많은 현상들이 마치 더듬거리며 말을 하는 것처럼 그들 자체의 무리로 인해 모호해진다!
어둠은 침묵한다. 그러나 이 침묵은 모든 것을 말해 준다.
그 결과물이 어둠의 침묵으로부터 위엄 있게 존재를 드러낸다.
바로 신의 존재다.
신은 더 이상 축소할 수 없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인류 안에 내재한다.
교묘한 논법들과 불화, 부정, 체계, 종교, 이 모든 것들이 인류 안에 들어 있는 개념을 축소시키는 일 없이 지나쳐 간다.
완전한 어둠이 이 개념을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 그러나 흔돈의 여지는 남아 있다.
그 내재성이란 어마어마하다.
이루 설명할 수 없는 힘의 화합이 균형을 이루는 가운데 전체의 어둠을 유지시키며 그 세력을 펼쳐 나간다. 우주는 매달려 있지만, 아무 것도 떨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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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지속되는, 정상을 벗어난 궤도로의 이동은 예기치 않은 사고나 파괴 없이 행해진다.
인간은 변화하는 이 움직임에 관여하며, 그 엄청난 동요 속에 종속된다.
이것이 바로 운명이라 부르는 것이다.
운명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자연의 종말은 어디인가?
자연의 요소와 계절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으며, 우환과 빗줄기, 자연의 위력과 별 사이에는 또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한 시간은 한 번의 파동을 뜻하지는 않는가?
연쇄적인 이동의 악순환은 인간에게 대꾸할 여지 없이 냉정하게 그들의 격변을 일으킨다.
별이 박힌 하늘은 수레바퀴와 시계추, 평형추의 영상을 보여 준다.
이는 최고의 명상을 부가시킨 최고의 관조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현실 자체이면서 추상적 관념이 되기도 한다. 그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다.
무언가에 사로잡힌 느낌이다.
이 어둠이 우리에 대한 재량권을 가지고 있다. 빠져나갈 구멍도 없다.
톱니 바퀴 속에 얽혀 돌아가는 자신을 인식하며 우리는 미지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전체' 의 일부를 이룬다.
또한 우리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정체불명의 세계가 우리의 바깥에 존재하는 미지의 세계와 신비롭게 연대하고 있음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숭고하게 스며드는 죽음에 대한 예고다.
얼마나 불안한 동시에 또 얼마나 황홀한가!
무한대에 접촉한다는 것, 이 접착으로 인해 자기 자신에게 필연적인 불멸의 요소를 부여하기까지 이르는 것, 이와 같은 일들이 불가능하기만 할까?
영원한 존재의 가능성, 우주적 삶의 이 거대한 대홍수의 물결 속에서 자아의 완강한 생명력은 가라앉지 않음을 느낀다!
별들을 보고 말한다. 나의 영혼은 너희들과 마찬 가지로 불멸하다!
어둠을 보고 또 이야기한다. 내 안에는 너와 똑같은 심연의 깊이가 존재한다!
이런 엄청난 현상들이 바로 밤이다.
고독으로 인해 확장된 이 모든 심리가 질리아를 짓눌렀다.
그가 과연 이를 납득했을까? 아니다.
그렇다면 느끼고 있었을까? 그렇다.
질리아의 머리 속은 모호하여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가슴속은 텅 비고 황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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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리아가 점검을 마쳐갈 때 쯤 어떤 하얀 물체가 가까이서 지나가더니 어둠 속에 박혔다.
갈매기였다.
폭풍우 속에서 이보다 더 반가운 출현은 없다.
새들이 온다는 것은 폭 풍우가 물러간다는 의미다.
또 다른 훌륭한 신호로 천둥이 더 심해졌다.
극도의 격렬한 폭풍우가 혼란을 야기했다.
모든 선원들은 폭풍우의 마지막 시도가 맹렬하지만 짧다는 것을 안다.
과도하게 내리치는 번개는 종말을 예고하는 것이다.
비가 갑자기 그쳤다. 그리고 운집한 구름 속에서는 거친 굉음만이 난무 할 뿐이었다.
마치 땅에 널빤지가 떨어지듯이 폭풍우가 딱 멎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깨졌다. 구름의 막대한 엔진이 해체되었다.
맑은 하늘의 갈라진 틈이 어둠을 분리했다.
질리아는 어안이 벙벙했다.
대낮이었다.
폭풍우는 거의 20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폭풍우를 몰고 온 바람이 다시 그것을 몰아냈다.
