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산교를 건너면서
한명란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사방은 어두웠다. 우산을 위로 올려 들자 ‘독산교’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가는 목적지는 다리 건너편에 있었다. 금천구청역에서 내릴 때만도 하루 동안의 고생한 보람이 있고 감사한 마음이었다. 우산을 쓰고 있어 네이버 지도 안내받기도 어려웠다. 지하철 안에서 검색했던 위치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아파트촌이 보이는 방향의 횡단보도를 건넜다. 걸어서 17분이었으므로 아파트가 밀집된 방향으로 가면 되겠지 싶었다. 비가 와서 그런지 지하철역 근처인데도 거리에는 사람이 없었다. 다행히 버스정류장 쪽에 한 학생이 서 있었다. 학생에게 OO 아파트 가는 길을 묻자 다리를 건너가야 한다고 했다. 다리를? 어디에서 다리를 건넌다는 것인지? 어둡기도 했지만,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건널만한 위치가 전혀 아닌듯한 내 표정을 읽었는지 학생은 지하철역에서 내려오면 빵집이 있고 그 옆 계단을 올라가면 다리가 있다고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건너온 횡단 보도를 다시 건너가 지하철역 옆 불 꺼진 빵집 옆으로 가보니 숨어있는 것 같은 계단이 있었다. 이층집의 옥상으로 올라가는 정도의 폭이 좁은 계단이었다. 컴컴하고 사람도 없고 뭔가 오싹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계단을 올라가야 다리가 있다고 하니 마음을 단단히 먹고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은 꽤 높아서 한참을 올라갔다. 돌에 새겨진 큰 글씨 ‘독산교’가 눈에 들어오면서 하마터면 주저앉을뻔했다. 어둠 속 허공 중에 나 홀로 서 있는 것 같고 무섬증이 온몸에 스며들면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독산교는 아주 긴 긴 다리였다. 비는 내리고 가로등은 희미해서 사위가 두렵게 어두웠다. 돌아갈까? 그런데 돌아설 수가 없었다. 뒤돌아서면 나를 잡아갈 귀신이 있을 것만 같았다. 나쁜 사람과 맞닥칠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죽을 수도 있겠구나! 망상까지 하며 가까스로 핸드폰을 열어 사진을 찍었다. 남겨야 할 것 같았다. 위치추적이야 가능하겠지만 아무도 내가 그 장소에 있었는지? 휴대전화만 거기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우산을 꽉 움켜쥐고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제발 가는 동안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기를. 사람조차도. 태어나 지금까지 건너본 다리 중에 가장 길었다. 다리를 건너니 다시 또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그렇지, 다리를 건너기 위해 계단을 올라왔으니 그 높이만큼 높았을 것이다. 온몸에 땀이 비 오듯 했다. 4차선 도로였지만 차는 한두 대가 지나갔고 무섬증만 더해지는 어두운 공간일 뿐이었다. 건너편으로 가야 하는데 횡단보도는 없고 요즘 보기 드문 육교가 있었다. 역시 다리에서 내려왔던 만큼 높은 계단이었다. 있는 힘을 다해 뛰어 올라갔다. 육교 위에 서니 반대편 쪽에 사람이 한 명 보였다. 반가움보다는 무서웠다. 그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길 바라면서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걸었다. 그런데 그는 검은 물체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획 돌아서 내게로 달려들 것만 같았다. 최대한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걷고 있는데 그 사람이 움직였다. 다리를 절고 있었다. 검은 물체는 엘리베이터 건물이었다. 문이 열리고 그가 절뚝절뚝 다리를 절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우산으로 앞을 가리고 천천히 걷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고 후다닥 계단으로 들어섰다. 난간을 붙잡고 최대한 빠르게 내려갔다. 집들이 있고 저 멀리 아파트가 보였다. 그 흔한 편의점 하나가 없는 동네였다. 그래도 길이 좀 넓어서 마음이 놓였다. 무슨 일이 있으면 아무 집이나 무조건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뛰었다. 드디어 목적지인 OO 아파트였다. 경비실 불빛이 너무 반가웠다. 내가 가고자 하는 단지 내 도서관이 어디쯤 있는지 물었더니 직진하면 정문이 나오고 그 옆 3층 건물이라고 했다. 훤하게 불이 켜진 3층 건물을 올려다보며 안도감이 들었다. 도서관장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10시 47분 도착 예정이었는데 11시가 되었다. 고작 30분이었는데 아주 긴 시간 걸어온 것 같았다. 통화 녹음하고 대신 서명하셔도 되는데…. 어린이날 행사로 일이 많아 한참 더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함께 심사했던 다른 한 분도 광명시에 사시는데 그분은 서명을 받았는지 물었다. 너무 늦어서 포기해야 할 것 같다고 했더니 아마 그분도 늦게까지 일하고 있을 것이라며 여기까지 언제 다시 또 오느냐며 전화를 해보라고 했다. 고맙게도 일하는 중이고 늦어도 괜찮다고 했다. 아파트 정문으로 나가면 바로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고 5분 후면 막차가 올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다시 또 뛰었다. 시간이 예상보다 많이 걸렸고 지하철도 끊길 것 같다고 데리러 와달라고 마지막 횡선지 주소를 찍어주었다. 어찌 되었든 나는 목표한 9명으로부터 서명을 모두 받아냈다. 남편의 차를 탔을 때는 자정이 넘었다.