확산된 어둠이 붕괴되면서 수평선을 혼잡하게 했다.
부서져 사라지는 안개는 난잡하게 소란을 피우며 몰려들었고, 구름 행렬의 한 쪽 끝에서 다른 쪽 끝에 이르기까지 후퇴의 움직임이 있었으며, 사그라져 가는 긴 소음이 들렸고, 비 몇 방울이 마지막으로 떨어졌으며, 천둥으로 가득했던 이 모든 어둠은 마치 혼잡하게 뒤얽힌 일단의 짐수레처럼 지나가 버렸다.
갑자기 하늘이 파래졌다.
질리아는 몹시 피곤함을 느꼈다. 맹금이 급습해 오듯 잠이 쏟아졌다.
자리를 제대로 잡지도 못한 채 작은 배 안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꼼짝 않고 팔 다리를 쭉 펴고서, 들보와 들보 용재들 틈에서 거의 구분이 안되게 누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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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야의 범주 내에 있는 모든 자연적인 것들은 결국 먹고 먹히는 관계에 있다.
먹이가 먹이를 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자들과 같은 학자들, 말하자면 이러한 창조적 세계에 기꺼이 뛰어들고자 하는 여러 의식 있는 학자들은 여전히 그런 관계에 대한 원인 규명을 하고 있거나, 혹은 그 해답을 찾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보네드 쥬네브는 뷔퐁에 적대적이었던 확고한 신비주의 사상가로서 마지막 관문을 통과했다고 여기는 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는 훨씬 이후에 죠프르와 생 틸레르가 퀴비에와 대립 구도상에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 경우다. 해답은 이렇다.
도처에서 발생하는 죽음이 또 다른 도처의 매장에 연루 된다.
먹어 삼키는 쪽이 매장자이다.
이 모든 생물들이 서로의 몸체 속으로 들어간다.
썩어 들어감, 그것이 곧 양식이 된다. 지구상의 끔찍한 일소이다.
육식동물인 인간도 역시 매장자에 속한다.
우리의 생명은 죽음으로부터 형성된다.
이 얼마나 흉악한 법칙인가.
우리들은 모두 무덤인 셈이다.
꺼져 가는 세상의 빛 아래서 생명의 질서에 종속한 운명이 괴물들을 생산해 낸다.
이제 따져 물을 것이다.
결과는? 그것이 전부다.
이게 바로 원인을 규명한 것인가?
문제에 대한 해답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어째서 또 다른 사물의 질서는 존재하지 않는가?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남는다.
그냥 살아가기만 하자.
그러나 죽음이 좀 더 진보적일 수 있도록 노력하자.
어둠이 덜한 세계에서 숨쉬자.
의식이 이끄는 데로 따라가자.
실제로 최상의 해답은 오로지 최선의 방법에 의해서만 찾을 수 있음을 결코 잊지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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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역시 같이 질리아를 도와주었다.
칼끝에 힘을 약간 주어 밀어냈더니 상자 뚜껑이 튕겨져 올랐다. 상자가 열렸다.
안에는 종이밖에 없었다.
네 겹으로 접힌 매우 얇은 종잇장 뭉치 자그마한 것 하나가 상자 바닥에 깔려 있었다.
종이는 젖어 있었지만 조금도 변형이 일거나 하지는 않았다.
완전히 밀폐된 상자가 종이를 온전하게 보존했던 것이다.
질리아는 종이 뭉치를 다시 접었다.
이는 총 7만 5천 프랑에 해당하는, 각각 천 파운드짜리 은행 수표 세 장이었다.
질리아는 그 수표들을 다시 접어서 상자에 넣고 약간의 남은 공간을 이용하여 거기에 20기니를
합쳐 놓았다. 그리고는 최대한 완벽하게 상자를 다시 닫았다.
그는 전대를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가죽의 겉은 니스 칠을 한 적이 있고, 안쪽은 가공하지 않은 상태 그대로였다.
다갈색의 밑바닥 위로 몇 개의 문자가 두꺼운 검정색 잉크로 쓰여 있었다.
질리아는 이 문자들을 해독하여 읽었다.
시외르 클뤼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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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체가 집어삼켜진다면 그는 이제 옴므 바위의 조난자처럼 굶주림과 추위로 죽어가는 일만 남았다.
기나긴 두 달 동안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서 인간의 의식과 신의 섭리가 대치하고 있었다.
한편은 망망대해와, 파도와, 바람과, 번개와, 태풍과, 회오리였고 다른 한편은 인간이었다.
또 한편은 바다였고 다른 한 편은 영혼이었으며, 한편이 무한대였다면 다른 한편은 티끌만한 존재였다. 그리고 전투가 있었다.
아마도 여기서 자연과 인간의 경이로운 대치 상태는 무산되는 것 같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영웅적 행위도 무력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해서 '전체' 에 대항하는 ‘전무’의 투쟁, 자연에 맞선 인간의 이 엄청난 노력의 쟁투가 비극의 결말을 보여 주는 일리아드처럼 결국 절망으로 끝을 맺어가고 있었다.
당혹감에 이성을 잃은 질리아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옷가지 하나 남은 것없이 광대함 앞에서 그는 헐벗고 있었다.
이제 이 거대한 미지의 세계에 짓눌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채 그는 어둠과 대면하여 철저한 암흑 속에 갇혀 버렸다.
소란스럽게 일렁이는 물결, 거칠게 굽이치는 파도, 바다 거품, 돌풍 속에 있었으며, 밀운과 바람, 방대하게 분산된 힘, 날개 돋친 듯 신비롭게 떠 있는 창공과 별들, 죽음 아래 있었고, 또 어마어마한 그 무엇들과 뒤섞인 채 그것들이 행사하는 의지 아래 있었다.
그러니까 대양이 그의 둘레를 감싸고 그 아래로 퍼져 있었으며 위로는 반짝이는 것들이 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속에 그는 털썩 주저앉았다. 자포자기하였다.
바위 위로 길게 드러누워 별들을 정면으로 마주 대하고 그 끔찍한 심연의 깊이 앞에서 그는 두 손 모아 무한의 공간을 향해 외쳤다.
“신이여" 광대함 앞에 쓰러진 채 그는 긴장했다.
바다 한 가운데의 암벽 위 어둠 속에서 흡사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같이혼자 그렇게 지쳐 쓰러져 있었다.
원형 경기장의 검투사처럼 옷도 걸치지 않은 채였다.
단지 원형 경기장 대신에 심연의 깊은 구렁 속이라는 점이 달랐으며,
맹수들 대신에 어둠이 위협을 하고,
관중의 시선 대신에 미지의 공간으로부터 주시를 받는다는 점이 달랐으며,
순결한 처녀 대신에 별들이 존재하고,
로마 황제 대신에 신이 지배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추위와 피로와 무력감, 간절한 기도와 어둠 속에서 온 몸이 서서히 해체되고 두 눈이 감기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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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리아가 마침내 눈을 떴다.
만족한 새들은 황급히 날아가 버렸다.
질리아는 똑바로 일어서더니 잠에서 깨어난 사자처럼 기지개를 쭉 폈다.
그리고는 곧바로 바위산 가장자리로 달려가 그 밑으로 두브르 암초 사이의 협곡을 내려다보았다. 팡스가 거기에 원상태 그대로 있었다. 천 뭉치 마개가 버텨주었던 것이다.
아마도 바다가 그것을 혹독하게 다루진 않았었던가 보다.
모든 게 보전되었다.
질리아는 이제 더 이상 피곤하지 않았다.
기력이 회복되었다. 죽은 듯 한 실신은 단순히 잠이었던 것이다.
그는 물 한 방울 남김없이 말끔히 팡스의 선창을 비워 파손 부위가 수면 밖으로 드러나도록 했으며, 옷을 다시 입고,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면서 만족해했다.
날이 밝고 보니 틈새 구멍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작업을 필요로 했다.
꽤 심각한 파손이었다. 그것을 수리하는 데만도 하루 온종일이 걸렸다.
다음 날 새벽, 장벽을 헤쳐 협곡을 빠져나가는 길을 다시 연 후 그는 틈새 구멍을 잘 막아내 주었던 넝마 조각들을 주워 입었다.
그런 다음 7만 5천 프랑이 든 클뤼뱅의 전대를 두르고 수리를 마친 팡스 안에, 그 중에서도 무사히 보전된 엔진 옆에 서서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놀랍도록 잔잔한 바다와 함께 두브르의 암초로부터 벗어났다.
그는 게른제 섬을 향하여 뱃머리를 돌렸다.
암초로부터 멀어지는 순간 누군가 거기 있었다면 그가 낮은 목소리로 보니 던디의 곡조를 읊조리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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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저는 매주 일요일과 목요일에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그렇게 자주 교회에 나오지 않았던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제 와 이런 얘길 꺼내서 미안합니다만 사람들이 그 점을 주시한 모양이더군요.