올 3월 중순부터 기간제로 회계 관련 일을 하고 있다. 매월 초에 담당 세무사 직원이 사무실에 와서 전월 지출결의서(돈을 지급하기 위해 결재받은 문서) 중 면접 심사비, 교육 강사비 등 세금이 발생한 건에 대해 당사자가 직접 서명한 지급 명세서상 세목, 세율 등이 맞게 적용되었는지 확인을 한다. 그런데 세무사 직원이 4월 1일부터 4일까지 기간동안 지출결의서가 없다고 했다. 4월분을 일자별로 정리해서 주었는데 없다고 하니 난감했다. 책상 서랍, 주변 서류함 등을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찾지를 못했다. 30여 건이니 꽤 부피가 있어 폐지에 휩쓸려 버려질 수도 없고, 분쇄기에 넣어 파쇄했을 리도 없었다. 동료 직원도 발이 달린 것도 아닌데 어딘가에 분명 있을 것이라며 걱정하지 말고 연휴 잘 보내라 했다. 하지만 나는 3일 연휴가 시작되는 금요일에 매우 불편한 마음으로 퇴근했었다.
모처럼 맞는 연휴 동안 결혼식, 여행(친척 접 방문) 등 일정이 집혀있었지만 사라진(?) 서류 때문에 조금도 즐겁지가 않았다. 토요일인 다음날 결혼식이 끝나자 마자 식장에서 서둘러 나와 사무실로 갔다. 아무도 없으니 편하게 여기저기 구석구석 다 찾아보았다. 어딘가에서 분명 서류 뭉텅이가 나를 반길 것으로 확신했다. 그러나 어디에도 찾는 서류는 없었다. 걱정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시스템에 스캔으로 첨부해둔 친필서명이 있는 증빙을 모두 출력했다. ‘담당자의 부주의로 훼손되어 다시 서명을 받아 첨부함. 한명란’이라고 표기해두는 방법을 선택했다. 서류가 없는 그 기간에 지급된 심사위원, 강사 등은 모두 17명이었다. 연휴 마지막 날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차에서 내렸다. 오후 1시쯤이었다. 주소로 구분하여 그날은 영등포구, 관악구, 금천구, 경기도 수원, 과천, 광명 등에 거주하는 9명의 서명을 받아낸 것이다. 남은 8명은 다음날인 화요일 퇴근 후에 받을 계획이었다.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위험을 무릅쓰고 자정까지 그 일을 해야 했었을까? 다른 사람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비 오고 바람불고 캄캄한 어둠 속에 버티고 있던 독산교 다리 위에서, 무섬증으로 떨면서, 그 짧은 시간에 생각했었다. 여기서 죽게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렇게 해야만 한다고. 가방 안에 들어있는 친필서명 서류가 내가 어떤 사람임을 말해 줄 것이라고 믿으면서. 다음날 출근했고 몸살과 입술에 커다란 물집이 훈장으로 주어졌다.
서류는 서류가 누락 되었다고 말한 세무사 직원 책상 위에 있었다. “거봐요. 어디가 있을 것이라 했지요!.” “그러네요.” 독산교를 건널 때처럼 다리가 휘청거렸다. 며칠 동안 지독한 독감으로 끙끙 앓았다.
첫댓글 아고, 고생하셨습니다. 낯선 동네에서 이런 상황에 처하면 그 두려움이 우리를 집어 삼킵니다. 저도 이런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이후에는 밤 운전하는 것이 두렵기까지 합니다. 들국화님의 철저한 책임감이 잘 나타난 글입니다. "여기서 죽게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렇게 해야만 한다." 순직하실뻔 하셨습니다.
너무 무리하신 일입니다.
죽자고 덤비면 안될 일은 없지만, 그래도 두려움과 무섬증을 동반한 책임 완결은 곤란합니다.
혹 사고라도 났다면 가족들은 어쩝니까?
선생님!
건강 챙기시고 좀 여유있게 지내시면 좋을 듯 합니다.
요즘의 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ㅜㅜ
글 읽어내려 가다가 가슴이 정말 두근두근 했습니다.
그렇게 마무리 되어서 무척 감사한 일입니다.
새로 시작한 직장일이군요 독산교. 읽는내내 조바조바 했는데 저녁에는 위험합니다 더구나 낯선길입니다 마치 내동생 고생을 본듯합니다 느긋하게 마음먹고 길 걸어라고 일러주고싶네요 긴 글
잘 쓰셨습니다.
독산교가 어디일까 생각하머 마치 추리소설 보는 느낌으로 아슬아슬했습니다. 책임감 무겁게 어렵게 일을 처리해 나가는데 결국에 찾게 되니 헛심도 빠지고 그 끝에 독감에 걸렸다니 안쓰럽습니다. 읽는 내내 조바심 나게 순간순간을 잘 내려썼습니다. 얼마나 놀라고 두려웠을까요 그 책임감이 들국화가 지금까지 그자리에 있게 한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글을 읽는 처음부터 조바심이 나더니 끝내 힘들게 했군요.
한 사람의 부주의가 엉뚱한 사람을 피말리게 했으니 참 가관입니다. 그 세무사가 밉고 원망스럽기까지 했네요.
서류를 그렇게나마 찾았으니 망정이지 많은 부분 어려움이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참! 기가 막힙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 책임감이 사람 잡겠습니다. 얼마나 힘드셨을까? 다시는 그런 일이 없으시기를 바라며...
들국화님! 화이팅!!!!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