저는 당신에게 한번도 말을 걸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게 제 의무였으니까요. 오늘 제가 당신에게 이야기하는 것 또한 저의 의무입니다.
그보다 우선 당신에게 알려드려야만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캐시미어가 내일 출발합니다. 제가 온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죠.
당신은 매일 저녁마다 정원에서 산책을 하더군요.
당신의 습관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옳지 못한 일일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제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위해서였습니다.
아가씨, 당신은 지금 곤란한 처지에 있습니다.
전 오늘 아침부터 부자가 되었죠.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데뤼셰트는 마치 애원하듯 두 손을 모으고 온몸을 떨며 시선은 한 곳에 고정시킨 채 그녀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사랑합니다. 신은 침묵하라고 인간의 심장을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신이 영원을 약속한 데에는 남녀 두 사람이 서로 일체가 되기를 바라는 의미가 담겨 있죠.
지상에서 저에게 있어 여인은 당신뿐입니다.
기도를 하듯 당신을 생각합니다.
저의 신앙은 신에게 속해 있고 저의 희망은 당신의 것입니다.
제가 가진 날개를 펼치도록 해 줄 사람은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은 제 삶의 전부이고 이미 저의 하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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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뤼셰트는 몸을 떨고 있었다.
목소리가 계속되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엇을요?
“대답 말입니다."
"신께서 이미 들으셨을 거예요." 데뤼세트가 말했다.
그러자 거의 울려 퍼질 정도의, 그리고 동시에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가장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말들이 덤불숲에서, 그러니까 마치 불타오르는 듯한 그 수풀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이제 당신은 나의 약혼자입니다. 이쪽으로 와요.
저 푸르른 하늘 속에서 별들이 당신의 영혼 안에 나의 영혼을 받아들이는 의식을 주관하고 있소. 우리의 첫 입맞춤이 창공으로 승화되어 올라갈 것이오!”
데뤼셰트가 몸을 일으키더니 앞을 향해, 틀림없이 마주 대하고 있을 또 다른 시선 위에 그녀의 눈길을 고정시키고는 꼼짝 않은 채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나서 고개를 꿋끗이 들고 느린 걸음으로 양팔은 늘어뜨린 채, 마치 낯선 버팀대 위를 걸을 때처럼 손가락을 벌리고서 덤불숲을 향하여 나아가더니 이내 그녀는 사라져 버렸다.
잠시 후 모래 땅 위에는 하나의 그림자 대신에 하나로 얽힌 두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질리아는 무릎을 꿇고 이들 두 그림자의 포옹을 지켜보고 있었다.
시간은 모래시계처럼 우리에게서 빠져나가고, 특히 어떤 최고의 절정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이런 시간의 흐름에 대한 감각조차도 느끼지 못한다.
한편에서는 서로 쌍을 이룬 두 사람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자의 존재를 의식하지도 못하고, 알아볼 수도 없었던 반면에 또 다른 한 편에서 한 사람은, 그들이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한 쌍이 거기 존재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얼마 동안이나 그렇게 신비로 가득한 분위기 속에 서로 몸을 의지한 채 머물러 있었을까? 이를 말로 표현하기 란 어려울 것이다. 갑자기 멀리로부터 어떤 외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여기 좀 보세요!”
그리고서 항구의 종소리가 울렸다.
천상의 행복감에 도취 된 두 사람은 아마도 이런 소동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종소리가 계속 울려 퍼졌다.
누군가가 담 모퉁이에서 질리아를 찾고 있었지만 이미 그는 그 자리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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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만을 명상하던 그가 사제에게는 해로운, 운명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앙은 그 속에서 무너지고 만다. 미지의 것에 대한 복종만큼 혼란스러운 것은 없다.
인간은 사실로 드러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긴다.
삶은 계속 밀려들고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뿐이다.
급작스런 우연이 어디에서 기다릴지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한다.
불행도 기쁨도 뜻밖의 인물과 마찬가지로 밀려들어왔다가 나가버린다.
그것들은 인간과 상관없는 그것들만의 법칙과 궤도와 인력을 가지고 있다.
덕이 행복을 가져오는 것도, 죄악이 불행을 가져오는 것도 아니다.
의식이 논리를 가지고 있다면 운명은 또 다른 논리를 가지고 있다.
아무것도 들어맞지 않는, 그래서 아무것도 예견할 수 없는 논리이다.
우리는 온통 뒤범벅된 삶을 살아간다.
의식이 곧은 길이라면 인생은 소용돌이다.
소용돌이는 느닷없이 우리 앞에 시커먼 카오스도 파란 하늘도 던져준다.
운명은 변이의 기술을 갖지 않는다.
단지 너무 빨리 돌아서 사건과 사건 사이의 간격이나 어제와 오늘의 연관을 전혀 알아볼 수 없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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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임사제가 말했다.
“반지는?"
돌발사태였다. 에브느제르에게는 반지가 없었다.
질리아는 얼른 새끼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서 주임사제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바로 그날 아침에 산 결혼반지임에 틀림없었다.
주임사제는 반지를 성서 위에 놓고 다시 에브느제르에게 건네주었다.
에브느제르는 떨고 있는 데뤼셰트의 자그마한 왼손을 잡고 넷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나는 이 반지를 징표로 삼아 당신과 혼인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주임사제가 말했다.
"아멘." 전도사가 말했다.
주임사제가 말했다.
'당신들은 이제 부부가 되었습니다."
"아멘” 전도사가 말했다.
주임사제가 말했다.
“기도합시다."
에브느제르와 데뤼셰트는 성단 앞에 무릎 끓었다.
질리아는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에브스제르와 데뤼셰트는 하느님 앞에 무릎 끓고 질리아는 운명 앞에 고개를 숙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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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여러 일들은 때때로 우박처럼 쏟아져 우리를 구멍 투성이로 만들고 커머거리로 만든다. 조용하고 평범한 존재들에게 거칠게 떨어지는 일들은 그것으로 고통 받거나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금세 변해버린다.
결국 우리는 사건의 일부가 되지 못한다.
간파하지 못한 채 짓밟히기도 하고 이해하지 못한 채 보상을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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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갑자기 떠나게 되어 옷가지가 필요하리라 생각했어요.
캐시미어호에 가방을 가져다 놓았지요. 제 어머니께서 결혼할 여자에게 남겨주신 물건을 넣은 것이랍니다. 받아 주시겠지요.?”
데뤼셰트는 꿈에서 반쯤 깨어난 듯 질리아에게 몸을 돌렸다. 그는 나직 이 말했다.
"당신에게 과거를 생각하게 하고 싶지 않지만, 이제 설명해야 할 것 같군요.
그 불행했던 날 밤, 당신은 거실에 앉아 어떤 말을 했었지요.
당신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거야 당연하죠.
누구나 자신이 했던 말을 다 기억할 수는 없으니까요.
메스 르티에리는 무척 슬퍼하셨어요. 그 배는 정말 훌륭했고 쓸모가 많았거든요.
바다에서 불행이 닥쳐와 섬 전체를 발각 뒤집어 놓았지만 사람들은 금세 다 잊었어요.
바다에서 좌초되는 배가 뒤랑드 만은 아니고, 또 매일 그 생각만 할 수도 없으니까요.
아무도 거기에 가지 않을 거라 했지만 나는 갔어요.
불가능할거라 했지만 불가능한 건 그게 아니었죠.
내 얘길 들어 줘서 고마워요. 부인, 당신을 괴롭히기 위해 거기 간 것이 아니었다는거 아시겠지요? 게다가 너무 오래된 일이지요.
어서 떠나셔야 하겠지만, 하긴 시간이 있어 더 이야기를 하고 기억을 해내면 뭐하겠어요.
이 이야기는 눈이 내렸던 날로 거슬러 올라가죠.
언젠가 한 번 당신이 나를 향해 미소 지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랬어요. 어제는, 엄청난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이라 집에 갈 시간이 없었어요.
상처투성이었죠. 당신을 두렵게 하고 아프게 하다니 내 잘못이 커요.
그런 꼴로 남의 집에 가는 게 아니었는데, 용서하세요.
이제 다 됐어요. 가세요. 날씨도 좋군요. 동풍이 불어요.
잘 가요. 당신에게 말하길 잘했어요. 마지막이니까."
“그가방", 데뤼세트가 대답했다. "왜 결혼할 때까지 갖고 있지 않지요?”
당신의 신부를 위해서 말이에요."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질리아가 말했다.
"안됐군요. 당신은 좋은 분인데. 고마워요."
데뤼셰트는 미소지었다. 질리아도 웃음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데뤼셰트가 배에 오르도록 도왔다.
15분쯤 후 에브느제르와 데뤼셰트가 탄 배는 정박 중인 캐시미어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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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리아는 갑판 위 햇빛이 가득한 한 구석을 보고 있었다.
햇살 아래 나란히 앉아 있는 에브느제르와 데뤼세트였다.
정오의 태양에 몸을 녹이는 두 마리의 새처럼, 몸을 바짝 붙이고 우아하게 의자에 앉아있었다.
잘 정돈된 배에서 볼 수 있는 여성전용의, 아담한 천장으로 덮인 의자였다.
데뤼셰트는 에브느제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에브느제르는 데뤼셰트의 허리를 팔로 감싸고 손을 맞잡고 있었다.
순수함으로 만들어진 두 우아한 모습 위에서 두 천사의 미묘한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한 쪽은 처녀의 것이었으며 또 한 쪽은 별의 것이었다.
그들의 순수한 포옹은 의미심장했다. 그것은 결혼의 친밀성과 수줍음을 의미했다.
그 의자는 이미 은밀한 침실이었으며 거의 둥지와 같았다.
동시에 그것은 고난을 피한 사랑의 영광이었다.
모든 것이 고요했다.
에브느제르의 눈은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생각에 잠겨있었으며 데뤼셰트의 입술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육지에서 바람이 불어오더니 캐시미어가 셰즈 질돌르뮈르의 불과 몇 미터 앞에서 빨리 미끄러져 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질리아는 부드럽고 우아한 데뤼셰트의 목소리를 들 었다.
"봐요. 바위에 누군가가 있어요." 그 목소리는 멀어졌다.
캐시미어는 뷔드라뤼의 갑을 뒤로하고 깊은 물결의 주름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십오 분쯤 지났을 때 돛대와 돛들은 수평선에서 점점 작아지는 하얀 오벨리스크에 불과했다.
물이 질리아의 무릎까지 차올랐다.
그는 배가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먼 바다에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바람을 타기 위해 캐시미어가 아래 쪽 보조 돛과 앞쪽의 삼각돛을 올리는 것이 보였다.
캐시미어는 벌써 게른제의 바다를 벗어나 있었다. 질리아는 눈으로 배를 계속 좇았다.
물이 그의 허리까지 차올랐다.
조수가 밀려들고 시간이 흘러갔다.
갈매기와 가마우지들이 불안하게 그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에게 경고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분명히 이 새의 무리 중에는 두브르에서 그를 본 갈매기도 있었을 것이다.
한 시간이 지났다.
난바다의 바람을 정박지에서는 느낄 수 없었지만 캐시미어가 급격히 작아지고 있었다.
샬루프선은 필시 전속력으로 질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벌써 거의 레 카스케에 이르렀다.
질돌르뮈르의 바위 주위에는 파도도물거품도 일지 않았다. 물은 평온하게 불어나고 있었다.
이제 질리아의 어깨쯤에 닿았다.
또한 시간이 흘렀다.
캐시미어는 오리니의 바다 저편에 있었다.
오르티슈의 암벽에 잠시 가려져 마치 일월식처럼 암벽의 엄폐 속으로 사라졌다가는 다시 나타났다. 샬루프선은 북쪽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먼 바다에 이르렀다.
캐시미어는 햇빛에 반짝이는 점에 불과했다.
새들이 질리아에게 날카로운 소리로 외쳐댔다.
그의 머리 밖에 보이지 않았다.
바다는 음산하고 부드럽게 높아만 갔다.
질리아는 움직이지도 않고 사라져 가는 캐시미어를 보고 있었다.
거의 만조에 가까웠다. 저녁이 되고 있었다.
질리아 뒤쪽의 정박지로 고기잡이배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질리아의 시선은 저 멀리 샬루프선 위에 박혀 있었다.
그의 눈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이 비극적이고 고요한 눈동자 속에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그 시선에는 꿈을 꿈으로 내버려두는 평정이 있었다.
그것은 또 다른 성취라는 비통한 받아들임이었다.
그 시선은 멀어져 가는 별을 좇고 있었다.
간간이 하늘의 어두움이 이 눈에 드리워지고, 눈에서 보이는 그 어두움의 빛은 공간의 한 점에 고정되어 머물고 있었다.
동시에 질돌르뮈르 바위를 둘러싼 끝없는 바다, 거대하고 고요한 그림자는 질리아의 깊은 눈 안으로 차오르고 있었다.
이제 보이지 않게 된 캐시미어는 안개와 뒤섞인 흔적에 불과했다.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은 오로지 배를 계속 따라갔던 질리아의 것뿐이었다.
조금씩 조금씩 이 흔적은 더 이상 형태를 갖지 않고 희미해져 갔다.
그리고 작아졌다.
그리고 사라졌다.
배가 수평선에서 지워진 순간 머리도 물 속으로 사라졌다.
바다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